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능력검정시험 고급] 제46회 기출문제 해설 페이지
(가) 시대의 생활 모습으로 옳은 것은? [1점]
돌방무덤에 시신을 매장하였다.
가락바퀴를 이용하여 실을 뽑았다.
명도전, 반량전 등의 화폐를 사용하였다.
쟁기, 쇠스랑 등의 철제 농기구를 사용하였다.
거푸집을 이용하여 비파형 동검을 제작하였다.
제시된 자료의 (가)는 부산 동삼동 유적의 빗살무늬 토기와 갈돌·갈판이 대표 유물인 신석기 시대다. 농경과 정착 생활이 시작된 이 시대에는 가락바퀴와 뼈바늘을 이용해 실을 뽑고 옷을 지어 입는 원시적 수공업이 이루어졌다. 동굴이나 막집 거주는 구석기, 거푸집으로 세형 동검을 만든 것은 철기 시대의 모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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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 (나) 나라에 대한 설명으로 옳은 것은? [2점]
(가)-여러 가(加)들이 별도로 사출도를 주관하였다.
(가)-가족의 유골을 한 목곽에 안치하는 풍습이 있었다.
(나)-읍락 간의 경계를 중시하는 책화가 있었다.
(나)-철이 많이 생산되어 낙랑과 왜에 수출하였다.
(가),(나) - 제사장인 천군과 신성 지역인 소도가 있었다.
대화 속 두 나라는 철기 시대에 등장한 나라들의 혼인 풍속으로 구분됩니다. 혼인을 약속한 여자 아이를 데려다 키워서 며느리로 삼는 민며느리제가 있었다고 소개된 (가)는 옥저이고, 혼인 후 신랑이 신부 집 뒤편에 지어진 서옥에 살다가 자식이 장성하면 신랑 집으로 함께 돌아가는 풍속이 있었다고 소개된 (나)는 고구려입니다.
옥저에는 사람이 죽으면 시신을 임시로 묻었다가 뼈만 추려 가족의 유골을 하나의 큰 목곽에 함께 안치하는 가족 공동 무덤 풍습(골장제)이 있었습니다. 목곽 입구에는 쌀을 담은 항아리를 매달아 두었다고 전합니다.
나머지는 다른 나라의 특징입니다. 여러 가(加)들이 별도로 사출도를 주관한 나라는 부여, 읍락 간 경계를 중시해 침범하면 노비나 소·말로 배상하게 한 책화가 있던 나라는 동예입니다. 철이 많이 생산되어 낙랑과 왜에 수출한 곳은 변한 지역이며, 제사장인 천군과 신성 지역 소도는 삼한의 특징이므로 옥저·고구려 공통의 설명이 될 수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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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자료를 활용한 탐구 활동으로 가장 적절한 것은? [2점]
백강 전투의 전개 과정을 살펴본다.
안동도호부가 설치된 경위를 찾아본다.
백제가 사비로 천도한 원인을 알아본다.
나당 연합군이 결성된 계기를 파악한다.
가야 연맹의 중심지가 이동한 배경을 조사한다.
제시된 자료는 광개토 대왕릉비의 비문입니다. 경자년(400년)에 왕이 보병과 기병 5만 명을 보내 신라를 구원하게 하였고, 고구려군이 남거성을 거쳐 신라성에 이르자 왜적이 물러났으며, 이를 추격하여 임나가라의 종발성에 이르니 성이 곧 항복하였다는 내용이 담겨 있습니다.
여기서 임나가라는 김해의 금관가야를 가리킵니다. 고구려군의 이 남정으로 낙동강 하류의 금관가야가 큰 타격을 입어 쇠퇴하였고, 그 결과 전기 가야 연맹의 주도권이 무너지면서 가야 연맹의 중심지가 김해에서 고령의 대가야로 옮겨가게 되었습니다. 따라서 이 자료는 가야 연맹 중심지 이동의 배경을 조사하는 탐구 활동에 활용하기에 가장 적절합니다.
비문 끝부분의 "예전에는 신라 매금이 몸소 고구려에 와서 보고하며 명을 받든 적이 없었는데 … 신라 매금이 조공하였다"는 구절은 이 사건 이후 신라가 고구려의 정치적 영향력 아래 놓였음을 보여 줍니다. 반면 나당 연합군의 결성, 백강 전투, 안동도호부 설치는 모두 7세기 신라와 당의 동맹 및 백제·고구려 멸망을 전후한 일이고, 백제의 사비 천도는 6세기 성왕 때의 일이므로 5세기 초 고구려의 남정을 전하는 이 자료와는 연결되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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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왕에 대한 설명으로 옳은 것은? [2점]
금마저에 미륵사를 창건하였다.
윤충을 보내 대야성을 함락하였다.
지방에 22담로를 두어 왕족을 파견하였다.
고흥으로 하여금 서기를 편찬하게 하였다.
동진에서 온 마라난타를 통해 불교를 수용하였다.
화면 속 유물은 백제 왕릉에서 발견된 묘지석으로, "영동대장군 백제 사마왕은 나이가 62세가 되는 계묘년 5월 임진일 7일에 돌아가셨다"라고 새겨져 있습니다. 『삼국사기』에 사마왕으로 기록된 인물은 무령왕이므로, (가)는 무령왕이며 이 무덤이 무령왕릉임이 확인되었습니다. 백제 왕릉 가운데 무덤 주인이 밝혀진 최초의 사례라는 설명도 이 때문입니다.
무령왕은 웅진 시기 백제의 중흥을 이끈 왕으로, 지방의 주요 거점 22담로에 왕족을 파견하여 지방에 대한 통제를 강화하였습니다. 또한 중국 남조의 양나라와 교류하며 국력을 회복하였습니다.
나머지는 다른 왕들의 업적입니다. 금마저에 미륵사를 창건한 왕은 무왕, 윤충을 보내 대야성을 함락한 왕은 의자왕, 고흥에게 서기를 편찬하게 한 왕은 근초고왕, 동진에서 온 마라난타를 통해 불교를 수용한 왕은 침류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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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자료에 나타난 시기에 볼 수 있는 모습으로 적절한 것은? [2점]
농상집요를 소개하는 관리
만권당에서 대담을 나누는 학자
매소성 전투에서 당군과 싸우는 군인
빈공과를 준비하는 6두품 출신 유학생
주류성에서 백제 부흥 운동을 벌이는 귀족
제시된 자료는 일본 승려 엔닌이 남긴 『입당구법순례행기』입니다. 오시에 북서풍이 불어 돛을 올렸고 미시와 신시 사이에 적산 동쪽 언덕에 도착했다는 항해 기록과 함께, 적산에 있는 적산 법화원이 본래 장보고가 처음 세운 절이라는 사실이 적혀 있습니다.
장보고가 활동한 시기는 통일 신라 후기인 9세기입니다. 이 무렵 신라에서는 골품제의 제약으로 승진에 한계가 있던 6두품 출신들이 당으로 건너가 외국인 대상 과거 시험인 빈공과에 응시하는 일이 흔하였습니다. 최치원이 대표적인 인물입니다.
나머지는 시기가 맞지 않습니다. 농상집요의 소개와 만권당에서의 학문 교류는 고려 후기 원 간섭기의 모습이고, 당군과 맞서 싸운 매소성 전투(675년)와 주류성의 백제 부흥 운동(660년대)은 장보고의 활동보다 훨씬 앞선 나당 전쟁·삼국 통일기의 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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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사실이 있었던 시기를 연표에서 옳게 고른 것은? [2점]
(가)
(나)
(다)
(라)
(마)
제시된 『삼국사기』 기록은 전진의 왕 부견이 사신과 승려 순도를 보내 불상과 경문을 전하였고, 왕이 답례로 방물을 바쳤으며 태학을 세워 자제를 교육시켰다는 내용입니다. 이는 고구려 소수림왕 때의 일로, 불교 수용과 태학 설립은 372년에 이루어졌습니다.
연표는 246년 관구검의 환도성 함락, 313년 낙랑군 축출, 371년 고국원왕 전사, 427년 평양 천도, 475년 개로왕 전사, 554년 관산성 전투로 구간이 나뉘어 있습니다. 소수림왕은 아버지 고국원왕이 백제 근초고왕과의 싸움에서 전사한 371년 직후 즉위하여 체제 정비에 나섰습니다.
따라서 불교 수용과 태학 설립이 있었던 372년은 고국원왕 전사(371년)와 평양 천도(427년) 사이의 구간에 해당합니다. 소수림왕은 이어 373년에 율령을 반포하여 중앙 집권 체제의 기틀을 다졌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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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정책을 추진한 왕의 재위 기간에 있었던 사실로 옳은 것은? [2점]
병부와 상대등이 설치되었다.
이사부가 우산국을 복속시켰다.
불국사 삼층 석탑이 건립되었다.
화랑도가 국가적인 조직으로 개편되었다.
지방관 감찰을 목적으로 외사정이 파견되었다.
