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능력검정시험 고급] 제45회 기출문제 해설 페이지
(가)시대의 생활 모습으로 옳은 것은? [1점]
주로 동굴이나 막집에 거주하였다.
철제 농기구를 제작하여 사용하였다.
소를 이용한 깊이갈이가 일반화되었다.
계급이 없는 평등한 공동체 생활을 하였다.
반달 돌칼을 사용하여 곡물을 수확하였다.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등재된 화순 고인돌 유적이고 '계급이 발생한' 시대라는 설명에서 (가)는 청동기 시대임을 알 수 있다. 고인돌은 많은 노동력을 동원할 수 있는 지배자의 무덤으로 계급 발생을 보여 주는 청동기 시대의 대표적 무덤이다. 이 시기에는 반달 돌칼을 사용하여 곡물의 이삭을 수확하였다. 동굴·바위 그늘 생활과 뗀석기 제작은 구석기, 빗살무늬 토기는 신석기, 소를 이용한 깊이갈이는 그보다 훨씬 뒤의 모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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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자료에 해당하는 나라에 대한 설명으로 옳은 것은? [1점]
연맹 왕국으로 발전하였다.
낙랑과 왜에 철을 수출하였다.
무천이라는 제천 행사를 열었다.
혼인 풍습으로 민며느리제가 있었다.
여러 가(加)들이 별도로 사출도를 주관하였다.
자료는 『삼국지』 동이전의 기록으로, "대군장이 없고, 한(漢) 이래로 후(侯)·읍군·삼로가 있어서 하호를 통치하였다", "그 풍속은 산천을 중요시하여 산과 내마다 각기 구분이 있어 함부로 들어가지 않는다", "동성끼리는 결혼하지 않는다"고 전한다. 읍락 간 경계를 침범하면 노비나 소·말로 배상하게 한 책화와 족외혼 풍습이 나타나는 나라는 동예이다.
동예는 왕이 없이 후·읍군·삼로 같은 군장이 자기 읍락을 다스린 군장 국가였으며, 매년 10월에 무천이라는 제천 행사를 열어 하늘에 제사하고 밤낮으로 춤과 노래를 즐겼다. 단궁·과하마·반어피 같은 특산물로도 잘 알려져 있다.
나머지는 다른 나라의 특징이다. 연맹 왕국으로 발전한 것은 부여·고구려 등이고, 낙랑과 왜에 철을 수출한 것은 변한(가야), 혼인 풍습으로 민며느리제가 있었던 것은 옥저, 여러 가(加)들이 별도로 사출도를 주관한 것은 부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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밑줄 그은 ‘이 나라’에 대한 설명으로 옳은 것은? [2점]
진흥왕 때 신라에 복속되었다.
나당 연합군에 의해 멸망하였다.
대가들이 사자, 조의, 선인을 거느렸다.
빈민을 구제하기 위해 진대법을 시행하였다.
박, 석, 김의 3성이 교대로 왕위를 계승하였다.
그림의 설명은 경상북도 고령을 중심으로 발전한 나라의 지산동 44호분을 소개하고 있다. 무덤 배치도에는 가운데 으뜸 돌방을 두고 그 둘레를 순장 돌덧널 30여 기가 원형으로 에워싼 모습이 그려져 있어, 이 나라에서 순장이 실제로 행해졌음을 보여 준다.
고령 지산동 고분군을 남긴 나라는 후기 가야 연맹을 이끈 대가야이다. 대가야는 5세기 후반 중국 남제에 사신을 보낼 만큼 성장했으나, 562년 진흥왕이 이사부를 보내 정벌하면서 신라에 복속되었다.
대가들이 사자·조의·선인을 거느린 것과 빈민 구제를 위해 진대법을 시행한 것은 고구려의 사실이고, 박·석·김 세 성이 번갈아 왕위를 이은 것은 신라 초기의 모습이다. 나당 연합군에 멸망한 나라는 백제와 고구려로, 가야는 신라에 병합되어 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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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 (나) 사이의 시기에 있었던 사실로 옳은 것은? [3점]
신라의 법흥왕이 불교를 공인하였다.
백제의 문주왕이 웅진으로 천도하였다.
고구려의 태조왕이 옥저를 복속시켰다.
고구려의 광개토 대왕이 백제를 공격하였다.
백제와 고구려가 동맹을 맺고 신라에 대항하였다.
(가)는 왕이 태자와 함께 정예군 3만 명을 거느리고 평양성을 공격하여 고구려왕 사유(고국원왕)가 화살에 맞아 죽었다는 기록으로, 백제 근초고왕의 평양성 공격(371년)이다. (나)는 고구려왕 거련(장수왕)이 병사 3만 명으로 한성을 포위하고 성문을 나가 달아나던 왕(개로왕)을 살해했다는 기록으로, 한성 함락(475년)에 해당한다.
따라서 두 사건 사이는 4세기 후반부터 5세기 후반까지이다. 이 시기에 광개토 대왕은 즉위 후 남진하여 백제를 거듭 공격하였고, 396년에는 한강 이북의 여러 성을 빼앗고 아신왕의 항복을 받아 냈다.
고구려 태조왕의 옥저 복속은 1세기 후반의 일로 (가) 이전이다. 문주왕의 웅진 천도는 한성이 함락된 직후, 신라 법흥왕의 불교 공인은 527년, 백제와 고구려가 손잡고 신라에 맞선 것은 6세기 후반 이후여서 모두 (나) 뒤에 해당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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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기획전에 전시될 문화유산으로 적절한 것을 보기에서 고른 것은? [1점]
ㄱ,ㄴ
ㄱ,ㄷ
ㄴ,ㄷ
ㄴ,ㄹ
ㄷ,ㄹ
기획전의 주제는 백제의 도교 문화이다. 삼국에 전래된 도교는 신선 사상과 불로장생의 관념을 담아 백제 귀족 문화에 큰 영향을 주었으므로, 그러한 관념이 표현된 유물을 골라야 한다.
보기 ㄴ의 산수무늬 벽돌은 부여 외리에서 출토된 것으로, 산봉우리와 나무·구름·물이 어우러진 이상 세계를 새겨 신선 사상을 잘 보여 준다. 보기 ㄹ의 백제 금동 대향로는 뚜껑 꼭대기의 봉황, 산악과 신선·동물이 어우러진 산 모양 뚜껑, 연꽃 몸체와 용 받침으로 도교적 세계관이 집약된 대표 유물이다.
반면 보기 ㄱ의 몸통을 감싸는 판갑옷은 무기·무구류이고, 보기 ㄷ의 금동 보살 입상은 불교 조각이어서 도교 문화를 보여 주는 전시품으로는 적절하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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밑줄 그은 ‘왕’의 업적으로 옳은 것은? [2점]
익산에 미륵사를 창건하였다.
동진으로부터 불교를 수용하였다.
신라를 공격하여 대야성을 점령하였다.
사비로 천도하고 국호를 남부여로 고쳤다.
고흥으로 하여금 서기를 편찬하게 하였다.
첫 번째 사료에서 왕의 이름이 명농이고 무령왕의 아들로 왕위에 올랐다고 하였고, 두 번째 사료에서는 신라군을 습격하려고 보병과 기병 50명을 거느리고 밤에 구천에 이르렀다가 신라군에게 살해되었다고 하였다. 이는 백제 성왕과 그의 관산성 전투 전사(554년)를 가리킨다.
성왕은 538년 좁은 웅진을 벗어나 평야와 수로를 갖춘 사비로 도읍을 옮기고 국호를 남부여로 고쳐 백제 중흥을 꾀하였다. 이어 22부의 중앙 관청을 정비하고 신라와 연합해 한강 하류를 되찾았으나, 진흥왕에게 그 땅을 빼앗기자 신라를 공격하다 전사하였다.
익산에 미륵사를 세운 왕은 무왕, 동진에서 불교를 받아들인 왕은 침류왕, 대야성을 점령한 왕은 의자왕이며, 고흥에게 서기를 편찬하게 한 왕은 근초고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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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 국가에 대한 설명으로 옳은 것은? [2점]
지방관 감찰을 위해 외사정을 파견하였다.
지방을 통제하기 위해 22담로를 설치하였다.
5경 15부 62주의 지방 행정 제도를 갖추었다.
집사부 외 13부를 두고 행정 업무를 분담하였다.
상수리 제도를 시행하여 지방 세력을 견제하였다.
답사 보고서의 답사지는 러시아 연해주 콕샤로프카성 일대이며, 전체 둘레 1,645m의 대규모 성곽 내부 건물지에서 고구려 계통의 온돌 시설과 토기가 발굴되었다고 하였다. 지도에도 동모산 북동쪽 연해주 지역이 표시되어 있고, 본문은 이 유적이 해동성국으로 불린 나라가 고구려 문화를 계승했음을 보여 준다고 밝히고 있다.
따라서 (가)는 발해이다. 발해는 선왕 때 최대 영역을 이루면서 지방 행정 구역을 5경 15부 62주로 정비하였고, 이 무렵 중국으로부터 해동성국이라 불렸다.
