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능력검정시험 고급] 제32회 기출문제 해설 페이지
다음 전시회에 전시될 유물로 적절한 것을 <보기>에서 고른 것은? [1점]
ㄱ, ㄴ
ㄱ, ㄷ
ㄴ, ㄷ
ㄴ, ㄹ
ㄷ, ㄹ
전시회 안내문은 "약 1만 년 전 빙기가 끝나면서 나타난 환경의 변화 속에서 새로운 도구와 기술을 개발하고 농경을 시작하였다"고 설명한다. 빙기 종료 후 간석기와 토기가 등장하고 농경·목축이 시작된 시기이므로 이 전시회의 주제는 신석기 시대이다.
보기 가운데 넓적한 판돌 위에 둥근 돌을 얹은 갈판과 갈돌은 채집하거나 수확한 곡식의 껍질을 벗기고 가루로 빻는 데 쓴 신석기 시대의 대표적인 조리 도구이다. 가운데 구멍이 뚫린 둥근 원반 모양의 가락바퀴 역시 신석기 시대에 실을 뽑아 옷감을 짜던 방직 도구로, 원시적 수공업이 시작되었음을 보여 준다.
반면 목이 꺾이고 몸통이 불룩하며 작은 손잡이가 달린 민무늬 계열 토기와 나란히 놓인 다섯 점의 푸른 녹이 슨 청동 화살촉은 금속 도구가 쓰이던 청동기 시대의 유물이므로 이 전시회에는 어울리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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밑줄 그은 ‘왕’의 업적으로 옳은 것은? [2점]
익산에 미륵사를 창건하였다.
신라를 공격하여 대야성을 함락시켰다.
동진으로부터 전래된 불교를 수용하였다.
사비로 천도하고 국호를 남부여로 고쳤다.
고흥으로 하여금 서기를 편찬하게 하였다.
자료는 고구려가 군사를 동원해 공격해 오자 왕이 패하(浿河) 강가에 군사를 매복시켜 이를 물리쳤고, 그해 겨울 태자와 함께 정병 3만을 거느리고 평양성을 공격하여 고구려왕 사유가 화살에 맞아 사망했다고 전한다. 사유는 고구려 고국원왕의 이름이며, 그를 전사시킨 왕은 백제 근초고왕이다.
근초고왕은 이 승리로 황해도 일대까지 세력을 넓혔고, 남쪽으로는 마한의 남은 세력을 통합하여 백제의 전성기를 이끌었다. 대외적으로는 중국 남조 및 왜와 활발히 교류하였다.
이 왕의 업적으로는 박사 고흥에게 백제의 역사서인 『서기』를 편찬하게 한 것이 대표적이다. 사비 천도와 국호 남부여 개칭은 성왕, 미륵사 창건은 무왕, 대야성 함락은 의자왕, 동진에서 전래된 불교 수용은 침류왕 때의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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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 나라의 사회 모습으로 옳은 것은? [2점]
신지, 읍차 등의 지배자가 있었다.
12월에 영고라는 제천 행사를 열었다.
사회 질서를 유지하기 위한 범금 8조가 있었다.
제사장인 천군과 신성 지역인 소도가 존재하였다.
부족 간의 경계를 중요시하여 책화라는 제도가 있었다.
첫 번째 자료는 (가)가 장성 북쪽, 현도에서 천 리쯤 떨어진 곳에 있으며 남쪽은 고구려, 동쪽은 읍루, 서쪽은 선비와 접하고 북쪽에는 약수(弱水)가 있고, 사방 2천 리에 호수(戶數)는 8만이라고 전한다. 이는 『삼국지』 동이전이 기록한 부여의 위치와 규모이다.
두 번째 자료에서도 온조가 세운 백제의 세계(世系)가 고구려와 함께 (가)에서 나왔으므로 부여(扶餘)를 성씨로 삼았다고 하였다. 실제로 백제 왕실은 부여씨를 칭했고 성왕은 국호를 남부여로 고치기도 하였다.
부여는 왕 아래 마가·우가·저가·구가 등이 사출도를 다스렸고, 해마다 12월에 영고라는 제천 행사를 열어 하늘에 제사하고 죄수를 풀어 주었다. 신지·읍차는 삼한, 범금 8조는 고조선, 천군과 소도는 삼한, 책화는 동예의 사회 모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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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상황이 전개된 배경으로 옳은 것은? [2점]
무령왕이 22담로에 왕족을 파견하였다.
장수왕이 수도를 국내성에서 평양으로 옮겼다.
연개소문이 정변을 일으켜 권력을 장악하였다.
진흥왕이 대가야를 병합하여 영토를 확장하였다.
법흥왕이 병부를 설치하여 군사력을 강화하였다.
그림에서 사신들은 "작년 귀국과 화친을 맺었기에 우리 비유왕께서 흰 매를 마립간께 보내셨다"고 말하고, 왕은 "지난봄 좋은 말 2필을 보내셨는데 또 선물을 보내 주셨다"며 황금과 명주를 답례품으로 보내겠다고 한다. 백제 비유왕과 신라 마립간(눌지 마립간)이 예물을 주고받으며 화친을 다지는 장면, 곧 나제 동맹이다.
오랫동안 대립하던 두 나라가 손을 잡은 것은 공동의 위협이 생겼기 때문이다. 5세기 고구려 장수왕은 국내성에서 평양으로 수도를 옮기고 본격적인 남진 정책을 폈고, 이에 위협을 느낀 백제와 신라가 동맹을 맺어 대응하였다.
이 동맹은 이후 백제 성왕과 신라 진흥왕이 한강 유역을 함께 되찾을 때까지 이어지다가 진흥왕의 한강 하류 점령으로 깨졌다. 무령왕의 22담로 왕족 파견, 연개소문의 정변, 진흥왕의 대가야 병합, 법흥왕의 병부 설치는 모두 이 장면의 배경이 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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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에 들어갈 내용으로 가장 적절한 것은? [3점]
무역소를 통한 여진과의 교역 물품 분석
쇼토쿠 태자의 스승인 혜자의 생애와 활동
당항성과 중국을 연결하는 해상 교통로 탐색
당의 장안성과 상경 용천부의 도성 구조 비교
칠지도 명문의 해석으로 알아 본 일본과의 관계
게시판 글은 "청해진이 국제 무역 기지로 번성했던 이 나라의 국제 교류"를 주제로 보고서를 쓰라고 안내하고 있다. 장보고가 완도에 청해진을 설치한 나라이므로 이 나라는 통일 신라이다.
이미 올라온 다른 모둠의 제목들도 이를 뒷받침한다. "도당 유학생 최치원의 활약", "산둥 반도에 설치된 신라소의 기능"은 모두 통일 신라와 당 사이의 인적·경제적 교류를 다루고 있다.
따라서 빈칸에는 통일 신라의 대외 교류에 해당하는 주제가 들어가야 한다. 당항성은 신라가 한강 하류를 차지한 뒤 중국과 직접 통하는 관문 역할을 한 항구이므로, 이곳과 중국을 잇는 해상 교통로 탐색이 적절하다.
무역소를 통한 여진과의 교역은 조선, 상경 용천부의 도성 구조는 발해, 쇼토쿠 태자의 스승 혜자는 고구려, 칠지도는 백제와 관련된 주제여서 이 나라의 보고서 제목이 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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밑줄 그은 ‘이 유물’로 옳은 것은? [1점]
일기는 부여 능산리 절터 발굴 조사 중, 나성과 능산리 고분군 사이의 계단식 논에서 이 유물이 발견되었으며 도교와 불교 사상이 함께 반영되어 있고 왕실 의례에 사용된 것으로 추측된다고 적고 있다. 또한 백제의 멸망과 함께 사라진 절터에서 나왔다고 하였다.
이 조건에 맞는 유물은 백제 금동 대향로이다. 보기 가운데 용이 몸을 틀어 받침이 되고, 알 모양 몸체에 산봉우리와 인물·동물이 겹겹이 새겨졌으며, 꼭대기에 봉황이 날개를 편 금빛 향로가 이에 해당한다. 산봉우리(박산)와 신선·용은 도교의 신선 사상을, 연꽃 무늬 몸체와 향을 피우는 용도는 불교 의례를 보여 준다.
나머지 보기의 금동 불상, 말을 탄 인물 모양 토기, 뚜껑이 있는 둥근 청동 그릇, 뿔이 달린 짐승 모양 석조 진묘수는 모두 능산리 절터에서 나온 향로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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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다)의 문화유산을 제작된 순서대로 옳게 나열한 것은? [2점]
(가) - (나) - (다)
(가) - (다) - (나)
(나) - (가) - (다)
(나) - (다) - (가)
(다) - (나) - (가)
(가)는 검은 돌을 벽돌처럼 다듬어 쌓아 올린 모전석탑으로, 몸돌에 감실 형태의 문이 나 있고 기단 위에 석사자상이 놓여 있다. 신라가 삼국을 통일하기 전인 7세기 전반 선덕 여왕 때 세워진 분황사 모전석탑이다.
(다)는 기단 위에 몸돌과 지붕돌을 세 층 올리고 그 위로 노반·복발·보륜 등 상륜부가 온전히 남은 삼층석탑이다. 이처럼 기단 위에 몸돌 3층을 균형 있게 올린 석탑은 통일 신라의 전형적인 양식이다.
(나)는 팔각을 기본 평면으로 하여 연꽃 무늬 기단 위에 팔각 몸돌을 세우고, 지붕돌을 목조 건축의 기와지붕처럼 새긴 승탑이다. 이런 팔각 승탑은 선종이 널리 퍼지면서 승려의 사리를 모시기 위해 만들어진 것으로, 신라 말 이후에 본격적으로 조성되었다.
