있다. 많은 노동력을 동원해야 만들 수 있는 (가) 는/은
지배층의 무덤으로 알려졌다. 유네스코는 2000년 우리나라의
(가) 유적지를 세계유산으로 지정하였다.
(가)는 고인돌이므로 청동기 시대의 모습인 계급 분화와 군장의 등장이 옳다.
'지배층의 무덤', '많은 노동력을 동원', '2000년 세계유산 지정'이 고인돌을 가리키는 단서이다. 고인돌은 많은 사람을 동원할 수 있는 지배자가 나타났음을 보여 준다.
- 농경과 목축의 시작은 신석기 시대의 변화이다.
- 뗀석기를 이용한 채집과 사냥은 구석기 시대의 생활이다.
- 빗살무늬 토기는 신석기 시대의 대표적인 토기이다.
걸쳐 있다. 주현(州縣)과 관역(館驛)은 없고 곳곳에 마을이
있는데, 모두 말갈의 마을이다. 그 백성은 말갈인이 많고
원주민은 적은데, 모두 원주민을 마을의 우두머리로 삼는다.
- 『유취국사』 -
(가)는 발해이며, 지방을 5경 15부 62주로 다스린 것이 옳다.
'고구려의 옛 땅', '말갈의 마을', 말갈인이 많고 원주민(고구려계)이 마을의 우두머리라는 내용이 발해를 가리키는 단서이다.
- 독서삼품과는 통일 신라 원성왕 때 실시한 관리 선발 제도이다.
- 당항성은 신라가 한강 유역을 차지한 뒤 중국과 교류한 거점이다.
- 22담로에 왕족을 파견한 것은 백제 무령왕 때의 일이다.
발탁되어 정계에 진출하였다. 이후 신돈은 전민변정도감의
책임자가 되어 권세 있는 자들이 빼앗은 토지와 노비를
원래 주인에게 돌려주었다.
밑줄 친 왕은 공민왕이며, 옳지 않은 것은 성리학을 처음 들여왔다는 설명이다. 성리학은 충렬왕 때 안향이 처음 소개하였다.
'신돈'을 발탁하고 '전민변정도감'을 통해 토지와 노비를 원래 주인에게 돌려준 왕이 공민왕이다.
- 쌍성총관부를 공격해 철령 이북 땅을 되찾은 것은 공민왕의 반원 자주 정책이다.
- 성균관을 개편해 신진 세력을 키운 것은 공민왕의 인재 양성책이다.
- 기철 등 친원 세력의 제거도 공민왕의 개혁에 해당한다.
위해 과감한 개혁을 추진해 나갔다. 그러나 급진적인 개혁
정치에 부담을 느낀 중종에 의해 결국 제거되었다.
'이들'은 조광조 등 중종 대 사림이며, 옳지 않은 것은 『국조오례의』 편찬이다.
'왕도 정치', '급진적인 개혁 정치', '중종에 의해 결국 제거'가 단서이다. 『국조오례의』는 성종 때 완성된 국가 의례서로, 이들의 활동이 아니다.
- 위훈 삭제는 중종반정 공신의 공훈을 삭제하려 한 조광조 세력의 개혁이다.
- 소격서 폐지는 도교 의식을 없애려 한 조광조 세력의 주장이다.
- 향약의 시행은 향촌에 성리학적 질서를 퍼뜨리려 한 사림의 활동이다.
처가 쪽 친척은 특별한 경우가 아니면 족보에 기재하지
않았고, 아들이 없으면 양자를 들이는 경우가 많았으며,
(가)
(가)에는 조선 후기의 부계 중심 사회를 보여 주는 동족 마을의 형성이 들어간다.
'아버지 쪽의 혈연이 중시', '아들이 없으면 양자를 들이는 경우'가 단서이다. 이 시기에는 같은 성씨가 모여 사는 마을이 늘어났다.
- 아들과 딸이 돌아가며 제사를 지낸 것은 조선 전기까지의 모습이다.
- 재산을 아들과 딸에게 고르게 나눈 것도 조선 전기까지의 관행이다.
- 신랑이 신붓집에서 혼례를 올리고 생활한 것은 조선 전기까지 이어진 혼인 풍습이다.
세력이 강한 자를 물리치셨습니다. 즉위한 해로부터 8년까지
정치와 교화가 청렴하고 공평하였으며 형벌과 상이 남발되지
않았습니다. 쌍기를 등용한 뒤부터 문사를 높이고 중용하여
대접이 지나치게 후하셨습니다.
