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회직 9급 한국사] 20년 1회차
국회직 9급 한국사 기출문제

20년 1회차

총 20문항 · 객관식 · A4 약 1장

1 / 1
A4정답 포함
국회직 9급 한국사 기출문제모두CBT · moducbt.com

20년 1회차

총 20문항 · 객관식 · 정답·해설 포함
문제 1
<보기1>의 밑줄 친 ‘이 왕’의 업적으로 옳은 것만을 <보기2>에서 모두 고르면?
<보 기1>
이 왕의 정치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은 보법에 의한 군역제도의 개혁과 직전법의 실시에 의한 토지제도의 혁신이었다. 보법은 군역의 평준화에 따른 국방 강화에 목적이 있었고, 직전법은 관리들의 경제력을 약화시키는 대신 국가 재정을 강화하는 데 목적이 있었다.

<보 기2>
ㄱ.상서사에서 맡고 있던 인사권을 이조와 병조에 귀속시켜 6조의 기능을 강화하였다.
ㄴ.6조 판서들이 국왕에게 직접 보고하는 제도를 부활하여 왕권을 강화하였다.
ㄷ.문하부의 낭사를 사간원으로 독립시켜 언론 기능을 강화하고 대신들을 견제하도록 하였다.
ㄹ.국경 지대에서 시행되던 방어체제를 전국으로 확대하여 지역 중심 방어체제로 개편하였다.
1ㄱ, ㄴ
2ㄱ, ㄷ
3ㄴ, ㄷ
4ㄴ, ㄹ
5ㄷ, ㄹ
정답 및 해설

밑줄 친 ‘이 왕’은 세조이므로 옳은 것은 6조 직계제 부활과 진관 체제 확대를 고른 조합이다.

‘보법’에 의한 군역 개혁과 ‘직전법’ 실시는 모두 세조의 대표 정책이다. 각 지문을 판정하면 ㄱ·ㄷ은 태종, ㄴ·ㄹ은 세조의 업적이다.

  • ㄱ(X): 상서사의 인사권을 이조와 병조로 옮긴 것은 태종의 6조 강화 조치이다.
  • ㄴ(O): 6조 판서가 왕에게 직접 보고하는 6조 직계제는 태종 때 시행되었고, 세조가 이를 부활하였다.
  • ㄷ(X): 문하부 낭사를 사간원으로 독립시킨 것은 태종이다.
  • ㄹ(O): 세조는 국경 지대의 방어 체제를 전국으로 넓혀 지역 단위의 진관 체제를 확립하였다.
문제 2
(가)와 (나) 사이의 시기에 있었던 사실로 옳은 것은?
(가)김춘추가 무릎을 꿇고 “…… 만약 폐하께서 당의 군사를 빌려주어 흉악한 것들을 잘라내지 않는다면 …… 산과 바다 건너 행하는 조회도 바랄 수 없을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태종이 매우 옳다고 여겨서 군사의 출동을 허락하였다.
(나)당의 군사가 와서 매소성을 공격하니, 원술이 이를 듣고 죽음으로써 지난번의 치욕을 씻고자 하였다. 드디어 힘껏 싸워서 공을 세워 상을 받았다.
1대조영이 발해를 건국하였다.
2백제가 멸망하였다.
3신라가 대가야를 병합하였다.
4신라에서 녹읍이 폐지되었다.
5고구려가 살수에서 수의 군대를 격퇴하였다.
정답 및 해설

(가)와 (나) 사이의 사실은 백제의 멸망(660)이다.

(가)는 ‘김춘추’가 당 태종에게 군사를 청한 나당 동맹(648), (나)는 ‘매소성’ 전투(675)로 나당 전쟁 시기이다. 백제 멸망은 이 두 사건 사이에 있다.

  • 대조영의 발해 건국은 698년으로 (나) 이후이다.
  • 신라의 대가야 병합은 562년으로 (가) 이전이다.
  • 신라의 녹읍 폐지는 신문왕 때인 689년으로 (나) 이후이다.
  • 고구려의 살수 대첩은 612년으로 (가) 이전이다.
문제 3
다음과 같은 변화가 나타난 시기의 사실로 옳은 것은?
건국과 발전 과정에서 신라의 왕호는 여러 번 바뀐 것으로 알려져 있다. 특히, 4세기 무렵에는 이사금이라는 칭호가 마립간으로 바뀌었다.
1율령을 반포하고 불교를 공인하였다.
2국호를 신라로 바꾸고 주군제를 도입하였다.
3백제와 연합하여 고구려에게 빼앗긴 한강 유역을 되찾았다.
4독자적인 연호를 사용하여 자주국가로서의 위상을 높였다.
53성이 권력을 주고받던 시대가 끝나고 김씨 세습이 이루어졌다.
정답 및 해설

왕호가 마립간으로 바뀐 시기는 내물 마립간 무렵이며, 이때 김씨의 왕위 세습이 자리 잡았다.

4세기 신라는 박·석·김 3성이 왕위를 번갈아 잇던 단계를 끝내고, 내물 마립간 이후 김씨가 왕위를 독점하였다. 나머지 내용은 모두 6세기의 일이다.

  • 율령 반포와 불교 공인은 법흥왕의 업적이다.
  • 국호를 신라로 정하고 주군제를 도입한 것은 지증왕 때이다.
  • 백제와 연합해 한강 유역을 되찾은 것은 진흥왕 때이다.
  • 독자적 연호 ‘건원’을 처음 사용한 것은 법흥왕이다.
문제 4
다음과 같은 활동을 전개한 승려에 대한 설명으로 옳은 것은?
임진년(1232년) 여름 4월 8일 처음 보현도량(普賢道場)을 결성하고 법화삼매(法華三昧)를 수행하여, 극락정토에 왕생하기를 구하였는데, 모두 천태삼매의(天台三昧儀)를 그대로 따랐다. 오랫동안 법화참(法華懺)을 수행하고 전후에 권하여 발심시켜 이 경을 외우도록 하여 외운 자가 1000여 명이나 되었다.
1천태종을 창시하였다.
2돈오점수를 주장하였다.
3백련결사를 주도하였다.
4천태사교의를 저술하였다.
5유불일치설을 강조하였다.
정답 및 해설

지문의 승려는 요세이며, 그는 백련결사를 주도하였다.

‘임진년(1232년)’의 ‘보현도량’ 결성, ‘법화삼매’ 수행, 극락왕생 추구가 단서이다. 요세는 법화 신앙과 참회 수행을 바탕으로 강진 만덕사에서 결사를 이끌었다.

  • 천태종 창시는 대각국사 의천의 활동이다.
  • 돈오점수 주장은 보조국사 지눌의 사상이다.
  • 『천태사교의』 저술은 제관의 업적이다.
  • 유불일치설 강조는 지눌의 제자 혜심의 사상이다.
문제 5
다음 지문의 작가가 속한 붕당에 대한 설명으로 옳은 것은?
江湖(강호)애 病(병)이 깊퍼 竹林(듁님)의 누엇더니,
關東(관동) 八百里(팔ᄇᆡᆨ니)에 方面(방면)을 맛디시니,
어와 聖恩(셩은)이야 가디록 罔極(망극)ᄒᆞ다.
- 「관동별곡(關東別曲)」
1이황과 조식의 문인으로 이루어져 있다.
2이조전랑 자리를 두고 다툰 김효원을 추종하는 세력이다.
3광해군을 세자로 책봉하자고 건의한 사건으로 피해를 입었다.
4정여립 모반사건에 연루되어 많은 사람들이 실각하였다.
5선조가 사망하고 광해군이 즉위하자 실권을 장악하였다.
정답 및 해설

「관동별곡」의 작가는 정철이고 그가 속한 붕당은 서인이므로, 광해군 세자 책봉 건의 사건으로 피해를 입었다는 설명이 옳다.

