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민생 안정과 문화 부흥에도 힘을 썼으며, 서얼과 노비에 대한 차별을 완화하였으며, 재정 수입을 늘리고 상공업을 진흥시키기 위하여 자유로운 상업 행위를 허락하는 통공 정책(通共政策)을 시행하는 등 사회 전반에 걸쳐 제도와 그것의 운영을 개선하려는 노력을 기울였다. |
속대전 편찬과 사형수 삼심제 엄격 시행은 정조가 아니라 영조의 업적이다.
제시문의 '서얼과 노비에 대한 차별 완화', '통공 정책'(신해통공)은 정조의 정책이다.
- 초계문신제: 정조가 규장각을 통해 유능한 문신을 재교육한 제도이다.
- 장용영: 정조가 왕권을 뒷받침하려고 설치한 친위 부대이다.
- 화성: 정조가 정치·군사적 기능을 부여해 축조한 상징 도시이다.
| 수신사 김홍집이 가지고 와서 유포한 사사로운 책자를 보노라면 어느새 털끝이 일어서고 쓸개가 떨리며 울음이 북받치고 눈물이 흐릅니다.… ( ㈎ )은 우리가 신하로서 섬기는 바이며 해마다 옥과 비단을 보내는 수레가 요동과 계주를 이었습니다. 신의와 절도를 지키고 속방의 직분을 충실히 지킨 지 벌써 2백년이나 되었습니다. … ( ㈏ )은 우리가 본래 모르던 나라입니다. 잘 알지 못하는데 공연히 타인의 권유로 불러들였다가 그들이 재물을 요구하고 우리의 약점을 알아차려 어려운 청을 하거나 과도한 경우를 떠맡긴다면 장차 이에 어떻게 응할 것입니까? ( ㈐ )은 우리에게 매어있던 나라입니다. … 그들은 이미 우리 땅을 잘알고 수륙 요충 지대를 점거하고 있습니다. … 그들이 우리의 허술함을 알고 함부로 쳐들어오면 장차 이를 어떻게 막겠습니까? ( ㈑ )는 본래 우리와 혐의가 없는 나라입니다. 공연히 남의 말만 듣고 틈이 생기게 된다면 우리의 위신이 손상될 뿐만 아니라 만약 이를 구실로 침략해 온다면 장차 이를 어떻게 막을 것입니까?… - 영남만인소 중에서 - |
( ㈏ )에 들어갈 나라는 미국이다.
영남만인소는 김홍집이 들여온 조선책략 유포에 반발해 올린 상소로, 청(신하로서 섬기는 나라)·미국(본래 모르던 나라)·일본(매어 있던 나라)·러시아(본래 혐의가 없는 나라)를 차례로 들어 그 주장을 반박하였다.
- ( ㈎ )는 '신하로서 섬기고 해마다 옥과 비단을 보낸' 나라이므로 일본이 아니라 청이다.
- ( ㈐ )는 '우리에게 매어 있던' 나라로 수륙 요충을 점거한 일본이며, 청이 아니다.
- ( ㈑ )는 '본래 우리와 혐의가 없는' 나라인 러시아이며, 프랑스가 아니다.
| 이 선언의 주요 내용은 당시 독립 운동 노선의 한 축을 이루고 있던 외교론, 준비론 등을 배격하고 민중의 직접 혁명을 내세운 것이었다. |
'이 선언'은 신채호의 조선 혁명 선언이므로, 독사신론을 발표한 내용이 신채호에 대한 설명이다.
신채호는 의열단의 요청으로 쓴 이 선언에서 외교론·준비론을 배격하고 민중 직접 혁명을 주장했으며, 앞서 대한매일신보에 독사신론을 연재해 민족주의 사학의 방향을 제시하였다.
- 한국통사를 지어 일제의 침략 과정을 폭로한 인물은 박은식이다.
- 세계사적 보편 법칙을 한국사에 적용한 것은 백남운 등 사회 경제 사학이다.
- 진단학회를 결성해 문헌 고증을 중시한 것은 이병도 등 실증 사학이다.
| ㆍ 관료로서의 봉사에 대한 대가로서 귀족에게 지급된 토지였다. ㆍ 귀족은 이 토지로부터 조세․노동력․공물을 모두 수취하였다. ㆍ 이 토지가 증가함에 따라 국가재정이 악화되었다. |
제시문의 토지는 녹읍이다.
