[한국사능력검정시험 고급] 제41회 기출문제 해설 페이지
(가) 시대의 생활 모습으로 옳은 것은? [1점]
주로 동굴이나 강가의 막집에서 살았다.
계급이 없는 평등한 공동체 생활을 하였다.
오수전, 화천 등의 중국 화폐를 사용하였다.
많은 인력을 동원하여 고인돌을 축조하였다.
실을 뽑기 위해 가락바퀴를 처음 사용하였다.
안내판의 설명은 여주 흔암리 선사 유적으로, 한강 유역의 대표적 유적이며 200여 기의 집자리에서 민무늬 토기와 반달 돌칼이 출토되었고 토기 안에서 탄화된 쌀·겉보리·조·수수가 발견되어 벼농사가 이루어졌음을 보여 준다고 되어 있다.
민무늬 토기와 반달 돌칼, 그리고 탄화미는 모두 청동기 시대의 지표 유물이다. 반달 돌칼은 이삭을 따는 수확 도구로, 벼농사의 확대를 뒷받침한다.
청동기 시대에는 농업 생산력이 늘면서 잉여 생산물이 생기고 사유 재산과 계급이 발생하였다. 그 결과 지배층의 무덤인 고인돌이 만들어졌는데, 수십 톤에 이르는 덮개돌을 옮기려면 많은 인력을 동원할 수 있는 권력이 필요했으므로 고인돌은 계급 사회의 성립을 보여 주는 증거가 된다.
동굴이나 강가의 막집 생활과 평등한 공동체 생활은 구석기 시대, 가락바퀴를 처음 사용한 것은 신석기 시대의 모습이다. 오수전·화천 등 중국 화폐의 사용은 철기 시대에 해당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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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 인물에 대한 설명으로 옳은 것을 <보기>에서 고른 것은? [3점]
ㄱ, ㄴ
ㄱ, ㄷ
ㄴ, ㄷ
ㄴ, ㄹ
ㄷ, ㄹ
자료는 『사기』 조선열전의 기록으로, 연왕 노관이 한을 배반하고 흉노로 들어가자 (가)도 망명하여 무리 천여 명을 모아 상투를 틀고 오랑캐 복장을 한 채 동쪽으로 도망하여 패수를 건너 진의 옛 땅인 상하장에 살았다고 하였다. 이 인물은 위만이다.
위만은 고조선의 준왕에게 의탁하여 서쪽 변경 수비를 맡았다가 세력을 키운 뒤 준왕을 몰아내고 스스로 왕이 되었다(기원전 194년경). 이후 위만 조선은 철기 문화를 본격적으로 받아들이며 진번과 임둔을 복속시켜 세력을 넓혔고, 중국과 남쪽 여러 나라 사이에서 중계 무역으로 이익을 얻었다.
<보기>에서 한 무제가 파견한 군대에 맞서 싸운 것은 위만의 손자인 우거왕 때의 일이며(기원전 109~108년), 연의 장수 진개의 공격을 받아 서쪽 땅을 빼앗긴 것은 기원전 3세기 초 위만 이전 고조선의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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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 (나) 나라에 대한 설명으로 옳은 것은? [1점]
(가) - 대가들이 사자, 조의 등을 거느렸다.
(가) - 읍락 간 경계를 중시하는 책화가 있었다.
(나) - 도둑질한 자에게 12배를 변상하게 하였다.
(나) - 철이 많이 생산되어 낙랑과 왜에 수출하였다.
(가), (나) - 제사장인 천군과 신성 지역인 소도가 존재하였다.
(가)는 『삼국지』 동이전에서 혼인을 말로 미리 정한 뒤 여자 집 본채 뒤에 작은 집을 지어 서옥(婿屋)이라 불렀다고 한 나라이니, 데릴사위제인 서옥제 풍습을 가진 고구려이다.
(나)는 길이 10여 장의 큰 나무 곽을 만들어 한쪽에 문을 내고, 사람이 죽으면 가매장했다가 뼈만 추려 곽에 안치하며 온 집 식구를 하나의 곽에 넣고 죽은 사람 수대로 나무를 깎아 생전 모습처럼 만들었다고 하였다. 이는 옥저의 가족 공동 무덤(골장제) 풍습이다.
고구려는 왕 아래 상가·고추가 등의 대가들이 있어 이들이 각각 사자·조의·선인 등의 관리를 거느렸고, 제가 회의에서 국가의 중대사를 결정하였다.
책화는 동예, 도둑질한 자에게 12배를 물리는 1책 12법은 부여와 고구려, 철을 낙랑과 왜에 수출한 것은 변한(가야), 천군과 소도는 삼한의 풍습이므로 (가)·(나)에 대한 설명으로는 맞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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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 나라의 문화유산으로 옳은 것은? [2점]
『삼국사기』 자료에 고령군은 본래 (가)로서 시조 이진아시왕부터 16대 520년간 이어졌고 진흥왕이 공격하여 멸망시킨 뒤 그 땅을 군으로 삼았다고 하였다. 고령을 중심으로 한 이 나라는 후기 가야 연맹을 이끈 대가야이며, 562년 신라 진흥왕에게 병합되었다.
따라서 답으로 골라야 할 것은 고령 지산동 고분군에서 출토된 가야의 금동관이다. 넓은 관테 위에 풀잎·보주 모양의 세움 장식이 솟아 있는 형태로, 신라 금관의 나뭇가지(출자형)·사슴뿔 모양 장식과 뚜렷이 구별되는 대가야 관의 특징을 보여 준다.
나머지 보기에 제시된 아치형 감실이 있는 석조물, 무덤 벽화 조각, 커다란 광배를 갖춘 금동 여래 입상, 웅크린 자세의 돌사자상은 모두 고령 일대의 대가야 유적에서 나온 것이 아니므로 답이 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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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 (나) 사이의 시기에 있었던 사실로 옳은 것은? [3점]
미천왕이 낙랑군을 몰아내었다.
당이 평양에 안동도호부를 설치하였다.
이문진이 유기를 간추린 신집을 편찬하였다.
고구려가 후연을 공격하고 요동 땅을 차지하였다.
관구검이 이끄는 위의 군대가 고구려를 침략하였다.
(가)는 백제 왕이 병력 3만을 이끌고 평양성을 공격하여 고구려 왕이 화살에 맞아 서거하고 고국(故國)의 들에 장사지냈다는 기록이니, 371년 백제 근초고왕의 공격으로 고국원왕이 전사한 사건이다.
(나)는 고구려 왕 거련(장수왕)이 백제를 공격하자 백제 왕 경(개로왕)이 아들 문주를 신라에 보내 구원을 요청했으나 도착 전에 도성이 함락되고 왕도 피살되었다는 기록으로, 475년 한성 함락이다.
즉 371년과 475년 사이의 사실을 골라야 한다. 광개토 대왕은 즉위 후 북으로 진출하여 후연을 공격하고 요동 지역을 차지하였는데(400년대 초), 이는 두 사건 사이에 해당한다.
미천왕의 낙랑군 축출은 313년, 관구검이 이끄는 위 군대의 침입은 246년으로 (가) 이전이고, 이문진이 『유기』를 간추려 『신집』을 편찬한 것은 600년, 당이 평양에 안동도호부를 둔 것은 668년으로 (나) 이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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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마)에 대한 설명으로 옳은 것은? [2점]
(가) - 재상을 선출하던 천정대가 있다.
(나) - 백제 금동 대향로가 발굴되었다.
(다) - 백제의 대표적인 5층 석탑이 남아 있다.
(라) - 귀족들의 놀이 도구인 나무 주사위가 출토되었다.
(마) - 무령왕 부부의 무덤이 발견되었다.
답사 계획서의 주제는 '부여에서 만나는 백제의 발자취'이고, 지도에는 (가) 부소산성, (나) 관북리 유적, (다) 정림사지, (라) 궁남지, (마) 능산리 고분군이 차례로 표시되어 있다. 모두 백제의 사비 도읍기 유적이다.
이 가운데 정림사지에는 백제 석탑을 대표하는 부여 정림사지 5층 석탑이 남아 있다. 목탑의 구조를 돌로 옮긴 듯한 안정된 비례가 특징이며, 1층 탑신에 당의 소정방이 백제를 평정한 사실을 새겨 놓아 한때 '평제탑'으로 잘못 불리기도 했다.
나머지는 장소가 어긋난다. 재상을 뽑던 천정대는 부소산성이 아니라 백마강 건너 호암리 일대에 있고, 백제 금동 대향로는 관북리가 아니라 능산리 절터에서 출토되었다.
또 귀족의 놀이 도구인 나무 주사위(주령구)는 궁남지가 아니라 경주 동궁과 월지(안압지)에서 나온 신라 유물이며, 무령왕 부부의 무덤은 능산리가 아니라 공주 송산리 고분군에서 발견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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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인물에 대한 설명으로 옳은 것은? [1점]
매소성 전투를 승리로 이끌었다.
관산성 전투에서 성왕을 전사시켰다.
당으로 건너가 군사 동맹을 체결하였다.
황산벌에서 계백이 이끄는 군대를 물리쳤다.
임존성에서 소정방이 지휘하는 당군을 격퇴하였다.
인물 카드에는 생몰 595~673년, 가계는 수로왕의 12대손, 생애로 화랑이 되어 용화 향도를 이끎, 비담과 염종의 반란 진압, 무열왕의 딸 지소와 결혼, 삼국 통일에 기여가 적혀 있다. 금관가야 왕실의 후예인 김유신이다.
