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능력검정시험 고급] 제28회 기출문제 해설 페이지
(가) 시대의 생활 모습으로 옳은 것은? [1점]
주로 동굴이나 막집에서 살았다.
가락바퀴를 이용하여 실을 뽑았다.
지배자의 무덤으로 고인돌을 만들었다.
거푸집을 이용하여 세형 동검을 제작하였다.
빗살무늬 토기를 사용하여 식량을 저장하였다.
제시된 자료의 공주 석장리 유적과 뗀석기(주먹도끼)는 (가)가 구석기 시대임을 알려 준다. 구석기인들은 사냥과 채집으로 먹을거리를 구하며 이동 생활을 하였기 때문에 동굴이나 바위 그늘, 강가의 막집에서 살았다. 반달 돌칼로 벼를 수확한 것은 청동기, 빗살무늬 토기와 가락바퀴·뼈바늘은 신석기, 반량전·명도전 사용은 철기 시대의 모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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밑줄 그은 ‘이 나라’에 대한 설명으로 옳은 것은? [2점]
신성 지역인 소도가 존재하였다.
혼인 풍습으로 서옥제가 있었다.
여러 가(加)들이 별도로 사출도를 다스렸다.
매년 10월에 무천이라는 제천 행사를 열었다.
사회 질서를 유지하기 위해 8조법을 만들었다.
대화에서 다른 부족의 영역을 침범하면 노비나 소·말로 변상하는 책화(責禍) 풍습과, 특산물로 단궁·과하마·반어피가 있었다는 점이 제시되어 있습니다. 이 두 가지는 모두 동예를 가리키는 대표적 특징으로, 책화는 읍락 간 경계를 엄격히 지킨 공동체 질서를, 단궁(작은 활)·과하마(작은 말)·반어피(바다표범 가죽)는 동해안 지역의 산물을 보여 줍니다.
따라서 옳은 설명은 매년 10월에 무천이라는 제천 행사를 열었다는 내용입니다. 동예는 군장인 읍군·삼로가 다스렸고, 족외혼을 지켰습니다.
나머지는 다른 나라의 풍습입니다. 신성 지역 소도와 천군은 삼한, 사위가 처가에 머무는 서옥제는 고구려, 마가·우가 등 여러 가(加)가 사출도를 다스린 것은 부여, 8조법은 고조선의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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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 (나) 전쟁에 대한 설명으로 옳은 것은? [2점]
(가) - 나·당 연합군이 평양성을 공격하였다.
(가) - 을지문덕이 이끄는 고구려군이 수의 군대를 크게 물리쳤다.
(나) - 수 양제가 대군을 보내 고구려를 침공하였다.
(나) - 관구검이 이끄는 위의 군대가 고구려를 침략하였다.
(가), (나) - 연개소문이 주도하여 당군의 침략에 맞서 싸웠다.
(가)는 살수(薩水)에서 적군이 강을 반쯤 건널 때 공격해 우둔위장군 신세웅이 전사했고, 요하를 건넌 30만 5천 명 가운데 요동성으로 돌아간 것은 겨우 2천 7백 명이었다는 기록입니다. 이는 612년 을지문덕이 수 양제가 보낸 별동대를 격파한 살수 대첩입니다.
(나)는 여러 장수가 안시성을 공격하며 60일 동안 50만 인을 동원해 토산을 쌓았으나, 고구려군이 무너진 곳으로 나가 싸워 토산을 빼앗아 지켰고 결국 황제가 군사를 돌리게 했다는 기록입니다. 645년 당 태종의 침입 때 벌어진 안시성 싸움으로, 이때 고구려의 정권을 잡고 있던 인물은 연개소문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옳은 설명은 (가)에 대해 을지문덕이 이끄는 고구려군이 수의 군대를 크게 물리쳤다는 내용입니다. 나·당 연합군의 평양성 공격은 668년 고구려 멸망 때의 일이어서 (가)와 맞지 않고, 수 양제의 대군 침공은 (가)에 해당하는 사실이므로 (나)의 설명으로는 틀립니다. 관구검이 이끈 위의 침략은 3세기 동천왕 때의 일이라 (나)와 다르며, 연개소문이 맞선 것은 당군이 쳐들어온 (나)뿐이므로 (가)·(나) 모두에 해당한다는 서술도 옳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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밑줄 그은 ‘태왕’에 대한 설명으로 옳은 것은? [2점]
태학을 설립하여 인재를 양성하였다.
영락이라는 독자적인 연호를 사용하였다.
전진의 순도를 통해 불교를 수용하였다.
당의 침입에 대비하여 천리장성을 쌓았다.
평양으로 천도하여 남진 정책을 본격화하였다.
자료는 신채호의 『조선상고사』로, 태왕의 목적이 북방의 강성한 선비를 정벌하여 지금의 봉천·직예 등의 땅을 차지하는 것이었고, 중국의 효웅들이 기세가 꺾여 수천 리의 토지를 고구려에 넘겨줌으로써 시호와 같이 토지를 광개(廣開)함에 이르렀다고 서술합니다. '토지를 널리 넓혔다'는 시호에서 이 태왕이 광개토 대왕임을 알 수 있습니다.
광개토 대왕은 만주 일대로 영토를 크게 넓히고 백제를 압박했으며, 신라에 침입한 왜를 물리치기 위해 5만의 군대를 파견하기도 했습니다. 특히 영락(永樂)이라는 독자적인 연호를 사용하여 고구려의 자주적 위상을 드러낸 점이 이 왕의 대표적 업적입니다.
나머지는 다른 왕의 업적입니다. 태학 설립과 전진의 순도를 통한 불교 수용은 소수림왕, 평양 천도와 남진 정책 본격화는 장수왕, 당의 침입에 대비한 천리장성 축조는 영류왕 때 시작되어 보장왕 때 완성된 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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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 (나) 사이에 있었던 사실로 옳은 것은? [3점]
백제가 웅진으로 천도하였다.
신라가 대가야를 멸망시켰다.
고구려가 낙랑군을 축출하였다.
신라가 매소성에서 당을 물리쳤다.
신라가 함경도 지역까지 진출하였다.
제시된 두 자료는 모두 『삼국사기』 신라본기의 기록입니다. (가)는 고구려 왕 거련(장수왕)이 몸소 군사를 거느리고 백제를 공격하자 백제 왕 경(개로왕)이 아들 문주를 보내 구원을 요청했으나, 구원병이 도착하기 전에 백제가 무너지고 개로왕이 피살되었다는 내용입니다. 이는 장수왕의 남진 정책으로 한성이 함락된 475년의 일입니다.
(나)는 금관국(금관가야)의 왕 김구해가 왕비와 세 아들 노종·무덕·무력을 데리고 나라의 창고에 있던 보물을 가지고 와서 항복했다는 내용으로, 신라 법흥왕 때인 532년 금관가야가 신라에 병합된 사건입니다.
따라서 두 사건 사이인 5세기 후반~6세기 전반에 해당하는 사실을 찾아야 합니다. 한성이 함락된 직후 즉위한 문주왕이 도읍을 웅진(공주)으로 옮긴 것이 바로 이 시기의 사실입니다.
고구려의 낙랑군 축출(313년)은 (가) 이전의 일이며, 신라가 함경도 지역까지 진출하고(진흥왕의 북방 진출) 대가야를 멸망시킨 것(562년), 매소성에서 당을 물리친 것(675년)은 모두 (나) 이후의 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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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가상 인터뷰의 주인공에 대한 설명으로 옳은 것은? [2점]
황룡사 구층 목탑의 건립을 건의하였다.
무애가를 만들어 불교의 대중화에 힘썼다.
국청사를 중심으로 해동 천태종을 창시하였다.
불교 개혁을 주장하며 수선사 결사를 제창하였다.
유불 일치설을 주장하여 유교와 불교의 조화를 도모하였다.
가상 인터뷰에서 진행자가 스님이 저술한 저서로 『대승기신론소』, 『십문화쟁론』을 언급하고, 스님은 “모든 것은 한마음에서 나온다”며 화합과 회통(화쟁)이 중요하다고 답하고 있습니다. 이 두 저서와 일심(一心)·화쟁 사상은 신라의 승려 원효를 가리키는 결정적 단서입니다.
원효는 종파 간의 대립을 극복하고자 화쟁 사상을 주장하는 한편, 무애가를 지어 부르며 어려운 교리를 모르는 일반 백성도 “나무아미타불”만 외면 극락에 갈 수 있다는 아미타 신앙을 전파하여 불교의 대중화에 크게 기여했습니다.
황룡사 구층 목탑 건립을 건의한 인물은 자장이고, 국청사를 중심으로 해동 천태종을 창시한 인물은 고려의 의천입니다. 수선사 결사를 제창한 인물은 지눌, 유불 일치설을 주장한 인물은 혜심으로 모두 고려 시대 승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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밑줄 그은 ‘이들’에 대한 설명으로 옳은 것은? [3점]
완산주를 도읍으로 정하였다.
안동 도호부를 요동으로 몰아냈다.
백강에서 왜군과 함께 당군에 맞서 싸웠다.
