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능력검정시험 고급] 제37회 기출문제 해설 페이지
(가) 시대에 대한 설명으로 옳은 것은? [1점]
소를 이용한 깊이갈이가 일반화되었다.
반달 돌칼을 사용하여 곡물을 수확하였다.
계급이 없는 평등한 공동체 생활을 하였다.
사냥을 위해 슴베찌르개를 처음 제작하였다.
정착 생활이 시작되면서 움집이 등장하였다.
자료는 부여 송국리 유적을 소개하고 있다. 발굴 조사에서 목책(木柵)의 흔적과 100여 기 이상의 대규모 주거지가 확인되었고, 송국리식 토기라 불리는 민무늬 토기를 비롯해 비파형 동검과 거푸집이 출토되었다고 하였다. 민무늬 토기와 비파형 동검, 방어 시설인 목책은 모두 청동기 시대의 대표적인 특징이다.
청동기 시대에는 벼농사를 비롯한 농경이 본격화되면서 반달 돌칼로 곡물의 이삭을 거두었고, 잉여 생산물이 쌓이면서 계급이 발생하여 지배자인 군장이 등장하였다.
소를 이용한 깊이갈이가 일반화된 것은 고려 시대이며, 슴베찌르개가 처음 제작된 것은 구석기 시대 후기이다. 계급이 없는 평등한 공동체 생활과, 정착 생활이 시작되며 움집이 등장한 것은 청동기 이전 시기의 모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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밑줄 그은 ‘이 나라’에 대한 설명으로 옳은 것은? [2점]
신지, 읍차 등의 지배자가 있었다.
여러 가(加)들이 별도로 사출도를 다스렸다.
제사장인 천군과 신성 지역인 소도가 있었다.
읍락 간의 경계를 중요시하는 책화가 있었다.
범금 8조를 통해 살인, 절도 등의 죄를 다스렸다.
대화에서 학생들은 삼국유사에 건국 이야기가 실려 있다는 점, 기원전 2세기경 위만이 준왕을 몰아내고 왕이 되었다는 점, 한반도 남부의 진(辰)과 중국의 한(漢) 사이에서 중계 무역을 하였다는 점을 이야기하고 있다. 이는 모두 고조선에 해당하는 설명이다.
고조선에는 사회 질서를 유지하기 위한 범금 8조가 있어 살인·상해·절도 등의 죄를 다스렸으며, 현재는 그중 세 조목만이 전해진다. 이를 통해 생명과 노동력, 사유 재산을 중시하고 신분 차이가 있었던 사회였음을 알 수 있다.
신지·읍차라는 지배자와 제사장 천군 및 신성 지역 소도가 있었던 것은 삼한이고, 여러 가(加)들이 사출도를 다스린 것은 부여이며, 읍락 간 경계를 중시한 책화는 동예의 풍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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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 나라에 대한 설명으로 옳은 것은? [2점]
지방의 22담로에 왕족을 파견하였다.
12월에 영고라는 제천 행사를 거행하였다.
박, 석, 김의 3성이 교대로 왕위로 계승하였다.
철이 많이 생산되어 낙랑, 왜 등에 수출하였다.
집사부를 비롯한 14부를 두어 행정 업무를 분담하였다.
김수로왕이 세웠다고 전해지며 봉황대와 회현리 패총이 합쳐진 김해 봉황동 유적을 남긴 나라라고 하였으므로 (가)는 금관가야이다. 금관가야는 낙동강 하구의 해상 교통 요지에 자리하고 질 좋은 철이 많이 생산되어 낙랑과 왜 등에 철을 수출하며 중계 무역으로 번성하였다. 집사부를 비롯한 14부는 통일 신라, 부경과 사자·조의·선인은 고구려, 부여씨와 8성 귀족은 백제의 특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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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 (나) 사이의 시기에 있었던 사실로 옳은 것은? [3점]
전진의 순도가 고구려에 불교를 전파하였다.
연개소문이 정변을 일으켜 권력을 장악하였다.
이문진이 유기(留記)를 간추린 신집을 편찬하였다.
관구검이 이끄는 위의 군대가 고구려를 공격하였다.
장수왕이 평양으로 천도하고 남진 정책을 본격화하였다.
(가)는 백제왕이 병력 3만 명을 거느리고 평양성을 공격하자 고구려 왕이 출병하여 막다가 날아오는 화살에 맞아 서거하였다는 내용으로, 371년 백제 근초고왕의 평양성 공격과 고구려 고국원왕의 전사를 말한다.
(나)는 왕이 보병과 기병 5만 명을 보내 신라를 구원하게 하였고, 고구려군이 남거성을 거쳐 신라성에 이르자 그곳에 가득하던 왜적이 퇴각하였다는 내용이다. 이는 400년 광개토 대왕이 신라를 도와 왜를 격퇴한 사실로, 광개토 대왕릉비에 새겨져 있다.
따라서 두 사건 사이의 시기는 4세기 후반이며, 이때 고국원왕의 뒤를 이은 소수림왕이 372년 전진의 왕 부견이 보낸 승려 순도를 통해 불교를 받아들였다. 소수림왕은 이와 함께 태학을 세우고 율령을 반포하여 국가 체제를 정비하였다.
관구검이 이끄는 위의 군대가 침입한 것은 3세기 동천왕 때로 (가)보다 앞선 일이다. 반면 장수왕의 평양 천도(427), 이문진의 신집 편찬(600), 연개소문의 정변(642)은 모두 (나) 이후의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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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비석을 세운 왕이 시행한 정책으로 옳은 것은? [3점]
국학을 설립하여 유학을 교육하였다.
대가야를 정복하여 영토를 확장하였다.
병부 등을 설치하여 지배 체제를 정비하였다.
지방관을 감찰하기 위하여 외사정을 설치하였다.
국호를 신라로 확정하고 왕이라는 칭호를 사용하였다.
왼쪽 비석에는 "왕이 인민을 많이 얻어 …… 이리하여 영토를 순수(巡狩)하면서 민심을 살피고 노고를 위로하고자 한다"라고 새겨져 있는데, 이는 북한산 순수비의 내용이다. 오른쪽 비석에는 "적성(赤城)의 야이차에게 …… 옳은 일을 하는 데 힘을 쓰다가 죽게 되었으므로 …… 이(利)를 허락하였다"라고 되어 있어 단양 신라 적성비임을 알 수 있다.
지도에 표시된 한강 유역의 두 지점과 함께 보면, 이 비석들은 한강 유역을 차지하고 영토를 크게 넓힌 진흥왕이 세운 것이다. 진흥왕은 창녕비와 황초령비, 마운령비도 남겼다.
진흥왕은 화랑도를 국가적 조직으로 개편하고 562년에 대가야를 정복하여 낙동강 유역을 완전히 장악하는 등 신라 최대의 영토를 이루었다.
국학을 설립한 왕은 신문왕, 병부를 설치한 왕은 법흥왕, 지방관 감찰을 위해 외사정을 둔 왕은 문무왕, 국호를 신라로 정하고 왕이라는 칭호를 쓴 왕은 지증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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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라)를 일어난 순서대로 옳게 나열한 것은? [2점]
(가) - (나) - (다) - (라)
(가) - (나) - (라) - (다)
(나) - (가) - (라) - (다)
(나) - (다) - (가) - (라)
(다) - (라) - (나) - (가)
자료를 하나씩 보면, 의자왕이 계백에게 결사대 5천 명을 주어 황산으로 보냈다는 것은 660년의 황산벌 전투이다. 유인원과 신라왕 김법민이 육군을, 유인궤와 부여융이 수군을 이끌고 백강에서 왜의 배 400척을 불살랐다는 것은 663년의 백강 전투로, 백제 부흥 운동이 끝난 사건이다.
이근행이 군사 20만 명을 이끌고 매소성에 진을 쳤는데 신라군이 공격하여 패주시키고 말 3만여 필을 얻었다는 것은 675년 매소성 전투로, 나당 전쟁의 대세를 신라 쪽으로 돌린 싸움이다.
검모잠이 남은 백성을 모아 당의 관리와 승려 법안 등을 죽이고 안승을 왕으로 삼았다는 것은 670년에 시작된 고구려 부흥 운동이다.
따라서 일어난 순서는 황산벌 전투(660) → 백강 전투(663) → 검모잠의 고구려 부흥 운동(670) → 매소성 전투(675)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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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 제도가 시행된 국가에 대한 설명으로 옳은 것은? [2점]
제가 회의에서 나라의 중요한 일을 결정하였다.
상수리 제도를 실시하여 지방 세력을 견제하였다.
중국 남조의 영향을 받아 벽돌무덤을 축조하였다.
왕족인 부여씨와 8성의 귀족이 지배층을 이루었다.
경당을 설치하여 청소년에게 글과 활쏘기를 가르쳤다.
대화에서 한 인물은 "우리나라에는 (가)이/가 있어서 아무리 큰 공을 세워도 신분적 한계 때문에 관등이 아찬까지밖에 오르지 못한다"라며 답답함을 토로하고 당으로 떠나려 하고 있다. 6두품이 오를 수 있는 최고 관등이 아찬이었으므로, (가)는 신라의 골품제이다.