김유신은 선덕 여왕 말년인 647년 비담·염종의 난을 진압하여 진덕 여왕의 즉위를 뒷받침했고, 김춘추와 손잡고 그가 무열왕으로 즉위하는 데 힘을 보탰다.
660년 나당 연합군의 백제 공격 때 그는 신라군 5만을 이끌고 황산벌에서 계백의 결사대와 맞붙어 네 번의 패배 끝에 이를 물리치고 사비성으로 진격하였다.
매소성 전투(675)는 김유신 사후의 일이고, 관산성에서 성왕을 전사시킨 것은 진흥왕 때 신라군, 당에 건너가 군사 동맹을 맺은 것은 김춘추, 임존성에서 소정방의 당군을 막아 낸 것은 백제 부흥 운동을 이끈 흑치상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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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상황이 전개된 배경으로 가장 적절한 것은? [2점]
장문휴가 등주를 공격하였다.
대흥이라는 연호를 사용하였다.
철리부 등 동북방 말갈을 복속시켰다.
별무반을 편성하고 동북 9성을 축조하였다.
연개소문이 정변을 일으켜 권력을 장악하였다.
『구당서』의 이 기록은 당 현종이 대문예를 유주로 보내 군사를 징발하게 하고, 동시에 태복원외경 김사란을 신라에 보내 군사를 일으켜 발해의 남쪽 국경을 치게 했으나, 산이 험하고 눈이 한 길이나 내려 병사들이 태반이나 죽고 전공 없이 돌아왔다는 내용이다.
이는 발해 무왕 때인 732년, 발해 장수 장문휴가 수군을 이끌고 산둥반도의 등주를 공격하여 자사를 죽인 사건에 대한 당의 보복 조치였다. 당은 신라를 끌어들여 남북에서 발해를 협공하려 했으나 폭설로 실패하였다.
대문예는 무왕의 동생으로 흑수말갈 공격에 반대하다 당으로 망명한 인물이어서, 당이 그를 앞세운 것 자체가 발해와의 대립을 보여 준다.
대흥이라는 연호를 쓴 것과 철리부 등 동북방 말갈을 복속시킨 것은 문왕·선왕 대의 일로 시기가 맞지 않고, 별무반과 동북 9성은 고려 예종 때, 연개소문의 정변은 642년 고구려의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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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 인물에 대한 설명으로 옳은 것은? [2점]
황룡사 구층 목탑의 건립을 건의하였다.
무애가를 지어 불교 대중화에 노력하였다.
보현십원가를 지어 불교 교리를 전파하였다.
인도와 중앙아시아를 다녀와서 왕오천축국전을 남겼다.
현세의 고난에서 구제받고자 하는 관음 신앙을 강조하였다.
『삼국유사』의 자료에서 (가)는 열 곳의 절에서 교를 전하게 하니 태백산 부석사와 남악 화엄사 등이 그것이며, 『법계도서인(화엄일승법계도)』을 짓고 주석을 붙여 일승의 요점을 기록했는데 이 법계도가 총장 원년 무진년(668)에 완성되었다고 하였다. 이 인물은 신라 화엄종을 연 의상이다.
의상은 당에 유학하여 지엄에게 화엄학을 배우고 돌아와, '하나가 곧 전체이고 전체가 곧 하나'라는 일즉다 다즉일의 화엄 사상을 210자의 시로 압축한 화엄일승법계도를 지었으며, 부석사를 비롯한 화엄 십찰을 세워 교단을 넓혔다.
또한 그는 낙산사를 창건하며 현세의 고통에서 구제받으려는 관음 신앙을 널리 퍼뜨려 불교가 일반 백성에게 다가가는 데 이바지하였다.
황룡사 구층 목탑 건립을 건의한 이는 자장, 무애가를 지어 불교 대중화에 힘쓴 이는 원효, 보현십원가를 지은 이는 고려의 균여, 『왕오천축국전』을 남긴 이는 혜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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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 (나) 사이의 시기에 있었던 사실로 옳은 것은? [2점]
왕명으로 거칠부가 국사를 편찬하였다.
왕의 장인인 김흠돌이 반란을 일으켰다.
병부 등을 설치하여 지배 체제를 정비하였다.
장보고가 청해진을 거점으로 반란을 도보하였다.
관리들에게 관료전이 지급되고 녹읍이 폐지되었다.
(가)는 웅천주 도독 헌창이 아버지 주원이 왕이 되지 못한 것을 이유로 반란을 일으켜 국호를 장안, 연호를 경운이라 한 사건입니다. 무진·완산·청주·사벌 4개 주 도독과 국원경·서원경·금관경의 사신까지 협박해 자기 소속으로 삼았다는 서술에서 김헌창의 난(822)임을 알 수 있습니다.
(나)는 진성왕 3년(889)에 주·군이 공물과 부세를 보내지 않아 재정이 궁핍해지자 독촉했고, 이때 원종과 애노가 사벌주를 근거지로 일으킨 반란입니다. 따라서 두 자료 사이는 9세기 초에서 9세기 말에 이르는 신라 하대의 혼란기입니다.
이 시기에 해당하는 것은 장보고가 청해진을 거점으로 반란을 도모한 일(846)입니다. 왕위 계승 다툼에 개입해 딸을 왕비로 들이려다 거절당하자 반기를 들었고, 결국 자객 염장에게 살해되었습니다.
거칠부의 국사 편찬과 병부 설치는 6세기 진흥왕·법흥왕 대의 일이고, 김흠돌의 난과 관료전 지급·녹읍 폐지는 7세기 말 신문왕 대의 일이어서 모두 시기가 맞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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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라)를 일어난 순서대로 옳게 나열한 것은? [3점]
(가)-(나)-(다)-(라)
(가)-(다)-(라)-(나)
(나)-(가)-(라)-(다)
(나)-(라)-(가)-(다)
(다)-(라)-(나)-(가)
자료를 하나씩 보면 (가)는 태조가 정예 기병 5천을 거느리고 공산 아래에서 견훤과 싸우다 김락·신숭겸을 잃고 겨우 죽음을 면한 공산 전투(927), (나)는 태조가 포정전에서 즉위해 국호를 고려, 연호를 천수라 한 고려 건국(918)입니다.
(다)는 왕이 삼군을 통솔해 천안부에서 군대를 합치고 일선군으로 진격해 신검과 일리천을 사이에 두고 진을 친 일리천 전투(936), (라)는 견훤이 아들 능예와 딸 애복 등과 함께 나주로 도망쳐 와 고려 조정에 들어오기를 요청한 견훤의 귀부(935)입니다.
따라서 순서는 고려 건국(918) → 공산 전투(927) → 견훤의 귀부(935) → 일리천 전투(936)가 됩니다. 견훤이 금산사에 유폐되었다가 탈출해 고려에 투항한 뒤, 이듬해 그 아들 신검의 후백제군을 일리천에서 격파하며 후삼국이 통일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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밑줄 그은 ‘왕’의 업적으로 옳은 것은? [1점]
관학 진흥을 위해 양현고를 설치하였다.
노비안검법을 실시하여 왕권을 강화하였다.
권문세족을 견제하기 위해 전민변정도감을 설치하였다.
최승로의 시무 28조를 받아들여 통치 체제를 정비하였다.
정계와 계백료서를 지어 관리가 지켜야 할 규범을 제시하였다.
제시된 교서에서 왕은 “경서에 통달하고 책을 두루 읽은 선비와 온고지신하는 무리를 가려 12목에 각각 경학박사 1명과 의학박사 1명을 뽑아 보낼 것”이라 하고, 주·군·현의 장리와 백성 가운데 재주 있는 아이들을 가르치게 했습니다.
전국에 12목을 처음 설치하고 지방에 경학박사·의학박사를 파견해 교육을 담당하게 한 왕은 고려 성종입니다. 성종은 유교 정치 이념을 국가 운영의 원리로 삼아 중앙과 지방의 제도를 정비했습니다.
그 출발점이 된 것이 최승로의 시무 28조를 받아들여 통치 체제를 정비한 일입니다. 이를 바탕으로 중앙에 2성 6부를 두고 국자감을 정비하는 등 유교적 통치 질서를 갖추어 나갔습니다.
양현고 설치는 예종, 노비안검법은 광종, 전민변정도감을 통한 권문세족 견제는 공민왕, 정계와 계백료서 저술은 태조 왕건의 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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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사건이 일어난 시기를 연표에서 옳게 고른 것은? [2점]
(가)
(나)
(다)
(라)
(마)
제시문은 진성왕 3년(889) 원종과 애노의 난에 대한 『삼국사기』기록이다. 이는 신라 하대 혜공왕 피살(780) 이후, 고려 건국(918) 이전 시기에 해당하므로 연표의 (라) 시기에 해당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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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국가에 대한 고려의 대응으로 옳은 것은? [2점]
침입에 대비하여 광군을 창설하였다.
화통도감을 설치하여 화포를 제작하였다.
진관 체제를 실시하여 국방을 강화하였다.
상비군으로 구성된 훈련도감을 설치하였다.
좌·우별초와 신의군으로 삼별초를 조직하였다.
자료에서 (가)는 사신을 보내 낙타 50필을 보낸 나라이며, 일찍이 발해와 화목하다가 갑자기 의심해 맹약을 어기고 멸망시킨 무도한 나라로 서술되어 있습니다. 이에 태조는 사신 30인을 섬으로 유배 보내고 낙타는 만부교 아래에 매어 두어 모두 굶어 죽게 했습니다.
