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상을 뽑는 이 제도는 백제의 정사암 회의이므로, 온조가 건국하였다는 설명이 옳다.
‘정사암’ 위에 후보자 이름을 넣은 상자를 두었다가 도장이 찍힌 사람을 ‘재상’으로 삼았다는 대목이 단서이다. 『삼국사기』는 백제의 시조를 온조로 기록하고 있다.
- 청소년 조직인 화랑도는 신라의 제도로, 진흥왕 때 국가 조직으로 개편되었다.
- 선종의 융성과 9산 선문의 성립은 신라 하대의 사실이다.
- 낙동강 하류에 자리해 해상 활동에 유리했던 나라는 금관가야이다.
○ 태학을 설립하였다.
불교를 수용하고 태학을 설립한 왕은 고구려 소수림왕이며, 같은 왕 때 율령이 반포되었다.
소수림왕은 고국원왕 전사 이후 흔들린 나라를 추스르기 위해 불교 수용(372), 태학 설립(372), 율령 반포(373)로 체제를 정비하였다.
- 이사부의 우산국 복속은 신라 지증왕 때의 일이다.
- 관산성 전투에서 성왕이 전사한 것은 백제 성왕과 신라 진흥왕이 맞선 6세기의 일이다.
- 국내성에서 평양으로 도읍을 옮긴 왕은 장수왕이다.
(가)는 조광조이며, 도교 행사를 맡던 소격서의 폐지를 주장하였다.
‘중종’에게 ‘현량과’ 실시를 건의했다는 대목이 단서이다. 조광조는 현량과로 사림을 등용하고 소격서 폐지 등 도학 정치를 추진하였다.
- 「조의제문」은 김종직이 지은 글로, 무오사화의 빌미가 되었다.
- 『불씨잡변』을 지어 불교를 비판한 인물은 정도전이다.
- 서북 지역 차별에 항거해 난을 일으킨 인물은 순조 때의 홍경래이다.
밑줄 친 왕은 고려 광종이며, 그의 재위 기간에 쌍기의 건의로 과거제가 시행되었다.
‘노비안검법’을 실시해 공신의 불법 노비를 가려냈다는 대목이 단서이다. 광종은 이 법과 과거제로 공신·호족 세력을 누르고 왕권을 강화하였다.
- 전시과 제도는 광종 다음의 경종 때 처음 마련되었다.
- 최승로의 시무 28조 건의는 성종 때의 일이다.
- 강감찬의 귀주 대첩은 현종 때 거란의 침입을 물리친 싸움이다.
밑줄 친 왕은 조선 정조이며, 초계문신제를 실시해 문신들을 재교육하였다.
‘만천명월주인옹’이라는 자호와 ‘화성’ 건설·행차가 단서이다. 정조는 규장각을 키우고 젊은 문신을 재교육해 왕권의 기반을 다졌다.
- 청을 정벌하자는 북벌 운동은 효종 때 추진되었다.
- 『속대전』을 편찬해 통치 제도를 정비한 왕은 영조이다.
- 명과 후금 사이의 중립 외교는 광해군의 정책이다.
(가)는 발해이며, 중앙 행정 기구로 3성 6부를 두었다.
국서를 보낸 ‘대무예’가 발해 무왕이고, ‘고구려의 옛 땅을 회복’하고 ‘부여의 풍속’을 이었다는 표현에서 고구려 계승 의식이 드러난다. 발해는 당의 제도를 받아들이되 명칭과 운영은 독자적으로 하였다.
- 나당 연합군의 공격으로 멸망한 나라는 백제와 고구려이며, 발해는 거란의 공격으로 멸망하였다.
- 9주 5소경은 통일 신라의 지방 행정 구역이다.
- 고구려의 수도였던 평양을 서경으로 삼은 나라는 고려이다.
옳지 않은 것은 기해예송이다. 효종 사후의 복상 문제로 벌어진 이 논쟁은 숙종이 아니라 현종 때의 일이다.
예송은 현종 때 기해예송과 갑인예송으로 두 차례 일어났고, 숙종 때에는 경신환국을 비롯한 환국이 거듭되었다.
- 서인이 노론과 소론으로 나뉜 것은 숙종 때 경신환국 이후 남인 처벌 문제를 둘러싼 대립에서 비롯되었다.
- 청과의 국경을 표시한 백두산정계비는 숙종 때 세워졌다.
- 안용복이 일본에 건너가 울릉도와 독도가 조선 땅임을 주장한 활동도 숙종 때의 일이다.
(가)는 전민변정도감으로, 권문세족이 불법으로 차지한 토지와 노비 문제를 바로잡기 위해 설치되었다.
‘신돈’이 설치를 청해 ‘판사’가 되었고, 기한 안에 잘못을 고친 자는 죄를 묻지 않겠다고 알린 대목이 단서이다. 이는 공민왕 때의 개혁 조치이다.