외사정 파견, 집사부를 비롯한 14개 관청 운영, 상수리 제도는 모두 통일 신라의 제도이며, 22담로 설치는 백제 무령왕 때의 지방 통제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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밑줄 그은 ‘이 종파’에 대한 설명으로 옳은 것은? [2점]
동경대전을 경전으로 삼았다.
단군을 숭배의 대상으로 하였다.
대성전을 세워 옛 성현에 제사를 지냈다.
참선과 수행을 통해 깨달음을 얻고자 하였다.
마음속에 한울님을 모시는 시천주를 강조하였다.
사진은 전라남도 화순군 쌍봉사에 있는 철감선사 승탑(국보 제57호)으로, 목조 건축을 본뜬 팔각의 지붕돌과 기둥·받침이 정교하게 조각되어 있다. 설명에서는 승려의 사리를 봉안하는 승탑이 9세기부터 유행했고, 이 종파가 9산 선문을 형성했다고 하였으므로 밑줄 그은 종파는 선종이다.
선종은 경전 연구에 치중한 교종과 달리 참선과 수행으로 각자의 마음속에서 깨달음을 얻는 것을 강조하였다. 이러한 성격은 신라 하대 지방 호족의 성향과 맞아 크게 확산되었고, 각 지방에 세워진 선종 사원에서 승탑과 탑비가 활발히 제작되었다.
동경대전을 경전으로 삼고 시천주를 강조한 것은 동학, 단군을 숭배 대상으로 삼은 것은 대종교, 대성전을 세워 옛 성현에게 제사한 것은 유교와 관련된 내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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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에 해당하는 섬에 대한 설명으로 옳은 것은? [1점]
몽골에 항전할 때 임시 수도였다.
정약전이 자산어보를 저술한 섬이다.
하멜 일행이 표류하다가 도착한 곳이다.
양헌수 부대가 프랑스군을 격퇴한 장소이다.
대한 제국 칙령 제41호에서 관할 영토로 명시한 곳이다.
화면은 (가) 섬의 역사를 연표처럼 정리하고 있다. 512년 우산국 복속, 1454년 세종실록 지리지에 무릉과 거리가 서로 멀지 않아 날씨가 맑으면 볼 수 있다고 기록, 1696년 안용복의 일본 도해, 1770년 동국문헌비고에 울릉과 함께 모두 우산국의 땅이라고 명확히 기록, 1906년 울도 군수 심흥택 보고서가 이어진다. 이는 모두 독도에 관한 사실이다.
대한 제국은 1900년 칙령 제41호를 반포하여 울릉도를 울도군으로 승격하고 군수가 울릉 전도와 죽도, 석도(독도)를 관할하도록 명시하였다. 이는 독도가 우리 영토임을 근대 법령으로 확인한 대표적 근거이다.
몽골 항전기의 임시 수도이자 양헌수 부대가 프랑스군을 격퇴한 곳은 강화도, 정약전이 자산어보를 저술한 곳은 흑산도, 하멜 일행이 표류해 도착한 곳은 제주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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밑줄 그은 ‘선종’의 활동으로 옳은 것은? [3점]
김흠돌 등 진골 세력을 숙청하였다.
고창 전투에서 고려군에게 패하였다.
금성을 습격하여 경애왕을 죽게 하였다.
금산사에 유폐된 후 왕건에게 귀부하였다.
국호를 마진으로 바꾸고 철원으로 천도하였다.
사료에서 진성왕 즉위 5년에 선종이 죽주의 도적 기훤에게 의탁했다가 대우가 나쁘자 원회·신훤 등과 친구가 되었고, 임자년에 북원의 도적 양길에게 의탁했다고 하였다. 이 인물은 뒷날 후고구려를 세운 궁예이다.
궁예는 양길의 세력을 흡수해 강원·경기 일대를 장악하고 901년 송악에서 후고구려를 세웠다. 이어 904년 국호를 마진으로 바꾸고 연호를 무태라 하였으며, 905년 철원으로 도읍을 옮겼다. 뒤에는 국호를 다시 태봉으로 고쳤다.
고창 전투에서 고려군에 패하고 금성을 습격해 경애왕을 죽게 했으며 금산사에 유폐된 뒤 왕건에게 귀부한 인물은 견훤이고, 김흠돌 등 진골 세력을 숙청한 왕은 신라 신문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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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상황 이후에 일어난 사실로 옳은 것은? [2점]
대표적 친원 세력인 기철이 숙청되었다.
김윤후가 처인성에서 몽골군을 물리쳤다.
정중부 등이 정변을 일으켜 권력을 장악하였다.
최충이 9재 학당을 세워 유학 교육을 실시하였다.
만적을 비롯한 노비들이 신분 해방을 도모하였다.
사료는 왕이 원의 제도를 따라 변발과 호복 차림으로 앉아 있자 이연종이 "변발과 호복은 선왕의 제도가 아니니 본받지 마소서"라고 간언하였고, 왕이 기뻐하며 즉시 변발을 풀었다는 내용이다. 이는 즉위 직후 몽골식 풍습을 없애기 시작한 공민왕 때의 일이다.
공민왕은 이어 정동행성 이문소를 없애고 쌍성총관부를 공격해 철령 이북 땅을 되찾는 등 반원 자주 정책을 폈다. 그 과정에서 1356년 대표적 친원 세력이던 기철 일파를 숙청하였다.
김윤후의 처인성 승리(1232), 정중부 등의 무신 정변(1170), 최충의 9재 학당 설립(11세기), 만적의 신분 해방 운동(1198)은 모두 공민왕 즉위보다 앞선 시기의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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밑줄 그은 ‘이 자기’에 해당하는 문화유산으로 옳은 것은? [1점]
설명에서 이 자기는 고려 시대에 상감 기법으로 제작되었으며, 상감은 겉면을 파낸 자리에 백토나 흑토를 메워 무늬를 내는 방식이라고 하였다. 따라서 찾아야 할 유물은 상감 청자이다.
보기 가운데 어깨가 벌어지고 아래로 갈수록 좁아지는 매병 형태에 비취색 유약을 입히고, 몸체 전면에 백토로 상감한 넝쿨·꽃무늬를 촘촘히 새기며 굽 둘레에 연꽃잎 띠를 두른 청자가 이에 해당한다.
나머지는 무늬 없이 흰 빛만 살린 조선 백자 항아리, 무늬를 넣지 않고 참외 모양 굴곡만 살린 순청자 병, 붉은 갈색 안료로 무늬를 그린 철화 백자 항아리, 푸른 안료로 그림을 그린 청화 백자 항아리로 모두 상감 기법과는 거리가 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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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라)를 일어난 순서대로 옳게 나열한 것은? [3점]
(가)-(나)-(다)-(라)
(가)-(나)-(라)-(다)
(나)-(가)-(다)-(라)
(나)-(가)-(라)-(다)
(다)-(가)-(나)-(라)
제시된 네 자료는 모두 고려 시대의 정치 상황이다. (가)는 최우가 자기 집에 정방(政房)을 설치해 백관의 인사를 심사하고 왕은 명단을 승인만 했다는 내용으로, 최씨 무신 정권이 인사권을 장악한 1225년의 일이다. (나)는 후주 출신 쌍기의 건의로 과거 제도를 도입하고 그가 지공거가 되어 진사를 선발했다는 내용으로, 광종 9년(958년)에 해당한다.
(다)는 신돈이 전민변정도감 설치를 청하고 스스로 판사가 되어 빼앗긴 토지와 노비를 주인에게 돌려주었다는 내용으로, 공민왕 15년(1366년)의 개혁이다. (라)는 남의 땅을 빼앗은 기삼만을 잡아 가두어 죽게 한 정치도감 관원을 정동행성 이문소가 가둔 사건으로, 충목왕 3년(1347년)에 설치된 정치도감이 원의 간섭 기구인 이문소에 의해 좌절된 장면이다.
따라서 시간 순서는 광종의 과거제 도입(958) → 최우의 정방 설치(1225) → 정치도감과 이문소의 충돌(1347) → 신돈의 전민변정도감(1366)이 된다. 고려 전기의 왕권 강화, 무신 집권기, 원 간섭기, 공민왕의 반원 개혁이라는 큰 흐름으로 묶어 두면 순서를 쉽게 잡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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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사의 질문에 대한 학생의 답변으로 옳은 것은? [2점]
기전체 형식으로 서술하였습니다.
조선 건국의 정통성을 강조하였습니다.
남북국이라는 용어를 처음 사용하였습니다.
단군 조선에서 고려까지의 역사를 정리하였습니다.
불교사를 중심으로 고대의 민간 설화 등을 수록하였습니다.
