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옳지 않은 설명은 철제 농기구가 보급되었다는 내용으로, 이는 철기 시대의 모습이다.
제시된 유물은 빗살무늬 토기, 곡식을 가는 갈돌과 갈판, 실을 뽑는 가락바퀴로, 모두 신석기 시대를 대표한다.
- 움집을 짓고 살았다는 설명은 옳다. 신석기 사람들은 강가나 바닷가에 움집을 짓고 살았다.
- 농경과 목축의 시작은 옳다. 신석기 시대에 조·피 등을 재배하고 가축을 기르기 시작했다.
- 정착 생활의 시작은 옳다. 농경이 시작되면서 이동 생활에서 벗어나 한곳에 머물러 살게 되었다.
밑줄 친 ‘이 나라’는 부여이며, 도둑질한 자에게 물건값의 12배를 갚게 한 1책 12법이 부여의 법 풍습이다.
사료의 ‘마가·우가·저가·구가’라는 가축 이름의 관직과, 제가가 별도로 다스린 ‘사출도’가 부여를 확정하는 단서이다.
- 고구려 미천왕의 공격으로 축출된 것은 낙랑군이며, 부여가 아니다.
- 천군이 소도에서 제사를 주관한 나라는 삼한이다.
- 낙랑과 왜에 철을 수출한 나라는 변한(이후 가야)이다.
서울시 몽촌토성은 백제역사유적지구에 포함되지 않는다.
백제역사유적지구는 공주·부여·익산에 있는 웅진·사비 시기 유적 8곳으로 이루어져 있다. 몽촌토성은 그보다 앞선 한성 시기의 유적이다.
- 공주시 공산성은 웅진 시기의 왕성으로, 유적지구에 포함된다.
- 부여군 정림사지는 사비 시기의 절터로, 유적지구에 포함된다.
- 익산시 왕궁리 유적은 사비 시기 무왕 대와 관련된 유적으로, 유적지구에 포함된다.
‘이 기구’는 비변사이며, 비변사는 흥선대원군에 의해 폐지되었다.
‘변방의 문제에 대비’한다는 명칭과, 임시 기구였으나 권한이 커져 의정부와 6조가 유명무실해졌다는 내용이 단서이다. 흥선대원군은 의정부와 삼군부의 기능을 되살리면서 비변사를 없앴다.
- 비변사는 조선의 기구이며, 고려의 독자적 기구는 도병마사와 식목도감이다.
- 사헌부, 사간원과 함께 3사를 이룬 기구는 홍문관이다.
- 왕명 출납을 담당한 국왕의 비서 기관은 승정원이다.
| 백제의 고구려 평양성 공격 | → | 고구려의 백제 한성 함락 | → | (가) | → | 신라의 관산성 전투 승리 |
(가) 시기의 사실은 백제의 사비 천도(538)이다.
(가)는 고구려의 백제 한성 함락(475)과 신라의 관산성 전투 승리(554) 사이이다. 성왕의 사비 천도는 538년이므로 이 구간에 들어간다.
- 신라의 대가야 정복은 562년으로, 관산성 전투 이후의 일이다.
- 고구려의 천리장성 축조는 7세기 전반에 시작되어 관산성 전투보다 훨씬 뒤의 일이다.
- 고구려가 신라에 침입한 왜를 격퇴한 것은 400년 광개토 대왕 때로, 한성 함락 이전의 일이다.

옳은 설명은 (나) 혼천의를 홍대용이 천체 운행 연구에 사용했다는 내용이다.
(가)는 솥처럼 오목한 모양의 해시계인 앙부일구이고, (나)는 여러 개의 고리로 천체의 움직임을 재는 관측 기구인 혼천의이다. 홍대용은 혼천의를 만들어 농수각에 두고 천체를 연구하였다.
- 신라 선덕여왕 때 천체 관측을 위해 만든 것은 첨성대이므로, (가) 앙부일구의 설명이 아니다.
- 세종 때 장영실이 만든 물시계는 자격루이다. (가) 앙부일구는 해 그림자로 시각을 재는 해시계이다.
- 정약용이 『기기도설』을 참고해 만든 것은 거중기이므로, (나) 혼천의의 설명이 아니다.
‘이 정책’을 시행한 왕은 공민왕이며, 그 재위 기간에 홍건적의 침입으로 개경이 함락되었다.
사료의 ‘신돈’, ‘도감’, 권세가가 빼앗은 전민을 원래 주인에게 돌려주었다는 내용은 공민왕 때의 전민변정도감 설치를 가리킨다.
- 지눌의 수선사 결사는 무신 집권기의 일이다.