골품제는 관등뿐 아니라 관직 진출, 집의 크기, 수레와 의복까지 제한한 폐쇄적인 신분 제도였다. 따라서 이 제도가 시행된 나라는 신라이다.
신라는 지방 세력을 견제하기 위해 지방 향리의 자제를 일정 기간 수도에 머물게 하는 상수리 제도를 실시하였는데, 이는 고려의 기인 제도로 이어졌다.
제가 회의와 경당은 고구려의 것이고, 중국 남조의 영향을 받은 벽돌무덤(무령왕릉)과 왕족 부여씨 및 8성의 귀족이 지배층을 이룬 것은 백제의 특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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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 왕에 대한 설명으로 옳은 것을 <보기>에서 고른 것은? [2점]
ㄱ, ㄴ
ㄱ, ㄷ
ㄴ, ㄷ
ㄴ, ㄹ
ㄷ, ㄹ
화면 속 사진은 중국 산둥반도의 등주성이고, 교사는 (가)가 이 지역에 장문휴를 보내 당의 군대를 격파했다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산둥반도의 등주를 선제공격한 장문휴의 원정은 발해 무왕(대무예)의 대표적 대당 강경책이므로 (가)는 발해 무왕입니다.
보기 가운데 인안(仁安)이라는 독자적 연호를 사용한 것과, 당에 붙으려던 흑수 말갈을 치도록 동생 대문예에게 명한 것이 모두 무왕 대의 사실입니다. 무왕은 인안 연호로 대내적 자주성을 드러내고, 흑수 말갈 문제를 계기로 당·신라와 대립하며 영토를 크게 넓혔습니다.
반면 중경 현덕부에서 상경 용천부로 천도한 것은 당과 관계를 개선하고 체제를 정비한 문왕의 업적이고, 고구려 유민을 이끌고 동모산에서 나라를 세운 것은 발해를 건국한 고왕 대조영의 일이어서 무왕에 대한 설명으로 볼 수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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밑줄 그은 ‘탑’에 해당하는 사진 자료로 옳은 것은? [1점]
제시된 『삼국유사』 기록은 무왕과 부인이 사자사로 가던 길에 용화산 아래 큰 못에서 미륵 삼존이 나타나자, 부인의 청을 받아들여 못을 메우고 법당과 탑, 낭무를 각각 세 곳에 세우고 절 이름을 미륵사라 했다는 내용입니다. 따라서 밑줄 그은 '탑'은 백제 무왕이 세운 익산 미륵사지 석탑입니다.
사진 자료 중 이에 해당하는 것은 목조 건축의 기둥·공포·지붕을 돌로 옮겨 표현한 거대한 화강암 탑으로, 아래층 한가운데에 사람이 드나들 수 있는 십자형 통로 입구가 뚫려 있고 지붕돌이 층마다 넓게 뻗은 모습입니다. 현존하는 우리나라 석탑 중 가장 오래되고 규모가 큰 탑으로, 목탑에서 석탑으로 넘어가는 과도기 양식을 보여 줍니다.
나머지 사진은 계단과 난간·기둥으로 화려하게 꾸민 통일 신라의 불국사 다보탑, 벽돌을 쌓아 올린 안동 법흥사지 칠층전탑, 넓은 기단 위에 얇고 넓은 지붕돌을 얹은 백제계 양식의 오층석탑, 돌을 벽돌 모양으로 다듬어 쌓은 신라 경주 분황사 모전석탑으로 자료의 기록과 연결되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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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 왕의 재위 기간에 있었던 사실로 옳은 것은? [2점]
12목에 지방관을 파견하였다.
서경을 북진 정책의 전진 기지로 삼았다.
국자감에 7재라는 전문 강좌를 개설하였다.
쌍기의 건의를 받아들여 과거제를 시행하였다.
노비안검법을 시행하여 호족과 공신 세력을 견제하였다.
학생이 소개하는 사진은 개성에 있는 무덤이고, 그 주인공은 『정계』와 『계백료서』를 지어 관리가 지켜야 할 규범을 제시하고 후대 왕들이 지킬 훈요 10조를 남겼다고 설명합니다. 이는 고려를 세운 태조 왕건의 업적이므로 (가)는 태조이며, 사진의 무덤은 개성의 현릉입니다.
태조는 고구려 계승 의식을 내세워 평양을 서경으로 삼고 북진 정책의 전진 기지로 삼았습니다. 그 결과 청천강에서 영흥만에 이르는 선까지 영토를 넓혔습니다.
한편 12목에 지방관을 파견한 것은 성종, 국자감에 7재라는 전문 강좌를 설치한 것은 예종, 쌍기의 건의로 과거제를 시행하고 노비안검법으로 호족·공신 세력을 견제한 것은 광종의 정책이어서 태조 재위 기간의 사실이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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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 국가의 경제에 대한 설명으로 옳은 것은? [2점]
의창을 두어 빈민을 구제하였다.
솔빈부의 말이 특산물로 유명하였다.
왜관을 설치하여 일본과 교역하였다.
경시서를 통해 수도의 시전을 감독하였다.
청해진을 중심으로 해상 무역이 전개되었다.
자료의 석상은 원성왕릉 앞에 세워진 무인상으로, 부리부리한 눈과 이국적인 얼굴 윤곽·복식이 흥덕왕릉 앞 무인상과 함께 서역인의 모습을 하고 있어 아라비아 등 서역과의 활발한 교류를 뒷받침한다고 설명합니다. 원성왕·흥덕왕은 모두 통일 신라의 왕이므로 (가)는 통일 신라입니다.
통일 신라 흥덕왕 때 장보고는 완도에 청해진을 설치하여 해적을 소탕하고 당·일본을 잇는 해상 무역을 주도하였습니다. 서역계 무인상이 남아 있는 것도 이러한 국제 교류의 산물입니다.
이와 달리 빈민 구제 기구인 의창과 수도의 시전을 감독한 경시서는 고려의 제도이고, 솔빈부의 말은 발해의 특산물이며, 왜관을 두어 일본과 교역한 것은 조선의 일이어서 통일 신라의 경제와 맞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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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상황이 나타난 시기를 연표에서 옳게 고른 것은? [2점]
(가)
(나)
(다)
(라)
(마)
제시된 교서에서 왕은 원(元)의 연호 사용을 중지시키고 기철 일당이 권세를 믿고 나라의 법도를 어지럽혔다고 지적하며 조종이 세운 법을 회복하겠다고 밝히고 있습니다. 이는 고려 공민왕이 1356년에 단행한 반원 자주 개혁의 상황입니다.
연표는 918년 고려 건국 – 1009년 강조의 정변 – 1135년 묘청의 난 – 1232년 강화 천도 – 1270년 개경 환도 – 1388년 위화도 회군으로 구간이 나뉘어 있습니다. 공민왕의 기철 제거와 정동행성 이문소 폐지 등 반원 개혁은 1356년의 일입니다.
따라서 이 상황은 개경 환도(1270) 이후 위화도 회군(1388) 이전에 해당하는 연표의 마지막 구간, 곧 (마) 시기에 들어갑니다. 이 시기에는 원 간섭기가 이어지다가 원이 쇠퇴하면서 공민왕의 개혁이 추진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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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자료에 나타난 상황 이후의 사실로 옳은 것은? [3점]
왕실의 외척인 이자겸이 난을 일으켰다.
윤관이 여진을 정벌하고 동북 9성을 쌓았다.
공주 명학소서 망이ㆍ망소이가 봉기하였다.
김부식 등이 왕명으로 삼국사기를 편찬하였다.
최충이 9재 학당을 세워 유학 교육을 실시하였다.
자료는 정중부 등이 왕을 모시던 신하 20여 명을 죽이고, 이고와 채원이 왕을 시해하려 하자 양숙이 이를 막았으며, 정중부가 왕을 협박해 군기감으로 옮겼다는 내용입니다. 곧 1170년 의종 때 일어난 무신 정변(경인난)의 상황입니다.
무신 정권이 들어선 뒤 지배층의 수탈이 심해지자 하층민의 저항이 잇따랐는데, 1176년 공주 명학소에서 망이·망소이가 봉기하여 소(所) 주민에 대한 차별 대우 철폐를 요구하였습니다. 이는 무신 정변 이후에 벌어진 사실입니다.
반면 윤관의 여진 정벌과 동북 9성 축조(1107), 이자겸의 난(1126), 김부식의 삼국사기 편찬(1145), 최충의 9재 학당 설립은 모두 무신 정변 이전 문벌 귀족 사회에서 일어난 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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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사의 질문에 대한 학생의 답변으로 옳은 것은? [1점]
개경까지 침입한 흥건적을 몰아냈어요.
몽골군의 침략을 처인성에서 물리쳤어요.
쌍성총관부를 공격하여 철령 이북의 땅을 수복했어요.
강동 6주의 반환 등을 요구한 거란의 침략을 격퇴했어요.