이 일이 건저의 사건으로, 정철이 세자 책봉을 건의했다가 선조의 노여움을 사 유배되면서 서인이 큰 타격을 입었다.

  • 이황과 조식의 문인으로 이루어진 쪽은 동인이다.
  • 이조전랑 자리를 두고 다툰 김효원을 따른 세력은 동인이다.
  • 정여립 모반 사건으로 많은 사람이 실각한 쪽은 동인이다.
  • 광해군 즉위 후 실권을 장악한 세력은 북인이다.
문제 6
ㄱ∼ㄹ의 ‘이 책’이 편찬된 순서로 옳은 것은?
ㄱ.이 책은 단군 신화를 서술하면서 예맥, 부여, 옥저, 삼한, 삼국이 모두 단군의 후손임을 밝혀 놓았다.
ㄴ.이 책은 고려의 역사를 편년체와 강목체를 결합하여 서술한 것으로, 우리나라 최초의 강목체 사서로 평가된다.
ㄷ.이 책은 고구려 건국 영웅을 소재로 서사시를 지은 것으로, 고구려 전통을 계승하려는 의식이 강조되어 있다.
ㄹ.이 책은 고려 태조부터 숙종까지의 역사를 정리한 것으로, 그 가운데 국왕들의 업적에 대한 평가 부분이 지금 전하고 있다.
1ㄱ - ㄷ - ㄹ - ㄴ
2ㄱ - ㄹ - ㄴ - ㄷ
3ㄴ - ㄱ - ㄷ - ㄹ
4ㄷ - ㄱ - ㄴ - ㄹ
5ㄷ - ㄹ - ㄱ - ㄴ
정답 및 해설

편찬 순서는 ㄷ 『동명왕편』 → ㄱ 『제왕운기』 → ㄴ 『본조편년강목』 → ㄹ 『사략』이다.

네 책 모두 고려 시대 저술로, 지문의 단서로 책을 확정한 뒤 시기를 비교하면 된다.

  • ㄷ: 고구려 건국 영웅을 읊은 서사시는 이규보의 『동명왕편』으로, 명종 때인 1193년에 지어졌다.
  • ㄱ: 단군을 우리 역사의 시조로 서술한 책은 이승휴의 『제왕운기』로, 충렬왕 때인 1287년에 지어졌다.
  • ㄴ: 최초의 강목체 사서로 꼽히는 책은 민지의 『본조편년강목』으로, 충숙왕 때 편찬되었다.
  • ㄹ: 태조부터 숙종까지를 정리하고 사론 부분이 전하는 책은 이제현의 『사략』으로, 공민왕 때 저술되었다.
문제 7
(가), (나) 시기에 일어난 사건으로 옳은 것은?
모스크바 삼상회의에서 한국 문제에 관한 4개 항의 결의서를 채택하였다.
↓
(가)
↓
서울에서 제1차 미·소 공동위원회가 열렸으나 협의 대상을 둘러싼 이견으로 결렬되었다.
↓
(나)
↓
UN에서 인구 비례에 따른 남북한 총선거를 실시할 것을 결정하였다.
1(가)-미군이 진주하여 북위 38도선 이남에 군정을 선포하였다.
2(가)-주한 미국 육군 사령부는 국내 치안을 명분으로 남조선 국방 경비대를 창설하였다.
3(가)-이승만이 정읍에서 남한 단독 정부 수립을 주장하였다.
4(나)-조선 공산당 북조선 분국이 조직되어 책임비서로 김일성을 선출하였다.
5(나)-김구와 김규식 등이 통일정부 수립을 위한 남북 협상을 벌였다.
정답 및 해설

(가) 시기의 사건으로 옳은 것은 남조선 국방 경비대 창설(1946.1)이다.

기준 사건은 모스크바 삼상회의(1945.12), 제1차 미·소 공동 위원회 결렬(1946.5), UN 총회의 총선거 결의(1947.11)이다. 미군정은 삼상회의 직후인 1946년 1월 국방 경비대를 만들었으므로 (가)에 해당한다.

  • 미군의 남한 진주와 군정 선포는 1945년 9월로, 삼상회의 이전이다.
  • 이승만의 정읍 발언은 1946년 6월로, 제1차 미·소 공위 결렬 이후이므로 (나) 시기이다.
  • 조선 공산당 북조선 분국 조직과 김일성의 책임비서 선출은 1945년의 일로, (나)보다 훨씬 앞선다.
  • 김구·김규식의 남북 협상은 1948년 4월로, UN의 결정 이후이다.
문제 8
(가)∼(마)에 들어갈 내용으로 옳지 않은 것은?
연 도조 약 명주요내용
1876조·일 수호 조규(가)
1876조·일 무역 규칙(나)
1882조·청 상민 수륙 무역 장정(다)
1882조·미 수호통상 조약(라)
1883조·일 통상 장정(마)
1(가)-조선이 자주국임을 명시하였다.
2(나)-일본정부에 소속된 선박의 항세를 면제하였다.
3(다)-청의 북양대신과 조선 국왕은 대등한 권리를 갖는다고 규정하였다.
4(라)-거중조정의 원칙과 최혜국대우 조항을 규정하였다.
5(마)-일본 물품에 대한 관세를 폐지하였다.
정답 및 해설

옳지 않은 것은 조·일 통상 장정이 일본 물품의 관세를 폐지하였다는 설명이다.

1883년 조·일 통상 장정은 오히려 무관세 상태를 고쳐 관세를 설정하였고, 방곡령 규정과 최혜국 대우도 담았다.

  • 조·일 수호 조규는 조선을 자주국으로 명시해 청의 종주권을 부정하려 하였다.
  • 조·일 무역 규칙은 일본 정부 소속 선박의 항세를 면제하였다.
  • 조·청 상민 수륙 무역 장정은 청의 북양대신과 조선 국왕을 대등한 지위로 규정해 조선의 속방 지위를 드러냈다.
  • 조·미 수호 통상 조약은 거중조정과 최혜국 대우를 규정하였다.
문제 9
(가)와 (나) 사이에 있었던 사건으로 옳은 것은?
(가)대통령이 계엄령을 선포한 가운데 개헌에 반대하는 국회의원들을 감금하고 국회에서 대통령 직선제를 골자로 하는 개헌안을 통과시켰다.
(나)국회에서 개헌안에 대해 표결한 결과 재적 인원 203명의 2/3에 못 미치는 135명이 찬성하였으나 사사오입의 논리를 펴 억지로 개헌안을 통과시켰다.
1이승만이 여러 우익 단체를 모아서 자유당을 창당하였다.
2부통령 선거에서 민주당의 장면 후보가 당선되었다.
36.25 전쟁에 대한 휴전 협정이 체결되었다.
4대통령 후보였던 조봉암이 간첩 혐의로 사형에 처해졌다.
5김일성이 연안파를 숙청하고 주체를 강조하기 시작하였다.
정답 및 해설

(가)와 (나) 사이의 사건은 6·25 전쟁 휴전 협정 체결(1953)이다.

(가)는 계엄령 아래 대통령 직선제 개헌을 통과시킨 발췌 개헌(1952), (나)는 ‘사사오입’ 개헌(1954)이다. 휴전 협정은 두 개헌 사이인 1953년 7월에 체결되었다.

