ㄱ. 조개 껍질을 이용하여 장식을 만들고 있다.
ㄴ. 고인돌 무덤을 만들기 위해 돌을 나르고 있다.
ㄷ. 모양을 낸 진흙을 불에 구워 그릇을 만들고 있다.
ㄹ. 도둑질한 자를 노비로 삼으라는 판결이 내려졌다.
B.C. 5000년경은 신석기 시대이므로 옳은 장면은 ㄱ과 ㄷ이다.
신석기인은 조개 껍질로 장식품을 만들었고(ㄱ), 진흙을 빚어 불에 구운 토기를 만들어 식량을 저장·조리했다(ㄷ).
- ㄴ. 고인돌은 계급이 발생한 청동기 시대의 무덤이므로 이 시기의 장면이 아니다.
- ㄹ. 도둑질한 자를 노비로 삼는 규정은 고조선의 8조법에 보이는 내용으로, 사유 재산과 신분이 성립한 뒤의 일이다.
◦큰 나라 사이에서 시달리다가 마침내 고구려에 복속되었다. 고구려는 이 나라 사람 가운데 세력이 큰 사람을 사자(使者)로 삼아 다스리게 하고, 고구려의 대가로 하여금 조세 수취를 책임지도록 했다.
-『삼국지』위서 동이전-
자료의 나라는 동예이며, 옳은 설명은 읍락사회의 공동체적 결속력이 강하였다는 내용이다.
‘책화’, ‘후, 읍군, 삼로’가 동예를 가리키는 단서다. 다른 읍락의 경계를 침범하면 노비와 소, 말로 배상하게 한 책화는 읍락 단위의 폐쇄적 결속을 보여 준다.
- 영고는 부여의 제천행사이고, 동예의 제천행사는 무천이다.
- 천군이라는 별도의 종교 지도자는 삼한의 특징이다.
- 책화의 벌로 노비를 내게 했으므로 천민층이 없었다는 설명은 자료와 어긋난다.
- 동예에는 대군장이 없었고 고구려 복속 뒤에도 토착 세력을 통한 간접 지배를 받았으므로, 지방관을 파견했다는 설명은 틀리다.
자료는 신라의 건국 설화이며, 옳은 설명은 돌무지덧널무덤에 시신과 부장품을 매장하였다는 내용이다.
‘나정’, ‘흰 말’, ‘보랏빛 알’은 박혁거세 탄생 설화의 단서다. 돌무지덧널무덤은 신라 고분의 대표 양식이다.
- 단궁과 과하마는 동예의 특산물이다.
- 전연의 침략으로 왕릉이 도굴된 나라는 고구려다.
- 고구려의 남진으로 웅진으로 천도한 나라는 백제다.
- 변한 지역에서 철기 문화를 바탕으로 출현한 나라는 가야다.
-『삼국유사』-
ㄱ. 6세기 후반 백제 왕을 지냈다.
ㄴ.지방에 22개의 담로를 설치하였다.
ㄷ.신라 왕실과 혼인관계를 맺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ㄹ. 당나라와 일본과의 친선을 강화하면서 국가의 부흥을 도모하였다.
(가)는 백제 무왕이며, 옳은 것은 ㄷ과 ㄹ이다.
왕흥사 기초를 세우다 승하한 아버지의 뒤를 이어 ‘미륵사’를 완성했다는 내용이 단서다. 서동 설화에 신라 선화공주와의 혼인이 전하고(ㄷ), 무왕은 당·일본과의 친선을 강화하며 국가 부흥을 꾀했다(ㄹ).
- ㄱ. 무왕은 7세기 전반에 재위한 왕이므로 6세기 후반의 왕이라는 설명은 틀리다.
- ㄴ. 지방의 22담로 설치는 무령왕의 업적이다.
옳지 않은 것은 고왕이 덩저우를 공격했다는 설명으로, 산둥반도의 덩저우를 공격한 왕은 무왕이다.
고왕은 건국자 대조영이며, 그 뒤를 이은 무왕 때 장문휴가 수군을 이끌고 덩저우를 공격했다.
- 발해의 중앙 관제가 당을 모방한 3성 6부라는 설명은 옳다.
- 문왕이 일본에 보낸 국서에서 ‘고려 국왕 대흠무’라 칭한 것은 고구려 계승 의식을 보여 주는 사실이다.
- 대조영이 고구려 유민과 말갈 집단을 이끌고 건국했다는 설명은 옳다.
- 선왕이 대부분의 말갈족을 복속시키고 지방제도를 정비했다는 설명은 옳다.
