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송리식 토기와 민무늬 토기는 청동기 시대를 대표하는 토기이므로 철기 시대의 설명으로 옳지 않다.
철기 시대의 대표 토기로는 덧띠 토기와 검은 간 토기를 꼽는다.
- 철제 무기와 농기구: 철기 보급으로 무기뿐 아니라 농기구도 철로 만들어 농업 생산력이 높아졌다.
- 명도전: 중국에서 쓰인 화폐로, 이 시기 중국과 교류했음을 보여 준다.
- 창원 다호리의 붓: 글씨를 쓰는 도구이므로 문자 사용을 짐작하게 한다.
과전법은 공민왕이 아니라 고려 말 공양왕 때 이성계 세력과 신진 사대부가 실시한 토지 제도이다.
공민왕은 반원 자주 정책과 왕권 강화를 내세워 원의 간섭 기구와 권문세족의 기반을 약화시켰다.
- 정방 폐지: 인사권을 장악해 온 권신의 기구를 없애 왕권을 강화하였다.
- 정동행성 이문소 혁파: 원의 내정 간섭 통로이던 기구를 없앴다.
- 쌍성총관부 철폐: 무력으로 공격해 원에 빼앗긴 철령 이북 땅을 되찾았다.
세종은 백성의 여론을 물어 토지세 제도인 공법을 실시하였다.
공법은 토지 비옥도에 따른 전분 6등법과 풍흉에 따른 연분 9등법으로 세액을 정한 제도이다.
- 6조 직계제: 태종이 왕권 강화를 위해 실시하였고 세조도 다시 시행하였다.
- 간경도감: 세조가 설치하여 불경을 한글로 번역하고 간행하였다.
- 『경국대전』 반포: 세조 때 편찬을 시작하여 성종 때 완성·반포하였다.
태양력 채용은 을미개혁의 내용이다.
을미사변 뒤 추진된 을미개혁에서는 태양력 사용, 단발령 실시, ‘건양’ 연호 사용 등이 이루어졌다.
- 지계 발급: 대한제국의 광무개혁 때 토지 소유권을 증명하려고 시행하였다.
- 헌의 6조 채택: 독립협회가 연 관민 공동회에서 결의한 개혁안이다.
- ‘광무’ 연호 제정: 고종이 환궁한 뒤 대한제국 수립 과정에서 정한 연호이다.
발해 정효공주 무덤은 벽화가 그려진 벽돌무덤이다.
벽돌로 무덤을 쌓은 것은 당의 양식이고, 천장을 평행 고임으로 짠 것은 고구려의 양식이다.
- 둘레돌과 12지신상: 통일 신라 왕릉 등에서 보이는 특징이다.
- 나무 덧널 위에 돌을 쌓고 흙을 덮는 구조: 신라의 돌무지덧널무덤이다.
- 백제 건국 세력과 고구려의 관련성 입증: 서울 석촌동 돌무지무덤에 대한 설명이다.
㉠은 만권당으로, 고려에 성리학이 들어오고 퍼지는 데 기여하였다.
‘충선왕’, ‘북경’, ‘이제현’, ‘조맹부’라는 단서로 만권당을 확정할 수 있다. 이곳에서 고려와 원의 학자가 교류하며 성리학 수용이 깊어졌다.
- 교종의 확산: 만권당은 유학자들의 학문 교류 기관으로, 불교 종파의 확산과는 관련이 없다.
- 고증학의 수입: 고증학은 훗날 청에서 발달하여 조선 후기에 전해졌다.
- 권문세족의 사상적 기반: 성리학은 신진 사대부의 사상적 기반이 되었다.
청주 흥덕사에서 간행된 것은 『직지심체요절』이므로, 『상정고금예문』을 연결한 설명이 옳지 않다.
『상정고금예문』은 흥덕사와 관련이 없으며, 몽골 침입기 강화도에서 금속 활자로 인쇄했다는 기록이 전한다.
- 순천 송광사: 지눌이 이끈 수선사 결사의 중심 사찰이다.
- 개성 경천사: 원의 석탑 양식 영향을 받은 10층 석탑이 세워졌다.
- 안동 봉정사: 극락전은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목조 건물로 꼽히는 주심포 양식 건물이다.