제시된 『삼국사기』 기록은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국왕이 죽으면 남녀 각각 다섯 명씩 순장하던 것을 명을 내려 금지하였다는 내용이고, 다른 하나는 주주(州主)와 군주(郡主)에게 농사를 권장하게 하고 처음으로 소를 부려 농사를 짓게(우경) 하였다는 내용입니다. 이는 모두 신라 지증왕 때의 정책입니다.
지증왕은 이 밖에도 국호를 신라로 확정하고 왕이라는 칭호를 사용하였으며, 수도에 시장인 동시와 이를 감독하는 관청을 두었습니다. 그리고 512년에는 이사부를 보내 우산국(울릉도)을 복속시켜 영역을 넓혔습니다.
나머지는 다른 왕대의 일입니다. 병부와 상대등의 설치는 법흥왕 때, 화랑도를 국가적인 조직으로 개편한 것은 진흥왕 때의 일이며, 불국사 삼층 석탑 건립과 지방관 감찰을 위한 외사정 파견은 통일 신라 시기의 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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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에 들어갈 내용으로 옳은 것은? [2점]
백성에게 정전을 지급하였어요.
건원이라는 독자적인 연호를 사용하였어요.
독서삼품과를 실시하여 관리를 채용하였어요.
지방 행정 제도를 9주 5소경으로 정비하였어요.
시장을 감독하는 관청인 동시전을 설치하였어요.
화면 속 설명이 가리키는 왕은 신문왕입니다. 동해의 용이 되어 나라를 지키겠다는 유언을 남긴 선왕(문무왕)에 감사하는 마음을 담아 감은사를 완성하였고, 김흠돌의 난을 진압하여 진골 귀족을 숙청하고 왕권을 강화하였다는 대목이 그 근거입니다.
대화창에 이미 나온 국학 설립 외에 신문왕이 추진한 대표적인 정책은 지방 행정 제도를 9주 5소경으로 정비한 것입니다. 넓어진 영토를 아홉 개의 주로 나누고 수도가 동남쪽에 치우친 약점을 보완하기 위해 다섯 곳에 소경을 두었습니다. 또한 관료전을 지급하고 녹읍을 폐지하여 귀족의 경제 기반을 약화시켰습니다.
나머지는 다른 왕들의 정책입니다. 백성에게 정전을 지급한 왕은 성덕왕, 건원이라는 연호를 사용한 왕은 법흥왕, 독서삼품과를 실시한 왕은 원성왕, 시장 감독 관청인 동시전을 설치한 왕은 지증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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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 국가에 대한 설명으로 옳지 않은 것은? [1점]
중앙군으로 9서당을 편성하였다.
중정대를 두어 관리를 감찰하였다.
전성기에 해동성국이라고도 불렸다.
인안, 대흥 등의 연호를 사용하였다.
5경 15부 62주의 지방 행정 제도를 마련하였다.
답사 계획서의 경로를 보면 1일차에 중경 현덕부로 추정되는 서고성 터와 하남둔 고성 터를, 2일차에 정효공주묘·순목황후묘·효의황후묘가 있는 용두산 고분군을 찾아가며, 지도에는 해란강이 흐르고 있습니다. 이는 오늘날 중국 지린성 일대에 남아 있는 발해의 유적들이므로 (가)는 발해입니다.
발해는 감찰 기구인 중정대를 두어 관리를 감찰하였고, 무왕의 인안·문왕의 대흥 등 독자적인 연호를 사용하였으며, 선왕 때 전성기를 맞아 해동성국이라 불렸습니다. 지방은 5경 15부 62주로 정비하였습니다.
반면 중앙군을 9서당으로 편성한 나라는 통일 신라입니다. 신문왕이 신라인뿐 아니라 고구려·백제·말갈 출신까지 포함해 아홉 개 부대로 편성한 것으로, 발해의 중앙군은 10위 체제였습니다. 따라서 이 설명이 발해에 대한 옳지 않은 서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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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에 들어갈 문화유산으로 옳은 것은? [3점]
화면의 설명은 국보 제30호로 현재 남아 있는 신라 석탑 중 가장 오래된 탑이며, 돌을 벽돌 모양으로 다듬어 쌓은 점이 특징이고 선덕 여왕 3년에 건립된 것으로 추정된다는 내용입니다. 이 조건을 모두 만족하는 삼국 시대의 탑은 분황사 모전석탑입니다.
보기 가운데 이에 해당하는 것은 회흑색 안산암을 벽돌처럼 잘게 다듬어 쌓아 올린 낮고 육중한 탑으로, 1층 몸돌 네 면에 감실 문을 내고 좌우에 인왕상을 새겼으며 기단 위에 사자상이 놓여 있는 모습의 것입니다. 원래는 더 높았으나 현재는 3층까지만 남아 있습니다.
함께 제시된 다른 탑들은 조건에 맞지 않습니다. 실제로 구운 벽돌을 층층이 쌓아 올린 높다란 전탑들은 돌을 다듬어 쌓았다는 설명과 어긋나고, 지붕돌이 얇고 넓게 뻗은 백제계 양식의 오층 석탑이나 이형 구조로 화려하게 꾸민 통일 신라 불국사의 다보탑 역시 신라에서 가장 오래된 모전석탑이라는 조건에 해당하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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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라)를 일어난 순서대로 옳게 나열한 것은? [3점]
(가)-(나)-(다)-(라)
(가)-(나)-(라)-(다)
(나)-(가)-(다)-(라)
(나)-(가)-(라)-(다)
(다)-(가)-(나)-(라)
제시된 네 자료는 모두 후삼국 통일 과정의 사건입니다. 견훤이 크게 군사를 일으켜 고창군 병산 아래에서 태조와 싸웠으나 이기지 못하고 전사자가 8천여 명이었다는 기록은 고창 전투(930년), 태조가 정예 기병 5천을 거느리고 공산 아래에서 견훤을 맞아 싸우다 김락과 신숭겸이 전사하고 태조가 겨우 죽음을 면했다는 기록은 공산 전투(927년)입니다.
또 태조가 뜰에서 신라왕의 알현하는 예를 받고 신라국을 폐하여 경주라 하고 그 지역을 김부에게 식읍으로 하사하였다는 기록은 경순왕의 신라 항복(935년)이며, 태조가 일선군으로 진격하여 신검의 군사와 일리천을 사이에 두고 대치하다 후백제 장수들이 항복하였다는 기록은 일리천 전투(936년)입니다.
따라서 일어난 순서는 공산 전투 → 고창 전투 → 신라 항복 → 일리천 전투가 됩니다. 공산에서 크게 패한 고려가 고창 전투 승리로 전세를 뒤집었고, 이어 신라의 항복과 후백제의 멸망으로 후삼국 통일이 완성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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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장면에 등장하는 왕이 추진한 정책으로 옳은 것은? [2점]
지방 세력 통제를 위해 향리제를 정비하였다.
주전도감을 설치하여 해동통보를 발행하였다.
쌍기의 건의를 받아들여 과거제를 실시하였다.
정계와 계백료서를 지어 관리의 규범을 제시하였다.
국자감을 성균관으로 개칭하고 유학 교육을 강화하였다.
그림 속 왕은 "몇 해 전에 설치한 12목에 경학박사와 의학박사를 각 1명씩 파견하여 지방의 인재를 가르치라"고 명하고, 지방관이 지역 인재를 중앙에 천거하는 것을 항구적인 법식으로 삼으라고 지시하고 있습니다. 12목 설치와 경학박사·의학박사 파견은 고려 성종의 대표적인 지방 정책입니다.
성종은 최승로의 시무 28조를 받아들여 유교 정치 이념을 확립하고, 처음으로 지방에 12목을 두어 지방관을 파견했습니다. 이때 지방 호족의 세력을 억누르기 위해 그들의 관직명을 호장·부호장 등으로 개편하는 향리제 정비를 함께 단행했습니다.
주전도감을 두어 해동통보를 발행한 것은 숙종, 쌍기의 건의로 과거제를 처음 시행한 것은 광종, 정계와 계백료서를 지어 관리의 규범을 제시한 것은 태조의 일입니다. 국자감을 성균관으로 고쳐 부른 것은 고려 후기의 일로 성종과는 시기가 다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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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 국가에 대한 고려의 대응으로 옳은 것은? [2점]
별무반을 보내 동북9성을 축조하였다.
개경에 나성을 쌓아 침입에 대비하였다.
최영을 중심으로 요동 정벌을 추진하였다.
화통도감을 설치하여 화약과 화포를 제작하였다.
쌍성총관부를 공격하여 철령 이북의 땅을 수복하였다.
자료는 소손녕과 서희의 담판 장면입니다. 소손녕이 "너희 나라는 신라 땅에서 일어났고 고구려 땅은 우리 소유인데 침범해 왔다"고 하자, 서희가 "우리나라가 바로 고구려의 옛 땅을 이었기에 국호를 고려라 하고 평양에 도읍하였다"고 반박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가)는 거란(요)입니다.
거란은 세 차례에 걸쳐 고려를 침입했습니다. 3차 침입 때 강감찬이 귀주에서 크게 승리한 뒤, 고려는 거란의 재침에 대비하여 개경에 나성을 쌓고 국경 지역에는 천리장성을 축조했습니다.