밑줄 친 ‘국왕’은 고려 성종이며, 옳은 정책은 전국의 주요 지역에 12목을 설치하고 목사를 파견한 것이다.
태조부터 경종까지 다섯 왕의 정치를 평가하고 시무책을 올렸다는 내용은 최승로의 시무 28조를 가리킨다. 성종은 이를 받아들여 지방관을 파견했다.
- 전지와 시지를 함께 주는 전시과를 처음 시행한 왕은 경종이다.
- 거란의 침략으로 불탄 실록을 다시 편찬한 것은 현종 때의 일이다.
- 과거 제도를 도입해 신구 세력 교체를 도모한 왕은 광종이다.
- 『정계』와 『계백료서』를 지은 왕은 태조다.
(나)김윤후는…몽골군이 이르자 처인성으로 난을 피하였는데, 몽골의 장수 살리타가 와서 성을 공격하므로 그를 사살하였다.
-『고려사』-
(가)와 (나) 사이의 사실은 이자겸이 금의 사대 요구를 받아들인 일이다.
(가)는 별무반을 앞세운 윤관의 여진 정벌과 동북 9성 축조(1107년 무렵), (나)는 김윤후가 처인성에서 살리타를 사살한 일(1232년)이다. 이자겸의 금 사대 수용은 1126년이므로 이 사이에 든다.
- 광덕, 준풍 연호 사용은 10세기 광종 때로 (가)보다 앞선다.
- 홍건적 침입으로 공민왕이 안동까지 피난한 일은 14세기로 (나)보다 뒤다.
- 서희의 강동 6주 확보는 993년으로 (가)보다 앞선다.
- 삼별초의 대몽 항쟁은 개경 환도가 결정된 1270년 이후로 (나)보다 뒤다.
-『조선경국전』-
자료의 주장에 근거한 정책은 경연의 실시다.
『조선경국전』은 정도전의 저술로, 임금의 자질이 한결같지 않으니 신하가 임금을 바로잡아야 한다는 주장을 담고 있다. 경연은 신하가 임금에게 학문과 정사를 강론해 임금을 올바르게 이끄는 제도다.
- 자료는 임금을 바로잡자는 것이지 군주제를 없애자는 것이 아니므로 군주제 타파는 맞지 않다.
- 직전법은 현직 관리에게 수조지를 지급한 토지 제도로 자료의 주장과 무관하다.
- 호포제는 양반에게도 군포를 걷게 한 군역 제도로 자료의 주장과 무관하다.
- 6조 직계제는 왕이 6조를 직접 장악하는 왕권 강화책으로, 신하의 견제를 강조한 자료와 방향이 반대다.
(가) 시기의 사실이 아닌 것은 미국에 보빙사를 파견한 일이다.
강화도 조약은 1876년, 임오군란은 1882년이다. 보빙사는 임오군란 뒤인 1883년에 파견되었으므로 (가) 시기를 벗어난다.
- 5군영을 무위영·장어영의 2영으로 개편한 것은 1881년의 일로 (가) 시기에 든다.
- 『조선책략』은 1880년 김홍집이 들여와 소개했으므로 (가) 시기에 든다.
- 통리기무아문 설치는 1880년의 일로 (가) 시기에 든다.
- 영선사 파견은 1881년의 일로 (가) 시기에 든다.
ㄱ. 법적으로 규정된 신분이었다.
ㄴ. 전현직 문반 관직자들로 제한되었다.
ㄷ. 유향소를 통해 향촌사회에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었다.
ㄹ. 향안(鄕案) 입록을 두고 향촌 사회에서 서로 다투기도 하였다.
(가)는 양반이며, 옳은 것은 ㄷ과 ㄹ이다.
‘문과의 홍패’, ‘진사’, 농사나 장사 없이 마을 사람을 부리는 모습은 박지원의 『양반전』에 묘사된 양반의 특권이다. 양반은 유향소를 통해 향촌에 영향력을 행사했고(ㄷ), 향안 입록을 둘러싸고 서로 다투기도 했다(ㄹ).
- ㄱ. 법제상 신분은 양인과 천인으로 나뉘었고, 양반은 법으로 규정된 신분이 아니라 사회적으로 형성된 신분이었다.
- ㄴ. 양반은 문반에 한정되지 않고 문무 양반과 그 가족·가문까지 포함하는 지배층으로 굳어졌다.
자료의 사회 운동은 형평 운동이며, 옳은 설명은 진주에서 시작되어 전국으로 확대되었다는 내용이다.
‘계급을 타파’, ‘모욕적 칭호를 폐지’, ‘본 사’가 단서로, 백정 차별 철폐를 내건 조선 형평사의 취지문이다. 형평사는 1923년 진주에서 창립되었다.