- 임진왜란 이후 국정을 총괄한 최고 기구는 조선의 비변사이다.
- 임술 농민 봉기 뒤 삼정의 문란을 바로잡으려 설치한 기구는 조선 철종 때의 삼정이정청이다.
- 일본 원정을 위해 설치된 뒤에도 존속하며 내정에 간섭한 기구는 원이 둔 정동행성이다.
제시된 사건은 만적의 난(1198)이고, 그보다 앞선 일은 정중부 등이 일으킨 무신 정변(1170)이다.
‘사노 만적’이 노비들을 모아 주인을 죽이고 노비 문서를 불태우자고 모의한 대목이 단서이다. 이 모의는 최충헌 집권기에 일어났으므로 무신 집권 이후의 일이다.
- 이성계의 위화도 회군은 1388년으로, 고려 말의 일이다.
- 삼별초가 진도와 제주도로 옮겨 간 항쟁은 1270년 이후의 일이다.
- 팔만대장경 조판은 몽골 침입기인 13세기 중엽의 일이다.
(가)는 조선 세조이며, 그가 추진한 정책은 6조 직계제의 실시이다.
‘『경국대전』이라는 이름’을 내렸고 「형전」과 「호전」을 먼저 반포한 뒤 승하했다는 대목이 단서이다. 세조는 태종 때 시행되었던 6조 직계제를 다시 실시해 왕권을 강화하였다.
- 계미자는 태종 때 만든 금속 활자이다.
- 계해약조는 세종 때 대마도주와 맺은 약조이다.
- 관수 관급제는 세조 이후 성종 때 시행되었다.
○ 언론·출판·집회·결사의 자유를 요구하는 등 자유 민권 운동을 전개하였다.
이 단체는 독립 협회이며, 러시아의 절영도 조차 요구에 반대하는 운동을 전개하였다.
‘관민공동회’에서 ‘헌의 6조’를 채택했다는 대목이 단서이다. 독립 협회는 만민 공동회 등을 통해 이권 침탈에 맞서는 자주 국권 운동을 펼쳤다.
- 일제가 날조한 105인 사건으로 해산된 단체는 신민회이다.
- 일본의 황무지 개간 요구에 반대한 단체는 보안회이다.
- 대구에서 서상돈 등의 제안으로 시작된 국채 보상 운동은 독립 협회 해산 후인 1907년의 일이다.
○ 남북의 통일된 정부를 수립하기 위한 좌우 합작 운동을 전개하던 중 암살당하였다.
이 활동을 한 인물은 여운형이다.
광복 직후 ‘조선 건국 준비 위원회’ 위원장을 맡았고, 김규식과 함께 ‘좌우 합작 운동’을 벌이다 1947년 암살되었다.
- 조소앙은 대한민국 임시 정부의 건국 강령에 반영된 삼균주의를 체계화한 인물이다.
- 이상재는 독립 협회에서 활동했고 신간회 초대 회장을 지낸 인물이다.
- 조봉암은 진보당을 이끌다가 진보당 사건으로 처형된 인물이다.
(나) 농민군이 우금치에서 전투를 벌였다.
(다) 농민군이 황토현에서 관군을 물리쳤다.
(라) 전봉준 등이 농민을 모아 고부 관아를 습격하였다.
올바른 순서는 고부 관아 습격 → 황토현 전투 → 전주 화약 → 우금치 전투이다.
1894년 고부 군수의 수탈에 맞선 봉기에서 시작해, 황토현에서 관군을 물리치고 전주성을 점령한 뒤 정부와 화약을 맺었다. 이후 일본군의 경복궁 점령에 맞서 다시 일어난 농민군이 우금치에서 패배하였다.
- 황토현 전투를 맨 앞에 두고 고부 습격을 전주 화약 뒤에 놓은 배열은 고부 습격이 출발점이라는 점에 어긋난다.
- 황토현 전투 다음에 고부 습격, 우금치 전투, 전주 화약을 놓은 배열은 2차 봉기인 우금치 전투가 전주 화약보다 뒤라는 점에도 어긋난다.
- 고부 습격 다음에 전주 화약, 우금치 전투, 황토현 전투를 놓은 배열은 황토현 승리가 전주 화약보다 앞선다는 점에 어긋난다.
옳지 않은 것은 저화의 유통이다. 저화는 고려 말에 등장해 조선 초기에 유통된 지폐로, 조선 후기의 모습이 아니다.
조선 후기에는 상공업이 발달해 금속 화폐인 상평통보가 널리 쓰였다.
- 강경포, 원산포 같은 포구가 상업의 중심지로 성장한 것은 조선 후기의 모습이다.