발해를 멸망시키고 낙타를 보냈으며 만부교 사건의 상대가 된 나라는 거란(요)입니다. 태조는 발해를 멸망시킨 거란을 금수의 나라로 규정하고 국교를 단절하는 강경한 북진 정책을 폈습니다.
이러한 거란의 침입에 대비해 고려가 취한 조치가 광군 창설입니다. 정종 때 광군사를 두고 30만 명 규모의 광군을 조직해 국방을 강화했습니다.
화통도감은 고려 말 왜구에 대비한 최무선의 건의로 설치되었고, 진관 체제와 훈련도감은 조선의 군사 제도이며, 삼별초는 몽골 침입기 무신 정권의 군사 조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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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 인물에 대한 설명으로 옳은 것은? [2점]
국청사를 중심으로 해동 천태종을 창시하였다.
법화 신앙에 중점을 둔 백련 결사를 주도하였다.
정혜사를 결성하여 불교계를 개혁하고자 하였다.
유불 일치설을 주장하여 심성의 도야를 강조하였다.
승려들의 전기를 정리하여 해동고승전을 편찬하였다.
화면 속 설명은 (가)가 문종의 아들로서 송·요·일본 각지의 불교 서적을 수집해 그 목록을 정리한 신편제종교장총록을 남겼다고 밝히고 있습니다. 이에 해당하는 인물은 대각국사 의천입니다.
의천은 흥왕사에 교장도감을 두고 수집한 장소와 논소를 간행했으며, 국청사를 중심으로 해동 천태종을 창시했습니다. 교종을 중심으로 선종을 통합하려는 교관겸수를 내세운 것이 그의 사상적 특징입니다.
백련 결사를 주도한 인물은 요세, 수선사(정혜결사)를 결성한 인물은 지눌, 유불 일치설을 주장한 인물은 혜심, 해동고승전을 편찬한 인물은 각훈으로 서로 구분해 두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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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 (나) 제도에 대한 설명으로 옳은 것을 보기에서 고른 것은? [2점]
ㄱ,ㄴ
ㄱ,ㄷ
ㄴ,ㄷ
ㄴ,ㄹ
ㄷ,ㄹ
(가)는 제술업·명경업의 두 업과 의업·복업·지리업·율업·서업·산업 등의 잡업이 있어 각각 시험을 쳐서 벼슬길에 나아가게 한 제도이므로 과거제입니다. (나)는 조상의 공로로 벼슬길에 나아가는 자를 모두 나이 18세 이상으로 제한했다는 내용이므로 음서입니다.
과거제에 대해서는 향리의 자제가 중앙 관직으로 진출하는 통로가 되었다는 설명이 옳습니다. 고려의 과거는 법제적으로 양인 이상에게 열려 있었고, 실제로 향리층이 제술업을 통해 중앙 관료로 성장하는 주요 경로였습니다.
음서에 대해서는 사위·조카·외손자에게도 적용되기도 하였다는 설명이 옳습니다. 고려의 음서는 아들에게만 국한되지 않아 친족 범위가 넓었는데, 이는 사위와 외손까지 포괄하던 고려의 양측적 친족 관념을 보여 줍니다.
반면 재가한 여자의 자손이 응시에 제한을 받은 것은 조선의 과거제에 해당하고, 후주 출신 쌍기의 건의로 시작된 것은 음서가 아니라 광종 때의 과거제이므로 잘못된 연결입니다.
내용에 오류가 있거나 최신 법령·기준과 다른 부분이 보이면 알려주세요. 확인 후 반영하겠습니다.
(가)에 들어갈 사진으로 적절한 것은? [2점]
제시된 사진전은 “문화유산을 통해 본 고려와 몽골의 교류”를 주제로 하며, 이미 천산대렵도와 송광사 티베트문 법지가 전시되어 있습니다. 천산대렵도는 공민왕이 그렸다고 전하는 원의 화풍이 반영된 그림이고, 송광사 티베트문 법지는 원을 통해 들어온 티베트 불교의 흔적을 보여 줍니다.
따라서 (가)에는 원 간섭기 몽골의 영향을 받은 문화유산이 들어가야 하며, 이에 해당하는 것은 개성 경천사지 십층석탑입니다. 대리석으로 만든 다층 탑신에 화려한 조각을 새긴 이 탑은 원의 라마교 양식이 반영된 대표적 유물로, 현재 국립중앙박물관 실내에 세워져 있습니다.
나머지 사진의 석굴암 본존불은 통일 신라, 무덤 앞의 석인상과 팔각 지붕을 올린 승탑은 몽골과의 교류를 보여 주는 유물로 보기 어렵고, 곤여만국전도는 조선 후기 서양 선교사가 제작한 세계 지도가 전래된 것이어서 주제와 맞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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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 화폐가 발행된 시기의 경제 상황으로 옳은 것은? [2점]
왜관이 설치되어 일본과 무역하였다.
경시서가 수도의 시전을 감독하였다.
보부상이 장시를 돌아다니며 활동하였다.
광산을 전문적으로 경영하는 덕대가 나타났다.
중각 개시와 중강 후시를 통한 중국과의 교역이 활발하였다.
자료에서 왕은 금과 은을 국가의 보물이라 하면서 간악한 백성이 구리를 섞어 몰래 주조하니 (가)에 표지를 새겨 영구한 법식으로 삼으라 했고, 이때 비로소 (가)를 화폐로 쓰기 시작했다고 합니다. 그 제도는 은 1근으로 본국의 지형을 본떠 만들었으며 속칭 활구라 했다고 서술되어 있습니다.
은 한 근으로 우리나라 지형을 본떠 만들고 활구라 불린 화폐는 고려 숙종 때 발행된 은병입니다. 숙종 대에는 주전도감을 두고 해동통보·삼한통보 등 동전도 함께 주조했습니다.
따라서 이 시기의 경제 상황으로는 경시서가 수도의 시전을 감독한 사실이 옳습니다. 개경의 시전 상업을 관리하고 물가를 조절하기 위해 경시서를 두었습니다.
왜관을 통한 일본과의 무역, 보부상의 장시 왕래, 광산을 전문 경영하는 덕대의 등장, 중강 개시·후시를 통한 청과의 교역은 모두 조선 시대, 특히 조선 후기의 모습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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밑줄 그은 ‘이 왕’의 업적으로 옳은 것은? [2점]
전통 한의학을 정리한 동의보감을 간행하였다.
문하부 낭시를 분리하여 사간원으로 독립시켰다.
경국대전을 반포하여 국가 통치 규범을 마련하였다.
붕당 정치의 폐해를 극복하고자 탕평비를 건립하였다.
한양을 기준으로 한 역법서인 칠정산 내편을 편찬하였다.
전시 설명에 따르면 이 책은 동래선생교정북사상절의 일부로 주자소에서 제작한 계미자를 이용해 간행되었고, 같은 왕 때 세계 지도인 혼일강리역대국도지도가 제작되었다고 합니다.
주자소를 설치해 계미자를 주조하고 혼일강리역대국도지도를 만든 왕은 태종입니다. 태종은 두 차례 왕자의 난을 거쳐 즉위한 뒤 국왕 중심의 통치 체제를 다지며 6조 직계제 시행, 호패법 실시 등을 추진했습니다.
그 업적 가운데 하나가 문하부 낭사를 분리해 사간원으로 독립시킨 일입니다. 낭사를 별도의 언관 기구로 떼어 내 재상 권한을 견제하게 함으로써 왕권을 강화하려는 의도였습니다.
동의보감 간행은 광해군, 경국대전 반포는 성종, 탕평비 건립은 영조, 칠정산 내편 편찬은 세종 대의 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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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마)에 대한 탐구 활동으로 적절하지 않은 것은? [3점]
(가) - 직지심체요절의 인쇄 과정을 파악한다.
(나) - 팔상전에 나타난 목탑 양식의 특징을 찾아본다.
(다) - 팔만대장경판의 보존 방식에 대해 조사한다.
(라) - 일연이 삼국유사를 집필한 경위를 알아본다.
(마) - 주심포 양식 건축물의 구조와 특징을 분석한다.
지도에 표시된 곳은 (가) 청주 흥덕사지, (나) 논산 개태사, (다) 합천 해인사, (라) 군위 인각사, (마) 안동 봉정사입니다.
이 가운데 적절하지 않은 것은 논산 개태사를 팔상전의 목탑 양식과 연결한 탐구입니다. 개태사는 태조 왕건이 후백제를 평정한 뒤 후삼국 통일을 기념해 세운 사찰이며, 현존하는 유일한 조선 시대 목탑인 팔상전은 보은 법주사에 있습니다.
나머지는 모두 알맞은 연결입니다. 청주 흥덕사는 현존 최고(最古) 금속 활자본인 직지심체요절이 간행된 곳이고, 합천 해인사 장경판전은 팔만대장경판을 보관하고 있으며, 군위 인각사는 일연이 말년에 머물며 삼국유사를 집필한 곳입니다.
안동 봉정사는 극락전이 있는 곳으로, 기둥 위에만 공포를 얹는 주심포 양식과 배흘림기둥을 갖춘 현존 최고(最古) 목조 건축물로 꼽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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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 문화유산에 대한 설명으로 옳은 것은? [1점]
역대 국왕과 왕비의 신주가 모셔져 있다.
공자와 여러 성현들의 위패를 모셔 놓았다.
신농씨와 후직씨에게 풍년을 기원하는 곳이다.
