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역인재 9급 한국사] 22년 1회차
지역인재 9급 한국사 기출문제

22년 1회차

총 20문항 · 객관식 · A4 약 1장

1 / 1
A4정답 포함
지역인재 9급 한국사 기출문제모두CBT · moducbt.com

22년 1회차

총 20문항 · 객관식 · 정답·해설 포함
문제 1
다음 유물이 사용된 시대에 대한 설명으로 옳지 않은 것은?

1주로 움집을 짓고 살았다.
2농경과 목축이 시작되었다.
3철제 농기구가 보급되었다.
4정착 생활이 시작되었다.
정답 및 해설

옳지 않은 설명은 철제 농기구가 보급되었다는 내용으로, 이는 철기 시대의 모습이다.

제시된 유물은 빗살무늬 토기, 곡식을 가는 갈돌과 갈판, 실을 뽑는 가락바퀴로, 모두 신석기 시대를 대표한다.

  • 움집을 짓고 살았다는 설명은 옳다. 신석기 사람들은 강가나 바닷가에 움집을 짓고 살았다.
  • 농경과 목축의 시작은 옳다. 신석기 시대에 조·피 등을 재배하고 가축을 기르기 시작했다.
  • 정착 생활의 시작은 옳다. 농경이 시작되면서 이동 생활에서 벗어나 한곳에 머물러 살게 되었다.
문제 2
밑줄 친 ‘이 나라’에 대한 설명으로 옳은 것은?
이 나라에는 왕이 있다. 모두 여섯 가지 가축 이름으로 관직명을 정하였는데, 마가·우가·저가·구가·대사·대사자·사자가 있다. …(중략)… 제가들은 별도로 사출도를 다스렸는데, 큰 곳은 수천 가, 작은 곳은 수백 가였다.
1고구려 미천왕의 공격을 받아 멸망하였다.
2천군이 소도에서 제사를 주관하였다.
3바다를 통해 낙랑과 왜에 철을 수출하였다.
4도둑질한 자는 물건값의 12배를 갚게 하였다.
정답 및 해설

밑줄 친 ‘이 나라’는 부여이며, 도둑질한 자에게 물건값의 12배를 갚게 한 1책 12법이 부여의 법 풍습이다.

사료의 ‘마가·우가·저가·구가’라는 가축 이름의 관직과, 제가가 별도로 다스린 ‘사출도’가 부여를 확정하는 단서이다.

  • 고구려 미천왕의 공격으로 축출된 것은 낙랑군이며, 부여가 아니다.
  • 천군이 소도에서 제사를 주관한 나라는 삼한이다.
  • 낙랑과 왜에 철을 수출한 나라는 변한(이후 가야)이다.
문제 3
밑줄 친 ‘백제역사유적지구’ 유적지에 해당하지 않는 것은?
2015년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등재된 백제역사유적지구는 8개 고고학 유적지로 이루어져 있다. 백제역사유적은 중국의 도시계획 원칙, 건축 기술, 예술, 종교를 수용하여 백제화(百濟化)한 증거를 보여주며, 이러한 발전을 통해 이룩한 세련된 백제의 문화를 일본 및 동아시아로 전파한 사실을 증언하고 있다.
1공주시 공산성
2부여군 정림사지
3서울시 몽촌토성
4익산시 왕궁리 유적
정답 및 해설

서울시 몽촌토성은 백제역사유적지구에 포함되지 않는다.

백제역사유적지구는 공주·부여·익산에 있는 웅진·사비 시기 유적 8곳으로 이루어져 있다. 몽촌토성은 그보다 앞선 한성 시기의 유적이다.

  • 공주시 공산성은 웅진 시기의 왕성으로, 유적지구에 포함된다.
  • 부여군 정림사지는 사비 시기의 절터로, 유적지구에 포함된다.
  • 익산시 왕궁리 유적은 사비 시기 무왕 대와 관련된 유적으로, 유적지구에 포함된다.
문제 4
밑줄 친 ‘이 기구’에 대한 설명으로 옳은 것은?
이 기구는 일시적인 전쟁 때문에 임시로 설치한 것으로서 국가의 중요한 일을 모두 다 맡긴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오늘에 와서는 큰일이건 작은 일이건 중요하지 않은 것이 없는데, 의정부는 한갓 헛된 이름만 남고 6조는 모두 그 직임을 상실하였습니다. 이 기구의 명칭은 ‘변방의 문제에 대비하는 것’인데, 과거 시험에 대한 판단이나 비빈(妃嬪)을 간택하는 등의 일까지도 모두 여기를 거쳐 나옵니다.
1고려만의 독자적인 기구였다.
2흥선대원군에 의해 폐지되었다.
3사헌부, 사간원과 함께 3사의 하나였다.
4왕명 출납을 담당한 국왕의 비서 기관이었다.
정답 및 해설

‘이 기구’는 비변사이며, 비변사는 흥선대원군에 의해 폐지되었다.

‘변방의 문제에 대비’한다는 명칭과, 임시 기구였으나 권한이 커져 의정부와 6조가 유명무실해졌다는 내용이 단서이다. 흥선대원군은 의정부와 삼군부의 기능을 되살리면서 비변사를 없앴다.

  • 비변사는 조선의 기구이며, 고려의 독자적 기구는 도병마사와 식목도감이다.
  • 사헌부, 사간원과 함께 3사를 이룬 기구는 홍문관이다.
  • 왕명 출납을 담당한 국왕의 비서 기관은 승정원이다.
문제 5
(가) 시기에 있었던 사실로 옳은 것은?
백제의
고구려
평양성 공격
→고구려의
백제 한성
함락
→(가)→신라의
관산성 전투
승리
1백제가 사비로 천도하였다.
2신라가 대가야를 정복하였다.
3고구려가 천리장성을 축조하였다.
4고구려가 신라에 침입한 왜를 격퇴하였다.
정답 및 해설

(가) 시기의 사실은 백제의 사비 천도(538)이다.

(가)는 고구려의 백제 한성 함락(475)과 신라의 관산성 전투 승리(554) 사이이다. 성왕의 사비 천도는 538년이므로 이 구간에 들어간다.

  • 신라의 대가야 정복은 562년으로, 관산성 전투 이후의 일이다.
  • 고구려의 천리장성 축조는 7세기 전반에 시작되어 관산성 전투보다 훨씬 뒤의 일이다.
  • 고구려가 신라에 침입한 왜를 격퇴한 것은 400년 광개토 대왕 때로, 한성 함락 이전의 일이다.
문제 6
(가), (나)에 대한 설명으로 옳은 것은?

1(가) – 신라 선덕여왕 때 천체 관측을 위해 만들었다.
2(가) – 세종 때 장영실이 시간을 측정하기 위해 만든 물시계이다.
3(나) – 정약용이 『기기도설』을 참고해 만들었다.
4(나) – 홍대용이 천체의 운행을 연구하기 위해 사용하였다.
정답 및 해설

옳은 설명은 (나) 혼천의를 홍대용이 천체 운행 연구에 사용했다는 내용이다.

