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능력검정시험 고급] 제33회 기출문제 해설 페이지
(가) 시대에 대한 설명으로 옳은 것은? [1점]
빗살무늬 토기를 제작하기 시작하였다.
주로 동굴이나 강가의 막집에서 살았다.
반달 돌칼을 사용하여 곡물을 수확하였다.
계급이 없는 평등한 공동체 생활을 하였다.
실을 뽑기 위해 가락바퀴를 처음 사용하였다.
뉴스 화면은 평창군 평창읍 하리 유적에서 비파형 동검과 인골이 함께 출토되었다고 전하고 있습니다. 비파형 동검은 우리나라 청동기 시대를 대표하는 유물이므로 (가)는 청동기 시대입니다.
청동기 시대에는 벼농사를 비롯한 농경이 본격화되면서 반달 돌칼로 곡식의 이삭을 잘라 수확하였고, 민무늬 토기와 미송리식 토기를 사용하였습니다. 잉여 생산물이 쌓이면서 계급이 발생하여 지배자인 군장이 등장하였고, 그들의 무덤으로 고인돌과 돌널무덤이 만들어졌습니다.
빗살무늬 토기 제작, 가락바퀴를 이용한 실 뽑기, 계급이 없는 평등한 공동체 생활은 모두 신석기 시대의 모습이며, 동굴이나 강가의 막집에서 살던 것은 구석기 시대의 생활 모습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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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 (나) 나라에 대한 설명으로 옳은 것은? [2점]
(가) - 신성 지역인 소도가 존재하였다.
(가) - 여러 가(加)들이 별도로 사출도를 다스렸다.
(나) - 읍락 간의 경계를 중시하는 책화가 있었다.
(나) - 왕 아래 상가, 고추가 등의 대가들이 있었다.
(가), (나) - 철이 많이 생산되어 낙랑군과 왜에 수출하였다.
(가)는 장사를 지낼 때 길이 십여 장(丈)의 큰 나무 곽을 만들어 온 가족을 한 곽에 넣고, 죽은 이를 가매장했다가 살이 썩은 뒤 뼈만 추려 넣으며, 살아 있을 때의 모습대로 죽은 사람의 수만큼 나무를 깎아 둔다는 기록입니다. 이는 옥저의 가족 공동 무덤(골장제)에 대한 『삼국지』 동이전의 서술입니다.
(나)는 나라 동쪽 큰 굴인 수혈에서 10월에 온 나라 사람이 모여 수신(隧神)을 나라 동쪽 강가로 모셔 제사 지내고, 혼인할 때 여자 집 본채 뒤에 서옥이라는 작은 집을 짓는다는 기록입니다. 10월 제천 행사인 동맹과 서옥제(데릴사위제)는 고구려의 풍속입니다.
고구려는 왕 아래 상가, 고추가 등으로 불린 대가들이 있어 이들이 사자·조의·선인 등의 관리를 거느렸습니다. 한편 소도는 삼한, 사출도는 부여, 책화는 동예의 특징이며, 철을 낙랑군과 왜에 수출한 것은 변한(가야)에 해당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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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 지역에서 있었던 사실로 옳은 것은? [2점]
주세붕이 백운동 서원을 설립하였다.
박상진의 주도로 대한 광복회가 결성되었다.
백제와 신라 사이에 황산벌 전투가 벌어졌다.
최무선이 화포를 사용하여 왜구를 격퇴하였다.
남북한 경제 협력 사업의 일환으로 공단이 건설되었다.
답사 보고서의 답사지는 관촉사와 개태사지이며, 관촉사에 대해 "고려 시대에 조성된 가장 큰 석조 불상으로 흔히 은진 미륵이라 불린다"라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관촉사 석조 미륵보살 입상과 후삼국 통일을 기념해 세운 개태사의 터가 함께 있는 곳은 충청남도 논산입니다.
논산 연산 일대의 황산벌은 660년 나·당 연합군이 백제로 진격할 때, 계백이 이끄는 결사대 5천 명이 김유신의 신라군에 맞서 싸운 황산벌 전투가 벌어진 곳입니다. 이 전투에서 백제군이 패하면서 사비성이 함락되고 백제는 멸망하였습니다.
백운동 서원은 경북 영주, 대한 광복회 결성은 대구, 화포로 왜구를 격퇴한 진포 대첩은 전북 군산, 남북 경제 협력 공단이 건설된 곳은 개성으로 모두 논산과는 관련이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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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연보에 해당하는 왕의 업적으로 옳은 것은? [2점]
유학 교육을 위해 국학을 설립하였다.
건원이라는 독자적인 연호를 사용하였다.
인재를 등용하고자 독서삼품과를 시행하였다.
시장을 관리하는 관청인 동시전을 설치하였다.
자장의 건의로 황룡사 구층 목탑을 건립하였다.
연보는 500년 즉위, 502년 순장 금지와 우경 장려, 503년 국호를 '신라'로 확정하고 '왕' 칭호 사용, 505년 이사부를 실직주 군주로 삼음이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는 신라 지증왕의 업적입니다.
지증왕은 이 밖에도 509년 수도 경주에 시장을 관리하는 관청인 동시전을 설치하여 상업을 감독하였고, 512년에는 이사부를 보내 우산국을 복속시켰습니다.
국학 설립은 신문왕, 건원 연호 사용은 법흥왕, 독서삼품과 시행은 원성왕, 자장의 건의에 따른 황룡사 구층 목탑 건립은 선덕 여왕 때의 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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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전시회에 전시될 사진으로 적절한 것은? [1점]
특별 사진전의 주제는 "사진으로 보는 고구려의 도교 문화"입니다. 따라서 고구려에서 도교의 영향을 받아 제작된 문화유산을 찾아야 합니다.
고구려 후기 고분 벽화에는 동서남북을 지키는 방위신을 그린 사신도가 나타나는데, 이는 신선 사상과 도교가 널리 퍼졌음을 보여 줍니다. 사진 가운데 뱀이 거북을 휘감은 모습을 그린 벽화가 바로 북쪽을 지키는 신을 표현한 고구려 고분 벽화의 현무도로, 전시에 적절합니다.
화려한 금빛 향로와 신선이 사는 산을 새긴 벽돌은 도교적 요소를 담고 있으나 백제의 유물이며, 미소 띤 석조 상과 여러 인물이 늘어선 그림 역시 고구려 도교 문화와는 관계가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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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 (나) 사이의 시기에 있었던 사실로 옳은 것은? [2점]
고흥이 서기를 편찬하였다.
무왕이 미륵사를 건립하였다.
무령왕이 22담로에 왕족을 파견하였다.
견훤이 금성을 습격해 경애왕을 살해하였다.
복신과 도침 등이 부여풍을 왕으로 추대하였다.
(가)는 고구려가 침입해 한성을 포위하자 개로왕이 사망하고 문주왕이 즉위하여 10월에 웅진으로 도읍을 옮겼다는 기록으로, 475년 장수왕의 남진으로 한성이 함락된 사건입니다.
(나)는 "봄에 도읍을 사비로 옮기고 국호를 남부여라 하였다"는 기록으로, 538년 성왕의 사비 천도에 해당합니다. 따라서 두 시기 사이는 웅진 도읍기(475~538년)입니다.
이 시기에 무령왕은 지방 통제를 강화하기 위해 22담로를 두고 왕족을 파견하였으며, 중국 남조의 양과 교류하였습니다. 고흥의 서기 편찬은 근초고왕(4세기), 무왕의 미륵사 건립과 복신·도침의 부여풍 추대는 사비 천도 이후의 일이고, 견훤의 금성 습격은 후백제 때의 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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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상황 이후 고구려에서 있었던 사실로 옳은 것은? [3점]
수의 침략군을 살수에서 격퇴하였다.
낙랑군을 몰아내고 영토를 확장하였다.
전진의 순도를 통해 불교를 수용하였다.
평양성에서 나·당 연합군에 항전하였다.
연개소문이 정변을 일으켜 권력을 장악하였다.
화면 속 설명은 "고구려는 당 태종의 침입으로 요동성, 백암성이 함락되는 위기를 맞았지만 안시성에서 이를 물리쳤다"는 내용입니다. 이는 645년의 안시성 전투로, 당군은 성을 넘기 위해 토산까지 쌓았으나 결국 물러났습니다.
이후 고구려는 연개소문 사후 그 아들들 사이의 권력 다툼으로 국력이 약해졌고, 668년 평양성에서 나·당 연합군의 공격에 맞서 항전하다가 성이 함락되면서 멸망하였습니다.
