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 (나) 사건에 대한 설명으로 옳은 것은? [2점] | [한국사능력검정시험 고급] 제34회 상세 페이지
1[한국사능력검정시험 고급] 제34회
(가), (나) 사건에 대한 설명으로 옳은 것은? [2점]
1
(가) - 황토현에서 관군에게 승리를 거두었다.
2
(가) - 사건의 수습을 위해 박규수가 안핵사로 파견되었다.
3
(나) - 삼정이정청 설치의 계기가 되었다.
4
(나) - 지역 차별에 반발한 홍경래가 주도하여 봉기하였다.
5
(가), (나) - 남접과 북접이 연합하여 조직적으로 전개되었다.
해설
(가) 자료는 “평서대원수는 급히 격문을 띄우노니 우리 관서(關西)의 부로 자제와 공사천민 모두 이 격문을 들으라”로 시작하며, 관서 사람을 보면 반드시 평안도놈이라 일컫는다는 지역 차별을 문제 삼고 있습니다. 스스로 평서대원수라 칭하며 서북민 차별에 반발해 일으킨 이 봉기는 1811년(순조)의 홍경래의 난입니다.
(나) 자료는 “임술년 2월 19일, 진주 백성 수만 명이 머리에 흰 수건을 두르고 손에는 나무 몽둥이를 들고 진주 읍내에 모여 서리들의 가옥 수십 호를 불사르고 부수니”라고 하여, 1862년 유계춘 등이 삼정의 문란과 경상 우병사 백낙신의 수탈에 항거한 임술 농민 봉기(진주 농민 봉기)임을 보여 줍니다.
진주에서 시작된 봉기가 전국으로 번지자 정부는 박규수를 안핵사로 파견하고 삼정이정청을 설치하여 전정·군정·환곡의 폐단을 바로잡으려 하였습니다. 따라서 임술년 진주 봉기가 삼정이정청 설치의 계기가 되었다는 설명이 옳습니다.
황토현 승리와 남접·북접의 연합은 1894년 동학 농민 운동에 해당하고, 박규수가 안핵사로 파견된 것과 홍경래 주도의 지역 차별 반발 봉기는 각각 두 자료의 짝이 뒤바뀐 설명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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