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두 표준어인 묶음은 ‘최댓값, 귀이개, 우렁쉥이’이다.
‘최댓값’은 한자어 ‘최대(最大)’와 고유어 ‘값’이 결합하며 뒷말이 된소리로 나므로 사이시옷을 받쳐 적는다. ‘귀이개’와 ‘우렁쉥이’도 표준어이며, ‘우렁쉥이’는 ‘멍게’와 함께 복수 표준어이다.
- ‘설거지, 자장면, 초생달’: ‘초생달’은 비표준어이고 ‘초승달’이 표준어이다.
- ‘등굣길, 삭월세, 무릎팍’: ‘삭월세’는 ‘사글세’, ‘무릎팍’은 ‘무르팍’으로 써야 한다.
- ‘멍게, 바짓가랭이, 반짇고리’: ‘바짓가랭이’는 ‘바짓가랑이’로 써야 한다.
- ‘짬뽕, 꼬깔모자, 떡만둣국’: ‘꼬깔’은 비표준어이고 ‘고깔’이 표준어이므로 ‘고깔모자’로 써야 한다.
○ 마을 이장이 소에게 ( ㉡ ) 꼼짝을 못한다.
○ 신에게 제물을 ( ㉢ ) 우리 마을의 안녕을 빌었다.
○ 아가씨들이 양산을 ( ㉣ ) 들고 거리를 거닐고 있다.
문맥에 맞는 배열은 ㉠ 받쳐, ㉡ 받혀, ㉢ 바쳐, ㉣ 받쳐이다.
감정이 치밀어 오르거나 물건을 펴 드는 것은 ‘받치다’, 뿔 같은 것에 세게 부딪히는 피동은 ‘받히다’, 신이나 윗사람에게 드리는 것은 ‘바치다’이다.
- ‘㉠ 받쳐 / ㉡ 받쳐 / ㉢ 바쳐 / ㉣ 받혀’: 소에게 들이받힌 것이므로 ㉡은 ‘받혀’, 양산을 펴 드는 것이므로 ㉣은 ‘받쳐’여야 한다.
- ‘㉠ 받쳐 / ㉡ 받혀 / ㉢ 바쳐 / ㉣ 받혀’: 양산은 펴서 드는 것이므로 ㉣은 ‘받쳐’여야 한다.
- ‘㉠ 바쳐 / ㉡ 받쳐 / ㉢ 받혀 / ㉣ 바쳐’: 설움이 치미는 ㉠은 ‘받쳐’, ㉡은 ‘받혀’, 제물을 드리는 ㉢은 ‘바쳐’, ㉣은 ‘받쳐’여야 하므로 네 곳 모두 틀렸다.
- ‘㉠ 바쳐 / ㉡ 받혀 / ㉢ 받쳐 / ㉣ 바쳐’: ㉡만 맞고 ㉠과 ㉣은 ‘받쳐’, ㉢은 ‘바쳐’여야 한다.
성분의 호응이 적절한 문장은 ‘건강을 위해서는 바른 식습관과 적당한 운동이 필요하다.’이다.
접속된 두 주어 ‘식습관’과 ‘운동’이 모두 서술어 ‘필요하다’와 자연스럽게 호응한다. 나머지는 호응 관계나 필수 성분에 문제가 있다.
- ‘들에 핀 장미꽃이 여간 탐스럽다.’: 부사 ‘여간’은 부정 표현과 호응하므로 ‘여간 탐스럽지 않다’로 써야 한다.
- ‘날씨가 흐려지더니 비와 바람이 불었다.’: ‘비’는 ‘불다’와 호응하지 않으므로 ‘비가 내리고 바람이 불었다’로 써야 한다.
- ‘오해의 소지를 발생하지 않도록 유의한다.’: ‘발생하다’는 목적어를 취하지 않으므로 ‘오해의 소지가 발생하지 않도록’ 또는 ‘오해의 소지를 만들지 않도록’으로 고쳐야 한다.
- ‘인간은 자연을 지배하기도 하고 복종하기도 한다.’: ‘복종하다’에 필요한 부사어가 빠졌으므로 ‘자연을 지배하기도 하고 자연에 복종하기도 한다’로 써야 한다.
각 단어의 단모음이 입술 모양에서 같은 묶음은 ‘가게, 기차’이다.
입술 모양에 따라 단모음은 평순 모음(ㅏ, ㅐ, ㅓ, ㅔ, ㅡ, ㅣ)과 원순 모음(ㅗ, ㅜ, ㅚ, ㅟ)으로 나뉜다. ‘가게(ㅏ, ㅔ)’와 ‘기차(ㅣ, ㅏ)’는 두 단어 모두 평순 모음으로만 이루어져 있다.
- ‘대구, 제고’: ‘대구’는 ㅐ(평순)와 ㅜ(원순), ‘제고’는 ㅔ(평순)와 ㅗ(원순)로 섞여 있다.