- 객주와 여각이 상품 중개와 운송·보관·숙박업을 겸한 것도 조선 후기의 모습이다.
- 동전을 많이 발행했는데도 유통 화폐가 부족해지는 전황이 나타난 것도 조선 후기의 현상이다.
○ 이제 우리는 무기휴회된 공위가 재개될 기색도 보이지 않으며 통일정부를 고대하나 여의치 않으니 우리는 남방만이라도 임시 정부 혹은 위원회 같은 것을 조직하여 38도선 이북에서 소련을 철퇴하도록 세계 공론에 호소하여야 될 것이니 여러분도 결심하여야 될 것이다.
이렇게 주장한 인물은 이승만이다.
강대국에 호소해 독립을 이루자는 ‘외교 활동’ 노선과, ‘남방만이라도 임시 정부 혹은 위원회’를 조직하자는 정읍 발언(1946)이 단서이다.
- 김구는 남한만의 단독 정부 수립에 반대하며 남북 협상에 나섰다.
- 안창호는 신민회와 흥사단을 통해 실력 양성 운동을 이끌었다.
- 김규식은 좌우 합작 운동과 남북 협상에 참여하며 통일 정부 수립을 추구하였다.
(가)는 대한 독립군단이다.
청산리 전투 이후 일본군의 공세를 피해 ‘밀산’에 모인 독립군 부대들이 ‘서일’을 총재로 삼아 결성한 조직이라는 대목이 단서이다. 이후 이 부대들은 러시아 영토의 자유시로 이동하였다.
- 한국 광복군은 1940년 충칭에서 대한민국 임시 정부가 창설한 군대이다.
- 대한 광복회는 1910년대 국내에서 박상진 등이 조직한 비밀 결사이다.
- 독립 의군부는 1910년대 임병찬이 고종의 밀지를 받아 국내에서 조직한 단체이다.
(가)는 한인 애국단이며, 소속 인물의 활동은 윤봉길의 홍커우 공원 의거이다.
‘이봉창’이 도쿄에서 일왕의 행렬에 폭탄을 던진 대목이 단서이다. 한인 애국단은 김구가 상하이에서 조직하였고, 이봉창과 윤봉길의 의거는 모두 1932년에 일어났다.
- 조명하의 타이중 의거는 1928년에 있었던 일로, 한인 애국단이 조직되기 전이다.
- 안중근의 이토 히로부미 저격은 1909년의 일로, 한인 애국단과 관련이 없다.
- 장인환의 스티븐스 저격은 1908년의 일로, 역시 한인 애국단과 관련이 없다.
이렇게 주장한 인물은 박은식이며, 「유교구신론」으로 유교의 개혁을 주장하였다.
‘나라는 형체, 역사는 정신’이라는 표현은 박은식이 『한국통사』에서 밝힌 역사관이다. 그는 나라는 망해도 민족의 혼을 지키면 독립을 이룰 수 있다고 보았다.
- 진단학회를 조직하고 『진단학보』를 낸 것은 이병도, 손진태 등 실증 사학자들이다.
- 『여유당전서』 간행과 조선학 운동은 정인보, 안재홍 등이 주도하였다.
- 의열단의 「조선혁명선언」을 작성한 인물은 신채호이다.
(가)는 대한제국이며, 이 시기의 사실은 광무개혁의 하나인 지계 발급 사업이다.
고종이 연호를 ‘광무’로 바꾸고 ‘환구단’에서 황제로 즉위했다는 대목이 단서이다. 대한제국은 1897년에 선포되었고, 토지 소유권을 증명하는 지계는 그 뒤 지계아문을 통해 발급되었다.
- 별기군은 대한제국 수립 이전인 1881년 개화 정책의 하나로 창설되었다.
- 교육입국조서는 제2차 갑오개혁 때인 1895년에 발표되었다.
- 통리기무아문은 1880년 개화 정책을 총괄하기 위해 설치되었다.
○ (가) 의 명학소민 망이와 망소이 등이 무리를 불러 모아 스스로 산행병마사라 칭하며 (가) 을/를 공격하여 함락시켰다.
(가)는 공주(웅진)이며, 이곳에서 김헌창의 난이 일어났다.
문주왕이 한성 함락 뒤 도읍을 옮긴 곳이 웅진이고, 망이·망소이가 봉기한 ‘명학소’가 공주에 속했다는 점이 단서이다. 신라 헌덕왕 때 김헌창은 웅천주(지금의 공주) 도독으로 있으면서 반란을 일으켰다.
- 일본의 침략에 맞선 신립이 패전한 곳은 충주 탄금대이다.
- 조만식의 주도로 물산 장려 운동이 시작된 곳은 평양이다.
- 백정 차별 철폐를 위한 조선 형평사가 창립된 곳은 진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