토지와 곡식의 신에게 제사를 지내는 공간이다.
일제에 의해 경내에 조선 총독부 청사가 세워졌다.
태조 이성계가 개경에 처음 세웠다가 한양 천도 후 지금 자리에 건립하였고 사직과 더불어 왕조 국가를 표현하는 상징이었다고 하였으므로 (가)는 종묘이며, 사진 속 건물은 그 정전이다. 종묘 정전과 영녕전에는 역대 국왕과 왕비의 신주를 모시고 제례를 지냈으며, 종묘 제례와 제례악은 유네스코 인류 무형 유산에 등재되었다. 조선 총독부 청사가 들어선 곳은 경복궁, 대성전과 명륜당은 성균관·향교, 창경원으로 격하된 곳은 창경궁, 토지와 곡식의 신에게 제사하는 곳은 사직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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밑줄 그은 ‘왕’의 재위 기간에 있었던 사실로 옳은 것은? [2점]
청의 요청으로 조총 부대를 파견하였다.
4군 6진을 설치하여 북방 영토를 개척하였다.
외척 사이의 권력 다툼으로 을사사화가 발생하였다.
남인이 축출되고 노론과 소론이 정국을 주도하였다.
이조 전랑 임명을 둘러싸고 사림이 동인과 서인으로 나뉘었다.
제시된 사료는 포도대장 김순고가 왕에게 올린 보고로, 황해도의 흉악한 도적 임꺽정의 일당인 서임이란 자가 이름을 엄가이로 바꾸어 숭례문 밖에 살고 있어 붙잡아 심문하였다는 내용이다. 서임은 대장(임꺽정)이 이춘동의 집에 모여 봉산 군수 이흠례를 죽이기로 의논하였다고 진술하였다.
임꺽정의 활동은 명종 재위 기간의 대표적 사건이다. 왕실 외척의 수탈과 흉년으로 민생이 무너지자 황해도·경기 일대에서 임꺽정 무리가 봉기하여 관아와 부호를 습격하였고, 조정은 여러 해에 걸친 토포 끝에 이들을 진압하였다.
따라서 같은 왕의 재위 기간에 있었던 일로는 외척 사이의 권력 다툼으로 을사사화가 일어난 것이 옳다. 중종의 두 계비를 배경으로 한 윤임의 대윤과 윤원형의 소윤이 대립하다가, 명종이 어린 나이로 즉위하고 문정 왕후가 수렴청정하면서 소윤이 대윤과 그에 연루된 사림을 대거 숙청하였다.
나머지는 시기가 다르다. 조총 부대를 청의 요청으로 파견한 나선 정벌은 효종, 4군 6진 개척은 세종, 남인이 축출되고 노론·소론이 정국을 주도한 것은 숙종 이후, 사림이 동인과 서인으로 갈린 것은 선조 때의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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밑줄 그은 ‘국문교서’가 발표된 이후의 사실로 옳은 것은? [2점]
이순신이 명량에서 왜의 수군을 대파하였다.
신립이 탄금대에서 배수의 진을 치고 항전하였다.
이종무가 왜구의 근거지인 쓰시마섬을 정벌하였다.
계해약조가 체결되어 세견선의 입항이 허가되었다.
조선 정부의 통제에 반발항 3포 왜란이 일어났다.
그림 속 자료는 의주로 파천한 국왕이 내린 국문 교서로, 어쩔 수 없이 왜군에게 협조한 백성의 죄는 묻지 않으며, 왜군을 잡아오거나 포로가 된 우리 백성을 데리고 나오는 사람에게는 벼슬을 내린다는 내용이 적혀 있다고 설명된다.
국왕이 의주까지 피란한 상황은 임진왜란 초기이며, 이 교서는 왜군 점령지의 백성을 회유하여 조선 편으로 돌리려 한 선조의 문서다. 따라서 이 교서 이후의 사실을 골라야 한다.
정유재란 때 이순신이 명량에서 왜의 수군을 대파한 것이 이 교서가 발표된 뒤의 일이다. 이순신은 남은 열세 척의 배로 좁은 울돌목의 조류를 이용해 일본 수군을 격파하고 서해로 향하던 물길을 막았다.
나머지는 모두 그 이전이다. 신립의 탄금대 항전은 왜란 발발 직후 국왕이 의주로 향하기 전에 있었고, 이종무의 쓰시마섬 정벌은 세종 즉위 초, 계해약조와 3포 왜란은 각각 세종·중종 때의 일로 임진왜란보다 훨씬 앞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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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주장을 펼친 인물에 대한 설명으로 옳은 것은? [3점]
의산문답에서 중국 중심의 세계관을 비판하였다.
동의수세보원을 저술하여 사상 의학을 확립하였다.
우서에서 사농공상의 직업적 평등과 전문화를 주장하였다.
경세유표를 저술하여 국가 제도의 개혁 방향을 제시하였다.
북학의에서 재물을 우물에 비유하여 절약보다 소비를 권장하였다.
제시된 글은 「전론」의 일부로, 농사짓는 사람만 토지를 갖게 하려면 여전(閭田)의 법을 시행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산골짜기와 시내를 경계로 삼아 한 구역을 여(閭)로 묶고, 여장(閭長)을 두어 여의 토지를 여의 사람들이 공동으로 경작하게 하자는 구상이다.
수확기에는 그 곡식을 먼저 국가에 세를 내고, 다음에 여장의 봉급을 준 뒤, 나머지를 장부에 적힌 일한 만큼(노동량)에 따라 여민에게 분배한다고 하였다. 토지의 공동 소유·공동 경작과 노동량에 따른 분배를 결합한 이 여전론을 제기한 인물은 정약용이다.
정약용은 신유박해로 강진에 유배된 뒤 방대한 저술을 남겼는데, 그 가운데 경세유표를 지어 국가 제도 전반의 개혁 방향을 제시하였다. 이 밖에 지방관의 도리를 다룬 목민심서, 형옥 실무를 다룬 흠흠신서를 함께 저술하였고 뒷날 여전론을 현실에 맞게 조정한 정전제를 구상하기도 하였다.
나머지는 각각 다른 인물이다. 의산문답으로 중국 중심의 세계관을 비판한 이는 홍대용, 동의수세보원의 사상 의학은 이제마, 우서에서 사농공상의 직업적 평등과 전문화를 주장한 이는 유수원, 북학의에서 재물을 우물에 비유한 이는 박제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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밑줄 그은 ‘대책’의 내용으로 옳은 것은 <보기>에서 고른 것은? [2점]
ㄱ,ㄴ
ㄱ,ㄷ
ㄴ,ㄷ
ㄴ,ㄹ
ㄷ,ㄹ
대화에서 한 인물이 임금이 군포를 기존의 절반인 1필로 줄이는 법을 시행한다고 말하고, 다른 인물이 그로 인해 줄어드는 세입을 보충하기 위한 대책이 무엇인지 궁금하다고 묻고 있다. 군포 2필을 1필로 감해 준 이 법은 영조 대의 균역법이다.
부족해진 재정을 메우기 위해 정부가 마련한 방안이 바로 어염세와 선박세를 국가 재정으로 귀속시킨 것과 일부 상류층 자제를 선무군관으로 편성해 1년에 1필의 군포를 거둔 것이다. 여기에 결작이라 하여 토지 1결당 쌀 2두를 거두는 조치도 함께 시행하였다.
나머지 보기는 균역법과 무관하다. 양전 사업을 실시하고 지계를 발급한 것은 대한 제국 시기 광무개혁의 내용이고, 수신전·휼양전 등의 명목으로 세습되던 토지를 폐지한 것은 세조 때 현직 관리에게만 수조권을 준 직전법 시행과 관련된 조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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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에 대한 설명으로 옳은 것은? [2점]
매년 정기적으로 파견되었다.
다녀온 여정을 연행록으로 남겼다.
하정사, 성절사, 천추사 등이 있었다.
사절 왕래를 위하여 북평관을 개설하였다.
19세기 초까지 파견되어 문화 교류의 역할을 하였다.
화면은 조선과 에도 막부를 잇는 사절단을 소개하는 자료실로, 일본 측 기록인 하급 무사 아시히 시게아키의 일기가 실려 있다. 2,500명의 몰이꾼을 동원해 사슴 16마리를 생포해 접대 음식을 준비했고, 시문과 서화의 휘호를 청하러 찾아오는 사람들로 혼잡하여 조선 문인들이 한숨도 못 자고 붓을 놓을 틈이 없었다는 내용이다. 2017년 유네스코 세계 기록 유산에 등재된 이 사절단은 통신사이다.
통신사는 임진왜란 이후 국교가 재개되면서 에도 막부의 요청으로 파견되었고, 막부 쇼군의 권위를 높이는 외교 행사이자 조선의 학문·문화를 전하는 통로가 되었다. 자료의 휘호 요청 장면이 그 문화 교류의 실상을 보여 준다.
통신사는 19세기 초까지 파견되며 문화 교류의 역할을 담당하였다. 1811년 쓰시마에서 국서를 교환한 사행을 끝으로 파견이 중단되었다.
나머지는 통신사에 해당하지 않는다. 매년 정기적으로 간 것이 아니라 막부의 요청이 있을 때 부정기적으로 갔고, 연행록을 남기거나 하정사·성절사·천추사로 불린 것은 청(명)에 보낸 사행이며, 북평관은 여진 사신을 접대하던 곳으로 일본 사신은 동평관에 머물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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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 기구에 대한 설명으로 옳은 것은? [2점]
사림의 건의로 중종 때 폐지되었다.