녹읍은 귀족 관료에게 지급되어 조세뿐 아니라 노동력·공물까지 수취할 수 있었으므로, 녹읍이 늘수록 국가 재정이 악화되었다.
- 정전: 성덕왕 때 백성에게 지급한 토지이다.
- 과전: 고려 말 과전법에 따라 관리에게 수조권을 준 토지로, 통일 신라의 토지가 아니다.
- 관료전: 신문왕이 관료에게 지급한 토지로, 조세만 수취할 수 있었다.
8․15 모스크바 한국문제 5․10 대한민국 광복 외상회의 유엔상정 총선거 정부수립 |
트루먼 독트린 발표(1947.3)는 모스크바 외상 회의와 한국 문제 유엔 상정 사이인 ㈏ 시기에 해당한다.
연표의 기준은 광복(1945.8) → 모스크바 3국 외상 회의(1945.12) → 유엔 상정(1947.9) → 5·10 총선거(1948.5) → 정부 수립(1948.8)이다.
- 좌우 합작 위원회 구성(1946.7)과 좌우 합작 7원칙 발표는 ㈎가 아니라 ㈏ 시기이다.
- 이승만의 정읍 발언(1946.6)은 ㈐가 아니라 ㈏ 시기이다.
- 김구·김규식의 남북 협상 제안(1948.2)은 ㈑가 아니라 ㈐ 시기이다.
| 무릇 과거에 나아가려는 자는 모두 9재에 적을 두니, 이를 문헌공도라 불렀다. 또 유신(儒臣; 문신)으로 도(徒)를 세운 자가 11명이 있으니, 문헌공 최충의 도와 아울러 세칭 12도라 하였지만, 최충의 도가 가장 성하였다. - 고려사 - |
국자감은 사학이 융성하기 전인 성종 때 이미 설치된 국립 교육 기관이므로, 사학 융성에 대응해 실시한 관학 진흥책으로 볼 수 없다.
문종 무렵 최충의 문헌공도를 비롯한 사학 12도가 번성해 관학이 위축되자, 숙종·예종 대에 관학 진흥책이 추진되었다.
- 서적포: 숙종 때 설치해 서적 간행을 활발히 하였다.
- 7재: 예종 때 국학에 설치한 전문 강좌이다.
- 양현고: 예종 때 설치한 장학 재단이다.
| ㈎ 과전법 시행 → ㈏ 직전법 실시 → ㈐ 관수관급제 실시 → ㈑ 직전법 폐지 |
관수관급제는 관청이 수조하여 관리에게 나누어 주는 방식으로, 국가의 토지 지배력이 강화되었다.
성종 때 시행되어 관리가 직접 수조하며 농민을 수탈하던 폐단을 줄였고, 16세기 중엽 직전법이 폐지되면서 수조권 지급 제도는 사라졌다.
- 과전법: 18과로 나누어 수조권을 주었으나 땔감을 얻는 시지는 지급하지 않았다(시지 지급은 고려 전시과).
- 직전법: 현직 관리에게만 수조권을 준 것으로, 수조권을 빌미로 한 지배는 사라지지 않고 오히려 수탈이 심해졌다.
- 직전법 폐지: 이후 지주 전호제는 사라진 것이 아니라 오히려 확대되었다.
| 대군장이 없고, 한 대 이후로 후, 읍군, 삼로 등의 관직이 있어서 하호를 통치하였다. 풍속은 산천을 중요시하여 산과 내마다 구분이 있어 함부로 들어가지 않는다. |
제시된 나라는 동예이며, 단궁·과하마·반어피가 동예의 특산물이다.
'대군장이 없고 후·읍군·삼로가 하호를 통치', '산천마다 구분이 있어 함부로 들어가지 않음'(책화)은 동예의 특징이다.
- 철을 낙랑·왜에 수출한 것은 변한이다.
- 제사장 천군이 존재한 것은 삼한이다.
- 가매장 후 뼈를 추려 가족 공동 무덤인 목곽에 안치한 것은 옥저이다.
| (가) | (나) |
| 양인 | 양반 |
| 중인 | |
| 상민 | |
| 천민 | 천민 |
(나)의 양반·중인·상민·천민 구분은 법제적 신분제가 아니라 실제 사회에서 통용된 반상제이다.
조선의 법제적 신분제는 (가)처럼 양인과 천민으로 나눈 양천제였다.