내륙까지 쳐들어와 약탈하던 왜구를 황산에서 무찔렀어요.
우표에는 고려 현종 10년(1019)에 강감찬이 이끄는 고려군이 소배압의 10만 대군을 물리친 전투 장면이 그려져 있다고 교사가 설명하고 있습니다. 이 전투는 귀주 대첩으로, 거란의 3차 침입을 막아 낸 싸움입니다.
거란은 2차 침입 이후에도 고려에 국왕의 친조와 강동 6주 반환을 요구하였고, 고려가 이를 거부하자 소배압을 보내 다시 쳐들어왔습니다. 강감찬은 퇴각하는 거란군을 귀주에서 크게 무찔러 거의 전멸시켰습니다.
따라서 학생의 답변으로는 강동 6주의 반환 등을 요구한 거란의 침략을 격퇴했다는 내용이 알맞습니다. 개경까지 침입한 홍건적 격퇴, 처인성에서의 몽골군 격퇴(김윤후), 쌍성총관부 공격과 철령 이북 수복, 황산에서의 왜구 격퇴(이성계)는 모두 다른 시기·다른 인물의 전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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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 지역에서 있었던 사실로 옳지 않은 것은? [2점]
병자호란 때 김상용이 순절하였다.
프랑스군이 외규장각을 약탈하였다.
정몽주가 이방원 세력에 의해 피살되었다.
어재연이 이끄는 부대가 미국군에 맞서 싸웠다.
조선왕조실록을 보관하던 사고(史庫)가 설치되었다.
답사 계획서의 경로는 부근리 고인돌 → 홍릉 → 고려궁지 → 죽산 조봉암 선생 추모비이고, 지도에도 이 네 곳이 표시되어 있습니다. 청동기 시대 탁자식 고인돌, 고려 고종의 무덤인 홍릉, 대몽 항쟁기 궁궐터인 고려궁지가 함께 있는 (가) 지역은 강화도입니다.
강화도에서는 병자호란 때 김상용이 순절하였고, 병인양요 때 프랑스군이 외규장각 의궤를 약탈하였으며, 신미양요 때 광성보에서 어재연 부대가 미국군에 맞서 싸웠습니다. 또 조선 후기에는 정족산 사고가 설치되어 조선왕조실록을 보관하였습니다.
그러나 정몽주가 이방원 세력에게 피살된 곳은 강화도가 아니라 개성의 선죽교입니다. 따라서 이 내용이 (가) 지역에서 있었던 사실로 옳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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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에 들어갈 문화유산으로 옳은 것은? [2점]
문화유산 카드에는 국보 제15호, 소재지 경상북도 안동시, 그리고 단층 맞배지붕의 주심포계 건물로 초석 위에 배흘림기둥을 세웠으며 우리나라에 남아 있는 목조 건축물 가운데 가장 오래된 것으로 인정받는다는 소개가 적혀 있습니다. 이 조건을 모두 충족하는 문화유산은 안동 봉정사 극락전입니다.
봉정사 극락전은 고려 시대 주심포 양식 건물로, 기둥 위에만 공포를 얹고 지붕은 옆면이 사람 인(人) 자 모양인 맞배지붕입니다. 해체 수리 과정에서 고려 공민왕 12년(1363)에 지붕을 크게 고쳤다는 상량문이 발견되어, 건립 시기를 13세기 초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가장 이른 목조 건축으로 평가됩니다.
함께 제시된 수덕사 대웅전은 충남 예산에 있는 고려 시대 건물이고, 쌍계사 대웅전과 화엄사 각황전, 전등사 대웅전은 조선 시대에 세워진 건물이어서 안동 소재·국보 제15호라는 카드의 설명과 맞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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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자료의 화폐를 제작한 시기의 경제 상황으로 옳은 것은? [2점]
모내기법이 전국적으로 확산되었다.
벽란도에 국제 무역이 이루어졌다.
계해약조를 맺어 일본과 교역을 하였다.
시장을 감독하는 관청인 동시전이 있었다
감자, 고구마 등의 구황 작물이 재배되었다.
자료에서 왕은 백성을 부유하게 하는 데 돈보다 중요한 것이 없다며 금속을 녹여 돈을 주조하는 법을 제정하고, 주조한 돈 1만 5천 관(貫)을 관리와 군인들에게 나누어 주어 통용의 시초로 삼으라 하면서 그 화폐의 이름을 해동통보라 하라고 명하였습니다. 해동통보는 고려 숙종 때 의천의 건의로 주전도감을 두고 만든 화폐입니다.
고려 시대에는 예성강 하구의 벽란도가 국제 무역항으로 번성하여 송·일본은 물론 아라비아 상인까지 드나들며 교역하였습니다. 이 무렵 '코리아'라는 이름이 서방에 알려졌다고 전해집니다.
한편 모내기법의 전국적 확산과 감자·고구마 등 구황 작물 재배는 조선 후기, 계해약조를 맺어 일본과 교역한 것은 조선 세종 때, 시장을 감독하는 동시전 설치는 신라 지증왕 때의 일이어서 해동통보가 제작된 시기의 경제 상황으로 볼 수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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밑줄 그은 ‘그’에 대한 설명으로 옳은 것은? [2점]
수심결을 지어 돈오점수를 강조하였다.
심성 도야를 강조한 유불 일치설을 주장하였다.
법화 신앙에 중점을 둔 백련 결사를 주도하였다.
이론의 연마와 실천을 함께 강조하는 교관겸수를 제창하였다.
인도와 중앙아시아의 풍물을 기록한 왕오천축국전을 저술하였다.
제시된 자료는 개성 영통사에 있는 비석에 새겨진 행적을 소개하면서, 그 주인공이 고려 숙종의 동생이며 국청사를 중심으로 해동 천태종을 개창하고 교종을 중심으로 선종을 통합하려 했다고 밝히고 있다. 이러한 조건에 모두 맞는 인물은 문종의 넷째 아들이자 대각국사인 의천이다.
의천은 교종과 선종의 대립을 극복하기 위해 경전 이론의 연마와 실천 수행을 함께 닦아야 한다는 교관겸수를 제창하였다. 아울러 송·요·일본의 불교 저술을 모아 교장(속장경)을 간행하며 교학 연구의 기반을 넓혔다.
한편 수선사에서 수심결을 지어 돈오점수와 정혜쌍수를 내세운 인물은 지눌, 심성 도야를 강조하며 유불 일치설을 편 인물은 혜심, 법화 신앙에 바탕을 둔 백련 결사를 이끈 인물은 요세, 왕오천축국전을 남긴 인물은 신라의 혜초로 모두 시기와 활동이 다르다.
내용에 오류가 있거나 최신 법령·기준과 다른 부분이 보이면 알려주세요. 확인 후 반영하겠습니다.
(가)~(라)를 일어난 순서대로 옳게 나열한 것은? [3점]
(가) - (나) - (다) - (라)
(가) - (나) - (라) - (다)
(나) - (가) - (라) - (다)
(나) - (다) - (가) - (라)
(다) - (라) - (나) - (가)
제시된 네 자료는 모두 임진왜란·정유재란의 전황을 담고 있다. 왜적이 대거 침략해 부산진이 함락되면서 첨사 정발이 전사하고 이어 동래부에서 부사 송상현이 전사한 장면은 전쟁이 시작된 1592년 4월의 일이다.
이어 왜적을 한산 앞바다로 끌어내 학익진을 펼쳐 크게 이긴 기록은 1592년 7월의 한산도 대첩이고, 권율이 행주에서 왜적을 대파하고 고산 현감 신경희를 보내 승전을 알린 기록은 1593년 2월의 행주 대첩이다.
마지막으로 이순신이 노량에 도착해 혈전 중 적탄에 맞아 배 위에서 쓰러졌고 "죽은 이순신이 산 왜적을 물리쳤다"고 전해진 기록은 전쟁의 마지막 전투인 1598년 11월의 노량 해전이다. 따라서 부산진·동래성 함락 → 한산도 대첩 → 행주 대첩 → 노량 해전의 순서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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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 왕의 재위 기간에 있었던 사실로 옳은 것은? [1점]
세계 지도인 곤여만국전도가 전해졌다.
우리말 음운 연구서인 언문지가 저술되었다.
홍길동전, 춘향전 등의 한글 소설이 등장하였다.
최초로 100리 척을 사용한 동국지도가 제작되었다.
한양을 기준으로 천체 운동을 계산한 칠정산이 편찬되었다.
자료에 제시된 책은 향약집성방으로, 우리나라 약재와 중국 약재를 비교 연구하고 각 지역에서 나는 약재를 조사한 향약채취월령 등을 바탕으로 편찬된 의약서이다. 이 책이 왕명으로 간행된 시기는 세종 재위 기간이다.
세종 때에는 원의 수시력과 아라비아 회회력을 참고해 한양을 기준으로 천체 운동을 계산한 칠정산이 편찬되어 우리 실정에 맞는 역법 체계가 마련되었다. 같은 시기에 측우기·자격루·앙부일구 등 과학 기구도 제작되었다.