- ‘나름, 너울’: ‘나름’은 평순 모음끼리이지만 ‘너울’은 ㅓ(평순)와 ㅜ(원순)로 섞여 있다.
- ‘달빛, 더위’: ‘달빛’은 평순 모음끼리이지만 ‘더위’는 ㅓ(평순)와 ㅟ(원순)로 섞여 있다.
- ‘고국, 우애’: ‘고국’은 원순 모음끼리이지만 ‘우애’는 ㅜ(원순)와 ㅐ(평순)로 섞여 있다.
외래어 표기가 옳은 것은 ‘브리지’이다.
영어 bridge의 어말 [ʤ]는 외래어 표기법에 따라 ‘지’로 적으므로 ‘브리지’가 바른 표기이다.
- ‘플랜카드’: placard의 표기는 ‘플래카드’이다.
- ‘튀르키에’: 국명의 표기는 ‘튀르키예’이다.
- ‘메타세콰이어’: metasequoia의 표기는 ‘메타세쿼이아’이다.
- ‘컨셉트’: concept의 표기는 ‘콘셉트’이다.
[제42항]의존 명사는 띄어 쓴다.
[제43항]단위를 나타내는 명사는 띄어 쓴다.
[제45항]두 말을 이어 주거나 열거할 때 쓰이는 단어들은 띄어 쓴다.
[제48항]성과 이름, 성과 호 등을 붙여 쓰고, 이에 덧붙는 호칭어, 관직명 등은 띄어 쓴다.
옳은 것은 ‘지’를 시간의 경과를 나타내는 의존 명사로 보아 띄어 쓴다는 내용이다.
‘떠난 지 닷새가 지났다’의 ‘지’는 [제42항]이 적용되는 의존 명사이므로 앞말과 띄어 써서 ‘떠난 지’로 적는다.
- ‘밖에’를 보조사로 본 설명: ‘누구도 없었다’와 함께 쓰인 ‘밖에’는 오직 그것만이라는 한정이 아니라 바깥 공간을 뜻하므로, 명사 ‘밖’에 조사가 붙은 말로 보아 앞말과 띄어 쓴다.
- ‘번’을 단위 의존 명사로 본 설명: ‘노래 한번 잘한다’의 ‘한번’은 횟수가 아니라 잘함을 강조하는 말이므로 한 단어로 붙여 쓴다.
- ‘하고’를 [제45항]으로 설명한 내용: ‘사과하고 귤’의 ‘하고’는 조사이므로 [제41항]에 따라 앞말에 붙여 쓴다.
- ‘씨’를 호칭어로 본 설명: ‘성은 박씨이다’의 ‘씨’는 성씨 자체를 나타내는 접미사이므로 ‘박씨’로 붙여 쓴다.
○그는 가늘지만 길게 ( ㉡ )의 자세로 사는 것이 소시민의 처세 방법이라고 말한다.
㉠에는 면종복배(面從腹背), ㉡에는 무골호인(無骨好人)이 알맞다.
㉠의 ‘겉과 달리 내심으로 배반하는’은 겉으로 따르는 체하고 속으로 배반한다는 면종복배의 뜻 그대로이다. ㉡의 ‘가늘지만 길게’ 사는 소시민의 처세에는 뼈가 없는 듯 순하여 남의 비위를 거스르지 않는 사람을 뜻하는 무골호인이 어울린다.
- 면종복배(面從腹背)와 함포고복(含哺鼓腹)의 짝: 함포고복은 배불리 먹고 배를 두드리며 태평을 즐긴다는 뜻으로 ㉡의 처세와 맞지 않는다.
- 교언영색(巧言令色)과 함포고복(含哺鼓腹)의 짝: 교언영색은 교묘한 말과 꾸민 얼굴빛으로 환심을 사려 한다는 뜻으로 내심의 배반과 다르고, 함포고복도 ㉡에 맞지 않는다.
- 백수북면(白首北面)과 무골호인(無骨好人)의 짝: 백수북면은 재주와 덕이 없는 사람은 늙어서도 스승의 가르침을 받아야 한다는 뜻으로 ㉠에 맞지 않는다.
- 교언영색(巧言令色)과 상산구어(上山求魚)의 짝: 상산구어는 산에 올라 물고기를 구한다는 뜻으로 불가능한 일을 하려 함을 이르므로 ㉡에 맞지 않고, 교언영색도 ㉠에 맞지 않는다.
나는 시인이 못되므로 잘 모른다고 대답하였다.
무교동과 종로와 명동과 남산과
서울역 앞을 걸었다.
저녁녘 남대문 시장 안에서
빈대떡을 먹을 때 생각나고 있었다.
그런 사람들이
엄청난 고생 되어도
순하고 명랑하고 맘 좋고 인정이
있으므로 슬기롭게 사는 사람들이
그런 사람들이
이 세상에서 알파이고
고귀한 인류이고
영원한 광명이고
다름 아닌 시인이라고.