나머지는 모두 안시성 전투 이전의 사실입니다. 미천왕의 낙랑군 축출은 313년, 소수림왕 때 전진의 순도를 통한 불교 수용은 372년, 을지문덕의 살수 대첩은 612년, 연개소문의 정변은 642년에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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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가상 인터뷰의 (가)에 들어갈 대답으로 적절한 것은? [2점]
병자에게 약을 지급하는 혜민국을 설치하였습니다.
백성들에게 곡식을 빌려주는 진대법을 마련하였습니다.
호구를 정확하게 파악하기 위한 호패법을 시행하였습니다.
강제로 노비가 된 자를 해방시키는 노비안검법을 실시하였습니다.
기금을 모아 그 이자로 빈민을 구제하는 제위보를 운영하였습니다.
가상 인터뷰에서 왕은 "반란을 진압한 후 정치를 바로잡기 위해" 널리 인재를 추천받아 안유와 을파소를 발탁하였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을파소를 국상으로 등용한 왕은 고구려 고국천왕입니다.
이어 기자가 민생 안정을 위한 새로운 제도를 묻자, 왕은 사냥길에 울고 있는 백성의 사연을 듣고 신하들에게 명령을 내렸다고 답합니다. 이는 고국천왕이 을파소의 건의를 받아들여 마련한 진대법의 유래로, 봄에 관곡을 빌려주었다가 가을 추수기에 갚게 한 빈민 구제 제도입니다.
혜민국 설치와 제위보 운영은 고려의 구휼 기구이며, 노비안검법은 고려 광종, 호패법은 조선 태종 때 시행된 제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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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문화유산에 대한 탐구 활동으로 적절한 것은? [3점]
신라 왕을 매금왕이라 표현한 의미를 찾아본다.
신라의 수리 관개 시설 축조에 대하여 알아본다.
비문의 내용을 검토한 김정희의 금석과안록을 살펴본다.
고대 사회의 재산 소유와 상속에 관한 내용을 조사한다.
신라의 요청을 받은 고구려가 왜를 격퇴하는 과정을 검색한다.
문화유산 카드에는 종목 국보 제3호, 시대 신라, 그리고 "한강 유역을 영토로 편입한 뒤 진흥왕이 이 지역을 순수(巡狩)하고 세운 것"이며 원래 북한산 비봉에 있었으나 지금은 국립 중앙 박물관이 소장하고 있다는 설명이 담겨 있습니다. 이는 북한산 진흥왕 순수비입니다.
이 비는 오랫동안 무학 대사의 비 등으로 잘못 알려져 있었는데, 조선 후기 김정희가 직접 비봉에 올라 비문을 판독하여 진흥왕 순수비임을 밝히고 그 고증 결과를 금석과안록에 정리하였습니다. 따라서 이 책을 살펴보는 활동이 적절합니다.
매금왕이라는 표현이 보이는 것은 충주 고구려비, 수리 관개 시설 축조는 영천 청제비, 재산 소유와 상속 내용은 신라 촌락 문서와 관련되며, 고구려가 신라의 요청으로 왜를 격퇴한 사실은 광개토 대왕릉비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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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 국가에 대한 설명으로 옳은 것은? [2점]
지방을 9주 5소경 체제로 다스렸다.
경당을 설치하여 학문과 무예를 가르쳤다.
사회 질서를 유지하기 위한 범금 8조를 두었다.
제가 회의에서 나라의 중요한 일을 결정하였다.
일부 왕족이 멸망 후 신라의 진골로 편입되었다.
신문 기사는 인도 우타르프라데시 주 차관이 김해를 방문해 시조 김수로왕과 허황옥 왕후의 능을 둘러보았고, 인도 아요디아 시의 허 왕후 기념 공원을 양국이 함께 재정비하기로 했다는 내용입니다. 김해에 도읍하고 김수로를 시조로 삼으며 아유타국 공주 허황옥 설화를 전하는 나라는 금관가야입니다.
금관가야는 낙동강 하류의 풍부한 철과 해상 교통을 바탕으로 낙랑·왜를 잇는 중계 무역으로 성장해 전기 가야 연맹을 주도했습니다. 그러나 고구려 광개토 대왕의 남정으로 크게 쇠퇴하였고, 532년 구해왕(김구해)이 신라 법흥왕에게 나라를 넘기며 멸망하였습니다.
이때 항복한 금관가야 왕족은 신라에서 진골 신분으로 편입되어 대우를 받았고, 그 후손에서 김유신 같은 인물이 배출되었습니다. 이 점이 금관가야의 특징적인 사실입니다.
참고로 9주 5소경은 통일 신라의 지방 제도이고, 경당은 고구려의 지방 교육 기관이며 제가 회의 역시 고구려의 귀족 회의입니다. 범금 8조는 고조선의 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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밑줄 그은 ‘이 시기’에 있었던 사실로 옳은 것은? [2점]
9산 선문 중 하나인 실상산문이 개창되었다.
국가 주도로 삼한통보, 해동통보가 발행되었다.
관리들에게 관료전이 지급되고 녹읍이 폐지되었다.
중국 화북 지방의 농법을 정리한 농상집요가 소개되었다.
인간의 심성과 우주의 원리를 탐구하는 성리학이 전래되었다.
대화에서 혜공왕이 피살되어 무열왕 직계 자손의 왕위 계승이 끊어졌고, 이후 방계 왕족인 김양상이 선덕왕이 되었으며 왕위 쟁탈전이 치열해져 150여 년간 20명의 왕이 교체되었다고 했습니다. 이는 혜공왕 사후 시작된 신라 하대를 가리킵니다.
신라 하대에는 진골 귀족의 분열로 중앙 정부의 통제력이 약해지고 지방에서 호족이 성장했습니다. 이들의 후원 아래 개인의 깨달음을 중시하는 선종이 크게 유행하여 각지에 9산 선문이 세워졌는데, 그 첫 번째가 홍척이 지리산에 개창한 실상산문(흥덕왕 대)입니다.
삼한통보·해동통보 발행과 농상집요 소개, 성리학 전래는 모두 고려 시대의 일이고, 관료전 지급과 녹읍 폐지는 신문왕 때의 정책으로 신라 중대에 해당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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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과 같은 중앙 관제를 갖춘 국가에 대한 설명으로 옳은 것은? [1점]
한의 침략을 받아 멸망하였다.
9서당 10정의 군사 조직을 갖추었다.
주자감을 두어 유학 교육을 실시하였다.
외사정을 파견하여 지방관을 감찰하였다.
청해진을 통하여 해상 무역을 전개하였다.
도표는 왕 아래에 정당성·선조성·중대성의 3성을 두고, 정당성 밑에 좌사정(충부·인부·의부)과 우사정(지부·예부·신부)을 나누어 6부를 배치한 구조입니다. 3성 6부를 유교 덕목의 명칭으로 바꾸고 이원적으로 운영한 것은 발해의 중앙 관제입니다.
발해는 당의 제도를 받아들이되 독자적으로 운영하여 정당성의 장관인 대내상이 국정을 총괄하게 했습니다. 유학 교육 기관으로는 주자감을 설치하여 귀족 자제를 가르쳤고, 감찰 기구로 중정대를 두었습니다.
한의 침략으로 멸망한 나라는 고조선이며, 9서당 10정과 외사정, 청해진은 모두 통일 신라와 관련된 내용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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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에 들어갈 세시 풍속에 대한 설명으로 옳지 않은 것은? [2점]
앵두로 화채를 만들어 먹었다.
창포를 삶은 물로 머리를 감았다.
들판에 쥐불을 놓으며 풍년을 기원했다.
그네뛰기, 씨름 등의 민속놀이를 즐겼다.
임금이 신하들에게 부채를 나누어 주었다.
자료는 '일 년 중 양기가 가장 왕성한 날'이라는 제목 아래, 「동국세시기」를 인용해 이날을 속칭 수릿날이라 하며 '수리'는 우리말로 수레[車]를 뜻하고 쑥을 넣어 수레바퀴 모양의 떡을 만들어 먹는다고 설명합니다. 또 이날 강릉의 행사가 유명하고 유네스코 인류 무형 문화유산으로 등재되었다고 했으므로 (가)는 음력 5월 5일 단오입니다.
단오에는 창포 삶은 물로 머리를 감고 창포 뿌리를 비녀로 꽂아 액을 물리쳤으며, 그네뛰기와 씨름 같은 민속놀이를 즐겼습니다. 제철 과일인 앵두로 화채를 만들어 먹었고, 더위가 시작되는 때라 임금이 신하들에게 부채를 나누어 주는 단오선 풍습도 있었습니다.
반면 들판에 쥐불을 놓아 풍년을 기원한 것은 음력 정월 대보름의 풍속으로, 해충과 잡균을 없애 한 해 농사가 잘되기를 빌던 행사입니다. 따라서 단오의 풍속으로 보기 어렵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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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 왕이 실시한 정책으로 옳은 것은? [1점]
기인 제도와 사심관 제도를 시행하였다.