반면 곤여만국전도가 조선에 전해진 것은 17세기 초 선조 대의 일이고, 우리말 음운 연구서 언문지는 19세기 유희의 저술, 홍길동전·춘향전 등 한글 소설의 유행은 조선 후기, 100리 척을 처음 쓴 동국지도는 영조 대 정상기의 작품으로 모두 시기가 다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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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에 대한 설명으로 옳은 것을 <보기>에서 고른 것은? [2점]
ㄱ, ㄴ
ㄱ, ㄷ
ㄴ, ㄷ
ㄴ, ㄹ
ㄷ, ㄹ
자료는 덕망과 학술을 지닌 1인을 도약정으로 추대하고 2인을 부약정으로 삼으며, 구성원 중에서 직월과 사화를 맡긴다고 하였다. 또 세 가지 장부를 두어 가입 희망자, 덕업이 있는 자, 과실이 있는 자를 기록해 모임 때마다 약정에게 알린다고 하였는데, 이는 율곡전서에 실린 향약의 규약이다.
향약은 덕업상권·과실상규·예속상교·환난상휼을 강령으로 삼아 풍속 교화와 향촌 자치의 역할을 담당하였다. 또한 약정·도약정 등 주요 직임을 지방 사족이 차지하면서 사림의 향촌 지배 수단으로 기능하였다.
한편 흥선 대원군에 의해 대대적으로 철폐된 것은 서원이고, 대성전을 세워 선현에게 제사를 지낸 곳은 향교·성균관으로 모두 향약에 대한 설명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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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 기구에 대한 설명으로 옳은 것은? [2점]
고려의 삼사와 같은 기능을 담당하였다.
왕명 출납을 맡은 왕의 비서 기관이었다.
실록을 보관하고 관리하는 업무를 관장하였다.
재신, 추밀 등으로 구성되어 법제를 논의하였다.
5품 이하 관리 임명 과정에서 서경권을 행사하였다.
대화 장면에서 두 관리는 조광조가 대사헌에 제수되었다는 소식을 전하며, 그가 관리의 비리 감찰 등을 담당하는 기구의 장관이 되었으니 의정부의 정승들도 함부로 대할 수 없다고 말하고 있다. 대사헌을 수장으로 하여 관리 감찰을 맡은 기구는 사헌부이다.
사헌부는 사간원과 함께 양사(대간)를 이루어 간쟁·봉박과 함께 5품 이하 관리의 임명 과정에서 서경권을 행사하며 인사의 적절성을 심사하였다. 홍문관까지 더해 삼사로 불리며 권력의 독점과 부정을 견제하였다.
회계 출납을 맡아 고려의 삼사와 유사한 기능을 한 곳은 호조, 왕명 출납을 담당한 비서 기관은 승정원, 실록의 보관·관리는 춘추관, 재신과 추밀이 모여 법제를 논의한 기구는 고려의 식목도감으로 각각 다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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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에 들어갈 세시 풍속으로 옳은 것은? [1점]
단오
입동
칠석
대보름
한가위
안내문은 (가)가 24절기 중 열아홉 번째 절기로 이날부터 겨울이 시작된다는 뜻을 담고 있다고 설명한다. 체험 프로그램도 겨울나기 김장 담그기와 어르신 보양을 위한 치계미 만들기로 짜여 있어, 겨울의 시작을 알리는 절기임을 알 수 있다.
이 조건에 맞는 세시 풍속은 입동으로, 대체로 양력 11월 7일 무렵에 든다. 이 무렵 김장을 담그고 마을 노인들을 위해 치계미를 마련해 대접하는 풍습이 전해진다.
반면 음력 5월 5일의 단오는 창포물에 머리 감기와 씨름·그네뛰기, 음력 7월 7일의 칠석은 견우직녀 설화와 걸교, 음력 1월 15일의 대보름은 부럼 깨기와 쥐불놀이, 음력 8월 15일의 한가위는 송편과 강강술래로 대표되어 절기의 성격이 전혀 다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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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왕에 대한 설명으로 옳은 것은? [2점]
어영청을 중심으로 북벌을 추진하였다.
경국대전을 완성하여 법령을 정비하였다.
청과의 국경을 정하는 백두산정계비를 세웠다.
초계문신을 선발하여 학문 연구에 힘쓰도록 하였다.
의정부의 권한을 약화시키고 6조 직계제를 실시하였다.
조사 보고서는 이 왕을 국왕 중심의 통치 체제를 정비한 인물로 소개하면서, 즉위 과정으로 왕자의 난을 통해 개국 공신 정도전 등을 몰아내고 왕위에 올랐다고 적고 있다. 정책으로는 사원의 토지와 노비를 몰수하고 신문고 설치와 호패법 시행을 들고 있는데, 이는 모두 태종의 업적이다.
태종은 왕권을 강화하기 위해 의정부의 권한을 약화시키고 6조 직계제를 실시하여 6조가 국왕에게 직접 보고하도록 하였다. 또한 사병을 혁파하고 양전과 호구 파악을 통해 국가의 재정·군역 기반을 넓혔다.
한편 어영청을 중심으로 북벌을 추진한 왕은 효종, 경국대전을 완성한 왕은 성종, 백두산정계비를 세운 왕은 숙종, 초계문신제를 시행한 왕은 정조로 모두 다른 시기의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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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상황이 전개된 이후의 사실로 옳은 것은? [3점]
폐비 윤씨 사사 사건의 관련자들이 화를 입었다.
자의 대비의 복상 문제로 기해 예송이 전개되었다.
붕당 정치의 폐해를 경계하기 위한 탕평비가 세워졌다.
외척 세력인 대윤과 소윤의 대립으로 사화가 일어났다.
희빈 장씨 소생의 원자 책봉 문제로 환국이 발생하였다.
자료는 왕의 이복동생인 연잉군이 노론의 지지로 왕세제에 책봉되고 대리청정이 추진되자, 소론이 노론 대신들을 역적으로 몰아 김창집·이이명·이건명·조태채 등 노론 4대신을 처벌하게 한 상황을 담고 있다. 이는 경종 대에 일어난 신축·임인옥사(신임사화)로 1721~1722년의 일이다.
이후 왕세제였던 연잉군이 영조로 즉위하여 붕당 간의 극심한 대립을 억누르는 탕평책을 폈고, 1742년에는 붕당 정치의 폐해를 경계하는 탕평비를 성균관 앞에 세웠다.
반면 폐비 윤씨 사사 사건으로 일어난 갑자사화는 1504년, 자의 대비의 복상 문제를 둘러싼 기해예송은 1659년, 대윤과 소윤의 대립에서 비롯된 을사사화는 1545년, 희빈 장씨 소생의 원자 책봉으로 일어난 기사환국은 1689년으로 모두 제시된 상황보다 앞선 사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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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 인물에 대한 설명으로 옳은 것은? [2점]
양반전에서 양반의 위선과 무능을 비판하였다.
북학의를 저술하여 청의 문물 수용을 강조하였다.
사람의 체질을 연구하여 사상 의학을 확립하였다.
조선책략 유포에 반발하여 영남 만인소를 주도하였다.
여전론을 통해 토지의 공동 소유와 공동 경작을 주장하였다.
제시된 그림은 화성성역의궤에 실린 거중기 전도이다. 자료는 이 거중기를 고안하고 화성 건설에 참여한 인물이 경세유표로 국가 제도의 개혁 방향을 제시하고 지방 행정 개혁안을 담은 목민심서를 저술했다고 설명하는데, 이에 해당하는 실학자는 정약용이다.
정약용은 토지 개혁론으로 여전론을 제시하여 마을 단위인 여(閭)를 기준으로 토지를 공동으로 소유하고 공동으로 경작한 뒤 노동량에 따라 수확을 분배하자고 주장하였다. 뒤에는 이를 현실에 맞게 조정한 정전론도 내놓았다.
한편 양반전으로 양반의 위선과 무능을 풍자한 인물은 박지원, 북학의에서 청 문물 수용과 소비 진작을 강조한 인물은 박제가, 사상 의학을 확립한 인물은 이제마, 영남 만인소를 주도한 인물은 이만손으로 모두 다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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밑줄 그은 ‘방법’의 시행 내용으로 옳은 것을 보기에서 고른 것은? [2점]
ㄱ, ㄴ
ㄱ, ㄷ
ㄴ, ㄷ
ㄴ, ㄹ
ㄷ, ㄹ
자료에서 왕은 명정전에서 신하들을 불러 양역 변통을 논의하며 호포나 결포 모두 문제가 있으니 이제는 1필로 줄이는 것으로 돌아가겠다고 하고, 1필을 줄일 때 생기는 세입 감소분을 대신할 방법을 강구하라고 지시하였다. 이는 영조가 시행한 균역법에 관한 논의이다.
균역법은 군포 부담을 2필에서 1필로 줄이는 대신 부족해진 재정을 여러 보충 재원으로 메웠다. 대표적으로 지주에게 토지 1결당 쌀 2두의 결작을 부과하고, 일부 상류층 자제를 선무군관으로 삼아 1년에 1필의 군포를 거두었으며 어염세·선박세 등을 국가 재정으로 돌렸다.