-김종삼, 「누군가 나에게 물었다」-
옳지 않은 설명은 일상적 체험을 초월한 시인의 예술적 능력을 강조한다는 내용이다.
화자는 ‘나는 시인이 못되므로’라고 말한 뒤 일상의 거리에서 ‘순하고 명랑하고 맘 좋고 인정이/ 있으므로 슬기롭게 사는 사람들’을 ‘다름 아닌 시인’이라 부른다. 즉 시인의 의미를 예술적 재능이 아니라 소박한 삶에서 찾고 있다.
- 구체적 장소의 제시: ‘무교동과 종로와 명동과 남산과/ 서울역 앞’, ‘남대문 시장’이 현실감을 준다.
- 도치와 반복: ‘생각나고 있었다.’ 뒤에 ‘그런 사람들이’로 시작하는 내용을 놓은 도치와 ‘그런 사람들이’의 반복이 핵심을 전달한다.
- 진실하고 착한 삶의 예찬: 그런 사람들을 ‘고귀한 인류’, ‘영원한 광명’이라 부르며 예찬한다.
- 물음과 사색의 전개: ‘시가 뭐냐고’라는 물음에서 출발해 거리를 걷고 ‘생각나고 있었다’로 이어지는 흐름으로 시상이 전개된다.
㉠교체:어떤 음운이 환경에 따라 다른 음운으로 바뀌는 음운 현상을 말한다.
㉡탈락:본디의 음운이 사라지는 음운 현상을 말한다.
㉢첨가:본디 없었던 음운이 새로 더해지는 음운 현상을 말한다.
㉣축약:두 음운이 합쳐져서 하나의 음운으로 줄어드는 음운 현상을 말한다.
옳지 않은 것은 ‘잡혀[자펴]’에 교체와 축약이 일어난다는 설명이다.
‘잡혀’는 ㅂ과 ㅎ이 합쳐져 ㅍ이 되는 거센소리되기, 곧 축약만 일어나므로 교체는 나타나지 않는다.
- ‘맑지[막찌]’: 겹받침 ㄺ에서 ㄹ이 떨어지는 탈락과 ㅈ이 ㅉ으로 바뀌는 된소리되기(교체)가 일어난다.
- ‘꽃잎[꼰닙]’: ㄴ 첨가가 일어나고, ㅊ이 ㄷ으로 바뀌는 음절의 끝소리 규칙과 ㄷ이 ㄴ으로 바뀌는 비음화(교체)가 일어난다.
- ‘색연필[생년필]’: ㄴ 첨가가 일어나고, ㄱ이 ㅇ으로 바뀌는 비음화(교체)가 일어난다.
- ‘굳히다[구치다]’: ㄷ과 ㅎ이 ㅌ으로 합쳐지는 축약이 일어나고, ㅌ이 ㅊ으로 바뀌는 구개음화(교체)가 일어난다.
과학의 재현 가능성에 대한 요구는 예측 가능성과도 일맥상통한다. 따라서 아무리 유명한 과학자의 이론이라도, 실험 결과가 예측한 것과 다르면 그의 이론은 폐기된다. 물리학의 아버지라 불리는 뉴턴이지만, 빠른 속도로 움직이는 물체에서 그의 이론은 잘못된 예측을 내놓는다. 특허청에서 일하는 말단 직원이라도, 그의 이론이 재현 가능한 예측을 내놓는다면 그가 맞는 거다. 그가 바로 아인슈타인이다. 그래서인지 물리학자들은 권위주의에 알레르기 반응을 보인다. 이론이 옳다면 재현 가능한 증거를 보이면 그만인 것이다. 증거가 불충분할 때는 모른다고 말하며 판단을 유보하는 것이 과학적인 자세이다.
옳지 않은 것은 혼자 있을 때만 성공하는 실험의 결과는 거짓이다라는 내용이다.
지문은 그런 주장에 대해 ‘거짓이라고 단정할 수는 없다’고 하면서 ‘적어도 과학적이지는 않다’고만 말한다. 즉 비과학적이라는 판단과 거짓이라는 판단을 구분하고 있다.
- 재현 가능한 증거에 기반한 학문: ‘이론이 옳다면 재현 가능한 증거를 보이면 그만’이라는 내용과 맞다.
- 판단 유보의 자세: ‘모른다고 말하며 판단을 유보하는 것이 과학적인 자세’라고 밝힌다.
- 뉴턴 이론의 폐기 가능성: ‘아무리 유명한 과학자의 이론이라도, 실험 결과가 예측한 것과 다르면’ 폐기된다고 하며 뉴턴의 예를 든다.
- 합리성을 내세운 과학이라는 이름의 사용: 과학이 ‘가장 합리적인 방법론’으로 믿어지며 ‘많은 학문 분야가 자신의 이름에 ‘과학’을 넣으려는’ 경향을 언급한다.