도병마사를 설치하여 주요 문제를 논의하였다.
쌍기의 건의를 받아들여 과거제를 도입하였다.
전시과 제도를 마련하여 관리에게 토지를 지급하였다.
백관의 공복을 제정하여 복색을 4등급으로 구분하였다.
칠판에 정리된 (가)의 정책은 민생 안정으로 취민유도를 내세우고 흑창을 설치한 것, 관리의 규범으로 「정계」와 「계백료서」를 지은 것, 북진 정책으로 서경을 중시한 것이며, 학생은 (가)가 호족을 통합하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고 말합니다. 이는 고려를 세운 태조 왕건의 정책입니다.
태조는 호족을 포섭하는 한편 견제하기 위해 유력 호족의 자제를 수도에 머물게 하는 기인 제도와, 중앙 관리를 출신 지역의 사심관으로 삼아 그 지방을 관리하게 하는 사심관 제도를 실시하였습니다. 또 혼인 정책과 사성 정책으로 호족과 유대를 맺었습니다.
도병마사 설치는 성종 이후 정비된 회의 기구이고, 쌍기의 건의에 따른 과거제 도입과 백관의 공복 제정은 광종, 전시과 제도의 마련은 경종 때의 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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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 인물에 대한 설명으로 옳은 것은? [2점]
불씨잡변을 저술하였다.
봉사 10조를 국왕에게 올렸다.
무신 정권을 타도하고자 하였다.
칭제 건원과 금국 정벌을 주장하였다.
반정 공신의 위훈 삭제를 시도하였다.
신문 기사는 서경 임원역의 지세가 궁궐 짓기에 좋다며 천도를 주장하던 (가)가 서경에서 반란을 일으켜 국호를 대위, 연호를 천개라 하고 1년간 중앙 정부와 대치하다가 김부식이 이끄는 관군에게 진압되었다고 전합니다. 1135년의 묘청의 서경 천도 운동입니다.
묘청을 비롯한 서경 세력은 풍수지리설을 근거로 서경 천도를 주장하면서, 고려 국왕이 황제를 칭하고 독자 연호를 쓰자는 칭제 건원과 함께 금국 정벌을 내세웠습니다. 이는 사대를 주장한 김부식 중심의 개경 문벌 세력과 정면으로 충돌하는 주장이었습니다.
「불씨잡변」은 정도전, 봉사 10조는 최충헌이 올린 것이며, 무신 정권 타도를 꾀한 것은 김보당·조위총 등의 움직임입니다. 반정 공신의 위훈 삭제는 조선 중종 때 조광조의 시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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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서술형 평가의 답안에 들어갈 내용으로 적절하지 않은 것은? [3점]
중등 교육 기관으로 4부 학당을 설립하였다.
국자감에 전문 강좌인 7재를 두어 운영하였다.
경사 6학을 중심으로 교육 제도를 정비하였다.
장학 기금을 마련하기 위해 양현고를 설치하였다.
청연각과 보문각을 설치하여 학문 연구를 장려하였다.
서술형 평가지의 제시문은 11세기 중엽 최충의 문헌공도를 비롯한 사학이 들어서고, 그곳 출신들이 과거에서 좋은 성적을 거두자 사학이 더욱 번성한 반면 관학 교육은 위축되었다는 내용입니다. 문제는 이 상황을 개선하기 위해 고려가 실시한 관학 진흥책을 쓰라는 것입니다.
고려는 숙종 때 서적포를 두어 서적 간행을 맡겼고, 예종 때는 국자감에 전문 강좌인 7재를 설치하고 장학 재단인 양현고를 두었으며 청연각·보문각을 세워 학문 연구를 장려했습니다. 인종 때에는 경사 6학을 중심으로 교육 제도를 정비하였습니다.
이에 비해 중등 교육 기관인 4부 학당은 조선이 한성에 설치한 관학이므로, 고려의 관학 진흥책 사례로는 적절하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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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 (나) 역사서에 대한 설명으로 옳은 것은? [3점]
(가) - 시정기, 사초 등을 토대로 편찬되었다.
(가) - 청주 흥덕사에서 금속 활자본으로 간행되었다.
(나) - 유네스코 세계 기록 유산으로 등재되었다.
(나) - 조선 왕조의 역사가 기사본말체로 서술되었다.
(가), (나) - 단군의 건국 이야기가 수록되어 있다.
(가)는 삼국의 시조가 모두 신비로운 데에서 탄생했으니 이상할 것이 없으며 책 머리에 기이(紀異)편을 싣는 까닭이 여기에 있다고 밝힌 글로, 일연이 쓴 삼국유사의 서문입니다. (나)는 시(詩)로 읊어 좋은 것은 본보기로, 나쁜 것은 경계로 삼았다고 하고 '요동에 별개의 천지가 있어 중국과 뚜렷이 구분된다'고 노래한 이승휴의 제왕운기입니다.
두 책 모두 원 간섭기에 편찬되어 자주 의식을 담았고, 우리 역사의 시작을 단군의 고조선 건국에서 찾아 그 이야기를 수록하였습니다. 이것이 두 역사서의 공통점입니다.
시정기와 사초를 토대로 편찬되고 유네스코 세계 기록 유산으로 등재된 것은 조선왕조실록이며, 조선 왕조의 역사를 기사본말체로 서술한 것은 이긍익의 연려실기술입니다. 청주 흥덕사에서 금속 활자로 간행된 것은 직지심체요절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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밑줄 그은 ‘여러 개혁’의 내용으로 옳지 않은 것은? [2점]
격하된 관제를 복구하였다.
정동행성 이문소를 폐지하였다.
경기에 한하여 과전법을 시행하였다.
기철을 비롯한 친원 세력을 숙청하였다.
인사 행정을 담당하던 정방을 혁파하였다.
그림에서 신하 이연종이 '변발을 하고 호복을 입는 것은 선왕의 제도가 아니다'라고 간언하자, 왕이 그를 충신이라 칭찬하며 변발을 풀고 여러 개혁 조치를 통해 고려를 바로잡겠다고 답합니다. 몽골식 풍습을 없앤 이 왕은 공민왕입니다.
공민왕은 원의 세력이 약해진 틈을 타 반원 자주 정책을 폈습니다. 기철 등 친원 세력을 숙청하고 내정 간섭 기구인 정동행성 이문소를 폐지했으며, 원에 의해 격하되었던 관제를 복구하고 쌍성총관부를 공격해 철령 이북 땅을 되찾았습니다. 왕권 강화를 위해 인사 행정을 좌우하던 정방을 혁파하고 전민변정도감을 두어 신돈에게 맡겼습니다.
반면 경기에 한하여 과전법을 시행한 것은 공민왕 사후인 1391년 공양왕 때 신진 사대부가 주도한 토지 개혁으로, 조선 건국의 경제적 기반이 되었습니다. 따라서 공민왕의 개혁 내용으로 볼 수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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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 지역에 대한 탐구 활동으로 가장 적절한 것은? [2점]
서희의 외교 교섭 결과에 대해 조사한다.
공민왕이 수복한 쌍성총관부의 위치를 파악한다.
윤관의 여진 정벌과 관련된 척경입비도를 검색한다.
궁예가 국호를 바꾸고 도읍을 옮긴 지역을 살펴본다.
김윤후가 몽골 장수 살리타를 사살한 지역을 확인한다.
지도에서 (가)로 표시된 곳은 압록강 하류 동쪽 일대로, 안에 흥화진·용주·통주·철주·곽주·귀주가 함께 표기되어 있습니다. 이 여섯 성이 바로 강동 6주입니다.
강동 6주는 993년 거란의 1차 침입 때 서희가 소손녕과 담판하여 고려가 고구려를 계승한 나라임을 내세우고 송과 관계를 끊는 조건으로 확보한 지역입니다. 이로써 고려의 국경이 압록강 유역까지 확대되었습니다.
따라서 이 지역을 탐구하려면 서희의 외교 교섭 결과를 조사하는 활동이 알맞습니다. 이후 거란은 강동 6주 반환을 요구하며 다시 침입했고, 강감찬이 이 일대에서 귀주 대첩을 거두었습니다.
쌍성총관부는 화주(영흥) 지역, 척경입비도와 관련된 동북 9성은 함경도 일대, 궁예가 도읍을 옮긴 곳은 철원, 김윤후가 살리타를 사살한 곳은 처인성으로 모두 지도의 위치와 다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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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 인물에 대한 설명으로 옳은 것은? [2점]
심성의 도야를 강조한 유불 일치설을 제창하였다.
