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석기에서 신석기로 넘어가는 전환기(중석기)의 모습이 아닌 것은 선돌을 세운 거석 숭배이다.
선돌·고인돌 같은 거석 기념물은 청동기 시대에 계급이 생기면서 나타난 문화이다.
- 큰 짐승이 사라지고 작고 빠른 짐승이 늘어나 활을 사용한 것은 전환기의 모습이다.
- 더 작게 만든 잔석기 사용은 중석기의 대표적 특징이다.
- 석기를 나무나 뼈에 꽂아 쓰는 이음 도구도 이 시기에 만들어졌다.
| 신라 사회가 혼란해지면서 지방에서는 호족이라 불리는 새로운 세력이 성장하였다. 호족들은 중앙 정부의 통제에서 벗어나면서 반독립적인 세력으로 성장하였다. 이들은 자기 근거지에 성을 쌓고 군대를 보유하여 스스로 성주 또는 장군이라고 칭하면서 그 지방의 행정권과 군사권을 장악하였다. |
제시문은 호족이 성장한 신라 하대이며, 녹읍 폐지와 관료전 지급은 이 시기 모습이 아니다.
관료전 지급과 녹읍 폐지는 통일 직후 신문왕이 왕권 강화를 위해 시행한 정책이다.
- 선종은 신라 하대에 호족의 후원을 받아 확산되었다.
- 풍수지리설은 신라 말 도선 등에 의해 널리 퍼졌다.
- 최치원 같은 도당 유학생 출신 6두품이 골품제를 비판한 것도 신라 하대의 일이다.
| (가) 고려는 내분에 휩싸여 있던 후백제를 정벌하였다. (나) 신라에 대하여 적극적인 우호 정책을 내세우던 고려는 결국 신라 경순왕의 항복을 받아 전쟁 없이 신라를 통합하였다. (다) 귀족들의 권력 투쟁으로 국력이 크게 쇠퇴한 발해는 거란의 침략을 받아 멸망하였다. |
사건은 발해 멸망 → 신라 항복 → 후백제 정벌 순서로 일어났다.
발해는 926년 거란에 멸망했고, 신라 경순왕은 935년 고려에 항복했으며, 고려는 936년 후백제를 무너뜨려 후삼국을 통일하였다.
- 후백제 정벌을 처음에 두는 배열은 936년 사건을 가장 앞에 둔 것이므로 틀리다.
- 신라 항복을 발해 멸망보다 앞에 두는 배열도 926년 발해 멸망이 먼저이므로 틀리다.
| 소실된 초조대장경을 대신하여 고종 때에는 대장경을 다시 만들었다. 대장도감을 설치하여 16년 만에 이룩한 재조대장경은 목판이 8만 장이 넘어 팔만대장경이라고 부른다. |
팔만대장경 조판 이후의 사건은 원의 일본 원정에 군대와 물자를 강요받은 일이다.
재조대장경은 강화도 천도 이후 고종 때(1236~1251) 만들어졌고, 원의 일본 원정은 충렬왕 때(1274·1281) 두 차례 있었다.
- 무신 정권의 강화도 천도는 1232년으로 대장경 조판보다 앞선다.
- 개경 환도에 반대해 항쟁을 이어간 부대는 별무반이 아니라 삼별초이다.
- 나성과 천리장성은 몽고가 아니라 거란·여진의 침입에 대비해 쌓은 것이다.
| 양반 : 나는 사대부의 자손인데. 선비 : 아니, 나는 팔대부의 자손인데. 양반 : 팔대부는 또 뭐야? 선비 : 아니, 양반이라는 게 팔대부도 몰라? 팔대부는 사대부의 갑절이지 뭐. … 양반 : 첫째, 지식이 있어야지. 나는 사서삼경을 다 읽었네. 선비 : 뭣이, 사서삼경? 나는 팔서육경도 읽었네. 양반 : 도대체 팔서육경이 뭐냐? 초랭이 : 나도 아는 육경, 그걸 몰라? 팔만대장경, 중의 바라경, 봉사 안경, 처녀 월경, 약국 길경(도라지), 머슴 새경(품삯). <하회 탈춤 대사> |
하회 탈춤 대사는 양반의 위선을 풍자하며 문항은 조선 후기 향촌 사회를 묻는다. 이 시기 관권과 결탁해 부세 운영에 참여한 것은 사족(양반)이 아닌 신향(부농층)의 모습이다.
