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인돌’과 ‘민무늬토기’가 단서이므로 이 시대는 청동기 시대이고, 반달형 돌칼을 썼다는 설명이 옳다.
청동기 시대에는 농경이 확대되어, 곡식의 이삭을 따는 도구로 반달 모양의 돌칼이 널리 쓰였다.
- 동굴이나 바위 그늘에서 생활한 것은 이동 생활을 하던 구석기 시대의 모습이다.
- 방추(가락바퀴)로 실을 뽑아 옷감을 짜기 시작한 것은 신석기 시대이다.
- 순장 풍습은 문헌상 부여 등 철기 문화 위에 성립한 초기 국가에서 전해진다.
- 빗살무늬 토기는 신석기 시대를 대표하는 토기이다.
- 『삼국지』 위서 동이전 -
‘살인한 자는 죽이고 그 가족은 노비로 삼는다’, ‘열두 배로 갚으며’가 단서이므로 이 나라는 부여이고, 호민과 하호가 있었다는 설명이 옳다.
부여의 4조목 법과 1책 12법은 『삼국지』 위서 동이전에 전한다. 부여의 읍락에는 호민이 있었고, 하호는 그 아래에서 노복처럼 지내는 피지배층이었다.
- 천군이 제사를 주관한 것은 삼한의 풍습이다.
- 한 무제의 침략으로 멸망한 나라는 고조선이다.
- 호랑이를 신으로 섬긴 것은 동예의 풍습이다.
- 국동대혈에서 제사를 지낸 것은 고구려의 동맹과 관련된다.
ㄴ. 광개토왕릉비
ㄷ. 관촉사 석조 미륵보살 입상
ㄹ. 정혜공주묘
제작 순서는 ㄴ→ㄱ→ㄹ→ㄷ으로, 고구려·신라·발해·고려의 순이다.
각 문화유산의 시기는 다음과 같다. 5세기의 비석이 가장 앞서고, 고려 시대의 불상이 가장 뒤이다.
- ㄴ. 광개토왕릉비: 고구려 장수왕 때인 5세기 초에 세웠다.
- ㄱ. 첨성대: 신라 선덕 여왕 때인 7세기에 만들었다.
- ㄹ. 정혜공주묘: 발해 문왕의 딸 무덤으로 8세기 후반에 조성되었다.
- ㄷ. 관촉사 석조 미륵보살 입상: 고려 시대 초기의 불상이다.
따라서 ㄱ이나 ㄷ으로 시작하는 배열과 ㄷ이 ㄹ보다 앞서는 배열은 모두 틀리다.
옳지 않은 것은 등급별 지급 액수가 늘어났다는 설명이다. 전시과는 개정을 거듭하면서 지급 액수가 오히려 줄어들었다.
시정 전시과, 개정 전시과를 거쳐 문종 때 경정 전시과에 이르는 동안 관료 수가 늘고 토지가 부족해져 지급 규모가 축소되는 흐름을 보였다.
- 지급 토지의 권리가 소유권이 아닌 수조권이었다는 설명은 옳다.
- 농지인 전지와 땔감을 얻는 시지를 함께 지급했다는 설명은 옳다.
- 5품 이상 관리에게 세습이 허용된 공음전을 준 경우가 있었다는 설명은 옳다.
- 수조지를 받은 사람이 퇴임하면 반납하는 것이 원칙이었다는 설명은 옳다.
- 정하상, 『상재상서』 -
‘죽은 사람 앞에 술과 음식을 차려 놓는 것’을 금한다는 내용과 정하상의 『상재상서』로 보아 ㉠은 천주교이고, 황사영 백서 사건으로 심한 탄압을 받았다는 설명이 옳다.
신유박해 때 황사영이 베이징의 주교에게 외국 군대의 지원 등을 요청하는 백서를 보내려다 발각되면서 천주교 탄압이 더욱 거세졌다.
- 『동경대전』을 기본 경전으로 삼은 것은 동학이다.
- 『주자가례』에 따른 의례는 성리학의 것으로, 천주교는 제사 의례를 거부해 유교 윤리와 충돌하였다.
- 천주교의 포교가 사실상 허용된 계기는 갑오개혁이 아니라 1886년 조불 수호 통상 조약이다.
- 1862년 임술 농민 봉기는 삼정의 문란 등 수탈에 맞선 항쟁으로, 천주교가 사상적 뒷받침이 된 것이 아니다.
‘천자란 무릇 군중이 밀어서 그 자리에 오른 것’이라는 주장은 정약용의 「탕론」이고, 그의 글로는 여전론을 담은 내용이 옳다.