법화 신앙을 중심으로 백련사 결사를 주도하였다.
귀법사를 중심으로 활동하며 성상융회를 강조하였다.
돈오점수를 주장하며 수행 방법으로 정혜쌍수를 내세웠다.
이론 연마와 수행을 함께 강조하는 교관겸수를 주장하였다.
카드에 적힌 생몰 1055년~1101년, 고려 제11대 왕 문종의 넷째 아들이라는 단서만으로 인물이 특정된다. 왕자 출신으로 출가한 이 시기의 대표적 승려는 의천(대각국사)이다.
주요 활동으로 제시된 개경 흥왕사에 설치된 교장도감에서 교장(敎藏) 간행은 의천이 송·요·일본에서 수집한 불교 주석서 목록을 정리해 펴낸 사업이며, 해동 천태종 개창 역시 의천의 대표 업적이다.
의천은 교종(화엄종)을 기반으로 선종을 통합하려 하면서 경전 이론 공부와 실천 수행을 함께 닦아야 한다는 교관겸수를 내세웠다. 따라서 이론 연마와 수행을 함께 강조했다는 설명이 이 인물에 해당한다.
돈오점수·정혜쌍수는 무신 집권기의 지눌, 백련사 결사는 요세, 유불 일치설은 혜심, 성상융회는 광종 때 귀법사의 균여가 주장한 것이어서 시기와 인물이 모두 다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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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 (나) 국가의 지방 통치에 대한 설명으로 옳은 것은? [1점]
(가) - 수령이 파견되지 않은 속현이 존재하였다.
(가) - 지방 세력을 견제하기 위해 상수리 제도를 실시하였다.
(나) - 성종 때 12목을 설치하고 지방관을 파견하였다.
(나) - 호장, 부호장을 상층부로 하는 향리 제도를 처음 마련하였다.
(가), (나) - 관찰사를 파견하여 병마절도사, 수군절도사를 겸임하게 하였다.
왼쪽 지도에는 북계·동계라는 양계와 서해도·교주도·경기·양광도·경상도·전라도가 표시되어 있다. 이는 고려의 5도 양계 체제를 나타낸 지도이다.
오른쪽 지도에는 함경도·평안도·황해도·강원도·경기도·충청도·경상도·전라도의 여덟 개 도가 표시되어 있으니, 조선의 8도 체제이다.
고려에서는 모든 군현에 지방관을 보내지 못하여 수령이 파견된 주현보다 수령이 파견되지 않은 속현이 더 많았고, 그 행정 실무는 향리가 담당하였다. 5도 양계 지도에 해당하는 설명으로 옳다.
상수리 제도는 통일 신라, 12목 설치와 향리 제도 정비는 고려 성종의 일이므로 8도 지도 쪽 설명이 될 수 없고, 관찰사가 병마절도사·수군절도사를 겸임한 것은 조선에만 해당하므로 두 지도에 공통으로 적용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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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에 들어갈 수 있는 문화유산으로 적절한 것을 <보기>에서 고른 것은? [2점]
ㄱ, ㄴ
ㄱ, ㄷ
ㄴ, ㄷ
ㄴ, ㄹ
ㄷ, ㄹ
설명 장면에서 15세기에는 궁궐·관아·성곽이 건축의 중심을 이루었고 그 시기 불교 건축 중에도 뛰어난 문화유산이 있었다고 하였다. 따라서 조선 전기(15세기)에 만들어진 불교 문화유산을 골라야 한다.
해인사 장경판전은 팔만대장경판을 보관하기 위해 15세기에 지어진 건물로, 통풍과 습도 조절을 고려한 과학적 설계로 유명하다. 원각사지 십층 석탑은 세조 때인 1467년에 대리석으로 세운 탑으로 고려의 경천사지 십층 석탑의 영향을 받았다.
반면 수덕사 대웅전은 1308년에 세워진 고려 후기의 주심포 양식 건물이고, 법주사 팔상전은 임진왜란 이후 17세기에 중건된 조선 후기의 목조 5층탑이어서 15세기와는 시기가 맞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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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사건이 일어난 시기를 연표에서 옳게 고른 것은? [2점]
(가)
(나)
(다)
(라)
(마)
제시된 기록은 이종무를 삼군도체찰사로 삼아 경상·전라·충청 3도의 병선 200여 척을 거느리고 왜구가 들어오는 길목을 막게 하였다는 내용으로, 세종 1년(1419)의 쓰시마(대마도) 정벌을 가리킨다.
연표를 보면 구간은 1392년 조선 건국 – 1453년 계유정난 – 1510년 삼포왜란 – 1592년 임진왜란 – 1636년 병자호란 – 1654년 1차 나선정벌로 나뉜다.
1419년은 조선 건국(1392)과 계유정난(1453) 사이에 놓이므로, 연표의 첫 번째 구간이 이 사건이 일어난 시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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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에 대한 설명으로 옳은 것은? [2점]
과전 지급 대상을 현직 관리로 제한하였다.
선혜법이라는 이름으로 경기도에서 처음 실시하였다.
부족한 재정을 충당하기 위해 선무군관포를 수취하였다.
공인을 통해 각 관청에 필요한 물품을 공급하도록 하였다.
풍흉에 관계없이 대부분 농지에서 1결당 4~6두의 전세를 거두었다.
메모에 적힌 배경은 재정 수입 감소와 농민 생활 피폐, 그리고 전분 6등법·연분 9등법의 복잡한 징수 절차로 인한 수취의 어려움이다. 이는 세종 대 공법의 운영이 사실상 마비된 상황을 가리키므로 (가)는 인조 때 시행된 영정법이다.
영정법은 그해의 풍흉에 관계없이 전세를 정액화하여 대부분의 농지에서 1결당 4~6두를 거두도록 한 제도이다. 그 결과 메모의 설명대로 국가 재정 수입은 안정되었다.
다만 지주가 전세를 소작농에게 전가하고 각종 부가세가 늘어나면서, 실제로 토지가 없는 농민의 부담은 줄지 않았다는 점도 메모에 함께 적혀 있다.
현직 관리로 수조지 지급을 제한한 것은 직전법, 선혜법이라는 이름으로 경기도에서 처음 실시되고 공인이 등장한 것은 대동법, 선무군관포를 걷은 것은 균역법이므로 모두 다른 제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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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 붕당에 대한 설명으로 옳지 않은 것은? [3점]
광해군을 축출한 인조반정으로 집권하였다.
이이와 성혼의 문인을 중심으로 형성되었다.
정여립 모반 사건을 빌미로 기축옥사를 주도하였다.
선조 때 왕세자 책봉 문제로 정치적 입지가 약화되었다.
효종비의 사망 이후 전개된 예송의 결과 정국을 주도하였다.
제시문은 김효원과 심의겸의 대립, 심충겸의 이조 전랑 천거를 김효원이 외척이라며 반대한 일을 서술하고 있다. 이는 선조 때의 동서 분당(1575)으로, 김효원 지지 세력이 동인, 심의겸을 지지한 세력이 서인이다. 따라서 (가)는 서인이다.
서인은 이이와 성혼의 문인을 중심으로 형성되었고, 1589년 정여립 모반 사건을 계기로 정철 등이 기축옥사를 주도하였다. 그러나 이후 왕세자 책봉 문제(건저의 사건)로 정철이 실각하면서 정치적 입지가 약해졌고, 광해군을 몰아낸 인조반정으로 다시 집권하였다.
반면 효종비(인선왕후)의 사망 이후 벌어진 갑인예송(1674)에서는 자의 대비의 복상을 두고 서인의 대공설이 아니라 남인의 기년설이 채택되었다. 이 예송의 결과 정국을 주도한 것은 서인이 아니라 남인이었으므로, 이 설명이 서인에 대한 서술로 옳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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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대화 장면 속 왕의 재위 기간에 있었던 사실로 옳은 것은? [3점]
여진족을 몰아내고 4군 6진을 설치하였다.
외척 간의 대립으로 을사사화가 발생하였다.
기유약조 체결로 일본과의 국교가 재개되었다.
안동 김씨의 세도 정치로 부정부패가 심화되었다.
남인이 축출되고 노론과 소론이 정국을 주도하였다.
대화에서 신하들은 임꺽정 일당이 일어난 원인으로 황해도 지역 백성들이 공동으로 이용하던 갈대밭을 권세가들이 빼앗은 일을 들고 있다. 임꺽정의 활동은 1559년 무렵부터 1562년까지로, 대화 속 왕은 명종이다.
명종은 중종의 아들로 즉위할 때 나이가 어려 문정 왕후가 수렴청정하였고, 이 과정에서 대윤(윤임)과 소윤(윤원형)이라는 외척 간의 대립이 폭발하여 1545년 을사사화가 일어났다. 명종 재위 기간에 있었던 사실로 옳다.