왕명 출납을 맡은 왕의 비서 기관이었다.
국왕의 친위 부대로 서울과 수원에 배치되었다.
왕에게 경서와 사서를 강론하는 경연을 주관하였다.
5품 이하 관리의 임명 과정에서 서경권을 행사하였다.
전시 설명에 따르면 유물인 상대계첩(霜臺契帖)은 (가) 소속 감찰직 관원들의 계모임을 기념하여 제작되었고, 그들이 근무하는 청사가 그려져 있으며 모인 사람들의 명단이 적혀 있다. 상대는 서릿발 같은 관리 감찰 때문에 붙여진 (가)의 다른 이름이고 그 수장은 대사헌이라고 하였다.
대사헌을 우두머리로 두고 감찰을 담당한 이 기구는 사헌부이다. 사헌부는 관리의 비리를 규찰하고 풍속을 바로잡으며 부당한 정사를 논박하는 일을 맡았다.
사헌부는 사간원과 함께 양사(대간)를 이루어 5품 이하 관리의 임명 과정에서 서경권을 행사하였다. 대간의 동의를 받지 못하면 임명이 이루어지지 않아 인사의 견제 장치로 기능하였다.
나머지는 다른 기구다. 사림의 건의로 중종 때 폐지된 것은 소격서, 왕명 출납을 맡은 비서 기관은 승정원, 서울과 수원에 배치된 국왕 친위 부대는 장용영, 경연을 주관한 곳은 홍문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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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검색창에 들어갈 인물의 활동으로 옳은 것은? [3점]
사화의 발단이 된 조의제문을 작성하였다.
청의 정세 변화를 계기로 북벌을 주장하였다.
반계수록에서 토지 제도 개혁론을 제시하였다.
양반전을 지어 양반의 허례와 무능을 지적하였다.
충청도 지역까지 대동법의 확대 실시를 건의하였다.
검색 결과에는 1617년~1680년에 살았고 호가 백호(白湖)·하헌(夏軒)이며, 1·2차 예송에서 각각 3년설과 1년설을 주장하였고, 유교 경전의 재해석을 시도하여 사문난적이라 비판받았으며, 경신환국으로 사사되었다고 적혀 있다. 이 인물은 윤휴이다.
윤휴는 남인의 대표적 논객으로 예송에서 서인의 주장에 맞서 왕실의 예를 사대부와 달리 보아야 한다고 논박하였고, 주자의 해석에 얽매이지 않고 중용 등을 독자적으로 주석하여 송시열 등에게 사문난적으로 몰렸다.
정치적으로 그는 청의 정세 변화를 계기로 북벌을 주장한 것으로 유명하다. 청에서 삼번의 난이 일어나 내부가 흔들리자 이를 기회로 삼아 군사를 일으키자고 건의하며 도체찰사부 강화 등 군비 확충을 추진하였다. 그러나 경신환국으로 남인이 실각하면서 사사되었다.
나머지는 다른 인물이다. 조의제문을 쓴 이는 김종직, 반계수록의 토지 개혁론은 유형원, 양반전을 지은 이는 박지원, 충청도까지 대동법 확대를 건의한 이는 김육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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밑줄 그은 ‘거사’에 대한 설명으로 옳은 것은? [1점]
청의 군대에 의해 진압되었다.
백낙신의 탐학이 발단이 되어 일어났다.
왕이 도성을 떠나 공산성으로 피란하였다.
정부와 약조를 맺고 집강소를 설치하였다.
선천, 정주 등 청천강 이북의 여러 고을을 점령하였다.
제시된 시나리오는 가산군 다복동 부근 비밀 회의 장소를 배경으로 한다. 이희저는 조정의 지나친 세금 수탈로 평안도민들의 불만이 크고 계속된 자연 재해로 굶어 죽는 사람이 많다고 하고, 우군칙은 금광을 연다고 하여 사람들을 모으고 군사 훈련을 하여 거사를 일으키자고 제안한다. 김창시는 평안도민에 대한 차별을 부각하는 격문을 발표하자고 하며, 홍경래가 거사 날을 12월 20일로 못박는다.
등장인물과 장소로 보아 밑줄 그은 거사는 순조 때 일어난 홍경래의 난이다. 세도 정치기의 삼정 문란과 서북 지역에 대한 오랜 차별이 배경이 되어 몰락 양반·상인·광산 노동자·농민이 결합하였다.
봉기군은 다복동에서 일어나 선천·정주 등 청천강 이북의 여러 고을을 점령하며 한때 기세를 떨쳤다. 그러나 관군의 반격으로 정주성에 갇힌 채 농성하다가 성이 함락되면서 진압되었다.
나머지는 다른 사건이다. 청 군대에 의해 진압된 것은 갑신정변, 백낙신의 탐학이 발단이 된 것은 임술 농민 봉기(진주 농민 봉기), 왕이 공산성으로 피란한 것은 이괄의 난, 정부와 약조를 맺고 집강소를 설치한 것은 동학 농민 운동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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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자료의 상황이 나타난 시기에 볼 수 있는 모습으로 적절하지 않은 것은? [2점]
청화 백자를 제작하는 도공
시사를 조직하여 활동하는 중인
담배 등의 상품 작물을 재배하는 농민
저잣거리에서 이야기책을 읽어주는 전기수
과전법에 의해 토지의 수조권을 지급받는 관리
「일성록」에 실린 이 자료에서 백목전 상인은 서양목(西洋木)이 들어온 이후 토산 면포가 소용없게 되어 망할 지경이라고 호소하며, 연경을 왕래하는 상인들의 물건 수입을 금지하거나 아니면 자기 전(廛)에 오로지 속하게 해 달라고 요구하고 있다. 서양산 면직물이 청을 거쳐 유입되던 조선 후기, 그중에서도 19세기의 상황이다.
이 시기에는 상품 화폐 경제가 발달하여 사상의 활동이 활발해지고 시전의 독점적 지위가 흔들렸다. 따라서 청화 백자를 굽는 도공, 시사를 조직해 활동하는 중인, 담배 같은 상품 작물을 재배하는 농민, 저잣거리에서 이야기책을 읽어 주는 전기수는 모두 이 무렵에 볼 수 있는 모습이다.
반면 과전법에 따라 토지의 수조권을 받는 관리는 이 시기에 볼 수 없다. 과전법은 고려 말에 제정되어 조선 초까지 시행되다가 세조 때 현직 관리에게만 지급하는 직전법으로 바뀌었고, 명종 때 직전법마저 폐지되면서 관리에게 수조권을 주는 제도 자체가 사라지고 녹봉만 지급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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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 (나) 사이의 시기에 있었던 사실로 옳은 것은? [2점]
오페르트가 남연군 묘 도굴을 시도하였다.
일본 군함 운요호가 영종도를 공격하였다.
영국군이 러시아를 견제하기 위해 거문도를 점령하였다.
조선이 프랑스와 조약을 체결하고 천주교 포교를 허용하였다.
조선책략 유포에 반발하여 이만손 등이 영남 만인소를 올렸다.
(가)는 「베이징 주재 프랑스 대리공사 벨로네의 서한」으로, 조선에서 국왕의 명령에 의해 프랑스인 주교 2명과 선교사 9명, 조선인 사제 7명과 수많은 천주교도가 학살되었으며 며칠 내로 군대가 조선을 정복하기 위해 출발할 것이라고 밝히고 있다. 이는 1866년 병인박해 직후 병인양요를 예고한 문서다.
(나)는 「대한계년사」의 기록으로, 돌을 캐어 종로에 비석을 세우고 그 비면에 “서양 오랑캐가 침범하는데 싸우지 않으면 곧 화친하는 것이요, 화친을 주장함은 나라를 팔아먹는 것”이라 새겼다고 하였다. 신미양요 직후인 1871년 흥선 대원군이 세운 척화비다.
따라서 두 자료 사이는 1866년부터 1871년까지의 시기이다. 이 기간에 오페르트가 남연군 묘 도굴을 시도하였다. 1868년 통상을 요구하던 독일 상인 오페르트가 흥선 대원군 아버지의 묘를 파헤치려다 실패하였고, 이 사건은 서양에 대한 반감을 키워 통상 수교 거부 정책을 더욱 굳히는 계기가 되었다.
나머지는 모두 (나) 이후의 일이다. 운요호의 영종도 공격은 1875년, 영국의 거문도 점령은 1885년, 프랑스와의 조약 체결로 천주교 포교가 허용된 것은 1886년, 조선책략 유포에 반발한 영남 만인소는 1881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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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조약에 대한 설명으로 옳은 것은? [3점]
양곡의 무제한 유출 조항을 포함하고 있다.
외국 상인의 내지 통상권을 최초로 규정하였다.
청의 알선으로 서양 국가와 맺은 최초의 조약이다.
스티븐스가 외교 고문으로 부임하는 계기가 되었다.
부산, 원산, 인천에 개항장이 설치되는 결과를 가져왔다.
제시된 조약문의 제1관은 "대조선국 군주와 대미국 대통령과 아울러 그 인민은 각각 모두 영원히 화평하고 우호를 다진다"며 제3국이 불공평하게 대할 경우 서로 도와 잘 조정한다는 거중조정 조항을 담고 있다. 상대가 '대미국 대통령'이라는 점에서 이 문서는 조·미 수호 통상 조약(1882)이다.