중국의 오월과 후당에 외교 사절을 보냈다.
신라의 금성을 습격하여 경애왕을 살해하였다.
가상의 역사 신문 기사 제목은 “부여풍을 왕으로 추대하다”이며, 본문에는 왕족 복신과 승려 도침 등이 주류성을 근거지로 부흥의 기치를 내걸자 주변 지역의 200여 성이 호응했고, ‘이들’이 부여풍을 왕으로 받들고 국가 체제를 갖추었다고 나옵니다. 즉 밑줄 그은 ‘이들’은 660년 사비성 함락 이후 일어난 백제 부흥 운동 세력입니다.
백제 부흥군은 왜에 머물던 왕자 부여풍을 맞아들여 왕으로 삼았고, 663년 왜가 보낸 지원군과 함께 백강(백촌강)에서 나당 연합군의 당군에 맞서 싸웠으나 크게 패하면서 부흥 운동은 사실상 끝을 맺었습니다.
완산주를 도읍으로 정한 것은 견훤의 후백제, 신라 금성을 습격해 경애왕을 살해하고 중국의 오월·후당에 사절을 보낸 것도 후백제와 관련된 사실입니다. 안동 도호부를 요동으로 몰아낸 것은 나당 전쟁을 승리로 이끈 신라의 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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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 단체에 대한 설명으로 옳은 것은? [1점]
경당에서 글과 활쏘기를 배웠다.
진흥왕 때 국가적인 조직으로 정비되었다.
박사와 조교를 두어 유교 경전을 가르쳤다.
정사암에 모여 국가의 중대사를 결정하였다.
귀족들로 구성되어 만장일치제로 운영되었다.
역사 용어 사전의 설명을 보면 (가)는 국선도·풍월도라고도 불렸고, 명산 대천을 돌아다니며 도의를 연마하고 무예를 수련하여 유사시 전투에 참여했으며, 원광이 제시한 ‘세속 5계’를 행동 규범으로 삼아 신라의 삼국 통일에 크게 기여했다고 나옵니다. 이는 신라의 청소년 수련 단체인 화랑도에 대한 설명입니다.
화랑도는 본래 씨족 사회의 청소년 집단에서 유래했으나, 진흥왕 때 국가적인 조직으로 정비되면서 인재를 양성하고 계층 간 갈등을 완화하는 기능을 수행했습니다. 김유신을 비롯한 많은 인물이 화랑 출신으로 삼국 통일 과정에서 활약했습니다.
경당에서 글과 활쏘기를 배운 것은 고구려의 지방 교육 기관에 대한 설명이고, 박사와 조교를 두어 유교 경전을 가르친 곳은 통일 신라의 국학입니다. 정사암 회의는 백제, 만장일치제로 운영된 귀족 회의는 신라의 화백 회의에 해당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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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에 들어갈 문화유산으로 옳은 것은? [2점]
문화유산 카드에는 (가)가 국보 제30호, 소재지는 경상북도 경주시이며, 현존하는 신라 석탑 중 가장 오래된 것으로 백제 석탑이 목탑적 요소를 보이는 것과 달리 돌을 벽돌 모양으로 다듬어 쌓은 점이 특징이라고 적혀 있습니다. 이는 선덕 여왕 때 세워진 분황사 모전석탑을 가리킵니다.
보기 그림 중 이에 해당하는 것은 돌을 벽돌처럼 네모나게 다듬어 층층이 쌓아 올린 3층 규모의 탑으로, 기단 위 모서리에 사자상이 놓이고 1층 몸돌에 감실 문과 그 좌우를 지키는 인왕상이 새겨진 탑입니다. ‘모전(模塼)’이란 벽돌을 모방했다는 뜻으로, 실제 벽돌이 아니라 안산암을 벽돌 모양으로 가공해 쌓은 것입니다.
나머지 그림들은 카드의 설명과 맞지 않습니다. 사찰 마당에 선 단정한 비례의 삼층 석탑과 들판에 우뚝 서 있는 웅장한 삼층 석탑은 모두 통일 신라 시기에 완성된 전형적인 석탑 양식이어서 ‘현존하는 신라 석탑 중 가장 오래된 것’이라는 설명에 어긋납니다. 또 여러 층이 높이 솟아 있고 지붕이 층단을 이루는 나머지 두 탑은 벽돌을 구워 쌓았거나 그 양식을 본떠 세운 다층탑으로, 경주에 있는 이 탑과는 소재지와 형태가 모두 다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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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문화유산을 만든 국가에 대한 설명으로 옳은 것을 <보기>에서 고른 것은? [2점]
ㄱ, ㄴ
ㄱ, ㄷ
ㄴ, ㄷ
ㄴ, ㄹ
ㄷ, ㄹ
제시된 문화유산은 석가불과 다보불이 나란히 앉은 모습을 형상화한 불상으로, 동경용원부(東京龍原府) 유적지에서 발견되었고 날카로운 광배와 양감 있는 연꽃 표현 등이 고구려 불상 조각의 전통을 계승한 것으로 평가된다고 설명되어 있습니다. 동경용원부는 5경 중 하나이므로 이 나라는 발해이며, 이 유물은 이불병좌상입니다.
발해는 당의 3성 6부를 받아들이면서도 6부의 명칭을 충·인·의·지·예·신이라는 유교식으로 정하고 정당성 아래 좌사정·우사정이 각각 3부씩 관할하는 이원적 운영을 하는 등 독자성을 보였습니다. 또한 무왕의 인안, 문왕의 대흥처럼 독자적인 연호를 사용하여 중국과 대등하다는 자주 의식을 드러냈습니다.
서경을 북진 정책의 전진 기지로 삼은 것은 고려 태조 왕건의 정책이며, 지방관을 감찰하기 위해 외사정을 파견한 것은 통일 신라 문무왕 때의 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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밑줄 그은 ‘왕’의 업적으로 옳은 것은? [2점]
관학의 재정 기반을 마련하고자 양현고를 두었다.
빈민을 구제하기 위하여 흑창을 처음 설치하였다.
쌍기의 건의를 받아들여 과거 제도를 실시하였다.
전국의 주요 지역에 12목을 설치하고 지방관을 파견하였다.
전민변정도감을 두어 권문세족의 경제 기반을 약화시키고자 하였다.
자료에서 왕은 “짐이 정무를 새로이 하게 되어 혹시 잘못된 정치가 있을까 두렵다”며 중앙의 5품 이상 관리들에게 각각 상서(봉사)를 올려 정치의 옳고 그름을 논하라고 명했고, 이에 최승로가 시무 28조를 올렸다고 나옵니다. 시무 28조를 받아들인 왕은 고려 성종입니다.
성종은 최승로의 건의를 수용해 유교 정치 이념을 통치의 근본으로 삼고, 지방 호족을 통제하기 위해 전국의 주요 지역에 12목을 설치하고 지방관을 파견했습니다. 또한 국자감을 정비하고 2성 6부의 중앙 관제를 마련했으며, 의창과 상평창을 두었습니다.
양현고를 설치한 왕은 예종, 흑창을 처음 둔 왕은 태조, 쌍기의 건의로 과거제를 실시한 왕은 광종, 전민변정도감을 두어 권문세족의 경제 기반을 약화시키려 한 왕은 공민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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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마)에 들어갈 내용으로 옳은 것은? [2점]
(가) - 국정 자문을 위한 문신들의 숙위(宿衛) 기구
(나) - 최우의 집에 설치된 인사 행정 담당 기구
(다) - 최씨 무신 정권에서 국정을 총괄한 최고 권력 기구
(라) - 치안 유지 및 전투의 임무를 수행한 군사 기구
(마) - 재신과 추신으로 구성되어 법제와 격식을 논의한 회의 기구
제시된 표는 무신 집권기 주요 기구의 명칭과 성격을 짝지은 것으로, 중방(가), 도방(나), 교정도감(다), 정방(라), 서방(마) 순으로 배열되어 있습니다. 각 기구의 성격을 정확히 알고 있어야 올바른 짝을 고를 수 있습니다.
이 중 교정도감은 최충헌이 설치한 기구로, 국정을 총괄하며 감찰·인사·조세 징수까지 관장한 최씨 무신 정권의 최고 권력 기구였습니다. 그 우두머리인 교정별감은 최씨 집권자가 대대로 세습하였으므로, 표에서 교정도감에 해당하는 칸의 설명으로 알맞습니다.
나머지는 짝이 어긋나 있습니다. 중방은 2군 6위의 상장군·대장군이 모인 무신들의 회의 기구이고, 도방은 경대승이 처음 설치한 사병 집단으로 집권자의 신변을 경호했습니다. 정방은 최우가 자기 집에 설치한 인사 행정 담당 기구이며, 서방은 최우가 문신들을 등용해 국정 자문을 맡긴 숙위 기구입니다.
또한 치안 유지와 전투 임무를 수행한 군사 기구는 야별초에서 비롯된 삼별초이고, 재신과 추신으로 구성되어 법제와 격식을 논의한 회의 기구는 식목도감으로 무신 정권기의 기구가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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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의 침입에 대한 고려의 대응으로 옳은 것은? [3점]
별무반을 편성하고 동북 9성을 축조하였다.