따라서 제작 순서는 모전석탑 → 통일 신라의 삼층석탑 → 팔각 승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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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사건이 일어난 이후의 사실로 옳은 것은? [3점]
나·당 연합군이 백강에서 왜군을 물리쳤다.
복신과 도침 등이 주류성에서 군사를 일으켰다.
계백이 이끄는 결사대가 신라군에 맞서 싸웠다.
신라군이 당의 군대에 맞서 매소성에서 승리하였다.
김춘추가 중국으로 건너가 군사 동맹을 성사시켰다.
자료는 고구려의 대장 검모잠이 무리를 거느리고 반란을 일으켜 보장왕의 외손 안승을 왕으로 삼았고, 당이 고간과 이근행을 행군총관으로 삼아 토벌하게 하였으며, 결국 안승이 검모잠을 죽이고 신라로 달아났다고 전한다. 고구려 멸망 직후에 일어난 고구려 부흥 운동이자 그 분열 과정으로, 670년 무렵의 일이다.
신라는 망명해 온 안승을 받아들여 보덕국왕으로 삼고 고구려 유민을 당에 맞서는 힘으로 활용하였다. 이로써 백제·고구려 멸망 이후 한반도를 지배하려던 당과 신라의 충돌, 곧 나당 전쟁이 본격화되었다.
그 결과 신라군은 매소성에서 당의 군대를 크게 물리쳤고, 이어 기벌포 해전에서도 승리하여 삼국 통일을 완성하였다. 김춘추의 군사 동맹 체결, 계백의 결사대, 복신·도침의 주류성 봉기, 백강에서 왜군을 물리친 일은 모두 이 사건 이전에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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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자료에 해당하는 시기를 연표에서 옳게 고른 것은? [2점]
(가)
(나)
(다)
(라)
(마)
자료는 "3월에 서울과 지방의 관리에게 지급하던 월봉을 없애고 다시 녹읍을 주었다"고 하였다. 신문왕 때 폐지되었던 녹읍이 부활한 것으로, 왕권이 약해지고 귀족의 요구가 관철된 결과이다.
이어 "12월에 사벌주를 상주로 고치고 1주 10군 30현을, 한산주를 한주로 고치고 1주 1소경 27군 46현을 거느리게 하였다"고 하였다. 지방 행정 구역의 이름을 중국식 한자 지명으로 바꾼 조치로, 경덕왕 때 추진된 한화(漢化) 정책에 해당한다.
연표에서 정전 지급(722)과 독서삼품과 실시(788) 사이가 경덕왕의 재위 기간을 포함하는 구간이다. 삼국 통일(676)과 발해 건국(698)보다는 뒤이고, 김헌창의 난(822)이나 후고구려 건국(901)보다는 앞선 시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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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 인물의 활동으로 옳은 것은? [2점]
웅천주를 기반으로 반란을 일으켰다.
훈요 10조에서 불교 숭상을 강조하였다.
완산주를 도읍으로 후백제를 건국하였다.
신라의 수도를 습격하여 경애왕을 죽게 하였다.
국호를 마진으로 바꾸고 철원으로 도읍을 옮겼다.
제시된 「삼국사기」 기록은 (가)가 신라 사람으로 성은 김씨이고 아버지는 제47대 헌안왕, 어머니는 헌안왕의 후궁이었다고 전한다. 또한 중오일(5월 5일)에 태어나고 나면서 이가 났으며 이상한 빛이 있어 나라에 이롭지 못할 것이라 하여 죽이려 하였고, 유모가 받다가 실수로 한쪽 눈이 멀었다고 서술한다.
애꾸눈이 된 뒤 머리를 깎고 승려가 되어 스스로 선종(善宗)이라 불렸다는 대목에서 이 인물이 궁예임을 확정할 수 있다. 궁예는 신라 왕실의 후예로 전해지며, 승려 생활을 하다가 기훤·양길의 휘하에 들어간 뒤 자립하여 세력을 키웠다.
궁예는 송악을 근거로 후고구려를 세운 뒤, 국호를 마진으로 바꾸고 연호를 무태라 하였으며 도읍을 송악에서 철원으로 옮겼다. 이후 국호를 다시 태봉으로 고치고 광평성 등의 관제를 두었으나, 미륵 신앙을 앞세운 전제적 통치로 신하들의 신망을 잃어 왕건에게 축출되었다.
같은 시기 인물들과 구별해 두자. 완산주를 도읍으로 후백제를 세우고 뒤에 신라 금성을 습격해 경애왕을 죽게 한 인물은 견훤이며, 훈요 10조에서 불교 숭상을 당부한 이는 고려 태조 왕건, 웅천주를 기반으로 반란을 일으킨 이는 신라 하대의 김헌창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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밑줄 그은 ‘이 왕’의 업적으로 옳은 것은? [2점]
지린 성 동모산에서 나라를 세웠다.
3성 6부의 중앙 관제를 정비하였다.
장문휴를 보내 당의 등주를 공격하였다.
5경 15부 62주의 지방 행정 조직을 확립하였다.
전성기를 이루어 당으로부터 해동성국이라 불렸다.
화면 속 설명은 ‘이 왕’의 넷째 딸인 정효 공주의 무덤과 그 안에서 발견된 묘지석을 소개하고 있다. 묘지석에 이 왕이 황상(皇上)으로 표현되어 있고 독자적 연호인 ‘대흥’이 사용된 점에서, 발해가 당과 대등하다는 의식을 지녔음을 확인할 수 있다는 것이 자료의 핵심이다.
연호 대흥과 정효 공주라는 두 단서는 발해 문왕(대흠무)을 가리킨다. 정효 공주 묘는 벽돌무덤에 평행고임 천장을 결합한 구조로, 당과 고구려 문화의 요소가 함께 나타나는 발해 문화의 성격을 잘 보여 준다.
문왕은 당과 친선 관계를 맺으면서 당의 제도를 받아들여 3성 6부의 중앙 관제를 정비하고, 유학 교육 기관인 주자감을 두었으며 수도를 중경에서 상경 용천부로 옮겨 지배 체제를 정비하였다.
혼동하기 쉬운 다른 왕들의 업적도 정리해 두자. 지린성 동모산에서 나라를 세운 이는 대조영(고왕), 장문휴를 보내 당의 등주를 공격한 이는 무왕이며, 5경 15부 62주의 지방 조직을 완성하고 해동성국이라 불린 전성기를 이룬 이는 선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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밑줄 그은 ‘(ㄱ)’과 ‘(ㄴ)’에 해당하는 문화유산으로 옳은 것은?(순서대로 ㄱ, ㄴ) [2점]
장군총, 팔만대장경
장군총, 직지심체요절
천마총, 팔만대장경
천마총, 직지심체요절
무령왕릉, 무구정광대다라니경
잡지 목차는 시대별 문화유산에 적용된 과학 기술을 소개하며, 삼국 시대 항목에 ㉠ 들여쌓기 방식이 활용된 돌무지무덤, 고려 시대 항목에 ㉡ 현존하는 세계 최고(最古)의 금속 활자본을 제시하였다. 그 밖에 통일 신라의 기하학적 건축 원리가 적용된 석굴 사원, 조선 전기의 한양 기준 역법서, 조선 후기의 거중기를 활용한 성곽이 함께 실려 있다.
돌을 계단식으로 들여쌓아 올린 돌무지무덤은 고구려 초기의 대표적 무덤 양식으로, 중국 지안 일대에 남아 있는 장군총이 그 완성형이다. 화강암을 7층 계단식으로 쌓아 올린 구조와 무덤 밑을 받치는 호석에서 당시의 축조 기술을 확인할 수 있다.
고려 우왕 때 청주 흥덕사에서 간행된 직지심체요절은 현존하는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금속 활자본으로, 구텐베르크의 성서보다 앞선 것으로 평가되어 유네스코 세계 기록 유산에 등재되었다.
선택지에 함께 나온 유산들도 구별해 두자. 팔만대장경은 목판이지 금속 활자본이 아니며, 무구정광대다라니경은 통일 신라의 목판 인쇄물이다. 천마총은 신라의 돌무지덧널무덤, 무령왕릉은 백제의 벽돌무덤이므로 들여쌓기 방식의 돌무지무덤과는 계통이 다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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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다)에 대한 설명으로 옳지 않은 것은? [3점]
(가) - 인품과 공복을 기준으로 하였다.
(나) - 관직을 기준으로 토지를 지급하였다.
(다) - 현직 관리를 중심으로 토지를 지급하였다.
(가), (나) - 경기 지역으로 한정하여 토지를 지급하였다.
(가), (나), (다) - 지급된 토지에 대한 수조권을 인정하였다.
세 자료는 모두 고려의 토지 제도인 전시과의 변천을 보여 준다. (가)는 경종 원년에 처음으로 직관(職官)과 산관(散官) 각 품의 전시과를 제정한 시정 전시과, (나)는 목종 원년에 문무 양반 및 군인의 전시과를 고친 개정 전시과, (다)는 문종 30년에 양반전시과를 다시 정한 경정 전시과이다.
시정 전시과는 관품만이 아니라 인품과 공복(자삼·단삼·비삼·녹삼)을 함께 기준으로 삼은 과도기적 제도였고, 개정 전시과는 인품을 배제하고 관직(官階)만을 기준으로 18과로 나누어 지급하였다. 경정 전시과는 지급할 토지가 부족해지자 산관을 제외하고 현직 관리 중심으로 지급 대상을 축소하였다.