조·러 수호통상조약은 청의 알선 없이 조선이 러시아와 직접 교섭하여 체결한 조약이다.
청의 알선으로 체결된 것은 조·미 수호통상조약이다.
- 조·일 무역규칙: 조선의 양곡이 제한 없이 일본으로 유출될 수 있게 되었다.
- 강화도 조약: 부산 외에 원산과 인천의 개항이 이어졌다.
- 조·미 수호통상조약의 최혜국 대우: 서양 국가와 맺은 첫 조약으로 이 규정이 포함되었다.
- 『고려사』 「훈요십조」 -
‘이곳’은 서경(평양)이며, 장수왕이 남하 정책을 추진하며 도읍으로 삼은 곳이다.
‘훈요십조’, ‘수덕(水德)’, ‘지맥 근본’, ‘1년에 100일 이상 머물러’라는 단서는 태조 왕건이 서경을 중시하라고 남긴 내용을 가리킨다.
- 삼별초의 대몽 항전: 강화도에서 진도, 제주도로 옮겨 가며 전개되었다.
- 19세기 말 영국의 점령: 거문도에서 일어난 사건이다.
- 거란과의 전쟁 후 나성 축조: 도읍 개경을 방어하려고 쌓았다.
『일성록』은 정조가 세손 시절 쓰던 일기에서 시작되어 국왕의 일기로 이어진 기록이다.
나머지는 기록물의 이름과 설명이 어긋나 있으므로, 설명에 맞는 기록물을 찾아 소거한다.
- 왕실 혼인과 국장 등의 행사를 글과 그림으로 남긴 기록: 『어책』이 아니라 『의궤』이다.
- 사상의학 서적: 『동의보감』이 아니라 이제마의 『동의수세보원』이다.
- 전왕의 사초와 시정기 등을 모아 편찬한 기록: 『승정원일기』가 아니라 『조선왕조실록』이다. 『승정원일기』는 왕명 출납 기관 승정원의 일지이다.
화랑도는 계층 간의 대립과 갈등을 완화하는 기능도 하였다.
진골 귀족 출신의 화랑과 여러 계층의 낭도가 함께 활동하였기 때문이다. 진흥왕 때 국가 조직으로 정비되어 인재 양성에도 기여하였다.
- 만장일치제 정책 결정: 신라 귀족 회의인 화백 회의의 특징이다.
- 군장과 제사장의 기능 분리: 천군이 소도를 주관한 삼한의 제정 분리에 해당한다.
- 불교 신앙에 바탕을 둔 농민 공동체: 향도에 대한 설명이다.
‘이 사건’은 임오군란이며, 그 결과 조선은 일본과 제물포 조약을 체결하였다.
‘선혜청’, ‘민겸호’, ‘구식 군인’, ‘왕후가 피신’이라는 단서로 임오군란임을 알 수 있다.
- 통리기무아문 설치: 임오군란 이전 개화 정책을 추진하려고 설치한 기구이다.
- 이항로의 척화주전론: 임오군란보다 훨씬 앞선 병인양요 무렵에 제기되었다.
- 묄렌도르프 파견: 일본이 아니라 청의 추천으로 조선에 온 고문이다.
밑줄 친 ‘만세 시위’는 6·10 만세 운동으로, 사회주의 계열과 천도교, 학생 단체 등이 계획하였다.
‘순종이 서거’, ‘장례일’이라는 단서로 6·10 만세 운동임을 확정한다. 사전에 계획이 발각되었으나 학생들이 중심이 되어 시위를 벌였다.
- 신간회의 지원: 6·10 만세 운동 뒤에 창립된 신간회가 지원한 것은 광주 학생 항일 운동이다.
- 광주의 한·일 학생 충돌: 광주 학생 항일 운동의 발단이다.
- 도쿄의 조선청년독립단: 3·1 운동 직전 2·8 독립 선언을 주도한 단체이다.
흥선대원군이 경복궁 중건을 위해 발행한 화폐는 당오전이 아니라 당백전이다.
당오전은 그보다 뒤인 개항기에 발행되었다.
- 변한의 철: 철이 풍부하여 교역에서 화폐처럼 쓰였다.
- 해동통보: 고려 숙종 때 주전도감에서 동전을 만들었다.
