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원직 9급 한국사] 08년 1회차
법원직 9급 한국사 기출문제

08년 1회차

총 25문항 · 객관식 · A4 약 1장

1 / 1
A4정답 포함
법원직 9급 한국사 기출문제모두CBT · moducbt.com

08년 1회차

총 25문항 · 객관식 · 정답·해설 포함
문제 1
다음은 어느 민족 운동가의 약력이다. (가)에 들어갈 활동으로 올바른 것은?
1919년 만주 지린성에서 윤세주 등과 조선 의열단 조직
1932년 난징으로 이동, 이후 조선 혁명 간부 학교 창립
1935년 민족 혁명당 조직
1938년 조선 민족 전선 연맹 결성, 조선 의용대 창설
1942년 (가)
1958년 북한에서 숙청됨
1국내 민족주의자 및 공산주의자들과 손을 잡고 함경도 보천보를 습격하였다.
2조선 독립 동맹이 이끄는 조선 의용군에 흡수되어 태평양 전쟁에 참전하였다.
3중국의 국공 내전에 참전하였다가 그 뒤 북한으로 들어가 인민군으로 편입되었다.
4일부 병력을 이끌고 한국 광복군에 합류하여 광복군의 조직과 병력이 증강되었다.
정답 및 해설

약력의 주인공은 김원봉이며, 1942년 그는 조선 의용대 일부를 이끌고 한국광복군에 합류하였다.

‘의열단 조직’, ‘조선 혁명 간부 학교’, ‘민족 혁명당’, ‘조선 의용대 창설’이 단서이다. 김원봉은 광복군 부사령관을 맡았고, 이 합류로 광복군의 조직과 병력이 보강되었다.

  • 보천보 습격은 1937년 동북 항일 연군 계열 부대가 국내 조직과 연계해 벌인 일로, 김원봉의 활동이 아니다.
  • 조선 독립 동맹 산하 조선 의용군으로 개편된 것은 화북으로 이동한 조선 의용대 주력이며, 김원봉은 이에 가담하지 않았다.
  • 국공 내전 참전 후 북한 인민군으로 편입된 것은 조선 의용군의 행로이다.
문제 2
일제 시기 밑줄 친 이것을 이론적으로 반박한 사학자의 활동은?
이것은 한국이 여러 정치적 사회적 변화를 겪으면서도 능동적으로 발전하지 못하였으며, 개항 당시 조선 사회가 10세기 말 고대 일본의 수준과 비슷하다는 주장이다. 특히 근대 사회로 이행하는데 필수적인 봉건 사회가 형성되지 못하여 사회․경제적으로 낙후한 상태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주장은 우리나라의 근대화를 위해서는 일본의 역할이 필요하다는 침략 미화론으로 이어졌다.
1사적 유물론에 입각하여 한국사를 세계사적 보편성 위에 체계화하였다.
2개별적 사실을 객관적으로 밝히려는 실증주의 역사 연구 방법론을 따랐다.
3고대사 연구에 초점을 맞추었으며 민족주의 사학자들의 정신 사관을 비판하였다.
4민족의 고유한 문화 전통과 정신을 강조하여 민족 독립의 정신적 기반을 마련하였다.
정답 및 해설

밑줄 친 주장은 식민 사관의 정체성론이며, 이를 이론적으로 반박한 것은 사적 유물론에 입각한 사회 경제 사학이다.

백남운 등은 『조선사회경제사』 등에서 한국사도 세계사의 보편적 발전 법칙에 따라 단계적으로 발전해 왔음을 체계화하여 ‘봉건 사회 결여론’을 정면으로 반박하였다.