반면 양전 사업을 실시하고 지계를 발급한 것은 대한 제국의 광무개혁이고, 관리에게 경기 지방에 한하여 과전을 지급한 것은 고려 말에 제정된 과전법의 내용으로 균역법과는 무관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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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가상 대화가 이루어진 시기의 경제 상황으로 옳지 않은 것은? [2점]
상평통보가 시장에서 유통되었다.
담배와 면화 등이 상품 작물로 재배되었다.
송상, 만상이 대청 무역으로 부를 축척하였다.
보부상이 장시를 돌아다니며 상업 활동을 하였다.
관리가 직전법에 의해 토지의 수조권을 지급받았다.
대화에서 "주상 전하께서 궁방과 중앙 각 관청 소속의 노비를 모두 혁파하라고 하교하셨다", "이로 인한 재정 손실은 장용영에서 부담하기로 결정되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중앙 관서의 공노비 해방은 1801년(순조 원년)에 단행되었고, 정조가 창설한 장용영이 아직 남아 있던 시점이므로 이 대화는 조선 후기의 상황입니다.
조선 후기에는 상평통보가 전국적으로 유통되며 화폐 경제가 확대되었고, 담배·면화·인삼 등이 상품 작물로 재배되어 시장에 팔렸습니다. 사상(私商)이 성장하여 개성의 송상과 의주의 만상이 대청 무역으로 부를 쌓았고, 보부상은 전국의 장시를 오가며 물화를 유통시켰습니다.
반면 현직 관리에게만 토지의 수조권을 주던 직전법은 세조 때 시행되었다가 명종 때 폐지되어, 조선 후기에는 관리가 수조권을 받는 제도 자체가 사라진 상태였습니다. 따라서 직전법으로 수조권을 지급받았다는 설명이 이 시기의 경제 상황과 맞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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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 인물에 대한 설명으로 옳은 것은? [2점]
계유정난을 계기로 정계에서 축출되었다.
일본에 다녀와서 해동제국기를 편찬하였다.
서얼 출신으로 규장각 검서관에 임용되었다.
양명학을 연구하여 강화 학파 형성의 기초를 마련하였다.
성학집요를 저술하여 군주가 수양해야 할 덕목을 제시하였다.
자료의 책은 『하곡집』이며, 그 안의 "존언" 부분이 사진으로 제시되어 있습니다. 설명에는 그가 학변(學辨)·존언(存言) 등의 글에서 심(心)과 이(理)를 구별하는 주자의 견해를 비판하고, 지(知)와 행(行)을 둘로 나누는 것은 물욕에 가려진 것이며 양지(良知)의 본체에서 보면 지와 행은 하나라고 주장했다고 나옵니다.
심즉리(心卽理)와 지행합일(知行合一)을 핵심으로 하는 이 학문은 양명학이며, 하곡은 조선 양명학을 집대성한 정제두의 호입니다. 그의 학문이 스승 박세채, 그리고 윤증과의 교류를 통해 심화되었다는 서술도 정제두의 이력과 일치합니다.
정제두는 만년에 강화도로 옮겨 후학을 길렀고, 그 학맥이 이어져 이른바 강화 학파가 형성되었습니다. 따라서 양명학을 연구하여 강화 학파 형성의 기초를 마련했다는 설명이 이 인물에 해당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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밑줄 그은 ‘그’가 그린 그림으로 옳은 것은? [1점]
제시된 『이향견문록』의 기록은 "그의 자는 사능(士能)이요, 호는 단원(檀園)이다", "산수·인물·꽃과 나무·새와 짐승을 그려 신묘한 경지에 이르렀는데 신선을 그린 것이 가장 뛰어났다", "도화서 화원으로 있으면서 매양 한 폭씩 올릴 때마다 왕의 마음에 들었다", "벼슬이 연풍 현감에 이르렀다"고 전합니다.
자 사능, 호 단원, 도화서 화원, 연풍 현감이라는 이력은 모두 김홍도를 가리킵니다. 자료가 특히 강조한 것이 산수나 풍속이 아니라 신선 그림이라는 점이 판단의 결정적 단서입니다.
보기의 그림 가운데 여러 신선이 무리를 지어 걸어가는 장면을 그린 군선도(群仙圖)가 바로 김홍도의 작품입니다. 나머지는 바위 위에 누운 인물을 그린 소품, 수박과 들쥐·나비를 담은 초충도, 짙은 먹으로 그린 산수화, 기녀와 양반의 야외 놀이를 그린 풍속화로 모두 다른 화가의 그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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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 조약에 대한 설명으로 옳은 것은? [1점]
거증조정의 조항을 포함하였다.
갑신정변이 원인이 되어 체결되었다.
조약 체결에 항거하여 민영환이 자결하였다.
천주교 포교의 자유를 인정하는 계기가 되었다.
부산과 그 외 2곳의 항구가 개항되는 결과를 가져왔다.
자료의 『심행일기(沁行日記)』는 조약 체결 당시 조선 측 대표를 맡았던 신헌이 협상 전말을 기록한 것으로, 일본 측 대표 구로다 기요타카 등과 벌인 협상 내용이 대화체로 실려 있고, 운요호 사건을 계기로 시작된 양국 간 협상 과정을 보여 준다고 설명되어 있습니다.
신헌과 구로다 기요타카가 마주 앉아 맺은, 운요호 사건이 계기가 된 조약은 강화도 조약(조일 수호 조규, 1876)입니다. 사료 제목의 '심(沁)'은 강화를 뜻하는 글자로, 협상 장소가 강화였음을 보여 줍니다.
이 조약으로 조선은 이미 개항되어 있던 부산 외에 두 곳의 항구를 더 열기로 하여 이후 원산과 인천이 차례로 개항되었습니다. 아울러 해안 측량권과 영사 재판권(치외 법권)을 인정한 불평등 조약이었습니다.
참고로 거중조정 조항이 담긴 것은 조미 수호 통상 조약, 갑신정변이 원인이 되어 체결된 것은 한성 조약, 민영환이 자결로 항거한 것은 을사늑약, 천주교 포교의 자유가 인정되는 계기가 된 것은 조프 수호 통상 조약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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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마)에 대한 설명으로 옳은 것은? [2점]
(가) - 정부에서 발행하는 순 한문 신문이었다.
(나) - 국채 보상 운동을 적극적으로 후원하였다.
(다) - 외국인이 읽을 수 있도록 영문으로도 발행되었다.
(라) - 국권 피탈 후 총독부의 기관지로 전락하였다.
(마) - 최초로 상업 광고가 게재되었다.
안내문은 개항 이후 발행된 신문 다섯 종을 한성순보, 독립신문, 황성신문, 제국신문, 대한매일신보 순으로 제시하고 하나를 골라 보고서를 내라고 하고 있습니다.
이 가운데 한성순보는 1883년 박문국에서 발행한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 신문으로, 정부가 펴낸 순 한문 신문이며 열흘에 한 번 간행되었습니다. 따라서 정부에서 발행한 순 한문 신문이라는 설명이 옳습니다.
나머지는 짝이 어긋나 있습니다. 국채 보상 운동을 적극 후원하고 국권 피탈 뒤 총독부 기관지 매일신보로 전락한 것은 대한매일신보이고, 영문으로도 발행된 것은 독립신문이며, 최초의 상업 광고가 실린 것은 한성순보를 이은 한성주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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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 교육 기관에 대한 설명으로 옳은 것은? [2점]
교육 입국 조서에 근거하여 세워졌다.
교원 양성을 목적으로 한 사범학교이다.
전국의 부ㆍ목ㆍ군ㆍ현에 하나씩 설치되었다.
미국인 헐버트, 길모어 등을 교사로 초빙하였다.
장학 기금을 마련하기 위해 양현고를 설립하였다.
1886년자 역사 신문 기사는 정부가 좌원(左院)과 우원(右院)으로 구성된 신식 학교를 세운다고 전합니다. 좌원에서는 양반 출신의 젊고 유능한 관리를 특별히 선발해 가르치고, 우원에서는 재주 있고 똑똑한 인재를 뽑아 공부시키며, '영재를 기른다'는 뜻의 교명이 붙었다고 되어 있습니다.
1886년에 설립된, 좌원·우원 체제를 갖추고 '영재를 기른다'는 이름을 지닌 관립 신식 학교는 육영 공원입니다. 기사에서 신학문을 가르치는 곳이라 한 대로 영어를 비롯한 근대 학문을 가르쳐 외교 실무 인재를 기르려 한 학교였습니다.