예를 들어 사람들은 “우리가 살고 있는 대도시가 자연을 죽이고 있습니다. 이건 참상입니다.”라고 말하고, 생태학자들은 “우리는 보다 자연적인 방식으로 살아야 합니다. 숲 가까이에서 살아야 합니다.”라고 말하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제가 아는 독일의 한 생태학자는 이러한 경향이 생태학적으로는 완전한 재앙이라고 말합니다. 한국에서도 그런 사례들이 있는지 모르겠습니다만, 일본에서는 이미 진행되고 있다고 들었는데요. 한 도시를 최대한 많은 사람들로 가득 채우는 겁니다. 그러면 그 도시의 오염 수준은 극도로 악화되지만, 일인당 오염 수준은 낮아지게 됩니다. 그러면서 더 많은 지역을 상대적으로 깨끗하게 남겨두는 겁니다. 이렇게 사람들이 꽉 들어차서 생태적으로 오염되고 더러워진 대도시는 사실상 역설적으로 자연에게는 최선인 것입니다. 태양열을 이용한 작은 자가 발전식 집에서 사는 생태적인 아이디어를 볼까요. 대다수의 사람들이 그렇게 살고 싶어 한다면, 이러한 집은 더욱 많아질 것이고 실질적으로 숲은 사라지게 될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오늘날의 생태학적 경향에 대한 저의 불신입니다. 만약 어떤 것이 최고선으로 제안되고, 그래서 우리가 이기주의를 초월하여 그것을 향해 노력한다고 할 때, 바로 이러한 특권들을 우리는 이미 은밀히 누리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옳은 것은 자연을 위한 생태학이 인간 중심적 태도와 은밀히 얽혀 있다는 내용이다.
글쓴이는 생태학이 ‘은폐된 정치적 선택’에 좌우되며 ‘매우 이기적이면서도 인간 중심적’으로 보인다고 말한다. 공동선 역시 ‘우리의 은밀한 목적’에 의해 정의된다는 것이 핵심이다.
- 태양열 주택 확대로 인한 자연 보존: 이런 집이 많아지면 ‘실질적으로 숲은 사라지게 될 것’이라고 하여 반대된다.
- 도시 밀집과 오염이 자연에 끼치는 해악: 사람이 꽉 들어찬 대도시가 ‘역설적으로 자연에게는 최선’이라고 하여 반대된다.
- 이기주의와 무관한 공동선의 실현: 생태학을 이기적으로 보고 공동선도 은밀한 목적에 따른 것이라 하므로 반대된다.
- 숲 가까이 사는 삶의 강조: 그런 주장에 ‘그렇지 않습니다’라고 반박하며 ‘재앙’의 사례로 든다.
내 몸의 해올 일만 닦고 닦을 뿐이언정
그 밧긔 여남은 일이야 분별할 줄 이시랴
내 일 망령된 줄을 내라 하여 모를쏜가
이 마음 어리기도 임 위한 탓이로세
아무가 아무리 일러도 임이 혜여 보소서
추성(秋城) 진호루(鎭胡樓) 밧긔 울어 예는 저 시내야
므음 호리라 주야에 흐르는다
임 향한 내 뜻을 조차 그칠 뉘를 모르나다
뫼흔 길고 길고 물은 멀고 멀고
어버이 그린 뜻은 많고 많고 하고 하고
어디서 ㉠외기러기는 울고 울고 가느니
어버이 그릴 줄을 처음부터 알안마는
임금 향한 뜻도 하늘이 삼겨시니
㉡진실로 임금을 잊으면 긔 불효인가 여기노라
-윤선도, 「견회요」-
옳지 않은 설명은 ㉠이 어버이의 마음을 나타낸다는 내용이다.
㉠의 ‘외기러기’는 ‘어버이 그린 뜻’을 품고 멀리 떨어진 화자의 외로운 처지와 그리움이 투영된 대상이다. 그리워하는 쪽은 화자이므로 어버이의 마음이라 할 수 없다.
- 설의적 표현: ‘분별할 줄 이시랴’, ‘내라 하여 모를쏜가’가 설의법으로 화자의 뜻을 강조한다.
- 유배지에서의 창작: 「견회요」는 윤선도가 유배 중에 지은 연시조로, ‘뫼흔 길고 길고 물은 멀고 멀고’에도 임금과 어버이에게서 멀리 떨어진 처지가 드러난다.
- 자연물과 화자의 동일시: 흐르는 시내를 보며 ‘임 향한 내 뜻을 조차 그칠 뉘를 모르나다’라고 하여 시내와 화자를 하나로 놓는다.
- ㉡의 충효 일치: 임금을 잊는 것을 불효로 여긴다는 말에서 충과 효가 통한다는 인식을 볼 수 있다.
띄어쓰기가 옳은 것은 ‘수십 년 만에’이다.
‘년’은 단위를 나타내는 의존 명사이고, 시간의 경과를 나타내는 ‘만’도 의존 명사이므로 각각 앞말과 띄어 쓴다.
- ‘1/2 가량은’: ‘가량’은 접미사이므로 ‘1/2가량은’으로 붙여 쓴다.