김윤후의 활약으로 처인성에서 승리하였다.
화포를 이용하여 진포에서 대승을 거두었다.
초조 대장경을 만들어 적을 물리치기를 기원하였다.
쌍성총관부를 공격하여 철령 이북의 땅을 수복하였다.
『고려사』에서 인용한 자료에는 (가)의 군사가 곽주로 침입해 성이 함락되었고, 양규가 흥화진에서 군사 7백여 명을 이끌고 통주까지 가서 군사 1천여 명을 수습한 뒤, 밤중에 곽주로 들어가 적을 물리치고 성 안에 있던 남녀 7천여 명을 통주로 옮겼다고 나옵니다. 흥화진·통주·곽주와 양규의 활약은 거란(요)의 2차 침입(1010, 현종 때) 당시의 상황입니다.
강조의 정변을 구실로 거란 성종이 직접 쳐들어와 개경이 함락되고 현종이 나주로 피난하는 위기를 겪었으나, 양규가 후방에서 적을 공격해 큰 타격을 주었습니다. 이 무렵 고려는 부처의 힘으로 거란의 침입을 물리치기를 기원하며 초조대장경을 조판하기 시작했습니다.
별무반 편성과 동북 9성 축조는 여진에 대한 대응이고, 김윤후의 처인성 승리는 몽골 침입 때의 일입니다. 화포를 이용한 진포 대첩은 왜구를 격퇴한 것이며, 쌍성총관부 공격은 공민왕이 원의 지배에서 벗어나기 위해 단행한 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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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 지역에서 있었던 사실로 옳은 것은? [2점]
육영 공원이 설립되었다.
최초의 근대적 조약이 체결되었다.
조선 형평사 중앙 총본부가 있었다.
물산 장려 운동이 처음 시작되었다.
영국군에 의해 불법으로 점령되었다.
‘우리 지역의 역사 탐구’ 칠판에는 (가) 지역의 역사로 통일 신라 시기 혈구진 설치, 고려 대몽 항쟁기 임시 수도, 조선 시대 정족산 사고(史庫) 설치 세 가지가 정리되어 있습니다. 이 세 가지를 모두 충족하는 곳은 강화도입니다.
강화도는 최우가 몽골에 맞서기 위해 도읍을 옮긴 곳이며, 조선 후기에는 실록을 보관하는 정족산 사고가 있었습니다. 개항기에는 운요호 사건을 계기로 1876년 이곳에서 조일 수호 조규(강화도 조약)가 체결되었는데, 이는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적 조약이자 불평등 조약이었습니다.
육영 공원은 한성(서울)에 세워진 근대식 관립 학교이고, 조선 형평사 중앙 총본부가 있던 곳은 진주입니다. 물산 장려 운동이 처음 시작된 곳은 평양이며, 영국군에 불법 점령된 섬은 거문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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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자료에 해당하는 문화유산으로 옳은 것은? [2점]
제시된 자료는 국보 제18호이며 경상북도 영주시에 있는 건물, 지붕은 팔작지붕, 처마를 받치는 공포를 기둥 위에만 올린 주심포 양식, 기둥은 배흘림 기법, 내부에 소조여래좌상이 있다고 설명하고 있다.
이 조건을 모두 만족하는 문화유산은 부석사 무량수전이다. 고려 후기 목조 건축을 대표하는 건물로, 배흘림기둥과 주심포 양식이 함께 나타나는 대표 사례이며 내부의 소조여래좌상(국보 제45호)도 잘 알려져 있다.
다른 후보들은 조건이 어긋난다. 수덕사 대웅전은 충청남도 예산에 있는 맞배지붕 건물이고, 봉정사 극락전은 경북 안동의 맞배지붕 건물로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목조 건축물이다. 불국사 대웅전과 쌍계사 대웅전은 임진왜란 이후 다시 지어진 조선 후기 건물로, 공포를 기둥 사이에도 배치한 다포 양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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밑줄 그은 ‘이 역사서’에 대한 설명으로 옳은 것은? [1점]
유교 사관에 기초하여 기전체 형식으로 서술하였다.
자주적 입장에서 단군의 건국 이야기를 수록하였다.
사초, 시정기 등을 바탕으로 실록청에서 편찬하였다.
불교사를 중심으로 고대의 민간 설화 등을 수록하였다.
고구려 건국 시조의 일대기를 서사시 형태로 서술하였다.
자료는 이 역사서가 1145년에 김부식 등이 고려 인종의 명을 받아 편찬했고, 구성이 본기 28권(고구려 10권·백제 6권·신라와 통일 신라 12권), 지 9권, 표 3권, 열전 10권이라고 밝히고 있다. 이는 현존하는 우리나라 최고(最古)의 역사서인 삼국사기이다.
본기·지·표·열전으로 나누어 서술하는 방식이 바로 기전체이며, 삼국사기는 신라 계승 의식과 유교적 합리주의 사관에 입각해 서술된 관찬 사서이다. 따라서 유교 사관에 기초해 기전체로 서술했다는 설명이 옳다.
단군의 건국 이야기를 자주적으로 수록한 것은 제왕운기와 삼국유사이고, 불교사와 고대 민간 설화를 담은 것은 삼국유사이다. 사초와 시정기를 바탕으로 실록청에서 편찬한 것은 조선왕조실록, 고구려 시조 동명왕의 일대기를 서사시로 쓴 것은 이규보의 동명왕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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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라) 제도를 시행된 순서대로 옳게 나열한 것은? [3점]
(가) - (나) - (다) - (라)
(가) - (나) - (라) - (다)
(나) - (가) - (다) - (라)
(나) - (가) - (라) - (다)
(다) - (나) - (가) - (라)
자료의 네 제도를 각각 확인하면, 처음으로 직관·산관 각 품의 전시과를 제정한 것은 고려 경종 1년(976)의 시정 전시과이고, 매달 주던 녹봉을 없애고 다시 녹읍을 준 것은 통일 신라 경덕왕 16년(757)의 녹읍 부활이다.
대왕대비가 전지하여 직전의 세를 소재지 관리가 감독해 거두게 한 것은 조선 성종 1년(1470)의 관수관급제이며, 도평의사사가 건의하여 과전법을 제정한 것은 고려 공양왕 3년(1391)의 일이다.
따라서 시행 순서는 녹읍 부활(757) → 시정 전시과(976) → 과전법(1391) → 관수관급제(1470), 곧 (나) - (가) - (라) - (다) 순이 된다.
토지 제도의 흐름은 신라의 녹읍·관료전, 고려의 전시과, 고려 말 과전법, 조선의 직전법과 관수관급제, 명종 때 직전법 폐지로 이어진다는 큰 줄기로 정리해 두면 순서 문제를 빠르게 풀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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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 세시 풍속에 해당하는 속담으로 적절한 것은? [1점]
입춘 거꾸로 붙였나.
우수 경칩에 대동강 물이 풀린다.
옷은 시집올 때처럼 음식은 한가위처럼.
게으른 선비 설날에 다락에 올라가서 글 읽는다.
정월 보름달을 먼저 보는 사람은 복을 많이 받는다.
자료 카드는 (가)의 시기를 음력 8월 15일, 별칭을 가배·중추절, 세시 음식을 햇곡식으로 만든 송편이라 하고, 유래로 신라 유리 이사금 때 6부를 두 편으로 나누어 여자들이 길쌈을 겨루고 진 편이 술과 음식을 내어 사례했다는 삼국사기 기록을 들고 있다. 이는 추석(한가위)이다.
추석은 한 해 농사의 수확에 감사하며 햇곡식과 햇과일로 차례를 지내는 명절이므로, 음식이 가장 풍성한 때를 빗댄 “옷은 시집올 때처럼 음식은 한가위처럼”이라는 속담이 어울린다.
나머지 속담은 다른 절기·명절의 것이다. 거꾸로 붙인 입춘첩과 대동강 물이 풀린다는 말은 각각 입춘과 우수·경칩이라는 절기에 해당하고, 다락에 올라가 글 읽는 게으른 선비와 보름달을 먼저 본다는 이야기는 설날과 정월 대보름의 속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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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 화폐에 대한 설명으로 옳은 것은? [1점]
청과의 교역에 사용되었다.
조선 시대에 전국적으로 유통되었다.
우리나라에서 최초로 발행된 화폐였다.
입구가 넓어 활구라고 불리기도 하였다.
경복궁 중건의 재원을 마련하고자 발행되었다.
자료의 조서는 간악한 백성들이 구리를 섞어 몰래 주조하는 것을 막고자 (가)에 표식을 새겨 영구한 법식으로 삼으라 하였고, 이것은 은 1근으로 만들었으며 모양이 우리나라의 지형을 본떴다고 설명한다. 이는 고려 숙종 때 만들어진 은병이다.
은병은 입구가 넓다는 데서 활구라고도 불렸으며, 은 한 근이라는 큰 가치를 지녀 주로 대규모 거래에 쓰인 고액 화폐였다. 따라서 입구가 넓어 활구라 불렸다는 설명이 옳다.