육영 공원은 미국인 헐버트, 길모어, 벙커 등을 교사로 초빙하여 영어로 수업을 진행하였습니다. 교육 입국 조서(1895)에 근거해 세워진 학교들이나 한성 사범 학교, 부·목·군·현마다 설치된 조선 시대 향교, 고려 예종이 장학 기금 마련을 위해 둔 양현고와는 구별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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밑줄 그은 ‘전쟁’ 기간에 있었던 사실로 옳은 것을 <보기>에서 고른 것은? [3점]
ㄱ, ㄴ
ㄱ, ㄷ
ㄴ, ㄷ
ㄴ, ㄹ
ㄷ, ㄹ
대화에서 한 인물은 "일본이 전쟁을 일으키고 나서 한성을 장악하고 한·일 의정서 체결을 강요하였다"고 말하고, 다른 인물은 "결국 우리나라의 국외 중립 선언을 일본이 무시하였다"고 답합니다. 한·일 의정서 강요와 대한 제국의 국외 중립 선언 무시가 함께 언급되었으므로 밑줄 그은 전쟁은 러·일 전쟁(1904~1905)입니다.
보기 가운데 전쟁 기간에 있었던 일은 일본의 독도 불법 편입과 메가타의 대한 제국 재정 고문 부임입니다. 일본은 1905년 2월 시마네현 고시로 독도를 자국 영토에 편입했고, 1904년 8월 제1차 한·일 협약에 따라 메가타가 재정 고문으로 부임해 이후 화폐 정리 사업을 주도하였습니다.
나머지 둘은 시기가 맞지 않습니다. 러시아의 절영도 조차 요구는 1898년 독립 협회가 반대 운동을 벌였던 사건이고, 고종이 러시아 공사관으로 거처를 옮긴 아관 파천은 1896년의 일로 모두 러·일 전쟁 이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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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에 해당하는 개혁의 내용으로 옳은 것은? [2점]
대한국 국제를 제정하였다.
신식 군대인 별기군을 창설하였다.
황제 직속의 원수부를 설치하였다.
청의 연호를 폐지하고 개국 기원을 사용하였다.
의정부의 기능을 회복시키고 비변사를 혁파하였다.
학술 대회 안내문은 1894년 동학 농민 운동이 전개되던 상황에서 군국기무처가 추진한 개혁의 성격과 의의를 다룬다고 밝히고 있습니다. 발표 주제도 제1차 김홍집 내각의 구성과 역할, 조혼 금지와 과부 재가 허용, 과거제의 폐지와 관리 임용 제도의 변화로 제시되어 있습니다.
군국기무처를 중심으로 김홍집 내각이 단행한 이 개혁은 제1차 갑오개혁입니다. 신분제와 노비제 폐지, 과부 재가 허용, 과거제 폐지, 재정의 탁지아문 일원화, 은 본위 화폐 제도 채택 등이 이때 이루어졌습니다.
정치 면에서는 청의 연호를 폐지하고 개국 기원을 사용하여 청과의 전통적 관계에서 벗어나려 한 조치가 대표적입니다. 대한국 국제 제정과 원수부 설치는 대한 제국의 광무개혁, 별기군 창설은 1881년 개화 정책, 비변사 혁파는 흥선 대원군의 정책에 해당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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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 운동에 대한 설명으로 옳은 것은? [1점]
조선 형평사의 주도로 전개되었다.
평양에서 시작되어 전국으로 확산되었다.
순종의 인산일을 기회로 삼아 추진되었다.
일제가 회사령을 제정하는 계기가 되었다.
김광제, 서상돈 등의 발의로 본격화되었다.
제시된 잡지 표지는 한반도 지도 위에 '산업계(産業界)'라는 제호와 '창간호(創刊號)' 글자가 새겨진 것으로, 산업 장려와 토산품 애용을 선전·계몽하기 위해 월간으로 발행되었다고 설명됩니다. 1923년 11월 창간되어 1924년 9월 통권 5호까지 나왔다는 발행 시기도 제시되어 있습니다.
토산품 애용과 산업 장려를 내세운 1920년대 전반의 이 운동은 물산 장려 운동입니다. "조선 사람 조선 것", "내 살림 내 것으로" 등의 구호를 내걸고 국산품 애용, 근검저축, 금주·단연을 함께 주장하였습니다.
이 운동은 1920년 조만식 등이 평양에서 조선 물산 장려회를 조직하면서 시작되어 서울을 비롯한 전국으로 확산되었습니다. 회사령이 폐지(1920)되어 일본 자본의 진출이 쉬워진 것이 배경이었으므로 이 운동이 회사령 제정의 계기가 되었다는 설명은 앞뒤가 뒤바뀐 것이고, 백정에 대한 차별 철폐를 내건 조선 형평사나 순종의 인산일에 일어난 6·10 만세 운동, 김광제·서상돈이 발의한 국채 보상 운동과도 구분해야 합니다.
내용에 오류가 있거나 최신 법령·기준과 다른 부분이 보이면 알려주세요. 확인 후 반영하겠습니다.
다음 사건을 일으킨 단체에 대한 설명으로 옳은 것은? [3점]
105인 사건으로 해체되었다.
중ㆍ일 전쟁 발발 직후에 조직되었다
조선 혁명 선언을 활동 지침으로 삼았다.
파리 강화 회의에 김규식을 대표로 파견하였다.
고종의 밀지를 받아 결성된 비밀 무장 단체였다.
『기려수필』의 기록은 김익상이 일본인 노동자로 행세하며 조선 총독부에 들어가 2층 비서과와 회계과를 향해 폭탄을 던졌고, 그 뒤 철공(鐵工)의 옷을 사서 변장하고 열차로 평양을 거쳐 북경으로 향했다고 전합니다. 이는 1921년 조선 총독부 폭탄 투척 의거입니다.
김익상이 소속되어 이 의거를 일으킨 단체는 1919년 만주 지린에서 김원봉 등이 결성한 의열단입니다. 의열단은 일제 요인 암살과 식민 통치 기관 파괴를 통한 무장 투쟁을 노선으로 삼았습니다.
의열단은 1923년 신채호가 지은 「조선 혁명 선언」을 활동 지침으로 삼아 민중의 직접 혁명을 표방하였습니다. 105인 사건으로 해체된 신민회, 중·일 전쟁 직후 조직된 조선 의용대 계열 단체, 파리 강화 회의에 김규식을 파견한 신한청년당, 고종의 밀지로 결성된 독립 의군부와는 구별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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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 인물에 대한 설명으로 옳은 것은? [2점]
대한민국 임시 정부 대통령으로 활동하였다.
일제의 침략 과정을 서술한 한국통사를 저술하였다.
민족 단결을 내세운 신간회의 회장으로 추대되었다.
새로운 국가 건설의 이념을 삼균주의를 주창하였다.
일제의 패망과 광복에 대비하여 조선 건국 동맹을 결성하였다.
제시된 사진 설명은 1920년 조선 체육회 창립을 기념해 열린 제1회 전조선야구대회에서 흰 두루마기를 입고 시구하는 인물을 담고 있습니다. 이어지는 글에서 그가 서재필 등과 함께 독립 협회를 조직하고 만민 공동회를 주도했으며 민립 대학 설립 운동을 이끌었고, 1927년 세상을 떠나 사회장으로 장례가 치러졌다고 밝히고 있습니다.
이 조건을 모두 충족하는 인물은 월남 이상재입니다. 그는 독립 협회 활동과 황성 기독교 청년회(YMCA) 활동, 조선 교육 협회를 통한 민립 대학 설립 기성회 참여로 이어지는 대표적 민족 운동 지도자였습니다.
특히 1927년 좌우 합작으로 창립된 신간회의 초대 회장으로 추대된 사실이 그의 마지막 활동이며, 그해 3월 그가 사망하자 최초의 사회장이 거행되었습니다. 따라서 민족 단결을 내세운 신간회의 회장으로 추대되었다는 설명이 그에 대한 옳은 서술입니다.
나머지는 다른 인물의 행적입니다. 대한민국 임시 정부 대통령으로 활동한 인물은 이승만과 박은식이고, 한국통사를 저술한 인물은 박은식입니다. 삼균주의 주창은 조소앙, 조선 건국 동맹 결성은 여운형에 해당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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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 (나)사건에 대한 설명으로 옳은 것은? [2점]
(가) - 중국의 5ㆍ4 운동에 영향을 주었다.
(가) - 혁명적 농민 조합을 중심으로 펼쳐졌다.
(나) - 대한민국 임시 정부 수립의 계기가 되었다.
(나) - 일본, 프랑스 등지의 노동 단체로부터 격려 전문을 받았다.
(가), (나) - 일제가 이른바 문화 통치를 실시하는 배경이 되었다.
왼쪽 신문 자료는 전라남도 신안군(당시 무안군)에서 고율의 소작료를 징수한 지주 문재철에 맞서 1923년부터 1년여에 걸쳐 소작인들이 전개한 사건을 보도한 기사로 소개되어 있습니다. 이는 암태도 소작 쟁의로, 소작료를 7~8할에서 4할로 낮추는 성과를 거둔 1920년대 대표적 농민 운동입니다.
오른쪽 자료는 문평 라이징 선 석유 회사에서 일본인 감독이 조선인 노동자를 구타한 사건이 발단이 되어 1929년 1월 총파업에 돌입한 노동자들의 투쟁을 보도한 기사입니다. 이는 일제 강점기 최대 규모의 노동 운동인 원산 노동자 총파업입니다.