별무반을 편성해 동북 9성을 쌓은 것은 여진에 대한 대응이고, 최영 중심의 요동 정벌 추진과 화통도감 설치, 쌍성총관부 공격은 각각 명·왜구·원을 상대로 한 고려 말의 일이어서 거란과는 관계가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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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에 들어갈 내용으로 적절한 것은? [2점]
일연이 삼국유사를 집필하였습니다.
원효가 금강삼매경론을 저술하였습니다.
의천이 신편제종교장총록을 편찬하였습니다.
지눌이 정혜쌍수와 돈오점수를 내세웠습니다.
요세가 법화 신앙을 바탕으로 백련 결사를 이끌었습니다.
화면 속 안내는 순천시 조계산의 송광사를 소개하면서, 해인사·통도사와 함께 삼보 사찰 중 하나로 16명의 국사를 배출하여 승보 사찰로 불린다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송광사는 무신 집권기에 지눌이 수선사 결사를 펼친 근거지였습니다.
지눌은 불교계의 세속화를 비판하며 승려 본연의 수행에 힘쓰자는 수선사 결사 운동을 일으켰고, 선을 중심으로 교학을 아우르는 정혜쌍수와 단번에 깨친 뒤에도 꾸준히 닦아야 한다는 돈오점수를 주장했습니다.
삼국유사를 쓴 일연, 금강삼매경론을 지은 원효, 신편제종교장총록을 편찬한 의천은 송광사와 직접 연결되지 않으며, 법화 신앙을 바탕으로 한 백련 결사는 요세가 강진 만덕사에서 전개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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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 (나) 사이의 시기에 있었던 사실로 옳은 것은? [2점]
인사 행정을 담당하던 정방이 폐지되었다.
만적이 개경에서 신분 해방을 도모하였다.
묘청이 중심이 되어 서경 천도를 주장하였다.
정중부 등이 정변을 일으켜 권력을 장악하였다.
외적의 침입을 받아 황룡사 구층 목탑이 소실되었다.
(가)는 최우가 왕에게 속히 강화도로 행차할 것을 청하고, 녹전거 100여 대를 빼앗아 집안의 재물을 강화도로 옮겨 수도가 흉흉해졌다는 기록으로, 몽골의 침입에 맞선 강화 천도(1232)를 가리킵니다.
(나)는 재추가 옛 수도로 다시 천도할 것을 회의하고 날짜를 정해 게시했으나 삼별초가 따르지 않고 부고를 개방했다는 내용으로, 개경 환도(1270)와 삼별초의 항쟁이 시작되는 시점입니다.
두 시기 사이인 몽골의 침입 과정에서 경주의 황룡사 구층 목탑이 불타 없어졌습니다. 반면 묘청의 서경 천도 주장, 정중부 등의 무신정변, 만적의 봉기는 모두 강화 천도 이전의 일이며, 인사를 담당하던 정방의 폐지는 개경 환도 이후에 이루어졌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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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자료에 나타난 시기의 사실로 옳은 것은? [1점]
왕조 교체를 예언하는 정감록이 유포되었다.
지배층을 중심으로 변발과 호복이 확산되었다.
교정도감이 국정을 총괄하는 기구로 부상하였다.
이자겸이 왕실의 외척이 되어 권력을 독점하였다.
김사미와 효심이 가혹한 수탈에 저항하여 봉기하였다.
자료에는 흔도·홍다구·김방경이 일본의 세계촌 대명포에 이르러 교전하고, 군사가 일기도(一岐島)로 향하다 풍랑을 만났다는 내용이 담겨 있습니다. 이는 원이 고려를 끌어들여 감행한 여·몽 연합군의 일본 원정 장면으로, 시기는 원 간섭기입니다.
원 간섭기에는 몽골과의 활발한 교류 속에서 변발과 호복 같은 몽골풍이 지배층을 중심으로 유행했고, 반대로 원에는 고려의 의복과 음식이 전해지는 고려양이 퍼졌습니다.
이자겸의 권력 독점과 교정도감의 국정 총괄, 김사미·효심의 봉기는 모두 원 간섭기 이전인 문벌 사회와 무신 집권기의 일이며, 정감록의 유포는 조선 후기의 현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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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지역에서 있었던 사실로 옳은 것은? [3점]
유형원이 반계수록을 저술하였다.
안승을 왕으로 하는 보덕국이 세워졌다.
금속 활자로 직지심체요절이 간행되었다.
백제와 신라 사이에 황산벌 전투가 벌어졌다.
전태일이 근로 기준법 준수를 외치며 분신하였다.
화면의 시티투어 역사 코스는 정북동 토성 → 상당산성 → 흥덕사지 → 용두사지 철당간 → 청남대로 이어집니다. 이 답사지들이 모두 모여 있는 곳은 청주입니다.
코스에 등장하는 흥덕사에서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금속 활자본인 직지심체요절(직지)이 간행되었습니다. 용두사지 철당간 역시 청주의 대표적인 고려 시대 문화유산입니다.
유형원이 반계수록을 저술한 곳은 부안, 안승의 보덕국이 세워진 곳은 익산, 황산벌 전투가 벌어진 곳은 논산 일대이며, 전태일의 분신은 서울 평화시장에서 일어난 일이어서 이 지역과 맞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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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자료에 나타난 시기의 사회 모습으로 옳은 것은? [2점]
을파소의 건의로 진대법이 실시되었다.
기근에 대비하기 위해 구황촬요가 발간되었다.
우리 풍토에 맞는 농법을 소개한 농사직설이 편찬되었다.
국산 약재와 치료 방법을 정리한 향약집성방이 간행되었다.
기금을 모아 그 이자로 빈민을 도와주는 제위보가 운영되었다.
자료에서 왕은 개경 백성들이 역질에 걸리자 구제도감을 설치해 치료하게 하고, 시신과 유골을 거두어 묻게 하며 관리를 보내 동북도와 서남도의 굶주린 백성을 진휼하라고 명하고 있습니다. 임시 구호 기구인 구제도감과 개경이라는 수도 명칭에서 고려 시대임을 알 수 있습니다.
고려에서는 기금을 마련해 그 이자로 빈민을 구제하는 제위보가 운영되었고, 이 밖에 의창·상평창과 환자를 치료하는 동서 대비원, 혜민국 등이 운영되었습니다.
을파소의 건의로 실시된 진대법은 고구려 고국천왕 때의 제도이고, 구황촬요·농사직설·향약집성방은 모두 조선 시대에 편찬된 서적이므로 시기가 맞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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밑줄 그은 ‘이 왕’의 재위 기간에 있었던 사실로 옳은 것은? [2점]
어영청을 중심으로 북벌이 추진되었다.
국왕의 친위 부대인 장용영이 설치되었다.
강홍립 부대가 사르후 전투에 참전하였다.
에도 막부의 요청에 따라 통신사가 파견되었다.
제한된 범위의 무역을 허용한 계해약조가 체결되었다.
그림은 이만주 정벌도로, 설명에 따르면 이 왕의 명을 받은 최윤덕 장군 부대가 올라산성에서 여진족을 정벌했고 그 결과 조선은 압록강 유역을 개척하여 여연·자성·무창·우예의 4군을 설치했습니다. 4군 개척과 최윤덕에서 이 왕이 세종임을 알 수 있습니다.
세종은 북방에서 최윤덕과 김종서를 보내 4군 6진을 개척하는 한편, 남쪽으로는 이종무의 쓰시마 정벌 이후 삼포를 열어 왜인의 교역을 허용했고, 이어 계해약조를 맺어 세견선과 세사미두의 규모를 정해 제한된 범위의 무역만 허용했습니다.
어영청 중심의 북벌 추진은 효종, 장용영 설치와 초계문신제는 정조, 강홍립 부대의 사르후 참전은 광해군 때의 일입니다. 일본에 통신사가 파견된 것은 에도 막부가 성립한 임진왜란 이후이므로 세종 대와는 시기가 다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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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 기구에 대한 설명으로 옳은 것은? [1점]
수도의 행정과 치안을 담당하였다.
사헌부, 사간원과 함께 3사로 불렸다.
검서관에 서얼 출신 학자들이 기용되었다.
임진왜란을 거치면서 국정 전반을 총괄하였다.
국왕 직속 사법 기구로 반역죄, 강상죄 등을 처결하였다.
화면 속 책 소개는 옥당선생안을 보여 주며, 조선 시대 옥당·옥서로 불렸던 (가)의 관직을 지낸 인물들의 성명과 주요 관직, 본관을 기록한 책이라고 설명합니다. 또 (가)가 집현전의 기능을 이었고 직제에 영사·대제학·부제학·응교·교리가 있다고 했으므로 (가)는 홍문관입니다.
홍문관은 궁중의 경서와 문서를 관리하고 왕의 자문에 응하며 경연을 주관한 기구로, 사헌부·사간원과 함께 3사로 불리며 권력의 독점과 부정을 견제하는 언론 기능을 담당했습니다.