  • 자유당 창당은 1951년으로 (가) 이전이다.
  • 장면의 부통령 당선은 1956년 선거로 (나) 이후이다.
  • 조봉암의 사형은 1959년으로 (나) 이후이다.
  • 김일성의 연안파 숙청은 1956년 8월 종파 사건 이후의 일로 (나) 이후이다.
문제 10
다음과 같은 주장을 받아들인 국왕의 업적으로 옳은 것은?
◦불교를 믿는 것은 자신을 다스리는 근원이며, 유교를 행하는 것은 나라를 다스리는 근원을 구하는 것입니다. 자신을 다스리는 것은 내세에 복을 구하는 일이며, 나라를 다스리는 것은 오늘의 급한 일입니다.
◦풍속은 각기 그 토질에 따라 다른 것이므로 모든 것을 반드시 구차하게 중국과 같게 할 필요는 없습니다.
1청연각이라는 도서관 겸 학문연구소를 설치하였다.
2연등회와 팔관회를 성대하게 개최하였다.
3개국공신들을 숙청하고 왕권을 강화하였다.
4쌍기의 건의를 수용하여 과거제를 시행하였다.
5지방에 경학 박사와 의학 박사를 파견하였다.
정답 및 해설

지문은 최승로의 시무 28조이고 이를 받아들인 왕은 고려 성종이므로, 지방에 경학 박사와 의학 박사를 파견한 것이 옳다.

‘유교를 행하는 것은 나라를 다스리는 근원’이라는 유교 정치 이념 표방이 단서이다. 성종은 12목 설치와 함께 교육 진흥을 위해 박사를 지방에 보냈다.

  • 청연각 설치는 예종의 업적이다.
  • 성종은 최승로의 건의에 따라 연등회와 팔관회를 축소·폐지하는 쪽으로 움직였으므로 성대한 개최와 맞지 않는다.
  • 개국 공신 숙청을 통한 왕권 강화는 광종의 정책이다.
  • 쌍기의 건의에 따른 과거제 시행은 광종의 업적이다.
문제 11
(가), (나)의 토지제도에 대한 설명으로 옳지 않은 것은?
(가) 경종 원년(976) 11월 …… 관품의 높고 낮음은 논하지 않고 다만 인품만 가지고 등급을 정하였다.
(나) 경기는 무릇 사방의 근본이니 마땅히 과전을 설치하여 사대부를 우대한다.
1(가) - 무인에 대한 차별대우가 사라졌다.
2(가) - 전지와 시지를 함께 지급하였다.
3(나) - 수신전, 휼양전 등이 마련되었다.
4(나) - 수조권을 지급하는 것이 원칙이었다.
5(가), (나) - 전직 관리에게도 토지를 지급하였다.
정답 및 해설

옳지 않은 것은 시정 전시과에서 무인 차별이 사라졌다는 설명이다.

(가)는 ‘인품’을 기준으로 삼은 경종의 시정 전시과, (나)는 ‘경기’에 과전을 설치한 과전법이다. 시정 전시과는 문반·무반·잡업을 구분해 차등을 두었고, 무인에 대한 차별이 이때 해소되었다고 볼 수 없다.

  • 전시과는 곡물을 거두는 전지와 땔감을 얻는 시지를 함께 지급하였다.
  • 과전법에는 관리의 유가족을 위한 수신전과 휼양전이 마련되었다.
  • 과전법은 토지 소유권이 아니라 수조권을 지급하는 것이 원칙이었다.
  • 시정 전시과와 과전법 모두 현직뿐 아니라 전직 관리에게도 토지를 지급하였다.
문제 12
임진왜란 당시의 사건들을 오래된 시기 순으로 옳게 나열한 것은?
ㄱ. 이순신이 이끄는 수군이 옥포에서 첫 승리를 거두었다.
ㄴ. 진주성이 함락되고 수많은 사람들이 살상되었다.
ㄷ. 권율이 행주산성에서 대승을 거두었다.
ㄹ. 평양성을 일본군에게서 탈환하였다.
1ㄱ - ㄴ - ㄷ - ㄹ
2ㄱ - ㄷ - ㄹ - ㄴ
3ㄱ - ㄹ - ㄷ - ㄴ
4ㄴ - ㄱ - ㄹ - ㄷ
5ㄴ - ㄹ - ㄱ - ㄷ
정답 및 해설

임진왜란의 순서는 옥포 해전 → 평양성 탈환 → 행주 대첩 → 진주성 함락이다.

개전 직후의 첫 해전 승리가 가장 앞서고, 나머지는 모두 1593년에 일어났다. 진주성 함락은 1592년의 진주 대첩과 구분되는 제2차 진주성 전투이다.

  • ㄱ: 이순신의 옥포 해전 승리는 1592년 5월이다.
  • ㄹ: 조·명 연합군의 평양성 탈환은 1593년 1월이다.
  • ㄷ: 권율의 행주 대첩은 1593년 2월이다.
  • ㄴ: 진주성 함락은 1593년 6월이다.
문제 13
(가)의 인물이 주장했을 구호로 옳지 않은 것은?
( 가 )선생의 생애
연도활동
1907국채보상 단연동맹지회 설립
1918상하이에서 신한 청년당 조직
1921고려 공산당에 가입
1944조선 건국 동맹 조직
1945조선 건국 준비 위원회 결성
1946좌우 합작 운동 주도
1947서울 혜화동 로터리에서 피격․사망
1한반도 분단을 막고 통일정부를 수립하자!
2나라 빚을 갚아 일본의 간섭에서 벗어나자!
3조선 사람은 조선 사람이 만든 물건을 쓰자!
4일제의 패망에 대비하여 건국을 준비하자!
5파리 강화 회의에 대표를 보내 일제의 침략상을 알리자!
정답 및 해설

(가)의 인물은 여운형이며, 그의 구호로 옳지 않은 것은 조선 사람이 만든 물건을 쓰자는 구호이다.

이 구호는 1920년대 조만식 등이 주도한 물산 장려 운동의 것으로, 연표의 활동과 연결되지 않는다. 단서는 ‘신한 청년당’, ‘조선 건국 동맹’, ‘좌우 합작 운동’, ‘혜화동’ 피격이다.

  • 분단을 막고 통일 정부를 세우자는 구호는 1946년 좌우 합작 운동과 이어진다.
  • 나라 빚을 갚자는 구호는 1907년 국채 보상 단연 동맹 활동과 이어진다.
  • 일제 패망에 대비해 건국을 준비하자는 구호는 1944년 조선 건국 동맹 조직과 이어진다.
  • 파리 강화 회의에 대표를 보내자는 구호는 1918년 신한 청년당 조직과 이어지며, 이 단체는 김규식을 파견하였다.
문제 14
조선 후기 상품 화폐 경제에 대한 설명으로 옳지 않은 것은?
1숙종 이후 전국적으로 유통된 동전은 교환 수단으로 뿐만 아니라 재산 축적의 수단으로 여겨져 동전의 부족 현상인 전황이 발생하기도 하였다.
2지방민의 교역 장소로 장시가 정기적으로 열렸으며, 보부상들이 장시들을 하나의 유통망으로 연결시키는 역할을 담당하였다.
317세기 중엽 이후 국경 지대를 중심으로 공적으로 허용된 개시가 열렸는데, 중강 개시, 회령 개시, 경원 개시, 동래 개시가 있었다.
4정조 때 신해통공을 통해 모든 시전이 가진 금난전권의 특권을 없애고 모든 상품의 자유로운 판매를 허용하였다.
5상업 자본가로 성장한 도매상인인 도고들은 자본을 바탕으로 상품을 독점하여 부를 축적하였다.
정답 및 해설

옳지 않은 것은 신해통공이 모든 시전의 금난전권을 없앴다는 설명이다.

정조의 신해통공(1791)은 육의전을 제외한 시전 상인의 금난전권을 폐지한 조치이다. 따라서 육의전의 특권은 이때 남아 있었다.