조선 후기에는 수령 중심의 관권이 강해지면서 새로 성장한 부농층이 수령과 결탁해 향안에 진출하고 향회를 부세 자문 기구로 이용했으며, 기존 사족은 영향력이 약해졌다.
- 촌락 단위 동약 시행은 약해진 사족이 향촌 지배력을 유지하려 한 방법이다.
- 문중 중심 서원 건립도 사족이 가문의 위세를 지키려 한 활동이다.
- 이름난 선조를 모시는 사우 건립 역시 같은 목적의 사족 활동이다.
| 임진왜란 이후 차별이 완화되기 시작하였다. 더욱이 전란으로 재정적 타격을 받은 정부가 납속책을 실시하고 공명첩을 발급하자, 이를 이용하여 관직에 나아갈 수 있게 되었다. 영·정조 때에는 적극적으로 신분 상승을 시도하여 수 차례에 걸쳐 집단으로 상소하여 관직 진출의 제한을 없애 줄 것을 요구하였다. 정조 때에는 유득공, 이덕무, 박제가 등이 규장각 검서관으로 등용되어 제각기 능력을 발휘할 수 있었다. |
제시된 신분은 서얼이며, 중인과 비슷한 대우를 받아 중서라고도 불렸다.
서얼은 납속책·공명첩으로 관직에 진출했고, 집단 상소(통청 운동)를 벌였으며 정조 때 규장각 검서관으로 등용되었다.
- 서얼은 문과 응시가 제한되었을 뿐 무과·잡과에는 응시할 수 있었고, 직역이 세습되지도 않았다.
- 양인이면서 천역을 지는 신량역천은 서얼과 다른 계층이다.
- 매매·상속·증여의 대상이 된 것은 노비이다.
| ․신라 신문왕 시기 : (가) ․고려 광종 시기 : (나) ․조선 태종 시기 : (다) ․조선 흥선 대원군 시기 : (라) |
바르게 연결된 것은 고려 광종이 광덕·준풍 등 독자적 연호를 사용한 것이다.
광종은 노비안검법·과거제와 함께 칭제건원으로 왕권을 강화하였다.
- 독서삼품과는 신문왕이 아니라 원성왕 때 시행되었다.
- 태종은 사원을 정리하고 도첩제를 엄격히 했지만, 출가 전면 금지나 도첩제 폐지는 아니다.
- 대전통편은 정조 때 편찬되었고, 흥선 대원군 때 편찬된 법전은 대전회통이다.
| ㄱ. “의천”은 천태종을 창시하였고, 교관겸수를 제창하였다. ㄴ. “지눌”은 정혜쌍수, 즉 교종 중심의 선종통합을 주장하였다. ㄷ. “혜심”은 유불일치설을 주장하면서 심성의 도야를 강조하여 장차 성리학을 수용할 수 있는 사상적 토대를 마련하기도 하였다. ㄹ. “요세”는 송광사를 중심으로 수선사 결사를 제창하였다. |
바른 설명은 의천과 혜심에 대한 내용이다.
의천은 해동 천태종을 열고 교관겸수를 내세웠으며, 혜심은 유불일치설을 주장해 성리학 수용의 바탕을 마련하였다.
- 지눌의 정혜쌍수는 교종 중심이 아니라 선종 중심의 교·선 통합이다.
- 송광사를 중심으로 수선사 결사를 이끈 사람은 지눌이며, 요세는 만덕사에서 백련 결사를 이끌었다.
| 인조반정 이후 송시열을 중심으로 한 서인은 당시 조선 사회가 안고 있던 모순을 해결하기 위해 명분론을 강화하고 성리학을 절대화했다. |
알맞지 않은 것은 주자 중심 성리학에서 해결책을 찾는 자를 사문난적으로 몰았다는 설명이다.
서인은 성리학을 절대화하면서 오히려 주자의 해석을 비판하거나 벗어난 학자(윤휴, 박세당 등)를 사문난적으로 몰았다.
- 성리학 절대화에 대한 반발로 실천성을 강조한 양명학 연구자가 나타났다.
- 주자 해석에서 벗어나 6경과 제자백가에서 해답을 찾으려는 학자도 등장하였다.