- 『고려사절요』 -
밑줄 친 왕은 고려 광종이며, 옳지 않은 것은 국자감 설치이다. 개경에 국자감을 세운 왕은 성종이다.
'쌍기를 등용', '세력이 강한 자를 물리치셨습니다'가 단서이다. 광종은 쌍기를 등용해 문신 관료 체제를 다지고 호족 세력을 눌렀다.
- 과거제는 쌍기의 건의로 광종 때 시행되었다.
- 백관의 공복 제정은 광종이 관리의 위계를 세운 조치이다.
- 노비안검법은 광종이 호족의 경제·군사 기반을 약화하려고 실시하였다.
것인지 모르겠으나, 세상을 현혹하고 백성을 속이며 윤리와
강상을 없애고 어지럽히는 것이 어찌 진산(珍山)의 권상연,
윤지충보다 더한 자가 있겠습니까. 제사를 폐지하는 것으로도
부족해서 위패를 불태우고, 조문을 거절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그 부모의 시신을 내버렸으니, 그 죄악을 따져 보자면
어찌 하루라도 이 하늘과 땅 사이에 그대로 살려 둘 수
있겠습니까.
- 『정조실록』 -
'서양의 사설'은 천주교이며, 남인 계열의 일부 학자가 신앙으로 받아들였다는 설명이 옳다.
'진산의 권상연, 윤지충', '제사를 폐지', '위패를 불태우고'는 정조 때의 진산 사건을 가리키는 단서이다. 천주교는 서학으로 전래된 뒤 일부 남인 학자들 사이에서 신앙으로 자리 잡았다.
- 왜양일체론은 천주교가 아니라 위정척사 세력이 개항을 반대하며 내세운 주장이다.
- 진인의 출현을 예고한 것은 『정감록』과 같은 예언 사상이다.
- 인내천 사상은 동학의 핵심 교리이다.
모아 매일 밤 순찰하여 포악한 짓을 막았으므로 이를 야별초라
하였다. 도적이 여러 도에서 일어나자 야별초를 나누어 보내
잡게 하였는데, 그 군사가 매우 많아져 마침내 나누어
좌우별초로 만들었다. 또 고려 사람으로서 몽골로부터
도망하여 온 자들로 하나의 부대를 만들어 신의군이라
불렀다. 이것을 합쳐서 (가) 를/을 만들었다.
- 『고려사』 -
(가)는 삼별초이다.
'야별초'가 나뉜 '좌우별초'에 몽골에서 도망해 온 사람들로 만든 '신의군'을 합쳤다는 내용이 단서이다. 좌별초·우별초·신의군을 합쳐 삼별초라 한다.
- 도방은 무신 집권자의 신변을 지키던 사병 조직이다.
- 중추원은 왕명 출납과 군사 기밀을 맡은 고려의 중앙 관청이다.
- 별무반은 윤관의 건의로 여진 정벌을 위해 만든 군사 조직이다.
통치 제도를 정비하였다. 지방 행정은 전국을 9주로 나누고,
그 아래 군․현을 두어 지방관을 보내 다스리게 하였다.
또, 수도인 금성(경주)이 동남쪽에 치우친 점을 보완하고자
5소경을 설치하고 지방 정치와 문화의 중심지로 삼았다.
옳게 짝 지은 것은 북원경 - 원주이다.
통일 신라의 5소경은 금관경(김해), 중원경(충주), 북원경(원주), 서원경(청주), 남원경(남원)이다. 수도가 동남쪽에 치우친 점을 보완하려고 설치하였다.
- 중원경은 청주가 아니라 충주이다.
- 서원경은 충주가 아니라 청주이다.
- 금관경은 남원이 아니라 김해이다.
(나) 행주 대첩
(다) 동래 전투
(라) 한산도 대첩
임진왜란의 전개 순서는 (다) 동래 전투 → (라) 한산도 대첩 → (나) 행주 대첩 → (가) 노량 해전이다.
동래 전투는 일본군이 상륙한 직후인 1592년 4월, 한산도 대첩은 1592년 7월, 행주 대첩은 1593년 2월의 싸움이다. 노량 해전은 전쟁 막바지인 1598년 11월의 싸움이다.
- 행주 대첩과 노량 해전을 앞에 둔 배열 (나) → (가) → (다) → (라)는 전쟁 초기의 동래 전투를 뒤로 미룬 것이다.