- 일연의 『삼국유사』 편찬은 충렬왕 때의 일이다.
- 『직지심체요절』의 금속활자 인쇄는 공민왕 사후인 우왕 때의 일이다.
밑줄 친 ‘임금’은 세종이며, 그 재위 기간의 업적은 『향약집성방』 편찬이다.
사료의 ‘언문 28자’와 ‘백성을 가르치는 바른 소리’는 세종의 훈민정음 창제를 가리킨다. 『향약집성방』은 우리 풍토에 맞는 약재와 처방을 정리한 의서이다.
- 『고려사』는 세종 사후 문종 때 완성되었다.
- 『경국대전』은 성종 때 완성되어 반포되었다.
- 「천상열차분야지도」는 태조 때 제작되었다.
○ 4월에 후금에 있던 강홍립이 임금에게 글을 올리기를 “3월 4일에 행군하였는데 …(중략)… 신이 부득이 화해를 청하며 후금의 장수에게 말하기를 ‘우리나라와 귀국이 조금도 원한이 없고, 이번 군사 출동도 원래 우리나라의 뜻이 아니다. 서로 싸우기로 한다면 우리 군사는 죽음을 각오하였으니, 귀국에 이득이 될 것이 무엇이 있겠는가? 강화하는 것만 못하다.’라고 하였더니, 후금의 장수가 승낙하였습니다.”라고 하였다.
밑줄 친 ‘임금’은 광해군이며, 그는 대동법을 경기도에서 시행하였다.
사료의 ‘강홍립’이 후금에 항복하고 ‘이번 군사 출동도 원래 우리나라의 뜻이 아니다’라고 말한 내용은 광해군의 중립 외교를 보여 준다.
- 초계문신제는 정조가 실시하였다.
- 『대전통편』은 정조 때 편찬되었다.
- 친명배금 정책은 광해군을 몰아낸 인조반정 이후 인조 때 추진되었다.
밑줄 친 ‘그’는 정조이며, 국왕의 군사적 기반을 확보하기 위해 장용영을 설치하였다.
사료의 ‘세손에서 국왕으로 즉위’, 붕당에 관계없는 인재 등용, ‘수원에 화성을 건설’이 정조를 확정하는 단서이다.
- 홍경래의 난은 순조 때 일어났다.
- 삼정이정청은 임술 농민 봉기 이후 철종 때 설치되었다.
- 균역법을 처음 시행한 왕은 영조이다.
이 창간사를 실은 신문은 한성순보이다.
사료의 ‘우리 조정’이 설치한 ‘박문국’이 결정적 단서이다. 한성순보는 박문국에서 발행한 정부 관보 성격의 신문이다.
- 독립신문은 서재필이 창간한 민간 신문으로, 박문국과 관련이 없다.
- 황성신문은 국한문 혼용의 민간 신문으로, 「시일야방성대곡」을 실은 것으로 유명하다.
- 제국신문은 순 한글로 발행되어 서민층과 부녀자를 주된 독자로 삼은 민간 신문이다.
자료의 운동은 국채 보상 운동으로, 대구에서 시작되어 대한매일신보사 등 언론 기관의 후원으로 확산되었다.
‘나라의 빚이 1,300만 원’, ‘담배를 끊고’ 그 돈을 모아 갚자는 내용이 국채 보상 운동의 단서이다.
- 일본의 황무지 개간권 요구를 철회시킨 것은 보안회의 활동이다.
- 공화정에 바탕을 둔 근대 국가 건설을 목표로 삼은 단체는 신민회이다.
- 평양에서 시작되어 토산품 애용을 강조한 운동은 일제 강점기의 물산 장려 운동이다.
제5조 회사가 본령이나 본령에 의거하여 발하는 명령과 허가 조건을 위반하거나 또는 공공질서와 선량한 풍속에 반하는 행위를 할 때, 조선 총독은 사업의 정지와 금지, 지점의 폐쇄 또는 회사의 해산을 명할 수 있다.
이 법령이 시행된 시기에 볼 수 있는 모습은 태형을 집행하는 헌병 경찰이다.
회사 설립에 ‘조선 총독의 허가’를 받게 한 법령은 회사령으로, 1910년에 제정되어 1920년에 폐지되었다. 이 시기는 헌병 경찰제와 조선 태형령이 시행된 무단 통치기이다.
- 별기군은 개항 이후인 1881년에 창설되어 회사령 이전의 일이다.
- 국채 보상 운동은 1907년의 일로, 회사령 이전이다.
- 화폐 정리 사업은 1905년에 시작되어 회사령 이전의 일이다.