4군 6진 개척은 세종, 기유약조(1609)는 광해군, 남인이 축출되고 노론·소론이 정국을 주도한 것은 숙종 이후, 안동 김씨의 세도 정치는 순조 이후의 일이므로 모두 시기가 맞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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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 (나)에 들어갈 내용으로 옳은 것은? [1점]
(가) - 화폐, 곡식의 출납과 회계를 맡았다.
(가) - 왕명 출납과 군사 기밀을 담당하였다.
(나) - 실록을 보관하고 관리하는 업무를 관장하였다.
(나) - 재신과 추밀 등으로 구성되어 법제와 격식을 논의하였다.
(가), (나) - 왕의 관리 임명 과정에서 서경권을 행사하였다
게시판의 제목이 조선 시대 삼사의 역할이고, 세 장의 쪽지는 각각 사헌부, 사간원, 홍문관이다. 홍문관 칸에만 왕의 자문에 응함, 경연 담당이라는 내용이 채워져 있으므로, 빈 칸에는 사헌부와 사간원의 역할이 들어가야 한다.
사헌부는 관리의 비리를 감찰하고 풍속을 바로잡는 일을, 사간원은 왕의 잘못을 논하는 간쟁을 맡았다. 두 기관을 합쳐 양사(대간)라 하는데, 양사는 왕이 관리를 임명할 때 그 자격을 심사해 동의 여부를 결정하는 서경권을 행사하였다. 두 칸에 공통으로 들어갈 내용으로 옳다.
화폐와 곡식의 출납·회계를 맡은 것은 고려의 삼사, 왕명 출납과 군사 기밀을 담당한 것은 고려의 중추원, 실록의 보관과 관리는 춘추관, 재신과 추밀이 모여 법제와 격식을 논의한 것은 고려의 식목도감이므로 어느 것도 조선 삼사의 사헌부·사간원 설명이 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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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에 대한 설명으로 옳은 것은? [2점]
청과의 후시 무역을 주도하였다.
전국에 송방이라는 지점을 설치하였다.
주로 왜관을 중심으로 무역 활동을 하였다.
포구에서의 중개·금융·숙박업에 주력하였다.
상권 수호를 위해 황국 중앙 총상회를 조직하였다.
방문의 내용은 한성부 관할 구역의 난전을 단속할 수 있도록 허용했던 금난전권을 폐지하되 육의전은 제외한다는 것으로, 1791년 정조 때의 신해통공이다. 금난전권을 누리다가 이때 그 특권을 잃은 (가)는 시전 상인이다.
시전 상인은 종로 거리에 상설 점포를 두고 국가에 필요한 물품을 조달하는 대가로 특정 물품의 독점 판매권을 인정받았던 어용 상인이었다. 개항 이후 외국 상인이 한성에까지 들어와 상권을 위협하자, 이들은 1898년 황국 중앙 총상회를 조직해 상권 수호 운동을 전개하였다.
청과의 후시 무역을 주도한 것은 의주의 만상, 전국에 송방이라는 지점을 둔 것은 개성의 송상, 왜관을 중심으로 활동한 것은 동래의 내상, 포구에서 중개·금융·숙박업에 주력한 것은 객주와 여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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밑줄 그은 ‘이 법전’을 편찬한 왕의 업적으로 옳은 것은? [2점]
왕권을 강화하기 위해 장용영을 설치하였다.
청과의 국경을 정하는 백두산정계비를 세웠다.
동국문헌비고를 편찬하여 역대 문물을 정리하였다.
삼정의 문란을 해결하고자 삼정이정청을 설치하였다.
붕당 정치의 폐해를 극복하고자 탕평비를 건립하였다.
전시 설명에서 이 법전은 경국대전과 속대전 및 여러 법령을 통합해 편찬한 것이고, 규장각 검서관인 박제가·유득공 등이 감인관으로 참여했다고 하였다. 이는 1785년에 완성된 대전통편이며, 편찬을 명한 왕은 정조이다.
정조는 규장각을 정책 연구 기관으로 육성하고 서얼 출신을 검서관으로 등용하였으며, 왕권을 뒷받침할 친위 부대로 장용영을 설치하였다. 정조의 업적으로 옳다.
백두산정계비 건립과 동국문헌비고 편찬은 각각 숙종과 영조, 탕평비 건립도 영조의 일이고, 삼정이정청 설치는 임술 농민 봉기 이후 철종 때의 조치이므로 모두 다른 왕에 해당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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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주장을 펼친 인물에 대한 설명으로 옳은 것은? [2점]
전론에서 마을 단위 토지 분배와 공동 경작을 제안하였다.
우서에서 사농공상의 직업적 평등과 전문화를 강조하였다.
반계수록에서 신분에 따라 토지를 차등 분배하자고 하였다.
곽우록에서 자영농 몰락을 막기 위해 영업전 설정을 주장하였다.
북학의에서 재물을 우물에 비유하여 절약보다 소비를 권장하였다.
제시된 글은 재물이 모자라는 까닭을 농사에 힘쓰지 않는 데에서 찾고, 다시 그 원인으로 여섯 가지 좀(六蠹), 곧 노비·과업(과거)·벌열·기교·승니·게으름뱅이를 들고 있습니다. 이 육두론을 편 인물은 중농학파(경세치용) 실학자 성호 이익입니다.
이익은 곽우록에서 한전론을 제시했습니다. 한 가정이 생계를 이어 갈 최소한의 토지를 영업전으로 정해 매매를 금지하고 그 밖의 토지만 거래를 허용함으로써, 토지 겸병으로 자영농이 몰락하는 것을 막자는 구상이었습니다.
비슷한 시기 다른 실학자들의 주장과 구별해야 합니다. 마을 단위로 토지를 나눠 공동 경작하자는 전론(여전론)은 정약용, 사농공상의 직업적 평등과 전문화는 유수원의 우서, 신분에 따른 차등 분배(균전론)는 유형원의 반계수록, 재물을 우물에 빗대어 소비를 권장한 것은 박제가의 북학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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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상소가 올려진 직접적 계기로 옳은 것은? [2점]
개항장에서 일본 화폐가 유통되었다.
조·미 수호 통상 조약이 체결되었다.
제너럴 셔먼호가 평양 군민과 충돌하였다.
영종도에 일본군이 상륙하여 약탈을 저질렀다.
김홍집이 가지고 온 조선책략이 국내에 유포되었다.
제시된 상소는 미국을 두고 "원래 잘 모르던 나라"라 하고, 러시아·미국·일본이 모두 같은 오랑캐여서 우열을 가릴 수 없다고 주장하며 미국과의 수교에 반대하고 있습니다. 1881년 이만손 등 영남 유생들이 올린 영남 만인소입니다.
이 상소의 직접적 계기는 2차 수신사로 일본에 다녀온 김홍집이 들여온 황준헌의 조선책략이 국내에 퍼진 일이었습니다. 러시아를 막기 위해 "친중국·결일본·연미국"하라는 이 책의 내용이 알려지자 위정척사 세력이 거세게 반발한 것입니다.
나머지 사건들은 시기가 맞지 않습니다. 제너럴 셔먼호 사건(1866)과 영종도 약탈을 부른 운요호 사건(1875)은 이보다 앞서고, 조·미 수호 통상 조약(1882)은 오히려 이 상소가 막으려 했던 결과에 해당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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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편지가 작성된 시기를 연표에서 옳게 고른 것은? [2점]
(가)
(나)
(다)
(라)
(마)
제시된 편지는 황사영이 베이징 주교에게 보내려 한 글로, 조선이 천주교(성교)를 탄압하고 성직자를 학살했으니 군사를 보내 문책해 달라고 청하는 내용입니다. 1801년 신유박해 때 작성된 황사영 백서입니다.
연표는 1750년 균역법 실시 – 1776년 정조 즉위 – 1800년 순조 즉위 – 1811년 홍경래의 난 – 1862년 임술 농민 봉기 – 1876년 강화도 조약으로 이어집니다. 1801년은 순조 즉위와 홍경래의 난 사이 구간에 놓입니다.
순조가 어린 나이로 즉위하자 정순 왕후를 중심으로 한 노론 벽파가 정권을 잡고, 남인 시파를 누르기 위해 천주교를 대대적으로 탄압한 것이 신유박해였습니다. 이 사건으로 이승훈·정약종 등이 처형되고 정약용·정약전은 유배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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밑줄 그은 ㉠ 사건 이후의 사실로 옳은 것을 보기에서 고른 것은? [1점]
ㄱ, ㄴ
ㄱ, ㄷ
ㄴ, ㄷ
ㄴ, ㄹ
ㄷ, ㄹ
사진 속 장소는 흥선 대원군의 아버지 남연군의 묘이며, 밑줄 그은 사건은 독일 상인 오페르트가 덕산까지 들어와 도굴을 시도한 1868년 오페르트 도굴 사건입니다. 이 사건으로 서양에 대한 반감이 극에 달했습니다.