다른 설명은 시기가 맞지 않는다. 우리나라 최초의 화폐는 성종 때의 건원중보이고, 조선 후기에 전국적으로 유통된 화폐는 상평통보이며, 경복궁 중건 재원 마련을 위해 흥선 대원군이 발행한 것은 당백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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밑줄 그은 ‘왕’의 재위 시기에 있었던 사실로 옳은 것은? [2점]
초계문신제를 실시하여 관리를 재교육하였다.
집현전을 폐지하여 왕권을 강화하고자 하였다.
현량과를 실시하여 신진 사림을 등용하고자 하였다.
균역법을 시행하여 군역의 부담을 줄여주고자 하였다.
탕평비를 건립하여 붕당의 폐해를 경계하고자 하였다.
그림 속 안내인은 이곳이 경기도 남양주시에 있는 조선 제7대 왕의 무덤이며 그 왕이 계유정난을 통해 정권을 장악했다고 말하고 있다. 계유정난으로 김종서·황보인 등을 제거하고 즉위한 제7대 왕은 세조이며, 남양주에 있는 그의 능은 광릉이다.
세조는 왕권을 강화하기 위해 6조 직계제를 부활시키고, 단종 복위 운동에 집현전 학사들이 가담하자 집현전과 경연을 폐지하였다. 또한 직전법을 실시하고 경국대전 편찬에 착수하였다.
나머지는 다른 왕의 정책이다. 초계문신제와 장용영은 정조, 현량과를 통한 사림 등용은 조광조가 활동한 중종 때, 균역법과 탕평비 건립은 영조의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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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그림이 그려진 당시에 볼 수 있는 모습으로 옳은 것은? [2점]
삼강행실도를 읽고 있는 양반
고구마를 밭에 심고 있는 농민
장용영에서 훈련을 받고 있는 군인
천리경으로 별자리를 보고 있는 관리
동의수세보원 처방에 따라 약방문을 짓고 있는 의원
제시된 그림은 안견이 안평대군의 꿈 이야기를 듣고 그린 작품으로, 왼쪽의 현실 세계와 오른쪽의 이상 세계가 대비를 이루면서도 전체적으로 통일된 분위기를 낸다고 설명하고 있다. 이는 몽유도원도로, 1447년(세종 29)에 그려졌다.
따라서 세종 대에 볼 수 있는 모습을 찾아야 한다. 삼강행실도는 1434년(세종 16)에 모범이 될 만한 충신·효자·열녀의 행적을 그림과 함께 엮어 간행한 윤리서이므로, 이를 읽는 양반의 모습은 이 시기와 들어맞는다.
나머지는 모두 훨씬 뒤의 모습이다. 고구마는 18세기 후반 조엄이 일본에서 들여왔고, 장용영은 정조가 설치한 친위 부대이며, 천리경(망원경)은 17세기 이후 청을 통해 서양 문물이 들어오면서 전해졌다. 동의수세보원은 1894년 이제마가 사상 의학을 정리한 의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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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기관에 대한 설명으로 옳은 것은? [3점]
좌수와 별감을 선발하여 운영되었다.
중앙에서 파견된 교수나 훈도가 지도하였다.
국자학, 태학, 사문학으로 나누어 교육하였다.
전국의 부·목·군·현에 하나씩 설립되었다.
국왕으로부터 편액과 함께 서적 등을 받기도 하였다.
배치도와 설명은 이 기관이 선현제향과 학문 연구를 위해 세워진 조선 시대의 사설 교육 기관이며, 향촌 사림의 모임 장소로 시정을 비판하고 공론을 형성했다고 밝힌다. 주요 건물로 위패를 모시고 제향하는 사당, 강연과 회의가 열리는 강당, 기숙사인 재(동재·서재)가 배치되어 있다. 이는 서원이다.
서원 가운데 국가의 공인을 받은 곳은 국왕으로부터 편액(사액)과 함께 서적·토지·노비 등을 하사받았다. 주세붕이 세운 백운동 서원이 이황의 건의로 소수 서원이라는 사액을 받은 것이 그 시작이다.
다른 설명은 서원이 아닌 기관의 것이다. 좌수와 별감을 두어 운영한 것은 유향소, 중앙에서 파견한 교수·훈도가 지도하고 전국의 부·목·군·현에 하나씩 세워진 관학은 향교이며, 국자학·태학·사문학으로 나누어 가르친 것은 고려의 국자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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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 인물에 대한 설명으로 옳은 것은? [2점]
불교 이론을 비판한 불씨잡변을 저술하였다.
만권당에서 원의 성리학자들과 교유하였다.
공납의 부담을 줄이고자 수미법을 주장하였다.
세계 지도인 혼일강리역대국도지도를 만들었다.
군사력 강화를 위해 훈련도감 설치를 건의하였다.
인물 카드는 (가)를 조선 건국의 주역으로 소개하며, 고려 말에서 조선 초까지 활동한 문신 겸 학자로 호가 삼봉, 이성계를 도와 조선 건국을 주도하고 도성의 축조 계획을 세웠으며 왕자의 난 때 이방원에게 죽임을 당했다고 적고 있다. 이는 정도전이다.
정도전은 성리학을 통치 이념으로 세우면서 불교의 교리를 이론적으로 비판한 불씨잡변을 저술하였다. 이 밖에 조선경국전과 경제문감을 지어 재상 중심의 정치 운영을 제시하였다.
나머지는 다른 인물의 활동이다. 만권당에서 원의 학자들과 교유한 이는 이제현, 공납의 폐단을 줄이고자 수미법을 주장한 이는 이이와 유성룡 등이며, 혼일강리역대국도지도는 태종 때 이회·권근 등이 제작하였고, 훈련도감 설치를 건의한 이는 임진왜란 중의 유성룡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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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논의가 이루어진 직접적인 배경으로 옳은 것은? [2점]
청이 조선에 군신 관계를 요구하였다.
일본의 침략으로 선조가 의주로 피난하였다.
청이 나선 정벌을 위하여 군대 파견을 요청하였다.
강홍립이 이끄는 부대가 명의 요청으로 파병되었다.
이괄이 후금의 침입에 대비하여 평안도에 주둔하였다.
대화에서 윤집은 “명은 우리나라에 있어서 부모와 같은 나라인데 부모의 원수인 오랑캐와 어찌 화친을 맺을 수 있겠는가”라며 척화를 주장하고, 최명길은 “정묘년의 굴욕을 생각하면 의리를 지켜 전쟁을 하는 것보다 화친을 맺어 나라를 보존하는 것이 옳다”며 주화를 주장하고 있다.
‘정묘년의 굴욕’이라는 표현에서 이 논의가 정묘호란(1627) 이후임을 알 수 있다. 정묘호란으로 형제 관계를 맺은 후금은 국호를 청으로 바꾸고 조선에 군신 관계를 요구하였고, 이를 두고 조정에서 척화론과 주화론이 맞선 것이 바로 이 자료의 배경이다.
조선이 청의 요구를 거부하자 이어진 것이 병자호란(1636)이며, 인조는 남한산성에서 항전하다 삼전도에서 항복하였다. 선조의 의주 피난은 임진왜란, 강홍립의 파병은 광해군의 중립 외교, 이괄의 평안도 주둔은 이괄의 난과 관련된 사실로 시기가 모두 앞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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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글을 쓴 인물에 대한 설명으로 옳은 것은? [2점]
북한산비가 진흥왕 순수비임을 밝혔다.
서얼 출신으로 규장각 검서관에 기용되었다.
양반전에서 양반의 위선과 무능을 비판하였다.
현지 답사를 바탕으로 지리서인 택리지를 저술하였다.
산줄기, 물줄기, 도로 등을 표시한 대동여지도를 완성하였다.
제시된 글은 “재물은 대체로 우물과 같다. 퍼내면 차고, 버려두면 말라 버린다”는 유명한 비유를 담고 있습니다. 비단옷을 입지 않으면 비단 짜는 사람이 없어지고, 그릇의 기교를 숭상하지 않으면 공장(工匠)의 기예가 망한다는 논리로, 절약보다 소비가 생산을 자극한다고 주장한 대목입니다.
이는 청의 문물을 직접 보고 돌아와 「북학의」를 지은 박제가의 글입니다. 그는 중국이 사치로 망한다면 우리나라는 검소함 탓에 쇠퇴할 것이라며, 수레와 배의 이용, 통상 확대, 소비 촉진을 통한 생산력 증대를 역설하였습니다.
박제가는 서얼 출신이었지만 정조가 서얼 등용의 길을 열어 규장각 검서관에 기용되었고, 이덕무·유득공·서이수와 함께 이른바 4검서관으로 활동하였습니다.
한편 북한산비를 진흥왕 순수비로 고증한 인물은 김정희, 「양반전」으로 양반의 위선을 풍자한 인물은 박지원, 「택리지」의 저자는 이중환, 대동여지도를 완성한 인물은 김정호이므로 이 글의 필자와는 관계가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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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에 들어갈 작품으로 옳지 않은 것은? [2점]
안내문은 영조·정조 시기에 활동한 ‘단원’, 즉 김홍도의 작품을 모아 조선 후기 생활 모습을 보여 주는 특별전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가)에는 김홍도의 풍속화가 들어가야 합니다.