  • 숙종 이후 상평통보가 전국에 유통되었고 재산 축적 수단이 되면서 전황이 발생하였다.
  • 장시가 정기적으로 열렸고 보부상이 장시들을 하나의 유통망으로 이었다.
  • 17세기 중엽 이후 중강·회령·경원·동래 등지에서 공적으로 허용된 개시가 열렸다.
  • 도고는 자본을 바탕으로 상품을 독점해 부를 축적한 도매 상인이다.
문제 15
(가)와 (나) 시기 사이의 역사적 사실로 옳은 것은?
(가) 이제부터 청의 연호를 사용하지 않고, 개국 기년을 사용하도록 한다. 우리 조선이 건국된 해를 기준으로 삼아 연도를 표시하도록 하라.
(나) 다가오는 11월 17일을 양력 1월 1일로 새로 정할 것이다. 또 연호를 건양으로 다시 정할 것이니, 공사문서에 적용하도록 하라.
1아관파천이 일어났다.
2홍범 14조가 발표되었다.
3청일 전쟁이 시작되었다.
4영국이 거문도를 점령하였다.
5동학농민군이 제2차 봉기를 일으켰다.
문제 16
일제 시대 국학운동에 대한 사항으로 옳지 않은 것은?
1신채호는 역사를 ‘인류 사회의 아(我)와 비아(非我)의 투쟁’이라고 규정하고 민족주의 사학을 주장하였다.
2백남운은 마르크스주의 역사학에 입각하여 한국사의 발전 과정을 변증법적 역사발전 법칙에 따라 서술하였다.
3정인보는 ‘민족의 혼’을 강조하고, 저술을 통해 국가를 구성하고 있는 두 요소를 ‘혼’과 ‘백’이라고 하였다.
4문일평은 ‘조선심’을 강조하고 조선심의 결정체로서 ‘조선글’을 주장하였다.
5실증 사학자들은 랑케 사학을 수용하여 실증주의를 표방하고 진단학회를 설립하였다.
정답 및 해설

옳지 않은 것은 정인보가 ‘혼’과 ‘백’을 말했다는 설명이다.

정인보가 강조한 것은 ‘얼’이고, 국가를 구성하는 두 요소를 혼과 백으로 나눈 사람은 박은식이다.

  • 신채호는 역사를 ‘아(我)와 비아(非我)의 투쟁’으로 규정하였다.
  • 백남운은 마르크스주의 사학의 입장에서 한국사의 발전을 법칙적으로 서술하였다.
  • 문일평은 ‘조선심’을 강조하고 그 결정체로 ‘조선글’, 곧 한글을 내세웠다.
  • 이병도 등 실증 사학자들은 랑케 사학을 받아들이고 진단학회를 설립하였다.
문제 17
남북 관계에서 벌어진 다음 사건들을 오래된 시기 순으로 옳게 나열한 것은?
(가) 7·4 남북공동성명(나) 남북적십자 1차 회담
(다) 판문점 도끼 살인 사건(라) 북한 핵확산 금지조약 탈퇴
1(가) - (나) - (다) - (라)
2(가) - (다) - (나) - (라)
3(나) - (가) - (다) - (라)
4(나) - (가) - (라) - (다)
5(나) - (라) - (가) - (다)
정답 및 해설

순서는 7·4 남북 공동 성명 → 남북 적십자 1차 회담 → 판문점 도끼 살인 사건 → 북한의 NPT 탈퇴이다.

남북 적십자 회담은 1971년 예비 회담으로 시작했지만, 제1차 본회담은 공동 성명 이후인 1972년 8월 평양에서 열렸다.

  • (가): 7·4 남북 공동 성명은 1972년 7월이다.
  • (나): 남북 적십자 제1차 본회담은 1972년 8월이다.
  • (다): 판문점 도끼 살인 사건은 1976년 8월이다.
  • (라): 북한의 핵확산 금지 조약 탈퇴 선언은 1993년이다.
문제 18
다음 자료에 대한 설명으로 옳은 것은?
오라 총관 목극등(穆克登)이 황지를 받들고 변계를 조사한 결과 서쪽의 경계선은 압록강이고, 동쪽은 토문강이므로 분수령 상에 비를 세워 기록으로 삼는다.
1조선 후기에 폐4군을 복구하고 건립하였다.
2후일 간도 귀속 문제가 발생하는 원인이 되었다.
3일본이 임나일본부설의 근거로 이용하고 있다.
4고려가 여진을 쫓아내고 국경을 정한 비석이다.
5정도전이 요동정벌을 주장하는 계기가 되었다.
정답 및 해설

자료는 백두산 정계비(1712)이며, 후일 간도 귀속 문제의 원인이 되었다.

‘목극등’, ‘서쪽은 압록강, 동쪽은 토문강’이 단서이다. 숙종 때 조선과 청이 세운 비로, 19세기 후반 ‘토문강’의 해석을 두고 분쟁이 일어났다.

  • 폐4군 복구와는 관련이 없고, 청과의 경계를 정하려고 세운 비이다.
  • 일본이 임나일본부설의 근거로 이용하는 것은 광개토 대왕릉비이다.
  • 고려가 여진을 몰아낸 뒤의 일은 윤관의 동북 9성 축조로, 조선 숙종 때의 이 비와 다르다.
  • 정도전의 요동 정벌 주장은 조선 초 명과의 갈등에서 나온 것으로, 시기가 맞지 않는다.
문제 19
다음과 같은 위기를 타개하기 위하여 임시정부가 추진한 정책으로 옳은 것은?
민족 운동 전선이 이념과 노선의 차이로 분열된 상황에서 임시정부는 자금난에 시달려, 독립운동의 중추 역할을 감당하기 어렵게 되었다. 1920년대 후반에 안창호 등을 중심으로 민족유일당을 건설하자는 운동이 전개되었지만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하였다. 이 무렵 만보산 사건과 만주 사변이 일어났다.
1한인애국단을 조직하였다.
2국민대표회의를 소집하였다.
3연통제와 교통국을 조직하였다.
4파리강화회의에 대표를 파견하였다.
5주석제를 채택하고 한국독립당을 처음 결성하였다.
정답 및 해설

임시정부가 추진한 정책은 한인애국단 조직(1931)이다.

‘만보산 사건’과 ‘만주 사변’이 일어난 1931년 무렵의 침체를 타개하려고 김구가 조직하였고, 이봉창·윤봉길의 의거로 이어졌다.

  • 국민대표회의는 1923년에 열렸으므로 시기가 앞선다.
  • 연통제와 교통국은 1919년 임시정부 수립 직후의 조직이다.
  • 파리 강화 회의 대표 활동은 1919년의 일이다.
  • 한국 독립당 결성은 1930년, 주석제 채택은 1940년으로 이 위기의 타개책과 맞지 않는다.
문제 20
다음 포고령을 내린 세력에 대한 설명으로 옳은 것은?
제1조 북위 38도선 이남의 조선 영토와 조선 인민에 대한 통치의 모든 권한은 당분간 본관의 권한 하에 시행한다.
제2조 정부 등 모든 공공사업 기관에 종사하는 유급·무급 직원과 고용인, 그리고 기타 중요한 제반 사업에 종사하는 자는 별도의 명령이 있을 때까지 종래의 정상 기능과 업무를 수행할 것이며, 모든 기록 및 재산을 보호 보존하여야 한다.
1친일파 대다수를 처벌하였다.
2조선 건국 준비 위원회를 조직하였다.
3조선 인민 공화국의 권위를 인정하지 않았다.
4대한민국 임시정부를 공식 정부로 인정하였다.
5사회주의 세력과 연합하여 인민 위원회를 구성하였다.
정답 및 해설

포고령을 내린 세력은 미군정이며, 미군정은 조선 인민 공화국의 권위를 인정하지 않았다.

‘북위 38도선 이남’의 통치 권한을 자신이 행사한다는 내용은 1945년 9월 맥아더의 포고령 제1호이다. 미군정은 남한의 유일한 정부를 자처하며 다른 정부 조직을 부정하였다.