- 양인은 조세·국역의 의무를 지고 과거에 응시할 수 있는 자유민이었다.
- 양반은 관직 진출과 국역 면제 등 신분적 특권을 제도적으로 보장받았다.
- 천민의 대부분은 매매·상속의 대상인 노비였다.
| 왜란과 호란을 거치면서 농촌 사회는 심각하게 파괴되었다. 그러나 양반 지배층은 정치적 다툼에 몰두하여 민생 문제에 적극적으로 대처하지 못했다. 이러한 지배층에 실망한 농민들은 불만을 드러내고 도적이 되기도 하였다. 이에, 국가는 수취 체제를 개편하여 농촌 사회를 안정시키고 재정 기반을 확대하려 하였다. |
대동법으로 관청 물품을 조달하는 공인이 등장하면서 상품 화폐 경제의 발달이 촉진되었다.
대동법은 공납을 토지 결수에 따라 쌀·베·동전으로 거두는 제도로, 광해군 때 경기도에서 처음 시행되었다.
- 대동법은 함경도·평안도가 아니라 경기도에서 처음 시행되었다.
- 영정법은 풍흉에 관계없이 전세를 고정한 제도로, 풍흉에 따라 조정하지 않았다.
- 결작은 영정법이 아니라 균역법 시행으로 줄어든 군포 수입을 보충하려고 거둔 것이다.
6두품은 신라 중대에 학문적 식견을 바탕으로 왕의 정치적 조언자로 활약하였다.
강수·설총 등 6두품 출신은 전제 왕권을 뒷받침하며 국왕을 보좌했으나, 골품제로 인해 관등 승진에 한계가 있었다.
- 6두품의 관등 승진 상한은 대나마가 아니라 아찬이었다(대나마는 5두품의 상한).
- 중앙 관청의 장관이나 지방 장관직은 진골이 독점하였다.
- 신라 하대의 6두품은 진골 귀족과 대립하며 지방 호족과 연계해 새로운 사회를 모색하였다.
1862 1863 1873 1876
임술농민봉기 고종 즉위 고종 친정 선포 강화도 조약 |
흥선 대원군은 의정부와 삼군부의 기능을 축소한 것이 아니라 부활·강화하였다.
(가) 시기는 고종 즉위부터 친정 선포까지의 흥선 대원군 집권기로, 그는 세도 정치의 기반이던 비변사를 축소·폐지하고 의정부와 삼군부가 정무와 군무를 나누어 맡게 하였다.
- 왕실의 권위를 회복하려고 경복궁을 중건하였다.
- 양전 사업, 호포제, 사창제 등으로 전정·군정·환곡의 삼정 문란을 바로잡으려 하였다.
- 붕당의 근거지이자 폐단이 컸던 서원을 대폭 철폐하였다.
열강의 광산 채굴권 요구를 좌절시킨 이권 수호 운동은 신민회가 아니라 독립협회의 활동이다.
독립협회는 러시아의 절영도 조차 요구를 저지하고 프랑스·독일의 광산 채굴권 요구를 막는 등 이권 수호 운동을 전개하였다.
- 방곡령: 함경도·황해도 등에서 곡물 유출을 막으려고 지방관이 선포하였다.
- 보안회: 반대 운동을 벌여 일본의 황무지 개간권 요구를 철회시켰다.
- 국채 보상 운동: 일본 차관을 갚아 경제적 예속을 막으려 한 운동이다.
| ㈎ 나는 1914년에 경북의 한 마을에서 태어났다. 나는 1922년에 보통학교에 입학하였다. 학교는 멀었으나 나는 운이 좋은 편이었다. 내 또래 아이들이 학교에 들어가는 비율은 10명 중 2명이었다. 내 친한 친구 중에는 아예 서당에서 공부하는 아이들도 있었다. ㈏ 입학하는 날 아버지께서 말씀하시길, 나보다 다섯 살 많은 형이 보통 학교에 다닐 때에는 선생님들이 허리에 칼을 차고 수업을 하였는데, 지금은 그 때와 많이 달라졌다고 하셨다. 수업 과목 중에는 조선어 시간이 있어서 우리말을 배울 수 있었으나, 주로 일본어를 한국어로 해석하는 식이었다. ㈐ 보통학교를 마친 나는 1928년에 대구의 한 고등 보통 학교에 진학하였다. 학교 선배들은 일본인 교사 모르게 여러 단체에 가입하여 자주 모임을 가졌다. 1929년에 광주에서 항일 학생 운동이 터졌을 때 우리 학교도 동맹 휴학을 하였다. ㈑ 1930년대 후반에 내가 학부모가 되었을 때에 조만식 선생 등이 일본 상품을 배격하고 국산품을 애용할 것을 강조하기 위해 물산 장려 운동을 시작하자 나도 여기에 적극적으로 동참하였다. |
물산 장려 운동은 1930년대 후반이 아니라 1920년대 초에 시작되었으므로 ㈑ 내용이 당시 상황과 맞지 않는다.