화면에 제시된 글은 「진삼국사표(進三國史表)」로, "신라, 고구려, 백제가 기틀을 잡고 세 세력이 서로 대립하면서 …… 본기 28권, 연표 3권, 지(志) 9권, 열전 10권을 찬술하였습니다"라고 밝히고 있다. 이 글을 왕에게 올린 인물은 김부식이며, 함께 올린 역사서가 인종 때 왕명을 받아 편찬한 『삼국사기』이다.
본기·연표·지·열전으로 편(篇)을 나눈 구성 자체가 곧 답의 근거다. 이렇게 인물과 제도를 항목별로 나누어 서술하는 방식을 기전체라 하며, 『삼국사기』는 우리나라에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기전체 역사서다. 본기 28권·연표 3권·지 9권·열전 10권을 합한 총 50권으로, 유교적 합리주의 사관에 입각해 서술되었다.
나머지 설명은 다른 역사서에 해당한다. 남북국이라는 용어를 처음 쓴 것은 유득공의 『발해고』, 단군 조선부터 고려까지를 정리한 것은 『동국통감』, 불교사를 중심으로 고대 민간 설화를 수록한 것은 일연의 『삼국유사』, 조선 건국의 정통성을 강조한 것은 조선 초 정도전 등이 편찬한 『고려국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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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상황이 나타난 시기를 연표에서 옳게 고른 것은? [2점]
(가)
(나)
(다)
(라)
(마)
제시된 『고려사』 기록은 "거란군이 귀주를 지날 때, 강감찬 등이 동쪽 교외에서 맞아 싸웠다 …… 살아서 돌아간 자가 겨우 수천 명이었으니, 거란의 패배가 이토록 심한 적이 없었다"라는 내용으로, 1019년 귀주 대첩을 가리킨다. 거란의 3차 침입을 강감찬이 귀주에서 크게 격파한 사건이다.
연표는 918년 고려 건국 - 993년 서희의 외교 담판 - 1104년 별무반 조직 - 1170년 무신 정변 - 1232년 강화 천도 - 1270년 개경 환도로 구간이 나뉘어 있다. 1019년은 서희의 외교 담판(993)과 별무반 조직(1104) 사이에 놓이므로, 그 두 사건 사이의 구간이 정답이 된다.
거란과의 관계는 993년 1차 침입(서희의 담판, 강동 6주 획득) → 1010년 2차 침입(양규의 활약) → 1018~1019년 3차 침입(강감찬의 귀주 대첩) 순으로 이어지며, 이후 개경에 나성을 쌓고 천리장성을 축조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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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 지역에서 있었던 사실로 옳은 것은? [2점]
인조가 피신하여 청군에 향전하였다.
오페르트가 남연군 묘 도굴을 시도하였다.
정약용이 유배 중에 경세유표를 저술하였다.
김광제 등의 발의로 국채 보상 운동이 일어났다.
노동자 강주룡이 을밀대 지붕에서 고공 농성을 벌였다.
답사 계획서의 경로는 2·28 기념 중앙 공원 → 경상 감영 공원 → 달성 공원 내 최제우 동상 → 민족 저항 시인 이상화 고택이다. 2·28 민주 운동이 일어난 곳, 조선 시대 경상 감영이 있던 곳, 동학을 창시한 최제우가 처형된 곳, 시인 이상화가 살던 곳을 모두 만족하는 지역은 대구이다.
대구에서는 1907년 김광제·서상돈 등의 발의로 국채 보상 운동이 시작되었다. 일본에서 도입한 차관 1,300만 원을 국민의 모금으로 갚자는 운동으로, 대한매일신보 등 언론의 후원을 받아 전국으로 확산되었으나 통감부의 방해로 좌절되었다.
나머지 사실은 각각 다른 지역의 일이다. 인조가 피신해 청군에 항전한 곳은 남한산성, 오페르트가 남연군 묘 도굴을 시도한 곳은 덕산(예산), 정약용이 유배 중 『경세유표』를 저술한 곳은 강진, 강주룡이 을밀대 지붕에서 고공 농성을 벌인 곳은 평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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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마)에 대한 설명으로 옳은 것은? [2점]
(가) - 영국이 러시아의 남하를 구실로 불법 점령하였다.
(나) - 통일 신라 때 장보고가 청해진을 설치하였다.
(다) - 6ㆍ25 전쟁 때 포로 수용소가 설치되었다.
(라) - 러시아가 저탄소 설치를 명분으로 조차를 요구하였다.
(마) - 삼별초가 용장성을 쌓고 몽골에 대항하였다.
지도에 표시된 다섯 섬은 서쪽부터 (가) 진도, (나) 완도, (다) 거문도, (라) 거제도, (마) 영도이다. 각 섬에서 있었던 대표적인 사건을 짝지어야 한다.
이 가운데 옳게 연결된 것은 완도에 관한 설명이다. 통일 신라 흥덕왕 때 장보고가 완도에 청해진을 설치하여 해적을 소탕하고 당·신라·일본을 잇는 해상 무역을 장악하였다.
나머지는 섬이 서로 어긋나 있다. 영국이 러시아의 남하를 구실로 불법 점령한 곳은 거문도(1885~1887), 6·25 전쟁 때 포로 수용소가 설치된 곳은 거제도, 러시아가 저탄소 설치를 명분으로 조차를 요구한 곳은 부산 앞의 영도(절영도), 삼별초가 용장성을 쌓고 몽골에 대항한 곳은 진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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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장면에 등장하는 왕의 재위 기간에 있었던 경제 모습으로 옳은 것은? [2점]
해동통보가 주조되어 유통되었다.
전환국에서 백동화가 발행되었다.
중국 화폐인 명도전, 반량전이 널리 사용되었다.
공인이 상평통보를 사용하여 물품을 조달하였다.
궁궐 중건 비용을 마련하기 위해 당백전을 발행하였다.
그림 속 왕은 신하들에게 "나의 아우인 의천이 화폐를 사용하면 쌀 운반의 수고를 덜고 …… 녹봉 지급과 국가 재정 관리에 편리하다고 건의하였다. 이제 주전도감에서 화폐를 발행하도록 하라"고 명하고 있다. 대각국사 의천의 형이자 주전도감을 설치한 왕은 고려 숙종이다.
숙종 대에는 주전도감에서 해동통보를 비롯해 해동중보·삼한통보 등의 동전과 은병(활구)이 주조되어 유통이 시도되었다. 다만 자급자족적 경제 구조 탓에 화폐 사용은 널리 정착하지 못하였다.
다른 화폐들은 시기가 다르다. 전환국에서 발행한 백동화는 개항기, 명도전·반량전은 철기 시대의 중국 화폐, 공인이 사용한 상평통보와 궁궐 중건용 당백전은 각각 조선 후기와 흥선 대원군 집권기의 일이다.
내용에 오류가 있거나 최신 법령·기준과 다른 부분이 보이면 알려주세요. 확인 후 반영하겠습니다.
밑줄 그은 ‘왕’의 재위 기간에 있었던 사실로 옳은 것은? [2점]
최충헌이 봉사 10조를 올렸다.
명학소의 망이ㆍ망소이가 봉기하였다.
최무선의 건의로 화통도감이 설치되었다.
강조가 정변을 일으켜 김치양을 제거하였다.
묘청이 수도를 서경으로 옮길 것을 주장하였다.
제시된 『고려사』 기록은 금을 섬기는 문제를 백관에게 의논하게 하니 모두 반대했으나, 이자겸과 척준경만이 "작은 나라로서 큰 나라를 섬기는 것은 선왕의 도리"라며 사대를 주장했고 왕이 이를 따랐다는 내용이다. 이 왕은 고려 인종이며, 금의 사대 요구 수용은 1126년의 일이다.
인종 때에는 이자겸의 난(1126)이 진압된 뒤, 묘청과 정지상 등 서경 세력이 풍수지리설을 내세워 수도를 서경으로 옮길 것과 금 정벌·칭제건원을 주장하였다. 이것이 받아들여지지 않자 1135년 서경에서 난을 일으켰고, 김부식이 이끄는 관군에게 진압되었다.
나머지는 다른 왕의 재위 기간에 해당한다. 최충헌의 봉사 10조와 망이·망소이의 봉기는 무신 집권기, 최무선의 건의로 화통도감을 설치한 것은 우왕 때, 강조의 정변은 목종 때의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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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 (나) 사이의 시기에 있었던 사실로 옳은 것은? [3점]
녹읍을 폐지하고 관료전을 지급하였다.
조준 등의 건의로 과전법을 제정하였다.
양지아문을 설치하여 양전 사업을 실시하였다.
공로와 인품에 따라 역분전을 차등 지급하였다.
직전법을 실시하여 현직 관리에게만 수조권을 지급하였다.
(가)는 "대군이 압록강을 건너 위화도에 머물렀다 …… 태조가 회군한다는 소식을 듣고는 사람들이 다투어 모여들었다"는 기록으로, 1388년 이성계의 위화도 회군이다. (나)는 신료들이 왕위에 오를 것을 권하여 태조가 수창궁으로 행차해 즉위하고 신하들의 하례를 받았다는 기록으로, 1392년 조선 건국을 가리킨다.