세 제도 모두 토지 자체의 소유권이 아니라 그 토지에서 조세를 거둘 권리, 곧 수조권을 관리에게 준 것이며 원칙적으로 죽거나 관직에서 물러나면 국가에 반납해야 했다.
따라서 옳지 않은 설명은 경기 지역으로 한정하여 토지를 지급하였다는 서술이다. 지급 대상 토지를 경기에 국한한 것은 고려 말 공양왕 때 신진 사대부가 마련한 과전법의 특징으로, 전국의 토지를 대상으로 한 전시과와 구별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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밑줄 그은 ‘이 정책’으로 옳은 것은? [1점]
노비안검법을 실시하였다.
12목에 지방관을 파견하였다.
인사권을 가진 정방을 폐지하였다.
경순왕 김부를 경주의 사심관으로 삼았다.
인재를 등용하기 위해 과거제를 도입하였다.
가상 인터뷰에서 기자는 중앙의 5품 이상 관리에게 국정에 관한 의견을 받은 일을 어떻게 활용할 것인지 묻고 있고, 왕은 왕권을 강화하고 유교적 통치 체제를 확립하는 데 활용하겠다며 특히 최승로의 건의를 받아들여 이 정책을 실시하겠다고 답한다.
5품 이상 관리에게 시무책을 올리게 하고 최승로의 시무 28조를 수용한 왕은 고려 성종이다. 성종은 이를 바탕으로 유교 정치 이념을 국가 운영의 기본으로 삼고 중앙과 지방의 통치 조직을 정비하였다.
최승로가 시무 28조에서 지방 세력의 자의적 지배를 막기 위해 외관 파견을 건의하자, 성종은 전국의 주요 지역에 12목을 설치하고 지방관을 파견하였다. 아울러 2성 6부의 중앙 관제를 마련하고 국자감을 정비하였으며 흑창을 의창으로 고쳤다.
다른 왕들의 정책과 구별해 두자. 노비안검법과 과거제 도입은 광종, 경순왕 김부를 경주의 사심관으로 삼은 것은 태조, 인사권을 쥐고 있던 정방을 폐지한 것은 무신 집권기 이후 충선왕·공민왕 대의 개혁에 해당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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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라) 사건을 일어난 순서대로 옳게 나열한 것은? [3점]
(가) - (나) - (다) - (라)
(가) - (나) - (라) - (다)
(나) - (가) - (다) - (라)
(나) - (가) - (라) - (다)
(다) - (나) - (가) - (라)
네 자료는 모두 고려가 겪은 대외 항쟁이다. (가)는 살례탑(살리타이)이 처인성을 공격하다가 성 안의 승려가 쏜 화살에 죽은 일, (나)는 윤관이 여진에게 패한 까닭이 그들은 기병이고 우리는 보병이기 때문이라며 별무반 편성을 건의한 일이다.
(다)는 거란주(契丹主)가 보병과 기병 40만 명을 거느리고 압록강을 건너 흥화진을 포위하자 양규·이수화 등이 항복하지 않고 지켜 낸 일로, 거란 성종이 직접 침입한 거란의 2차 침입(1010년)에 해당한다. (라)는 왜구가 연산의 개태사를 노략하고 원수 박인계가 패하여 죽자 최영이 출격을 자청한 일로, 1376년 홍산 대첩으로 이어진다.
연대순으로 정리하면 거란 2차 침입인 (다) 1010년, 별무반 편성인 (나) 1104년, 몽골의 2차 침입 때 김윤후가 살리타이를 사살한 (가) 1232년, 최영의 왜구 격퇴인 (라) 1376년 순이 된다.
따라서 올바른 배열은 흥화진 항전 → 별무반 편성 → 처인성 전투 → 최영의 왜구 격퇴 순이다. 침입 세력이 거란 → 여진 → 몽골 → 왜구로 이어진다는 큰 흐름을 기억하면 순서를 쉽게 잡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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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시나리오의 상황 이후에 전개된 사실로 옳은 것은? [2점]
왕의 장인인 김흠돌이 반란을 도모하였다.
묘청이 칭제 건원과 금국 정벌을 주장하였다.
의종이 왕위에서 쫓겨나 거제도로 추방되었다.
이자겸이 왕실의 외척이 되어 권력을 독점하였다.
김부식이 서경의 반란군을 진압하기 위해 출정하였다.
시나리오는 보현원으로 행차하는 길, 오문(五門) 앞을 배경으로, 왕의 명으로 수박희를 하던 중 대장군 이소응이 상대를 이기지 못하고 도망가자 문신 한뢰가 그의 뺨을 때려 계단 아래로 떨어뜨리고, 이에 정중부가 성난 목소리로 3품 벼슬인 이소응을 어찌 이처럼 모욕하느냐고 항의하는 장면을 담고 있다.
이는 1170년(의종 24) 무신 정변이 일어나기 직전의 상황이다. 무신에 대한 차별과 모욕이 누적된 끝에 정중부·이의방·이고 등이 보현원에서 문신들을 제거하고 정권을 장악하였다.
정변에 성공한 무신들은 의종을 왕위에서 몰아내 거제도로 추방하고 명종을 세운 뒤 중방을 중심으로 권력을 행사하였다. 이후 이의방·정중부·경대승·이의민을 거쳐 최충헌이 집권하면서 최씨 무신 정권이 이어졌다.
제시된 상황보다 앞선 일들과 구별해야 한다. 왕의 장인 김흠돌의 반란은 통일 신라 신문왕 때의 일이고, 이자겸의 외척 권력 독점, 묘청의 칭제 건원과 금국 정벌 주장, 김부식의 서경 반란군 진압은 모두 무신 정변 이전인 인종 대에 일어났다.
내용에 오류가 있거나 최신 법령·기준과 다른 부분이 보이면 알려주세요. 확인 후 반영하겠습니다.
(가)에 들어갈 내용으로 옳은 것은? [2점]
경재소를 설치하여 유향소를 통제하였어요.
전국의 모든 군현에 지방관을 파견하였어요.
상수리 제도를 실시하여 지방 세력을 견제하였어요.
5소경을 설치하여 수도의 편재성을 보완하고자 하였어요.
국경 지대에 병마사를 파견하여 적의 침입에 대비하였어요.
게시판 질문에 첨부된 지도는 한반도를 양광도·경상도·전라도·교주도·서해도의 5도와 북쪽 국경 지대의 북계·동계 양계로 나누어 표시하고 있으며, 개경 일대의 경기와 남쪽의 탐라도 함께 나타나 있다. 이는 고려의 지방 행정 구역인 5도 양계 체제를 보여 준다.
답변에서 이미 언급한 향·부곡·소 같은 특수 행정 구역의 존재도 고려 지방 제도의 특징이다. 5도에는 안찰사를 파견하였고 그 아래 주현과 속현을 두었는데, 지방관이 파견되지 않은 속현이 더 많아 실제 행정은 향리가 담당하였다.
따라서 빈칸에 들어갈 설명으로는 군사 행정 구역인 양계, 즉 국경 지대에 병마사를 파견하여 적의 침입에 대비하였다는 내용이 알맞다. 북계와 동계에는 진(鎭)을 설치해 국방을 담당하게 하였다.
다른 시대의 제도와 혼동하지 말자. 경재소를 통한 유향소 통제와 모든 군현에 지방관 파견은 조선의 특징이며, 상수리 제도와 5소경은 통일 신라의 지방 통제 방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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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에 대한 설명으로 옳은 것은? [1점]
재해가 발생하였을 때 설치한 임시 기구였다.
개경의 동쪽과 서쪽에 두어 환자를 치료하였다.
흉년에 빈민에게 양식이나 종자 등을 빌려주었다.
국학에 설치되어 관학 진흥을 위한 재정을 뒷받침하였다.
전염병이 퍼지는 것을 막고 백성에게 약을 무료로 나눠주었다.
제시된 사료는 덕이란 정치를 잘하는 것이고 정치의 요체는 백성을 잘 기르는 데 있다고 하면서, 태조께서 흑창(黑倉)을 설치하였는데 쌀 1만 석을 더 보태고 그 이름을 (가)로 바꾸도록 하라고 명하는 내용이다.
고려 태조가 설치한 흑창을 확대하여 이름을 고친 기구는 의창이며, 이 조치는 성종 때 이루어졌다. 따라서 (가)는 의창이다.
의창은 평상시에 곡식을 비축해 두었다가 흉년이 들면 빈민에게 양식이나 종자를 빌려주고 추수 후에 갚게 한 빈민 구제 기구로, 고려 사회 정책의 대표적인 제도이다.
다른 기구들과 구별해 두자. 개경의 동쪽과 서쪽에 두어 환자를 치료한 것은 동·서 대비원, 전염병 확산을 막고 백성에게 약을 나누어 준 것은 혜민국, 재해 시 설치한 임시 기구는 구제도감·구급도감이며, 관학 진흥을 위해 국학에 설치한 장학 재단은 양현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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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사진전에 전시될 사진으로 적절한 것을 <보기>에서 고른 것은? [2점]
ㄱ, ㄴ
ㄱ, ㄷ
ㄴ, ㄷ
ㄴ, ㄹ
ㄷ, ㄹ
포스터는 ‘사진으로 보는 고려의 문화유산’이라는 제목 아래 찬란한 불교 문화를 꽃피웠던 고려 시대의 문화유산 사진전을 연다고 안내하고 있다. 따라서 보기 중 고려 시대에 제작된 불상을 골라야 한다.