- ‘파고 들어 가는’: ‘파고들다’는 한 단어이므로 ‘파고들어 가는’으로 쓴다.
- ‘3일자로’: ‘자’는 날짜를 나타내는 의존 명사이므로 ‘3일 자로’로 띄어 쓴다.
- ‘계획인 바’: 앞말을 근거로 뒤의 내용을 잇는 연결 어미 ‘-ㄴ바’이므로 ‘계획인바’로 붙여 쓴다.
동물 심리학자 콘리트 로렌츠는 동물들의 행동을 이해하려면 그 아름다움을 감식할 수 있는 미적 감각이 필요하다고 했다. 바로 이것이 참을성이라는 미덕을 선물하게 되고 그로 인해 동물들로부터 뭔가 의미 있는 것을 발견해 낼 때까지 끈질기게 볼 수 있다는 것이다. 하버드 대학의 지질학자 너대니얼 셰일러는 학생 시절 한 가지 표본을 반복해서 보라는 지시를 받은 적이 있는데 자꾸 보다 보니 눈에 잘 뜨이지 않던 것들, 이를테면 물고기의 양쪽 비늘의 배열이 다르다는 것 등이 분명하게 보이더라는 것이다.
그러나 단순히 참을성 있게 보는 것만으로 끝나는 것은 아니다. 무엇을 보는지, 무엇을 찾을 것인가가 중요하다. 고생물학자 엘윈 시먼스는 화석을 찾아내는 진짜 기술은 빠르고 예리한 시각적 식별력에 있다고 말하는데, 이는 화석을 찾는 작업이 얼핏 보기에 무작위적이고 평범한 지형에서 질서를 찾아내는 일이기 때문이다. “장구한 시간에 걸쳐 풍화된 돌들로 뒤덮인 이집트 사막에 이빨 화석 하나가 있다 한들 눈에 잘 뜨이지 않는다. 그건 마치 책 한 권에 단 한 번 나오는 단어를 책장을 휙휙 넘기면서 찾는 일과 같다.”
열대 조류 전문가인 생물학자 재러드 다이아몬드는 현장 탐사 작업을 하려면 먼저 자신이 느낀 빠르고 작은 움직임이 새의 움직임인지 나뭇잎의 움직임인지를 분간하는 능력을 익혀야 한다고 말한다. 숲에서 새를 추적하건, 들판에서 곤충을 관찰하건, 암석층에서 화석을 찾아내건 간에 이런 날카로운 관찰력이 가장 중요하다.
옳지 않은 것은 참을성 있는 관찰이 과학적 성과의 충분조건이라는 내용이다.
지문은 ‘그러나 단순히 참을성 있게 보는 것만으로 끝나는 것은 아니다’라고 하여 참을성만으로는 부족함을 밝힌다. 참을성은 중요하지만 충분조건은 아니다.
- 단순히 보는 것의 한계: 위 문장에 이어 ‘무엇을 보는지, 무엇을 찾을 것인가가 중요하다’고 한 내용과 맞다.
- 목적을 가진 관찰의 가치: ‘무엇을 찾을 것인가가 중요하다’는 강조와, 새와 나뭇잎의 움직임을 분간해야 한다는 다이아몬드의 말에서 확인된다.
- 식별력과 인내심의 필요: 시먼스의 ‘빠르고 예리한 시각적 식별력’과 앞 사례들의 참을성이 함께 제시된다.
- 다이아몬드의 감각적 경험 활용: ‘자신이 느낀 빠르고 작은 움직임’을 분간하는 능력을 말한 부분과 맞다.
아기들은 타인의 고통에도 반응한다. 어린 윌리엄 다윈이 생후 6개월 때 유모가 우는 척하자 ‘우울한 표정’을 지으며 ‘동정심’을 보였던 일을 기억하는가? 태어난 지 며칠 되지 않아도 우는 소리는 아기에게 불쾌하다. 그래서 그 소리에 아기들도 대체로 따라 울게 된다. 소음에 대해 말로 표현할 줄 몰라서 그렇게 반응하는 것이 아니다. 아기들은 자기 울음소리보다 다른 아기의 울음소리를 들으면 더 많이 운다. 반면, 볼륨은 같더라도 컴퓨터로 생성된 소음을 들을 때나 새끼 침팬지의 울음을 들을 때는 그만큼 울지 않는다.
다른 생명체들도 같은 종의 구성원이 괴로워하면 불쾌감을 느낀다. 배고픈 히말라야원숭이는 음식을 손에 넣기 위해 레버를 당겼을 때 다른 원숭이가 전기 충격을 받는다면 그 레버를 당기지 않으려 든다. 쥐는 공중에 매달린 다른 쥐를 내려주거나 물이 채워진 수조에 갇힌 쥐를 풀어주기 위해 막대를 누른다. 그리고 원숭이와 마찬가지로 음식을 제공해 주는 막대를 눌렀을 때 다른 쥐가 충격을 받으면 그 막대를 누르는 행동을 멈춘다.