보기 가운데 이 사건 이후의 일은 어재연이 지키던 광성보 함락과 전국 각지의 척화비 건립입니다. 두 가지 모두 1871년 신미양요와 그 직후에 일어난 일로, 미군의 강화도 침공에 맞선 항전과 통상 수교 거부 의지를 새긴 비석 건립이 이어졌습니다.
반면 외규장각 의궤가 국외로 약탈된 것과 양헌수 부대가 정족산성에서 활약한 것은 1866년 병인양요 때의 일로, 도굴 사건보다 앞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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밑줄 그은 ‘사절단’에 대한 설명으로 옳은 것은? [3점]
보고 들은 내용을 해동제국기로 남겼다.
고종이 대한 제국을 선포한 이후 파견되었다.
개화 반대 여론으로 인해 비밀리에 파견되었다.
기기국에서 무기 제조 기술을 습득하고 돌아왔다.
전권대신 민영익 및 홍영식, 서광범 등으로 구성되었다.
제시된 그림은 사절단이 아서 미국 대통령 앞에서 큰절을 올리는 장면으로, 설명에 따르면 미국 공사(푸트)의 서울 부임에 답하여 파견된 사절단입니다. 조·미 수호 통상 조약 체결 이듬해인 1883년에 미국에 보낸 보빙사이며, 대한 제국 선포(1897)보다 훨씬 앞선 시기입니다.
보빙사는 전권대신 민영익을 필두로 부대신 홍영식, 종사관 서광범 등으로 꾸려졌습니다. 이들은 미국의 산업 시설과 학교, 박람회 등을 두루 살펴보았고, 귀국 후 우정총국 설치와 농무 목축 시험장 설립 등 근대 문물 수용에 영향을 주었습니다.
다른 사절과 혼동하지 않아야 합니다. 해동제국기는 조선 전기 일본에 다녀온 신숙주의 기록이고, 개화 반대 여론 때문에 비밀리에 보낸 것은 조사 시찰단, 기기국에서 무기 제조 기술을 배워 온 것은 청에 보낸 영선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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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 ~ (라)에 들어갈 내용으로 적절한 것을 <보기>에서 고른 것은? [2점]
ㄱ, ㄴ
ㄱ, ㄷ
ㄴ, ㄷ
ㄴ, ㄹ
ㄷ, ㄹ
보고서는 청·일 전쟁과 아관 파천 이후 심해진 열강의 이권 침탈을 나라별로 정리한 표로, 러시아·미국·영국·일본 네 칸이 비어 있습니다.
바르게 짝지어진 것은 미국의 운산 금광 채굴권과 일본의 경부선 철도 부설권입니다. 운산 금광은 미국인 모스가 얻어 막대한 금을 캐 갔고, 경부선은 일본이 부설권을 확보해 러·일 전쟁 무렵 개통시켰습니다.
나머지 둘은 나라가 뒤바뀐 설명입니다. 두만강 유역과 울릉도의 삼림 채벌권은 아관 파천을 계기로 러시아가 차지한 이권이며, 한성과 의주를 잇는 전신 가설권은 임오군란 이후 영향력을 키운 청이 확보한 것으로 러시아의 이권이 아닙니다. 참고로 영국은 은산 금광 채굴권을 가져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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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자료가 반포된 이후 실시된 정책으로 옳은 것은? [2점]
전국 8도를 23부로 개편하였다.
지계아문을 설치하여 지계를 발급하였다.
건양 연호를 제정하고 태양력을 사용하였다.
6조를 8아문으로 개편하고 과거제를 폐지하였다.
군국기무처를 설치하여 근대적 개혁을 추진하였다.
제시된 자료는 대한국이 자주 독립한 제국임을 밝히고(제1조), 정치 체제를 만세토록 불변할 전제 정치로 규정하며(제2조), 황제가 무한한 군권을 누리고(제3조) 육해군 통솔과 계엄·해엄을 명한다(제5조)고 한 대한국 국제입니다. 대한 제국이 1899년 반포한 일종의 헌법으로, 황제권 강화를 명문화했습니다.
이후 광무개혁의 하나로 양지아문의 양전 사업에 이어 지계아문을 설치해 지계를 발급하였습니다. 근대적 토지 소유권 증명서를 주어 소유 관계를 정리하고 재정 수입을 늘리려 한 조치였습니다.
나머지는 모두 이보다 앞선 갑오·을미개혁기의 일입니다. 군국기무처 설치와 6조를 8아문으로 개편하고 과거제를 폐지한 것은 1894년 제1차 갑오개혁, 8도를 23부로 개편한 것은 제2차 갑오개혁, 건양 연호 제정과 태양력 사용은 1895년 을미개혁에 해당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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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 신문에 대한 설명으로 옳은 것은? [3점]
의병 운동을 호의적으로 보도하였다.
시일야방성대곡이라는 논설을 실었다.
국채 보상 운동을 적극적으로 후원하였다.
정부의 지원을 받았으며 영문으로도 발행되었다.
순 한문 신문으로 열흘마다 발행하는 것이 원칙이었다.
창간사에 박문국을 설치해 외국 소식을 번역하고 국내 일까지 실어 알린다고 한 점에서, 이 신문은 1883년 박문국에서 창간된 한성순보임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 신문입니다.
한성순보는 순 한문으로 간행되었고, 이름의 '순(旬)'이 말해 주듯 열흘마다 한 번 발행하는 것을 원칙으로 삼은 관보 성격의 신문이었습니다. 갑신정변으로 박문국이 불타면서 중단되었다가 뒤에 국한문 혼용의 한성주보로 이어졌습니다.
다른 신문들과 구분해야 합니다. 시일야방성대곡을 실은 것은 황성신문, 정부 지원을 받아 한글판과 영문판을 함께 낸 것은 독립신문, 의병 운동에 호의적이고 국채 보상 운동을 적극 후원한 것은 대한매일신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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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취지서를 발표한 단체의 활동으로 옳은 것은? [2점]
고종의 강제 퇴위 반대 운동을 전개하였다.
중추원 개편을 통한 의회 설립을 추진하였다.
가갸날을 제정하고 기관지인 한글을 발행하였다.
일본의 토지 약탈을 막고자 농광 회사를 설립하였다.
대성 학교와 오산 학교를 세워 민족 교육을 실시하였다.
제시된 취지서는 "나라의 독립은 오직 자강의 여하에 달려 있다"고 하면서, 자강할 방법을 배우지 않아 끝내 다른 나라의 보호를 받게 되었다고 개탄하고 있습니다. 을사늑약으로 외교권을 빼앗긴 직후인 1906년에 조직된 대한자강회의 취지서입니다.
대한자강회는 교육 진흥과 산업 개발을 통한 실력 양성을 내세우며 전국에 지회를 두고 강연회를 열고 기관지 월보를 펴냈습니다. 나아가 1907년 헤이그 특사 사건을 빌미로 한 고종의 강제 퇴위에 반대하는 운동을 벌였고, 이 때문에 통감부의 탄압을 받아 해산되었습니다.
다른 단체의 활동과 혼동하지 않아야 합니다. 중추원 개편을 통한 의회 설립 추진은 독립 협회, 가갸날 제정과 기관지 한글 발행은 조선어 연구회, 대성 학교와 오산 학교 설립은 신민회의 활동입니다. 농광 회사는 일제의 황무지 개간권 요구에 맞서 우리 손으로 개간하자며 세운 별개의 회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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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 섬에 대한 설명으로 옳은 것은? [1점]
하멜 일행이 표류하다 도착한 곳이다.
배중손이 이끄는 삼별초가 몽골군에 저항하였다.
정제두가 양명학을 연구하며 학파를 형성하였다.
러시아가 저탄소 설치를 명분으로 조차를 요구하였다.
대한 제국이 칙령 제41호를 통해 관할 영토임을 명시하였다.
대화는 강원도 관찰사 서리 이명래가 울릉 군수 심흥택의 보고를 전한 내용과, 참정대신 박제순이 "일본의 영토라는 말은 전혀 근거가 없다"며 재조사를 지시한 답변입니다. 일본 관인 일행이 그 섬을 두고 "지금 일본 영토가 되었다"고 한 1906년의 이 보고에서, 문제의 섬은 독도입니다.