보기의 영주 부석사 소조 여래 좌상은 흙으로 빚어 만든 현존 최고(最古)의 소조 불상으로, 부석사 무량수전에 봉안된 고려 시대 대표 불상이다. 하남 하사창동 철조 석가여래 좌상 역시 고려 초기에 유행한 대형 철불의 대표작으로, 지방 호족의 후원 아래 제작된 철불 조성 경향을 잘 보여 준다.
나머지 둘은 시기가 맞지 않는다. 금동 연가 7년명 여래 입상은 광배 뒷면의 명문에서 평양 동사(東寺)에서 만들었음이 확인되는 고구려의 불상이고, 금동 미륵보살 반가사유상은 삼국 시대에 제작되어 일본 고류사 목조 반가사유상과의 관련으로도 유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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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 지역에 대한 탐구 활동으로 가장 적절한 것은? [2점]
대몽 항쟁을 펼친 삼별초의 근거지를 파악한다.
홍건적의 침략 당시 공민왕이 피란한 지역을 찾아본다.
인조가 피신하여 청군과 항전을 벌인 장소를 알아본다.
양헌수가 이끈 부대가 프랑스군을 격퇴한 곳을 조사한다.
북로 군정서군이 일본군에 대승을 거둔 전적지를 검색한다.
안내문의 답사 경로는 병산 서원 → 봉정사 → 법흥사지 칠층 전탑 → 도산 서원이고, 아래 지도에도 이 네 곳이 한 시·군 경계 안에 모여 표시되어 있습니다. 병산 서원과 도산 서원, 봉정사, 법흥사지 칠층 전탑을 모두 품고 있는 고장은 경상북도 안동입니다.
안동은 고려 말 홍건적의 2차 침입 때 공민왕이 개경을 떠나 피란한 곳입니다. 당시 지명이 복주였는데, 왕을 맞이한 공으로 뒤에 안동대도호부로 승격되었습니다. 따라서 이 지역과 연결되는 탐구 활동은 홍건적 침입기 공민왕의 피란지를 찾아보는 것입니다.
나머지는 다른 고장의 사실입니다. 대몽 항쟁기 삼별초의 근거지는 강화도·진도·제주도이고, 인조가 피신해 청군과 맞선 곳은 남한산성입니다. 양헌수 부대가 프랑스군을 물리친 곳은 병인양요 때의 강화도 정족산성, 북로 군정서군이 일본군에 대승한 전적지는 만주의 청산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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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 인물에 대한 설명으로 옳은 것은? [2점]
최초의 서원인 백운동 서원을 건립하였다.
양명학을 연구하여 강화 학파를 형성하였다.
새로운 인사의 등용을 위해 현량과 실시를 주장하였다.
동호문답을 저술하여 다양한 개혁 방안을 제시하였다.
조선경국전을 편찬하여 재상 중심의 정치를 강조하였다
사진 속 건물은 심곡 서원이고, 설명에는 기묘사화로 희생당한 인물의 위패를 모신 곳이며 그가 중종에 의해 발탁되어 소격서 폐지 등 유교적 개혁 정치를 추진하다가 훈구파의 반발로 사사되었다고 나옵니다. 이 조건에 모두 들어맞는 인물은 조광조입니다.
조광조는 사림 세력을 확대하기 위해 학문과 덕행이 뛰어난 인재를 추천으로 뽑는 현량과 실시를 주장하여 관철시켰습니다. 이 밖에도 위훈 삭제, 향약 보급, 도교 제사 기관인 소격서 혁파를 밀어붙였고, 위훈 삭제에 반발한 훈구 세력의 공격으로 기묘사화를 맞아 죽음에 이르렀습니다.
다른 설명은 각각 백운동 서원을 세운 주세붕, 양명학을 연구해 강화 학파를 이룬 정제두, 동호문답을 지은 이이, 조선경국전을 편찬해 재상 중심 정치를 강조한 정도전에 해당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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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에 들어갈 내용으로 옳지 않은 것은? [2점]
신무기인 신기전과 화차가 개발되었어요.
천체의 운행을 측정하는 혼천의가 제작되었어요.
이덕무 등이 훈련 교범인 무예도보통지를 편찬하였어요.
강희맹이 자신의 경험을 바탕으로 금양잡록을 저술하였어요.
국산 약재와 치료 방법을 정리한 향약집성방이 간행되었어요.
수업 장면의 주제는 조선 전기 부국강병과 민생 안정을 위한 각 분야의 노력이고, 앞선 학생이 강우량을 측정하는 측우기 제작을 말하고 있습니다. 측우기는 세종 때 만들어졌으므로 빈칸에는 조선 전기, 특히 세종 무렵의 성과가 들어가야 합니다.
이 흐름에 맞지 않는 것은 무예도보통지 편찬입니다. 무예도보통지는 조선 후기 정조 때 이덕무·박제가·백동수 등이 왕명으로 만든 훈련 교범으로, 장용영의 무예 훈련에 쓰였습니다. 시기가 조선 후기이므로 빈칸에 들어갈 수 없습니다.
나머지는 모두 조선 전기의 성과입니다. 신기전과 화차는 세종 때 개발된 신무기이고, 혼천의는 천체의 운행을 관측하던 기구이며, 향약집성방은 우리 땅에서 나는 약재와 치료법을 정리해 세종 때 간행되었습니다. 금양잡록은 강희맹이 자신의 농사 경험을 바탕으로 지은 농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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밑줄 그은 ‘왕’의 업적으로 옳은 것은? [1점]
명과 후금 사이에서 중립 외교를 펼쳤다.
탕평비를 세워 붕당 정치의 폐해를 경계하였다.
초계문신제를 시행하여 문신들을 재교육하였다.
6조 직계제를 처음 실시하여 왕권을 강화하였다.
집현전을 설치하여 인재를 육성하고 편찬 사업을 추진하였다.
자료에서 왕은 양평군 허준이 선왕의 특명을 받아 의방을 찬집하다가 유배 중에도 작업을 이어 마침내 책으로 엮어 올렸다고 하며, 선왕이 명한 책이 자신이 계승한 뒤에 완성되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 책이 동의보감이고, 선조의 명으로 시작해 완성을 본 시점의 왕은 광해군입니다.
광해군은 명이 쇠퇴하고 후금이 성장하던 국제 정세 속에서 어느 한쪽에 치우치지 않는 중립 외교를 폈습니다. 명의 요청으로 강홍립 부대를 파병하면서도 상황에 따라 대처하도록 하여 후금과의 충돌을 피했고, 이는 뒷날 인조반정의 명분이 되기도 했습니다.
다른 설명의 주인공은 각각 탕평비를 세운 영조, 초계문신제를 시행한 정조, 6조 직계제를 처음 실시한 태종, 집현전을 설치한 세종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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밑줄 그은 ‘이 정책’에 대한 설명으로 옳은 것은? [2점]
풍흉과 토지의 비옥도에 따라 차등 부과하였다.
선혜법이라는 이름으로 경기도에서 처음 시행되었다.
육의전을 제외한 시전 상인의 금난전권 폐지를 가져왔다.
공인이 등장하여 상품 화폐 경제가 발달하는 계기가 되었다.
재정 부족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지주에게 결작을 부과하였다.
자료는 2필 양역의 폐단을 지적하면서 호전과 결포 주장을 모두 시행할 수 없게 되자 임금이 궁궐 문에 나아가 민정을 물은 끝에 "2필의 양역을 1필로 줄이겠다"고 하교했다고 전합니다. 군포를 1년에 2필에서 1필로 줄인 이 정책이 영조 때의 균역법입니다.
군포를 절반으로 줄이자 부족해진 재정을 메우기 위해 여러 보충 재원이 마련되었는데, 그 가운데 대표적인 것이 지주에게 토지 1결당 쌀 2두를 물린 결작입니다. 이 밖에 일부 상류층에게 선무군관포를 걷고 어세·염세·선박세를 국가 재정으로 돌렸습니다.
나머지는 다른 제도입니다. 풍흉과 토지 비옥도에 따라 차등 부과한 것은 연분 9등법과 전분 6등법이고, 선혜법이라는 이름으로 경기도에서 처음 시행되어 공인의 등장과 상품 화폐 경제 발달을 이끈 것은 대동법이며, 육의전을 제외한 금난전권을 폐지한 것은 신해통공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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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자료의 상황이 나타난 시기의 경제 모습으로 옳은 것을 <보기>에서 고른 것은? [3점]
ㄱ, ㄴ
ㄱ, ㄷ
ㄴ, ㄷ
ㄴ, ㄹ
ㄷ, ㄹ
자료는 금점 다섯 곳 가운데 두 곳은 금맥이 다 되어 철폐할 지경이고 세 곳은 아직 넉넉하다고 하면서, 점이 가장 왕성할 때는 하루아침에 걷는 세금이 수천 냥에 이르러 그중 7백 냥은 화성부에 상납하고 50여 냥은 점 안 소임의 급료로 제한 뒤 1천 냥은 차인이 차지한다고 적고 있습니다. 나라가 설점수세로 광산세를 거두고 실제 경영과 이익은 차인 같은 전문 경영인이 맡던 조선 후기의 모습입니다.
조선 후기에는 상품 화폐 경제가 발달하면서 담배와 면화 같은 작물을 시장에 내다 팔 목적으로 재배하는 상품 작물 농업이 널리 퍼졌습니다. 또 개성을 근거로 한 송상은 전국에 송방을 두고 인삼을 재배·판매했으며, 의주 만상과 동래 내상을 잇는 청·일 간 중계 무역으로 큰 부를 쌓았습니다.