옳은 것은 아기가 사람의 소리보다 다른 생명체의 소리에 덜 반응한다는 내용이다.
지문은 아기가 다른 아기의 울음에는 많이 울지만 ‘새끼 침팬지의 울음을 들을 때는 그만큼 울지 않는다’고 설명한다.
- 신생아의 공감 불가: ‘세상에 발을 들인 첫 순간부터 우리는 다른 사람들과 공감한다’는 내용에 어긋난다.
- 의식적 인지를 통한 반응: 아기가 혀 내밀기를 흉내 내는 것을 ‘본능적으로 아는 것’이라 하였으므로 어긋난다.
- 쥐의 공감 불능: 쥐도 다른 쥐가 충격을 받으면 ‘그 막대를 누르는 행동을 멈춘다’고 하므로 어긋난다.
- 원숭이와 쥐의 공감 정도 비교: 두 동물의 사례를 나란히 들 뿐 어느 쪽이 더 크다고 비교하지 않는다.
나 ᄒᆞᆫ 간 ᄃᆞᆯ ᄒᆞᆫ 간에 청풍(淸風) ᄒᆞᆫ 간 맛져 두고
강산(江山)은 들일 듸 업스니 둘러 두고 보리라
-송순, 「십년을 경영하여」-
가장 유사한 정서가 드러나는 것은 김상용의 「남으로 창을 내겠소」이다.
송순의 시조는 ‘초려삼간’에 달과 청풍을 들이고 ‘강산은 ... 둘러 두고 보리라’라고 하여 안분지족과 자연 친화를 드러낸다. 김상용의 시 역시 ‘강냉이가 익걸랑/ 함께 와 자셔도 좋소’, ‘왜 사냐건/ 웃지요’에서 자연 속 소박한 삶의 여유를 보인다.
- 박목월, 「산도화」: ‘보랏빛 석산’, ‘암사슴’ 등으로 탈속적 자연의 정경을 그릴 뿐 소박한 삶에 대한 만족이 드러나지 않는다.
- 윤동주, 「서시」: ‘한점 부끄럼이 없기를’에서 보듯 엄격한 자기 성찰과 다짐의 정서이다.
- 정지용, 「고향」: ‘그리던 고향은 아니러뇨’에서 보듯 돌아온 고향에서 느끼는 상실감과 방황의 정서이다.
- 조지훈, 「민들레꽃」: ‘못 잊어 차라리 병이 되어도’에서 보듯 사랑하는 이를 향한 간절한 그리움의 정서이다.
다음 글에 대한 설명으로 옳지 않은 것은?
어떤 공동체에든 언어 사용의 문제는 그 공동체의 정체성과 맞물려 있는 중요한 문제라고 할 수 있으며, ‘디아스포라’의 경우에는 더욱 그러할 수밖에 없다. 일찍이 해외의 우리 동포들은 공동체 내부에서는 한국어를 사용하고, 공식적이고 대외적인 차원에서는 한국어가 아닌 그 나라 말을 사용해야 하는 다중 언어 상황에 놓여 있었다. 그런데 세월이 흐르면서 이주 1세대들의 수가 점점 줄어드는 상황, 그리고 생존을 위해 현지의 언어를 적극적으로 수용해야 하는 상황 등이 맞물리면서, 해외에 거주하는 한민족 공동체의 한국어 구사 능력은 전체적으로 낮아지고 있는 실정이다.
언어가 의사소통의 수단이면서 정서와 감정, 문화와 사상을 담는 그릇이기도 하다는 점을 생각할 때, 이와 같은 다중 언어 사회의 언어 문제는 빠른 속도로 다문화 사회가 된 우리 사회에서도 매우 중요한 것이 되었다. 따라서 국제결혼이나 취업 등의 이유로 우리나라에 온 많은 외국인들이 맞닥뜨린 다중 언어 상황의 문제점을 정확히 파악하고, 우리 모두가 한 공동체의 일원이라는 인식을 바탕으로 문제를 슬기롭게 해결하려는 태도가 필요하다.
옳지 않은 것은 해외 동포의 언어 교육을 한국 정부가 책임져야 한다는 내용이다.
지문은 해외 동포의 한국어 구사 능력이 낮아지는 실정을 말할 뿐, 정부의 책임이나 교육 주체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는다.
- 고려인과 코리안 디아스포라: ‘중국이나 일본, 러시아 등지로 떠나야 했던 이들과 그 후손’이라는 설명에 비추어 볼 때 성립한다.
- 정체성과 언어 사용: ‘언어 사용의 문제는 그 공동체의 정체성과 맞물려 있는 중요한 문제’라는 내용과 맞다.
- 한국어 구사 능력의 저하: ‘한국어 구사 능력은 전체적으로 낮아지고 있는 실정’이라는 내용과 맞다.