(가)는 솥처럼 오목한 모양의 해시계인 앙부일구이고, (나)는 여러 개의 고리로 천체의 움직임을 재는 관측 기구인 혼천의이다. 홍대용은 혼천의를 만들어 농수각에 두고 천체를 연구하였다.

  • 신라 선덕여왕 때 천체 관측을 위해 만든 것은 첨성대이므로, (가) 앙부일구의 설명이 아니다.
  • 세종 때 장영실이 만든 물시계는 자격루이다. (가) 앙부일구는 해 그림자로 시각을 재는 해시계이다.
  • 정약용이 『기기도설』을 참고해 만든 것은 거중기이므로, (나) 혼천의의 설명이 아니다.
문제 7
밑줄 친 ‘이 정책’을 시행한 국왕의 재위 기간에 있었던 일로 옳은 것은?
신돈이 전국에 방을 붙여 알리기를 “…(중략)… 이제 도감을 설치하여 바로잡고자 하니 개경은 15일을 기한으로 하고 전국의 도(道)에서는 40일을 기한으로 하여 스스로 잘못을 알고 고치는 자는 죄를 묻지 않을 것이나, 기한을 넘겨 일이 발각된 자는 조사하여 다스릴 것이다.”라고 하였다. 이 정책이 시행되자 권세가 중에서 전민을 빼앗은 자들이 원래 주인에게 많이 돌려주어 온 나라가 기뻐하였다.
1지눌이 수선사 결사를 결성하였다.
2일연이 『삼국유사』를 편찬하였다.
3홍건적의 침입으로 개경이 함락되었다.
4『직지심체요절』이 청주 흥덕사에서 금속활자로 인쇄되었다.
정답 및 해설

‘이 정책’을 시행한 왕은 공민왕이며, 그 재위 기간에 홍건적의 침입으로 개경이 함락되었다.

사료의 ‘신돈’, ‘도감’, 권세가가 빼앗은 전민을 원래 주인에게 돌려주었다는 내용은 공민왕 때의 전민변정도감 설치를 가리킨다.

  • 지눌의 수선사 결사는 무신 집권기의 일이다.
  • 일연의 『삼국유사』 편찬은 충렬왕 때의 일이다.
  • 『직지심체요절』의 금속활자 인쇄는 공민왕 사후인 우왕 때의 일이다.
문제 8
밑줄 친 ‘임금’의 재위 기간에 이루어진 업적으로 옳은 것은?
이달에 임금이 친히 언문 28자를 지었는데, 그 글자가 옛 전자(篆字)를 모방하였고, 초성·중성·종성으로 나뉘어 있어 합한 이후에야 글자가 이루어졌다. 무릇 한자와 우리나라 말을 모두 쓸 수 있으며, 글자는 비록 쉽고 간단하지만 표현할 수 있는 것이 무궁무진하였으니, 이를 ‘백성을 가르치는 바른 소리’라고 일렀다.
1『고려사』를 완성하였다.
2『경국대전』을 반포하였다.
3『향약집성방』을 편찬하였다.
4「천상열차분야지도」를 제작하였다.
정답 및 해설

밑줄 친 ‘임금’은 세종이며, 그 재위 기간의 업적은 『향약집성방』 편찬이다.

사료의 ‘언문 28자’와 ‘백성을 가르치는 바른 소리’는 세종의 훈민정음 창제를 가리킨다. 『향약집성방』은 우리 풍토에 맞는 약재와 처방을 정리한 의서이다.

  • 『고려사』는 세종 사후 문종 때 완성되었다.
  • 『경국대전』은 성종 때 완성되어 반포되었다.
  • 「천상열차분야지도」는 태조 때 제작되었다.
문제 9
밑줄 친 ‘임금’이 실시한 정책으로 옳은 것은?
○ 3월 4일에 명나라의 제독 유정이 후금의 군대와 싸우다 전사하니 조선군 지휘관 강홍립이 후금에 항복하였다.
○ 4월에 후금에 있던 강홍립이 임금에게 글을 올리기를 “3월 4일에 행군하였는데 …(중략)… 신이 부득이 화해를 청하며 후금의 장수에게 말하기를 ‘우리나라와 귀국이 조금도 원한이 없고, 이번 군사 출동도 원래 우리나라의 뜻이 아니다. 서로 싸우기로 한다면 우리 군사는 죽음을 각오하였으니, 귀국에 이득이 될 것이 무엇이 있겠는가? 강화하는 것만 못하다.’라고 하였더니, 후금의 장수가 승낙하였습니다.”라고 하였다.
1대동법을 경기도에서 시행하였다.
2초계문신제를 실시하였다.
3『대전통편』을 편찬하였다.
4친명배금(親明背金) 정책을 폈다.
정답 및 해설

밑줄 친 ‘임금’은 광해군이며, 그는 대동법을 경기도에서 시행하였다.

사료의 ‘강홍립’이 후금에 항복하고 ‘이번 군사 출동도 원래 우리나라의 뜻이 아니다’라고 말한 내용은 광해군의 중립 외교를 보여 준다.

  • 초계문신제는 정조가 실시하였다.
  • 『대전통편』은 정조 때 편찬되었다.
  • 친명배금 정책은 광해군을 몰아낸 인조반정 이후 인조 때 추진되었다.
문제 10
밑줄 친 ‘그’에 대한 설명으로 옳은 것은?
세손에서 국왕으로 즉위한 그는 붕당에 관계없이 능력이 있는 사람을 고루 등용하였다. 또한 수원에 화성을 건설하여 정치적, 군사적 기능을 부여하고 이를 중심으로 정치 개혁을 완성하려 하였다.
1홍경래의 난이 발생하여 통치에 어려움을 겪었다.
2삼정이정청을 설치하여 삼정의 문란을 시정하려 하였다.
3백성의 군역 부담을 줄이기 위해 균역법을 처음 시행하였다.
4국왕의 군사적 기반을 확보하기 위해 장용영을 설치하였다.
정답 및 해설

밑줄 친 ‘그’는 정조이며, 국왕의 군사적 기반을 확보하기 위해 장용영을 설치하였다.

사료의 ‘세손에서 국왕으로 즉위’, 붕당에 관계없는 인재 등용, ‘수원에 화성을 건설’이 정조를 확정하는 단서이다.

  • 홍경래의 난은 순조 때 일어났다.
  • 삼정이정청은 임술 농민 봉기 이후 철종 때 설치되었다.
  • 균역법을 처음 시행한 왕은 영조이다.
문제 11
다음 글을 창간사로 게재한 신문으로 옳은 것은?
우리 조정에서도 박문국을 설치하고 관리를 두어 외국의 신문을 폭넓게 번역하고 아울러 국내의 일까지 기재하여 나라 안에 알리는 동시에 다른 나라에까지 공포하기로 하고, …(중략)… 견문을 넓히고, 여러 가지 의문점을 풀어 주고, 상업에도 도움을 주고자 하였다.
1독립신문
2황성신문
3한성순보
4제국신문
정답 및 해설

이 창간사를 실은 신문은 한성순보이다.