나머지 두 가지는 시기가 맞지 않습니다. 해동통보가 주조되어 유통된 것은 고려 숙종 때이고, 시전을 감독하기 위해 경시서가 설치된 것도 고려 때의 일로 조선 후기에는 그 기능을 평시서가 맡고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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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설명에 해당하는 지도로 옳은 것은? [2점]
설명은 현존하는 동양 최고(最古)의 세계 지도로 1402년 김사형과 이무가 발의하고 이회가 실무를 맡아 제작했으며, 원의 세계 지도를 참고하되 소략했던 한반도와 일본 부분을 우리 지도와 일본 지도로 보강했다고 밝히고 있습니다. 아시아·유럽·아프리카 대륙과 주요 도시가 표시된 이 지도가 혼일강리역대국도지도입니다.
따라서 선택지 중에서는 제목이 혼일강리역대국도지도로 붙은 지도를 골라야 합니다. 이 지도는 조선 태종 때 만들어져 당시 조선인의 세계 인식과 함께, 중국 다음으로 조선을 크게 그린 자국 중심의 지리관을 보여 줍니다.
나머지 지도들은 시기와 성격이 다릅니다. 천하도는 중국 중심의 관념적 세계관을 담은 조선 중기 이후의 상상적 세계 지도이고, 곤여만국전도는 마테오 리치가 만들어 17세기에 전해진 서양식 세계 지도이며, 지구전도와 여지전도 역시 서양 지리 지식이 들어온 뒤 조선 후기에 제작된 지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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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자료에 해당하는 군사 조직에 대한 설명으로 옳은 것은? [2점]
정조 때 설치된 국왕의 친위 부대였다.
정미 7조약에 의해 강제로 해산되었다.
포수, 사수, 살수의 삼수병으로 편제되었다.
이종무의 지휘 아래 대마도 정벌에 참여하였다.
양인개병의 원칙에 따라 의무병으로 구성되었다.
자료는 서애집에 실린 글로, 주상이 도감을 설치해 군사를 훈련시키라 명하고 글쓴이를 도제조로 삼자, 당속미 1천 석을 군량으로 삼아 한 사람당 하루 2승씩 주는 조건으로 군인을 모집했다고 합니다. 임진왜란 중 유성룡의 건의로 설치된 훈련도감입니다.
글에는 수천 명을 모아 조총 쏘는 법과 창검 쓰는 기술을 가르쳤다고 나오는데, 이는 훈련도감이 포수·사수·살수의 삼수병으로 편제되었음을 보여 줍니다. 하루 몇 승의 쌀을 급료로 받는 데서 알 수 있듯 훈련도감군은 의무병이 아니라 직업적인 상비군(급료병)이었습니다.
다른 설명은 각각 정조 때의 친위 부대인 장용영, 정미 7조약에 따라 강제 해산된 대한 제국 군대, 세종 때 이종무의 대마도 정벌에 나선 군대, 양인개병 원칙에 따라 의무병으로 채워진 조선 전기 5위에 해당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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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사건 이후에 전개된 사실로 옳은 것은? [3점]
외척 간의 대립으로 을사사화가 발생하였다.
인현왕후가 폐위되고 남인이 권력을 장악하였다.
공신 책봉에 불만을 품고 이괄이 반란을 일으켰다.
서인과 남인이 두 차례에 걸쳐 예송을 전개하였다.
이조 전랑 임명을 둘러싸고 사림이 동인과 서인으로 나뉘었다.
그림에서 한 신하가 "희빈 장씨의 아들은 왕비의 소생이 아니므로 왕자의 명호를 원자로 정한 것은 너무 이른 처사"라는 상소를 올리자, 왕은 "왕명을 가벼이 여기는 상소를 올린 송시열의 관작을 삭탈하고 도성 밖으로 내쫓으라"고 명하고 있습니다. 숙종이 장희빈 소생을 원자로 삼는 데 반대한 서인을 몰아낸 기사환국(1689)의 장면입니다.
기사환국으로 서인이 축출되고 남인이 정권을 잡았으며, 그 연장선에서 인현왕후가 폐위되고 장희빈이 왕비가 되었습니다. 송시열은 결국 사사되었습니다. 이후 갑술환국으로 인현왕후가 복위되면서 정국은 다시 뒤집힙니다.
나머지는 모두 이 사건보다 앞선 일입니다. 외척 대립으로 일어난 을사사화는 명종 즉위 직후, 이괄의 난은 인조 초, 서인과 남인의 두 차례 예송은 현종 때이며, 이조 전랑 임명 문제로 사림이 동인과 서인으로 갈린 것은 선조 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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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에 들어갈 내용으로 옳은 것을 <보기>에서 고른 것은? [2점]
ㄱ, ㄴ
ㄱ, ㄷ
ㄴ, ㄷ
ㄴ, ㄹ
ㄷ, ㄹ
칠판의 주제는 조선 후기 국학 연구이고, 배경으로 중국 중심의 세계관 탈피 추구와 우리의 전통·현실에 대한 관심 확대가, 내용의 예로 우리말의 음운을 연구한 훈민정음운해가 적혀 있습니다. 빈칸에는 같은 성격의 조선 후기 국학 성과가 들어가야 합니다.
이에 해당하는 것은 남북국 시대론을 제시한 발해고와 우리나라의 역사 지리를 정리한 아방강역고입니다. 유득공은 발해고에서 신라와 발해를 함께 다루며 발해사를 우리 역사로 끌어들였고, 정약용은 아방강역고에서 우리 옛 나라들의 강역을 고증했습니다.
나머지 둘은 조선 전기의 저술입니다. 전국의 지리 정보를 정리한 팔도지리지는 세종 때 편찬되었고, 고조선부터 고려까지의 역사를 정리한 동국통감은 성종 때 서거정 등이 완성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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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에 들어갈 세시 풍속으로 옳은 것은? [1점]
백중
칠석
대보름
삼짇날
한가위
홍보문에는 “봄의 첫걸음”이라는 제목과 함께 “강남 갔던 제비가 돌아와 새봄을 알린다는” 날이라는 설명이 붙어 있고, 체험 행사로 진달래꽃으로 장식한 화전 부치기와 노랑나비 날려 보내기가 제시되어 있습니다.
제비가 돌아오는 날로 여겨져 진달래 화전을 부쳐 먹고, 이날 노랑나비를 보면 길하다고 믿었던 음력 3월 3일의 세시 풍속이 바로 삼짇날입니다.
다른 명절과 구별해 두면 좋습니다. 백중은 음력 7월 15일 호미씻이와 백중장이 열리는 날, 칠석은 음력 7월 7일 견우직녀 설화의 날, 대보름은 음력 1월 15일 부럼 깨기·달집태우기, 한가위는 음력 8월 15일 추석으로 송편과 차례를 지내는 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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밑줄 그은 ‘이 사건’에 대한 설명으로 옳은 것은? [2점]
청의 군대에 의해 진압되었다.
선혜청과 일본 공사관을 공격하였다.
몰락 양반 출신인 유계춘이 주도하였다.
남접과 북접이 연합하여 조직적으로 전개하였다.
세도 정치기의 수탈과 지역 차별에 반발하여 일어났다.
자료는 진중일기로, 조선 후기 평안도 가산과 곽산 일대에서 일어난 사건의 진압 과정을 일기체로 기록한 책이라고 소개되어 있습니다. 참여 세력으로 우군칙(참모)·이희저(와주)·김창시(선봉)가 열거되고, 김사용과 홍총각이 손발 역할을 했다고 적혀 있습니다.
이 인물들과 평안도 가산 봉기라는 지역 정보는 1811년 홍경래의 난을 가리킵니다. 실제로 “의주로부터 개성에 이르는 지역 거의 대부분의 부호·대상(大商)이 망라되어 있었다”는 기록처럼, 서북 지방의 상인과 부호가 대거 가담한 봉기였습니다.
따라서 이 사건은 세도 정치기의 극심한 수탈과 오랫동안 누적된 서북(평안도) 지역에 대한 차별에 반발하여 일어났다고 설명하는 것이 옳습니다.
나머지는 다른 사건입니다. 청군에 진압된 것은 갑신정변, 선혜청과 일본 공사관을 공격한 것은 임오군란, 몰락 양반 유계춘이 주도한 것은 진주 농민 봉기, 남접과 북접이 연합한 것은 동학 농민 운동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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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 인물이 실시한 정책으로 옳지 않은 것은? [2점]
속대전을 편찬하여 통치 체제를 정비하였다.
국가 재정 확충을 위해 호포제를 실시하였다.
삼군부를 부활시켜 군국 기무를 전담하게 하였다.
경복궁을 중건하여 왕실의 권위를 세우고자 하였다.
사창제를 실시하여 환곡의 폐단을 시정하고자 하였다.
자료의 편지 설명에는 고종의 즉위와 함께 권력을 장악한 인물이 이양선(異樣船) 접근에 대비해 서리와 장교를 상인으로 위장시켜 동정을 살피라고 지시한 내용이 담겨 있고, 신미양요 직후 척화비를 세웠다는 설명이 이어집니다. 이 인물은 흥선 대원군입니다.
흥선 대원군은 양반에게도 군포를 물리는 호포제를 실시해 국가 재정을 확충했고, 비변사를 축소하는 대신 삼군부를 부활시켜 군국 기무를 맡겼습니다. 또 왕실의 권위를 세우고자 경복궁을 중건했으며, 환곡의 폐단을 시정하기 위해 민간이 운영하는 사창제를 시행했습니다.