원산 총파업은 4개월 가까이 이어지며 국제적 관심을 받아, 일본·프랑스 등지의 노동 단체로부터 격려 전문을 받았습니다. 따라서 문평 석유 회사 사건에서 비롯된 총파업에 대한 설명으로 이것이 옳습니다.
중국의 5·4 운동에 영향을 주고 대한민국 임시 정부 수립의 계기가 되었으며 일제가 이른바 문화 통치를 실시하는 배경이 된 것은 모두 1919년 3·1 운동이고, 혁명적 농민 조합을 중심으로 한 운동은 1930년대의 사회주의 계열 농민 운동이어서 두 자료 모두와 맞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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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 무장 투쟁에 대한 탐구 활동으로 가장 적절한 것은? [2점]
조선 의용대가 참여한 전투에 대해 알아본다.
일본군에서 탈출한 학도병들의 활동을 정리한다.
북로 군정서와 대한 독립군의 활약상을 조사한다.
조선 혁명군이 흥경성에서 승리한 요인을 살펴본다.
한국 독립군이 대전자령에서 수행한 작전을 찾아본다.
화면 속 설명은 1920년 10월에 백운평·완루구·어랑촌 등지에서 일본군에 맞서 싸운 전투를 가리키며, 제시된 「기전사가(祈戰死歌)」는 그 전투 당시 독립군이 불렀던 노래로 소개되고 있습니다. 지명과 시기, 군가가 모두 청산리 대첩을 가리킵니다.
청산리 대첩은 김좌진이 이끄는 북로 군정서와 홍범도가 이끄는 대한 독립군 등 여러 독립군 부대가 연합하여 6일간 10여 차례 전투를 치러 일본군에 큰 승리를 거둔 항일 무장 투쟁의 최대 전과입니다. 「기전사가」의 가사에는 전투에 임하는 독립군의 비장한 각오가 담겨 있습니다.
따라서 이 전투를 탐구하려면 북로 군정서와 대한 독립군의 활약상을 조사하는 것이 가장 적절합니다.
조선 의용대(1938년 창설)와 일본군 탈출 학도병의 광복군 합류는 1930~1940년대의 일이고, 조선 혁명군의 흥경성 전투와 한국 독립군의 대전자령 전투는 1930년대 초 한중 연합 작전에 해당하므로 1920년의 이 전투와는 시기가 다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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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 인물에 대한 설명으로 옳은 것은? [3점]
여유당전서를 간행하고 조선학 운동을 전개하였다.
서유견문을 집필하여 서양 근대 문명을 소개하였다.
한국독립운동지혈사에서 독립 투쟁 과정을 서술하였다.
독사신론을 발표하여 민족을 역사 서술의 중심에 두었다.
조선사회경제사에서 식민 사학의 정체성 이론을 반박하였다.
토론 장면에서 학생들은 (가) 인물이 조선상고사에서 역사를 '아(我)와 비아(非我)의 투쟁'으로 정의했고, 이순신전과 을지문덕전 등을 집필하여 애국심을 고취하고자 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두 진술 모두 단재 신채호의 대표적 업적입니다.
신채호는 대한 제국 말기 위인전을 통해 민족의식을 일깨웠고, 이후 낭가 사상을 중심으로 우리 고대사를 재구성한 조선상고사·조선사연구초를 저술하여 민족주의 사학의 토대를 세웠습니다.
그가 1908년 대한매일신보에 연재한 독사신론은 왕조 중심의 서술에서 벗어나 민족을 역사 서술의 중심에 둔 글로, 근대 민족주의 사학의 출발점으로 평가됩니다. 따라서 이 설명이 그에 대한 옳은 서술입니다.
여유당전서 간행과 조선학 운동은 정인보·안재홍 등, 서유견문은 유길준, 한국독립운동지혈사는 박은식, 조선사회경제사는 백남운의 업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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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용강이 발표된 이후에 볼 수 있는 모습으로 적절한 것은? [1점]
조선인에게 태형을 집행하는 헌병 경찰
일본 군수 공장에 강제 동원되는 여자 근로 정신대
경성 제국 대학 설립 업무를 수행하는 조선 총독부 관리
안창남의 고국 방문 비행을 환영하기 위해 상경하는 청년
나운규가 제작한 영화 아리랑의 첫 상영을 준비하는 단성사 직원
제시된 일본어 보급 운동 요강은 '반도 민중으로 하여금 확고한 황국 신민의 신념을 견지'하게 하고 일본어를 상용하게 한다는 취지를 밝히고 있으며, 대동아 공영권의 중핵인 황국 신민이라는 표현과 국민 총력 조선 연맹 지도 위원회 결정 사항이라는 출처가 붙어 있습니다.
국민 총력 조선 연맹은 1940년에 조직되었고 대동아 공영권이라는 용어도 그 무렵부터 쓰였으므로, 이 자료는 1940년대 민족 말살 통치기의 것입니다. 이 시기 일제는 국가 총동원법을 근거로 인력과 물자를 전면 수탈했습니다.
따라서 이 시기 이후에 볼 수 있는 모습으로는 일본 군수 공장에 강제 동원되는 여자 근로 정신대가 적절합니다. 여자 정신 근로령은 1944년에 공포되었습니다.
조선인에 한해 태형을 집행한 조선 태형령은 1910년대, 경성 제국 대학 설립은 1924년, 안창남의 고국 방문 비행은 1922년, 나운규의 영화 아리랑 첫 상영은 1926년의 일로 모두 이 자료보다 앞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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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검색창에 들어갈 종교에 대한 설명으로 옳은 것은? [2점]
항일 무장 단체인 중광단을 결성하였다.
경향신문을 발간하여 민중 계몽에 기여하였다.
배재 학당을 세워 신학문을 보급하고자 노력하였다.
만주에서 의민단을 조직하여 독립 전쟁을 전개하였다.
어린이 등의 잡지를 발간하여 소년 운동을 주도하였다.
검색 결과는 손병희가 동학을 바탕으로 발전시킨 종교로, 동학의 제3대 교주였던 손병희가 이용구 등 일부 교도가 일진회를 조직해 친일 행태를 보이자 1905년 교명을 개칭하고 교리와 교단 조직을 새롭게 정비했다고 설명합니다. 관련 이미지로는 중앙 대교당이 제시되어 있습니다.
이 조건에 해당하는 종교는 천도교입니다. 천도교는 만세보를 발행하고 3·1 운동을 주도했으며, 1922년에는 제2의 독립 선언 운동을 계획하기도 했습니다.
천도교는 방정환을 중심으로 천도교 소년회를 조직하고 잡지 어린이를 발간하여 소년 운동을 주도했습니다. 따라서 이 설명이 옳습니다.
중광단은 대종교, 경향신문 발간과 만주의 의민단 조직은 천주교, 배재 학당 설립은 개신교(미국 북감리회)의 활동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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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 부대에 대한 설명으로 옳은 것은? [2점]
자유시 참변으로 큰 타격을 입었다.
미국과 연계하여 국내 진공 작전을 계획하였다.
신흥 무관 학교를 설립하여 독립군을 양성하였다.
중국 관내(關內)에서 결선된 최초의 한인 무장 부대였다.
중국 호로군과 연합 작전을 통해 항일 전쟁을 전개하였다.
인물 소개 자료는 오광심(1910. 3. 15.~1976. 4. 7.)을 다루고 있습니다. 평안북도 선천 출신으로 남만주에서 교직 생활을 하다가 1931년 만주 사변이 일어나자 독립운동에 투신했고, 1940년 9월 17일 충칭에서 대한민국 임시 정부 산하의 (가)가 창설될 때 김정숙·지복영 등과 함께 참여했다고 서술되어 있습니다.
1940년 9월 17일 충칭에서 임시 정부가 창설한 부대는 한국광복군입니다. 오광심은 기관지 광복의 간행 업무를 맡고 병사 모집과 선전·파괴 활동을 전개했습니다.
한국광복군은 태평양 전쟁 발발 후 대일 선전 포고를 하고 인도·미얀마 전선에 파견되었으며, 미국 전략 정보국(OSS)과 연계하여 국내 진공 작전을 계획했습니다. 다만 일제의 항복으로 실행에는 이르지 못했습니다.
자유시 참변의 타격을 입은 것은 대한 독립 군단, 신흥 무관 학교 설립은 신민회 계열의 서간도 독립운동 기지, 중국 관내에서 결성된 최초의 한인 무장 부대는 조선 의용대, 중국 호로군과 연합 작전을 편 것은 지청천의 한국 독립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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밑줄 그은 ‘위원회’에 대한 설명으로 옳은 것은? [2점]
통일 정부 구성을 위한 남북 협상을 추진하였다.
유엔 감시하에 치러진 남북한 총선거에 참여하였다.
여운형, 김규식 등 중도 세력을 중심으로 결성되었다.
반민족 행위 처벌을 위한 특별 조사 위원회의 활동을 방해하였다.
귀속 재산 처리법을 제정하여 일본인들이 남기고 간 재산을 처리하였다.