수도의 행정과 치안을 맡은 곳은 한성부, 검서관에 서얼 출신 학자를 기용한 곳은 규장각, 임진왜란을 거치며 국정 전반을 총괄한 기구는 비변사, 반역죄와 강상죄를 다룬 국왕 직속 사법 기구는 의금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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밑줄 그은 ‘왕’에 대한 설명으로 옳은 것은? [3점]
유자광의 고변을 계기로 남이를 처형하였다.
변급, 신류 등을 파견하여 나선 정벌을 단행하였다.
함길도 토착 세력이 일으킨 이시애의 난을 진압하였다.
인목 대비 유폐와 영창 대군 사사를 명분으로 폐위되었다.
유능한 인재를 양성하기 위해 초계문신제를 시행하였다.
자료는 성삼문이 아버지 성승, 박팽년 등과 함께 상왕의 복위를 도모하다 발각되어 왕에게 친히 국문을 받는 장면으로, "하늘에 두 개의 해가 없듯이 백성에게도 두 임금이 있을 수 없다"고 답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상왕은 단종, 국문한 왕은 세조입니다.
세조는 계유정난으로 권력을 잡고 즉위한 뒤 사육신의 단종 복위 운동을 진압했으며, 집현전과 경연을 폐지하고 6조 직계제를 부활시켜 왕권을 강화했습니다. 또 함길도 토착 세력이 일으킨 이시애의 난을 진압하고 유향소를 폐지했으며, 직전법을 실시하고 경국대전 편찬에 착수했습니다.
유자광의 고변으로 남이를 처형한 것은 예종, 변급·신류를 보낸 나선 정벌은 효종, 초계문신제 시행은 정조의 일입니다. 인목 대비 유폐와 영창 대군 사사를 명분으로 폐위된 왕은 광해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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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 종교에 대한 설명으로 옳은 것은? [2점]
개벽, 신여성 등의 잡지를 발행하였다.
하늘에 제사 지내는 초제를 거행하였다.
동경대전과 용담유사를 경전으로 삼았다.
박중빈을 중심으로 새생활 운동을 추진하였다.
만주에서 의민단을 조직하여 독립 전쟁을 전개하였다.
화면 속 두루마리는 황사영 백서로, (가)에 대한 정부의 탄압 상황과 신앙의 자유를 얻기 위해 외국 군대의 출병을 요청하는 내용이 적혀 있다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황사영이 1801년 신유박해의 실상을 베이징 주교에게 알리려 한 밀서이므로 (가)는 천주교입니다.
천주교 신자들은 3·1 운동 이후 만주로 건너가 의민단을 조직하고 청산리 전투 등 무장 독립 전쟁에 참여하였습니다.
개벽·신여성 등의 잡지를 발행한 것은 천도교, 하늘에 제사 지내는 초제를 거행한 것은 도교, 동경대전과 용담유사를 경전으로 삼은 것은 동학(천도교), 박중빈을 중심으로 새생활 운동을 편 것은 원불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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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사건을 계기로 일어난 사실로 옳은 것은? [2점]
정여립 모반 사건으로 기축옥사가 일어났다.
남곤 등의 고변으로 조광조 일파가 축출되었다.
양재역 벽서 사건으로 이언적 등이 화를 입었다.
조의제문이 발단이 되어 김일손 등이 처형되었다.
공신 책봉에 불만을 품고 이괄이 반란을 일으켰다.
제시된 글은 정국공신의 훈적을 개정하라는 전지로, "초기에 일이 황급하여 바르게 결단하지 못하고 녹훈을 분수에 넘치게 하여 뚜렷한 공신까지 흐리게 하였으니" 공훈 없이 기록된 자를 가려내 공권(공신에게 지급하던 포상 문서)을 맑게 하라고 명하고 있습니다. 중종 때 조광조 등 사림이 요구한 위훈 삭제가 관철된 사건입니다.
공신 자격을 박탈당한 훈구 세력이 크게 반발하여 남곤·심정 등의 고변으로 조광조 일파가 축출된 기묘사화(1519)가 일어났습니다.
정여립 모반 사건에서 비롯된 기축옥사는 선조 때, 양재역 벽서 사건은 명종 때, 조의제문이 발단이 된 무오사화는 연산군 때, 이괄의 난은 인조 때의 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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밑줄 그은 ‘시기’에 볼 수 있는 모습으로 적절한 것은? [2점]
제중원에서 치료받는 환자
도병마사에서 회의하는 관리
곤여만국전도를 열람하는 학자
당백전을 주조하는 관청 소속 장인
벽란도에서 교역하는 아라비아 상인
대화에서 한글로 쓰인 을병연행록은 연행사 일행으로 홍대용이 연경(베이징)에 갔던 시기에 보고 들은 내용을 기록한 것이라고 소개하고 있습니다. 홍대용의 연행은 1765~1766년에 있었으므로 밑줄 그은 시기는 18세기 후반의 조선 후기입니다.
이 무렵 학자들은 마테오 리치가 제작하여 17세기 초 조선에 전해진 서양식 세계 지도인 곤여만국전도를 열람하며 넓어진 세계관을 접할 수 있었습니다.
제중원은 1885년에 세워졌고 당백전은 1866년 흥선 대원군 집권기에 주조되었으므로 이 시기보다 뒤의 모습이며, 도병마사에서 회의하는 관리와 벽란도에서 교역하는 아라비아 상인은 고려 시대의 모습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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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 제도에 대한 설명으로 옳은 것은? [1점]
양반에게도 군포를 부과하였다.
토지 소유자에게 결작을 거두었다.
풍흉에 따라 전세를 9등급으로 차등 과세하였다.
관청에 물품을 조달하는 공인이 등장하는 배경이 되었다.
부족한 재정을 보충하기 위해 선무군관포를 징수하였다.
비석 안내문은 김육의 건의로 (가)가 호서 지방에 시행된 것을 기념해 삼남으로 통하는 길목에 세웠으며, 경기도에서 처음 시행된 (가)를 호서에도 실시하여 방납의 폐단으로 고통받는 백성의 부담을 줄이고자 했다고 밝히고 있습니다. (가)는 대동법입니다.
대동법은 집집마다 현물로 걷던 공납을 토지 결수를 기준으로 쌀·베·동전으로 바꾸어 거두었고, 관청에 필요한 물품은 정부에서 받은 돈으로 물건을 사다 납품하는 공인이 조달하게 되어 상품 화폐 경제가 발달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양반에게도 군포를 부과한 것은 흥선 대원군의 호포제, 토지 소유자에게 걷은 결작과 선무군관포는 균역법의 재정 보충책, 풍흉에 따라 전세를 9등급으로 나눈 것은 세종 때의 연분 9등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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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 왕의 재위 기간에 있었던 사실로 옳은 것은? [3점]
허적과 윤휴 등 남인들이 대거 축출되었다.
박규수의 건의로 삼정이정청이 설치되었다.
자의 대비의 복상 문제로 예송이 전개되었다.
붕당의 폐해를 경계하기 위한 탕평비가 건립되었다.
왕조의 통치 규범을 재정비한 대전통편이 편찬되었다.
자료의 통정공 무신일기는 이승원이 무신난(1728)의 전개 과정을 기록한 일기로, 경상도 거창에서 반란군을 이끌던 정희량 세력의 활동이 담겨 있습니다. 무신난은 이인좌·정희량 등이 세제였던 (가)의 즉위 과정에 의혹을 제기하며 일으킨 반란이므로 (가)는 영조입니다.
영조는 붕당의 폐해를 경계하고 탕평 정치의 뜻을 밝히기 위해 1742년 성균관 입구에 탕평비를 세웠습니다.
허적과 윤휴 등 남인이 대거 축출된 경신환국은 숙종, 자의 대비의 복상을 둘러싼 예송은 현종, 삼정이정청 설치는 철종, 대전통편 편찬은 정조 때의 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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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대화가 이루어진 시기의 경제 상황으로 옳지 않은 것은? [2점]
담배, 면화 등이 상품 작물로 재배되었다.
경기 지역에 한하여 과전법이 실시되었다.
국경 지대에서 개시 무역과 후시 무역이 이루어 졌다.
모내기법의 확산으로 벼와 보리의 이모작이 성행하였다.
설점수세제의 시행으로 민간의 광산 개발이 활기를 띠었다.
대화에서 상인들이 송파장의 산대놀이를 구경하고 송파 나루를 순시하는 수어청 병사를 언급하고 있습니다. 장시가 상설 시장으로 발달하고 5군영 체제가 갖추어진 조선 후기의 모습입니다.
이 시기에는 담배·면화 등 상품 작물 재배가 확산되었고, 국경 지대에서 개시·후시 무역이 이루어졌으며, 모내기법이 퍼지면서 벼와 보리의 이모작이 성행하였고, 설점수세제 시행으로 민간의 광산 개발도 활기를 띠었습니다.
반면 경기 지역에 한하여 관리에게 수조권을 나누어 준 과전법은 1391년 고려 말에 제정되어 조선 초기에 시행된 제도로, 세조 때 직전법으로 바뀌고 명종 때 그마저 폐지되어 조선 후기에는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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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교서가 발표된 전쟁 기간에 있었던 사실로 옳은 것은? [3점]
김상용이 강화도에서 순절하였다.