- 명분론 강화와 함께 예학이 발달한 것도 같은 흐름이다.
옳지 않은 것은 박지원에 대한 설명으로, 박지원은 경세치용학파가 아니라 이용후생(중상)학파이다.
경세치용학파(중농학파)는 유형원·이익·정약용으로 이어지며 토지 제도 개혁을 중시하였다.
- 정약용은 중농학파를 집대성하면서도 거중기 제작 등 과학 기술과 상공업에 관심을 가졌다.
- 유형원은 농촌에 머물며 반계수록을 저술해 균전론을 제시하였다.
- 지주가 아닌 경작 농민 중심으로 농촌 문제를 해결하려 한 것이 이 학파의 특징이다.
홍경래의 난 배경으로 옳지 않은 것은 많은 사족층의 수탈이다.
서북 지역은 오히려 사족층이 적은 곳으로, 상공업 성장 세력이 중앙의 차별과 수탈에 반발한 것이 배경이다.
- 상업 활동을 억누르는 중앙의 간섭은 실제 배경이다.
- 수령의 지나친 수탈도 봉기의 원인이 되었다.
- 서북민에 대한 지역 차별 역시 주요 배경이다.
| 일반 교역의 대부분이 여기에서 이루어졌다. 당시 농업 생산력의 발달과 지주제의 확대로 인하여 시간이 흐를수록 발달하였다. 삼남 지방에서는 재난과 기근으로 물자의 교역이 요구됨에 따라 지방의 소도시를 중심으로 자연 발생적으로 개설되기 시작하였다. |
제시문이 설명하는 것은 장시이다.
장시는 15세기 후반 삼남 지방에서 자연 발생적으로 열리기 시작해 조선 후기 일반 교역의 중심이 되었다.
- 시전은 서울에서 관청의 허가를 받아 운영된 상설 상점이다.
- 방납은 공물을 대신 납부하고 대가를 받는 행위이다.
- 보부상은 장시를 돌아다니며 물건을 판 행상이다.
| 1882년 6월이 되자 구식 군인들은 1년 넘게 월급을 받지 못한 데다가 겨우 받은 한 달치 월급에 겨와 모래가 절반 이상 섞여 있자 마침내 폭동을 일으켰다. 도시 하층민까지 가담하면서 군란의 규모는 걷잡을 수 없이 커졌다. 이들은 일부 고관과 일본인 교관을 죽이고 일본 공사관을 습격하였다. |
1882년 구식 군인의 봉기는 임오군란이며, 이를 계기로 청군이 주둔하고 조선 내정·외교에 깊이 간섭하였다.
청은 군란을 진압한 뒤 마젠창·묄렌도르프를 고문으로 보내고 조청상민수륙무역장정을 맺었다.
- 유길준의 중립화론은 갑신정변 이후 열강 대립(거문도 사건 등) 속에서 나왔다.
- 성리학을 지키고 다른 사상을 배격하자는 위정척사 사상은 군란의 배경이 아니며, 군란은 구식 군인 차별과 개화 정책에 대한 불만에서 비롯되었다.
- 5군영을 무위영·장어영으로 통합한 것은 군란 이전의 일로, 군란의 배경에 해당한다.
| (가) 청과의 의례적 사대 관계 폐지, 문벌 폐지, 지조법 개혁, 혜상공국 혁파 (나) ‘건양’ 연호 사용, 단발령 실시, 태양력 사용, 종두법 시행 (다) 탐관 오리 엄징, 노비 문서 소각, 과부의 재가 허용, 토지의 평균 분작 |
(가)는 갑신정변이며, 정변이 실패한 뒤 청과 일본은 톈진 조약을 맺었다.
(가) 갑신정변(1884), (다) 동학 농민 운동의 폐정 개혁안(1894), (나) 을미개혁(1895) 순으로 전개되었다.
- (가)-(나)-(다) 순서는 1895년 을미개혁을 1894년 농민 운동보다 앞에 둔 것이므로 틀리다.
- 구본신참은 을미개혁이 아니라 대한제국의 광무개혁 원칙이다.