조만식 등이 평양에서 시작한 물산 장려 운동은 1923년 무렵 전국으로 확산되었고, 1930년대 후반은 민족 말살 통치 시기였다.
- ㈎: 1922년은 제2차 조선 교육령이 시행된 해로, 취학률이 낮아 서당 교육이 병존하던 상황과 맞는다.
- ㈏: 1910년대 무단 통치기에는 교원도 제복을 입고 칼을 찼으며, 이후 조선어 과목이 있었으나 일본어 중심 교육이었다.
- ㈐: 1929년 광주 학생 항일 운동이 전국으로 확산되어 각지 학교가 동맹 휴학에 나섰다.
| (가) 금은 거란을 멸망시킨 뒤 고려에 군신관계를 요구했다. (나) 고려는 여진족을 밀어내고 동북 지방 일대에 9개의 성을 쌓았다. (다) 서희는 소손녕과의 외교담판으로 고려가 고구려의 후계자임을 인정받고, 강동 6주를 확보했다. (라) 고려는 쌍성총관부를 공격해 철령 이북의 땅을 수복하고, 요동 지방을 공략했다. (마) 고려 정부가 개경으로 환도하자, 삼별초가 장기적 대몽 항쟁을 했다. |
시대 순서는 서희의 담판 → 동북 9성 → 금의 사대 요구 → 삼별초 항쟁 → 쌍성총관부 공격이다.
(다) 강동 6주 확보는 거란 1차 침입(993), (나) 동북 9성은 윤관의 여진 정벌(1107), (가) 금의 군신 관계 요구는 금이 요를 멸망시킨 무렵(1125)이다. (마) 삼별초 항쟁은 개경 환도(1270) 이후, (라) 쌍성총관부 공격은 공민왕 때(1356)이다.
- (가)로 시작하는 배열: 금의 사대 요구는 서희의 담판·동북 9성보다 뒤이다.
- (나)로 시작하는 배열: 동북 9성 축조는 서희의 담판보다 뒤이다.
- (다)-(가)-(나) 순 배열: 금의 사대 요구는 동북 9성 축조보다 뒤이다.
| 정중부, 이의방 등 무신들은 정변을 일으킨 뒤 (가)을/를 중심으로 권력을 행사하며 권력 쟁탈전을 벌였다. 이후 최충헌이 권력을 잡으면서 최고 집정부 역할을 하는 (나)을/를 설치하고, 경대승이 신변 경호를 위해 만들었던 사병집단인 (다)을/를 중요한 권력 장치로 재건했다. |
(가) 중방, (나) 교정도감, (다) 도방이 들어간다.
무신 정변 직후 정중부·이의방 등은 무신 합좌 기구인 중방을 중심으로 권력을 행사했고, 최충헌은 교정도감을 최고 집정부로 삼고 경대승이 만든 도방을 재건하였다.
- 교정도감을 (가)에 둔 조합: 교정도감은 정변 직후가 아니라 최충헌 때 설치되었다.
- 정방을 (다)에 둔 조합: 정방은 최우가 설치한 인사 기구로, 사병 집단이 아니다.
- 삼별초를 (다)에 둔 조합: 삼별초는 최우 때 조직된 군사 조직으로, 경대승이 만든 사병 집단이 아니다.
| 지구가 9만 리를 한 바퀴 도는데 그 회전 속도가 매우 빠르다. 그런데 저 별들과 지구와의 거리가 겨우 절반이라도 몇 천만, 몇 억 리나 될지 알 수 없다. 하물며 별 밖에 또 별이 있음에랴. 우주 공간에 한계가 없다면, 별이 분포하는 영역에도 한계가 없다. 그 별들이 한 바퀴 돈다고 말한다 해도 그 궤도의 둘레가 얼마나 길지 헤아릴 수조차 없다. 하루에 얼마나 빨리 회전할지 상상해본다면, 천둥·번개와 포탄의 속도를 계산하더라도 이보다 빠르지는 못할 것이다. |
조선에서 처음 지전설을 주장한 인물은 홍대용이 아니라 김석문이다.