제시된 그림 가운데 훈장 앞에서 우는 아이를 그린 서당, 쇠를 두드리는 대장간, 물레와 베틀로 실을 뽑고 베를 짜는 길쌈, 구경꾼에 둘러싸여 맞붙은 씨름은 모두 김홍도의 풍속화첩에 실린 대표작입니다. 굵고 힘 있는 선으로 서민의 노동과 놀이를 간결한 배경 속에 담아낸 것이 특징입니다.
이와 달리 나귀를 탄 갓 쓴 양반 일행이 들길에서 쓰개를 쓴 여인과 마주치는 장면을 가는 선과 옅은 채색으로 그린 작품은, 남녀의 만남과 양반 사회의 이면을 즐겨 다룬 다른 화가의 풍속화로 김홍도의 작품이 아닙니다. 따라서 이 그림은 특별전에 걸릴 수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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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 종교에 대한 설명으로 옳은 것은? [1점]
하늘에 제사 지내는 초제를 거행하였다.
왕조 교체를 예언하며 백성의 호응을 얻었다.
인내천 사상을 내세워 인간 평등을 주장하였다.
청을 다녀온 사신들에 의하여 서학으로 소개되었다.
유·불·선을 바탕으로 민간 신앙의 요소까지 포함하였다.
병인박해 때 해미에서 수많은 신자가 순교했다는 기사 내용으로 보아 (가)는 천주교다. 천주교는 17세기 청을 다녀온 사신들이 한문 서학서를 들여오면서 학문인 서학으로 먼저 소개되었고, 18세기 후반부터 신앙으로 받아들여졌다. 미륵 신앙은 다른 계통, 동경대전과 용담유사는 동학, 박중빈은 원불교, 단군 숭배는 대종교와 관련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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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대화에 나타난 사건이 일어난 시기를 연표에서 옳게 고른 것은? [2점]
(가)
(나)
(다)
(라)
(마)
대화에서 두 인물은 “남인 세력을 몰아내고 소론과 노론을 대거 등용”했으며, “폐위되어 사가에 계시던 중전마마도 그 후에 복위되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는 남인이 축출되고 서인이 재집권하면서 인현왕후가 복위한 갑술환국(1694)을 가리킵니다.
숙종은 왕권 강화를 위해 집권 붕당을 급격히 교체하는 환국을 거듭하였는데, 기사환국으로 남인이 집권하고 인현왕후가 폐위되었다가, 갑술환국으로 다시 서인이 정권을 잡고 폐비가 복위되었습니다.
연표는 임진왜란(1592) – 인조반정(1623) – 갑인예송(1674) – 영조 즉위(1724) – 규장각 설치(1776) – 공노비 해방(1801) 순으로 되어 있습니다. 1694년은 갑인예송(1674)과 영조 즉위(1724) 사이의 시기에 해당하므로, 그 구간이 정답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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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마) 상인에 대한 설명으로 옳지 않은 것은? [2점]
(가) - 책문 후시를 통해 대외 무역에 종사하였다.
(나) - 신해통공 이후에도 금난전권을 행사하였다.
(다) - 사개치부법이라는 독자적인 회계법을 창안하였다.
(라) - 한강을 중심으로 선박을 이용하여 운송업에 종사하였다.
(마) - 왜관을 중심으로 대일 무역을 전개하였다.
지도는 조선 후기 사상(私商)의 활동 근거지를 표시한 것입니다. 압록강 하구 의주의 만상, 대동강 유역 평양의 유상, 개성의 송상, 한강 유역 한양의 경강 상인, 남동쪽 동래의 내상이 각각 표시되어 있습니다.
금난전권은 한양 시전 상인에게 주어진 특권으로, 정조 때 신해통공(1791)으로 육의전을 제외한 나머지 시전의 금난전권이 폐지되었습니다. 애초에 금난전권을 가진 쪽은 사상이 아니라 시전 상인이었으므로, 평양을 근거지로 삼은 상인 집단이 신해통공 이후에도 금난전권을 행사했다는 설명은 성립하지 않습니다.
나머지는 모두 옳습니다. 의주 상인은 책문 후시를 통해 청과 교역하였고, 개성 상인은 송방이라는 지점망과 사개치부법이라는 독자적 회계법으로 유명했습니다. 한강의 경강 상인은 선박을 이용한 운송업(세곡 운반)으로 성장했고, 동래 상인은 왜관을 무대로 대일 무역을 주도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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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자료가 저술된 시기에 있었던 사실로 옳은 것은? [3점]
외척 간의 대립으로 을사사화가 발생하였다.
왕권을 강화하기 위하여 6조 직계제가 실시되었다.
공신과 왕족의 사병이 혁파되고 군사권이 강화되었다.
비변사를 중심으로 소수의 가문이 권력을 행사하였다.
이조 전랑 임명을 둘러싸고 사림이 동인과 서인으로 나뉘었다.
제시된 자료는 오랫동안 체납된 환곡을 탕감하거나 대동미 징수를 정지·연기하고 재해를 입은 농지의 조세를 면제하는 조치가 나라에는 손실만 되고 백성에게는 이득이 되지 않는다고 비판하는 글로, 출전은 「경세유표」입니다.
「경세유표」는 정약용이 강진 유배 중이던 순조 때(1817) 저술한 국가 개혁론으로, 관제·토지제도·조세제도의 전면적인 개편을 구상한 책입니다. 즉 자료가 쓰인 시기는 19세기 전반 세도 정치기에 해당합니다.
이 시기에는 안동 김씨·풍양 조씨 같은 소수의 외척 가문이 비변사를 장악하여 권력을 독점하였고, 그 결과 삼정의 문란이 극심해져 위 자료가 지적한 것처럼 조세 감면의 혜택조차 촌민에게 미치지 못하였습니다.
반면 을사사화는 명종 즉위 직후의 일이고, 6조 직계제 실시와 사병 혁파는 조선 초기 국왕 중심의 통치 체제를 다지던 시기의 일이며, 사림이 동인과 서인으로 갈라진 것은 선조 때의 일이므로 시기가 맞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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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마)에 들어갈 내용으로 적절하지 않은 것은? [2점]
(가) - 시무책을 제시한 6두품 지식인
(나) - 절개와 의리를 지킨 고려의 충신
(다) - 전쟁의 참상을 기록한 징비록의 저자
(라) - 반봉건 · 반외세의 기치를 든 동학 농민군 지도자
(마) - 독립을 위해 온 몸을 던진 한인 애국단원
강좌 안내문은 제1강 최치원, 제2강 정몽주, 제3강 유성룡, 제4강 홍경래, 제5강 윤봉길을 차례로 다루겠다고 밝히고 있으므로, 각 강의 주제는 해당 인물의 행적과 맞아야 합니다.
홍경래는 1811년 평안도 지역에 대한 차별과 세도 정권의 수탈에 반발하여 봉기한 몰락 양반으로, 정주성에서 관군에 맞서다 진압당하였습니다. 따라서 그를 반봉건·반외세를 내건 동학 농민군 지도자로 소개하는 것은 적절하지 않습니다. 동학 농민 운동(1894)을 이끈 인물은 전봉준 등입니다.
나머지 주제는 모두 알맞습니다. 최치원은 진성 여왕에게 시무 10여 조를 올린 6두품 지식인이고, 정몽주는 조선 건국에 반대하다 목숨을 잃은 고려의 충신이며, 유성룡은 임진왜란의 참상을 기록한 「징비록」의 저자이고, 윤봉길은 상하이 훙커우 공원에서 의거를 일으킨 한인 애국단 단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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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에 들어갈 답변으로 옳은 것은? [1점]
율곡 이이가 태어난 오죽헌에 가 보세요.
정약용이 유배 생활을 했던 다산 초당을 추천해요.
퇴계 이황의 학덕을 기리는 도산 서원을 추천해요.
팔만대장경판을 보관하고 있는 해인사를 추천해요.
대가야의 위용을 보여주는 지산동 고분군에 가 보세요.
게시판의 질문은 “단아한 아름다움을 보여 주는 무위사 극락전”을 보러 어느 군에 가려 한다면서 그 지역의 다른 명소를 추천해 달라고 하고 있습니다. 무위사 극락전은 조선 전기 주심포 양식의 대표 건축물로, 전라남도 강진에 있습니다.
이미 달린 답변들도 모두 강진의 명소입니다. 요세가 백련 결사를 제창한 백련사가 강진 만덕산에 있고, 고려 시대 청자를 만들어 공급하던 도요지 역시 강진 사당리 일대의 대표 유적입니다.
따라서 (가)에도 강진에 있는 곳이 들어가야 하는데, 정약용이 18년의 유배 생활을 하며 「목민심서」·「경세유표」 등을 저술한 다산 초당이 바로 강진에 있습니다.