두 사건 사이인 1391년, 조준 등의 건의로 과전법이 제정되었다. 권문세족의 대농장을 혁파하고 경기 지역 토지의 수조권을 전·현직 관리에게 지급한 제도로, 신진 사대부의 경제 기반을 마련하며 조선 건국의 토대가 되었다.
나머지 토지 제도는 시기가 다르다. 관료전 지급과 녹읍 폐지는 통일 신라 신문왕 때, 역분전은 고려 태조 때, 직전법은 조선 세조 때, 양지아문을 통한 양전 사업은 대한 제국의 광무개혁 때 시행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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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검색창에 들어갈 인물에 대한 설명으로 옳은 것은? [2점]
갑술환국으로 정계에서 축출되었다.
반정 공신의 위훈 삭제를 주장하였다.
무오사화의 발단이 된 조의제문을 작성하였다.
색경을 저술하여 농업 기술 발전에 이바지하였다.
양명학을 연구하여 강화 학파 형성의 기초를 마련하였다.
검색 결과는 "조선 시대에 활동했던 문신 겸 학자로 영남 학파의 종조(宗祖)로 불린다. 호는 점필재이며, 성종의 신임을 받아 홍문관 부제학, 승정원 도승지, 이조 참판 등 요직을 두루 거쳤다. 그의 학통을 이은 사람으로는 정여창, 김굉필, 김일손 등이 있다"고 설명하고 있다. 관련 이미지로 제시된 예림 서원과 추원재도 함께 단서가 된다. 이 인물은 김종직이다.
김종직이 지은 「조의제문」은 항우에게 죽은 초나라 의제를 조문하는 형식을 빌려 세조의 왕위 찬탈을 비판한 글이다. 제자 김일손이 이를 사초에 실은 것이 빌미가 되어 1498년(연산군 4) 무오사화가 일어났고, 이미 세상을 떠난 김종직은 부관참시되었다.
나머지는 다른 인물의 행적이다. 갑술환국으로 축출된 것은 남인 세력, 반정 공신의 위훈 삭제를 주장한 것은 조광조, 『색경』을 저술한 것은 박세당, 강화 학파의 기초를 마련한 것은 정제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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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 신분에 대한 설명으로 옳은 것은? [1점]
소속 관청에 신공(身貢)을 바쳤다.
매매, 상속, 증여의 대상이 되었다.
원칙적으로 과거에 응시할 수 없었다.
장례원(掌隷院)을 통해 국가의 관리를 받았다.
조선 후기 시사(詩社)를 조직해 위항 문학 활동을 하였다.
대화에서 학생들은 "허생전에 나오는 변 부자는 조선 시대 역관 변승업의 할아버지를 모델로 했다", "변승업은 사역원 소속의 일본어 역관으로 큰 부자가 된 인물이다", "변승업과 같은 역관들이 속한 신분을 (가)라고 하는데 여기에는 의관, 천문관, 율관 등도 포함된다"고 말하고 있다. 역관·의관·천문관·율관 등 기술관을 아우르는 신분은 중인이다.
중인은 잡과를 통해 관직에 나아가 전문 기술직을 세습하였고, 관청 실무를 담당하는 서리·향리와 서얼도 넓은 의미의 중인에 포함되었다. 조선 후기에는 역관들이 대외 무역으로 부를 축적하고 서양 문물을 들여오며 사회적 영향력을 키웠다.
이들은 조선 후기에 시사(詩社)를 조직해 위항(委巷) 문학 활동을 펼쳤고, 신분 상승을 요구하는 대규모 소청 운동을 벌이기도 하였다. 반면 소속 관청에 신공을 바치거나 매매·상속·증여의 대상이 되고 장례원의 관리를 받은 것은 노비에 해당하며, 원칙적으로 과거에 응시할 수 없었던 것도 중인이 아니라 천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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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상황이 나타난 시기를 연표에서 옳게 고른 것은? [1점]
(가)
(나)
(다)
(라)
(마)
제시된 상황은 정도전·남은·심효생 등이 여러 왕자를 해치려다 실패해 참형을 당하고, 정안군이 백관을 거느리고 상소를 올려 영안군을 세자로 삼기를 청한 장면이다. 이는 이방원이 세자 방석과 정도전 세력을 제거하고 둘째 형 방과(정종)를 세자로 세운 제1차 왕자의 난(무인정사, 1398년)에 해당한다.
연표는 1374년 우왕 즉위 — (가) — 1392년 조선 건국 — (나) — 1418년 세종 즉위 — (다) — 1453년 계유정난 — (라) — 1485년 경국대전 반포 — (마) — 1519년 기묘사화로 구성되어 있다.
따라서 1398년은 조선 건국(1392)과 세종 즉위(1418) 사이 구간에 놓인다. 왕자의 난은 조선 건국 직후 태조 재위 말기에 벌어진 사건이므로, 건국과 세종 즉위 사이의 시기를 고르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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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일기의 훼손된 부분에 해당하는 시기의 사실로 옳은 것은? [2점]
이순신이 한산도 대첩에서 승리하였다.
정발이 부산진성 전투에서 전사하였다.
휴전 회담의 결렬로 정유재란이 시작되었다.
명의 요청으로 강홍립의 부대가 파견되었다.
정봉수와 이립이 의병을 이끌고 활약하였다.
일기의 왼쪽 면은 임진년(1592년)의 기록으로, 왕이 세자에게 평안북도 강계로 가서 정국을 수습하라 이르고 자신은 의주로 향해 "조선에 두 개의 조정이 있게 되었다"고 적고 있다. 이는 선조가 의주로 피란하면서 광해군에게 분조(分朝)를 맡긴 상황이다.
오른쪽 면은 계사년(1593년)의 기록으로, 조·명 연합군의 평양성 탈환 소식이 분조에 전해졌다는 내용이다. 따라서 훼손된 부분은 1592년 분조 구성 이후부터 1593년 초 평양성 탈환 이전까지의 시기에 해당한다.
이 시기의 사실로는 이순신이 한산도에서 학익진으로 일본 수군을 크게 무찌른 한산도 대첩(1592년 7월)이 있다. 반면 정발의 부산진성 전사는 개전 직후인 1592년 4월로 분조보다 앞서고, 정유재란은 1597년, 강홍립 부대 파병은 1619년 광해군 대, 정봉수·이립의 활약은 1627년 정묘호란 때의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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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에 들어갈 문화유산으로 옳은 것은? [2점]
안내판의 설명은 (가)가 국보 제55호이며 현존하는 유일한 조선 시대 목탑으로, 임진왜란 때 불타 없어졌다가 인조 때 다시 조성되었다고 밝히고 있다. 가람 배치도에는 석련지(국보 제64호)와 쌍사자 석등(국보 제5호)이 함께 표시되어 있는데, 이 셋을 모두 보유한 절은 속리산 법주사이다.
따라서 (가)에 들어갈 문화유산은 법주사 팔상전이다. 5층 목탑 형태로 내부에 석가모니의 생애를 여덟 장면으로 그린 팔상도가 봉안되어 있으며, 법주사는 유네스코 세계유산 '산사, 한국의 산지승원'에 등재되었다.
보기에 함께 제시된 마곡사 대웅보전, 금산사 미륵전, 화엄사 각황전, 무량사 극락전은 모두 조선 후기를 대표하는 중층 불전 건축이지만 목탑이 아니므로 조건에 맞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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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상황 이후에 전개된 사실로 옳은 것은? [3점]
공신 책봉 문제로 이괄의 난이 일어났다.
정여립 모반 사건으로 옥사가 발생하였다.
허적과 윤휴 등 남인들이 대거 축출되었다.
북인이 서인과 남인을 배제하고 권력을 장악하였다.
인현 왕후가 폐위되고 희빈 장씨가 왕비로 책봉되었다.
제시된 자료에서 임금은 송시열이 산림의 영수로서 원자의 명호를 정한 것이 이르다고 한 일을 문제 삼아 삭탈관작하고 성문 밖으로 내치라 명하고 있다. 이는 숙종이 희빈 장씨 소생을 원자로 삼는 데 반대한 서인을 축출한 기사환국(1689년)의 상황이다.
기사환국으로 서인이 몰락하고 남인이 정권을 잡았으며, 그 연장선에서 인현 왕후가 폐위되고 희빈 장씨가 왕비로 책봉되었다. 송시열도 결국 사사되었다.
한편 허적과 윤휴 등 남인이 대거 축출된 경신환국은 1680년으로 이보다 앞서며, 이괄의 난은 1624년 인조 대, 정여립 모반 사건에 따른 기축옥사는 1589년 선조 대, 북인의 권력 장악은 광해군 대의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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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 서적이 편찬된 시기의 경제 상황으로 옳지 않은 것은? [2점]
개시 무역과 후시 무역이 이루어졌다.
담배, 면화와 같은 상품 작물이 재배되었다.
시장을 관리하기 위한 동시전이 설치되었다.