반면 속대전 편찬은 통치 체제를 정비하기 위해 영조가 추진한 사업으로, 흥선 대원군의 정책이 아닙니다. 참고로 흥선 대원군 시기에 편찬된 법전은 대전회통과 육전조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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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 (나) 인물의 활동으로 옳은 것은? [2점]
(가) - 대동강으로 침입한 제너럴 셔먼호를 불태웠다.
(가) - 북학의를 저술하여 청의 문물 수용을 주장하였다.
(나) - 대한 광복회를 조직하여 친일 부호를 처단하였다.
(나) - 조선책략 유포에 반발하여 영남 만인소를 주도하였다.
(가), (나) - 통상 개국론을 통해 문호 개방의 필요성을 주장하였다.
그림 자료에서 (가)는 “박지원의 손자인 나는 임술년 농민 봉기 때 안핵사로 파견되어 탐관오리 처벌과 삼정이정청 설치를 요청하였다”고 말합니다. 이 인물은 박규수입니다.
(나)는 “을사늑약 체결 소식에 을사오적 처벌 상소를 올린 뒤 태인에서 의병을 일으켰으나 체포되어 쓰시마 섬으로 끌려갔다”고 말합니다. 이 인물은 최익현입니다.
박규수는 평안도 관찰사로 재직하던 1866년, 통상을 요구하며 대동강을 거슬러 올라와 행패를 부린 제너럴 셔먼호를 불태운 사건을 지휘했습니다. 이 설명이 (가)의 활동으로 옳습니다.
나머지는 인물이 어긋납니다. 북학의를 저술한 이는 박제가, 대한 광복회를 조직해 친일 부호를 처단한 이는 박상진, 영남 만인소를 주도한 이는 이만손입니다. 또 통상 개국론을 주장한 사람은 박규수이며, 최익현은 오히려 왜양일체론을 내세워 개항에 반대했으므로 두 인물의 공통점이 될 수 없습니다.
내용에 오류가 있거나 최신 법령·기준과 다른 부분이 보이면 알려주세요. 확인 후 반영하겠습니다.
다음 조약에 대한 설명으로 옳은 것은? [2점]
갑신정변이 원인이 되어 체결되었다.
조약 체결에 반대하여 민영환이 자결하였다.
천주교의 포교를 허용하는 조항이 들어 있다.
외국에 대한 최혜국 대우를 처음으로 규정하였다.
부산 외 2곳의 항구가 개항되는 결과를 가져왔다.
자료는 일본 측 대표 구로다 기요타카·이노우에 가오루와 조선 측 판중추부사 신헌·부총관 윤자승이 의결했다는 조관으로, 1876년 강화도 조약(조·일 수호 조규)입니다. 제1관에 “조선국은 자주 국가로서 일본국과 평등한 권리를 보유한다”, 제7관에 일본 항해자가 조선 연해를 수시로 측량하고 지도를 제작하도록 허락한다는 내용이 담겨 있습니다.
제1관은 조선에 대한 청의 종주권을 부인하려는 의도였고, 제7관의 해안 측량권은 영사 재판권(치외 법권)과 함께 이 조약을 대표적인 불평등 조약으로 만든 조항입니다.
이 조약의 결과 조선은 이미 개항되어 있던 부산 외에 두 곳의 항구를 더 열게 되었고, 실제로 원산(1880)과 인천(1883)이 차례로 개항되었습니다.
다른 설명은 각각 다른 조약입니다. 갑신정변이 원인이 되어 체결된 것은 한성 조약과 톈진 조약, 체결에 반대해 민영환이 자결한 것은 을사늑약, 천주교 포교를 허용한 것은 조·프 수호 통상 조약, 최혜국 대우를 처음 규정한 것은 조·미 수호 통상 조약입니다.
내용에 오류가 있거나 최신 법령·기준과 다른 부분이 보이면 알려주세요. 확인 후 반영하겠습니다.
(가), (나) 사절단에 대한 설명으로 옳은 것은? [3점]
(가) - 에도 막부의 요청으로 파견되었다.
(가) - 암행어사의 형태로 비밀리에 파견되었다.
(나) - 조·미 수호 통상 조약의 체결로 파견되었다.
(나) - 무기 제조 공장인 기기창 설립의 계기가 되었다.
(가), (나) - 고종이 대한 제국을 선포한 이후 파견되었다.
정리 노트에서 (가)는 대표 김기수, 파견 시기 1876년 4월~6월, 활동은 일본의 신식 기관과 근대 시설 시찰 및 이토 히로부미 등 주요 인사와의 면담으로 적혀 있습니다. 강화도 조약 직후 일본에 보낸 제1차 수신사입니다.
(나)는 대표 김윤식, 파견 시기 1881년 9월~1882년 11월, 활동은 전기·화학·제련 등 선진 과학 기술과 외국어 학습이며 임오군란으로 1년여 만에 조기 귀국했다고 되어 있습니다. 청의 톈진에 파견된 영선사입니다.
영선사 일행이 배워 온 기술을 바탕으로 1883년 서울에 근대식 무기 제조 공장인 기기창이 설립되었습니다. 이 설명이 (나)의 활동으로 옳습니다.
나머지는 사실과 다릅니다. 에도 막부의 요청으로 파견된 것은 조선 후기의 통신사이고, 암행어사 형태로 비밀리에 다녀온 것은 1881년의 조사 시찰단이며, 조·미 수호 통상 조약 체결로 미국에 파견된 것은 보빙사입니다. 또 두 사절단 모두 대한 제국 선포(1897) 이전에 파견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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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가상 일기가 쓰인 이후의 사실로 옳지 않은 것은? [1점]
독립 협회가 만민 공동회를 개최하였다.
서울과 인천을 연결하는 철도가 개통되었다.
함경도 덕원 주민들에 의해 원산 학사가 세워졌다.
황실이 자본을 투자한 한성 전기 회사가 설립되었다.
최초의 서양식 극장인 원각사에서 은세계가 공연되었다.
가상 일기에는 “드디어 내일 우정총국에서 개국 축하연이 열린다”면서, 우정총국은 보빙사의 일원으로 미국을 방문한 홍영식이 미국의 우편 제도를 보고 돌아와 건의해 만들어진 근대 우편 기구라고 적혀 있습니다.
우정총국 개국 축하연은 1884년 12월 4일에 열렸고, 바로 그 자리에서 급진 개화파가 갑신정변을 일으켰습니다. 따라서 이 일기는 1884년에 쓰인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원산 학사는 1883년 함경도 덕원 주민들이 세운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적 사립 학교로, 일기가 쓰인 시점보다 앞선 일입니다. 그러므로 이후의 사실로 볼 수 없습니다.
나머지는 모두 1884년 이후입니다. 독립 협회의 만민 공동회 개최는 1898년, 서울과 인천을 잇는 경인선 개통은 1899년, 황실이 자본을 댄 한성 전기 회사 설립은 1898년, 원각사에서의 은세계 공연은 1908년의 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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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자료에 해당하는 민족 운동에 대한 설명으로 옳은 것은? [2점]
근우회의 주도로 전개되었다.
평양에서 시작되어 전국으로 확산되었다.
조선 사람 조선 것 등의 구호를 내세웠다.
러시아의 절영도 조차 요구를 저지시켰다.
서상돈, 김광제 등의 발의로 본격화되었다.
자료로 제시된 신문 기사의 제목은 “경고 아 부인 동포라”이고, 본문에는 여자의 몸이라도 나라 위하는 마음에 남녀가 다를 수 없다면서 “국채를 갚으려고 이천만 동포가 석 달간 연초를 아니 먹고 대전을 구취한다”는 내용이 담겨 있습니다.
담배를 끊어 모은 돈으로 나라의 빚을 갚자는 이 운동은 1907년 대구에서 일어난 국채 보상 운동입니다. 일본에서 들여온 차관 1,300만 원을 국민의 힘으로 갚아 경제적 자주권을 지키려 한 운동으로, 여성들도 패물을 내놓으며 적극 참여했습니다.
이 운동은 대구의 서상돈, 김광제 등의 발의로 본격화되었고, 대한매일신보 등 언론의 후원으로 전국으로 퍼졌으나 통감부의 방해로 좌절되었습니다.
다른 설명은 각각 근우회가 주도한 여성 운동, 평양에서 시작해 “조선 사람 조선 것”을 구호로 내건 물산 장려 운동, 러시아의 절영도 조차 요구를 저지한 독립 협회의 활동에 해당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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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 기구에서 추진한 개혁으로 옳은 것은? [3점]
건양이라는 연호를 제정하였다.
신식 군대인 별기군을 창설하였다.
양전 사업을 실시하여 지계를 발급하였다.
지방 행정 구역을 8도에서 23부로 개편하였다.
공사 노비법을 혁파하고 과부의 재가를 허용하였다.
자료는 주 조선 프랑스 공사가 파리의 외무부 장관에게 보낸 보고로, 일본군이 경복궁을 점령한 후 조선 왕이 일본 공사 오토리의 요청에 따라 이 기구를 구성했으며 의정부 영의정 김홍집이 총재를 겸임하고 행정·재정·법률 분야의 개혁안을 차례로 채택했다고 적고 있습니다. 이 기구는 군국기무처입니다.
군국기무처는 1894년 제1차 갑오개혁을 주도한 초정부적 회의 기구로, 정치 면에서 개국 기년 사용, 경제 면에서 재정의 탁지아문 일원화와 은 본위 화폐제·조세 금납화를 시행했습니다.