오죽헌은 강릉, 도산 서원은 안동, 팔만대장경판을 보관한 해인사는 합천, 대가야의 지산동 고분군은 고령에 있어 지역이 맞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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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상소가 올려진 시기를 연표에서 옳게 고른 것은? [2점]
(가)
(나)
(다)
(라)
(마)
상소는 호조 참판 최익현이 올린 것으로, “전하께서 어려서 아직 정사를 도맡아 보지 않고 계시던 시기에 생긴 일”이라며 “지금부터 임금의 권한을 발휘하시라”고 촉구하고 있습니다. 특히 친친(親親)의 반열에 속하는 사람은 지위와 녹봉만 높이고 나라의 정사에는 관여하지 못하게 하라는 대목이 핵심입니다.
이는 고종의 아버지인 흥선 대원군의 하야를 요구한 계유상소(1873)로, 이 상소를 계기로 대원군이 물러나고 고종의 친정이 시작되었습니다.
연표는 고종 즉위(1863) – 비변사 폐지(1865) – 호포제 실시(1871) – 제1차 수신사 파견(1876) – 통리기무아문 설치(1880) – 한성 조약 체결(1884) 순입니다. 1873년은 호포제 실시(1871)와 제1차 수신사 파견(1876) 사이의 구간에 해당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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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사의 질문에 대한 학생의 답변으로 옳은 것은? [2점]
종로와 전국 각지에 척화비가 세워졌습니다.
오페르트가 남연군 묘를 도굴하려 하였습니다.
평양 관민들에 의해 제너럴 셔먼호가 불탔습니다.
외규장각 건물이 불타고 의궤가 약탈당하였습니다.
프랑스 로즈 제독의 함대가 양화진을 침입하였습니다.
교사가 제시한 자료는 미군이 빼앗아 간 어재연 장군의 수(帥)자기 사진과, 초지진·덕진진·광성보를 잇는 침략로가 표시된 강화도 주요 격전지 지도입니다. 이는 1871년 미국 함대가 강화도를 공격한 신미양요를 보여 줍니다.
미군은 초지진과 덕진진을 차례로 함락한 뒤 광성보에서 어재연이 이끄는 조선군과 격전을 벌였고, 조선군은 큰 피해를 입었으나 끝내 물러서지 않아 미군은 결국 철수하였습니다.
이 사건 직후 흥선 대원군은 통상 수교 거부 의지를 널리 알리기 위해 종로를 비롯한 전국 각지에 척화비를 세웠습니다.
한편 오페르트의 남연군 묘 도굴 시도(1868), 제너럴 셔먼호 사건(1866), 로즈 제독 함대의 침입과 외규장각 의궤 약탈(병인양요, 1866)은 모두 이 사건 이전에 일어난 일입니다.
내용에 오류가 있거나 최신 법령·기준과 다른 부분이 보이면 알려주세요. 확인 후 반영하겠습니다.
(가), (나) 조약에 대한 설명으로 옳은 것은? [2점]
(가) - 양곡의 무제한 유출과 무관세 조항을 담았다.
(가) - 외국 상인의 내지 통상권을 최초로 규정하였다.
(나) - 공사관 경비 명목의 군대 주둔 조항을 두었다.
(나) - 프랑스가 천주교 포교 자유를 인정받는 계기가 되었다.
(가), (나) - 조약 체결 이후 사절단으로 보빙사가 파견되었다.
(가)는 조선 군주가 다른 나라나 그 상인에게 은혜로운 조치를 베풀 경우 항해·통상·무역·왕래 등에서 미국 관리와 국민이 똑같이 혜택을 받도록 한다는 내용으로, 최혜국 대우를 규정한 조·미 수호 통상 조약(1882)입니다.
(나)는 프랑스 국민이 조선에 와서 언어·문자를 가르치거나 배우고 법률과 기술을 연구할 경우 보호한다는 조항으로, 조·프 수호 통상 조약(1886)입니다. 이 ‘교회(敎誨)’ 조항이 확대 해석되면서 프랑스가 사실상 천주교 포교의 자유를 인정받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나머지 설명은 다른 조약의 내용입니다. 양곡의 무제한 유출과 무관세를 규정한 것은 조·일 무역 규칙(1876), 외국 상인의 내지 통상을 처음 허용한 것은 조·청 상민 수륙 무역 장정(1882), 공사관 경비를 명목으로 일본군 주둔을 허용한 것은 제물포 조약(1882)입니다.
또한 보빙사는 미국과의 조약 체결 이후인 1883년에 파견된 사절단이므로, 1886년에 맺어진 조약까지 함께 묶어 설명할 수는 없습니다.
내용에 오류가 있거나 최신 법령·기준과 다른 부분이 보이면 알려주세요. 확인 후 반영하겠습니다.
밑줄 그은 ‘이 사건’에 대한 설명으로 옳은 것은? [3점]
훈련대가 해산되는 원인을 제공하였다.
포접제가 활용되어 조직적으로 전개되었다.
청의 내정 간섭이 본격화되는 결과를 가져왔다.
청·일 양국의 군대가 조선에서 철수하는 계기가 되었다.
개화당이 민씨 정권을 타도하고 새로운 정권을 수립하고자 하였다.
화면 속 뉴스는 무위영과 장어영 소속 군인들이 포도청과 경기 감영을 습격하고 여기에 군중까지 가세하여 일본 공사관을 공격했다고 전하며, 자막은 "성난 군인들, 일본 공사관 공격"이라고 뽑혀 있습니다. 구식 군대에 대한 차별 대우와 밀린 급료 문제에서 촉발된 임오군란(1882)입니다.
군란으로 민씨 정권이 무너지고 흥선 대원군이 재집권하자, 민씨 세력의 요청을 받은 청이 군대를 파견하여 대원군을 톈진으로 납치하고 사태를 진압했습니다. 이후 청은 마젠창과 묄렌도르프를 고문으로 보내고 조·청 상민 수륙 무역 장정을 체결하는 등 조선의 내정과 외교에 본격적으로 간섭하게 되었습니다.
포접제를 활용한 조직적 전개는 동학 농민 운동, 훈련대 해산의 빌미가 된 것은 을미사변, 청·일 양국 군대의 철수를 규정한 것은 갑신정변 이후의 톈진 조약과 관련됩니다. 개화당이 민씨 정권을 타도하고 새 정권을 세우려 한 것은 갑신정변으로, 임오군란과 구분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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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마) 문화유산에 대한 설명으로 옳지 않은 것은? [2점]
(가) - 광복 이후 김구의 집무실과 사저로 이용되었다.
(나) - 고종이 을미사변 이후 거처를 옮긴 곳이다.
(다) - 외교권을 강탈당한 을사늑약이 체결된 곳이다.
(라) - 미·소 공동 위원회가 개최된 곳이다.
(마) - 교육 입국 조서에 근거하여 세워진 교원 양성 학교이다.
답사 자료집은 정동 일대를 경교장 → 구 러시아 공사관 → 중명전 → 석조전 → 배재학당 순으로 도는 경로를 안내하고, 지도에 (가) 경교장, (나) 구 러시아 공사관, (다) 중명전, (라) 석조전, (마) 배재학당을 표시해 두었습니다.
이 가운데 배재학당은 1885년 미국 선교사 아펜젤러가 세운 개신교 계열의 근대식 사립 학교로, 교원을 길러 내는 학교가 아니었습니다. 1895년 교육 입국 조서에 근거해 세워진 관립 교원 양성 기관은 한성 사범 학교이므로, 배재학당에 대한 설명이 옳지 않습니다.
나머지는 모두 맞는 설명입니다. 경교장은 광복 후 김구의 집무실 겸 사저였고, 구 러시아 공사관은 을미사변 이후 고종이 거처를 옮긴 아관파천의 현장이며, 중명전은 을사늑약이 강제로 체결된 곳, 석조전은 광복 후 미·소 공동 위원회가 열린 장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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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인물의 활동으로 옳은 것은? [1점]
가갸날을 제정하고 기관지인 한글을 발행하였다.
인재를 양성하기 위하여 대성 학교를 설립하였다.
조선학 운동을 주도하여 여유당전서를 간행하였다.
서유견문을 집필하여 서양 근대 문명을 소개하였다.
독사신론을 저술하여 민족 중심의 역사 서술을 하였다.
연보에는 1878년 평안도 강서 출생, 1897년 독립 협회 가입, 1912년 대한인 국민회 중앙 총회 조직, 1913년 흥사단 조직, 1919년 대한민국 임시 정부 내무총장 겸 국무총리 대리, 1937년 수양 동우회 사건으로 수감, 1938년 서울에서 별세가 적혀 있습니다. 이는 도산 안창호의 생애입니다.
안창호는 1907년 양기탁 등과 함께 비밀 결사 신민회를 만들고, 실력 양성을 위한 교육 사업으로 평양에 대성 학교를 세워 인재를 길렀습니다. 평양의 대성 학교와 정주의 오산 학교는 신민회 교육 운동의 대표적 성과입니다.
가갸날 제정과 기관지 한글 발행은 조선어 연구회, 조선학 운동과 여유당전서 간행은 정인보·안재홍 등, 서유견문은 유길준, 독사신론은 신채호의 업적으로 서로 구분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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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 (나) 사이에 있었던 사실로 옳은 것은? [3점]
고종의 밀지를 받아 독립 의군부가 조직되었다.