정약용은 「전론」에서 30호 정도를 1여로 묶어 토지를 공동으로 경작하고 노동량에 따라 수확을 나누는 방안을 제시하였다.
- 한 호의 영업전을 정해 두자는 글은 이익의 한전론에 해당한다.
- 재물을 샘에 비유해 소비의 필요성을 강조한 글은 박제가의 『북학의』이다.
- 지구의 자전을 논한 글은 홍대용의 『의산문답』이다.
- 단군·기자·마한으로 이어지는 정통을 밝힌 글은 안정복의 『동사강목』이다.
ㄴ. 공양왕 즉위
ㄷ. 원으로부터 쌍성총관부 탈환
ㄹ. 과전법 공포
사건의 순서는 ㄷ→ㄱ→ㄴ→ㄹ이다. 공민왕의 반원 개혁에서 시작해 위화도 회군을 거쳐 고려 말 개혁으로 이어진다.
각 사건의 연도는 다음과 같다. 쌍성총관부 탈환이 가장 앞서고, 과전법 공포가 가장 뒤이다.
- ㄷ. 쌍성총관부 탈환: 1356년 공민왕 때이다.
- ㄱ. 4불가론 건의: 1388년 요동 정벌 논의 때이다.
- ㄴ. 공양왕 즉위: 1389년 창왕 폐위 뒤이다.
- ㄹ. 과전법 공포: 1391년 공양왕 때이다.
따라서 ㄷ으로 시작하지 않는 배열은 모두 틀리다.
나그네 마음은 어찌하여 다시 긴 한숨인가.
이번 원정은 심하(深河)의 전쟁과 달라
김공(金公)*이 죽어 돌아오지 못함이 오히려 부럽도다.
-신류 장군이 전쟁 후에 지은 시-
*김공(金公): 강홍립과 함께 심하 전투에 참여했다가 목숨을 잃은 김응하(1580~1619)를 일컫는다.
‘신류 장군’이 나선 ‘원정’은 효종 때의 나선 정벌이고, 청의 요구로 조총 부대가 동원되었다는 설명이 옳다.
러시아 세력이 흑룡강 방면으로 내려오자 청이 조선에 원병을 요청했고, 조선은 조총 부대를 파견하였다. 시의 ‘심하 전쟁’은 광해군 때의 출병으로 비교 대상일 뿐이다.
- 4군과 6진의 개척은 세종 때 여진을 몰아낸 일이다.
- 삼전도에서 인조가 항복한 것은 병자호란 때이다.
- 임경업이 백마산성에서 항전한 것은 병자호란 때이다.
- 조명 연합군이 평양에서 일본군을 격퇴한 것은 임진왜란 때이다.
- 『고려사』 -
‘소손녕’과 ‘서희’가 단서이므로 이 화의는 성종 때 거란 1차 침입 당시의 서희의 외교 담판이고, 압록강 인근까지 영토가 확장되었다는 설명이 옳다.
담판의 결과 고려는 거란과의 교류를 약속하는 대신 압록강 동쪽의 강동 6주를 확보하였다.
- 천리장성 축조는 거란의 침입을 모두 물리친 뒤 덕종 때 시작되었다.
- 귀주에서 거란군을 격파한 것은 3차 침입 때 강감찬의 승리이다.
- 거란이 낙타 50필을 보내온 것은 태조 때의 일로, 고려는 이를 거절하였다(만부교 사건).
- 내원성 축조는 거란이 고려를 견제한 움직임으로, 고려가 강동 6주를 얻은 이 화의의 결과가 아니다.
- 『삼국사기』 -
원광에게 ‘걸사표’를 짓게 한 왕은 신라 진평왕이고 수나라에 정벌을 청한 대상이므로 ㉠은 고구려이며, 『신집』이 있었다는 설명이 옳다.
고구려 영양왕 때 이문진이 옛 역사서를 간추려 『신집』을 편찬하였다.
- 단양 적성비를 세운 것은 신라 진흥왕이다.
- 황초령·북한산 순수비를 세운 것은 신라 진흥왕이다.
- 평양성을 공격해 고국원왕을 전사시킨 것은 백제 근초고왕이다.
- 사비로 천도하고 국호를 남부여로 바꾼 것은 백제 성왕이다.
- 『고려사』 -
소금 전매와 ‘의염창’이 단서이므로 이 왕은 각염법을 시행한 충선왕이고, 만권당을 설치했다는 설명이 옳다.
충선왕은 원의 수도 연경에 만권당을 세워 고려와 원의 학자들이 교류하게 하였다.