사료의 ‘우리 조정’이 설치한 ‘박문국’이 결정적 단서이다. 한성순보는 박문국에서 발행한 정부 관보 성격의 신문이다.

  • 독립신문은 서재필이 창간한 민간 신문으로, 박문국과 관련이 없다.
  • 황성신문은 국한문 혼용의 민간 신문으로, 「시일야방성대곡」을 실은 것으로 유명하다.
  • 제국신문은 순 한글로 발행되어 서민층과 부녀자를 주된 독자로 삼은 민간 신문이다.
문제 12
다음 자료와 관련된 운동에 대한 설명으로 옳은 것은?
지금 나라의 빚이 1,300만 원이니 이는 우리 대한제국의 존망에 관계된 일이다. 이를 갚으면 나라를 보존하게 되고 못 갚으면 나라를 잃고 만다. 형세가 여기에 이르렀으나 현재 국고 형편으로는 갚기 어렵다. 그러므로 삼천리강토는 장차 우리 국가 소유나 백성 소유가 아니게 될 것이다. …(중략)… 다만 큰 노력이나 손해를 보지 않고도 돈을 모으는 방법이 하나 있다. 2천만 대중이 3개월 동안 담배를 끊고 그 돈을 각자 한 달에 20전씩 낸다면 1,300만 원을 모을 수 있다. 만약 부족하다면 1원, 10원, 100원, 1,000원 등을 따로 기부하는 사람이 있을 것이다.
1일본의 황무지 개간권 요구를 철회시켰다.
2공화정에 바탕을 둔 근대 국가 건설을 목표로 삼았다.
3평양에서 시작되었으며, 토산품 애용, 근검저축 등을 강조하였다.
4대구에서 시작되었으며, 대한매일신보사 등 언론 기관의 후원으로 확산되었다.
정답 및 해설

자료의 운동은 국채 보상 운동으로, 대구에서 시작되어 대한매일신보사 등 언론 기관의 후원으로 확산되었다.

‘나라의 빚이 1,300만 원’, ‘담배를 끊고’ 그 돈을 모아 갚자는 내용이 국채 보상 운동의 단서이다.

  • 일본의 황무지 개간권 요구를 철회시킨 것은 보안회의 활동이다.
  • 공화정에 바탕을 둔 근대 국가 건설을 목표로 삼은 단체는 신민회이다.
  • 평양에서 시작되어 토산품 애용을 강조한 운동은 일제 강점기의 물산 장려 운동이다.
문제 13
다음 법령이 시행된 시기에 볼 수 있는 모습으로 옳은 것은?
제1조 회사의 설립은 조선 총독의 허가를 받아야 한다.
제5조 회사가 본령이나 본령에 의거하여 발하는 명령과 허가 조건을 위반하거나 또는 공공질서와 선량한 풍속에 반하는 행위를 할 때, 조선 총독은 사업의 정지와 금지, 지점의 폐쇄 또는 회사의 해산을 명할 수 있다.
1태형을 집행하는 헌병 경찰
2훈련을 받고 있는 별기군 군인
3국채 보상 운동에 참여하는 여성
4화폐 정리 사업에 따라 백동화를 교환하는 상인
정답 및 해설

이 법령이 시행된 시기에 볼 수 있는 모습은 태형을 집행하는 헌병 경찰이다.

회사 설립에 ‘조선 총독의 허가’를 받게 한 법령은 회사령으로, 1910년에 제정되어 1920년에 폐지되었다. 이 시기는 헌병 경찰제와 조선 태형령이 시행된 무단 통치기이다.

  • 별기군은 개항 이후인 1881년에 창설되어 회사령 이전의 일이다.
  • 국채 보상 운동은 1907년의 일로, 회사령 이전이다.
  • 화폐 정리 사업은 1905년에 시작되어 회사령 이전의 일이다.
문제 14
(가)와의 전쟁 중에 있었던 일로 옳은 것은?
(가)의 장군 살리타[撒禮塔]가 처인성을 공격하였다. 전란을 피하여 성안에 있던 한 승려가 살리타를 쏘아 죽였다. 나라에서 전공을 가상히 여겨 그에게 상장군을 제수하였다. 그 승려가 전공을 다른 사람에게 미루면서 말하기를, “전투할 때 저는 활과 화살이 없었으니 어찌 감히 큰 상을 받겠습니까.”라고 하며 굳게 사양하고 받지 않았다. 이에 그 승려를 섭랑장에 임명하였는데, 그는 바로 김윤후였다. 김윤후는 이후 계속된 (가)와/과의 전쟁에서 충주성 전투에 참전하는 등 크게 활약하였다.
1황룡사 9층 목탑이 소실되었다.
2새로운 부대인 별무반이 편성되었다.
3강감찬이 이끄는 부대가 귀주에서 대승을 거두었다.
4서산대사와 사명대사 등이 이끄는 승군이 활약하였다.
정답 및 해설

(가)는 몽골이며, 몽골과의 전쟁 중에 황룡사 9층 목탑이 소실되었다.

사료의 ‘살리타’, ‘처인성’, ‘김윤후’, ‘충주성 전투’가 고려의 대몽 항쟁을 확정하는 단서이다.

  • 별무반은 여진을 정벌하기 위해 숙종 때 윤관의 건의로 편성되었다.
  • 강감찬의 귀주 대첩은 거란의 침입을 물리친 전투이다.
  • 서산대사와 사명대사의 승군은 조선 임진왜란 때 활약하였다.
문제 15
다음과 같은 개혁안을 받아들인 국왕의 정책으로 옳은 것은?
왕이 백성을 다스리는 것은 집집마다 가서 날마다 살펴보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수령을 나누어 보내 백성의 이익과 손해를 살피게 하는 것입니다. 우리 태조께서 통일한 후에 외관을 두고자 하셨지만, 대개 초창기라 일이 번다하여 미처 겨를이 없었습니다. …(중략)… 비록 한 번에 모두 다 보낼 수는 없더라도 먼저 십수 곳의 주현을 아울러서 한 관아를 설치하고, 관아마다 2 ~ 3명의 관원을 두어 백성을 돌보는 임무를 맡기십시오.
1훈요 10조를 남겼다.
2개경에 국자감을 설립하였다.
3광덕·준풍 등의 연호를 사용하였다.
4쌍기의 건의를 받아들여 과거제를 실시하였다.
정답 및 해설

이 개혁안을 받아들인 왕은 고려 성종이며, 그는 개경에 국자감을 설립하였다.

지방에 ‘수령을 나누어 보내’ 달라는 건의는 최승로의 시무 28조 내용이다. 성종은 이를 받아들여 지방관을 파견하고 유교 정치 체제를 정비하였다.