정문부가 길주에서 의병을 이끌었다.
조명 연합군이 평양성을 탈환하였다.
정봉수와 이립이 용골산성에서 항전하였다.
포수, 사수, 살수로 구성된 훈련도감이 설치되었다.
교서에는 "지난 정묘년에는 변란이 생겼을 때에 임시방편으로 강화를 허락하여 치욕을 감수하였다", "지금 오랑캐가 황제를 참칭하고 우리나라를 업신여기므로 천하의 대의를 위해 그 사신을 배척하였다가 이 같은 환란을 만났다"며 화의는 이미 끊어졌고 오직 결전이 있을 뿐이라고 밝히고 있습니다. 정묘호란 이후 후금이 국호를 청으로 고치고 황제를 칭한 뒤 침입한 병자호란(1636~1637) 때의 교서입니다.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인조는 남한산성으로 피신하였고, 왕족과 신하들이 옮겨 간 강화도가 청군에 함락되면서 김상용이 그곳에서 순절하였습니다.
정문부의 길주 의병, 조명 연합군의 평양성 탈환, 포수·사수·살수로 편성된 훈련도감 설치는 임진왜란 중의 일이고, 정봉수와 이립의 용골산성 항전은 앞선 정묘호란 때의 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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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뉴스에서 보도하는 사건에 대한 설명으로 옳은 것은? [2점]
척왜양창의를 기치로 내걸었다.
몰락 양반 유계춘이 주도하였다.
청군이 파병되는 결과를 가져왔다.
남접과 북접이 연합하여 전개되었다.
서북인에 대한 차별에 반발하여 일어났다.
뉴스 화면은 다복동에서 봉기하여 한때 청천강 이북 지역을 점령했던 반란군이 정주성에서 진압되었고, 주모자 가운데 우군칙·이희저 등을 추격 중이라고 보도하고 있습니다. 1811년 평안도에서 일어난 홍경래의 난입니다.
이 봉기는 세도 정치기의 가혹한 수탈과 함께 서북인, 곧 평안도 사람에 대한 관직 차별에 반발하여 몰락 양반 홍경래를 중심으로 영세 농민, 광산 노동자, 상인 등이 참여한 것이었습니다.
척왜양창의를 내건 것은 동학교도의 보은 집회, 몰락 양반 유계춘이 주도한 것은 진주에서 시작된 임술 농민 봉기, 청군 파병과 남접·북접 연합은 동학 농민 운동과 관련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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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검색창에 들어갈 교육 기관에 대한 설명으로 옳은 것은? [1점]
전국의 부ㆍ목ㆍ군ㆍ현에 하나씩 설립되었다.
입학 자격은 생원, 진사를 원칙으로 하였다.
중앙에서 교관인 교수나 훈도가 파견되었다.
유학을 비롯하여 율학, 서학, 산학을 교육하였다.
국왕으로부터 편액과 함께 서적 등을 받기도 하였다.
검색 결과는 풍기 군수 주세붕이 안향을 제사하기 위해 사당을 세운 것이 시초이며, 동아시아에 전파된 성리학이 지역화·변형되는 독특한 과정을 보여 준 점을 인정받아 9곳이 2019년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등재되었다고 설명합니다. 검색창에 들어갈 교육 기관은 서원입니다.
서원 가운데 국왕에게서 편액과 서적, 토지·노비 등을 하사받은 곳을 사액 서원이라 하였고, 주세붕이 세운 백운동 서원은 이황의 건의로 소수 서원이라는 사액을 받았습니다.
전국의 부·목·군·현에 하나씩 설립되고 중앙에서 교수나 훈도가 파견된 곳은 향교이며, 생원·진사를 입학 자격으로 한 곳은 성균관, 유학과 함께 율학·서학·산학을 가르친 곳은 고려의 국자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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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서신이 교환된 이후에 전개된 사실로 옳은 것은? [2점]
어재연 부대가 광성보에서 항전하였다.
외규장각의 의궤가 국외로 약탈되었다.
평양 관민이 제너럴 셔먼호를 불태웠다.
로즈 제독의 함대가 양화진을 침입하였다.
양헌수 부대가 정족산성에서 프랑스군을 격퇴하였다.
왼쪽 서신은 대원군에게 보낸 글로 "남의 무덤을 파는 것은 예의가 없는 행동이지만 무력을 동원하여 백성을 도탄에 빠뜨리는 것보다 낫기 때문"이라며 좋은 대책을 강구하라고 압박하고 있고, 오른쪽은 영종 첨사가 "덕산 묘소에서 저지른 변고"를 꾸짖으며 같은 하늘을 이고 살 수 없다고 답한 회답입니다. 통상을 요구하던 오페르트 일행이 1868년 남연군 묘를 파헤치려 한 오페르트 도굴 사건 당시 오간 문서입니다.
이 사건으로 서양에 대한 반감이 커지면서 통상 수교 거부 정책은 한층 강화되었고, 1871년 미군이 강화도를 침입한 신미양요 때 어재연 부대가 광성보에서 결사 항전하였습니다.
외규장각 의궤 약탈, 평양 관민의 제너럴 셔먼호 소각, 로즈 제독 함대의 양화진 침입, 양헌수 부대의 정족산성 승리는 모두 1866년의 일로 이 서신이 오가기 이전에 일어났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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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자료에 나타난 사건에 대한 설명으로 옳은 것은? [3점]
통감부의 방해와 탄압으로 실패하였다.
통리기무아문이 설치되는 배경이 되었다.
홍범 14조를 개혁의 기본 방향으로 제시하였다.
일본 공사관에 경비병이 주둔하는 계기가 되었다.
김기수가 수신사로 일본에 파견되는 결과를 가져왔다.
제시된 『성재집』 기록은 나라 재정이 고갈되어 각 영의 군인에게 지급할 봉급을 몇 달 동안 주지 못하자 영에 소속된 군인들이 밤에 부대를 조직해 궐내로 진입해 난을 일으켰다고 전한다. 밀린 급료 문제로 구식 군인이 봉기해 궁궐을 침범한 사건, 곧 임오군란(1882)이다.
별기군 우대와 구식 군대 차별, 그리고 선혜청에서 받은 쌀에 겨와 모래가 섞여 있던 일이 도화선이 되었다. 봉기군은 민씨 세력과 별기군 교관 호리모토를 처단하고 일본 공사관을 습격하였으며, 흥선 대원군이 일시 재집권하였다.
사건은 청군의 개입으로 진압되었고, 일본은 공사관 습격의 피해를 구실로 제물포 조약을 강요하였다. 이 조약으로 배상금 지불과 함께 일본 공사관에 경비병을 주둔시키는 것이 허용되어, 이후 일본군이 서울에 합법적으로 머무는 근거가 되었다는 설명이 옳다.
통리기무아문 설치(1880)와 김기수의 수신사 파견(1876)은 이 사건 이전의 일이고, 홍범 14조는 갑오개혁 때 제시된 개혁의 기본 방향이며, 통감부의 방해와 탄압으로 실패한 것은 국채 보상 운동이므로 이 사건과 연결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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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 단체에 대한 설명으로 옳은 것은? [3점]
만세보를 발행하여 민증 계몽에 힘썼다.
일본의 황무지 개간권 요구를 저지하였다.
중추원 개편을 통한 의회 설립을 추진하였다.
독립운동 자금 마련을 위해 독립 공채를 발행하였다.
대성 학교와 오산 학교를 설립하여 인재를 양성하였다.
제시된 문서는 서울 주재 프랑스 공사가 본국 외무부 장관에게 보낸 보고로, 러시아 교관과 재정 고문의 체류를 반대하는 움직임을 (가)가 주도하였고, 10일에 약 8,000명이 대로에 모여 러시아 장교와 알렉세예프의 송환 요구를 토론해 만장일치로 결정했다고 적고 있다. 1898년 만민 공동회를 이끈 독립 협회이다.
독립 협회는 서재필 등이 창립해 독립문을 세우고 독립신문을 통해 자주 국권·자유 민권 의식을 확산시켰으며, 러시아의 절영도 조차 요구와 한러 은행 설치를 저지하는 등 열강의 이권 침탈에 맞섰다.
나아가 정부 대신들이 참석한 관민 공동회를 열어 헌의 6조를 결의하고, 중추원을 의회식 기구로 개편하여 의회 설립을 추진하였다는 것이 이 단체에 대한 옳은 설명이다. 그러나 황국 협회를 동원한 탄압으로 해산되었다.
만세보 발행은 천도교, 황무지 개간권 요구 저지는 보안회, 독립 공채 발행은 대한민국 임시 정부, 대성 학교·오산 학교 설립은 신민회의 활동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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밑줄 그은 ‘내각’에서 추진한 정책으로 옳은 것은? [2점]
건양이라는 연호를 제정하였다.
전국 8도를 23부로 개편하였다.
황제 직속의 원수부를 설치하였다.
박문국을 설치하여 한성순보를 발행하였다.
공사 노비법을 혁파하고 과거제를 폐지하였다.