- 광덕, 준풍의 연호를 쓴 것은 광종이다.
- 급전도감을 두고 녹과전을 지급한 것은 원종 때이다.
- 신돈을 등용하고 전민변정도감을 설치한 것은 공민왕이다.
- 전국에 12목을 두고 지방관을 파견한 것은 성종이다.
‘김사용, 우군칙, 김창시’와 ‘정주성’이 단서이므로 이 사건은 1811년 홍경래의 난이고, 서북 지방 차별 타파를 내세웠다는 설명이 옳다.
순조 때 평안도 지역민은 관직 진출 차별과 세도 정치의 수탈에 불만이 컸고, 이를 명분으로 봉기하였다.
- ‘임술민란’은 1862년 진주 등지에서 일어난 농민 봉기를 가리킨다.
- 명화적은 횃불을 들고 약탈하던 도적 무리로, 이 봉기가 그 활동을 계승한 것은 아니다.
- 교조 신원 요구는 동학교도의 운동이다.
- 삼정이정청 설치의 계기는 1862년 임술 농민 봉기이다.
- 이중환, 『택리지』 -
붕당끼리 ‘서로 역적이란 이름으로 모함’하는 상황의 배경으로는 경신환국 이후 특정 붕당의 득세가 강해진 것이 옳다.
숙종 때 경신환국 이후 환국이 거듭되면서 붕당 사이의 공존이 무너지고 일당 전제의 경향이 나타났다. 이 과정에서 서인이 노론과 소론으로 갈라져 사료의 ‘삼색’ 구도가 이루어졌다.
- 비변사는 임진왜란 이후 권한이 오히려 커졌으므로 사료의 배경이 아니다.
- 외척 가문의 권력 독점은 19세기 세도 정치의 모습이다.
- 탕평책은 이러한 붕당 대립을 완화하려고 시행한 대책이다.
- 기축옥사와 건저의 사건은 동인이 남인과 북인으로 갈라진 선조 때의 일로, 노론·소론이 나타나기 전이다.
-「존주론」-
* 존주(尊周): 문명화된 중화 ** 이적(夷狄): 오랑캐
청의 문물이라도 백성에게 이로우면 받아들이자는 「존주론」의 주장은 북학론이며, 이를 편 인물은 박제가이고 『북학의』를 저술했다는 설명이 옳다.
‘오랑캐에게서 나왔다 하더라도 성인은 장차 취할 것’이라는 대목이 청 문물 수용을 주장하는 북학파의 입장을 보여 준다.
- 지전설을 제기한 인물로는 김석문, 홍대용 등이 있다.
- 여전론을 제안한 인물은 정약용이다.
- 위정척사운동은 19세기 이항로, 최익현 등 보수 유학자들이 전개하였다.
- 화폐 폐지를 주장한 인물은 이익으로, 박제가는 유통과 소비를 중시하였다.
(나)만주사변을 일으킨 일제는 전쟁 물자의 효율적 생산과 안전한 수송을 위하여 조선 공업화를 추진하기 시작하였다.
(가)는 1910년 회사령 공포, (나)는 1931년 만주사변 이후의 조선 공업화이므로, 그 사이의 사실은 1920년대의 물산장려운동이다.
물산장려운동은 평양에서 시작해 조선 물산 장려회를 중심으로 전국으로 퍼진 민족 자본 육성 운동이다.
- 국채보상운동은 1907년으로 (가) 이전이다.
- 학도지원병제는 1943년 실시되어 (나) 이후이다.
-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광복군 결성은 1940년으로 (나) 이후이다.
- 조선의용대 결성은 1938년으로 (나) 이후이다.
- 『황성신문』, 1904. 7. 23. -
1904년 ‘일본 공사’의 요구에 맞서 국토를 타국에 넘길 수 없다고 주장한 단체는 보안회이고, 외국 공사관에 문서를 보내 규탄했다는 설명이 옳다.
보안회는 일본의 황무지 개간권 요구에 맞서 외국 공사관에 통문을 돌리고 반대 운동을 벌여 요구를 철회시켰다.
- 민족 유일당 운동은 1920년대 후반에 전개되었다.
- 토지조사사업은 국권 피탈 전후 일제가 벌인 사업으로, 보안회의 활동 시기와 맞지 않는다.
- 양전 사업과 지계 발급은 대한제국 정부의 광무개혁 사업이다.
- 국채를 갚아 경제적 간섭에서 벗어나려 한 것은 1907년 국채보상운동이다.