  • 훈요 10조를 남긴 왕은 태조이다.
  • 광덕·준풍 등의 연호를 사용한 왕은 광종이다.
  • 쌍기의 건의로 과거제를 실시한 왕은 광종이다.
문제 16
밑줄 친 ‘정변’ 중에 있었던 사실로 옳은 것은?
10월 17일: 우정총국 개국 축하연을 계기로 김옥균 등이 정변을 일으키고, 임금을 경우궁으로 옮겼다.
10월 18일: 일본군은 궁궐 외곽 경비를 맡았다. 김옥균 등은 신정부를 구성하였다.
10월 19일: 청군이 개입하자 일본군은 후퇴하였고, 김옥균 등은 도피하였다.
1지계를 발급하였다.
2홍범 14조를 반포하였다.
3통리기무아문을 설치하였다.
4혜상공국 혁파를 주장하였다.
정답 및 해설

밑줄 친 ‘정변’은 갑신정변이며, 이때 개화당은 혜상공국 혁파를 주장하였다.

사료의 ‘우정총국 개국 축하연’, ‘김옥균’, ‘청군이 개입’이 갑신정변의 단서이다. 혜상공국 혁파는 정변 때 발표한 14개조 정강에 들어 있다.

  • 지계 발급은 대한 제국의 광무개혁 때 이루어졌다.
  • 홍범 14조는 갑오개혁 때 반포되었다.
  • 통리기무아문은 정변 이전인 개항 직후의 개화 정책으로 설치되었다.
문제 17
(가) 군사 조직에 대한 설명으로 옳은 것은?
일본군과 치열한 접전을 벌이고 있던 영국군은 일본어를 구사할 수 있는 인원이 필요하였고, 이를 (가) 측에 요청하였다. (가)에서는 영어와 일본어를 구사할 수 있는 공작대원 9명을 선발, 1943년 8월 인도 캘커타로 파견하였다. 이를 계기로 (가)은/는 영국군과 함께 인도·미얀마 전선에서 활동하게 되었다.
1황토현 전투에서 승리하였다.
2청산리 전투에서 대승리를 거두었다.
3쌍성보에서 중국군과 연합 작전을 펼쳤다.
4미국 전략 정보국(OSS)과 국내 진공 작전을 계획하였다.
정답 및 해설

(가)는 한국광복군이며, 미국 전략 정보국(OSS)과 국내 진공 작전을 계획하였다.

1943년 영국군의 요청으로 공작대원을 파견해 ‘인도·미얀마 전선’에서 활동하였다는 내용이 한국광복군을 가리킨다.

  • 황토현 전투에서 승리한 것은 동학 농민군이다.
  • 청산리 전투의 대승은 북로 군정서 등 독립군 연합 부대의 활약이다.
  • 쌍성보에서 중국군과 연합 작전을 펼친 것은 지청천이 이끈 한국 독립군이다.
문제 18
다음 글을 한국인 아동들이 암송하던 시기에 볼 수 있는 모습으로 옳은 것은?
1. 우리는 대일본 제국의 신민입니다.
2. 우리는 마음을 합하여 천황 폐하에게 충의를 다합니다.
3. 우리는 괴로움을 참고 몸과 마음을 단련하여 훌륭하고 강한 국민이 되겠습니다.
1민립 대학 설립 운동에 참여하는 청년
2일본식 성명을 강요하는 일본 관리
3서울 진공 작전을 전개한 13도 창의군
4브나로드 운동에 참여하여 한글을 가르치는 학생
정답 및 해설

이 글이 암송되던 시기에 볼 수 있는 모습은 일본식 성명을 강요하는 일본 관리이다.

‘대일본 제국의 신민’과 ‘천황 폐하에게 충의’는 황국 신민 서사의 내용으로, 1937년 이후 민족 말살 통치기에 암송이 강요되었다. 일본식 성명 강요도 같은 시기의 정책이다.

  • 민립 대학 설립 운동은 1920년대의 일이다.
  • 13도 창의군의 서울 진공 작전은 1908년의 일이다.
  • 브나로드 운동은 1930년대 전반에 전개되어 황국 신민 서사 이전의 일이다.
문제 19
다음 정책을 추진한 대통령이 재임한 기간의 경제 상황으로 옳은 것은?
친애하는 국민 여러분, 드디어 우리는 금융실명제를 실시합니다. 이 시간 이후 모든 금융 거래는 실명으로만 이루어집니다. 금융실명제가 실시되지 않고는 이 땅의 부정부패를 원천적으로 봉쇄할 수가 없습니다. 정치와 경제의 검은 유착을 단절할 수가 없습니다.
1제1차 경제 개발 5개년 계획을 추진하였다.
2경제 협력 개발 기구(OECD)에 가입하였다.
3국제 통화 기금의 구제 금융을 조기에 모두 상환하였다.
4베트남 파병과 건설 사업 참여로 외화를 획득할 수 있었다.
정답 및 해설

이 정책을 추진한 대통령은 김영삼이며, 재임 중 경제 협력 개발 기구(OECD)에 가입하였다.

‘금융실명제’ 실시는 김영삼 정부의 대표적 개혁이다. OECD 가입은 같은 정부 때인 1996년의 일이다.

  • 제1차 경제 개발 5개년 계획은 박정희 정부 때 추진되었다.
  • 국제 통화 기금의 구제 금융 조기 상환은 김대중 정부 때 이루어졌다.
  • 베트남 파병과 건설 사업 참여로 외화를 획득한 것은 박정희 정부 때이다.
문제 20
다음 자료가 발표된 민주화 운동은?
우리는 왜 총을 들 수밖에 없었는가? …(중략)… 정부 당국에서는 17일 야간에 계엄령을 확대 선포하고 일부 학생과 민주 인사, 정치인을 도무지 믿을 수 없는 구실로 불법 연행하였습니다. …(중략)… 계엄 당국은 18일 오후부터 공수 부대를 대량 투입하여 시내 곳곳에서 학생, 젊은이들에게 무차별 살상을 자행하였으니, …(중략)… 협상이 올바른 방향으로 진행되면 즉각 총을 놓겠습니다.
14·19 혁명
2부·마 민주 항쟁
35·18 민주화 운동
46월 민주 항쟁
정답 및 해설

이 자료가 발표된 민주화 운동은 5·18 민주화 운동이다.

‘계엄령을 확대 선포’, ‘공수 부대를 대량 투입’, ‘우리는 왜 총을 들 수밖에 없었는가’는 1980년 5월 신군부에 맞서 시민군이 무장 항쟁에 나선 상황을 보여 준다.