  • 개별 사실의 객관적 고증을 추구한 것은 진단 학회 중심의 실증 사학으로, 발전 단계론을 내세워 정체성론을 반박하지는 않았다.
  • 고대사 연구 집중과 정신 사관 비판만으로는 한국사가 단계적으로 발전했다는 논증이 되지 못해 정체성론 반박의 핵심이 아니다.
  • 민족 고유의 문화와 정신을 강조한 것은 민족주의 사학으로, 정체성론을 사회 발전 이론으로 반박한 흐름과는 다르다.
문제 3
다음 조약들을 순서대로 바르게 나열한 것은?
(가) 을사 조약
(나) 제2차 영ㆍ일 동맹
(다) 포츠머스 강화 조약
(라) 가쓰라ㆍ태프트 밀약
1(가) - (나) - (다) - (라)
2(나) - (라) - (다) - (가)
3(다) - (가) - (나) - (라)
4(라) - (나) - (다) - (가)
정답 및 해설

네 조약은 모두 1905년에 체결되었으며, 순서는 가쓰라·태프트 밀약 → 제2차 영·일 동맹 → 포츠머스 강화 조약 → 을사조약이다.

일본은 미국·영국·러시아로부터 차례로 한국 지배를 인정받은 뒤 을사조약으로 외교권을 박탈하였다.

  • 가쓰라·태프트 밀약(1905.7): 미국의 필리핀 지배와 일본의 한국 지배를 서로 인정하였다.
  • 제2차 영·일 동맹(1905.8): 영국이 일본의 한국 보호권을 인정하였다.
  • 포츠머스 강화 조약(1905.9): 러·일 전쟁을 끝내며 러시아가 일본의 한국 지배권을 인정하였다.
  • 을사조약(1905.11): 통감부 설치와 외교권 박탈로 이어졌다.
문제 4
다음 중 주심포 양식의 목조 건물을 모두 고른 것은?
ㄱ. 안동 봉정사 극락전 ㄴ. 영주 부석사 무량수전
ㄷ. 예산 수덕사 대웅전 ㄹ. 사리원 성불사 응진전
1ㄱ
2ㄱ, ㄴ
3ㄱ, ㄴ, ㄷ
4ㄱ, ㄴ, ㄷ, ㄹ
정답 및 해설

주심포 양식 건물은 봉정사 극락전, 부석사 무량수전, 수덕사 대웅전의 세 곳이다.

주심포 양식은 기둥 위에만 공포를 짜 올린 방식으로 고려 전·중기 건물에 주로 나타나고, 기둥 사이에도 공포를 둔 다포 양식은 고려 후기에 등장해 조선으로 이어졌다.

  • 안동 봉정사 극락전은 현존 최고(最古) 목조 건물로 꼽히는 주심포 양식 건물이다.
  • 영주 부석사 무량수전은 배흘림기둥으로 유명한 주심포 양식 건물이다.
  • 예산 수덕사 대웅전은 건립 연대가 확인되는 주심포 양식 건물이다.
  • 사리원 성불사 응진전은 다포 양식 건물이므로 제외된다.
문제 5
다음 자료에 나오는 지역과 관련한 설명으로 옳은 것은?
복잡한 역사적 논박 뒤에 숨겨진 중국의 ‘동북공정’은 결국 이 지역에 대한 영토적 욕망의 표현이라는 분석이 일반적이다. 이 지역은 대략적으로 중국 지린성 동남쪽, 지금의 옌볜 조선인 자치주에 해당되는 곳인데, 1909년 청과 일본이 체결한 조약에 의해 청의 영토로 편입되었다.
- ○○신문 -
1원·명 교체기를 이용하여 공민왕 때 무력으로 수복하였다.
2조선 초기부터 지속적으로 사민 정책을 실시하여 개발하였다.
3이곳에 거주하던 한인들은 1937년 중앙아시아로 강제 이주당하였다.
4토문강의 해석 차이로 조선과 청 사이에 영토 귀속 문제가 발생하였다.
정답 및 해설

자료의 지역은 1909년 청·일 사이의 간도 협약으로 청에 넘어간 간도이며, 백두산정계비의 ‘토문강’ 해석 차이로 조선과 청 사이에 귀속 분쟁이 일어났다.