대한 제국은 1900년 칙령 제41호를 반포해 울릉도를 울도군으로 승격시키고 군수의 관할 구역에 울릉 전도와 죽도, 그리고 석도(독도)를 포함한다고 규정했습니다. 이는 독도가 대한 제국의 관할 영토임을 국가 문서로 명시한 근거입니다.
다른 설명은 모두 서로 다른 섬에 얽힌 일입니다. 하멜 일행이 표류해 닿은 곳과 삼별초를 이끈 배중손이 몽골군에 맞선 곳은 제주도, 정제두가 양명학을 연구해 학파(강화학파)를 이룬 곳은 강화도, 러시아가 저탄소 설치를 명분으로 조차를 요구한 곳은 절영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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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 ~ (마) 문화유산에 대한 설명으로 옳지 않은 것은? [2점]
(가) - 일제에 의해 동물원 등이 설치되었다.
(나) - 일제 강점기 조선 총독부 청사로 이용되었다.
(다) - 을미사변 이후 고종이 피신하였다.
(라) - 제1차 미·소 공동 위원회가 개최되었다.
(마) - 6월 민주 항쟁 당시 시위대가 농성하였다.
답사 계획서의 지도에는 서울 도심의 근·현대 건축물 다섯 곳이 (가) 창경궁, (나) 서울 도서관(구 서울시 청사), (다) 구 러시아 공사관, (라) 덕수궁 석조전, (마) 명동 성당 순으로 표시되어 있다.
설명이 잘못된 것은 서울 도서관(구 서울시 청사) 항목이다. 이 건물은 일제 강점기에 경성부 청사로 지어져 광복 후 서울시 청사로 쓰이다가 현재 서울 도서관이 되었다. 조선 총독부 청사는 경복궁 근정전 앞을 가로막고 세워졌던 별개의 건물로, 1995년에 철거되었다.
나머지는 모두 옳다. 창경궁은 일제가 창경원으로 격하하면서 동물원과 식물원을 설치한 곳이고, 구 러시아 공사관은 을미사변 뒤 고종이 피신한 아관 파천(1896)의 현장이다.
덕수궁 석조전에서는 1946년 제1차 미·소 공동 위원회가 열렸고, 명동 성당은 1987년 6월 민주 항쟁 때 시위대가 농성하며 항쟁의 구심점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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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자료에 대한 설명으로 옳은 것은? [2점]
신채호에 의해 작성되었다.
중국 충칭에서 발표되었다.
조선 민족 혁명당의 강령이었다.
국민 대표 회의 개최의 배경이 되었다.
조선 건국 준비 위원회 설립의 계기가 되었다.
제시된 자료는 제3장 건국을 표제로 삼아 건국의 제1기·제2기를 단계별로 규정하고 있으며, 삼균 제도를 국가 강령과 헌법의 골자로 삼는다고 밝히고 있다. 토지와 대생산 기관의 국유화, 고급 교육의 무료 수학, 보통 선거의 완전 실시 등을 건국 완성의 지표로 제시한 점도 특징이다.
삼균주의를 뼈대로 한 이 문서는 조소앙이 기초하여 대한민국 임시 정부가 1941년 발표한 대한민국 건국 강령이다. 당시 임시 정부는 일본군의 공세를 피해 이동한 끝에 중국 충칭에 자리 잡고 있었으므로, 이 강령 역시 충칭에서 공포되었다.
따라서 신채호가 작성한 문서(조선 혁명 선언)나 조선 민족 혁명당의 강령과는 구별해야 한다. 또 국민 대표 회의(1923)는 이 강령보다 훨씬 앞선 사건이고, 조선 건국 준비 위원회는 1945년 국내에서 여운형이 주도해 결성한 조직이므로 관련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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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법령이 시행된 시기에 볼 수 있는 모습으로 적절한 것은? [1점]
토지 조사령을 발표하는 총독부 관리
황국 신민 서사를 암송하고 있는 학생
근우회가 개최한 강연회에서 연설하는 여성
가게 앞을 청결히 하지 않아 태형을 당하는 상인
조선 민립 대학 기성회 창립 총회에 참석하는 노인
제시된 법령은 치안 유지법을 어긴 자에게 형 집행 유예·기소 유예·형 만료·가출옥의 경우에도 보호 관찰을 붙일 수 있게 하고, 보호 관찰소가 그 사상 및 행동을 관찰하도록 규정하고 있다. 이는 1936년에 제정된 조선 사상범 보호 관찰령이다.
사상범을 형기 이후까지 감시하는 이 법령이 시행된 때는 민족 말살 통치기에 해당한다. 이 시기에는 내선일체와 황국 신민화가 강요되어 학생과 일반인에게 황국 신민 서사를 외우게 하였으므로, 이를 암송하는 학생의 모습을 볼 수 있다.
나머지는 시기가 맞지 않는다. 토지 조사령(1912)과 조선 태형령에 따른 태형은 1910년대 무단 통치기의 일이며, 근우회의 활동과 민립 대학 설립 운동은 1920년대 문화 통치기의 장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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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에 대한 설명으로 옳은 것은? [1점]
신간회로부터 진상 조사단이 파견되었다.
대한민국 임시 정부 수립의 계기가 되었다.
동아일보의 적극적인 지원을 받아 진행되었다.
순종의 인산일을 기해 대규모 시위가 계획되었다.
한국인 학생과 일본인 학생 간의 충돌에서 비롯되었다.
사진 속 건물은 옛 중앙 학교 숙직실을 복원한 것으로, 안내문은 일본 도쿄 유학생 송계백이 중앙 학교 교사 현상윤을 찾아와 유학생들의 거사 계획을 알리고 2·8 독립 선언서 초안을 전달하였다고 설명한다. 현상윤이 이곳에서 송진우 등과 협의한 결과 추진된 (가)는 3·1 운동이다.
3·1 운동은 전 민족적 항쟁이었음에도 통일된 지도부가 없었다는 한계가 드러났고, 이를 계기로 독립운동을 총괄할 정부의 필요성이 커져 1919년 대한민국 임시 정부가 수립되었다.
다른 설명은 각각 다른 사건에 해당한다. 신간회의 진상 조사단 파견과 한국인·일본인 학생 간 충돌은 1929년 광주 학생 항일 운동, 순종의 인산일을 계기로 계획된 시위는 1926년 6·10 만세 운동이며, 동아일보의 지원을 받은 것은 브나로드 운동이다. 3·1 운동의 계기가 된 것은 고종의 인산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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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법령 발표 이후에 있었던 사실로 옳지 않은 것은? [2점]
국민 징용령이 공포되었다.
국가 총동원법이 발표되었다.
농촌 진흥 운동이 시작되었다.
미곡 공출 제도가 시행되었다.
학도 지원병 제도가 실시되었다.
제시된 법령은 경작을 목적으로 하는 토지의 임대차에 적용되며, 소작지 임대차 기간을 3년 이상으로 정하고 임차인에게 배신행위가 없는 한 임대인이 임대차 갱신을 거절할 수 없도록 규정하고 있다. 이는 1934년에 시행된 조선 농지령이다.
따라서 이후의 사실이 아닌 것은 농촌 진흥 운동이다. 이 운동은 대공황 이후 농촌의 궁핍과 소작 쟁의 확산에 대응해 일제가 1932년부터 추진한 것으로, 조선 농지령보다 앞서 시작되었다. 조선 농지령 자체가 농촌 진흥 운동의 흐름 속에서 소작 분쟁을 무마하려고 마련된 조치였다.
나머지는 모두 1930년대 후반 이후의 전시 수탈 정책이다. 국가 총동원법(1938)과 국민 징용령(1939)이 잇달아 시행되었고, 태평양 전쟁기에는 미곡 공출 제도와 학도 지원병 제도(1943)로 물자와 인력을 강제 동원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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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 (나) 사이의 시기에 있었던 사실로 옳은 것은? [3점]
조선 혁명군이 영릉가에서 일본군에 승리하였다.
대한민국 임시 정부 직할 부대로 참의부가 결성되었다.
조선 민족 전선 연맹 산하에 조선 의용대가 조직되었다.
일본의 사주를 받은 마적단이 훈춘 일본 영사관을 불태웠다.
북로 군정서군 등 연합 부대가 청산리 일대에서 일본군에 승리 하였다.
(가)는 독립군이 일본군의 공세를 피해 러시아 스보보드니로 이동한 뒤 지휘권을 둘러싼 내분이 일어났고, 러시아 적군이 무장 해제를 요구하며 강제 해산시키는 과정에서 수많은 독립군이 희생되었다는 내용이다. 1921년의 자유시 참변이다.
(나)는 조선 총독부 경무국장 미쓰야와 중국 봉천성 경무처장 위전 사이에 맺어져 만주의 항일 한인 단체 해산과 지도자 체포·인도를 규정한 협정으로, 1925년의 미쓰야 협정이다.