- 발단이 된 것은 서얼 차별이 아니라 백정에 대한 차별이다.
- 근우회는 여성 운동 단체로 형평 운동이 사상적 기반이 된 것이 아니다.
- 민립대학 설립 운동은 고등 교육 기관 설립을 위한 실력 양성 운동으로 형평 운동과 배경이 다르다.
- 조선 소년군은 소년 운동의 흐름에서 창설된 것으로 형평 운동의 확대가 아니다.
옳은 설명은 조선 초에 승과 시험제도를 실시하고 승려들에게 도첩을 발급했다는 내용이다.
조선은 초기에 승과로 승려를 선발하면서 도첩제로 출가를 통제했다.
- 삼국 가운데 불교를 가장 먼저 수용한 나라는 백제가 아니라 소수림왕 때의 고구려다.
- 제가회의와 화백회의는 귀족 합의 전통에서 나온 제도로 불교가 사상적 배경이 된 것이 아니다.
- 부석사에서 화엄 사상을 펴며 화엄종을 연 인물은 원효가 아니라 의상이다.
- 광종 때 균여는 교종을 화엄종 중심으로 정리했고, 교종과 선종을 아우르는 통합은 뒤에 의천이 천태종으로 시도했다.
(나) 토지 소유를 제한하는 법령을 세우십시오. … 토지 소유를 제한하면 겸병한 자가 없어지고, 겸병한 자가 없어지면 산업이 균등하게 될 것입니다. 산업이 균등하게 된 후에야 백성이 모두 안정되어 각기 제 토지를 경작하게 되고, 근면한 사람과 나태한 사람의 구별이 드러나게 될 것입니다.
(가)는 이익, (나)는 박지원의 토지 개혁론이며, 옳은 설명은 (나)의 인물이 중국에 다녀온 경험이 있다는 내용이다.
(가)는 ‘영업전’을 정해 매매를 제한하는 이익의 한전론이고, (나)는 ‘토지 소유를 제한’하자는 박지원의 한전론이다. 박지원은 사행단을 따라 청을 다녀와 『열하일기』를 남겼다.
- 이익은 서학을 연구했으나 천주교를 수용했다고 볼 수 없으며, 신앙으로 수용한 것은 그의 문하 일부다.
- 유배지에서 실학을 집대성한 인물은 정약용이다.
- 문답 형식의 과학사상서 『의산문답』을 쓴 인물은 홍대용이다.
- 이익은 근기 남인, 박지원은 노론 출신의 북학파로 학맥이 달라 서로 교류하며 개혁안을 발전시켰다고 볼 수 없다.
둘째, ‘유엔’ 헌장을 준수하고 국제협약을 충실히 이행할 것이며 미국을 위시한 자유우방과의 유대를 더욱 공고히 한다.
…
다섯째, 민족의 숙원인 국토통일을 위하여 공산주의와 대결할 수 있는 실력 배양에 전력을 집중한다.
옳지 않은 것은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를 설치하고 언론매체를 통폐합했다는 설명이다.
‘반공을 국시의 제1의’로 삼는다는 성명은 5·16 군사 정변 세력의 혁명 공약으로, 대상은 박정희를 중심으로 한 군사 정권이다.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와 언론 통폐합은 1980년 신군부의 조치다.
- 한일회담 타결 추진은 군사 정권과 뒤이은 박정희 정부가 추진한 일이다.
- 경제개발 5개년계획은 이 정권이 추진한 정책이다.
- 중앙정보부는 5·16 직후 창설되어 권력 기반이 되었다.
- 사회정화를 명분으로 폭력배를 대거 검거한 것도 5·16 직후의 조치다.
밑줄 친 ‘왕’은 정조이며, 재위 시기의 사실은 『대전통편』의 편찬이다.
‘패관잡기’, ‘소품’을 금하고 ‘남공철’을 문책한 내용은 정조의 문체 반정이다. 『대전통편』은 정조 때 법전을 재정리한 통일 법전이다.
- 『만기요람』은 순조 때 편찬되었다.
- 『경국대전』은 성종 때 완성·반포되었다.
- 『국조오례의』는 성종 때 완성되었다.
- 『동국여지승람』은 성종 때 편찬되었다.
밑줄 친 ‘의병’은 을미의병이며, 옳은 설명은 위정 척사론을 계승한 유생들이 주도하였다는 내용이다.
‘국모의 원수’는 을미사변, ‘머리털을 풀 베듯이 베어 버리니’는 단발령을 가리킨다. 을미의병은 유인석 등 척사 계열 유생이 이끌었다.