제시문은 지구의 회전과 무한한 우주를 말한 홍대용의 글로, 홍대용은 김석문에 이어 지전설을 주장하였다.
- 주해수용을 지어 조선·중국·서양 수학의 성과를 정리하였다.
- 의산문답에서 중국 중심의 세계관을 비판하였다.
- 지구가 우주의 중심이 아니라는 무한 우주론을 제시하였다.
| ㉮ 토기는 밑바닥이 납작하고 몸체는 볼록한 편이며 목이 위로 올라가면서 넓어져 그 생김새가 마치 표주박의 아래위를 잘라버린 것처럼 생겼다. ㉮ 토기는 청천강 이북의 평안도 지역에서 집중적으로 나오고 있고, 중국 길림성ㆍ요령성 등지에서도 출토되고 있는데, 대체로 고조선의 영역과 관련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 〔보 기〕 ㉠ 반달돌칼 ㉡ 비파형 동검 ㉢ 세형 동검 ㉣ 거친무늬 거울 ㉤ 잔무늬 거울 |
㉮ 토기는 미송리식 토기로 청동기 시대 유물이며, 같은 시대 유물은 반달돌칼·비파형 동검·거친무늬 거울이다.
미송리식 토기는 비파형 동검·고인돌과 함께 고조선의 문화 범위를 보여 주는 대표 유물이다.
- 세형 동검과 잔무늬 거울을 함께 고른 조합: 두 유물 모두 청동기 문화가 독자적으로 발전한 초기 철기 시대 유물이다.
- 반달돌칼·세형 동검·잔무늬 거울을 고른 조합: 세형 동검과 잔무늬 거울이 초기 철기 시대 유물이다.
- 비파형 동검과 거친무늬 거울만 고른 조합: 청동기 시대의 반달돌칼을 빠뜨렸다.
| ㉠ 의천은 교종을 중심으로 선종을 통합하기 위하여 천태종을 창시하였다. ㉡ 지눌은 독경과 선 수행, 노동에 힘쓰자는 개혁 운동인 수선사 결사를 제창하였다. ㉢ 최승로는 유교 사상을 치국의 근본으로 삼아 사회 개혁을 추진하였다. ㉣ 안향은 고려에 성리학을 처음으로 소개하였다. |
순서는 최승로 → 의천 → 지눌 → 안향이다.
최승로의 시무 28조는 성종 때, 의천의 천태종 창시는 숙종 무렵, 지눌의 수선사 결사는 무신 집권기, 안향의 성리학 소개는 충렬왕 때이다.
- 의천으로 시작하는 배열: 의천은 성종 때의 최승로보다 뒤이다.
- 지눌로 시작하는 배열: 무신 집권기의 지눌이 가장 앞설 수 없다.
- 최승로 다음에 지눌을 둔 배열: 지눌은 의천보다 뒤 시기이다.
| 이 기구는 16세기 중종 초에 여진족과 왜구에 대비하기 위하여 처음 설치되었다. 이때에는 국방 문제에 정통한 재상을 중심으로 운영되던 임시 회의 기구였다. |
이 기구는 비변사이며, 비변사는 왕권 강화가 아니라 오히려 왕권을 약화시켰다.
비변사는 임시 기구로 출발해 상설화되었고, 임진왜란 이후 최고 기구로 확대되면서 의정부·6조 체제가 유명무실해졌다. 이에 흥선 대원군이 그 기능을 축소·폐지하였다.
- 임진왜란을 계기로 국방뿐 아니라 외교·내정까지 관장하였다.
- 19세기 세도 정치기에 세도 가문이 권력을 행사하는 중심 기구였다.
- 정치의 중심이 되면서 의정부와 6조의 기능을 약화시켰다.
경제 개발 5개년 계획 과정에서 산업 간·도농 간 격차와 함께 빈부 격차도 심화되었다.
정부 주도의 성장 우선 정책으로 고도성장을 이루었으나 분배가 뒤로 밀려 저임금 노동 문제와 소득 불균형이 커졌다.