사회 면에서는 신분제를 무너뜨리는 개혁을 단행해 공사 노비법을 혁파하고 과부의 재가를 허용했으며, 조혼 금지와 연좌제 폐지도 함께 이루어졌습니다.
나머지는 시기가 다릅니다. 건양 연호 제정은 을미개혁, 별기군 창설은 1881년 개화 정책, 양전 사업과 지계 발급은 대한 제국의 광무개혁, 8도를 23부로 개편한 것은 군국기무처 폐지 뒤의 제2차 갑오개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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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수행 평가의 보고서 제목으로 적절한 것을 <보기>에서 고른 것은? [2점]
ㄱ, ㄴ
ㄱ, ㄷ
ㄴ, ㄷ
ㄴ, ㄹ
ㄷ, ㄹ
수행 평가 안내문의 주제는 “일제 강점기 식민 사학을 극복하기 위한 노력”이고, 조사 내용은 한국사의 타율성·정체성·당파성을 강조한 식민 사학을 극복하려 한 노력을 조사해 보고서로 내는 것입니다. 따라서 일제 강점기에 이루어진, 식민 사학에 맞선 연구를 골라야 합니다.
신채호의 조선 상고사는 역사를 “아(我)와 비아(非我)의 투쟁”으로 규정하고 고대사를 주체적으로 서술해, 우리 역사가 스스로 발전하지 못했다는 타율성론을 정면으로 반박한 민족주의 사학의 대표 저술입니다.
백남운의 조선사회경제사는 유물 사관을 적용해 우리 역사도 세계사의 보편적인 발전 단계를 밟았음을 밝힘으로써, 조선이 근대 사회로 나아가지 못하고 정체되어 있었다는 정체성론을 논박했습니다.
나머지는 주제에 맞지 않습니다. 이종휘의 동사는 일제 강점기가 아니라 조선 후기의 역사서이고, 조선사편수회의 조선사 편찬은 극복 대상인 식민 사학을 만들어 낸 조선 총독부의 사업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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밑줄 그은 ‘의병’에 대한 설명으로 옳은 것은? [1점]
단발령의 시행에 반발하여 봉기하였다.
해산 군인의 합류로 군사력이 강화되었다.
봉오동에서 일본군을 상대로 승리를 거두었다.
조선 총독부에 국권 반환 요구서를 발송하였다.
국제법상 교전 단체로 승인해 줄 것을 요구하였다.
자료는 의암 유인석이 입던 평상복(등록문화재 제661호)을 소개하면서, 그가 복수보형(復讐保形)의 기치 아래 일으킨 의병이 제천·충주 등지에서 크게 기세를 떨쳤다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유인석이 위정척사 사상의 거두인 이항로의 문하라는 점도 함께 제시되어 있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의병은 을미의병(1895)입니다. 국모의 원수를 갚는다는 '복수'는 을미사변을, 전통을 보전한다는 '보형'은 상투를 자르게 한 조치에 대한 저항을 뜻합니다. 즉 을미사변과 함께 단발령의 시행에 반발하여 위정척사 계열 유생들이 주도해 봉기한 의병이며, 유인석은 제천에서 거병해 충주성을 점령하기도 했습니다.
나머지 설명은 시기가 맞지 않습니다. 해산 군인이 합류해 군사력이 강화되고 국제법상 교전 단체 승인을 요구한 것은 1907년 정미의병과 13도 창의군의 일이고, 봉오동 전투 승리는 1920년 대한 독립군, 조선 총독부에 국권 반환 요구서를 보낸 것은 1910년대 독립 의군부의 활동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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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에 들어갈 내용으로 옳은 것은? [2점]
하얼빈 역에서 이토 히로부미 사살
민족의식 고취를 위해 명동 학교 설립
훙커우 공원에서 일본군 장성과 고관 처단
조선 혁명군을 이끌고 영릉가 전투에서 승리
중국 우한에서 군사 조직인 조선 의용대 창설
연보에는 1898년 경상남도 밀양 출생, 1919년 의열단 조직, 1926년 황푸 군관 학교 졸업, 1935년 민족 혁명당 결성, 1938년 (가), 1942년 한국광복군 제1지대장 취임이 차례로 적혀 있습니다. 이 이력은 모두 약산 김원봉의 것입니다.
김원봉은 1919년 만주 지린에서 의열단을 조직해 의열 투쟁을 이끌다가, 개별 투쟁의 한계를 느끼고 황푸 군관 학교에 입학해 군사 훈련을 받았습니다. 이후 조선 혁명 간부 학교를 세우고 1935년 중국 관내 독립운동 세력을 모아 민족 혁명당을 결성했습니다.
따라서 1938년 자리에 들어갈 활동은 중국 우한에서 군사 조직인 조선 의용대를 창설한 일입니다. 조선 의용대는 중국 관내에서 결성된 최초의 한인 무장 부대였으며, 이후 일부는 화북으로 이동해 조선 의용대 화북 지대가 되고 김원봉이 이끈 나머지는 1942년 한국광복군에 합류했습니다.
하얼빈 역의 이토 히로부미 사살은 안중근, 명동 학교 설립은 김약연, 훙커우 공원 의거는 윤봉길, 영릉가 전투 승리는 조선 혁명군을 이끈 양세봉의 활동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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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대화에 나타난 일제의 정책이 시행된 시기에 볼 수 있는 모습으로 적절한 것은? [1점]
태형을 집행하는 헌병 경찰
회사령을 공포하는 총독부 관리
암태도 소작 쟁의에 참여하는 농민
황국 신민 서사 암송을 강요받는 학생
조선 민립 대학 기성회에 성금을 내는 상인
대화에서 한 인물이 창씨개명을 강요하여 성명을 바꾸게 한다고 개탄하자, 다른 인물이 그뿐 아니라 국민 징용령을 시행하여 광산이나 공장으로 끌고 가 노예처럼 일을 시킨다고 답하고 있습니다.
창씨개명(1940)과 국민 징용령(1939)은 모두 중일 전쟁 이후 일제가 실시한 민족 말살 통치와 전시 총동원 체제의 정책입니다. 따라서 이 시기에 볼 수 있는 모습은 황국 신민 서사 암송을 강요받는 학생입니다. 황국 신민 서사는 1937년 제정되어 학교와 관공서에서 암송이 강제되었습니다.
태형을 집행하는 헌병 경찰(조선 태형령, 1912)과 회사령 공포(1910)는 1910년대 무단 통치기의 모습이고, 암태도 소작 쟁의(1923)와 민립 대학 설립 운동(1922~1923)은 1920년대의 일이므로 시기가 맞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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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자료에 나타난 민족 운동에 대한 설명으로 옳은 것은? [3점]
대한민국 임시 정부의 수립에 영향을 주었다.
신간회 중앙 본부가 진상 조사단을 파견하였다.
민족주의 진영과 사회주의 진영이 함께 준비하였다.
한국인 학생과 일본인 학생 간의 충돌이 발단이 되었다.
일제 통치 방식이 이른바 문화 통치로 바뀌는 계기가 되었다
자료는 순종 황제의 인산 행렬이 돈화문을 떠나 황금정 거리까지 이어지던 중, 대여가 관수교를 지나갈 무렵 학생 수십 인이 인쇄한 격문 수만 매를 뿌리며 조선 독립 만세를 불렀다고 전하고 있습니다. 학생 30여 명이 체포되고 남대문통 세브란스 의학 전문 학생도 격문을 뿌리다 4명이 체포되었다는 내용도 보입니다.
순종의 인산일에 학생들이 격문을 뿌리며 만세를 외친 이 사건은 1926년의 6·10 만세 운동입니다. 이 운동은 민족주의 진영과 사회주의 진영이 함께 준비한 것이 가장 큰 특징으로, 조선 공산당 계열과 천도교 계열, 학생 단체가 각각 계획을 세웠습니다. 사전에 발각되어 일부만 실행되었지만, 이때 형성된 협력 경험이 이후 민족 유일당 운동과 신간회 창립의 밑거름이 되었습니다.
임시 정부 수립에 영향을 주고 문화 통치로의 전환 계기가 된 것은 3·1 운동이며, 한국인 학생과 일본인 학생의 충돌에서 시작되어 신간회가 진상 조사단을 파견한 것은 1929년 광주 학생 항일 운동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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밑줄 그은 ‘이 단체’에 대한 설명으로 옳은 것은? [2점]
김구에 의해 상하이에서 조직되었다.
조선 혁명 선언을 활동 지침으로 하였다.
김상옥, 김익상 등이 단원으로 활동하였다.
복벽주의를 내세우며 의병 전쟁을 준비하였다.
신흥 무관 학교를 설립하여 독립군을 양성하였다.
사진은 이봉창이 태극기 앞에서 독립운동에 헌신하겠다는 선서를 하며 찍은 것으로, 그가 일왕의 행렬에 폭탄을 던져 일제 침략자들의 간담을 서늘하게 했다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이봉창이 입단한 이 단체는 1931년 조직된 한인 애국단입니다. 침체에 빠진 대한민국 임시 정부의 활로를 열기 위해 김구가 상하이에서 조직한 의열 투쟁 단체로, 이봉창의 도쿄 의거(1932)와 윤봉길의 훙커우 공원 의거(1932)가 대표적 활동입니다. 특히 윤봉길 의거는 중국 국민당 정부가 임시 정부를 지원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조선 혁명 선언을 활동 지침으로 삼고 김상옥·김익상 등이 단원으로 활동한 단체는 의열단이고, 복벽주의를 내세운 것은 독립 의군부, 신흥 무관 학교를 세워 독립군을 양성한 것은 신민회와 경학사 계열의 활동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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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자료가 발표된 시기를 연표에서 옳게 고른 것은? [2점]
(가)
(나)
(다)
(라)
(마)
자료는 삼상 회의 결정에 의하여 남북을 통한 좌우 합작으로 민주주의 임시 정부를 수립할 것(제1조), 친일파 민족 반역자 처리 조례를 본 합작 위원회에서 입법 기구에 제안할 것(제4조), 언론·집회·결사·출판·교통·투표의 자유 보장(제7조)을 담고 있습니다. 이는 1946년 10월 발표된 좌우 합작 7원칙입니다.