(가)는 몽골이며, 몽골과의 전쟁 중에 황룡사 9층 목탑이 소실되었다.
사료의 ‘살리타’, ‘처인성’, ‘김윤후’, ‘충주성 전투’가 고려의 대몽 항쟁을 확정하는 단서이다.
- 별무반은 여진을 정벌하기 위해 숙종 때 윤관의 건의로 편성되었다.
- 강감찬의 귀주 대첩은 거란의 침입을 물리친 전투이다.
- 서산대사와 사명대사의 승군은 조선 임진왜란 때 활약하였다.
이 개혁안을 받아들인 왕은 고려 성종이며, 그는 개경에 국자감을 설립하였다.
지방에 ‘수령을 나누어 보내’ 달라는 건의는 최승로의 시무 28조 내용이다. 성종은 이를 받아들여 지방관을 파견하고 유교 정치 체제를 정비하였다.
- 훈요 10조를 남긴 왕은 태조이다.
- 광덕·준풍 등의 연호를 사용한 왕은 광종이다.
- 쌍기의 건의로 과거제를 실시한 왕은 광종이다.
10월 18일: 일본군은 궁궐 외곽 경비를 맡았다. 김옥균 등은 신정부를 구성하였다.
10월 19일: 청군이 개입하자 일본군은 후퇴하였고, 김옥균 등은 도피하였다.
밑줄 친 ‘정변’은 갑신정변이며, 이때 개화당은 혜상공국 혁파를 주장하였다.
사료의 ‘우정총국 개국 축하연’, ‘김옥균’, ‘청군이 개입’이 갑신정변의 단서이다. 혜상공국 혁파는 정변 때 발표한 14개조 정강에 들어 있다.
- 지계 발급은 대한 제국의 광무개혁 때 이루어졌다.
- 홍범 14조는 갑오개혁 때 반포되었다.
- 통리기무아문은 정변 이전인 개항 직후의 개화 정책으로 설치되었다.
(가)는 한국광복군이며, 미국 전략 정보국(OSS)과 국내 진공 작전을 계획하였다.
1943년 영국군의 요청으로 공작대원을 파견해 ‘인도·미얀마 전선’에서 활동하였다는 내용이 한국광복군을 가리킨다.
- 황토현 전투에서 승리한 것은 동학 농민군이다.
- 청산리 전투의 대승은 북로 군정서 등 독립군 연합 부대의 활약이다.
- 쌍성보에서 중국군과 연합 작전을 펼친 것은 지청천이 이끈 한국 독립군이다.
2. 우리는 마음을 합하여 천황 폐하에게 충의를 다합니다.
3. 우리는 괴로움을 참고 몸과 마음을 단련하여 훌륭하고 강한 국민이 되겠습니다.
이 글이 암송되던 시기에 볼 수 있는 모습은 일본식 성명을 강요하는 일본 관리이다.
‘대일본 제국의 신민’과 ‘천황 폐하에게 충의’는 황국 신민 서사의 내용으로, 1937년 이후 민족 말살 통치기에 암송이 강요되었다. 일본식 성명 강요도 같은 시기의 정책이다.
- 민립 대학 설립 운동은 1920년대의 일이다.
- 13도 창의군의 서울 진공 작전은 1908년의 일이다.
- 브나로드 운동은 1930년대 전반에 전개되어 황국 신민 서사 이전의 일이다.
이 정책을 추진한 대통령은 김영삼이며, 재임 중 경제 협력 개발 기구(OECD)에 가입하였다.
‘금융실명제’ 실시는 김영삼 정부의 대표적 개혁이다. OECD 가입은 같은 정부 때인 1996년의 일이다.
- 제1차 경제 개발 5개년 계획은 박정희 정부 때 추진되었다.
- 국제 통화 기금의 구제 금융 조기 상환은 김대중 정부 때 이루어졌다.
- 베트남 파병과 건설 사업 참여로 외화를 획득한 것은 박정희 정부 때이다.
이 자료가 발표된 민주화 운동은 5·18 민주화 운동이다.
‘계엄령을 확대 선포’, ‘공수 부대를 대량 투입’, ‘우리는 왜 총을 들 수밖에 없었는가’는 1980년 5월 신군부에 맞서 시민군이 무장 항쟁에 나선 상황을 보여 준다.
- 4·19 혁명은 1960년 3·15 부정 선거에 맞서 이승만 정부를 무너뜨린 운동이다.
- 부·마 민주 항쟁은 1979년 부산과 마산에서 유신 체제에 저항한 운동이다.
- 6월 민주 항쟁은 1987년 대통령 직선제 개헌을 이끌어 낸 운동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