- 농민이 전라도에 설치한 자치 조직은 집강소이며, 교정청은 정부가 세운 개혁 기구이다.
| 고조선은 중국과의 빈번한 교역을 통해 경제적으로 성장할 수 있었다. |
고조선과 중국의 교역을 보여 주는 유물은 명도전이다.
명도전은 중국 연나라 화폐로, 고조선 지역에서 많이 출토되어 활발한 교역을 보여 준다.
- 호우명 그릇은 신라와 고구려의 관계를 보여 준다.
- 칠지도는 백제와 왜의 교류를 보여 준다.
- 임신서기석은 신라 청년들의 유학 학습 맹세를 새긴 비석이다.
| 닉슨 독트린 선언 후 미국은 중국과 수교하는 등 공산권과 화해하려는 정책을 추진하였다. 그리고 주한 미군 2만 명을 철수시켰으며, 남북 교차 승인안을 제시하는 등 북한과 화해할 것을 권유하였다. 이처럼 냉전 체제가 완화되면서 반공주의를 내세워 정권을 유지해 왔던 박정희 정부의 기반은 약화되었다. 또, 경기 침체와 물가 상승으로 국민들의 불안도 커져 제7대 대통령 선거와 그 후에 실시된 국회 의원 선거에서 야당의 득표율이 높아졌다. (후략) |
제시문은 냉전 완화와 정권 기반 약화를 다루므로 유신 체제의 성립 배경이 알맞다.
닉슨 독트린·주한 미군 감축과 제7대 대선의 야당 약진으로 위기를 느낀 박정희 정부는 1972년 유신 체제를 수립하였다.
- 장면 내각은 4·19 혁명 이후 1960년에 들어섰다.
- 발췌 개헌은 6·25 전쟁 중인 1952년 이승만 정부 때의 일이다.
- 베트남 파병은 1960년대 중반 결정되어 닉슨 독트린보다 앞선다.
| 무단 통치 → (가) → 민족 말살 통치 (1910-1919) (1919-1931) (1931-1945) |
(가)는 문화 통치 시기(1919~1931)이며, 이 시기의 민족 운동은 광주 학생 항일 운동(1929)이다.
광주에서 일어난 한·일 학생 충돌을 계기로 전국적인 항일 운동으로 번졌다.
- 13도 창의군의 서울 진공 작전은 국권 피탈 이전인 정미의병 때의 일이다.
- 신민회 결성도 국권 피탈 이전 애국 계몽 운동 시기이다.
- 한국광복군 창설은 민족 말살 통치 시기인 1940년의 일이다.
잘못된 설명은 지방관이 파견되지 않는 속현이 더 많았다는 것이다.
속현이 더 많았던 것은 고려 시대이며, 조선은 모든 군현에 지방관을 파견하여 속현을 없앴다.
- 향리는 수령을 보좌하는 세습 아전으로 지위가 격하되었다.
- 전국을 8도로 나누고 고을 크기에 따라 수령의 등급을 정하였다.
- 향·부곡·소 같은 특수 행정 구역은 일반 군현으로 바뀌었다.
| 가. 다수확 품종의 개발로 쌀의 자급자족이 가능해졌다. 나. 전태일은 “근로기준법을 지켜라”를 외치며 분신하였다. 다. 생존권 투쟁을 외치던 YH무역 여성노동자가 사망하였다. 라. 직선제 개헌과 민주헌법 제정을 요구하는 6월 항쟁이 일어났다. |
바른 순서는 전태일 분신 → 쌀 자급 → YH 무역 사건 → 6월 민주 항쟁이다.
전태일 분신은 1970년, 통일벼 등 다수확 품종 보급에 따른 쌀 자급은 1970년대 중반, YH 무역 사건은 1979년, 6월 민주 항쟁은 1987년이다.
- 쌀 자급을 가장 앞에 두는 배열은 1970년 전태일 분신보다 늦은 사건을 앞세운 것이므로 틀리다.
- 6월 항쟁 뒤에 쌀 자급을 두는 배열은 1987년보다 앞선 사건을 마지막에 둔 것이므로 틀리다.
바른 설명은 고구려가 일본에 종이와 먹 제조법을 전했다는 것이다.
고구려 승려 담징은 일본에 종이·먹 제조법을 전하였다.
- 삼국 문화는 아스카 문화에 영향을 주었고, 하쿠호 문화는 통일 신라 문화의 영향을 받았다.