  • 미군정은 일제 관리를 상당수 유임시켰으므로 친일파 대다수 처벌과 맞지 않는다.
  • 조선 건국 준비 위원회는 여운형 등이 광복 직후 조직한 것이다.
  • 대한민국 임시정부도 인정하지 않아 요인들은 개인 자격으로 귀국하였다.
  • 사회주의 세력과 연합해 인민 위원회를 세운 것은 소련군이 주둔한 북한의 방식이고, 미군정은 남한의 인민 위원회를 부정하였다.
국회직 9급 한국사 기출문제모두CBT · moducbt.com
20년 1회차
총 20문항 · 객관식 · 정답·해설 포함
문제 1
<보기1>의 밑줄 친 ‘이 왕’의 업적으로 옳은 것만을 <보기2>에서 모두 고르면?
<보 기1>
이 왕의 정치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은 보법에 의한 군역제도의 개혁과 직전법의 실시에 의한 토지제도의 혁신이었다. 보법은 군역의 평준화에 따른 국방 강화에 목적이 있었고, 직전법은 관리들의 경제력을 약화시키는 대신 국가 재정을 강화하는 데 목적이 있었다.

<보 기2>
ㄱ.상서사에서 맡고 있던 인사권을 이조와 병조에 귀속시켜 6조의 기능을 강화하였다.
ㄴ.6조 판서들이 국왕에게 직접 보고하는 제도를 부활하여 왕권을 강화하였다.
ㄷ.문하부의 낭사를 사간원으로 독립시켜 언론 기능을 강화하고 대신들을 견제하도록 하였다.
ㄹ.국경 지대에서 시행되던 방어체제를 전국으로 확대하여 지역 중심 방어체제로 개편하였다.
1ㄱ, ㄴ
2ㄱ, ㄷ
3ㄴ, ㄷ
4ㄴ, ㄹ
5ㄷ, ㄹ
정답 및 해설

밑줄 친 ‘이 왕’은 세조이므로 옳은 것은 6조 직계제 부활과 진관 체제 확대를 고른 조합이다.

‘보법’에 의한 군역 개혁과 ‘직전법’ 실시는 모두 세조의 대표 정책이다. 각 지문을 판정하면 ㄱ·ㄷ은 태종, ㄴ·ㄹ은 세조의 업적이다.

  • ㄱ(X): 상서사의 인사권을 이조와 병조로 옮긴 것은 태종의 6조 강화 조치이다.
  • ㄴ(O): 6조 판서가 왕에게 직접 보고하는 6조 직계제는 태종 때 시행되었고, 세조가 이를 부활하였다.
  • ㄷ(X): 문하부 낭사를 사간원으로 독립시킨 것은 태종이다.
  • ㄹ(O): 세조는 국경 지대의 방어 체제를 전국으로 넓혀 지역 단위의 진관 체제를 확립하였다.
문제 2
(가)와 (나) 사이의 시기에 있었던 사실로 옳은 것은?
(가)김춘추가 무릎을 꿇고 “…… 만약 폐하께서 당의 군사를 빌려주어 흉악한 것들을 잘라내지 않는다면 …… 산과 바다 건너 행하는 조회도 바랄 수 없을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태종이 매우 옳다고 여겨서 군사의 출동을 허락하였다.
(나)당의 군사가 와서 매소성을 공격하니, 원술이 이를 듣고 죽음으로써 지난번의 치욕을 씻고자 하였다. 드디어 힘껏 싸워서 공을 세워 상을 받았다.
1대조영이 발해를 건국하였다.
2백제가 멸망하였다.
3신라가 대가야를 병합하였다.
4신라에서 녹읍이 폐지되었다.
5고구려가 살수에서 수의 군대를 격퇴하였다.
정답 및 해설

(가)와 (나) 사이의 사실은 백제의 멸망(660)이다.

(가)는 ‘김춘추’가 당 태종에게 군사를 청한 나당 동맹(648), (나)는 ‘매소성’ 전투(675)로 나당 전쟁 시기이다. 백제 멸망은 이 두 사건 사이에 있다.

  • 대조영의 발해 건국은 698년으로 (나) 이후이다.
  • 신라의 대가야 병합은 562년으로 (가) 이전이다.
  • 신라의 녹읍 폐지는 신문왕 때인 689년으로 (나) 이후이다.
  • 고구려의 살수 대첩은 612년으로 (가) 이전이다.
문제 3
다음과 같은 변화가 나타난 시기의 사실로 옳은 것은?
건국과 발전 과정에서 신라의 왕호는 여러 번 바뀐 것으로 알려져 있다. 특히, 4세기 무렵에는 이사금이라는 칭호가 마립간으로 바뀌었다.
1율령을 반포하고 불교를 공인하였다.
2국호를 신라로 바꾸고 주군제를 도입하였다.
3백제와 연합하여 고구려에게 빼앗긴 한강 유역을 되찾았다.
4독자적인 연호를 사용하여 자주국가로서의 위상을 높였다.
53성이 권력을 주고받던 시대가 끝나고 김씨 세습이 이루어졌다.
정답 및 해설

왕호가 마립간으로 바뀐 시기는 내물 마립간 무렵이며, 이때 김씨의 왕위 세습이 자리 잡았다.

4세기 신라는 박·석·김 3성이 왕위를 번갈아 잇던 단계를 끝내고, 내물 마립간 이후 김씨가 왕위를 독점하였다. 나머지 내용은 모두 6세기의 일이다.

  • 율령 반포와 불교 공인은 법흥왕의 업적이다.
  • 국호를 신라로 정하고 주군제를 도입한 것은 지증왕 때이다.
  • 백제와 연합해 한강 유역을 되찾은 것은 진흥왕 때이다.
  • 독자적 연호 ‘건원’을 처음 사용한 것은 법흥왕이다.
문제 4
다음과 같은 활동을 전개한 승려에 대한 설명으로 옳은 것은?
임진년(1232년) 여름 4월 8일 처음 보현도량(普賢道場)을 결성하고 법화삼매(法華三昧)를 수행하여, 극락정토에 왕생하기를 구하였는데, 모두 천태삼매의(天台三昧儀)를 그대로 따랐다. 오랫동안 법화참(法華懺)을 수행하고 전후에 권하여 발심시켜 이 경을 외우도록 하여 외운 자가 1000여 명이나 되었다.
1천태종을 창시하였다.
2돈오점수를 주장하였다.
3백련결사를 주도하였다.
4천태사교의를 저술하였다.
5유불일치설을 강조하였다.
정답 및 해설

지문의 승려는 요세이며, 그는 백련결사를 주도하였다.

‘임진년(1232년)’의 ‘보현도량’ 결성, ‘법화삼매’ 수행, 극락왕생 추구가 단서이다. 요세는 법화 신앙과 참회 수행을 바탕으로 강진 만덕사에서 결사를 이끌었다.

  • 천태종 창시는 대각국사 의천의 활동이다.
  • 돈오점수 주장은 보조국사 지눌의 사상이다.
  • 『천태사교의』 저술은 제관의 업적이다.
  • 유불일치설 강조는 지눌의 제자 혜심의 사상이다.
문제 5
다음 지문의 작가가 속한 붕당에 대한 설명으로 옳은 것은?
江湖(강호)애 病(병)이 깊퍼 竹林(듁님)의 누엇더니,
關東(관동) 八百里(팔ᄇᆡᆨ니)에 方面(방면)을 맛디시니,
어와 聖恩(셩은)이야 가디록 罔極(망극)ᄒᆞ다.
- 「관동별곡(關東別曲)」
1이황과 조식의 문인으로 이루어져 있다.
2이조전랑 자리를 두고 다툰 김효원을 추종하는 세력이다.
3광해군을 세자로 책봉하자고 건의한 사건으로 피해를 입었다.
4정여립 모반사건에 연루되어 많은 사람들이 실각하였다.
5선조가 사망하고 광해군이 즉위하자 실권을 장악하였다.
정답 및 해설

「관동별곡」의 작가는 정철이고 그가 속한 붕당은 서인이므로, 광해군 세자 책봉 건의 사건으로 피해를 입었다는 설명이 옳다.

이 일이 건저의 사건으로, 정철이 세자 책봉을 건의했다가 선조의 노여움을 사 유배되면서 서인이 큰 타격을 입었다.