13도 창의군이 결성되어 서울 진공 작전을 전개하였다.
헤이그에서 열린 만국 평화 회의에 특사가 파견되었다.
유생 출신 유인석이 이끄는 부대가 충주성을 점령하였다.
해산된 진위대 군인들이 합류하여 의병의 전투력이 강화되었다.
(가)는 매천야록의 기록으로, 11월 15일 고종이 머리를 깎고 내외 신민에게 모두 깎도록 명했다는 내용입니다. 을미사변 뒤 추진된 을미개혁의 단발령(1895)을 보여 줍니다. (나)는 대사와 공사가 병력을 이끌고 대궐을 포위해 참정 대신을 가두고 외부 대신을 협박하여 강제로 외교권을 빼앗았다는 내용으로, 을사늑약(1905)입니다.
따라서 두 자료 사이의 시기는 1895년 말부터 1905년 사이입니다. 이 시기에는 명성 황후 시해와 단발령에 반발한 을미의병이 일어났고, 유생 출신 유인석이 이끄는 부대가 충주성을 점령하며 기세를 올렸습니다.
나머지는 모두 을사늑약 이후의 일입니다. 헤이그 만국 평화 회의 특사 파견은 1907년, 해산 군인(진위대)의 의병 합류와 13도 창의군의 서울 진공 작전은 1907~1908년, 고종의 밀지를 받은 독립 의군부 조직은 1912년의 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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밑줄 그은 ‘이 사업’에 대한 설명으로 옳은 것을 <보기>에서 고른 것은? [2점]
ㄱ, ㄴ
ㄱ, ㄷ
ㄴ, ㄷ
ㄴ, ㄹ
ㄷ, ㄹ
신문 기사는 1905년 정부가 탁지부령 제1호에 근거해 구 백동화를 일본 제일 은행권으로 교환하기 시작했으며, 이를 주도한 인물이 일본이 추천한 재정 고문 메가타라고 전합니다. 제1차 한·일 협약 이후 추진된 화폐 정리 사업입니다.
이 사업에서 백동화는 품질에 따라 갑·을·병종으로 나뉘어 을종은 액면가보다 낮게 쳐주고 병종은 아예 교환해 주지 않았습니다. 그 결과 유통 화폐량이 급격히 줄어들어 국내 상인과 회사가 큰 타격을 입었고, 교환 자금 명목 등으로 일본에서 차관이 도입되어 대한 제국의 재정 예속이 심해졌습니다. 이 차관에 맞선 것이 1907년의 국채 보상 운동입니다.
한편 전환국은 1883년 근대적 화폐 주조를 위해 이미 설치되었다가 화폐 정리 사업 직전인 1904년에 폐지되었으므로 이 사업의 결과로 볼 수 없습니다. 황국 중앙 총상회는 1898년 서울 시전 상인들이 외국 상인의 상권 침탈에 맞서 조직한 단체로, 시기와 목적이 모두 다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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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자료의 전투에 참여한 독립군 부대에 대한 설명으로 옳은 것은? [2점]
대한민국 임시 정부의 직할 부대로 창설되었다.
중국 관내에서 결성된 최초의 한인 무장 부대였다.
조선 혁명 간부 학교를 세워 군사력을 강화하였다.
중국 호로군과 연합 작전을 통해 항일 전쟁을 전개하였다.
러시아에 의해 무장 해제를 당하여 세력이 크게 약화되었다.
자료는 "대전자령의 공격은 이천만 대한 인민을 위하여 원수를 갚는 것"이라며 최후까지 싸우라고 독려하는 글로, 끝에 지청천, 1933년 중국 대전자령 전투에 앞서라고 밝혀져 있습니다. 지청천이 이끈 한국 독립군의 전투입니다.
만주 사변 이후 한·중 연합 전선이 형성되면서 북만주의 한국 독립군은 중국인 항일 부대인 중국 호로군과 연합 작전을 펴 쌍성보·사도하자·대전자령 전투에서 잇따라 승리했습니다. 같은 시기 남만주의 조선 혁명군(양세봉)은 중국 의용군과 연합해 영릉가·흥경성 전투를 치렀습니다.
임시 정부의 직할 부대로 창설된 것은 한국광복군, 중국 관내 최초의 한인 무장 부대는 조선 의용대이며, 조선 혁명 간부 학교를 세운 것은 김원봉의 의열단입니다. 러시아(적군)에 의해 무장 해제를 당한 것은 자유시 참변 때의 대한 독립 군단과 관련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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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가상 일기에 나타난 민족 운동에 대한 설명으로 옳은 것은? [2점]
신간회의 지원 속에 전국 각지로 확산되었다.
이른바 문화 통치로 전환되는 배경이 되었다.
대한민국 임시 정부가 수립되는 데 영향을 주었다.
한·일 학생 사이의 충돌 사건이 발단이 되어 일어났다.
국내에서 민족 유일당 운동이 전개되는 계기를 마련하였다.
일기는 순종 황제의 인산일에 종로 3가 단성사 앞에서 30~40명의 학생들이 격문을 뿌리고 만세를 불렀으며, 격문에 '조선 독립 만세'와 '우리의 철천지 원수는 자본 제국주의 일본이다'라는 구호가 적혀 있었다고 전합니다. 1926년의 6·10 만세 운동입니다.
이 운동은 사회주의 계열과 천도교 등 민족주의 계열, 그리고 학생 단체가 각각 준비하다가 함께 손을 잡는 경험을 남겼습니다. 그 결과 이념을 넘어선 협동 전선의 필요성이 확인되어 민족 유일당 운동이 국내에서 본격화되었고, 정우회 선언을 거쳐 1927년 신간회 창립으로 이어졌습니다.
신간회의 지원 속에 전국으로 확산된 것과 한·일 학생 충돌에서 발단된 것은 모두 1929년 광주 학생 항일 운동이며, 이른바 문화 통치로의 전환 배경이 되고 대한민국 임시 정부 수립에 영향을 준 것은 1919년 3·1 운동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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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법령이 제정된 이후 일제의 정책으로 옳은 것은? [3점]
한국인에 한하여 적용하는 조선 태형령이 시행되었다.
한국인의 기업 활동을 억제하기 위해 회사령이 발표되었다.
식민지 교육 방침을 규정한 제1차 조선 교육령이 시행되었다.
식민 통치의 재정 기반을 확대하고자 토지 조사 사업이 실시되었다.
독립 운동을 탄압하기 위한 조선 사상범 보호 관찰령이 공포되었다
제시된 법령 제1조는 국체를 변혁하는 것을 목적으로 결사를 조직한 자를 사형이나 무기 또는 5년 이상의 징역·금고에, 사유 재산 제도를 부인할 목적으로 결사를 조직하거나 가입한 자를 10년 이하의 징역·금고에 처한다고 규정합니다. 1925년 일제가 제정한 치안 유지법입니다.
사회주의 운동 탄압을 명분으로 삼았지만 실제로는 모든 항일 민족 운동을 억누르는 데 쓰였습니다. 이 법의 연장선에서 1936년에는 사상범을 형기 이후에도 감시·통제하기 위한 조선 사상범 보호 관찰령이 공포되었고, 1941년에는 예방 구금까지 가능하게 한 조선 사상범 예방 구금령으로 이어졌습니다.
나머지는 모두 1910년대 무단 통치기의 정책입니다. 조선 태형령은 1912년, 회사령은 1910년, 제1차 조선 교육령은 1911년에 시행되었고 토지 조사 사업은 1910~1918년에 진행되어 이 법령 제정 이전에 해당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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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 지역에서 일어난 민족 운동에 대한 설명으로 옳은 것은? [2점]
서전서숙이 설립되어 민족 교육을 실시하였다.
신한 청년당이 파리 강화 회의에 대표를 파견하였다.
대한 광복군 정부가 세워져 무장 독립 투쟁을 준비하였다.
대조선 국민 군단이 조직되어 독립군 사관을 양성하였다.
유학생들이 중심이 되어 2·8 독립 선언서를 발표하였다.
지도에서 (가)는 두만강 너머 동해에 접한 러시아 연해주 지역이며, 설명문도 1860년대 함경도 농민들이 두만강을 건너 정착하면서 이주가 시작되었고 신한촌이 건설되었으며 1937년 중앙아시아로 강제 이주를 당했다고 밝히고 있습니다.
연해주 블라디보스토크의 한인 집단촌 신한촌에서는 권업회가 조직되어 권업신문을 발행했고, 1914년에는 이상설·이동휘를 정·부통령으로 하는 대한 광복군 정부가 세워져 무장 독립 전쟁을 준비했습니다. 이후 대한 국민 의회로 이어졌습니다.