조선은 토문강을 송화강 지류로, 청은 두만강으로 해석하였고, 대한 제국은 이범윤을 간도 관리사로 파견하기도 하였다.

  • 공민왕이 원·명 교체기에 무력으로 되찾은 곳은 쌍성총관부가 있던 철령 이북 지역이다.
  • 조선 초 사민 정책으로 개발한 곳은 4군 6진이 설치된 압록강·두만강 이남 지역이다.
  • 1937년 중앙아시아로 강제 이주된 한인은 소련의 연해주에 살던 사람들이다.
문제 6
다음은 조선 후기 경제 변화에 대한 글이다. 밑줄 친 내용에 대한 설명으로 옳은 것을 <보기>에서 모두 고르면?
서민들은 점차 경제적 변화를 적극적으로 의식하고, 이에 대응하여 삶의 자세를 바꾸어 갔다. 농민들은 생산력을 높이기 위하여 ㉠새로운 영농방법을 추구하였고, ㉡상품 작물을 재배하여 소득을 늘리려고 하였다. ㉢상인들도 상업 활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여 대자본을 가진 상인들도 출현하였다. ㉣수공업 생산도 활발해져 민간에서 생산 활동을 주도하여 갔다. 이러한 과정에서 자본 축적이 이루어지고, 지방의 상공업 활동이 활기를 띠었으며, 상업 도시가 출현할 수 있었다.

<보기>
(가) ㉠ - 남부 지방 일부에 처음으로 이앙법이 보급되기 시작하였다.
(나) ㉡ - 쌀의 상품화가 활발해지면서 밭을 논으로 바꾸는 현상이 활발해졌다.
(다) ㉢ - 금난전권이 폐지되어 시전 상인의 활동이 크게 활성화되었다.
(라) ㉣ - 원료의 구입과 제품의 처분에서 대부분 상업 자본의 지배를 받았다.
1(가), (다)
2(나), (라)
3(가), (다), (라)
4(가), (나), (다), (라)
정답 및 해설

옳은 것은 밭을 논으로 바꾸는 현상과 상업 자본의 지배를 받은 수공업에 관한 설명이다.

조선 후기에는 쌀의 상품화로 밭을 논으로 바꾸는 현상이 늘었고, 민영 수공업자는 상인에게 원료와 대금을 미리 받는 선대제 방식으로 상업 자본에 예속되는 경우가 많았다.

  • 이앙법은 고려 말에 이미 남부 일부에 보급되었고, 조선 후기에는 전국으로 확산되었으므로 ‘처음 보급되기 시작’은 틀리다.
  • 신해통공으로 금난전권이 폐지되면서 활성화된 것은 시전 상인이 아니라 사상(私商)의 활동이다.
문제 7
다음은 조선 후기 호락논쟁에 관련한 글이다. ㉠ 사상과 ㉡ 사상에 대한 설명으로 옳은 것을 <보기>에서 고르면?
호락논쟁(湖洛論爭)은 인간과 사물의 본성이 다르다는 인물성이론(人物性異論)을 주장한 충청도지역의 호론과 인간과 사물의 본성이 같다는 인물성동론(人物性同論)을 주장한 서울·경기지역의 낙론 사이의 논쟁이다. 뒤에 호론은 ㉠ 으로 연결되었으며, 낙론은 ㉡ 으로 연결되었다.

<보기>
(가) ㉠ - 흥선대원군의 대외 정책을 지지하였다.
(나) ㉡ - 의병 항쟁의 사상적 바탕이 되었다.
(다) ㉠ - 박규수, 오경석 등에게 영향을 주었다.
(라) ㉡ - 청의 문물을 수용하자고 주장하였다.
1(가), (나)
2(가), (라)
3(나), (다)
4(다), (라)
정답 및 해설

호론은 위정척사 사상으로, 낙론은 북학 사상을 거쳐 개화 사상으로 이어졌으므로 옳은 것은 위정척사의 대원군 정책 지지와 북학의 청 문물 수용이다.