송상, 만상이 대청 무역으로 부를 축적하였다.
모내기법의 확대로 벼와 보리의 이모작이 확산되었다.
대화에서 유수원이 편찬한 (가) 서적은 우서(迂書)이다. 그는 상공업의 진흥을 강조하고 양반도 농업과 상공업에 종사할 수 있도록 사회 분위기를 바꾸어야 한다며 사농공상의 직업적 평등과 전문화를 주장하였다.
유수원은 18세기 영조 대에 활동한 중상학파 실학자로, 우서가 편찬된 시기는 조선 후기에 해당한다. 이 시기에는 개시·후시 무역이 이루어지고 담배·면화 등 상품 작물이 재배되었으며, 송상과 만상이 대청 무역으로 부를 쌓고 모내기법 확대로 벼와 보리의 이모작이 퍼졌다.
반면 시장 감독 기구인 동시전은 신라 지증왕 때 수도의 시장을 관리하기 위해 설치한 관청이므로, 조선 후기의 경제 상황으로 볼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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밑줄 그은 ‘이 왕’의 업적으로 옳은 것은? [2점]
집현전을 계승한 홍문관을 설치하였다.
군역의 부담을 줄이고자 균역법을 제정하였다.
초계문신제를 실시하여 문신들을 재교육하였다.
붕당의 폐해를 경계하기 위해 탕평비를 건립하였다.
삼정의 문란을 해결하기 위해 삼정이정청을 설치하였다.
화면 속 만석거(萬石渠)는 밑줄 그은 '이 왕'이 수원 화성을 건립하면서 축조한 수리 시설로, 수갑(水閘)과 수도(水道)를 갖춘 기술적 혁신성과 식량 생산 기여를 인정받아 2017년 세계 관개 시설물 유산으로 등재되었다고 설명하고 있다.
수원 화성을 축조하고 그 일대에 만석거·축만제 등 저수지를 만들어 둔전을 경영한 왕은 정조이다. 정조는 규장각을 정비하고 장용영을 설치하는 등 왕권 강화 정책을 폈다.
정조의 업적으로는 초계문신제를 실시해 젊은 문신들을 규장각에서 재교육한 것이 있다. 홍문관 설치는 성종, 균역법 제정과 탕평비 건립은 영조, 삼정이정청 설치는 철종 때의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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밑줄 그은 ‘임금’이 재위했던 시기의 사실로 옳은 것은? [3점]
신유박해로 천주교인들이 처형되었다.
사림이 동인과 서인으로 나뉘게 되었다.
홍경래 등이 봉기하여 정주성을 점령하였다.
외척 간의 대립으로 을사사화가 발생하였다.
자의 대비의 복상 문제로 예송이 전개되었다.
대화에 나오는 양재역 벽서는 "대비께서 권력을 잡고 간신이 설치니 나라가 망한다"는 내용의 익명서로, 이를 빌미로 이기·윤원형 등이 반대 세력을 숙청한 양재역 벽서 사건(1547년)을 가리킨다. 여기서 대비는 문정 왕후이며, 밑줄 그은 임금은 명종이다.
명종 즉위 직후에는 문정 왕후의 동생 윤원형을 중심으로 한 소윤이 인종의 외척인 윤임 세력(대윤)을 제거한 을사사화(1545년)가 일어났다. 양재역 벽서 사건은 그 여파로 잔여 세력까지 축출한 사건이다.
한편 신유박해는 1801년 순조, 사림의 동인·서인 분화는 1575년 선조, 홍경래의 난과 정주성 점령은 1811년 순조, 자의 대비 복상 문제로 인한 예송은 현종 때의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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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에 들어갈 세시 풍속으로 옳은 것은? [2점]
동지
한식
칠석
유두
삼짇날
안내문은 (가)가 음력 6월 보름날이며 이날 동쪽으로 흐르는 물에 머리를 감으면 나쁜 기운이 물러가고 더위를 타지 않는다고 설명한다. 이 풍속이 바로 유두(流頭)로, '동류수두목욕(東流水頭沐浴)'에서 이름이 유래하였다.
체험 프로그램에도 유두의 특징이 그대로 담겨 있다. 햇밀로 만든 구슬 모양의 오색면을 색실에 꿰어 허리에 매달아 액운을 막는 놀이와, 찹쌀가루·밀가루로 경단을 만들어 얼음 꿀물에 넣어 먹는 수단(水團)은 모두 유두의 대표적인 절식과 세시 행사다.
참고로 동지는 양력 12월 무렵 팥죽을 먹는 날, 한식은 동지로부터 105일째로 찬 음식을 먹고 성묘하는 날, 칠석은 음력 7월 7일, 삼짇날은 음력 3월 3일이므로 6월 보름과는 맞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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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 (나) 조약에 대한 설명으로 옳은 것은? [2점]
(가) - 임오군란을 계기로 체결되었다.
(가) - 최혜국 대우를 처음으로 규정하였다.
(나) - 조선책략의 영향으로 체결되었다.
(나) - 거중 조정에 대한 내용을 포함하였다.
(가), (나) - 조ㆍ일 수호 조규의 후속 조치로 체결되었다.
(가)의 제7관은 일본국 인민이 본국 화폐로 조선국 인민의 물품과 교환할 수 있고 조선인은 그 화폐로 일본 상품을 살 수 있다는 조항으로, 조·일 수호 조규 부록(1876년)의 일본 화폐 유통 규정이다.
(나)의 제6칙은 조선국 항구에 거주하는 일본 인민이 양미와 잡곡을 수출·수입할 수 있다는 조항으로, 무관세와 양곡의 무제한 유출을 허용한 조·일 무역 규칙(통상 장정, 1876년)의 내용이다.
두 조약은 모두 1876년 조·일 수호 조규(강화도 조약) 체결 직후 그 세부 사항을 정하기 위해 맺어진 후속 조치라는 공통점이 있다. 반면 임오군란을 계기로 체결된 것은 제물포 조약과 조·청 상민 수륙 무역 장정이고, 최혜국 대우를 처음 규정하고 거중 조정 조항을 담았으며 조선책략의 영향을 받은 것은 1882년 조·미 수호 통상 조약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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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자료에 나타난 사건 이후의 사실로 옳은 것은? [2점]
민영환, 조병세 등이 자결로써 항거하였다.
13도 창의군이 서울 진공 작전을 전개하였다.
메가타가 주도한 화폐 정리 사업이 시작되었다.
고종이 헤이그 만국 평화 회의에 특사를 파견하였다.
구식 군대가 난을 일으켜 일본 공사관을 습격하였다.
대한매일신보 기사는 군부 대신과 하세가와 대장이 통감부에 모여 한국 군대를 해산하기로 결정하고, 총리와 법부 대신이 황제에게 아뢴 뒤 조칙을 반포했다는 내용이다. 이는 한·일 신협약(정미 7조약)에 따라 단행된 대한 제국 군대 해산(1907년 8월)이다.
해산된 군인들이 의병에 합류하면서 의병 전쟁은 전국적인 규모로 확대되었고, 이듬해 이인영을 총대장으로 한 13도 창의군이 서울 진공 작전을 전개하였다.
나머지는 모두 군대 해산 이전의 일이다. 민영환·조병세의 자결 항거와 메가타가 주도한 화폐 정리 사업은 1905년, 헤이그 만국 평화 회의 특사 파견은 1907년 6월로 군대 해산의 직접적 계기가 된 사건이며, 구식 군대가 일본 공사관을 습격한 임오군란은 1882년에 일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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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 단체에 대한 설명으로 옳은 것은? [1점]
연통제를 통해 독립운동 자금을 모았다.
일제의 황무지 개간권 요구를 저지하였다.
중추원 개편을 통해 의회 설립을 추진하였다.
복벽주의를 내세우며 의병 전쟁을 준비하였다.
남만주 삼원보에 독립운동 기지를 건설하였다.
제시된 자료는 안창호·양기탁·이승훈이 중심이 되어 조직한 비밀 결사 단체로, 국권을 회복한 뒤 공화 정체의 국가를 수립하려 했고 그 방법으로 실력 양성과 국민의 각성을 강조했다고 설명한다. 이 조건에 모두 부합하는 단체는 1907년에 결성된 신민회이다.
신민회는 대성 학교·오산 학교를 세워 인재를 기르고 자기 회사·태극 서관을 운영해 산업과 문화 방면의 실력을 다지는 한편, 국외에 독립운동 기지를 만들어 장기적인 무장 투쟁을 준비하였다. 그 결실이 남만주 삼원보에 세운 한인 정착지와 신흥 강습소(뒤의 신흥 무관 학교)이다.
연통제는 대한민국 임시 정부의 비밀 행정 조직이고, 황무지 개간권 요구 저지는 보안회, 중추원을 개편해 의회를 세우려 한 것은 독립 협회의 활동이다. 또한 신민회는 왕정 복고를 뜻하는 복벽주의가 아니라 공화정을 지향했다는 점에서 독립 의군부 계열과 구별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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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 사건에 대한 설명으로 옳은 것은? [2점]
김옥균, 박영효 등이 주도하였다.