  • 이황과 조식의 문인으로 이루어진 쪽은 동인이다.
  • 이조전랑 자리를 두고 다툰 김효원을 따른 세력은 동인이다.
  • 정여립 모반 사건으로 많은 사람이 실각한 쪽은 동인이다.
  • 광해군 즉위 후 실권을 장악한 세력은 북인이다.
문제 6
ㄱ∼ㄹ의 ‘이 책’이 편찬된 순서로 옳은 것은?
ㄱ.이 책은 단군 신화를 서술하면서 예맥, 부여, 옥저, 삼한, 삼국이 모두 단군의 후손임을 밝혀 놓았다.
ㄴ.이 책은 고려의 역사를 편년체와 강목체를 결합하여 서술한 것으로, 우리나라 최초의 강목체 사서로 평가된다.
ㄷ.이 책은 고구려 건국 영웅을 소재로 서사시를 지은 것으로, 고구려 전통을 계승하려는 의식이 강조되어 있다.
ㄹ.이 책은 고려 태조부터 숙종까지의 역사를 정리한 것으로, 그 가운데 국왕들의 업적에 대한 평가 부분이 지금 전하고 있다.
1ㄱ - ㄷ - ㄹ - ㄴ
2ㄱ - ㄹ - ㄴ - ㄷ
3ㄴ - ㄱ - ㄷ - ㄹ
4ㄷ - ㄱ - ㄴ - ㄹ
5ㄷ - ㄹ - ㄱ - ㄴ
정답 및 해설

편찬 순서는 ㄷ 『동명왕편』 → ㄱ 『제왕운기』 → ㄴ 『본조편년강목』 → ㄹ 『사략』이다.

네 책 모두 고려 시대 저술로, 지문의 단서로 책을 확정한 뒤 시기를 비교하면 된다.

  • ㄷ: 고구려 건국 영웅을 읊은 서사시는 이규보의 『동명왕편』으로, 명종 때인 1193년에 지어졌다.
  • ㄱ: 단군을 우리 역사의 시조로 서술한 책은 이승휴의 『제왕운기』로, 충렬왕 때인 1287년에 지어졌다.
  • ㄴ: 최초의 강목체 사서로 꼽히는 책은 민지의 『본조편년강목』으로, 충숙왕 때 편찬되었다.
  • ㄹ: 태조부터 숙종까지를 정리하고 사론 부분이 전하는 책은 이제현의 『사략』으로, 공민왕 때 저술되었다.
문제 7
(가), (나) 시기에 일어난 사건으로 옳은 것은?
모스크바 삼상회의에서 한국 문제에 관한 4개 항의 결의서를 채택하였다.
↓
(가)
↓
서울에서 제1차 미·소 공동위원회가 열렸으나 협의 대상을 둘러싼 이견으로 결렬되었다.
↓
(나)
↓
UN에서 인구 비례에 따른 남북한 총선거를 실시할 것을 결정하였다.
1(가)-미군이 진주하여 북위 38도선 이남에 군정을 선포하였다.
2(가)-주한 미국 육군 사령부는 국내 치안을 명분으로 남조선 국방 경비대를 창설하였다.
3(가)-이승만이 정읍에서 남한 단독 정부 수립을 주장하였다.
4(나)-조선 공산당 북조선 분국이 조직되어 책임비서로 김일성을 선출하였다.
5(나)-김구와 김규식 등이 통일정부 수립을 위한 남북 협상을 벌였다.
정답 및 해설

(가) 시기의 사건으로 옳은 것은 남조선 국방 경비대 창설(1946.1)이다.

기준 사건은 모스크바 삼상회의(1945.12), 제1차 미·소 공동 위원회 결렬(1946.5), UN 총회의 총선거 결의(1947.11)이다. 미군정은 삼상회의 직후인 1946년 1월 국방 경비대를 만들었으므로 (가)에 해당한다.

  • 미군의 남한 진주와 군정 선포는 1945년 9월로, 삼상회의 이전이다.
  • 이승만의 정읍 발언은 1946년 6월로, 제1차 미·소 공위 결렬 이후이므로 (나) 시기이다.
  • 조선 공산당 북조선 분국 조직과 김일성의 책임비서 선출은 1945년의 일로, (나)보다 훨씬 앞선다.
  • 김구·김규식의 남북 협상은 1948년 4월로, UN의 결정 이후이다.
문제 8
(가)∼(마)에 들어갈 내용으로 옳지 않은 것은?
연 도조 약 명주요내용
1876조·일 수호 조규(가)
1876조·일 무역 규칙(나)
1882조·청 상민 수륙 무역 장정(다)
1882조·미 수호통상 조약(라)
1883조·일 통상 장정(마)
1(가)-조선이 자주국임을 명시하였다.
2(나)-일본정부에 소속된 선박의 항세를 면제하였다.
3(다)-청의 북양대신과 조선 국왕은 대등한 권리를 갖는다고 규정하였다.
4(라)-거중조정의 원칙과 최혜국대우 조항을 규정하였다.
5(마)-일본 물품에 대한 관세를 폐지하였다.
정답 및 해설

옳지 않은 것은 조·일 통상 장정이 일본 물품의 관세를 폐지하였다는 설명이다.

1883년 조·일 통상 장정은 오히려 무관세 상태를 고쳐 관세를 설정하였고, 방곡령 규정과 최혜국 대우도 담았다.

  • 조·일 수호 조규는 조선을 자주국으로 명시해 청의 종주권을 부정하려 하였다.
  • 조·일 무역 규칙은 일본 정부 소속 선박의 항세를 면제하였다.
  • 조·청 상민 수륙 무역 장정은 청의 북양대신과 조선 국왕을 대등한 지위로 규정해 조선의 속방 지위를 드러냈다.
  • 조·미 수호 통상 조약은 거중조정과 최혜국 대우를 규정하였다.
문제 9
(가)와 (나) 사이에 있었던 사건으로 옳은 것은?
(가)대통령이 계엄령을 선포한 가운데 개헌에 반대하는 국회의원들을 감금하고 국회에서 대통령 직선제를 골자로 하는 개헌안을 통과시켰다.
(나)국회에서 개헌안에 대해 표결한 결과 재적 인원 203명의 2/3에 못 미치는 135명이 찬성하였으나 사사오입의 논리를 펴 억지로 개헌안을 통과시켰다.
1이승만이 여러 우익 단체를 모아서 자유당을 창당하였다.
2부통령 선거에서 민주당의 장면 후보가 당선되었다.
36.25 전쟁에 대한 휴전 협정이 체결되었다.
4대통령 후보였던 조봉암이 간첩 혐의로 사형에 처해졌다.
5김일성이 연안파를 숙청하고 주체를 강조하기 시작하였다.
정답 및 해설

(가)와 (나) 사이의 사건은 6·25 전쟁 휴전 협정 체결(1953)이다.

(가)는 계엄령 아래 대통령 직선제 개헌을 통과시킨 발췌 개헌(1952), (나)는 ‘사사오입’ 개헌(1954)이다. 휴전 협정은 두 개헌 사이인 1953년 7월에 체결되었다.

  • 자유당 창당은 1951년으로 (가) 이전이다.
  • 장면의 부통령 당선은 1956년 선거로 (나) 이후이다.
  • 조봉암의 사형은 1959년으로 (나) 이후이다.
  • 김일성의 연안파 숙청은 1956년 8월 종파 사건 이후의 일로 (나) 이후이다.
문제 10
다음과 같은 주장을 받아들인 국왕의 업적으로 옳은 것은?
◦불교를 믿는 것은 자신을 다스리는 근원이며, 유교를 행하는 것은 나라를 다스리는 근원을 구하는 것입니다. 자신을 다스리는 것은 내세에 복을 구하는 일이며, 나라를 다스리는 것은 오늘의 급한 일입니다.
◦풍속은 각기 그 토질에 따라 다른 것이므로 모든 것을 반드시 구차하게 중국과 같게 할 필요는 없습니다.
1청연각이라는 도서관 겸 학문연구소를 설치하였다.
2연등회와 팔관회를 성대하게 개최하였다.
3개국공신들을 숙청하고 왕권을 강화하였다.
4쌍기의 건의를 수용하여 과거제를 시행하였다.
5지방에 경학 박사와 의학 박사를 파견하였다.
정답 및 해설

지문은 최승로의 시무 28조이고 이를 받아들인 왕은 고려 성종이므로, 지방에 경학 박사와 의학 박사를 파견한 것이 옳다.