- '한인의 연못'은 백제가 아니라 신라의 축제술(제방 쌓는 기술) 전파와 관련된다.
- 신라도 조선술·축제술을 전해 일본 고대 문화 형성에 영향을 주었다.
| 어사대의 관원과 중서문하성의 낭사는 함께 대간으로 불렸는데, 대간은 간쟁, 봉박, 서경권 등의 권한을 가지고 있었다. |
대간 제도는 고려 정치에 견제와 균형의 원리가 작용했음을 보여 준다.
어사대와 중서문하성의 낭사로 이루어진 대간은 간쟁·봉박·서경을 통해 국왕과 고위 관료의 권력 행사를 견제하였다.
- 대간은 왕권을 제약하는 장치이므로 강력한 왕권 행사와는 거리가 멀다.
- 귀족적 특징이나 지방 세력 통제는 제시된 대간의 권한에서 직접 추론할 수 없다.
| 용정촌에서 40리 가량 떨어져 있는 한 마을은 왜군이 야간에 습격하여 청년을 모조리 죽였으니 밤마다 죽는 사람이 2, 3명씩 되었다. 이는 1920년 10월의 일이다. 당시의 참사를 현지에 있던 미국인 선교사 마틴은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10월 31일, 연기가 자욱하게 낀 찬랍파위(瓚拉巴威) 마을에 가보았다. 사흘 전 새벽에 무장한 일개 대대가 이 기독교 마을을 포위하고 남자라면 늙은이, 어린이를 막론하고 끌어내어 때려 죽이고 (후략) <조지훈, 『한국 민족 운동사』> |
1920년 10월 간도의 한인 마을 초토화는 간도 참변이며, 직접적 배경은 일본군이 봉오동·청산리에서 대패한 것이다.
일본군은 독립군에 패한 보복으로 간도의 한인 마을을 습격해 주민을 학살하였다.
- 천마산대의 국경 지대 활동은 간도 참변의 직접 배경으로 보지 않는다.
- 이봉창 의거는 1932년의 일로 1920년보다 늦다.
- 구월산대의 밀정 처단도 국내 무장 활동으로 간도 참변의 직접 배경이 아니다.
| 난리가 물밀듯 거듭 몰아닥쳐 머리는 세고 나이는 늙어 버렸네 몇 번이나 죽으려 했건만 아직도 그 뜻을 이루지 못하였는데 어떻게도 돌이킬 수 없는 오늘 가물거리는 촛불만이 푸른 하늘을 비추네 (후략) |
황현이 절명시를 남기고 자결한 것은 1910년 한·일 병합 조약(국권 피탈) 때문이다.
『매천야록』의 저자 황현은 국권 피탈 소식을 듣고 절명시를 지어 자결하였다.
- 순종은 퇴위된 것이 아니라 병합 조약으로 국권을 잃은 마지막 황제이다.
- 고종의 강제 퇴위는 1907년 헤이그 특사 사건 이후의 일이다.
- 을사조약 체결 때 자결한 대표 인물은 민영환이다.
옳지 않은 것은 신간회 본부가 주로 사회주의자로 구성되었다는 설명이다.
신간회는 비타협적 민족주의자와 사회주의자가 연합한 민족 협동 전선으로, 본부 지도부는 민족주의 계열이 중심이었다.
- 본부가 자치론자와 제휴하려는 등 우경화하자 사회주의 계열에서 해소론이 나왔다.
- 일제와의 비타협을 원칙으로 한 최대 항일 단체였다.
- 광주 학생 항일 운동이 일어나자 진상 조사단을 보내는 등 지원하였다.
| 고구려나 백제의 건국세력은 이 나라의 한 계통임을 자처하였고, 건국신화도 같은 원형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 사출도는 왕이 지배하는 지역과 함께 5부를 이루었다. |
사출도와 5부, 고구려·백제의 계통 자처는 부여를 가리키며, 부여는 도둑질에 12배 배상(1책 12법)을 물렸다.
'사출도'는 마가·우가·저가·구가가 다스린 부여의 지방 구역이다.
- 10월 무천은 동예의 제천 행사이다.
- 철을 낙랑·왜에 수출한 나라는 변한이다.
- 다른 부족 영역 침범을 변상하게 한 책화는 동예의 풍습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