김기수를 수신사로 일본에 파견하였다.
구본신참에 입각한 개혁을 추진하였다.
개화 정책을 총괄하는 통리기무아문을 설치하였다.
개혁의 기본 방향을 제시한 홍범 14조를 반포하였다.
동영상 제작 계획안은 제목을 ‘개화당, 새로운 세상을 꿈꾸다’로 달고, 장면 구성으로 박규수의 사랑방에 젊은이들이 모인 장면, 우정총국 개국 축하연 때의 거사 장면, 거사 실패 후 주요 인물이 일본으로 망명하는 장면을 들고 있다. 이는 1884년의 갑신정변을 가리킨다.
갑신정변은 급진 개화파가 일으킨 정변으로, 김옥균·박영효를 비롯해 홍영식·서광범·서재필 등이 주도하였다. 이들은 우정총국 개국 축하연을 틈타 정변을 일으키고 개혁 정강을 발표했으나 청군의 개입으로 3일 만에 무너졌고, 주동자들은 일본으로 망명하였다.
수신사 김기수 파견(1876)과 통리기무아문 설치(1880)는 갑신정변 이전의 개화 정책이며, 홍범 14조 반포는 제2차 갑오개혁, 구본신참은 대한 제국의 광무개혁 원칙으로 모두 시기와 성격이 다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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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 운동에 대한 설명으로 옳은 것은? [1점]
을사늑약에 반발하여 봉기하였다.
백낙신의 탐학이 발단이 되어 일어났다.
집강소를 중심으로 폐정 개혁안을 실천하였다.
유계춘을 중심으로 봉기하여 진주성을 점령하였다.
홍의장군으로 불린 곽재우가 의병장으로 활약하였다.
부패한 지배층과 외세의 침략에 맞서 봉기하였고 전봉준 공초·갑오군정실기·사발통문이 관련 기록물로 제시된 것으로 보아 (가)는 동학 농민 운동이다. 동학 농민군은 전주 화약 이후 전라도 일대에 집강소를 설치하고 폐정 개혁안을 실천하였다. 황무지 개간권 요구 저지는 보안회, 남한 대토벌 작전의 피해는 정미의병, 박규수의 안핵사 파견은 임술 농민 봉기와 관련된 사실이다.
내용에 오류가 있거나 최신 법령·기준과 다른 부분이 보이면 알려주세요. 확인 후 반영하겠습니다.
다음 기사에 보도된 사건에 대한 설명으로 옳은 것은? [2점]
순종의 인산일을 계기로 일어났다.
일제의 무단 통치를 완화시키는 배경이 되었다.
대한민국 임시 정부가 수립되는 계기가 되었다.
대한매일신보의 후원 속에 전국적으로 확산되었다.
전국 각지에서 일어난 동맹 휴학의 도화선이 되었다.
기사는 ‘광주고보, 중학생 충돌 사건’이라는 제목 아래, 광주역 부근에서 광주 공립 고등 보통학교 학생과 광주 일본인 중학교 학생 각 300여 명이 충돌해 수십 명의 부상자가 났고, 이후 고등 보통학교 학생들이 막대를 어깨에 메고 시내에서 시위를 벌여 두 학교가 6일까지 사흘 동안 임시 휴교했다고 전한다. 1929년 광주 학생 항일 운동의 발단 국면이다.
이 충돌은 곧 식민지 차별 교육에 대한 저항으로 번져 광주 지역 학생들의 대규모 시위가 일어났고, 이듬해까지 전국 각지의 동맹 휴학과 시위로 확산되었다. 신간회가 진상 조사단을 파견하고 민중 대회를 계획한 것도 이 사건을 계기로 한 일이다.
순종의 인산일을 계기로 일어난 것은 6·10 만세 운동이고, 무단 통치를 이른바 문화 통치로 바꾸게 하고 대한민국 임시 정부 수립의 계기가 된 것은 3·1 운동이다. 대한매일신보의 후원으로 확산된 운동은 1907년 국채 보상 운동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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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 (나) 사이의 시기에 볼 수 있는 모습으로 가장 적절한 것은? [3점]
영화 아리랑을 관람하는 교사
관민 공동회에서 연설하는 백정
육영 공원에서 영어를 배우는 학생
경부선 기차를 타고 부산으로 가는 기자
근우회가 주최한 강연회에 참석하는 노동자
(가)는 천지에 고하는 제사를 지내고 심순택이 백관을 거느린 채 “제례를 마쳤으므로 황제의 자리에 오르소서”라고 아뢰어 임금이 황제의 자리에 올랐다는 「고종실록」 기사로, 1897년 10월 대한 제국 선포 때의 환구단 의식이다. (나)는 대한국 국제(國制)를 상의·확정해 국제 1편을 정하여 본국의 정치와 군권이 어떤 것인지 밝히겠다는 내용으로, 1899년 대한국 국제 반포에 해당한다.
따라서 두 자료 사이는 1897년 10월부터 1899년 8월까지의 짧은 기간이다. 이 시기에 독립 협회는 1898년 관민 공동회를 열어 헌의 6조를 결의하였고, 이때 백정 출신 박성춘이 개막 연설에 나선 일은 신분 차별이 무너지던 상징적 장면으로 꼽힌다.
나머지는 시기가 어긋난다. 육영 공원은 1886년에 세워져 1894년에 문을 닫았고, 경부선 개통은 1905년, 나운규의 영화 아리랑 개봉은 1926년, 근우회 창립은 1927년의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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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 종교의 활동으로 옳은 것은? [2점]
개벽, 신여성 등의 잡지를 발행하였다.
만세보를 발행하여 민중 계몽에 힘썼다.
여성 교육을 위해 이화 학당을 설립하였다.
중광단을 조직하여 무장 투쟁을 전개하였다.
박중빈을 중심으로 새생활 운동을 추진하였다.
자료는 대한 제국 육군 무관 학교 출신의 독립운동가 김혁(1875~1939)이 나철이 창시한 종교에 귀의하였고, 자유시 참변 이후 북만주 일대의 독립운동 단체를 통합해 신민부를 조직하고 성동 사관학교를 세워 부교장 김좌진과 함께 독립군을 길렀다고 소개한다. 나철이 1909년에 중광한 이 종교는 대종교이다.
단군 신앙을 되살린 대종교는 교단 본부를 만주로 옮기고 무장 투쟁에 직접 뛰어들었다. 1911년 조직한 중광단은 3·1 운동 이후 북로 군정서로 발전하여 청산리 대첩의 주력이 되었으며, 김혁·김좌진 같은 인물이 그 흐름 위에 서 있다.
개벽·신여성 등의 잡지 발행과 만세보 간행은 천도교, 이화 학당 설립은 개신교 선교사(스크랜턴), 박중빈의 새생활 운동은 원불교의 활동이므로 이 종교와는 무관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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밑줄 그은 ‘사람’이 소속된 단체에 대한 설명으로 옳은 것은? [2점]
조선 혁명 선언을 활동 지침으로 삼았다.
윤봉길, 이봉창 등이 단원으로 활동하였다.
파리 강화 회의에 독립 청원서를 제출하였다.
신흥 무관 학교를 세워 독립군을 양성하였다.
독립군 비행사 육성을 위해 한인 비행 학교를 세웠다.
자료는 조선 총독부에 폭탄 두 개가 투척되어 비서과 부실에 던진 것은 터지지 않았고 회계 과장실에 던진 것은 폭발해 유리창이 부서지고 마루에 주먹이 들어갈 구멍이 뚫렸으며, 폭탄을 던진 사람은 즉시 자취를 감추어 탐색 중이라고 전한다. 1921년 총독부 청사에 폭탄을 던진 김익상의 의거로, 그가 속한 단체는 의열단이다.
의열단은 1919년 만주 지린에서 김원봉 등이 조직한 의열 투쟁 단체로, 1923년 신채호가 지은 조선 혁명 선언을 활동 지침으로 삼아 민중의 직접 혁명을 내세우고 조선 총독부·동양 척식 주식회사·종로 경찰서 등 식민 통치 기관을 공격 대상으로 삼았다.
윤봉길·이봉창이 활동한 단체는 김구가 조직한 한인 애국단이고, 파리 강화 회의에 독립 청원서를 낸 것은 신한청년당, 신흥 무관 학교 설립은 신민회 계열의 서간도 독립운동 세력, 한인 비행 학교 설립은 미주의 대한인 국민회 계열(노백린)의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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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자료에 나타난 상황 이후에 사실로 옳은 것은? [2점]
조선 농민 총동맹이 결성되었다.
사회주의 세력이 정우회 선언을 발표하였다.
대한민국 임시 정부가 건국 강령을 발표하였다.
독립군 연합 부대가 청산리에서 큰 승리를 거두었다.
노동 조건 개선을 요구하는 원산 노동자 총파업이 전개되었다.