- 행주 대첩으로 시작하는 배열 (나) → (다) → (라) → (가)는 1593년의 행주 대첩을 1592년의 두 싸움보다 앞세운 것이다.
- 노량 해전을 셋째에 둔 배열 (다) → (나) → (가) → (라)는 마지막 해전인 노량 해전을 한산도 대첩보다 앞세운 것이다.
통감부를 설치했다. 이처럼 일제의 침략이 본격화됨에 따라
국권을 빼앗길 수 있다는 위기감이 높아졌다. 이러한 가운데
안창호와 양기탁 등은 공화정에 바탕을 둔 국가 건설을 목표로
(가) 를/을 조직하였다. 이 단체는 태극서관을 통해 대중을
계몽하기 위한 서적을 보급하였으며, 산업 육성을 목적으로
평양에 자기회사를 설립해 운영하기도 하였다. 이 단체는
일제가 조작한 105인 사건으로 국내 활동을 이어갈 수
없게 되었다.
(가)는 신민회이며, 무장 투쟁을 위해 독립운동 기지 건설을 준비한 것이 옳다.
'안창호와 양기탁', '공화정', '태극서관', '자기회사', '105인 사건'이 단서이다. 신민회는 국외에 독립운동 기지를 건설하는 활동을 추진하였다.
- 이인영을 중심으로 한 서울 진공 작전은 13도 창의군의 활동이다.
- 「홍범 14조」는 제2차 갑오개혁 때 반포된 개혁 강령이다.
- 만민공동회로 절영도 조차를 막아 낸 것은 독립협회의 활동이다.
군국기무처를 설치했다. 이 기구는 신분제 폐지를 비롯한
여러 가지 개혁 안건을 의결하였다.
밑줄 친 개혁은 제1차 갑오개혁이며, 그 내용은 과거제 폐지이다.
'경복궁을 점령', '김홍집 내각', '군국기무처', '신분제 폐지'가 단서이다. 군국기무처는 신분제 폐지와 함께 과거제 폐지 등을 의결하였다.
- 「헌의 6조」는 독립협회가 관민 공동회에서 결의한 개혁안이다.
- 광무 양전은 대한제국의 광무개혁 때 시행한 토지 조사 사업이다.
- 「대한국 국제」는 대한제국이 황제권을 규정해 반포한 법이다.
유교의 개혁을 주장했으며, 나라가 없어졌다고 하더라도
정신은 살아남아야 한다는 주장을 내세웠다. 독립운동가로도
잘 알려진 그는 독립운동의 역사를 정리한 『한국독립
운동지혈사』를 쓰기도 했다.
밑줄 친 '그'는 박은식이며, 『한국통사』를 저술한 것이 옳다.
'유교 구신론', '정신은 살아남아야 한다', '『한국독립운동지혈사』'가 단서이다. 박은식은 민족의 혼을 강조하며 일제의 침략 과정을 『한국통사』에 정리하였다.
- 한글 맞춤법 통일안은 조선어 학회가 발표하였다.
- 진단학회는 이병도 등이 실증 사학을 내세워 조직하였다.
- 『조선사회경제사』는 유물 사관을 바탕으로 백남운이 펴냈다.
않았다. 백정의 자녀는 차별로 인해 학교에 다니기도 쉽지
않았다. 이러한 차별을 철폐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 사람들은
1923년 진주에서 (가) 를/을 조직하였다. 이 단체의 활동은
언론의 지지에 힘입어 전국적인 운동으로 발전하였다.
(가)는 백정 차별 철폐를 내건 조선 형평사이다.
'백정에 대한 차별', '1923년 진주'가 단서이다. 형평 운동은 진주에서 시작해 전국으로 퍼졌다.
- 근우회는 여성 운동을 이끈 단체로, 신간회의 자매단체로 불린다.
- 조선 청년 총동맹은 청년 운동을 이끈 단체이다.
- 조선 노동 총동맹은 노동 운동을 이끈 단체이다.
황토현에서 관군을 물리쳤다.
관군과 일본군에 패하였다.
(가)에는 전주 화약 체결이 들어간다.
1894년 동학 농민 운동은 황토현 전투 승리 → 전주성 점령 → 전주 화약 → 농민군 재봉기 → 우금치 전투 패배의 순서로 전개되었다.
- 임오군란은 동학 농민 운동보다 앞선 1882년의 사건이다.