‘유교를 행하는 것은 나라를 다스리는 근원’이라는 유교 정치 이념 표방이 단서이다. 성종은 12목 설치와 함께 교육 진흥을 위해 박사를 지방에 보냈다.

  • 청연각 설치는 예종의 업적이다.
  • 성종은 최승로의 건의에 따라 연등회와 팔관회를 축소·폐지하는 쪽으로 움직였으므로 성대한 개최와 맞지 않는다.
  • 개국 공신 숙청을 통한 왕권 강화는 광종의 정책이다.
  • 쌍기의 건의에 따른 과거제 시행은 광종의 업적이다.
문제 11
(가), (나)의 토지제도에 대한 설명으로 옳지 않은 것은?
(가) 경종 원년(976) 11월 …… 관품의 높고 낮음은 논하지 않고 다만 인품만 가지고 등급을 정하였다.
(나) 경기는 무릇 사방의 근본이니 마땅히 과전을 설치하여 사대부를 우대한다.
1(가) - 무인에 대한 차별대우가 사라졌다.
2(가) - 전지와 시지를 함께 지급하였다.
3(나) - 수신전, 휼양전 등이 마련되었다.
4(나) - 수조권을 지급하는 것이 원칙이었다.
5(가), (나) - 전직 관리에게도 토지를 지급하였다.
정답 및 해설

옳지 않은 것은 시정 전시과에서 무인 차별이 사라졌다는 설명이다.

(가)는 ‘인품’을 기준으로 삼은 경종의 시정 전시과, (나)는 ‘경기’에 과전을 설치한 과전법이다. 시정 전시과는 문반·무반·잡업을 구분해 차등을 두었고, 무인에 대한 차별이 이때 해소되었다고 볼 수 없다.

  • 전시과는 곡물을 거두는 전지와 땔감을 얻는 시지를 함께 지급하였다.
  • 과전법에는 관리의 유가족을 위한 수신전과 휼양전이 마련되었다.
  • 과전법은 토지 소유권이 아니라 수조권을 지급하는 것이 원칙이었다.
  • 시정 전시과와 과전법 모두 현직뿐 아니라 전직 관리에게도 토지를 지급하였다.
문제 12
임진왜란 당시의 사건들을 오래된 시기 순으로 옳게 나열한 것은?
ㄱ. 이순신이 이끄는 수군이 옥포에서 첫 승리를 거두었다.
ㄴ. 진주성이 함락되고 수많은 사람들이 살상되었다.
ㄷ. 권율이 행주산성에서 대승을 거두었다.
ㄹ. 평양성을 일본군에게서 탈환하였다.
1ㄱ - ㄴ - ㄷ - ㄹ
2ㄱ - ㄷ - ㄹ - ㄴ
3ㄱ - ㄹ - ㄷ - ㄴ
4ㄴ - ㄱ - ㄹ - ㄷ
5ㄴ - ㄹ - ㄱ - ㄷ
정답 및 해설

임진왜란의 순서는 옥포 해전 → 평양성 탈환 → 행주 대첩 → 진주성 함락이다.

개전 직후의 첫 해전 승리가 가장 앞서고, 나머지는 모두 1593년에 일어났다. 진주성 함락은 1592년의 진주 대첩과 구분되는 제2차 진주성 전투이다.

  • ㄱ: 이순신의 옥포 해전 승리는 1592년 5월이다.
  • ㄹ: 조·명 연합군의 평양성 탈환은 1593년 1월이다.
  • ㄷ: 권율의 행주 대첩은 1593년 2월이다.
  • ㄴ: 진주성 함락은 1593년 6월이다.
문제 13
(가)의 인물이 주장했을 구호로 옳지 않은 것은?
( 가 )선생의 생애
연도활동
1907국채보상 단연동맹지회 설립
1918상하이에서 신한 청년당 조직
1921고려 공산당에 가입
1944조선 건국 동맹 조직
1945조선 건국 준비 위원회 결성
1946좌우 합작 운동 주도
1947서울 혜화동 로터리에서 피격․사망
1한반도 분단을 막고 통일정부를 수립하자!
2나라 빚을 갚아 일본의 간섭에서 벗어나자!
3조선 사람은 조선 사람이 만든 물건을 쓰자!
4일제의 패망에 대비하여 건국을 준비하자!
5파리 강화 회의에 대표를 보내 일제의 침략상을 알리자!
정답 및 해설

(가)의 인물은 여운형이며, 그의 구호로 옳지 않은 것은 조선 사람이 만든 물건을 쓰자는 구호이다.

이 구호는 1920년대 조만식 등이 주도한 물산 장려 운동의 것으로, 연표의 활동과 연결되지 않는다. 단서는 ‘신한 청년당’, ‘조선 건국 동맹’, ‘좌우 합작 운동’, ‘혜화동’ 피격이다.

  • 분단을 막고 통일 정부를 세우자는 구호는 1946년 좌우 합작 운동과 이어진다.
  • 나라 빚을 갚자는 구호는 1907년 국채 보상 단연 동맹 활동과 이어진다.
  • 일제 패망에 대비해 건국을 준비하자는 구호는 1944년 조선 건국 동맹 조직과 이어진다.
  • 파리 강화 회의에 대표를 보내자는 구호는 1918년 신한 청년당 조직과 이어지며, 이 단체는 김규식을 파견하였다.
문제 14
조선 후기 상품 화폐 경제에 대한 설명으로 옳지 않은 것은?
1숙종 이후 전국적으로 유통된 동전은 교환 수단으로 뿐만 아니라 재산 축적의 수단으로 여겨져 동전의 부족 현상인 전황이 발생하기도 하였다.
2지방민의 교역 장소로 장시가 정기적으로 열렸으며, 보부상들이 장시들을 하나의 유통망으로 연결시키는 역할을 담당하였다.
317세기 중엽 이후 국경 지대를 중심으로 공적으로 허용된 개시가 열렸는데, 중강 개시, 회령 개시, 경원 개시, 동래 개시가 있었다.
4정조 때 신해통공을 통해 모든 시전이 가진 금난전권의 특권을 없애고 모든 상품의 자유로운 판매를 허용하였다.
5상업 자본가로 성장한 도매상인인 도고들은 자본을 바탕으로 상품을 독점하여 부를 축적하였다.
정답 및 해설

옳지 않은 것은 신해통공이 모든 시전의 금난전권을 없앴다는 설명이다.

정조의 신해통공(1791)은 육의전을 제외한 시전 상인의 금난전권을 폐지한 조치이다. 따라서 육의전의 특권은 이때 남아 있었다.