자료는 중·일 전쟁이 시작된 이후 지금 막 두 번째 겨울을 났다고 밝히며 난방용 석탄과 연탄조차 구하기 어렵고 총독부가 주민들에게 갖고 있는 금붙이를 팔라고 요구해 아녀자들이 가보로 내려오던 패물을 내놓고 있다고 적은 「윤치호 일기」이다. 1937년 7월에 시작된 전쟁을 기준으로 하면 1938년 말~1939년 초의 상황으로, 전시 물자 수탈이 본격화되던 때이다.
이 시점 이후의 사실로 맞는 것은 대한민국 임시 정부의 건국 강령 발표이다. 임시 정부는 1941년 11월 조소앙의 삼균주의에 바탕을 둔 건국 강령을 공포하여 광복 후 세울 나라의 정치·경제·교육 원칙을 제시하였다.
나머지는 모두 그보다 앞선 일이다. 청산리 대첩은 1920년, 사회주의 세력의 정우회 선언은 1926년, 조선 농민 총동맹 결성은 1927년, 원산 노동자 총파업은 1929년에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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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 단체에 대한 설명으로 옳은 것은? [3점]
공화 정체의 국가 건설을 지향하였다.
대한민국 임시 정부의 주도로 결성되었다.
봉오동에서 일본군을 상대로 승리를 거두었다.
구미 위원부를 설치하여 외교 활동을 전개하였다.
중국군과 함께 영릉가 전투에서 큰 전과를 올렸다.
안내문은 총사령 박상진이 이끌었던 단체의 충청도 지부장 김한종 의사 순국 기념비를 소개하면서, 김한종이 군자금 모금을 방해한 아산 도고 면장 박용하 처단을 주도하다 체포되어 박상진과 함께 대구 형무소에서 순국하였다고 설명한다. 이 단체는 1915년 대구에서 결성된 대한 광복회이다.
대한 광복회는 총사령 박상진, 부사령 김좌진 체제로 전국에 지부를 두고 상덕태상회 같은 거점을 이용해 군자금을 모았으며, 친일 부호를 처단하는 의열 활동을 벌였다. 이전의 의병 계열 조직이 왕정 회복을 내세운 것과 달리 공화 정체의 국가 건설을 목표로 삼은 점이 가장 큰 특징이다.
대한민국 임시 정부의 주도로 결성된 조직이 아니며(임시 정부 수립은 1919년), 봉오동 전투는 대한 독립군, 구미 위원부 설치는 임시 정부, 영릉가 전투 승리는 조선 혁명군의 활동이므로 이 단체와는 관계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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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선언서가 발표된 시기를 연표에서 옳게 고른 것은? [2점]
(가)
(나)
(다)
(라)
(마)
선언서는 국민 대표 회의가 이천만 민중의 뜻에 바탕을 두어 국민적 대회합으로 최고의 권위를 지니며, 독립운동이 나아갈 방향을 확립하여 통일적 기관 아래 대업을 완성하겠다고 밝히고 있다. 이는 1923년 상하이에서 열린 국민 대표 회의의 선언이다.
연표는 1919년 대한민국 임시 정부 수립, 1925년 박은식 대통령 취임, 1931년 한인 애국단 조직, 1935년 한국 국민당 창당, 1940년 김구 주석 취임, 1945년 8·15 광복으로 이어진다. 1923년은 임시 정부 수립과 박은식 대통령 취임 사이의 구간에 놓인다.
이 회의는 외교 노선의 한계와 이승만의 위임 통치 청원을 둘러싼 갈등에서 비롯되었고, 임시 정부를 해체하고 새 정부를 세우자는 창조파와 조직을 고쳐 쓰자는 개조파가 맞서 성과 없이 결렬되었다. 그 결과 이승만이 탄핵되고 박은식이 뒤를 이으면서 임시 정부는 국무령 중심의 내각 책임제로 개편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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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문서가 작성된 당시에 실시된 일제의 정책으로 옳은 것은? [2점]
노동력 동원을 위해 국민 징용령을 시행하였다.
한국인에 한해 적용되는 조선 태형령을 공포하였다.
쌀 수탈을 목적으로 하는 산미 증식 계획을 실시하였다.
독립운동 탄압을 위한 조선 사상범 보호 관찰령을 공포하였다.
회사 설립 시 총독의 허가를 받도록 하는 회사령을 제정하였다.
문서는 사이토 마코토의 「조선 통치에 대하여」로, 지방 자치를 실시해 민의 창달을 꾀하고 교육 제도를 개정하며, 일본인과 조선인 사이의 차별 대우를 철폐하고 조선인 소장층 가운데 유력자를 군수·학교장 등에 발탁하겠다고 밝히고 있다. 3·1 운동 이후 1920년대에 시행된 이른바 문화 통치의 내용이다.
겉으로 내건 유화책과 달리 실제로는 친일 세력을 길러 민족을 분열시키려는 의도였고, 경제 면에서는 일본 본토의 식량 부족을 메우려고 1920년부터 산미 증식 계획을 추진하여 늘어난 생산량보다 많은 쌀을 실어 갔다. 그 결과 조선 농민의 식량 사정은 오히려 더 나빠졌다.
조선 태형령(1912)과 회사령(1910)은 1910년대 무단 통치기의 조치이고, 조선 사상범 보호 관찰령(1936)과 국민 징용령(1939)은 민족 말살 통치기의 조치이므로 이 문서가 작성된 시기와 맞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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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 단체에 대한 설명으로 옳은 것은? [1점]
민족 유일당 운동의 일환으로 결성되었다.
이상설, 이동휘를 정ㆍ부통령에 선임하였다.
일제가 조작한 105인 사건으로 조직이 해체되었다.
조선 총독부에 국권 반환 요구서를 발송하려 하였다.
오산 학교와 대성 학교를 세워 민족 교육을 실시하였다.
제시된 자료는 (가) 단체가 ‘정치적·경제적·사회적 각성을 촉진함’, ‘단결을 공고히 함’, ‘일체 기회주의를 부인함’이라는 3대 강령 아래 탄생하여 140개 지회와 39,000여 명의 회원을 포함한 단체가 되었다고 『동광』을 인용해 전하고 있습니다.
이 세 가지 강령과 전국적인 지회·회원 규모는 신간회를 가리키는 결정적 단서입니다. 신간회는 1927년 비타협적 민족주의 세력과 사회주의 세력이 손을 잡고 결성한 국내 최대의 항일 사회단체로, 자치론자 등 타협적 세력을 ‘기회주의’로 규정해 배격하였습니다.
따라서 옳은 설명은 민족 유일당 운동의 일환으로 결성되었다는 것입니다. 1920년대 후반 좌우 세력을 하나의 정당·단체로 묶으려는 민족 유일당 운동이 국내에서 결실을 맺은 형태가 바로 신간회였습니다.
나머지는 다른 단체의 사실입니다. 이상설·이동휘를 정·부통령에 선임한 것은 1914년 연해주에서 조직된 대한 광복군 정부, 105인 사건으로 해체되고 오산 학교·대성 학교를 세운 것은 신민회, 조선 총독부에 국권 반환 요구서를 발송하려 한 것은 독립 의군부의 활동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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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인물에 대한 설명으로 옳은 것은? [3점]
대조선 국민 군단을 조직하였다.
한국광복군 부사령관으로 활약하였다.
하얼빈 역에서 이토 히로부미를 사살하였다.
한국 독립군을 이끌고 쌍성보 전투에서 승리하였다.
일제의 패망과 광복에 대비하여 조선 건국 동맹을 결성하였다.
제시된 연보는 1919년 의열단 조직, 1932년 조선 혁명 간부 학교 설립, 1935년 민족 혁명당 조직, 1937년 조선 민족 전선 연맹 결성, 1938년 조선 의용대 창설, 1944년 대한민국 임시 정부 군무부장이라는 이력을 나열하고 있습니다.
의열단 창설에서 출발해 조선 의용대 창설과 임시 정부 군무부장으로 이어지는 이 경로는 김원봉의 활동 그 자체입니다. 그는 무장 투쟁 노선을 견지하면서도 1930년대 중반 이후에는 좌우 통합 정당과 연합 전선을 만드는 데 앞장섰습니다.
따라서 옳은 설명은 한국광복군 부사령관으로 활약하였다는 것입니다. 1942년 조선 의용대 병력 일부가 한국광복군에 합류하면서 김원봉은 광복군 부사령관 겸 제1지대장을 맡았습니다.
한편 대조선 국민 군단은 하와이에서 박용만이, 하얼빈 의거는 안중근이, 쌍성보 전투의 한국 독립군 지휘는 지청천이, 조선 건국 동맹 결성은 여운형이 한 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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밑줄 그은 ‘개헌안’의 시행 결과로 옳은 것은? [2점]
대통령 중심제가 의원 내각제로 바뀌었다.
통일 주체 국민 회의에서 대통령이 선출되었다.
개헌 당시의 대통령에 한하여 중임 제한이 철폐되었다.