대화 속 인물들은 새로 구성된 내각에서 태양력을 채택했고 올해 11월 17일을 새해 1월 1일로 삼는다고 말하고 있다. 음력 1895년 11월 17일을 양력 1896년 1월 1일로 삼은 태양력 시행은 을미개혁의 대표적 조치로, 밑줄 그은 내각은 을미사변 직후 성립한 김홍집 내각이다.
을미개혁에서는 태양력 사용과 함께 단발령 시행, 종두법 실시, 소학교 설립, 친위대·진위대 편성 등이 추진되었다. 이때 ‘건양’이라는 독자 연호를 제정한 것이 이 내각이 추진한 정책으로 옳다.
전국 8도를 23부로 개편한 것과 재판소 설치는 제2차 갑오개혁, 공사 노비법 혁파와 과거제 폐지는 제1차 갑오개혁의 내용이다. 원수부 설치는 대한 제국 시기 광무개혁, 박문국을 통한 한성순보 발행은 1883년의 일이다.
내용에 오류가 있거나 최신 법령·기준과 다른 부분이 보이면 알려주세요. 확인 후 반영하겠습니다.
(가) 지역에서 전개된 민족 운동에 대한 설명으로 옳은 것은? [2점]
신흥 강습소를 세워 독립군을 양성하였다.
해조신문을 발간하여 국권 회복에 힘썼다.
서전서숙을 설립하여 민족 교육을 실시하였다.
대한인 국민회를 중심으로 외교 활동을 펼쳤다.
조선 독립 동맹을 결성하여 대일 항전을 준비하였다.
답사 코스에 다뉴바 애국선열 기념비, 리들리 한인 이민 역사 기념각, 장인환·전명운 의거지, 공립 협회 회관 터가 제시되어 있다. 다뉴바와 리들리는 캘리포니아의 한인 이주 중심지이고, 두 의사가 스티븐스를 저격한 곳도 샌프란시스코이므로 (가)는 미주 지역이다.
미주 한인들은 안창호 등이 조직한 공립 협회를 기반으로 단체를 통합하여 1910년 대한인 국민회를 결성하였고, 이를 중심으로 자금을 모으고 국제 사회에 한국 독립을 호소하는 외교 활동을 펼쳤다는 설명이 옳다. 대조선 국민 군단(하와이)과 한인 비행 학교(윌로스) 같은 군사 양성 시도도 이 지역에서 이루어졌다.
신흥 강습소 설립과 서전서숙 설립은 서간도·북간도 등 만주 지역, 해조신문 발간은 연해주, 조선 독립 동맹 결성은 중국 화북 지역의 활동이다.
내용에 오류가 있거나 최신 법령·기준과 다른 부분이 보이면 알려주세요. 확인 후 반영하겠습니다.
다음 사건이 일어난 이후의 사실로 옳은 것을 보기에서 고른 것은? [2점]
ㄱ, ㄴ
ㄱ, ㄷ
ㄴ, ㄷ
ㄴ, ㄹ
ㄷ, ㄹ
제시된 자료는 천수평에서 북로 군정서의 기습 공격을 받아 참패한 일본군이 이들을 추격해 어랑촌으로 들어갔고, 해 질 무렵까지 이어진 어랑촌 전투에서 북로 군정서가 지형적 이점을 활용해 일본군의 공격을 효과적으로 막아 내다가 연합 부대와 협공하여 큰 승리를 거두었다고 서술한다. 1920년 10월 김좌진의 북로 군정서와 홍범도 부대 등이 함께 싸운 청산리 대첩이다.
이 사건 이후의 사실을 보면, 일제가 중국(만주) 군벌과 미쓰야 협정을 맺어 만주 지역 독립군을 단속·인도하도록 한 것은 1925년의 일이고, 독립군이 대한 독립 군단으로 전열을 정비하기 위해 자유시로 이동한 것도 간도 참변 직후인 1921년의 일이므로 모두 이후에 해당한다.
반면 13도 창의군의 서울 진공 작전은 정미의병 시기인 1908년, 일제의 이른바 남한 대토벌 작전은 1909년으로 모두 청산리 대첩보다 앞선 사실이다.
내용에 오류가 있거나 최신 법령·기준과 다른 부분이 보이면 알려주세요. 확인 후 반영하겠습니다.
(가) 단체에 대한 설명으로 옳은 것은? [2점]
정우회 선언의 영향으로 결성되었다.
일제가 꾸며낸 105인 사건으로 해체되었다.
일제가 치안 유지법을 적용하여 탄압하였다.
백산 상회를 통해 독립운동 자금을 마련하였다.
국권 반환 요구서를 조선 총독에게 제출할 것을 계획하였다.
사진 속 순지비의 주인공은 임병찬으로, 설명에 스승인 최익현과 함께 의병을 일으켰다가 체포되어 쓰시마 섬으로 끌려갔고, 유배에서 돌아와 의병 봉기를 도모하던 중 고종의 밀지를 받아 (가)를 조직했다고 되어 있다. 1912년에 조직된 독립 의군부이다.
독립 의군부는 고종의 밀지를 근거로 삼아 옛 의병과 유생을 규합한 복벽주의 단체로, 대한 제국의 회복을 목표로 삼았다.
이 단체는 전국적인 의병 봉기를 계획하는 한편, 일본의 국권 침탈이 부당함을 알리기 위해 국권 반환 요구서를 조선 총독과 일본 정부에 제출할 것을 계획하였다는 설명이 옳다.
정우회 선언의 영향으로 결성된 단체는 신간회, 일제가 꾸며낸 105인 사건으로 해체된 단체는 신민회이다. 치안 유지법은 1925년에 제정되어 주로 사회주의 계열의 운동을 탄압하는 데 적용되었고, 백산 상회를 통해 마련한 자금이 지원된 곳은 대한민국 임시 정부이므로 모두 이 단체와는 연결되지 않는다.
내용에 오류가 있거나 최신 법령·기준과 다른 부분이 보이면 알려주세요. 확인 후 반영하겠습니다.
다음 학생들이 발표하고 있는 인물에 대한 설명으로 옳은 것은? [1점]
동양 척식 주식회사에 폭탄을 투척하였다.
하얼빈 역에서 이토 히로부미를 사살하였다.
한인 애국단을 결성하여 의거 활동을 전개하였다.
조선 혁명 간부 학교를 세워 독립군을 양성하였다.
명동 성당 앞에서 이완용을 습격하여 증상을 입혔다.
칠판의 ‘대한의군 참모중장’이라는 직함과 뤼순에서 재판받는 장면, 재판장·검사·변호사가 모두 일본인으로 구성된 불공정한 재판, 그리고 사형 판결을 받은 뒤 『동양 평화론』을 저술하던 중 순국했다는 설명은 모두 안중근을 가리킨다.
그는 의병 부대의 참모중장 자격으로 1909년 하얼빈 역에서 이토 히로부미를 사살하고 현장에서 체포되었다는 것이 옳은 설명이다. 재판 과정에서 자신은 범죄자가 아니라 독립 전쟁을 수행한 군인이므로 만국 공법에 따라 포로로 대우받아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또한 미완의 저술 『동양 평화론』에서 한·중·일이 대등한 위치에서 상호 협력해야 한다며 일제의 침략상을 비판하였다.
동양 척식 주식회사에 폭탄을 던진 인물은 나석주, 한인 애국단을 결성한 인물은 김구, 조선 혁명 간부 학교를 세운 인물은 김원봉, 명동 성당 앞에서 이완용을 습격한 인물은 이재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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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 운동에 대한 설명으로 옳은 것은? [1점]
조선 혁명 선언을 활동 지침으로 삼았다.
신간회에서 진상 조사단을 파견하여 지원하였다.
박상진이 주도한 대한 광복회 결성에 영향을 주었다.
전개 과정에서 일제가 제암리 학살 등을 자행하였다.
대한매일신보의 후원을 받아 전국적으로 확산되었다.
자료는 여성 독립운동가 김마리아(1892~1944)를 소개하면서, 일본 유학 중 2·8 독립 선언에 참여한 뒤 독립 선언서를 숨겨 귀국하였고 고종의 인산일을 계기로 (가)가 일어나자 여성들의 시위 참여를 촉구하다 체포되었다고 서술한다. (가)는 3·1 운동이다.
3·1 운동은 민족 대표 33인의 독립 선언과 학생·시민의 만세 시위로 시작되어 전국과 국외로 확산된 최대 규모의 민족 운동으로, 대한민국 임시 정부 수립과 일제의 이른바 문화 통치 전환을 이끌어 냈다.
일제는 이를 무력으로 진압하면서 경기도 화성에서 주민을 교회에 가두고 학살한 제암리 학살 등 만행을 자행하였다는 것이 이 운동에 대한 옳은 설명이다.
조선 혁명 선언을 활동 지침으로 삼은 단체는 의열단, 신간회가 진상 조사단을 파견하여 지원한 것은 광주 학생 항일 운동이다. 박상진이 주도한 대한 광복회는 1915년에 결성되어 이 운동보다 앞선 일이며, 대한매일신보의 후원을 받아 전국으로 확산된 것은 국채 보상 운동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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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마)에 들어갈 내용으로 옳은 것은? [2점]
(가)-잡지 한글의 간행을 주도하였다.