- 정부 주도로 수출 주도형 산업을 육성한 성장 우선 정책이었다.
- 1970년대 중화학 공업 육성으로 공업 구조가 중공업 중심으로 바뀌었다.
- 차관 등 외자 도입으로 개발 재원을 마련하였다.
| ㉠ 서해안의 간척 사업과 토지 매입 등을 통해 농장을 확대하였다. ㉡ 부국강병보다는 도덕과 의리를 바탕으로 하는 왕도 정치를 강조하였다. ㉢ 중앙의 권력을 바탕으로 향촌 사회를 장악하려고 하였다. ㉣ 공신과 외척의 비리와 횡포를 성리학적 명분론에 입각하여 비판하였다. ㉤ 관학파의 학풍을 계승하여 문물제도 정비에 크게 기여하였다. ㉥ 주나라의 제도를 기록한 경전인 주례를 국가의 통치 이념으로 중요하게 여겼다. |
15세기 사림과 관련된 것은 왕도 정치 강조와 공신·외척 비판이다.
사림은 성리학적 명분론과 도덕·의리를 중시하며 향촌 자치를 추구했고, 훈구 세력의 비리를 비판하였다.
- 간척·토지 매입으로 농장을 확대한 것은 훈구 세력이다.
- 중앙 권력으로 향촌을 장악하려 한 것은 훈구 세력이며, 사림은 향촌 자치를 내세웠다.
- 관학파 학풍을 계승해 문물제도를 정비한 것은 훈구 세력이다.
- 주례를 통치 이념으로 중시한 것은 관학파(훈구) 계열이다.
| ㉠ 대한 독립 군단 결성 ㉡ 간도참변 ㉢ 청산리 전투 ㉣ 삼부의 성립 ㉤ 자유시 참변 |
순서는 청산리 전투 → 간도 참변 → 대한 독립 군단 결성 → 자유시 참변 → 3부 성립이다.
청산리 전투(1920)에 대한 보복으로 일본군이 간도 참변을 일으키자 독립군은 밀산에서 대한 독립 군단을 결성해 러시아 자유시로 이동했다가 자유시 참변(1921)을 겪었다. 이후 만주에서 참의부·정의부·신민부의 3부가 성립하였다.
- 간도 참변 다음에 대한 독립 군단을 두되 3부를 자유시 참변 앞에 둔 배열: 3부는 자유시 참변 이후 독립군을 재정비하며 성립하였다.
- 대한 독립 군단을 간도 참변 앞에 두고 자유시 참변 뒤에 3부를 둔 배열: 대한 독립 군단은 간도 참변으로 독립군이 북상한 뒤 결성되었다.
- 대한 독립 군단을 간도 참변 앞에, 3부를 자유시 참변 앞에 둔 배열: 두 사건의 선후가 모두 어긋난다.
| 전시과 제도에서는 ㉠문무 관리로부터 군인, 한인에 이르기까지 18등급으로 나누어 ㉡전지와 시지를 지급하였다. 이때 지급된 토지는 ㉢소유권을 지급한 것이며, ㉣이 토지를 받은 자가 죽거나 관직에서 물러날 때에는 국가에 반납하도록 하였다. |
전시과에서 지급한 것은 토지의 소유권이 아니라 수조권이므로 ㉢이 잘못되었다.
전시과는 관직 복무의 대가로 전지와 시지에서 조세를 거둘 권리를 준 제도로, 토지 소유권은 원래의 소유자에게 있었다.
- ㉠: 문무 관리부터 군인·한인까지 18등급으로 나누어 지급하였다.
- ㉡: 곡물을 거두는 전지와 땔감을 얻는 시지를 함께 지급하였다.
- ㉣: 받은 자가 죽거나 관직에서 물러나면 국가에 반납하는 것이 원칙이었다.
현세의 고난 구제를 바라는 관음 신앙을 이끈 인물은 원효가 아니라 의상이다.
원효는 '나무아미타불'만 외면 극락에 갈 수 있다는 아미타 신앙(정토 신앙)을 전파해 불교 대중화에 기여하였다.
- 의상: 모든 존재가 상호 의존하며 조화를 이룬다는 화엄 사상을 정립하였다.
- 혜초: 인도와 중앙아시아를 순례하고 왕오천축국전을 남겼다.
- 도선: 풍수지리설을 들여와 경주 중심의 지리 개념에서 벗어나는 계기를 마련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