제14관은 대조선국 군주가 어떤 혜택과 특권을 다른 나라에 베풀면 "미국 관민도 일체 균점하도록 승인한다"고 규정하여 최혜국 대우를 명문화하였다. 이는 조선이 서양 국가와 맺은 조약에 최혜국 대우가 들어간 첫 사례이기도 하다.
이 조약은 러시아와 일본의 세력 확대를 견제하려던 청의 알선(이홍장의 중재)으로 체결되었으며, 조선이 서양 국가와 맺은 최초의 조약이라는 점이 가장 중요한 특징이다. 체결 이듬해 초대 공사 푸트가 부임하자 조선은 답례로 보빙사를 파견하였다.
한편 양곡의 무제한 유출을 허용한 것은 조·일 무역 규칙이고, 외국 상인의 내지 통상권을 처음 규정한 것은 조·청 상민 수륙 무역 장정이다. 스티븐스가 외교 고문으로 온 계기는 제1차 한·일 협약이며, 부산·원산·인천 개항은 강화도 조약의 결과이므로 이 조약과는 관계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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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 인물에 대한 설명으로 옳은 것은? [2점]
을사늑약에 반대하여 의병을 일으켰다.
독립 협회를 창립하고 독립문을 세웠다.
지부복궐척화의소를 올려 왜양일체론을 주장하였다.
13도 창의군을 지휘하여 서울 진공 작전을 전개하였다.
보국안면을 기치로 우금치에서 일본군 및 관군과 맞서 싸웠다.
제시된 자료는 심문자와 진술자가 주고받은 공초(供草, 심문 기록)로, "재차 기포(起包)한 것은 일본 군사가 궁궐을 침범하였다고 한 까닭에 다시 일어났다"는 진술이 핵심이다. 여기서 (가)는 전봉준이며, 일본군의 경복궁 점령에 맞서 일어난 동학 농민 운동의 제2차 봉기(1894)를 가리킨다.
진술자는 "각국인은 다만 통상만 하는데 일본인은 병사를 거느리고 경성에 진을 치고 있으므로 우리나라 영토를 침략하는가 하고 의아해한 것"이라고 밝혀, 재봉기의 목적이 반외세·항일에 있었음을 분명히 하고 있다.
전봉준은 보국안민을 기치로 남접 부대를 이끌고 논산에서 손병희의 북접군과 연합한 뒤 서울로 북상하다가, 공주 우금치에서 일본군과 관군의 연합 부대와 격돌하여 크게 패하였다. 이후 순창에서 체포되어 서울로 압송되었고, 이 공초는 그 심문 과정에서 남겨진 기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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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인물에 대한 설명으로 옳은 것은? [1점]
고종의 밀지를 받아 독립 의군부를 조직하였다.
영국인 베델과 함께 대한매일신보를 발간하였다.
평양에서 조선 물산 장려회 발기인 대회를 개최하였다.
북간도에 서전서숙을 설립하여 민족 교육을 실시하였다.
네덜란드 헤이그에서 열린 만국 평화 회의에 특사로 파견되었다.
제시된 인물 소개 카드는 "국권 침탈에 저항한 구국 운동의 지도자"라는 표제 아래 이준(1859~1907)을 다루고 있다. 1896년 한성 재판소 검사보로 임명되었고, 을사늑약 폐기를 주장하는 상소 운동을 펼쳤으며, 안창호 등과 함께 비밀 결사인 신민회를 조직하였다는 설명이 실려 있다.
그가 남긴 가장 널리 알려진 활동은 1907년 고종의 밀명을 받아 네덜란드 헤이그에서 열린 만국 평화 회의에 특사로 파견된 일이다. 이상설·이위종과 함께 을사늑약의 부당성과 일제 침략의 실상을 세계에 알리려 하였으나 일본과 열강의 방해로 회의장 입장조차 거부당했고, 이준은 현지에서 순국하였다.
카드 말미의 "1962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 추서"는 그 공훈에 대한 정부의 서훈 기록이다. 참고로 헤이그 특사 파견은 일제가 고종을 강제 퇴위시키는 구실로 이용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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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상황 이후에 전개된 사실로 옳은 것을 <보기>에서 고른 것은? [2점]
ㄱ,ㄴ
ㄱ,ㄷ
ㄴ,ㄷ
ㄴ,ㄹ
ㄷ,ㄹ
제시된 『고종실록』 기사는 환구단에서 천지에 제사를 지낸 뒤 심순택이 백관을 거느리고 "제례를 마쳤으므로 황제의 자리에 오르소서"라고 아뢰었고, 왕이 12장문의 곤면을 입고 옥새를 받아 황제의 자리에 올랐다고 전한다. 곧 1897년 고종의 황제 즉위와 대한 제국 선포 장면이다.
이후 대한 제국은 구본신참을 원칙으로 광무개혁을 추진하였다. 1899년에는 황제가 군 통수권을 직접 장악하기 위해 원수부를 설치하였고, 같은 해 대한국 국제를 반포하여 황제권을 명문화하였다. 상공업 진흥을 위한 관립 실업 학교인 상공학교도 1899년 관제가 마련되어 세워졌다. 두 가지 모두 제시된 상황 이후의 사실이다.
반면 근대식 무기 제조 공장인 기기창은 1883년 개화 정책의 일환으로 설치되었고, 서양식 근대 교육 기관인 육영 공원은 1886년에 세워졌다. 둘 다 대한 제국 수립보다 10여 년 앞선 일이므로 '이후에 전개된 사실'이 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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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사건이 일어난 시기를 연표에서 옳게 고른 것은? [3점]
(가)
(나)
(다)
(라)
(마)
제시된 역사 신문 기사는 대한민국 임시 정부가 제2차 개헌을 통해 내각 책임제를 채택하고 국무령과 국무원으로 구성된 국무회의가 정부를 운영하며 임시 의정원에 책임을 지도록 하였다고 전한다. 기존 대통령제에서 독재적인 상황이 나타났던 경험을 고려한 것이라는 설명도 덧붙어 있다.
이는 이승만 탄핵 이후인 1925년의 제2차 개헌(국무령 중심 내각 책임제)을 가리킨다. 국민 대표 회의가 창조파와 개조파의 대립으로 결렬되면서 임시 정부의 침체가 깊어지자, 지도 체제를 바꿔 활로를 찾으려 한 조치였다.
연표는 1919년 대한민국 임시 정부 수립, 1923년 국민 대표 회의 개최, 1931년 한인 애국단 조직, 1935년 한국 국민당 창당, 1941년 대한민국 건국 강령 발표, 1945년 8·15 광복으로 시기를 나누고 있다. 1925년은 국민 대표 회의(1923)와 한인 애국단 조직(1931) 사이에 놓이는 시기에 해당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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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 단체에 대한 설명으로 옳은 것은? [1점]
김구에 의해 상하이에서 결성되었다.
일제의 황무지 개간권 요구를 저지하였다.
고종의 강제 퇴위에 반대하는 시위를 주도하였다.
신채호의 조선 혁명 선언을 활동 지침으로 삼았다.
일제가 조직한 105인 사건으로 조직이 해체되었다.
제시된 자료는 나석주가 조선일보사에 보낸 편지로, "2천만 민족의 생존권을 찾아" 결사적으로 단결한 (가)의 일원으로서 왜적의 관·사설 기관을 파괴하려 귀국하였으며 동척 회사와 식산 은행에 폭탄을 던지겠다는 결의를 밝히고 있다. 여기서 (가)는 의열단이다.
의열단은 1919년 김원봉을 중심으로 만주 지린에서 조직되어 일제 요인 암살과 식민 통치 기관 파괴를 목표로 삼았다. 나석주는 1926년 동양 척식 주식회사와 조선 식산 은행에 폭탄을 투척하고 일본 경찰과 총격전을 벌인 뒤 자결하였는데, 편지 속 "현장에서 자살하기로 결심하였습니다"라는 구절이 그 각오를 담고 있다.
의열단은 1923년 신채호가 지은 조선 혁명 선언을 활동 지침으로 삼아, 민중의 직접 혁명을 통한 독립 쟁취를 표방하고 외교론과 준비론을 비판하였다.
참고로 상하이에서 김구가 결성한 단체는 한인 애국단이고, 황무지 개간권 요구를 저지한 것은 보안회, 고종 강제 퇴위 반대 시위를 주도한 것은 대한 자강회이며, 105인 사건으로 해체된 단체는 신민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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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 지역의 독립운동에 대한 설명으로 옳은 것은? [2점]
권업신문을 발간하여 민족 의식을 고취하였다.
대한인 국민회를 중심으로 독립운동을 전개하였다.
대한 광복군 정부를 세워 무장 독립 투쟁을 준비하였다.
신한청년당을 결성하여 파리 강화 회의에 대표를 파견하였다.
조선 청년 독립단을 중심으로 2·8 독립 선언서를 발표하였다.
제시된 화면 속 사진은 박용만이 주도하여 창설한 대조선 국민 군단의 훈련 모습이며, 설명에는 대원들이 병영에 기숙하면서 군사 훈련과 파인애플·사탕수수 농사를 병행하였다고 되어 있다. 사탕수수·파인애플 농장은 한인 노동 이민이 집중된 하와이의 대표적 산업이므로 (가) 지역은 미주(하와이)이다.
대조선 국민 군단은 1914년 하와이에서 조직된 무장 독립운동 단체로, 낮에는 농장 노동으로 자금을 마련하고 밤에는 군사 훈련을 하는 둔전병식 운영을 하였다.