인간과 사물의 본성을 구별한 호론은 화이론을 강조해 척사론의 바탕이 되었고, 같다고 본 낙론은 청 문물 수용론으로 연결되었다.

  • 위정척사 사상은 흥선 대원군의 통상 수교 거부 정책을 지지하였으므로 옳다.
  • 의병 항쟁의 사상적 바탕이 된 것은 위정척사 사상이므로 낙론 계열에 연결한 것은 틀리다.
  • 박규수·오경석 등 초기 개화파에 영향을 준 것은 북학 사상이므로 호론 계열에 연결한 것은 틀리다.
  • 북학 사상은 청의 선진 문물 수용을 주장하였으므로 옳다.
문제 8
다음 주장을 배격하면서 나타난 민족 운동은?
지금의 조선 민족에게는 왜 정치적 생활이 없는가? 일본이 조선을 병합한 이래로 조선인에게는 모든 정치 활동을 금지한 것이 첫째 원인이다. 지금까지 해온 정치 운동은 모두 일본인을 적대시 하는 운동뿐이었다. 이런 종류의 운동은 해외에서나 할 수 있는 일이고, 조선 내에서는 허용되는 범위 내에서 일대 정치적 결사를 조직해야 한다는 것이 우리의 주장이다.
- 이광수, 『민족적 경륜』 -
1신간회가 조직되었다.
2조선사 편수회가 조직되었다.
3실력 양성 운동이 전개되었다.
4해외에서 독립운동기지가 건설되었다.
정답 및 해설

이광수의 「민족적 경륜」이 내세운 자치론을 배격하며 나타난 운동은 신간회 조직이다.

1920년대 중반 일부 민족주의자가 일제 통치 아래 자치를 주장하자, 비타협적 민족주의자와 사회주의자가 민족 유일당 운동을 벌여 1927년 신간회를 결성하였다.

  • 조선사 편수회는 식민 사관에 따른 한국사 편찬을 위해 일제가 만든 기구로 민족 운동이 아니다.
  • 실력 양성 운동은 자치론과 같은 타협적 흐름과 맞닿아 있어, 자치론을 배격한 결과로 볼 수 없다.
  • 해외 독립운동 기지 건설은 국권 피탈 전후 1910년대에 본격화된 활동으로 시기가 맞지 않는다.
문제 9
조선 정부가 다음과 같은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실시한 것은?
무릇 백성의 근심은 재해를 살피는 것이 밝지 않고 등분을 정하는 것이 공평하지 않은데 있습니다. 감사가 수령을 뽑아 보내어 답험하게 하면 수령은 길만 따라가서 위관에게 맡기고 위관은 서리에게 맡깁니다. 서리는 산 넘고 물 건너는 험한 길을 꺼려서 평탄한 길로만 다닙니다. 음식 접대를 받고 뇌물을 기대합니다. 그러므로 힘 있는 자에게는 곡식이 여물어도 재해를 입는 것으로 하고, 가난한 자에게는 재해를 입어도 여문 것이라 합니다. 수령은 많이 거두어들이는 데에 힘쓰므로 흉년이 들어도 흉년이 아니라고 하고 곡식이 조금만 잘되어도 아주 잘 되었다고 하여 그 등급을 높입니다. 애달픈 백성들은 어디에 호소하겠습니까
- 『중종실록』 -
1토지 1결당 4두로 조세 부담을 고정하여 거두었다.
2수조권자가 직접 농민에게 세금을 거두도록 하였다.
3공인을 통해 관청에서 필요한 물품을 납부하도록 하였다.
4토지의 비옥도에 따라 등급을 나누는 전분 6등법을 만들었다.
정답 및 해설

사료는 해마다 풍흉을 따져 세액을 정하는 과정의 폐단을 지적하고 있으며, 이를 해결하기 위해 풍흉과 관계없이 1결당 4두로 고정한 영정법이 시행되었다.