따라서 1921년과 1925년 사이의 사실을 찾아야 한다. 자유시 참변 이후 만주로 돌아온 독립군은 조직을 재정비하여 1923년 참의부를 결성하였는데, 참의부는 대한민국 임시 정부 직할 부대를 표방하였다.
나머지는 시기가 벗어난다. 훈춘 사건과 청산리 대첩은 1920년으로 자유시 참변 이전이고, 조선 혁명군의 영릉가 전투는 1932년, 조선 민족 전선 연맹 산하 조선 의용대 조직은 1938년의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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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 ~ (다) 운동에 대한 설명으로 옳은 것은? [2점]
(가) - 통감부의 방해 등으로 실패하였다.
(가) - 조만식, 이상재 등의 주도로 시작되었다.
(나) - 공사 노비법의 혁파에 영향을 주었다.
(나) - 평양에서 시작되어 전국적으로 확산되었다.
(다) - 대한매일신보의 후원을 받아 추진되었다.
(가)는 "입어라, 조선 사람이 짠 것을"이라며 국산품 애용을 외치는 장면으로 물산 장려 운동이고, (나)는 "공평은 사회의 근본"이라며 모욕적 칭호와 차별 철폐를 요구하는 형평 운동, (다)는 어린이를 어른보다 높이 대접하라고 호소하는 소년 운동이다.
이 가운데 옳은 설명은 물산 장려 운동에 관한 것이다. 이 운동은 1920년 평양에서 조만식이 조선 물산 장려회를 발기하며 시작되었고, 1923년 서울에서 조선 물산 장려회가 창립될 때 이상재 등이 참여하면서 전국으로 확산되었다.
형평 운동은 백정에 대한 사회적 차별 철폐를 내건 운동으로 1923년 진주에서 조선 형평사가 창립되며 시작되었으므로 평양에서 시작되었다는 서술은 맞지 않고, 노비제와 관련된 공사 노비법 혁파는 형평 운동보다 훨씬 앞선 갑오개혁 무렵의 조치이다.
한편 통감부의 방해로 좌절되고 대한매일신보의 후원을 받은 것은 1907년의 국채 보상 운동이므로, 소년 운동이나 물산 장려 운동에 대한 설명이 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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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 (나) 주장을 한 인물의 활동으로 옳지 않은 것은? [3점]
(가) - 국제 연맹에 위임 통치 청원을 시도하였다.
(가) - 여운형과 함께 좌우 합작 위원회를 조직하였다.
(나) - 의거 활동을 전개하기 위해 한인 애국단을 결성하였다.
(나) - 분단을 막기 위해 평양에 가서 김일성 등과 회담하였다.
(가), (나) - 신탁 통치에 반대하는 운동을 전개하였다.
(가)는 미·소 공동 위원회 재개를 기대할 수 없으니 "남방만이라도 임시 정부 혹은 위원회 같은 것을 조직"해 소련의 철퇴를 세계 여론에 호소하자는 주장으로, 이승만의 1946년 정읍 발언이다. (나)는 "38도선을 베고 쓰러질지언정 단독 정부를 세우는 데는 협력하지 아니하겠다"는 김구의 「삼천만 동포에게 읍고함」이다.
따라서 옳지 않은 것은 이승만이 좌우 합작 위원회를 조직하였다는 설명이다. 좌우 합작 운동은 여운형과 김규식이 중심이 되어 추진하였고, 단독 정부 수립을 주장한 이승만은 여기에 참여하지 않았다.
나머지는 모두 사실에 부합한다. 이승만은 1919년 국제 연맹에 위임 통치 청원을 시도하여 뒷날 국민 대표 회의에서 비판을 받았고, 김구는 1931년 한인 애국단을 결성해 이봉창·윤봉길 의거를 이끌었으며 1948년 평양에서 김일성 등과 남북 협상에 임하였다.
또한 두 사람은 모두 모스크바 3국 외상 회의 결정이 알려진 뒤 신탁 통치 반대 운동에 앞장섰다는 공통점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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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법령을 제정한 국회에 대한 설명으로 옳지 않은 것은? [2점]
우리나라 최초의 보통 선거를 통해 구성되었다.
대통령을 행정부 수반으로 규정한 헌법을 제정하였다.
유상 매수, 유상 분배 원칙의 농지 개혁법을 통과시켰다.
일제가 남긴 재산 처리를 위한 귀속 재산 처리법을 제정하였다.
초대 대통령에 한해 중임 제한을 폐지하는 내용의 개헌안을 통과시켰다.
제시된 법령은 한일 합병에 협력하거나 국권 침해 조약에 조인·모의한 자, 독립운동가와 그 가족을 살상·박해한 자를 처벌하고 재산을 몰수하도록 규정하고 있다. 1948년에 제정된 반민족 행위 처벌법이며, 이를 만든 것은 제헌 국회이다.
따라서 옳지 않은 것은 초대 대통령에 한해 중임 제한을 폐지하는 개헌안 통과이다. 이는 1954년 이른바 사사오입 개헌으로, 제헌 국회가 아니라 제3대 국회에서 이루어진 일이다.
나머지는 제헌 국회의 활동으로 옳다. 제헌 국회는 1948년 5·10 총선거라는 우리나라 최초의 보통 선거로 구성되었고, 대통령을 행정부 수반으로 규정한 제헌 헌법을 제정하였다.
또한 유상 매수·유상 분배 원칙의 농지 개혁법과, 일제가 남긴 재산을 처리하기 위한 귀속 재산 처리법도 제헌 국회에서 통과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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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에 들어갈 수 있는 사진으로 적절한 것을 <보기>에서 고른 것은? [2점]
ㄱ, ㄴ
ㄱ, ㄷ
ㄴ, ㄷ
ㄴ, ㄹ
ㄷ, ㄹ
화면은 1948년부터 현재까지의 주요 사건을 대통령 간선제 시기와 직선제 시기로 나누어 정리한 것으로, 지금 선택된 탭은 직선제 시기이며 이미 남북 정상 회담 사진이 함께 배치되어 있다. 따라서 (가)에는 대통령을 국민이 직접 뽑던 때의 장면이 들어가야 한다.
대통령 직선제가 시행된 시기는 1952년 발췌 개헌 이후, 1962년 개헌으로 성립한 제3공화국 시기, 그리고 1987년 6월 민주 항쟁의 결과로 개정된 헌법 이후이다.
보기 가운데 서울 올림픽 대회는 1988년으로 직선제가 회복된 뒤의 일이고, 7·4 남북 공동 성명은 1972년 7월로 유신 헌법이 선포되기 전, 즉 직선제로 대통령을 뽑던 때의 사건이다. 이 둘이 (가)에 들어갈 수 있다.
반면 인천 상륙 작전은 1950년으로 제헌 헌법에 따라 국회가 대통령을 선출하던 간선제 시기이고, 부·마 민주 항쟁은 1979년으로 통일 주체 국민 회의가 대통령을 뽑던 유신 체제의 간선제 시기이므로 알맞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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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 ~ (다)를 발표된 순서대로 옳게 나열한 것은? [2점]
(가) - (나) - (다)
(가) - (다) - (나)
(나) - (가) - (다)
(나) - (다) - (가)
(다) - (나) - (가)
제시된 세 자료는 모두 민주화를 요구한 선언문이다. 3선 개헌을 "자유 민주에의 반역"으로 규정하고 "헌정 20년간 모든 호헌 세력"의 결집을 호소한 글은 대통령의 세 번째 연임을 가능하게 한 개헌이 추진되던 1969년의 반대 성명이다.
"3·1절 쉰일곱 돌"을 맞아 1919년 3월 1일의 함성을 상기하며 '민주 구국 선언'을 국내외에 선포하겠다고 밝힌 글은 3·1운동으로부터 57년이 지난 1976년에 명동성당에서 발표된 것이다. 긴급조치가 이어지던 유신 체제 아래에서 재야인사들이 유신 헌법 철폐와 민주 정부 수립을 요구한 선언이다.
"꽃다운 젊은이를 야만적 고문으로 죽여 놓고" "4·13 폭거를 철회시키기 위한 민주 장정을 시작한다"는 글은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과 개헌 논의를 중단시킨 호헌 조치가 겹친 1987년의 국민대회 선언이다. 이 선언을 계기로 6월 민주 항쟁이 전국으로 번졌다.
따라서 발표 순서는 3선 개헌 반대 성명(1969) → 3·1 민주 구국 선언(1976) → 호헌 철폐를 요구한 국민대회 선언(1987)이다.
내용에 오류가 있거나 최신 법령·기준과 다른 부분이 보이면 알려주세요. 확인 후 반영하겠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