제시된 문서는 '본 위원회는 합작 원칙에 합의하여 다음 사항을 알립니다'로 시작하여, 첫째로 모스크바 3국 외상 회의 결정에 의하여 좌우 합작으로 민주주의 임시 정부를 수립할 것, 셋째로 토지 개혁에서 몰수·유조건 몰수·체감 매상 등으로 토지를 농민에게 무상 분여할 것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이는 1946년 10월에 발표된 좌우 합작 7원칙이며, 밑줄 그은 '위원회'는 좌우 합작 위원회입니다. 제1차 미소 공동 위원회가 결렬되고 이승만의 정읍 발언으로 단독 정부 수립 움직임이 나타나자, 미군정의 지원 아래 통일 정부 수립을 목표로 조직되었습니다.
좌우 합작 위원회는 여운형과 김규식 등 중도 세력을 중심으로 결성되었으므로 이 설명이 옳습니다. 그러나 좌우 양극단의 반대와 1947년 여운형 암살, 미군정의 지지 철회로 성과 없이 해체되었습니다.
남북 협상은 1948년 김구·김규식이 추진한 별개의 활동이고, 유엔 감시하의 총선거는 북한이 거부하여 남한에서만 실시되었으며, 반민 특위 활동 방해와 귀속 재산 처리법 제정은 정부 수립 이후 이승만 정부와 관련된 사안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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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 사건에 대한 설명으로 옳은 것은? [3점]
4ㆍ13 호헌 조치에 저항하며 일어났다.
장면의 민주당 정권이 들어서는 계기가 되었다.
전개 과정에서 3ㆍ1 민주 구국 선언이 발표되었다.
3ㆍ15 부정 선거에 항의하는 시위에서 비롯되었다.
희생자들의 명예 회복을 위해 특별법이 제정되었다.
제시된 글은 1948년 제주섬에서 국제법이 요구하는 문명 사회의 기본 원칙이 무시되었고, 국가 공권력이 비무장 민간인과 어린이·노인까지 살해한 점이 중대한 인권 유린이었다고 지적하며, 제주도가 냉전의 최대 희생지였다고 결론짓습니다. 출처는 (가) 진상 조사 보고서(2003)입니다.
따라서 (가)는 제주 4·3 사건입니다. 1947년 3·1절 기념 대회 발포 사건을 계기로 긴장이 고조된 가운데, 1948년 4월 3일 남한만의 단독 선거에 반대하는 무장 봉기가 일어났고 이를 진압하는 과정에서 수많은 민간인이 희생되었습니다.
2000년에 제주 4·3 사건 진상 규명 및 희생자 명예 회복에 관한 특별법이 제정되었고, 그에 따라 구성된 위원회가 2003년 진상 조사 보고서를 확정했습니다. 그러므로 희생자들의 명예 회복을 위해 특별법이 제정되었다는 설명이 옳습니다.
4·13 호헌 조치에 저항한 것은 1987년 6월 민주 항쟁, 3·15 부정 선거에서 비롯되어 장면의 민주당 정권 수립으로 이어진 것은 1960년 4·19 혁명, 3·1 민주 구국 선언은 1976년 유신 체제에 대한 저항으로 모두 이 사건과 무관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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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뉴스의 사건이 일어난 정부 시기의 경제 상황으로 옳은 것은? [1점]
경제 협력 개발 기구(OECD)에 가입하였다.
칠레와 자유 무역 협정(FTA)에 체결되었다.
금융 거래의 투명성을 확보하고자 금융 실명제가 실시되었다.
세계 무역 기구(WTO)의 출범으로 시장 개방이 가속화되었다.
자립 경제 구축을 내세운 제1차 경제 개발 5개년 계획이 진행 되었다.
뉴스 화면은 오늘 서울에서 국교 정상화 추진을 위해 열리는 한·일 회담에 반대하는 시위가 일어났으며, 학생과 시민들이 정부의 굴욕적 회담 추진을 비판하면서 '민족적 민주주의 장례식'을 거행했다고 보도하고 있습니다.
'민족적 민주주의 장례식'은 1964년 5월 대학생들이 박정희 정권의 통치 이념을 매장한다는 뜻으로 치른 상징 의식이며, 이는 그해 6·3 시위로 이어졌습니다. 정부는 계엄령을 선포해 시위를 진압했고 1965년 한일 협정이 조인되었습니다.
따라서 이 사건이 일어난 시기는 박정희 정부 초기입니다. 이 시기에는 자립 경제 구축을 내세운 제1차 경제 개발 5개년 계획(1962~1966)이 진행되어 경공업 중심의 수출 주도형 성장이 추진되었으므로 이 설명이 옳습니다.
금융 실명제 실시와 세계 무역 기구(WTO) 출범에 따른 시장 개방, 경제 협력 개발 기구(OECD) 가입은 1990년대 김영삼 정부 시기의 일이고, 칠레와의 자유 무역 협정 체결은 2000년대에 이루어진 일로 모두 이 시기와 맞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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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자료가 작성된 시기를 연표에서 옳게 고른 것은? [3점]
(가)
(나)
(다)
(라)
(마)
제시된 자료는 개헌 청원 백만인 서명 운동 본부 장준하 명의로 발표된 문서로, 대통령이 스스로 개헌을 발의하여 민주 헌법을 회복할 것과 긴급 조치로 구속된 민주 인사·학생의 석방, 학원·종교계·언론계·정계에 대한 사찰과 탄압 중지를 요구하고 있다. 이는 유신 체제에 맞서 1973년 말부터 전개된 개헌 청원 백만인 서명 운동의 취지문이다.
연표의 눈금은 1948년 대한민국 정부 수립, 1952년 부산 정치 파동, 1960년 4·19 혁명, 1972년 7·4 남북 공동 성명, 1979년 부·마 항쟁, 1987년 6월 민주 항쟁으로 구분되어 있다.
유신 헌법은 7·4 남북 공동 성명이 발표된 1972년에 제정되었고, 긴급 조치가 잇달아 선포되며 저항이 이어지다가 1979년 부·마 항쟁으로 이어졌다. 따라서 이 자료가 작성된 시기는 7·4 남북 공동 성명과 부·마 항쟁 사이의 구간에 해당한다.
내용에 오류가 있거나 최신 법령·기준과 다른 부분이 보이면 알려주세요. 확인 후 반영하겠습니다.
(가) 민주화 운동에 대한 설명으로 옳은 것은? [2점]
허정 과도 정부가 구성되는 계기가 되었다.
호헌 철폐외 독재 타도 등의 구호를 내세웠다.
5년 단임의 대통령 직선제 개헌을 이끌어 냈다.
전개 과정에서 시민군이 자발적으로 조직되었다.
대통령 하야를 요구하는 대학 교수단의 시위 행진이 있었다.
전시 안내문은 2017년 기준 "37년 전 그 날"에 일어난 일을 다루므로 1980년의 사건이며, 신군부가 비상계엄을 전국으로 확대한 조치에 반대하여 도청과 금남로 일대에서 시위가 일어났고 계엄군이 무차별 폭력을 자행했다고 서술한다. 폭력의 진실을 세계에 알린 독일 언론인(위르겐 힌츠페터)을 추모한다는 대목까지 더하면 (가)는 5·18 민주화 운동이다.
계엄군의 발포로 사상자가 속출하자 광주 시민들은 무기고에서 무기를 확보해 시민군을 자발적으로 조직하여 계엄군에 맞섰다. 이것이 5·18 민주화 운동의 대표적 전개 양상이다.
이승만의 하야와 허정 과도 정부 구성, 대학 교수단의 시위 행진은 1960년 4·19 혁명의 내용이다. 또 "호헌 철폐, 독재 타도" 구호는 1987년 6월 민주 항쟁의 것이며, 5년 단임의 대통령 직선제 개헌은 6월 민주 항쟁의 결과로 6·29 민주화 선언을 거쳐 이루어졌으므로 구분해 두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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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 정부의 통일 정책으로 옳은 것은? [2점]
남북 기본 합의서를 채택하였다.
금강산 관광 사업을 시작하였다.
경의선 복원 공사를 시작하였다.
남북 조절 위원회를 설치하였다.
제2차 남북 정상 회담을 개최하였다.
대화에서 언급된 한반도의 비핵화에 관한 공동 선언은 남북 고위급 회담의 결과로 발표되었고, 핵무기의 시험·생산·보유·사용 금지와 핵에너지의 평화적 이용을 주요 내용으로 한다. 이 선언은 1991년 말 채택되어 1992년 발효된 것으로, (가)는 노태우 정부이다.
노태우 정부 시기에는 남북한이 유엔에 동시 가입하고, 같은 고위급 회담의 성과로 상호 화해와 불가침, 교류·협력을 규정한 남북 기본 합의서를 채택하였다.
금강산 관광 사업 시작과 경의선 복원 공사 착공은 김대중 정부, 제2차 남북 정상 회담은 노무현 정부의 일이다. 남북 조절 위원회는 7·4 남북 공동 성명에 따라 박정희 정부 시기에 설치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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