- 『삼국사기』 -
(나) 역적의 우두머리 흠돌, 흥원, 진공 등은 지위가 재능으로 오른 것이 아니고 관직이 실로 은혜로써 오른 것임에도 불구하고, 처음부터 끝까지 근신하여 부귀를 보전하지 못하였다. …… 지금 이미 요망한 무리들이 말끔하게 제거되어 먼 곳이나 가까운 곳 모두에 걱정거리가 없게 되었으니, 불러 모은 군사와 말들을 마땅히 신속하게 돌려보내라.
- 『삼국사기』 -
(가)는 영양왕 즉위 초 온달의 출정으로 6세기 말이고, (나)는 ‘흠돌’의 난을 진압한 신문왕 즉위년으로 681년이므로, 그 사이의 사실은 살수 대첩이다.
을지문덕의 살수 대첩은 612년으로, 두 기준 사건의 사이에 들어간다.
- 진흥왕의 북한산 순수비는 신라가 한강 유역을 차지한 뒤의 6세기 중후반 일로, 온달의 출정보다 앞선다.
- 장문휴의 등주 공격은 732년 발해 무왕 때로 (나) 이후이다.
- 장수왕의 평양 천도는 427년으로 (가) 이전이다.
- 성왕의 전사는 554년 관산성 전투로 (가) 이전이다.
| 구분 | 개헌 연도 | 주요 내용 |
| (가) | 1962 | 대통령 직선제 시행, 헌법 개정 시 국회 의결을 거쳐 국민투표 실시, 헌법재판소 폐지 |
| (나) | 1987 | 직선제를 통한 5년 단임 대통령제 시행, 비상조치권 및 국회해산권 폐지, 헌법재판소 부활 |
ㄱ.(가)는 ‘발췌 개헌’이라고도 한다.
ㄴ.(가)에서는 국회를 단원제로 하였다.
ㄷ.(나)는 6월 민주 항쟁을 계기로 개정하였다.
ㄹ.(나) 개헌은 국가 재건 최고 회의에서 주도하였다.
옳은 것은 ㄴ과 ㄷ이다. (가)는 1962년 제5차 개헌, (나)는 1987년 제9차 개헌이다.
각 지문을 판정하면 ㄱ·ㄹ은 틀리고 ㄴ·ㄷ만 맞으므로 이 조합 하나로 정해진다.
- ㄱ(틀림): ‘발췌 개헌’은 1952년 제1차 개헌을 가리킨다.
- ㄴ(옳음): 제5차 개헌으로 양원제를 없애고 단원제 국회로 돌아갔다.
- ㄷ(옳음): 제9차 개헌은 6월 민주 항쟁의 결과 이루어졌다.
- ㄹ(틀림): 국가 재건 최고 회의가 주도한 것은 (가)의 1962년 개헌이다.
ㄴ. ‘한국광복군 행동 9개 준승’으로 인하여, 한국광복군은 해방 때까지 중국 군사 위원회의 지휘를 받아야만 했다.
ㄷ.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1941년 12월, 일본에 정식으로 선전 포고를 하였다.
ㄹ. 일본의 항복 선언 직후,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김구 주석을 중심으로 건국준비위원회가 결성되었다.
옳은 것은 ㄷ 하나이다.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태평양 전쟁이 일어나자 1941년 12월 일본에 선전 포고를 하였다.
나머지 지문은 모두 틀리므로, ㄷ만 고른 조합이 답이다.
- ㄱ(틀림): 김원봉의 조선의용대 세력은 1942년 한국광복군에 합류하였다.
- ㄴ(틀림): 행동 9개 준승은 1944년에 폐지되었으므로 해방 때까지 적용된 것이 아니다.
- ㄷ(옳음): 임시정부의 대일 선전 포고는 1941년 12월의 일이다.
- ㄹ(틀림): 건국준비위원회는 김구가 아니라 여운형이 주도해 국내에서 결성하였다.
정권·이권·학권을 고르게 한다는 주장은 조소앙의 삼균주의이고, 이를 건국 이념으로 삼은 기관은 대한민국 임시정부이므로 한국광복군 창설과 국내 진공 작전 계획이 옳다.
임시정부는 1940년 충칭에서 한국광복군을 창설하고, 일제 패망 직전 미국과 협력해 국내 진공 작전을 준비하였다.
- 신채호의 「조선혁명선언」을 강령으로 삼은 것은 의열단이다.
- 화북 지역에서 팔로군과 함께 싸운 것은 조선의용군(조선의용대 화북지대)이다.
- 광주 학생 항일 운동에 조사단을 파견해 지원한 것은 신간회이다.
- 대전자령 전투에서 일본군을 격퇴한 것은 지청천의 한국독립군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