- 이주 노동자의 언어 문제 파악: ‘취업 등의 이유로’ 온 외국인이 맞닥뜨린 ‘문제점을 정확히 파악’해야 한다는 내용과 맞다.
(가)그냥 어떤 사람은 그 누구도 아니다. 남자도 여자도 아니고, 그 무리에 속하는지 여부도 아무도 알지 못한다. 지칭되는 명칭이 치환 가능하다고 여겨지는 사람은 그 위상이 애매해진다. 텔레비전의 토크쇼를 보더라도 개성 있는 패널들로 채워지는데, 이는 우연이 아니라 제작진의 세심한 의도 아래 구성된 것이다.
(나)일주일이 지나 수강 둘째 날이 왔다. 수강생들의 움직임은 확연히 빨라졌다. 강의실에 입장하자마자 일주일 전에 앉았던 바로 그 자리를 향해 총총걸음으로 돌진한다. 이름표가 붙은 책상을 찾아가는 것보다 더 신속정확하다. 배려심이 좀 있는 사람이라면 간혹 이렇게 묻기도 한다. “헛갈려서 그러는데요, 저번 주에 이 자리가 제 자리였나요?” 사실 코바늘뜨기 과정에서 누가 어디 앉든 무슨 문제가 될까?
(다)이제 자리에 앉아야 하는데 행동이 굼뜨거나 소심한 수강생들은 남아 있는 자리에 그냥 앉는 경우가 많다. 착석하자마자 어깨에서 벗겨진 외투는 의자에 입혀진다. 이 자리에 임자 있다는 표시다. 여성들은 의자 한쪽에 핸드백을 걸어놓기도 한다.
(라)인간은 낯선 사물, 낯선 사람과 최대한 빠른 시간 안에 친숙해지고 싶어 한다. 위의 경우에서는 새로운 강의실과 수강생들이 될 것이다. 조직심리학을 연구하는 외르크 펠페에 따르면, 인간은 안전함을 느끼기 위해 어느 무리에서든 최대한 신속하게 자기 자리를 정하고자 하는 욕구가 있다.
(마)그런데 여기서 모순에 부딪힌다. 무리의 소속감을 원하는 마음과 개인으로서 드러내고 싶은 마음이다. 이에 따라, 두 번째 강의에 참여한 수강생들은 첫날 앉았던 자리를 차지하려는 동기가 생긴다. 즉 그냥 ‘어떤 사람’이 아니라 ‘맨 앞줄 환등기 오른쪽에 앉은 사람’ 또는 ‘창가 맨 뒷줄 남자’로 차별화되어 각인되고 싶어 한다.
문맥에 맞는 순서는 (다) - (나) - (라) - (마) - (가)이다.
첫날 자리에 앉는 장면인 (다)가 도입부의 ‘첫날’을 잇고, ‘일주일이 지나’로 시작하는 (나)가 뒤따른다. (나)의 끝 ‘누가 어디 앉든 무슨 문제가 될까?’라는 물음에 (라)의 자기 자리를 정하려는 욕구가 답하고, ‘위의 경우에서는’도 앞선 사례를 가리킨다.
(마)는 ‘그런데’로 소속감과 차별화의 모순을 말하며 ‘그냥 어떤 사람’을 꺼내고, (가)가 ‘그냥 어떤 사람은 그 누구도 아니다’로 이를 받아 마무리한다.
- ‘(가) - (마) - (나) - (다) - (라)’: (가)의 ‘그냥 어떤 사람’은 (마)에서 먼저 제시되어야 하고, 둘째 날의 (나)가 첫날의 (다)보다 앞설 수 없다.
- ‘(다) - (라) - (나) - (마) - (가)’: (라)의 ‘위의 경우’와 설명은 (나)의 물음에 대한 답이므로 (나) 뒤에 와야 한다.
- ‘(라) - (나) - (다) - (마) - (가)’: (라)가 맨 앞에 오면 ‘위의 경우’가 가리킬 사례가 없고, 둘째 날의 (나)가 (다)보다 앞서게 된다.
- ‘(라) - (나) - (마) - (다) - (가)’: 착석 장면 (다)가 (마)와 (가) 사이에 끼어 ‘어떤 사람’으로 이어지는 흐름이 끊긴다.
최근 산업화 이후 경쟁적인 경제 발전으로 인해 지구의 기후변화와 자원 고갈의 문제가 등장함에 따라 지속 가능 발전이 전 세계가 달성해야 하는 인류 공통의 과제로 대두되고 있다. 이러한 지속 가능 발전을 실현하기 위해서 윤리적 소비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 있으며 윤리적 소비를 실천하고자 하는 소비자들의 의지 또한 높아지고 있다. 윤리적 소비는 제품의 생산·유통 과정에서 나타나는 여러 비윤리적인 문제를 고려하여 지구 환경의 문제를 최소화하고자 하는 소비 실천 행동이므로, 윤리적인 소비에 대한 관심이 높아진다는 것은 생산·유통 과정에서 윤리적 경영을 실천하는 기업의 제품을 선호한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다. 따라서 기업이 지속적으로 성장·발전하기 위해서는 윤리적 경영을 실천하는 것이 필요하다.