  • 4·19 혁명은 1960년 3·15 부정 선거에 맞서 이승만 정부를 무너뜨린 운동이다.
  • 부·마 민주 항쟁은 1979년 부산과 마산에서 유신 체제에 저항한 운동이다.
  • 6월 민주 항쟁은 1987년 대통령 직선제 개헌을 이끌어 낸 운동이다.
지역인재 9급 한국사 기출문제모두CBT · moducbt.com
22년 1회차
총 20문항 · 객관식 · 정답·해설 포함
문제 1
다음 유물이 사용된 시대에 대한 설명으로 옳지 않은 것은?

1주로 움집을 짓고 살았다.
2농경과 목축이 시작되었다.
3철제 농기구가 보급되었다.
4정착 생활이 시작되었다.
정답 및 해설

옳지 않은 설명은 철제 농기구가 보급되었다는 내용으로, 이는 철기 시대의 모습이다.

제시된 유물은 빗살무늬 토기, 곡식을 가는 갈돌과 갈판, 실을 뽑는 가락바퀴로, 모두 신석기 시대를 대표한다.

  • 움집을 짓고 살았다는 설명은 옳다. 신석기 사람들은 강가나 바닷가에 움집을 짓고 살았다.
  • 농경과 목축의 시작은 옳다. 신석기 시대에 조·피 등을 재배하고 가축을 기르기 시작했다.
  • 정착 생활의 시작은 옳다. 농경이 시작되면서 이동 생활에서 벗어나 한곳에 머물러 살게 되었다.
문제 2
밑줄 친 ‘이 나라’에 대한 설명으로 옳은 것은?
이 나라에는 왕이 있다. 모두 여섯 가지 가축 이름으로 관직명을 정하였는데, 마가·우가·저가·구가·대사·대사자·사자가 있다. …(중략)… 제가들은 별도로 사출도를 다스렸는데, 큰 곳은 수천 가, 작은 곳은 수백 가였다.
1고구려 미천왕의 공격을 받아 멸망하였다.
2천군이 소도에서 제사를 주관하였다.
3바다를 통해 낙랑과 왜에 철을 수출하였다.
4도둑질한 자는 물건값의 12배를 갚게 하였다.
정답 및 해설

밑줄 친 ‘이 나라’는 부여이며, 도둑질한 자에게 물건값의 12배를 갚게 한 1책 12법이 부여의 법 풍습이다.

사료의 ‘마가·우가·저가·구가’라는 가축 이름의 관직과, 제가가 별도로 다스린 ‘사출도’가 부여를 확정하는 단서이다.

  • 고구려 미천왕의 공격으로 축출된 것은 낙랑군이며, 부여가 아니다.
  • 천군이 소도에서 제사를 주관한 나라는 삼한이다.
  • 낙랑과 왜에 철을 수출한 나라는 변한(이후 가야)이다.
문제 3
밑줄 친 ‘백제역사유적지구’ 유적지에 해당하지 않는 것은?
2015년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등재된 백제역사유적지구는 8개 고고학 유적지로 이루어져 있다. 백제역사유적은 중국의 도시계획 원칙, 건축 기술, 예술, 종교를 수용하여 백제화(百濟化)한 증거를 보여주며, 이러한 발전을 통해 이룩한 세련된 백제의 문화를 일본 및 동아시아로 전파한 사실을 증언하고 있다.
1공주시 공산성
2부여군 정림사지
3서울시 몽촌토성
4익산시 왕궁리 유적
정답 및 해설

서울시 몽촌토성은 백제역사유적지구에 포함되지 않는다.

백제역사유적지구는 공주·부여·익산에 있는 웅진·사비 시기 유적 8곳으로 이루어져 있다. 몽촌토성은 그보다 앞선 한성 시기의 유적이다.

  • 공주시 공산성은 웅진 시기의 왕성으로, 유적지구에 포함된다.
  • 부여군 정림사지는 사비 시기의 절터로, 유적지구에 포함된다.
  • 익산시 왕궁리 유적은 사비 시기 무왕 대와 관련된 유적으로, 유적지구에 포함된다.
문제 4
밑줄 친 ‘이 기구’에 대한 설명으로 옳은 것은?
이 기구는 일시적인 전쟁 때문에 임시로 설치한 것으로서 국가의 중요한 일을 모두 다 맡긴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오늘에 와서는 큰일이건 작은 일이건 중요하지 않은 것이 없는데, 의정부는 한갓 헛된 이름만 남고 6조는 모두 그 직임을 상실하였습니다. 이 기구의 명칭은 ‘변방의 문제에 대비하는 것’인데, 과거 시험에 대한 판단이나 비빈(妃嬪)을 간택하는 등의 일까지도 모두 여기를 거쳐 나옵니다.
1고려만의 독자적인 기구였다.
2흥선대원군에 의해 폐지되었다.
3사헌부, 사간원과 함께 3사의 하나였다.
4왕명 출납을 담당한 국왕의 비서 기관이었다.
정답 및 해설

‘이 기구’는 비변사이며, 비변사는 흥선대원군에 의해 폐지되었다.

‘변방의 문제에 대비’한다는 명칭과, 임시 기구였으나 권한이 커져 의정부와 6조가 유명무실해졌다는 내용이 단서이다. 흥선대원군은 의정부와 삼군부의 기능을 되살리면서 비변사를 없앴다.

  • 비변사는 조선의 기구이며, 고려의 독자적 기구는 도병마사와 식목도감이다.
  • 사헌부, 사간원과 함께 3사를 이룬 기구는 홍문관이다.
  • 왕명 출납을 담당한 국왕의 비서 기관은 승정원이다.
문제 5
(가) 시기에 있었던 사실로 옳은 것은?
백제의
고구려
평양성 공격
→고구려의
백제 한성
함락
→(가)→신라의
관산성 전투
승리
1백제가 사비로 천도하였다.
2신라가 대가야를 정복하였다.
3고구려가 천리장성을 축조하였다.
4고구려가 신라에 침입한 왜를 격퇴하였다.
정답 및 해설

(가) 시기의 사실은 백제의 사비 천도(538)이다.

(가)는 고구려의 백제 한성 함락(475)과 신라의 관산성 전투 승리(554) 사이이다. 성왕의 사비 천도는 538년이므로 이 구간에 들어간다.

  • 신라의 대가야 정복은 562년으로, 관산성 전투 이후의 일이다.
  • 고구려의 천리장성 축조는 7세기 전반에 시작되어 관산성 전투보다 훨씬 뒤의 일이다.
  • 고구려가 신라에 침입한 왜를 격퇴한 것은 400년 광개토 대왕 때로, 한성 함락 이전의 일이다.
문제 6
(가), (나)에 대한 설명으로 옳은 것은?

1(가) – 신라 선덕여왕 때 천체 관측을 위해 만들었다.
2(가) – 세종 때 장영실이 시간을 측정하기 위해 만든 물시계이다.
3(나) – 정약용이 『기기도설』을 참고해 만들었다.
4(나) – 홍대용이 천체의 운행을 연구하기 위해 사용하였다.
정답 및 해설

옳은 설명은 (나) 혼천의를 홍대용이 천체 운행 연구에 사용했다는 내용이다.