미주 지역 한인들은 1910년 하와이의 한인 합성 협회와 샌프란시스코의 공립 협회 계열이 통합하여 결성한 대한인 국민회를 중심으로 독립운동을 전개하며, 외교 활동과 독립운동 자금 모금에 힘썼다.
한편 권업신문 발간과 대한 광복군 정부 수립은 연해주, 신한청년당의 파리 강화 회의 대표 파견은 상하이, 2·8 독립 선언은 일본 도쿄에서 있었던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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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 인물에 대한 설명으로 옳은 것은? [2점]
숭무 학교를 설립하여 독립군을 양성하였다.
쌍성보 전투에서 한·중 연합 작전을 전개하였다.
독립군 비행사 육성을 위해 한인 비행 학교를 세웠다.
독립군 연합 부대를 이끌고 청산리 전투에서 승리하였다.
일제 패망과 광복에 대비하여 조선 건국 동맹을 결성하였다.
제시된 흉상 안내는 (가)가 한국광복군 총사령관을 역임했으며, 일본 육군 사관 학교를 졸업하였으나 만주로 망명하여 신흥 무관 학교에서 독립군 양성에 힘썼고, 한국 독립군의 총사령관으로 대전자령 전투를 승리로 이끌었다고 밝히고 있다. 이 인물은 지청천(이청천)이다.
지청천이 이끈 한국 독립군은 1930년대 초 만주에서 중국 호로군 등과 손잡고 한·중 연합 작전을 폈다. 대표적인 전과가 쌍성보 전투이며, 이어 사도하자·경박호·대전자령 전투에서도 일본군을 격파하였다.
이후 그는 중국 관내로 이동하여 1940년 충칭에서 창설된 한국광복군의 총사령관을 맡았다. 참고로 멕시코에서 숭무 학교를 세운 인물은 이근영, 미국에 한인 비행 학교를 세운 인물은 노백린, 청산리 전투를 승리로 이끈 인물은 김좌진, 조선 건국 동맹을 결성한 인물은 여운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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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글을 쓴 인물의 활동으로 옳은 것은? [2점]
진단 학회를 창립하고 진단 확보를 발행하였다.
여유당전서를 간행하고 조선학 운동을 주도하였다.
한국독립운동지혈사에서 독립 투쟁 과정을 정리하였다.
독사신론을 저술하여 민족주의 사관의 기초를 마련하였다.
조선사회경제사에서 식민 사학의 정체성 이론을 반박하였다.
제시된 글은 "나라는 멸할 수 있으나 역사는 멸할 수 없다", "나라는 형체이고 역사는 정신이다", "한국의 형체는 허물어졌으나 정신만을 홀로 보존하는 것이 어찌 불가능하겠는가"라고 하여 역사를 민족의 정신으로 규정하고 있다. 글 끝에 적힌 태백광노(太白狂奴)는 박은식의 호이며, 이 글은 그의 『한국통사』 서문이다.
박은식은 국혼(國魂)을 강조하는 민족주의 사학을 세워, 일제의 침략 과정을 밝힌 『한국통사』를 저술하였다. 이어 3·1 운동을 비롯한 항일 투쟁의 전개를 정리한 『한국독립운동지혈사』를 펴내 우리 민족의 독립 투쟁 과정을 체계적으로 서술하였다.
그는 대한민국 임시 정부의 제2대 대통령을 지내기도 하였다. 한편 진단 학회를 창립한 인물은 이병도·손진태 등이고, 여유당전서 간행과 조선학 운동은 정인보·안재홍, 독사신론 저술은 신채호, 조선사회경제사로 정체성론을 반박한 인물은 백남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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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설명서가 발표된 이후의 사실로 옳은 것은? [3점]
조선 노동 총동맹과 조선 농민 총동맹이 성립되었다.
경성 고무 여자 직공 조합이 아사 동맹을 결성하였다.
노동자 강주룡이 을밀대 지붕에서 고공 농성을 전개하였다.
전국 단위의 노동 운동 단체인 조선 노동 공제회가 조직되었다.
백정에 대한 차별 철폐를 요구하는 조선 형평사가 창립되었다.
제시된 동아일보 기사는 "국제 통상 주식회사 원산 지점이 계약을 무시하고 부두 노동 조합 제1구에 대하여 노동을 정지시킨 것"과 이에 각 세포 단체가 동정을 표한 상황, 그리고 원산 상업 회의소가 노동 연합회 회원과 그 가족을 비(非)시민 취급한 데 대한 항의를 전하고 있다. 이는 원산 총파업(1929)에 관한 보도이다.
원산 총파업은 문평 라이징 선 석유 회사에서 일본인 감독이 한국인 노동자를 구타한 사건이 발단이 되어 원산 노동 연합회 산하 노동자들이 넉 달 가까이 벌인 일제 강점기 최대 규모의 노동 쟁의로, 일본·중국·프랑스 등 국외 노동 단체의 격려 전문을 받으며 항일 운동의 성격까지 띠었다.
이 파업 이후의 사실로는 1931년 평양 평원 고무 공장의 임금 삭감에 맞서 노동자 강주룡이 을밀대 지붕에 올라 고공 농성을 벌인 일을 들 수 있다. 이는 우리나라 최초의 고공 농성으로 기록된다.
반면 조선 노동 공제회 조직(1920), 경성 고무 여자 직공 조합의 아사 동맹(1923), 조선 형평사 창립(1923), 조선 노동 총동맹과 조선 농민 총동맹의 분리 성립(1927)은 모두 원산 총파업 이전의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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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부대에 대한 설명으로 옳은 것은? [2점]
간도 참변 이후 조직을 정비하고 자유시로 이동하였다.
북만주 지역에서 활동한 한국 독립당의 산하 부대였다.
남만주에서 중국군과 연합 작전으로 항일 전쟁을 벌였다.
중국 관내(관내)에서 결성된 최초의 한인 군사 조직이었다.
대한 국민회군과 연합하여 봉오동에서 일본군을 격파하였다.
안내판 설명에 김원봉이 조직했고 중일 전쟁 발발 직후 중국 국민당 정부의 지원을 받아 후베이성 우한에서 창설되었으며, 주로 일본군에 대한 심리전과 후방 공작을 전개했다고 나온다. 사진의 건물 터는 이 부대가 주둔했던 중국 광시성 구이린이므로 (가)는 조선 의용대이다.
조선 의용대는 1938년 조선 민족 전선 연맹 산하 군사 조직으로 우한에서 창설된, 중국 관내(關內)에서 결성된 최초의 한인 군사 조직이다. 이후 주력은 화북으로 이동해 조선 의용군이 되었고, 김원봉이 이끈 잔여 병력은 1942년 한국광복군에 합류하였다.
간도 참변 이후 조직을 정비해 자유시로 이동한 것은 서일·김좌진 등이 결성한 대한 독립 군단이고, 북만주에서 한국 독립당의 산하 부대로 활동한 것은 지청천의 한국 독립군이다. 남만주에서 중국 의용군과 연합 작전을 편 것은 양세봉의 조선 혁명군이며, 대한 국민회군과 연합해 봉오동에서 승리한 것은 홍범도의 대한 독립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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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 종교의 활동으로 옳은 것은? [1점]
개벽, 신여성 등의 잡지를 발행하였다.
항일 무장 단체인 중광단을 결성하였다.
배재 학당을 세워 신학문 보급에 기여하였다.
만주에서 의민단을 조직하여 무장 투쟁을 전개하였다.
어린이 등의 잡지를 발간하여 소년 운동을 주도하였다.
자료에 나철이 조직했고 서일이 총지휘를 맡아 약 1만 명의 신도를 거느렸으며, 김교헌이 부활을 꾀하고 있다는 내용이 나온다. 또 독립 군정서를 조직해 본부를 밀산에 두고 북간도 일원에서 활동했다고 하므로 (가)는 대종교이다.
대종교는 단군 신앙을 바탕으로 1909년 창시되었고, 국권 피탈 후 총본사를 북간도로 옮겨 1911년 항일 무장 단체인 중광단을 결성하였다. 중광단은 3·1 운동 이후 북로 군정서로 개편되어 청산리 대첩의 주력이 되었다.
잡지 개벽·신여성과 어린이를 발행하며 소년 운동을 주도한 것은 천도교이고, 배재 학당을 세워 신학문을 보급한 것은 개신교 선교사 아펜젤러이다. 만주에서 의민단을 조직해 무장 투쟁을 벌인 것은 천주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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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법령이 재정된 이후에 일어난 사실로 옳은 것은? [2점]
민족 유일당 운동의 일환으로 신간회가 창립되었다.
조선어 학회 사건으로 최현배, 이극로 등이 투옥되었다.
순종의 인산일을 기회로 삼아 6·10 만세 운동이 일어났다.
사회주의 세력의 활동 방향을 밝힌 정우회 선언이 발표되었다.
윤봉길이 홍커우 공원에서 폭탄을 던져 일제 요인을 살상하였다.
법령은 치안 유지법의 죄로 형을 마치고 석방되는 자라도 재범 우려가 뚜렷하면 재판소가 검사의 청구로 예방 구금에 부칠 수 있다고 규정하고, 조선 사상범 보호 관찰령으로 보호 관찰 중인 경우도 같다고 덧붙이고 있다. 이는 1941년 제정된 조선 사상범 예방 구금령으로, 죄를 저지르지 않아도 사상만으로 무기한 가둘 수 있게 한 민족 말살 통치기의 악법이다.