서전서숙이 세워진 곳은 북간도 용정, 신한청년당이 파리 강화 회의에 김규식을 파견한 곳은 상하이, 대조선 국민 군단이 조직된 곳은 하와이, 2·8 독립 선언이 발표된 곳은 일본 도쿄로 각각 구분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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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자료가 발표된 이후에 볼 수 있는 모습으로 옳은 것은? [2점]
헌병 경찰에게 벌금형을 부과받는 농민
신간회 창립 대회를 취재하고 있는 기자
국채 보상 운동의 모금에 참여하고 있는 상인
조선 민립 대학 기성 준비회 발족에 참석하는 교사
국민 징용령에 의해 강제 노동에 끌려가는 청년
연설문은 미나미 총독의 것으로, 조선의 사명을 제국의 대륙 병참 기지로 규정하고 이번 전쟁에서 조선이 대 중국 작전군에게 식량과 잡화 등 군수 물자를 공출했으나 아직 부족하다며 군수 공업 육성에 역점을 두어야 한다고 말합니다. 중일 전쟁(1937) 발발 이후 추진된 병참 기지화 정책을 보여 줍니다.
이 시기 일제는 국가 총동원법(1938)을 조선에 적용하며 인적·물적 수탈을 강화했습니다. 1939년 국민 징용령이 시행되어 청년들이 탄광과 군수 공장 등지로 강제 노동에 동원되었으므로, 이후에 볼 수 있는 모습에 해당합니다.
헌병 경찰이 즉결 처분을 하던 것은 1910년대 무단 통치기, 신간회 창립 대회는 1927년, 국채 보상 운동은 1907년, 민립 대학 설립 운동은 1920년대 초의 일로 모두 이 연설보다 앞선 시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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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인물의 활동으로 옳은 것은? [1점]
동양 척식 주식회사에 폭탄을 투척하였다.
국권 피탈에 앞장섰던 이완용을 저격하였다.
의열단을 결성하여 무장 투쟁을 전개하였다.
한국 광복군 지휘관으로 국내 진공 작전을 준비하였다.
민중의 직접 혁명을 주장하는 조선 혁명 선언을 집필하였다.
제시된 연보는 1900년 서울 출생, 호는 철기, 1919년 신흥 무관 학교 교관, 1920년 청산리 대첩에서 북로 군정서 지휘관으로 활약, 1934년 뤄양 군관 학교 한적 군관 대장, 1946년 조선 민족 청년단 결성, 1948년 대한민국 초대 국무총리 및 국방부 장관 겸임, 1972년 별세로 이어집니다. 이는 철기 이범석의 생애입니다.
이범석은 1940년 한국 광복군이 창설된 뒤 참모장과 제2지대장을 맡았고, 광복 직전 미국 전략 정보국(OSS)과 합작하여 대원들에게 특수 훈련을 시킨 뒤 국내 진공 작전을 준비하였습니다. 일제의 항복으로 작전은 실행되지 못했지만, 광복군 지휘관으로서 이 작전을 이끌었다는 점이 그의 대표적 활동입니다.
나머지 활동은 다른 인물의 것입니다. 동양 척식 주식회사에 폭탄을 던진 인물은 나석주, 이완용을 저격한 인물은 이재명, 의열단을 결성한 인물은 김원봉, 조선 혁명 선언을 집필한 인물은 신채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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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헌법이 시행된 시기의 사실로 옳지 않은 것은? [2점]
반국가 활동 규제를 위한 국가보안법이 만들어졌다.
유상 매수, 유상 분배를 규정한 농지개혁법이 제정되었다.
일제가 남긴 재산 처리를 위한 귀속재산처리법이 제정되었다.
친일파 청산을 위한 반민족 행위 특별 조사 위원회가 활동하였다.
자립 경제 구축을 위한 제1차 경제 개발 5개년 계획이 추진되었다.
자료의 헌법은 제1조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 제53조 대통령과 부통령은 국회에서 무기명 투표로써 각각 선거한다, 제55조 대통령과 부통령의 임기는 4년으로 하며 재선에 의하여 1차 중임할 수 있다고 규정하고 있습니다. 대통령을 국회에서 간접 선거로 뽑는다는 조항은 1948년 제헌 헌법의 특징으로, 이 헌법은 1952년 대통령 직선제를 담은 발췌 개헌이 이루어지기 전까지 시행되었습니다.
따라서 이 시기에는 1948년 12월 국가보안법 제정, 1949년 유상 매수·유상 분배 방식의 농지개혁법 제정, 1949년 귀속재산처리법 제정, 1948년 구성되어 이듬해까지 이어진 반민족 행위 특별 조사 위원회의 활동이 모두 있었습니다.
반면 자립 경제 구축을 내세운 제1차 경제 개발 5개년 계획은 5·16 군사 정변 이후인 1962년부터 추진되었으므로, 위 헌법이 시행되던 시기의 사실로 볼 수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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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자료의 단체에 대한 설명으로 옳은 것을 <보기>에서 고른 것은? [3점]
ㄱ, ㄴ
ㄱ, ㄷ
ㄴ, ㄷ
ㄴ, ㄹ
ㄷ, ㄹ
자료의 조직도는 위원장 여운형, 부위원장 안재홍 아래 재무부장 이규갑·선전부장 조동호·무경부장 권태석 등이 배치된 구조이고, 강령은 완전한 독립 국가의 건설, 전 민족의 정치적·경제적·사회적 기본 요구를 실현할 민주주의 정권의 수립, 일시적 과도기의 국내 질서 자주적 유지와 대중 생활 확보를 내걸고 있습니다. 이는 1945년 8월 광복 직후 결성된 조선 건국 준비 위원회입니다.
건국 준비 위원회는 여운형이 일제 말 국내에서 비밀리에 조직했던 조선 건국 동맹의 인적·조직적 기반 위에서 만들어졌고, 광복 직후의 혼란을 수습하기 위해 치안대를 조직하여 질서 유지 활동을 벌였습니다. 이 두 설명이 옳습니다.
모스크바 3국 외상 회의는 1945년 12월에 열렸는데, 건국 준비 위원회는 그해 9월 조선 인민 공화국 수립을 선포하며 사실상 해체되었으므로 그 결정에 반대할 수 없었습니다. 또 미 군정의 후원을 받아 좌우 합작 운동을 전개한 것은 1946년의 좌우 합작 위원회이지, 건국 준비 위원회가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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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선언문이 발표된 민주화 운동에 대한 설명으로 옳은 것은? [2점]
허정 과도 정부 성립의 배경이 되었다.
신군부의 비상 계엄 확대에 반대하여 일어났다.
4·13 호헌 조치에 국민들이 저항하며 시작되었다.
관련 기록물이 유네스코 세계 유산으로 등재되었다.
직선제 개헌을 약속한 6·29 민주화 선언을 이끌어냈다.
선언문은 관료와 경찰이 민주를 위장한 가부장적 전제 권력의 하수인으로 전락했다고 비판하고, 선거권마저 권력의 마수 앞에 농단되었다고 규탄하며, “나이 어린 학생 김주열의 참시를 보라”고 절규합니다. 3·15 부정 선거와 마산 시위에서 희생된 김주열의 죽음을 직접 거론하고 있으므로, 1960년의 4·19 혁명 당시 발표된 글입니다.
4·19 혁명으로 이승만 대통령이 하야하면서 허정을 수반으로 하는 과도 정부가 들어섰고, 이 과도 정부 아래에서 내각 책임제와 양원제를 골자로 한 개헌이 이루어져 장면 내각이 출범하였습니다.
신군부의 비상 계엄 확대에 맞선 것과 관련 기록물이 유네스코 세계 기록 유산으로 등재된 것은 5·18 민주화 운동이며, 4·13 호헌 조치에 저항하여 시작되어 6·29 민주화 선언을 이끌어낸 것은 6월 민주 항쟁입니다.
내용에 오류가 있거나 최신 법령·기준과 다른 부분이 보이면 알려주세요. 확인 후 반영하겠습니다.
(가) 정부 시기의 사실로 옳은 것은? [1점]
한·일 협정을 체결하였다.
중국, 소련 등과 수교하였다.
금강산 관광 사업을 시작하였다.
한·미 상호 방위 조약을 체결하였다.
경제 협력 개발 기구(OECD)에 가입하였다.
화면 속 뉴스는 (가) 대통령이 남측의 연합제 안과 북측의 낮은 단계의 연방제 안이 서로 공통성이 있다고 인정하는 남북 공동 선언을 발표했다고 전하고 있습니다. 이는 2000년 평양에서 열린 제1차 남북 정상 회담의 결과인 6·15 남북 공동 선언이므로, (가)는 김대중 정부입니다.
김대중 정부는 대북 화해 협력 정책을 추진하여 1998년 현대그룹의 참여로 해로를 통한 금강산 관광 사업을 시작하였고, 이어 정상 회담과 이산가족 상봉, 경의선 복원 등의 교류로 이어졌습니다.
한·일 협정 체결과 한·미 상호 방위 조약 체결은 각각 박정희 정부와 이승만 정부 때의 일이고, 중국·소련 등 사회주의 국가와의 수교(북방 외교)는 노태우 정부, 경제 협력 개발 기구(OECD) 가입은 김영삼 정부 때 이루어졌습니다.
내용에 오류가 있거나 최신 법령·기준과 다른 부분이 보이면 알려주세요. 확인 후 반영하겠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