이처럼 윤리적 소비는 현대 소비 사회의 다양한 문제를 해결하는 대안적인 소비 행동으로 환경오염, 빈부 격차, 삶에 대한 불만족 등의 현대 소비 사회의 주요 문제를 개선할 수 있는 소비 행동이며, 유통 과정에서 나타나는 여러 비윤리적인 문제를 해결하는 데 기여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궁극적으로 지구환경의 문제를 개선할 수 있는 바람직한 실천 행동이다. 따라서 윤리적 소비를 실천하는 윤리적 소비자는 다양한 실천 행동을 통해 기업에 영향을 줄 수 있다. 윤리적 경영을 실천하는 기업의 제품을 선택함으로써 기업을 성장시키기도 하지만 비윤리적인 경영을 실천하는 기업의 제품을 불매하는 운동을 하여 기업의 성장을 저해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윗글의 내용을 바탕으로 답을 찾을 수 있는 질문으로 옳은 것은?
윗글로 답할 수 있는 질문은 산업화 이후 지구 환경의 변화가 소비자에게 준 영향을 묻는 것이다.
지문은 ‘기후변화와 자원 고갈의 문제’가 등장하면서 ‘윤리적 소비에 대한 관심’과 소비자들의 실천 의지가 높아지고 있다고 답을 제시한다.
- 윤리적 소비를 확산시킬 정책 방안: 정책에 관한 내용은 지문에 없다.
- 윤리적 소비에 영향을 준 사회운동: 윤리적 소비의 기원이 된 운동은 언급되지 않는다.
- 윤리적 기업의 제품 종류: 구체적인 제품은 제시되지 않는다.
- 기업의 성장 전략이 소비자에게 요구하는 책임: 지문은 소비자가 기업에 영향을 주는 면을 다룰 뿐 기업 전략이 소비자에게 요구하는 내용은 없다.
최근 산업화 이후 경쟁적인 경제 발전으로 인해 지구의 기후변화와 자원 고갈의 문제가 등장함에 따라 지속 가능 발전이 전 세계가 달성해야 하는 인류 공통의 과제로 대두되고 있다. 이러한 지속 가능 발전을 실현하기 위해서 윤리적 소비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 있으며 윤리적 소비를 실천하고자 하는 소비자들의 의지 또한 높아지고 있다. 윤리적 소비는 제품의 생산·유통 과정에서 나타나는 여러 비윤리적인 문제를 고려하여 지구 환경의 문제를 최소화하고자 하는 소비 실천 행동이므로, 윤리적인 소비에 대한 관심이 높아진다는 것은 생산·유통 과정에서 윤리적 경영을 실천하는 기업의 제품을 선호한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다. 따라서 기업이 지속적으로 성장·발전하기 위해서는 윤리적 경영을 실천하는 것이 필요하다.
이처럼 윤리적 소비는 현대 소비 사회의 다양한 문제를 해결하는 대안적인 소비 행동으로 환경오염, 빈부 격차, 삶에 대한 불만족 등의 현대 소비 사회의 주요 문제를 개선할 수 있는 소비 행동이며, 유통 과정에서 나타나는 여러 비윤리적인 문제를 해결하는 데 기여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궁극적으로 지구환경의 문제를 개선할 수 있는 바람직한 실천 행동이다. 따라서 윤리적 소비를 실천하는 윤리적 소비자는 다양한 실천 행동을 통해 기업에 영향을 줄 수 있다. 윤리적 경영을 실천하는 기업의 제품을 선택함으로써 기업을 성장시키기도 하지만 비윤리적인 경영을 실천하는 기업의 제품을 불매하는 운동을 하여 기업의 성장을 저해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윗글에 대한 설명으로 옳지 않은 것은?
옳지 않은 것은 윤리적 경영 여부가 기업의 존폐를 가르는 결정적 요인이라는 내용이다.
지문은 기업의 지속적 성장·발전을 위해 윤리적 경영이 ‘필요하다’고 하고, 불매가 기업의 ‘성장을 저해할 수도’ 있다고 말할 뿐이다. 존폐를 결정한다고까지 단정하지는 않았다.
- 소비가 사회에 미치는 영향의 고려: ‘더 넓은 범위에 어떠한 영향을 미치는지 고려하여’ 결정한다는 내용과 맞다.
- 일상생활 전반의 절제와 나눔: ‘일상생활 전 과정에서’ ‘절제하고 나누는 삶을 실천’한다는 내용과 맞다.
- 도덕적 신념과 사회적 책임: ‘도덕적 신념을 가지고’ ‘사회적 책임을 실천하는 소비 행동’이라는 정의와 맞다.
- 현대 소비 사회의 문제 개선: ‘환경오염, 빈부 격차’ 등의 문제를 ‘개선할 수 있는 소비 행동’이라는 내용과 맞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