연표는 1945.8 광복 — (가) — 1945.12 모스크바 3국 외상 회의 — (나) — 1946.3 제1차 미·소 공동 위원회 — (다) — 1947.5 제2차 미·소 공동 위원회 — (라) — 1948.5 5·10 총선거 — (마) — 1950.6 6·25 전쟁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제1차 미·소 공동 위원회가 결렬된 뒤 여운형과 김규식을 중심으로 좌우 합작 위원회가 결성되어 1946년 10월 7원칙을 발표했으므로, 발표 시점은 1946년 3월과 1947년 5월 사이 구간에 해당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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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인물의 활동으로 옳은 것은? [2점]
민족 교육을 위해 오산 학교를 설립하였다.
대한민국 임시 정부의 대통령으로 활동하였다.
서유견문을 집필하여 서양 근대 문물을 소개하였다.
국문 연구소를 세워 한글의 문자 체계를 정리하였다.
헤이그에서 열린 만국 평화 회의에 특사로 파견되었다.
'이달의 독립운동가' 소개 자료에는 호가 남강(南岡), 생몰 연대가 1864년~1930년이며, 주요 활동으로 신민회 가입, 자기(磁器) 회사 설립, 태극 서관 경영, 105인 사건으로 옥고, 3·1 운동 당시 민족 대표 33인 중 기독교 측 대표로 활동, 1962년 건국 훈장 대한민국장 추서가 적혀 있습니다. 이 인물은 이승훈입니다.
이승훈은 안창호의 강연에 감화되어 신민회에 참여했고, 신민회의 실력 양성 방침에 따라 평양에 자기 회사를 세우고 태극 서관을 운영했습니다. 교육 구국 운동의 일환으로는 1907년 평안북도 정주에 오산 학교를 설립하여 민족 교육에 힘썼습니다.
임시 정부 대통령으로 활동한 인물은 이승만, 서유견문 집필은 유길준, 국문 연구소를 통한 한글 문자 체계 정리는 주시경 등의 활동이며, 헤이그 만국 평화 회의 특사는 이준·이상설·이위종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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밑줄 그은 ‘계획’에 대한 설명으로 옳은 것은? [2점]
농광 회사가 주도하여 추진하였다.
추진 과정에서 수리 조합 반대 운동이 일어났다.
태평양 전쟁 이후 군량미 조달을 위해 시작되었다.
하와이 노동 이민이 공식적으로 시작되는 배경이 되었다.
함경도와 황해도에서 방곡령이 선포되는 결과를 가져왔다.
신문 기사는 조선에서 대대적으로 쌀 생산을 늘리겠다는 조선 총독부의 계획을 전하면서, 일본에서 인구가 도시로 집중되며 쌀 부족과 쌀 폭동까지 일어나자 본국의 식량 부족을 조선에서 해결하려 한다고 설명합니다. 실행 수단으로는 관개 시설 확보, 종자 개량, 개간이 제시되어 있습니다.
이 계획은 1920년부터 추진된 산미 증식 계획입니다. 1918년 일본의 쌀 폭동을 계기로 부족한 식량을 조선에서 조달하려 한 정책으로, 수리 시설 확충과 품종 개량, 개간·간척이 중심이었습니다.
문제는 수리 시설 확충에 든 수리 조합비 등 각종 비용이 조선 농민에게 전가되었다는 점입니다. 이에 각지에서 수리 조합 반대 운동이 일어났고, 증산량보다 많은 양이 일본으로 반출되면서 조선인의 식량 사정은 오히려 나빠졌습니다.
농광 회사는 1904년 일본의 황무지 개간권 요구에 맞서 설립된 회사이고, 방곡령 선포는 1889년 함경도·황해도에서 있었던 일이며, 하와이 노동 이민은 1902~1903년에 시작되어 시기가 전혀 다릅니다. 또한 이 계획은 태평양 전쟁(1941)보다 훨씬 앞선 1920년에 시작되었으므로 군량미 조달을 위해 시작되었다는 설명도 맞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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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성명을 발표한 정부의 통일 정책으로 옳은 것은? [2점]
남북 조절 위원회를 구성하였다.
금강산 관광 사업을 실시하였다.
개성 공단의 설치에 합의하였다.
최초로 남북 정상 회담을 개최하였다.
한반도 비핵화 공동 선언을 채택하였다.
성명은 조국 통일 원칙으로 외세에 의존하거나 간섭받지 않는 자주적 해결, 무력행사에 의거하지 않는 평화적 방법, 사상과 이념·제도의 차이를 초월한 민족적 대단결의 세 가지를 제시하고 있습니다. 이는 자주·평화·민족 대단결의 3대 원칙을 천명한 7·4 남북 공동 성명(1972)입니다.
이 성명은 박정희 정부 시기에 남북이 서울과 평양에서 동시에 발표한 것으로, 분단 이후 통일 원칙에 처음으로 합의했다는 의의가 있습니다. 합의 이행과 통일 문제 협의를 위해 남북은 남북 조절 위원회를 구성하였습니다.
다만 이후 남북 대화는 진전 없이 중단되었고, 남과 북 모두 유신 체제와 사회주의 헌법 제정 등 체제 강화에 이를 이용했다는 한계가 지적됩니다.
금강산 관광 사업(1998)과 최초의 남북 정상 회담(2000)은 김대중 정부, 개성 공단 설치 합의는 김대중~노무현 정부, 한반도 비핵화 공동 선언(1991)은 노태우 정부 시기의 일입니다.
내용에 오류가 있거나 최신 법령·기준과 다른 부분이 보이면 알려주세요. 확인 후 반영하겠습니다.
다음 명령을 발동한 정부 시기에 있었던 사실로 옳은 것은? [1점]
제1차 경제 개발 5개년 계획이 추진되었다.
경제 협력 개발 기구(OECD)에 가입하였다.
미국과 자유 무역 협정(FTA)을 체결하였다.
제2차 석유 파동으로 경제 불황이 심화되었다.
원조 물자를 가공하는 삼백 산업이 발달하였다.
화면은 대통령이 금융 실명 거래 및 비밀 보장에 관한 대통령 긴급 재정 경제 명령을 발동했으며, 특별 담화문을 통해 금융 실명제 없이는 부정부패를 근절할 수 없음을 강조했다고 보도하고 있습니다.
금융 실명제는 1993년 8월 김영삼 정부가 긴급 재정 경제 명령 형식으로 전격 실시한 조치로, 가명·차명 거래를 금지해 지하 경제와 정경 유착을 차단하려는 개혁이었습니다.
따라서 같은 정부 시기의 사실은 1996년 경제 협력 개발 기구(OECD) 가입입니다. 김영삼 정부는 시장 개방과 세계화를 내세워 OECD에 가입했으나, 임기 말인 1997년 외환 위기를 맞아 국제 통화 기금(IMF)의 구제 금융을 받게 되었습니다.
제1차 경제 개발 5개년 계획(1962)은 박정희 정부, 제2차 석유 파동(1978~1980)은 박정희 정부 말~전두환 정부 초, 삼백 산업 발달은 1950년대 이승만 정부, 한·미 자유 무역 협정 체결(2007)은 노무현 정부 시기입니다.
내용에 오류가 있거나 최신 법령·기준과 다른 부분이 보이면 알려주세요. 확인 후 반영하겠습니다.
다음 자료를 통해 알 수 있는 민주화 운동에 대한 설명으로 옳은 것은? [3점]
신군부의 비상 계엄 확대가 원인이 되었다.
3·15 부정 선거에 항의하는 시위에서 시작되었다.
관련 자료가 유네스코 세계 기록 유산으로 등재되었다.
5년 단임의 대통령 직선제 개헌이 이루어지는 계기가 되었다.
국민들의 요구에 굴복하여 대통령이 하야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자료에 실린 복원 전·후의 운동화는 시위 도중 전투 경찰이 쏜 최루탄에 맞아 쓰러진 대학생 이한열이 신고 있던 것입니다. '호헌 철폐, 독재 타도'라는 구호와 최루탄 피격, 이에 분노한 시민들의 대규모 시위가 이어졌다는 서술은 1987년 6월 민주 항쟁을 가리킵니다.
전두환 정부가 기존 헌법을 그대로 유지하겠다는 4·13 호헌 조치를 발표하고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의 진상이 드러나면서 시위는 전국으로 확산되었습니다. 결국 여당은 6·29 민주화 선언을 발표하였고, 그 결과 5년 단임의 대통령 직선제를 핵심으로 하는 9차 개헌이 이루어졌습니다.
신군부의 비상 계엄 확대가 배경이 되고 관련 기록물이 유네스코 세계 기록 유산으로 등재된 것은 5·18 민주화 운동이며, 3·15 부정 선거에 항의하며 시작되어 이승만 대통령의 하야로 이어진 것은 4·19 혁명입니다.
내용에 오류가 있거나 최신 법령·기준과 다른 부분이 보이면 알려주세요. 확인 후 반영하겠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