(나)-한글 맞춤법 동일안 제정에 참여하였다.
(다)-민족의 얼을 강조하고 조선학 운동을 추진하였다.
(라)-애국심 고취를 위해 을지문덕전을 집필하였다.
(마)-조선사회경제사에서 식민 사학의 정체성론을 반박하였다.
보고서의 표는 일제의 역사 왜곡과 동화 정책에 맞서 우리 말과 역사를 지킨 인물로 (가) 신채호, (나) 백남운, (다) 정인보, (라) 이윤재, (마) 최현배를 들고 각각의 활동을 묻고 있다.
이 가운데 정인보는 ‘얼’을 민족정신의 핵심으로 강조하며 「오천년간 조선의 얼」을 저술하였고, 안재홍·문일평 등과 함께 여유당전서 간행을 계기로 조선학 운동을 전개하였다. 따라서 정인보의 활동란에 들어갈 내용으로 옳다.
나머지는 서로 어긋난다. 잡지 『한글』 간행을 주도하고 한글 맞춤법 통일안 제정에 참여한 인물은 조선어 연구회·조선어 학회에서 활동한 이윤재와 최현배이며, 『을지문덕전』 등 위인전을 지어 애국심을 고취한 인물은 신채호, 『조선사회경제사』에서 유물 사관으로 식민 사학의 정체성론을 반박한 인물은 백남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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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공보가 발표된 이후 대한민국 임시 정부의 활동으로 옳은 것은? [2점]
삼균주의에 바탕을 둔 건국 강령을 발표하였다.
무장 투쟁을 위해 육군 주만 참의부를 조직하였다.
독립군 비행사 양성을 위해 한인 비행 학교를 설립하였다.
국민 대표 회의를 개최하여 독립 운동의 방향을 논의하였다.
파리 강화 회의에 대표단을 파견하여 외교 활동을 전개하였다.
제시된 대한민국 임시 정부 공보 제42호는 3월 18일 임시 의정원이 임시 대통령 이승만을 탄핵하여 심판에 회부하고, 3월 23일 심판하여 면직한 뒤 같은 날 박은식을 임시 대통령으로 선거하였다고 밝히고 있다. 1925년 3월의 일이다.
이후 임시 정부는 국무령 중심의 내각 책임제로 개편하고, 1930년대에는 이동 시기를 거쳐 충칭에 정착하였다. 1940년 한국광복군을 창설한 데 이어, 1941년 조소앙의 삼균주의에 바탕을 둔 대한민국 건국 강령을 발표하여 정치·경제·교육의 균등을 광복 후 국가 건설의 원칙으로 제시하였다는 것이 이후의 활동으로 옳다.
파리 강화 회의 대표단 파견은 1919년, 한인 비행 학교 설립은 1920년, 육군 주만 참의부 조직은 1923년, 국민 대표 회의 개최는 1923년으로 모두 이 공보가 발표되기 전의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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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자료에 나타난 민족 운동에 대한 설명으로 옳은 것을 보기에서 고른 것은? [1점]
ㄱ, ㄴ
ㄱ, ㄷ
ㄴ, ㄷ
ㄴ, ㄹ
ㄷ, ㄹ
자료는 "실지(實地)는 부르짖음"이라는 제목 아래 "우리의 소유는 점점 줄어들고 살림살이는 나날이 가난하다", "조선 물산을 몸에 걸고 조선 물산을 입에 넣고 조선 물산을 팔며 사고 조선 물산을 만들어 쓰라"고 호소하는 글이다. 국산품 애용과 자급자족을 통해 민족 자본을 지키자는 물산 장려 운동의 취지문임을 알 수 있다.
물산 장려 운동은 1920년 회사령 철폐와 관세 철폐 움직임 속에서 민족 기업을 보호하려는 목적으로 일어났다. 조만식 등의 주도로 평양에서 조선 물산 장려회가 조직되어 시작되었고, 서울에서는 학생들이 만든 자작회, 여성들이 만든 토산 애용 부인회 등이 호응하며 전국으로 확산되었다. 따라서 평양에서 조만식 등의 주도로 시작되었다는 설명과 자작회·토산 애용 부인회 등이 활동하였다는 설명이 옳다.
반면 국채 보상 기성회를 중심으로 전개된 것은 1907년 대구에서 시작된 국채 보상 운동이고, 일본·프랑스 등의 노동 단체로부터 격려 전문을 받은 것은 1929년의 원산 총파업이므로 이 운동과는 관련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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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법령이 적용된 시기 일제의 정책으로 옳은 것은? [2점]
제2차 조선 교육령을 시행하였다.
범죄 즉결례에 의해 한국인을 처벌하였다.
조선 사상범 예방 구금령을 통해 독립운동을 탄압하였다.
농민의 자력갱생을 내세운 농촌 진흥 운동을 실시하였다.
국가 총동원법을 제정하여 인력과 물자를 강제 동원하였다.
자료는 "한일 병합 이후 일반 기업들이 발흥하여 회사 조직으로써 각종 사업을 경영하려는 자가 점차 증가하므로" 일본 정부가 한국인의 사업 경영에 제한을 주기 위하여 총독부령으로 (가)를 공포하여 허가주의를 채택하였다고 서술한다. 회사 설립을 총독의 허가 사항으로 묶고 이를 어기면 신체형과 벌금형을 부과했다는 점에서 (가)는 1910년에 공포된 회사령이다.
회사령은 1910년 제정되어 1920년 신고제(허가제 폐지)로 바뀔 때까지 적용되었으므로, 이 법령이 시행된 시기는 1910년대 무단 통치기에 해당한다. 이 시기 일제는 헌병 경찰에게 즉결 처분권을 주어 범죄 즉결례에 따라 정식 재판 절차 없이 한국인을 처벌하였다. 자료에서 법령을 어긴 자에게 신체형까지 부과하였다고 한 것도 이러한 강압적 통치의 성격을 잘 보여 준다.
나머지는 시기가 맞지 않는다. 제2차 조선 교육령은 1922년, 농촌 진흥 운동은 1932년부터 시행되었고, 조선 사상범 예방 구금령(1941)과 국가 총동원법(1938)은 민족 말살 통치기의 정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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밑줄 그은 ‘이 운동’에 대한 설명으로 옳은 것은? [1점]
잡지 동광을 발행하였다.
김광제 등의 발의로 시작되었다.
한일 학생 간의 충돌에서 비롯되었다.
백정에 대한 차별 철폐를 목표로 하였다.
배우자 가르치자 다함께 브나로드를 구호로 내세웠다.
그림 속 인물은 탑을 가리키며 "이 탑은 진주에서 시작된 이 운동을 기념하기 위해 시민들이 성금을 모아 설립한 것"이며, 탑에 "공평(公平)은 사회의 근본이요, 애정(愛情)은 인류의 본량(本良)이다"라는 내용이 새겨져 있다고 설명한다. 이는 1923년 진주에서 창립된 조선 형평사의 취지문 문구로, 밑줄 그은 운동은 형평 운동이다.
형평 운동은 갑오개혁으로 신분제가 법적으로 폐지된 뒤에도 호적 기재나 학교 입학 등에서 계속되던 백정에 대한 사회적 차별을 철폐하고 평등한 대우를 요구한 신분 해방 운동이었다. 이후 조직이 전국으로 확대되며 사회 운동 단체들과 연대하기도 하였다.
다른 설명은 각각 다른 운동에 해당한다. 잡지 동광 발행은 수양 동우회 계열의 활동이고, 김광제 등의 발의로 시작된 것은 국채 보상 운동이며, 한일 학생 간 충돌에서 비롯된 것은 광주 학생 항일 운동, "배우자 가르치자 다 함께 브나로드"는 동아일보의 문자 보급 계몽 운동인 브나로드 운동의 구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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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 군사 조직에 대한 설명으로 옳은 것은? [2점]
영릉가 전투에서 일본군에게 승리하였다.
미군과 연계하여 국내 진공 작전을 계획하였다.
동북 항일 연군으로 개편되어 유격전을 펼쳤다.
쌍성보에서 중국 호로군과 연합 작전을 전개하였다.
중국 관내(關內)에서 결성된 최초의 한인 무장 부대였다.
자료는 "동양의 강도 일본 군벌"이 중화민국 침략 전쟁을 개시하자 중국에서 활동하는 조선 혁명가들이 이 전쟁에 직접 참가해 조국의 독립을 쟁취해야 한다고 밝히며, "조선 민족 전선 연맹의 기치 아래 일치단결하고 항일의 최고 지도자인 장제스 위원장 아래 함께 모여 (가)를 조직하였다"고 선언한다. 중일 전쟁 이후 조선 민족 전선 연맹이 중국 국민당의 지원을 받아 1938년 한커우에서 창설한 (가)는 조선 의용대이다.
김원봉이 이끈 조선 의용대는 중국 관내(關內)에서 결성된 최초의 한인 무장 부대로, 주로 정보 수집·선전·포로 심문 등 중국군을 지원하는 활동을 맡았다. 이후 일부 병력은 화북으로 이동해 조선 의용대 화북 지대(뒷날 조선 의용군)가 되었고, 김원봉과 잔여 병력은 1942년 한국광복군에 합류하였다.