- 전봉준의 체포와 처형은 우금치 패배 이후의 일이다.
- 제물포 조약은 임오군란의 뒤처리로 1882년에 체결되었다.
○ 우리는 단결을 공고히 함.
○ 우리는 기회주의를 일체 부인함.
강령을 내세운 단체는 신간회이며, 사회주의 세력과 비타협적 민족주의 세력이 만든 민족 협동 전선이라는 설명이 옳다.
'정치적, 경제적 각성', '단결', '기회주의를 일체 부인'이 1927년 창립한 신간회 강령의 단서이다.
- 6·10 만세 운동은 신간회 창립보다 앞선 1926년의 일이다.
- 암태도 소작 쟁의는 신간회 창립 전에 소작인들이 벌인 투쟁이다.
- 민립 대학 설립 운동은 조선 민립 대학 기성회가 전개하였다.
판단한 일제는 무단통치 방침을 버리고 이른바 '문화정치'를
표방하였다. 당시 일제는 3․1 운동으로 확인된 한국인의
저항을 무마할 목적으로 친일 세력을 양성하고자 하였다.
또 헌병경찰제를 없애는 대신 보통경찰의 수를 늘렸다.
일제가 '문화정치'라는 방침을 내세웠던 이 시기에는 산미
증식계획이 시행되기도 하였다.
'이 시기'는 1920년대 이른바 문화 통치 시기이며, 『조선일보』와 『동아일보』의 창간이 옳다.
'3·1 운동을 계기로', '문화정치', '보통경찰', '산미 증식 계획'이 단서이다. 두 신문은 1920년에 창간되었다.
- 국채 보상 운동은 1907년에 일어났다.
- 국문 연구소는 1907년에 설립되었다.
- 백동화를 정리한 화폐 정리 사업은 1905년에 시작되었다.
인물을 응징하는 의열 투쟁을 전개하고자 (가) 를/을
조직했다. 이 단체는 김원봉의 요청으로 신채호가 작성한
「조선 혁명 선언」을 받아들여 활동을 펼쳐 나갔다.
(가)는 의열단이며, 소속 인물의 활동은 김익상의 조선 총독부 폭탄 투척이다.
'1919년 김원봉', '의열 투쟁', 신채호의 '「조선 혁명 선언」'이 단서이다.
- 이봉창은 의열단이 아니라 한인 애국단 소속으로 일왕의 행렬에 폭탄을 던졌다.
- 이회영이 삼원보에 세운 신흥강습소는 신민회 계열의 독립군 양성 기관이다.
- 임병찬이 조직한 독립 의군부는 고종의 밀명을 받은 복벽주의 단체이다.
1946년에 미․소 공동위원회를 열어 민주주의 임시정부
수립 문제를 논의하였다. 이 자리에서 양측은 민주주의
임시정부 수립 문제를 논의할 협의 대상 선정 문제에 대해
이견을 드러냈다. 양측의 의견 대립이 지속한 결과, 미․소
공동위원회는 성과를 내지 못하고 휴회하였다. 이후 여운형과
김규식은 좌우의 이견을 조율하고 미․소 공동위원회 재개를
촉구하기 위해 (가) 를/을 구성하였다.
(가)는 좌우 합작 위원회이며, 좌우 합작 7원칙의 발표가 옳다.
제1차 미·소 공동 위원회의 휴회, '여운형과 김규식', '좌우의 이견을 조율'이 단서이다.
- 조선 건국 준비 위원회는 광복 직후인 1945년 여운형 등이 조직하였다.
- 「반민족 행위 처벌법」은 1948년 제헌 국회가 제정하였다.
- 「대한민국 건국 강령」은 1941년 대한민국 임시 정부가 삼균주의를 바탕으로 발표하였다.
| 4․19 혁명 | (가) | 5․18 민주화 운동 |
(가) 시기에 있었던 일은 국군의 베트남 파병이다.
(가)는 1960년 4·19 혁명과 1980년 5·18 민주화 운동 사이이다. 베트남 파병은 1960년대 박정희 정부 때 이루어졌다.
- 발췌 개헌은 4·19 혁명 이전인 1952년 이승만 정부 때의 일이다.
- 남북한 유엔 동시 가입은 5·18 민주화 운동 이후인 1991년의 일이다.
- 6·15 남북 공동 성명(선언) 발표는 5·18 민주화 운동 이후인 2000년의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