- 해산 군인과 합세해 전력을 강화한 것은 군대 해산 뒤의 정미의병이다.
- 각국 영사관에 통문을 보내 외교 활동을 벌인 것은 정미의병 시기의 13도 창의군이다.
- ‘시일야방성대곡’은 을사늑약에 항의한 논설로 을사의병 시기의 일이다.
- 서울 진공 작전은 정미의병 시기 13도 창의군이 시도했다.
ㄴ. 농지개혁법 공포
ㄷ. 금융실명제 실시
ㄹ. 7.4 남북공동성명
ㅁ. 남북기본합의서 채택
시기 순서는 ㄴ→ㄹ→ㄱ→ㅁ→ㄷ이다.
농지개혁법 공포(1949) → 7.4 남북공동성명(1972) → 6월 민주 항쟁(1987) → 남북기본합의서 채택(1991) → 금융실명제 실시(1993) 순이다.
- ㄴ→ㄱ→ㅁ→ㄹ→ㄷ: 7.4 남북공동성명이 6월 민주 항쟁과 남북기본합의서보다 앞서므로 틀리다.
- ㄴ→ㄷ→ㄹ→ㄱ→ㅁ: 금융실명제가 가장 늦은 사건인데 두 번째에 놓였으므로 틀리다.
- ㄹ→ㄴ→ㄷ→ㅁ→ㄱ: 농지개혁법 공포가 7.4 남북공동성명보다 앞서므로 틀리다.
- ㄹ→ㅁ→ㄱ→ㄴ→ㄷ: 농지개혁법 공포가 가장 이른 사건인데 네 번째에 놓였으므로 틀리다.
옳지 않은 것은 이종휘의 『동사』가 의병 경험을 살려 애국 명장을 다루었다는 설명이다.
이종휘는 18세기 학자로 『동사』에서 고구려 등 고대사를 중시했다. 의병 경험을 살려 역대 명장의 활약을 강조한 역사서로는 오운의 『동사찬요』가 꼽힌다.
- 한백겸이 『동국지리지』에서 고대 지명을 새롭게 고증했다는 설명은 옳다.
- 홍여하가 기자-마한-신라로 이어지는 정통론을 내세웠다는 설명은 옳다.
- 조정이 『동사보유』에 옛 기록의 신화와 전설을 다수 수록했다는 설명은 옳다.
- 한치윤이 『해동역사』에서 500여 종의 중국, 일본 자료를 참고했다는 설명은 옳다.
-『고려사』-
밑줄 친 ‘왕’은 고려 인종이며, 옳은 설명은 김부식으로 하여금 『삼국사기』를 편찬토록 한 것이다.
‘개경의 지세가 쇠퇴’했다며 ‘서경’ 행차를 청한 것은 묘청 세력의 서경 천도 주장이다. 『삼국사기』는 인종 때 왕명으로 편찬되었다.
- 5도와 양계의 지방 제도는 인종 이전인 고려 전기에 정비되었다.
- 정동행성 이문소를 폐지한 왕은 공민왕이다.
- 압록강과 도련포에 걸친 천리장성은 인종 이전인 덕종~정종 때 쌓았다.
- 취민유도 원칙을 내세운 왕은 태조다.
2. 우리는 공산 독재는 물론 자본가와 부패 분자의 독재도 이를 배격하고 진정한 민주주의 체제를 확립하여 책임 있는 혁신 정치의 실현을 기한다.
…
5. 우리는 교육체계를 혁신하여 점진적으로 국가보장제를 수립하고, 민족적 새 문화의 창조로써 세계 문화에 기여를 기한다.
ㄱ. 대중의 자각과 단결을 강조했다.
ㄴ. 평화적 방식에 의한 조국 통일을 주장했다.
ㄷ. 민생 안정을 내세워 「농어촌고리채정리법」을 제정했다.
ㄹ. 자본주의와 공산주의를 모두 비판하며 대안으로 일민주의를 제시했다.
강령을 발표한 정당은 진보당(조봉암)이며, 옳은 것은 ㄱ과 ㄴ이다.
‘원자력 혁명’, 공산 독재와 ‘자본가와 부패 분자의 독재’ 배격, ‘혁신 정치’가 단서다. 진보당은 피해 대중의 자각과 단결을 강조했고(ㄱ), 조봉암은 평화 통일론을 내세웠다(ㄴ).
- ㄷ. 「농어촌고리채정리법」은 5·16 군사 정변 뒤 군사 정부가 제정했다.
- ㄹ. 일민주의는 이승만 정권이 내세운 이념으로 진보당과 무관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