선거인단이 선출하는 7년 단임의 대통령제가 실시되었다.
우리나라 최초의 보통 선거인 5ㆍ10 총선거가 실시되었다.
자료의 신문 기사와 담화는 국회 표결에서 민의원 재적수 203명 중 찬성 135표, 반대 60표, 기권 7, 결석 1이 나왔음에도 정부가 개헌안 통과를 인정했다고 전합니다. 3분의 2가 정확히 인데 단수(소수점 이하)는 계산에 넣지 않는다는 논리로 135표를 가결선으로 본 것입니다.
이것이 1954년의 이른바 사사오입 개헌입니다. 이므로 본래 가결에는 136표가 필요했지만, 정부와 여당은 소수점을 버림으로써 이미 내려진 부결 선포를 뒤집었습니다.
이 개헌의 핵심 내용은 초대 대통령에 한하여 3선 금지 조항을 적용하지 않는다는 것이었습니다. 즉 시행 결과로 개헌 당시의 대통령에 한하여 중임 제한이 철폐되었고, 이승만의 장기 집권이 제도적으로 가능해졌습니다.
참고로 의원 내각제로의 전환은 4·19 혁명 후 제3차 개헌, 통일 주체 국민 회의의 대통령 선출은 유신 헌법, 선거인단이 뽑는 7년 단임제는 1980년 제8차 개헌, 5·10 총선거는 제헌 국회 구성을 위한 선거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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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 (나) 문서가 작성된 사이의 시기에 있었던 사실로 옳은 것은? [3점]
한ㆍ미 상호 방위 조약이 체결되었다.
6ㆍ3 시위가 전개되고 비상 계엄령이 선포되었다.
경찰이 반민족 행위 특별 조사 위원회를 습격하였다.
평화 통일론을 주장한 진보당의 조봉암이 구속되었다.
유상 매수, 유상 분배 원칙의 농지 개혁법이 제정되었다.
(가)는 무상 원조를 두고 한국 측 3억 5천만 달러, 일본 측 2억 5천만 달러가 맞선 끝에 3억 달러를 10년에 걸쳐 공여하기로 하고, 수출입 은행 차관은 국교 정상화 이전이라도 협력하도록 양측 수뇌에게 건의한다는 내용입니다. 이는 1962년의 김종필·오히라 메모입니다.
(나)는 제1조에서 양 체약 당사국 간 외교 및 영사 관계 수립을, 제2조에서 1910년 8월 22일 및 그 이전에 체결된 모든 조약과 협정이 이미 무효임을 확인한 조문으로, 1965년 체결된 한일 기본 조약입니다.
따라서 두 문서 사이는 1962년부터 1965년까지의 시기입니다. 이 사이인 1964년, 굴욕적인 한일 회담에 반대하는 6·3 시위가 대규모로 일어나자 정부는 비상 계엄령을 선포하고 시위를 진압하였습니다.
나머지는 시기가 어긋납니다. 한·미 상호 방위 조약은 1953년, 반민족 행위 특별 조사 위원회 습격은 1949년, 진보당 조봉암 구속은 1958년, 농지 개혁법 제정은 1949년의 일입니다.
내용에 오류가 있거나 최신 법령·기준과 다른 부분이 보이면 알려주세요. 확인 후 반영하겠습니다.
다음 기사 내용이 보도된 정부 시기에 볼 수 있는 모습으로 옳은 것은? [2점]
경기장에서 프로 축구를 관람하는 회사원
개성 공단 착공식에 참석하고 있는 공무원
금융 실명제에 따라 신분증을 요구하는 은행 직원
거리에서 자를 들고 미니 스커트를 단속하는 경찰
외환 위기 극복을 위한 금 모으기 운동에 참여하는 학생
제시된 신문 기사는 긴급 조치 제9호의 후속 조치로 수립된 「공연물 및 가요 정화 대책」에 따라 한국 예술 문화 윤리 위원회가 국내 대중 가요 222곡을 금지곡으로 선정했다고 보도합니다. 선정 이유로 국가 안보 위협, 왜색 풍, 창법 저속, 불신 풍조 조장, 퇴폐성 등을 들었고, 이미자의 ‘기러기 아빠’, 김추자의 ‘거짓말이야’, 이장희의 ‘그건 너’, 신중현의 ‘미인’ 등이 예로 제시되었습니다.
긴급 조치 제9호는 1975년 유신 헌법에 근거해 발동된 것이므로, 이 기사는 박정희 정부의 유신 체제 시기에 보도된 것입니다. 이 시기에는 가요뿐 아니라 국민의 일상 풍속 전반이 국가의 통제 대상이 되었습니다.
따라서 이 시기에 볼 수 있는 모습은 거리에서 자를 들고 미니 스커트 길이를 단속하는 경찰입니다. 장발과 미니 스커트 단속은 경범죄 처벌법을 근거로 한 대표적인 유신 시기의 풍속 통제였습니다.
반면 프로 축구 출범은 1983년, 개성 공단 착공식은 2003년, 금융 실명제 실시는 1993년, 금 모으기 운동은 1998년의 일로 모두 이후 시기에 해당합니다.
내용에 오류가 있거나 최신 법령·기준과 다른 부분이 보이면 알려주세요. 확인 후 반영하겠습니다.
다음 선언문을 발표한 민주화 운동에 대한 설명으로 옳은 것은? [2점]
장면 내각이 출범하는 배경이 되었다.
5년 단임의 대통령 직선제 개헌을 이끌어 냈다.
3ㆍ15 부정 선거에 항의하는 시위에서 시작되었다.
신군부의 비상 계엄 확대가 원인이 되어 일어났다.
3ㆍ1 민주 구국 선언을 통해 긴급 조치 철폐 등을 요구하였다.
제시된 선언문은 “국민 합의를 배신한 4·13 호헌 조치는 무효임을 전 국민의 이름으로 선언한다”고 밝히면서, 40년 독재 정치를 청산하고 야만적인 고문으로 숨진 젊은이를 앞세워 국민을 속이려 한 현 정권에 맞서 4·13 폭거를 철회시키기 위한 민주 장정을 시작한다고 천명하고 있습니다.
4·13 호헌 조치와 고문 치사 사건(박종철 고문 치사)이 함께 언급된 점에서 이는 1987년 6월 민주 항쟁 당시 발표된 국민 운동 본부의 선언문입니다. 전두환 정부가 개헌 논의를 중단시키고 기존 헌법을 유지하겠다고 발표하자 전국적인 항쟁이 폭발하였습니다.
따라서 옳은 설명은 이 운동이 5년 단임의 대통령 직선제 개헌을 이끌어 냈다는 것입니다. 항쟁의 결과 6·29 민주화 선언이 발표되었고 그해 제9차 개헌으로 직선제가 도입되었습니다.
한편 장면 내각 출범의 배경이 되고 3·15 부정 선거 항의 시위에서 시작된 것은 4·19 혁명, 신군부의 비상 계엄 확대가 원인이 된 것은 5·18 민주화 운동, 3·1 민주 구국 선언은 유신 체제에 맞선 반유신 운동에 해당합니다.
내용에 오류가 있거나 최신 법령·기준과 다른 부분이 보이면 알려주세요. 확인 후 반영하겠습니다.
다음 경축사를 발표한 정부 시기의 통일 노력으로 옳은 것은? [2점]
남북 기본 합의서를 교환하였다.
7ㆍ4 남북 공동 성명을 발표하였다.
10ㆍ4 남북 공동 선언을 채택하였다.
금강산 해로 관광 사업을 시작하였다.
최초의 이산가족 고향 방문을 실현하였다.
제시된 경축사는 지난 2년 동안 냉전 체제의 다른 한쪽 종주국이었던 소련과 국교를 열었고, 동중부 유럽 국가들과 외교 관계를 수립했으며 중국과도 무역 대표부를 교환 설치했다고 밝히고, 그 변화 속에서 이루어질 남북한의 유엔 가입이 6·25 전쟁 이후 남북 관계의 가장 큰 전환일 것이라고 말합니다.
소련 수교(1990), 중국과의 무역 대표부 설치, 남북한 유엔 동시 가입(1991)은 모두 노태우 정부의 북방 외교 성과입니다. 즉 이 경축사는 노태우 정부 시기에 발표된 것입니다.
따라서 이 정부의 통일 노력으로 옳은 것은 남북 기본 합의서를 교환한 일입니다. 유엔 동시 가입 직후인 1991년 말 남북은 화해와 불가침, 교류·협력에 관한 합의서를 채택하였습니다.
나머지는 다른 정부의 일입니다. 7·4 남북 공동 성명은 박정희 정부, 10·4 남북 공동 선언은 노무현 정부, 금강산 해로 관광 시작은 김대중 정부, 최초의 이산가족 고향 방문은 전두환 정부 때 이루어졌습니다.
내용에 오류가 있거나 최신 법령·기준과 다른 부분이 보이면 알려주세요. 확인 후 반영하겠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