다른 설명은 각기 별개의 부대에 해당한다. 영릉가 전투 승리는 양세봉의 조선 혁명군, 쌍성보에서 중국 호로군과 연합한 것은 지청천의 한국 독립군, 동북 항일 연군으로 개편되어 유격전을 벌인 것은 만주의 항일 유격대, 미군(OSS)과 연계한 국내 진공 작전은 한국광복군의 활동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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밑줄 그은 ‘헌법’이 적용된 시기에 있었던 사실로 옳은 것은? [3점]
반민족 행위 처벌법이 제정되었다.
통일 주체 국민 회의가 조직되었다.
2년 임기의 국회의원이 선출되었다.
조봉암을 중심으로 진보당이 창당되었다.
국회가 민의원, 참의원의 양원으로 운영되었다.
라디오 방송 내용은 "민주당의 윤보선 의원이 국회에서 208표를 얻어 대통령에 당선되었다"며, "내각 책임제를 골자로 개정된 헌법에 따라 선출된 윤보선 대통령은 국가의 원수로서 나라를 대표하고 국무총리 지명권과 긴급 재정 처분권, 국군 통수권 등의 권한을 가지며 임기는 5년"이라고 전한다. 이는 4·19 혁명 직후인 1960년 6월 개정된 헌법, 곧 제2공화국 헌법이다.
이 헌법은 대통령을 국회에서 선출하는 상징적 국가 원수로 두고 실권은 국무총리와 내각에 부여하는 의원 내각제를 채택하였으며, 동시에 국회를 민의원과 참의원의 양원제로 구성하도록 하였다. 실제로 1960년 7·29 총선으로 양원이 구성되어 장면 내각이 출범하였고, 이 체제는 1961년 5·16 군사 정변으로 붕괴될 때까지 유지되었다.
나머지는 시기가 다르다. 반민족 행위 처벌법 제정(1948)과 2년 임기 국회의원 선출(5·10 총선거로 뽑힌 제헌 국회의원)은 제1공화국 수립 무렵의 일이고, 조봉암의 진보당 창당은 1956년, 통일 주체 국민 회의 조직은 1972년 유신 헌법에 따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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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결의문이 채택된 시기를 연표에서 옳게 고른 것은? [2점]
(가)
(나)
(다)
(라)
(마)
결의문은 한국 문제가 "한국민 자체의 문제이며 그 자유와 독립에 관련된 문제"임을 밝히고, 한국 대표가 군정 당국에 의해 지명된 자가 아니라 한국민에 의하여 실제로 정당하게 선출된 자임을 감시하기 위하여 유엔 한국 임시 위원단을 설치해 한국에 주재하게 하고 전체를 여행·감시·협의할 권한을 부여한다고 결의하였다. 이는 1947년 11월 유엔 총회에서 채택된 결의문이다.
제시된 연표는 1945.8 8·15 광복 → 1945.12 모스크바 3국 외상 회의 개최 → 1946.3 제1차 미소 공동 위원회 개최 → 1946.10 좌우 합작 7원칙 발표 → 1947.5 제2차 미소 공동 위원회 개최 → 1948.8 대한민국 정부 수립 순으로 구성되어 있다. 결의문이 채택된 1947년 11월은 제2차 미소 공동 위원회 개최(1947.5)와 대한민국 정부 수립(1948.8) 사이에 놓인다.
미소 공동 위원회가 신탁 통치 협의 대상 문제로 결렬되자 미국은 한국 문제를 유엔에 넘겼고, 이 결의에 따라 유엔 한국 임시 위원단이 1948년 초 입국하였다. 그러나 소련이 북한 지역 입북을 거부하면서 결국 접근 가능한 지역만의 총선거가 결정되어 5·10 총선거로 이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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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 민주화 운동에 대한 설명으로 옳은 것은? [2점]
유신 체제가 붕괴되는 배경이 되었다.
시민군을 조직하여 계엄군에 대항하였다.
허정 과도 정부가 구성되는 결과를 가져왔다.
관련 기록물이 유네스코 세계 기록 유산으로 등재되었다.
대통령 하야를 요구하는 대학 교수단의 시위 행진이 있었다.
그림 속 해설자는 기념탑을 가리키며 "부산과 마산 지역의 시민과 학생들이 일으킨 (가)를 기념하는 탑"이고, "야당 총재의 국회의원직 제명으로 촉발된 (가)는 민주화에 기여한 점을 인정받아 2019년에 국가 기념일로 지정되었다"고 설명한다. 이는 1979년 10월에 일어난 부마 민주 항쟁이다.
YH 무역 사건 이후 신민당 총재 김영삼이 국회에서 제명되자 부산과 마산 일대에서 유신 철폐를 요구하는 대규모 시위가 일어났고, 정부는 부산에 계엄령, 마산에 위수령을 내려 진압하였다. 그 수습 방향을 둘러싼 정권 내부의 갈등이 10·26 사태로 이어지면서 이 항쟁은 유신 체제가 붕괴되는 배경이 되었다.
나머지는 다른 사건의 내용이다. 시민군을 조직해 계엄군에 대항한 것과 관련 기록물이 유네스코 세계 기록 유산으로 등재된 것은 5·18 민주화 운동이며, 허정 과도 정부 구성과 대통령 하야를 요구한 대학 교수단의 시위 행진은 4·19 혁명 때의 일이다.
내용에 오류가 있거나 최신 법령·기준과 다른 부분이 보이면 알려주세요. 확인 후 반영하겠습니다.
밑줄 그은 ‘선거’가 실시된 배경으로 가장 적절한 것은? [2점]
3당 합당으로 민주 자유당이 창당되었다.
국제 통화 기금(IMF)의 구제 금융을 금융을 받게 되었다.
비상 계엄이 선포된 가운데 발췌 개헌안이 통과되었다.
여당 부통령 후보 당선을 위한 3ㆍ15 부정 선거가 자행되었다.
호헌 철폐 등을 내세운 시위로 6ㆍ29 민주화 선언이 발표되었다.
그림은 거리에 붙은 대통령 선거 벽보를 보며 "이번 대통령 선거에 나오는 후보들이군", "마침내 국민의 손으로 대통령을 직접 뽑을 수 있게 되었으니 신중하게 투표하세"라고 말하는 장면이다. 벽보에는 기호 1 노태우, 2 김영삼, 3 김대중, 4 김종필이 나란히 걸려 있어, 밑줄 그은 선거가 1987년 12월에 치러진 제13대 대통령 선거임을 알 수 있다.
이 선거는 16년 만에 부활한 대통령 직선제로 실시되었다. 그 배경에는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과 4·13 호헌 조치에 맞서 호헌 철폐·독재 타도를 내건 6월 민주 항쟁이 있었고, 그 결과 여당 대표가 직선제 개헌을 수용한 6·29 민주화 선언이 발표되면서 5년 단임 직선제 개헌이 이루어졌다.
다른 선택지는 이 선거 이후이거나 다른 시기의 일이다. 3당 합당으로 민주 자유당이 창당된 것은 1990년, 국제 통화 기금의 구제 금융을 받은 것은 1997년이며, 비상계엄하의 발췌 개헌(1952)과 3·15 부정 선거(1960)는 이승만 정부 시기의 사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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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행사를 마련한 정부의 통일 노력으로 옳은 것은? [3점]
10ㆍ4 남북 공동 선언을 채택하였다.
남북한이 한반도 비핵화 공동 선언에 서명하였다.
남북 조절 위원회를 설치하여 통일 방안을 논의하였다.
남북한의 교류 협력을 위한 개성 공업 지구 건설에 합의하였다.
최초의 이산가족 고향 방문과 예술 공연단 교환을 실현하였다.
자료는 "방송 3사 공동 특별 생방송 ○○○ 대통령, 국민과의 대화"에서 사회 복지사가 국민 기초 생활 보장법의 수급 대상 선정 문제를 묻자, 대통령이 "국민 기초 생활 보장법을 지난해 10월부터 처음 실시했는데"라고 답하며 굶주리거나 자식 교육을 못 시키거나 의료 혜택을 받지 못하는 일이 없도록 하는 것이 제도의 취지라고 설명하는 장면이다. 이 법은 2000년 10월부터 시행되었으므로 해당 정부는 김대중 정부이다.
김대중 정부는 대북 화해 협력 정책(햇볕 정책)을 추진하여 2000년 최초의 남북 정상 회담에서 6·15 남북 공동 선언을 채택하였고, 그 후속 조치로 경의선 철도 연결과 함께 개성 공업 지구 건설에 합의하여 남북 경제 협력의 토대를 마련하였다.
나머지는 다른 정부의 통일 노력이다. 10·4 남북 공동 선언은 노무현 정부, 한반도 비핵화 공동 선언 서명은 노태우 정부, 남북 조절 위원회 설치는 7·4 남북 공동 성명 직후인 박정희 정부, 최초의 이산가족 고향 방문과 예술 공연단 교환은 전두환 정부 때의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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