(가)는 솥처럼 오목한 모양의 해시계인 앙부일구이고, (나)는 여러 개의 고리로 천체의 움직임을 재는 관측 기구인 혼천의이다. 홍대용은 혼천의를 만들어 농수각에 두고 천체를 연구하였다.

  • 신라 선덕여왕 때 천체 관측을 위해 만든 것은 첨성대이므로, (가) 앙부일구의 설명이 아니다.
  • 세종 때 장영실이 만든 물시계는 자격루이다. (가) 앙부일구는 해 그림자로 시각을 재는 해시계이다.
  • 정약용이 『기기도설』을 참고해 만든 것은 거중기이므로, (나) 혼천의의 설명이 아니다.
문제 7
밑줄 친 ‘이 정책’을 시행한 국왕의 재위 기간에 있었던 일로 옳은 것은?
신돈이 전국에 방을 붙여 알리기를 “…(중략)… 이제 도감을 설치하여 바로잡고자 하니 개경은 15일을 기한으로 하고 전국의 도(道)에서는 40일을 기한으로 하여 스스로 잘못을 알고 고치는 자는 죄를 묻지 않을 것이나, 기한을 넘겨 일이 발각된 자는 조사하여 다스릴 것이다.”라고 하였다. 이 정책이 시행되자 권세가 중에서 전민을 빼앗은 자들이 원래 주인에게 많이 돌려주어 온 나라가 기뻐하였다.
1지눌이 수선사 결사를 결성하였다.
2일연이 『삼국유사』를 편찬하였다.
3홍건적의 침입으로 개경이 함락되었다.
4『직지심체요절』이 청주 흥덕사에서 금속활자로 인쇄되었다.
정답 및 해설

‘이 정책’을 시행한 왕은 공민왕이며, 그 재위 기간에 홍건적의 침입으로 개경이 함락되었다.

사료의 ‘신돈’, ‘도감’, 권세가가 빼앗은 전민을 원래 주인에게 돌려주었다는 내용은 공민왕 때의 전민변정도감 설치를 가리킨다.

  • 지눌의 수선사 결사는 무신 집권기의 일이다.
  • 일연의 『삼국유사』 편찬은 충렬왕 때의 일이다.
  • 『직지심체요절』의 금속활자 인쇄는 공민왕 사후인 우왕 때의 일이다.
문제 8
밑줄 친 ‘임금’의 재위 기간에 이루어진 업적으로 옳은 것은?
이달에 임금이 친히 언문 28자를 지었는데, 그 글자가 옛 전자(篆字)를 모방하였고, 초성·중성·종성으로 나뉘어 있어 합한 이후에야 글자가 이루어졌다. 무릇 한자와 우리나라 말을 모두 쓸 수 있으며, 글자는 비록 쉽고 간단하지만 표현할 수 있는 것이 무궁무진하였으니, 이를 ‘백성을 가르치는 바른 소리’라고 일렀다.
1『고려사』를 완성하였다.
2『경국대전』을 반포하였다.
3『향약집성방』을 편찬하였다.
4「천상열차분야지도」를 제작하였다.
정답 및 해설

밑줄 친 ‘임금’은 세종이며, 그 재위 기간의 업적은 『향약집성방』 편찬이다.

사료의 ‘언문 28자’와 ‘백성을 가르치는 바른 소리’는 세종의 훈민정음 창제를 가리킨다. 『향약집성방』은 우리 풍토에 맞는 약재와 처방을 정리한 의서이다.

  • 『고려사』는 세종 사후 문종 때 완성되었다.
  • 『경국대전』은 성종 때 완성되어 반포되었다.
  • 「천상열차분야지도」는 태조 때 제작되었다.
문제 9
밑줄 친 ‘임금’이 실시한 정책으로 옳은 것은?
○ 3월 4일에 명나라의 제독 유정이 후금의 군대와 싸우다 전사하니 조선군 지휘관 강홍립이 후금에 항복하였다.
○ 4월에 후금에 있던 강홍립이 임금에게 글을 올리기를 “3월 4일에 행군하였는데 …(중략)… 신이 부득이 화해를 청하며 후금의 장수에게 말하기를 ‘우리나라와 귀국이 조금도 원한이 없고, 이번 군사 출동도 원래 우리나라의 뜻이 아니다. 서로 싸우기로 한다면 우리 군사는 죽음을 각오하였으니, 귀국에 이득이 될 것이 무엇이 있겠는가? 강화하는 것만 못하다.’라고 하였더니, 후금의 장수가 승낙하였습니다.”라고 하였다.
1대동법을 경기도에서 시행하였다.
2초계문신제를 실시하였다.
3『대전통편』을 편찬하였다.
4친명배금(親明背金) 정책을 폈다.
정답 및 해설

밑줄 친 ‘임금’은 광해군이며, 그는 대동법을 경기도에서 시행하였다.

사료의 ‘강홍립’이 후금에 항복하고 ‘이번 군사 출동도 원래 우리나라의 뜻이 아니다’라고 말한 내용은 광해군의 중립 외교를 보여 준다.

  • 초계문신제는 정조가 실시하였다.
  • 『대전통편』은 정조 때 편찬되었다.
  • 친명배금 정책은 광해군을 몰아낸 인조반정 이후 인조 때 추진되었다.
문제 10
밑줄 친 ‘그’에 대한 설명으로 옳은 것은?
세손에서 국왕으로 즉위한 그는 붕당에 관계없이 능력이 있는 사람을 고루 등용하였다. 또한 수원에 화성을 건설하여 정치적, 군사적 기능을 부여하고 이를 중심으로 정치 개혁을 완성하려 하였다.
1홍경래의 난이 발생하여 통치에 어려움을 겪었다.
2삼정이정청을 설치하여 삼정의 문란을 시정하려 하였다.
3백성의 군역 부담을 줄이기 위해 균역법을 처음 시행하였다.
4국왕의 군사적 기반을 확보하기 위해 장용영을 설치하였다.
정답 및 해설

밑줄 친 ‘그’는 정조이며, 국왕의 군사적 기반을 확보하기 위해 장용영을 설치하였다.

사료의 ‘세손에서 국왕으로 즉위’, 붕당에 관계없는 인재 등용, ‘수원에 화성을 건설’이 정조를 확정하는 단서이다.

  • 홍경래의 난은 순조 때 일어났다.
  • 삼정이정청은 임술 농민 봉기 이후 철종 때 설치되었다.
  • 균역법을 처음 시행한 왕은 영조이다.
문제 11
다음 글을 창간사로 게재한 신문으로 옳은 것은?
우리 조정에서도 박문국을 설치하고 관리를 두어 외국의 신문을 폭넓게 번역하고 아울러 국내의 일까지 기재하여 나라 안에 알리는 동시에 다른 나라에까지 공포하기로 하고, …(중략)… 견문을 넓히고, 여러 가지 의문점을 풀어 주고, 상업에도 도움을 주고자 하였다.
1독립신문
2황성신문
3한성순보
4제국신문
정답 및 해설

이 창간사를 실은 신문은 한성순보이다.