- 상평통보: 조선 후기 상품 화폐 경제의 발달 속에 전국적으로 유통되었다.
제시문의 주장은 정약용의 여전론이므로 그의 저술인 『경세유표』가 옳다.
‘여전(閭田)’, ‘여장(閭長)’, 마을 사람이 함께 토지를 경작한다는 내용이 여전론의 단서이다.
- 『반계수록』: 균전론을 주장한 유형원의 저술이다.
- 『동사강목』: 안정복이 쓴 역사서이다.
- 『의산문답』: 지전설 등을 담은 홍대용의 저술이다.
쌍성보·대전자령 승리는 조선의용대가 아니라 한국독립군의 활동이다.
지청천이 이끈 한국독립군이 1930년대 초 만주에서 중국 호로군과 연합하여 싸운 전투이며, 조선의용대는 그보다 뒤인 중일 전쟁기에 창설되었다.
- 한국광복군 합류: 김원봉이 이끄는 조선의용대 일부가 합류하였다.
- 창설 배경: 조선민족전선연맹이 중국 국민당 정부의 지원을 받아 조직하였다.
- 화북 이동: 일부 대원이 화북으로 이동하여 조선의용대 화북지대를 만들었다.
육영공원이 동문학 설립으로 폐지되었다는 설명은 선후가 뒤바뀌어 옳지 않다.
동문학은 육영공원보다 먼저 세워진 외국어 교육 기관이며, 육영공원은 그 뒤에 정부가 세운 근대식 관립 학교이다.
- 대성학교: 안창호가 평양에 세운 민족 교육 기관이다.
- 신흥무관학교: 서간도 삼원보에서 독립군을 양성하였다.
- 서전서숙: 한인 마을이 형성된 북간도에 세워진 민족 학교이다.
ㄱ. 우산국 복속
ㄴ. 대가야 정복
ㄷ. 나제동맹 결성
ㄹ. 김씨의 왕위 독점 세습
(가)는 마립간 시기이며, 여기에 해당하는 것은 나제 동맹 결성과 김씨의 왕위 독점 세습이다.
내물 마립간 때 김씨의 왕위 세습이 확립되었고, 눌지 마립간 때 고구려에 맞서 백제와 나제 동맹을 맺었다.
- 우산국 복속: ‘왕’ 칭호를 쓴 지증왕 때의 일이다.
- 대가야 정복: ‘왕’ 칭호가 정착된 뒤인 진흥왕 때의 일이다.
밑줄 친 ‘그’는 박지원이며, 그가 저술한 해외 견문록은 『열하일기』이다.
‘청에 다녀와’, ‘수레와 선박’, ‘화폐 유통’, ‘한전론’이라는 단서가 청 문물의 수용과 토지 소유 상한을 주장한 박지원을 가리킨다.
- 이경직의 『부상록』: 일본에 다녀온 사행 기록으로, 청 방문과 관련이 없다.
- 박제가의 『북학의』: 청의 문물 수용을 주장했으나 저자가 제시문의 한전론 주장자가 아니다.
- 이수광의 『지봉유설』: 견문록이 아니라 백과사전식 저술이다.
ㄴ. 모스크바 3국 외상 회의가 개최되어 한반도 문제가 논의되었다.
ㄷ. 유엔 한국 임시 위원단의 감시 아래 남한에서 총선거가 실시되었다.
시기순 배열은 모스크바 3국 외상 회의 → 좌우합작 7원칙 발표 → 남한 총선거이다.
모스크바 3국 외상 회의는 1945년 12월, 좌우합작 7원칙 발표는 1946년 10월, 유엔 한국 임시 위원단 감시 아래의 남한 총선거는 1948년 5월의 일이다.
- 좌우합작 7원칙을 맨 앞에 둔 배열: 모스크바 회의의 결과로 열린 미소 공동 위원회가 난항을 겪은 뒤의 발표이므로 맞지 않다.
- 남한 총선거를 맨 앞에 둔 배열: 총선거가 세 사건 가운데 가장 늦으므로 맞지 않다.
- 좌우합작 7원칙을 맨 뒤에 둔 배열: 7원칙 발표는 1948년 총선거보다 앞서므로 맞지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