  • 숙종 이후 상평통보가 전국에 유통되었고 재산 축적 수단이 되면서 전황이 발생하였다.
  • 장시가 정기적으로 열렸고 보부상이 장시들을 하나의 유통망으로 이었다.
  • 17세기 중엽 이후 중강·회령·경원·동래 등지에서 공적으로 허용된 개시가 열렸다.
  • 도고는 자본을 바탕으로 상품을 독점해 부를 축적한 도매 상인이다.
문제 15
(가)와 (나) 시기 사이의 역사적 사실로 옳은 것은?
(가) 이제부터 청의 연호를 사용하지 않고, 개국 기년을 사용하도록 한다. 우리 조선이 건국된 해를 기준으로 삼아 연도를 표시하도록 하라.
(나) 다가오는 11월 17일을 양력 1월 1일로 새로 정할 것이다. 또 연호를 건양으로 다시 정할 것이니, 공사문서에 적용하도록 하라.
1아관파천이 일어났다.
2홍범 14조가 발표되었다.
3청일 전쟁이 시작되었다.
4영국이 거문도를 점령하였다.
5동학농민군이 제2차 봉기를 일으켰다.
문제 16
일제 시대 국학운동에 대한 사항으로 옳지 않은 것은?
1신채호는 역사를 ‘인류 사회의 아(我)와 비아(非我)의 투쟁’이라고 규정하고 민족주의 사학을 주장하였다.
2백남운은 마르크스주의 역사학에 입각하여 한국사의 발전 과정을 변증법적 역사발전 법칙에 따라 서술하였다.
3정인보는 ‘민족의 혼’을 강조하고, 저술을 통해 국가를 구성하고 있는 두 요소를 ‘혼’과 ‘백’이라고 하였다.
4문일평은 ‘조선심’을 강조하고 조선심의 결정체로서 ‘조선글’을 주장하였다.
5실증 사학자들은 랑케 사학을 수용하여 실증주의를 표방하고 진단학회를 설립하였다.
정답 및 해설

옳지 않은 것은 정인보가 ‘혼’과 ‘백’을 말했다는 설명이다.

정인보가 강조한 것은 ‘얼’이고, 국가를 구성하는 두 요소를 혼과 백으로 나눈 사람은 박은식이다.

  • 신채호는 역사를 ‘아(我)와 비아(非我)의 투쟁’으로 규정하였다.
  • 백남운은 마르크스주의 사학의 입장에서 한국사의 발전을 법칙적으로 서술하였다.
  • 문일평은 ‘조선심’을 강조하고 그 결정체로 ‘조선글’, 곧 한글을 내세웠다.
  • 이병도 등 실증 사학자들은 랑케 사학을 받아들이고 진단학회를 설립하였다.
문제 17
남북 관계에서 벌어진 다음 사건들을 오래된 시기 순으로 옳게 나열한 것은?
(가) 7·4 남북공동성명(나) 남북적십자 1차 회담
(다) 판문점 도끼 살인 사건(라) 북한 핵확산 금지조약 탈퇴
1(가) - (나) - (다) - (라)
2(가) - (다) - (나) - (라)
3(나) - (가) - (다) - (라)
4(나) - (가) - (라) - (다)
5(나) - (라) - (가) - (다)
정답 및 해설

순서는 7·4 남북 공동 성명 → 남북 적십자 1차 회담 → 판문점 도끼 살인 사건 → 북한의 NPT 탈퇴이다.

남북 적십자 회담은 1971년 예비 회담으로 시작했지만, 제1차 본회담은 공동 성명 이후인 1972년 8월 평양에서 열렸다.

  • (가): 7·4 남북 공동 성명은 1972년 7월이다.
  • (나): 남북 적십자 제1차 본회담은 1972년 8월이다.
  • (다): 판문점 도끼 살인 사건은 1976년 8월이다.
  • (라): 북한의 핵확산 금지 조약 탈퇴 선언은 1993년이다.
문제 18
다음 자료에 대한 설명으로 옳은 것은?
오라 총관 목극등(穆克登)이 황지를 받들고 변계를 조사한 결과 서쪽의 경계선은 압록강이고, 동쪽은 토문강이므로 분수령 상에 비를 세워 기록으로 삼는다.
1조선 후기에 폐4군을 복구하고 건립하였다.
2후일 간도 귀속 문제가 발생하는 원인이 되었다.
3일본이 임나일본부설의 근거로 이용하고 있다.
4고려가 여진을 쫓아내고 국경을 정한 비석이다.
5정도전이 요동정벌을 주장하는 계기가 되었다.
정답 및 해설

자료는 백두산 정계비(1712)이며, 후일 간도 귀속 문제의 원인이 되었다.

‘목극등’, ‘서쪽은 압록강, 동쪽은 토문강’이 단서이다. 숙종 때 조선과 청이 세운 비로, 19세기 후반 ‘토문강’의 해석을 두고 분쟁이 일어났다.

  • 폐4군 복구와는 관련이 없고, 청과의 경계를 정하려고 세운 비이다.
  • 일본이 임나일본부설의 근거로 이용하는 것은 광개토 대왕릉비이다.
  • 고려가 여진을 몰아낸 뒤의 일은 윤관의 동북 9성 축조로, 조선 숙종 때의 이 비와 다르다.
  • 정도전의 요동 정벌 주장은 조선 초 명과의 갈등에서 나온 것으로, 시기가 맞지 않는다.
문제 19
다음과 같은 위기를 타개하기 위하여 임시정부가 추진한 정책으로 옳은 것은?
민족 운동 전선이 이념과 노선의 차이로 분열된 상황에서 임시정부는 자금난에 시달려, 독립운동의 중추 역할을 감당하기 어렵게 되었다. 1920년대 후반에 안창호 등을 중심으로 민족유일당을 건설하자는 운동이 전개되었지만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하였다. 이 무렵 만보산 사건과 만주 사변이 일어났다.
1한인애국단을 조직하였다.
2국민대표회의를 소집하였다.
3연통제와 교통국을 조직하였다.
4파리강화회의에 대표를 파견하였다.
5주석제를 채택하고 한국독립당을 처음 결성하였다.
정답 및 해설

임시정부가 추진한 정책은 한인애국단 조직(1931)이다.

‘만보산 사건’과 ‘만주 사변’이 일어난 1931년 무렵의 침체를 타개하려고 김구가 조직하였고, 이봉창·윤봉길의 의거로 이어졌다.

  • 국민대표회의는 1923년에 열렸으므로 시기가 앞선다.
  • 연통제와 교통국은 1919년 임시정부 수립 직후의 조직이다.
  • 파리 강화 회의 대표 활동은 1919년의 일이다.
  • 한국 독립당 결성은 1930년, 주석제 채택은 1940년으로 이 위기의 타개책과 맞지 않는다.
문제 20
다음 포고령을 내린 세력에 대한 설명으로 옳은 것은?
제1조 북위 38도선 이남의 조선 영토와 조선 인민에 대한 통치의 모든 권한은 당분간 본관의 권한 하에 시행한다.
제2조 정부 등 모든 공공사업 기관에 종사하는 유급·무급 직원과 고용인, 그리고 기타 중요한 제반 사업에 종사하는 자는 별도의 명령이 있을 때까지 종래의 정상 기능과 업무를 수행할 것이며, 모든 기록 및 재산을 보호 보존하여야 한다.
1친일파 대다수를 처벌하였다.
2조선 건국 준비 위원회를 조직하였다.
3조선 인민 공화국의 권위를 인정하지 않았다.
4대한민국 임시정부를 공식 정부로 인정하였다.
5사회주의 세력과 연합하여 인민 위원회를 구성하였다.
정답 및 해설

포고령을 내린 세력은 미군정이며, 미군정은 조선 인민 공화국의 권위를 인정하지 않았다.

‘북위 38도선 이남’의 통치 권한을 자신이 행사한다는 내용은 1945년 9월 맥아더의 포고령 제1호이다. 미군정은 남한의 유일한 정부를 자처하며 다른 정부 조직을 부정하였다.

  • 미군정은 일제 관리를 상당수 유임시켰으므로 친일파 대다수 처벌과 맞지 않는다.
  • 조선 건국 준비 위원회는 여운형 등이 광복 직후 조직한 것이다.
  • 대한민국 임시정부도 인정하지 않아 요인들은 개인 자격으로 귀국하였다.
  • 사회주의 세력과 연합해 인민 위원회를 세운 것은 소련군이 주둔한 북한의 방식이고, 미군정은 남한의 인민 위원회를 부정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