사료의 ‘우리 조정’이 설치한 ‘박문국’이 결정적 단서이다. 한성순보는 박문국에서 발행한 정부 관보 성격의 신문이다.

  • 독립신문은 서재필이 창간한 민간 신문으로, 박문국과 관련이 없다.
  • 황성신문은 국한문 혼용의 민간 신문으로, 「시일야방성대곡」을 실은 것으로 유명하다.
  • 제국신문은 순 한글로 발행되어 서민층과 부녀자를 주된 독자로 삼은 민간 신문이다.
문제 12
다음 자료와 관련된 운동에 대한 설명으로 옳은 것은?
지금 나라의 빚이 1,300만 원이니 이는 우리 대한제국의 존망에 관계된 일이다. 이를 갚으면 나라를 보존하게 되고 못 갚으면 나라를 잃고 만다. 형세가 여기에 이르렀으나 현재 국고 형편으로는 갚기 어렵다. 그러므로 삼천리강토는 장차 우리 국가 소유나 백성 소유가 아니게 될 것이다. …(중략)… 다만 큰 노력이나 손해를 보지 않고도 돈을 모으는 방법이 하나 있다. 2천만 대중이 3개월 동안 담배를 끊고 그 돈을 각자 한 달에 20전씩 낸다면 1,300만 원을 모을 수 있다. 만약 부족하다면 1원, 10원, 100원, 1,000원 등을 따로 기부하는 사람이 있을 것이다.
1일본의 황무지 개간권 요구를 철회시켰다.
2공화정에 바탕을 둔 근대 국가 건설을 목표로 삼았다.
3평양에서 시작되었으며, 토산품 애용, 근검저축 등을 강조하였다.
4대구에서 시작되었으며, 대한매일신보사 등 언론 기관의 후원으로 확산되었다.
정답 및 해설

자료의 운동은 국채 보상 운동으로, 대구에서 시작되어 대한매일신보사 등 언론 기관의 후원으로 확산되었다.

‘나라의 빚이 1,300만 원’, ‘담배를 끊고’ 그 돈을 모아 갚자는 내용이 국채 보상 운동의 단서이다.

  • 일본의 황무지 개간권 요구를 철회시킨 것은 보안회의 활동이다.
  • 공화정에 바탕을 둔 근대 국가 건설을 목표로 삼은 단체는 신민회이다.
  • 평양에서 시작되어 토산품 애용을 강조한 운동은 일제 강점기의 물산 장려 운동이다.
문제 13
다음 법령이 시행된 시기에 볼 수 있는 모습으로 옳은 것은?
제1조 회사의 설립은 조선 총독의 허가를 받아야 한다.
제5조 회사가 본령이나 본령에 의거하여 발하는 명령과 허가 조건을 위반하거나 또는 공공질서와 선량한 풍속에 반하는 행위를 할 때, 조선 총독은 사업의 정지와 금지, 지점의 폐쇄 또는 회사의 해산을 명할 수 있다.
1태형을 집행하는 헌병 경찰
2훈련을 받고 있는 별기군 군인
3국채 보상 운동에 참여하는 여성
4화폐 정리 사업에 따라 백동화를 교환하는 상인
정답 및 해설

이 법령이 시행된 시기에 볼 수 있는 모습은 태형을 집행하는 헌병 경찰이다.

회사 설립에 ‘조선 총독의 허가’를 받게 한 법령은 회사령으로, 1910년에 제정되어 1920년에 폐지되었다. 이 시기는 헌병 경찰제와 조선 태형령이 시행된 무단 통치기이다.

  • 별기군은 개항 이후인 1881년에 창설되어 회사령 이전의 일이다.
  • 국채 보상 운동은 1907년의 일로, 회사령 이전이다.
  • 화폐 정리 사업은 1905년에 시작되어 회사령 이전의 일이다.
문제 14
(가)와의 전쟁 중에 있었던 일로 옳은 것은?
(가)의 장군 살리타[撒禮塔]가 처인성을 공격하였다. 전란을 피하여 성안에 있던 한 승려가 살리타를 쏘아 죽였다. 나라에서 전공을 가상히 여겨 그에게 상장군을 제수하였다. 그 승려가 전공을 다른 사람에게 미루면서 말하기를, “전투할 때 저는 활과 화살이 없었으니 어찌 감히 큰 상을 받겠습니까.”라고 하며 굳게 사양하고 받지 않았다. 이에 그 승려를 섭랑장에 임명하였는데, 그는 바로 김윤후였다. 김윤후는 이후 계속된 (가)와/과의 전쟁에서 충주성 전투에 참전하는 등 크게 활약하였다.
1황룡사 9층 목탑이 소실되었다.
2새로운 부대인 별무반이 편성되었다.
3강감찬이 이끄는 부대가 귀주에서 대승을 거두었다.
4서산대사와 사명대사 등이 이끄는 승군이 활약하였다.
정답 및 해설

(가)는 몽골이며, 몽골과의 전쟁 중에 황룡사 9층 목탑이 소실되었다.

사료의 ‘살리타’, ‘처인성’, ‘김윤후’, ‘충주성 전투’가 고려의 대몽 항쟁을 확정하는 단서이다.

  • 별무반은 여진을 정벌하기 위해 숙종 때 윤관의 건의로 편성되었다.
  • 강감찬의 귀주 대첩은 거란의 침입을 물리친 전투이다.
  • 서산대사와 사명대사의 승군은 조선 임진왜란 때 활약하였다.
문제 15
다음과 같은 개혁안을 받아들인 국왕의 정책으로 옳은 것은?
왕이 백성을 다스리는 것은 집집마다 가서 날마다 살펴보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수령을 나누어 보내 백성의 이익과 손해를 살피게 하는 것입니다. 우리 태조께서 통일한 후에 외관을 두고자 하셨지만, 대개 초창기라 일이 번다하여 미처 겨를이 없었습니다. …(중략)… 비록 한 번에 모두 다 보낼 수는 없더라도 먼저 십수 곳의 주현을 아울러서 한 관아를 설치하고, 관아마다 2 ~ 3명의 관원을 두어 백성을 돌보는 임무를 맡기십시오.
1훈요 10조를 남겼다.
2개경에 국자감을 설립하였다.
3광덕·준풍 등의 연호를 사용하였다.
4쌍기의 건의를 받아들여 과거제를 실시하였다.
정답 및 해설

이 개혁안을 받아들인 왕은 고려 성종이며, 그는 개경에 국자감을 설립하였다.

지방에 ‘수령을 나누어 보내’ 달라는 건의는 최승로의 시무 28조 내용이다. 성종은 이를 받아들여 지방관을 파견하고 유교 정치 체제를 정비하였다.