따라서 1941년 이후의 사실을 골라야 한다. 일제가 조선어 학회를 독립운동 단체로 몰아 최현배·이극로 등을 검거·투옥한 조선어 학회 사건은 1942년의 일이므로 이 시기에 해당한다.
신간회 창립(1927), 6·10 만세 운동(1926), 정우회 선언(1926), 윤봉길의 훙커우 공원 의거(1932)는 모두 이 법령 제정 이전에 일어난 사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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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에 들어갈 내용으로 가장 적절한 것은? [2점]
황성신문에 연재된 소설의 주제와 문제
해에게서 소년에게에 나타난 신체시의 형식
소설 고향을 통해 본 일제 강점기 농촌 현실
금수회의록을 통해 본 신소설의 소재와 내용
시 광야에 드러난 항일 정신과 작가의 독립운동
학술 대회 안내문은 일제 강점기 프로 문학의 대표적 작가인 민촌 이기영의 문학 세계를 조명한다고 밝히고 있다. 나머지 발표 주제도 '카프의 결성과 민촌 이기영의 문학 세계', '민촌 이기영의 소설을 통해 본 근대 도시의 모습', '민촌 이기영 문학의 위상과 남북 문화 교류의 가능성 모색' 등 모두 이기영을 다루므로, (가)에도 그의 작품을 소재로 한 주제가 들어가야 한다.
이기영은 카프(조선 프롤레타리아 예술가 동맹)의 핵심 작가로, 1933~1934년 조선일보에 연재한 장편 고향에서 식민지 농촌의 궁핍한 현실과 소작 쟁의를 그려 냈다. 따라서 소설 고향을 통해 본 일제 강점기 농촌 현실이 학술 대회의 발표 주제로 적절하다.
신체시 '해에게서 소년에게'는 최남선, 신소설 '금수회의록'은 안국선, 시 '광야'는 이육사의 작품이며, 황성신문에 연재된 소설 또한 대한 제국 시기의 작품이어서 모두 이기영을 조명하는 학술 대회의 주제로는 맞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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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법령이 재정된 정부 시기의 사실로 옳은 것은? [2점]
5년 단임의 대통령 직선제 개헌이 이루어졌다.
부정 선거에 항거하는 4·19 혁명이 전국 각지에서 일어났다.
호헌 철폐와 독재 타도 등의 구호를 내세운 시위가 전개되었다.
치안본부 대공 분실에서 박종철 고문 치사 사건이 발생하였다.
신군부의 계엄 확대와 무력 진압에 저항하는 시위가 벌어졌다.
제1조는 육군 군대가 일정 지구에 영구히 주둔하며 그 지구의 경비와 육군 시설 보호를 맡는다고 규정하고, 제12조는 위수 사령관이 재해나 비상사태 때 지방 장관의 청구를 받아 육군 총참모장의 승인을 얻어 병력을 출동시킬 수 있다고 정하고 있다. 이는 1950년 제정된 위수령으로, 이승만 정부 시기의 법령이다.
이승만 정부는 장기 집권을 위해 발췌 개헌과 사사오입 개헌을 강행했고, 1960년 3·15 부정 선거를 저지르며 정권 연장을 꾀하였다. 이에 항거해 전국 각지에서 시위가 일어나 이승만이 하야한 4·19 혁명이 이 정부 시기의 사실에 해당한다.
5년 단임의 대통령 직선제 개헌, 호헌 철폐·독재 타도를 외친 6월 민주 항쟁,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은 모두 1987년 전두환 정부 시기의 일이다. 신군부의 계엄 확대에 저항한 시위는 1980년 5·18 민주화 운동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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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기사 내용이 보도된 정부 시기의 사실로 옳은 것을 보기에서 고른 것은? [2점]
ㄱ,ㄴ
ㄱ,ㄷ
ㄴ,ㄷ
ㄴ,ㄹ
ㄷ,ㄹ
신문 기사는 1월 5일 24시를 기해 지난 37년간 지속되어 온 야간 통행 금지가 전국적으로 해제된다고 보도하고 있다. 광복 직후인 1945년부터 시행된 통행금지가 37년 만에 풀린 것이므로 이는 1982년, 곧 전두환 정부 시기의 기사이다.
보기 가운데 한국 프로 야구가 6개 구단으로 출범한 것은 1982년의 일로, 통행금지 해제·교복 자율화와 함께 국민의 관심을 스포츠와 여가로 돌리려 한 이른바 우민화 정책의 일환이었다. 또 언론 통폐합을 강제로 단행하고 언론 기본법을 제정해 언론을 장악한 것도 1980년 신군부가 집권하는 과정에서 이루어졌다.
허례허식을 없앤다며 법령으로 가정 의례 준칙을 제정한 것과 재건 국민 운동 본부를 중심으로 혼·분식 장려 운동을 전개한 것은 모두 1960~1970년대 박정희 정부 시기의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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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다)를 발표된 순서대로 옳게 나열한 것은? [3점]
(가)-(나)-(다)
(가)-(다)-(나)
(나)-(가)-(다)
(나)-(다)-(가)
(다)-(나)-(가)
(가)는 '삼상 회의의 결정에 의하여 남북을 통한 좌우 합작으로 민주주의 임시 정부를 수립할 것', '친일파 민족 반역자를 처리할 조례를 본 합작위원회에서 입법 기구에 제안하여 입법 기구로 하여금 심리 결정하여 실시케 할 것'이라고 하였으므로 1946년 10월에 발표된 좌우 합작 7원칙이다.
(나)는 '공동 위원회의 제안은 최고 5년 기한의 4개국 신탁 통치 협약을 작성하기 위해 미·영·소·중 4국 정부가 공동 참작할 수 있도록 조선 임시 정부와 협의한 후 제출되어야 한다'고 하였으므로 1945년 12월 모스크바 3국 외상 회의 결정서이다. (다)는 '외국 군대가 철퇴한 이후 전 조선 정치 회의를 소집하여 민주주의 임시 정부를 즉시 수립'한다고 하고 '남조선 단독 선거의 결과를 결코 인정하지 않으며 지지하지 않을 것'이라고 하였으므로 1948년 4월 남북 협상에서 채택된 공동 성명이다.
따라서 발표 순서는 모스크바 3국 외상 회의 결정서(1945. 12) → 좌우 합작 7원칙(1946. 10) → 남북 협상 공동 성명(1948. 4), 곧 (나)-(가)-(다)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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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문서를 접수한 정부 시기의 외교 정책으로 옳은 것은? [2점]
남북한이 유엔에 동시 가입하였다.
중화 인민 공화국과 국교를 수립하였다.
경제 협력 개발 기구(OECD)에 가입하였다.
칠레와 자유 무역 협정(FTA)을 체결하였다.
한·일 협정을 체결하여 국교 정상화를 추진하였다.
문서는 한국군의 현대화 계획을 위한 장비 제공과 월남에 파견되는 추가 증파 병력의 장비·추가 경비 부담을 약속하고, 주월 한국군 소요 물자를 한국에서 구매하며 주월 미군과 월남군용 물자도 한국에 발주하겠다는 군사 원조·경제 원조 조항을 담고 있다. 이는 베트남 파병의 대가를 규정한 1966년의 브라운 각서로, 이를 접수한 것은 박정희 정부이다.
박정희 정부는 경제 개발 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김종필·오히라 비밀 회담을 거쳐 1965년 한·일 협정을 체결하고 일본과 국교 정상화를 추진하였다. 이 과정에서 식민 지배에 대한 사죄와 배상이 빠졌다는 비판이 일어 6·3 시위가 벌어지기도 하였다.
남북한 유엔 동시 가입과 중화 인민 공화국과의 수교는 북방 외교를 편 노태우 정부, 경제 협력 개발 기구(OECD) 가입은 김영삼 정부, 칠레와의 자유 무역 협정 체결은 노무현 정부 때의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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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뉴스가 보도된 정부 시기의 통일 노력으로 옳은 것은? [1점]
남북한이 한반도 비핵화 공동 선언을 채택하였다.
최초의 이산가족 고향 방문과 예술 공연단 교환이 이루어졌다.
남북한의 교류 협력을 위한 개성 공업 지구 조성에 합의하였다.
남북한 간 최초의 공식 합의서인 남북 기본 합의서를 교환하였다.
7·4 남북 공동 성명을 실천하기 위한 남북 조절 위원회를 구성하였다.
뉴스는 대통령이 신년사에서 작년에 제정한 국민 기초 생활 보장법으로 IMF 외환 위기에 어려워진 중산층과 서민의 삶의 질을 높이겠다고 밝히고, 새천년에는 남북 경제 공동체 구성을 위한 협의와 남북 이산가족 상봉을 추진하겠다고 발표했다고 전한다. 국민 기초 생활 보장법이 1999년에 제정된 점으로 보아 2000년 초 김대중 정부의 신년사이다.
김대중 정부는 대북 화해 협력 정책을 펴 2000년 평양에서 최초의 남북 정상 회담을 열고 6·15 남북 공동 선언을 발표하였다. 그 후속 조치로 경의선 복원과 함께 개성 공업 지구 조성에 합의하여 남북 교류 협력의 기반을 마련하였다.
한반도 비핵화 공동 선언 채택과 남북 기본 합의서 교환은 1991년 노태우 정부, 최초의 이산가족 고향 방문과 예술 공연단 교환은 1985년 전두환 정부, 남북 조절 위원회 구성은 1972년 박정희 정부 때의 일이다.
내용에 오류가 있거나 최신 법령·기준과 다른 부분이 보이면 알려주세요. 확인 후 반영하겠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