  • 훈요 10조를 남긴 왕은 태조이다.
  • 광덕·준풍 등의 연호를 사용한 왕은 광종이다.
  • 쌍기의 건의로 과거제를 실시한 왕은 광종이다.
문제 16
밑줄 친 ‘정변’ 중에 있었던 사실로 옳은 것은?
10월 17일: 우정총국 개국 축하연을 계기로 김옥균 등이 정변을 일으키고, 임금을 경우궁으로 옮겼다.
10월 18일: 일본군은 궁궐 외곽 경비를 맡았다. 김옥균 등은 신정부를 구성하였다.
10월 19일: 청군이 개입하자 일본군은 후퇴하였고, 김옥균 등은 도피하였다.
1지계를 발급하였다.
2홍범 14조를 반포하였다.
3통리기무아문을 설치하였다.
4혜상공국 혁파를 주장하였다.
정답 및 해설

밑줄 친 ‘정변’은 갑신정변이며, 이때 개화당은 혜상공국 혁파를 주장하였다.

사료의 ‘우정총국 개국 축하연’, ‘김옥균’, ‘청군이 개입’이 갑신정변의 단서이다. 혜상공국 혁파는 정변 때 발표한 14개조 정강에 들어 있다.

  • 지계 발급은 대한 제국의 광무개혁 때 이루어졌다.
  • 홍범 14조는 갑오개혁 때 반포되었다.
  • 통리기무아문은 정변 이전인 개항 직후의 개화 정책으로 설치되었다.
문제 17
(가) 군사 조직에 대한 설명으로 옳은 것은?
일본군과 치열한 접전을 벌이고 있던 영국군은 일본어를 구사할 수 있는 인원이 필요하였고, 이를 (가) 측에 요청하였다. (가)에서는 영어와 일본어를 구사할 수 있는 공작대원 9명을 선발, 1943년 8월 인도 캘커타로 파견하였다. 이를 계기로 (가)은/는 영국군과 함께 인도·미얀마 전선에서 활동하게 되었다.
1황토현 전투에서 승리하였다.
2청산리 전투에서 대승리를 거두었다.
3쌍성보에서 중국군과 연합 작전을 펼쳤다.
4미국 전략 정보국(OSS)과 국내 진공 작전을 계획하였다.
정답 및 해설

(가)는 한국광복군이며, 미국 전략 정보국(OSS)과 국내 진공 작전을 계획하였다.

1943년 영국군의 요청으로 공작대원을 파견해 ‘인도·미얀마 전선’에서 활동하였다는 내용이 한국광복군을 가리킨다.

  • 황토현 전투에서 승리한 것은 동학 농민군이다.
  • 청산리 전투의 대승은 북로 군정서 등 독립군 연합 부대의 활약이다.
  • 쌍성보에서 중국군과 연합 작전을 펼친 것은 지청천이 이끈 한국 독립군이다.
문제 18
다음 글을 한국인 아동들이 암송하던 시기에 볼 수 있는 모습으로 옳은 것은?
1. 우리는 대일본 제국의 신민입니다.
2. 우리는 마음을 합하여 천황 폐하에게 충의를 다합니다.
3. 우리는 괴로움을 참고 몸과 마음을 단련하여 훌륭하고 강한 국민이 되겠습니다.
1민립 대학 설립 운동에 참여하는 청년
2일본식 성명을 강요하는 일본 관리
3서울 진공 작전을 전개한 13도 창의군
4브나로드 운동에 참여하여 한글을 가르치는 학생
정답 및 해설

이 글이 암송되던 시기에 볼 수 있는 모습은 일본식 성명을 강요하는 일본 관리이다.

‘대일본 제국의 신민’과 ‘천황 폐하에게 충의’는 황국 신민 서사의 내용으로, 1937년 이후 민족 말살 통치기에 암송이 강요되었다. 일본식 성명 강요도 같은 시기의 정책이다.

  • 민립 대학 설립 운동은 1920년대의 일이다.
  • 13도 창의군의 서울 진공 작전은 1908년의 일이다.
  • 브나로드 운동은 1930년대 전반에 전개되어 황국 신민 서사 이전의 일이다.
문제 19
다음 정책을 추진한 대통령이 재임한 기간의 경제 상황으로 옳은 것은?
친애하는 국민 여러분, 드디어 우리는 금융실명제를 실시합니다. 이 시간 이후 모든 금융 거래는 실명으로만 이루어집니다. 금융실명제가 실시되지 않고는 이 땅의 부정부패를 원천적으로 봉쇄할 수가 없습니다. 정치와 경제의 검은 유착을 단절할 수가 없습니다.
1제1차 경제 개발 5개년 계획을 추진하였다.
2경제 협력 개발 기구(OECD)에 가입하였다.
3국제 통화 기금의 구제 금융을 조기에 모두 상환하였다.
4베트남 파병과 건설 사업 참여로 외화를 획득할 수 있었다.
정답 및 해설

이 정책을 추진한 대통령은 김영삼이며, 재임 중 경제 협력 개발 기구(OECD)에 가입하였다.

‘금융실명제’ 실시는 김영삼 정부의 대표적 개혁이다. OECD 가입은 같은 정부 때인 1996년의 일이다.

  • 제1차 경제 개발 5개년 계획은 박정희 정부 때 추진되었다.
  • 국제 통화 기금의 구제 금융 조기 상환은 김대중 정부 때 이루어졌다.
  • 베트남 파병과 건설 사업 참여로 외화를 획득한 것은 박정희 정부 때이다.
문제 20
다음 자료가 발표된 민주화 운동은?
우리는 왜 총을 들 수밖에 없었는가? …(중략)… 정부 당국에서는 17일 야간에 계엄령을 확대 선포하고 일부 학생과 민주 인사, 정치인을 도무지 믿을 수 없는 구실로 불법 연행하였습니다. …(중략)… 계엄 당국은 18일 오후부터 공수 부대를 대량 투입하여 시내 곳곳에서 학생, 젊은이들에게 무차별 살상을 자행하였으니, …(중략)… 협상이 올바른 방향으로 진행되면 즉각 총을 놓겠습니다.
14·19 혁명
2부·마 민주 항쟁
35·18 민주화 운동
46월 민주 항쟁
정답 및 해설

이 자료가 발표된 민주화 운동은 5·18 민주화 운동이다.

‘계엄령을 확대 선포’, ‘공수 부대를 대량 투입’, ‘우리는 왜 총을 들 수밖에 없었는가’는 1980년 5월 신군부에 맞서 시민군이 무장 항쟁에 나선 상황을 보여 준다.

  • 4·19 혁명은 1960년 3·15 부정 선거에 맞서 이승만 정부를 무너뜨린 운동이다.
  • 부·마 민주 항쟁은 1979년 부산과 마산에서 유신 체제에 저항한 운동이다.
  • 6월 민주 항쟁은 1987년 대통령 직선제 개헌을 이끌어 낸 운동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