‘재해를 살피는 것’, ‘등분을 정하는 것’이 공평하지 않다는 지적이 단서로, 연분 판정 과정에서 수령·서리의 자의와 뇌물이 개입하는 문제였다. 인조 때 영정법은 전세를 정액화하여 이러한 판정 과정을 줄였다.

  • 수조권자가 농민에게 직접 거두는 방식은 오히려 수탈을 낳아 성종 때 관수관급제로 국가가 대신 거두게 하였다.
  • 공인을 통한 물품 조달은 대동법의 결과로 공납의 폐단을 해결하려는 것이지 전세 문제와는 관계가 없다.
  • 전분 6등법은 세종 때 이미 공법으로 시행된 제도로, 중종 대 사료가 지적한 폐단 이후의 대책이 아니다.
문제 10
다음 자료와 관련하여 당시 농촌 사회의 모습을 추론한 것으로 옳지 않은 것은?
농민이 밭에 심는 것은 곡물만이 아니다. 모시, 오이, 배추, 도라지 등의 농사도 잘 지으면 그 이익이 헤아릴 수 없이 크다. 도회지 주변에는 파밭, 마늘밭, 배추밭, 오이밭 등이 많다. 특히 서도 지방의 담배밭, 북도 지방의 삼밭, 한산의 모시밭, 전주의 생강밭, 강진의 고구마밭, 황주의 지황밭에서의 수확은 모두 상상등전(上上等田)의 논에서 나는 수확보다 그 이익이 10배에 이른다.
- 『경세유표』 -
1부농층의 성장으로 관권이 약화되었다.
2소작료가 도조법 방식으로 변화되었다.
3토지에서 밀려난 임노동자가 출현하였다.
4지주와 전호가 경제적 관계로 바뀌어 갔다.
정답 및 해설

옳지 않은 것은 부농층의 성장으로 관권이 약화되었다는 추론이다. 조선 후기에는 오히려 수령을 중심으로 한 관권이 강화되었다.

『경세유표』는 상품 작물 재배로 큰 이익을 얻는 조선 후기 농촌을 보여 준다. 이 시기 성장한 부농층은 수령과 결탁해 향촌 영향력을 키웠지만 재지 사족의 향권이 약해지면서 수령·향리의 권한이 커졌다.

  • 일정 액수를 내는 도조법이 확산되어 소작료 수취 방식이 변화하였다.
  • 광작과 농민층 분화로 토지에서 밀려난 농민이 임노동자로 전락하였다.
  • 지주와 전호의 관계가 신분적 예속에서 경제적 계약 관계로 바뀌어 갔다.
문제 11
다음은 고대 국가의 통치 조직을 정리한 것이다. ㉠ ~ ㉣에 대한 설명으로 옳은 것은?
구 분고구려백제신라통일 신라
최고 관직㉠상좌평상대등시중
지방 행정 조직5부5방㉡9주
특수 행정 구역3경㉢2소경5소경
최고 회의 기구제가 회의정사암 회의㉣
1㉠ - 정당성의 장관으로 국정을 총괄하였다.
2㉡ - 지방 행정 조직은 군사 조직을 겸하였다.
3㉢ - 풍수지리설의 영향으로 지방 거점에 설치하였다.
4㉣ - 임시 기구로 법 제정이나 시행 규정을 다루었다.
정답 및 해설

옳은 것은 신라의 지방 행정 조직인 주(州)에 대한 설명으로, 삼국의 지방 행정 조직은 군사 조직을 겸하였다.

신라는 주에 군주를 파견해 행정과 군사를 함께 맡겼으며, 고구려 5부·백제 5방도 마찬가지로 지방관이 군사 지휘권을 가졌다.

  • 고구려 최고 관직은 대대로로, 정당성 장관(대내상)은 발해의 관직이다.
  • 백제의 특수 행정 구역은 22담로이며, 풍수지리설은 신라 말 이후 확산된 사상이어서 관련이 없다.
  • 신라의 화백 회의는 만장일치제의 귀족 회의이며, 법 제정이나 시행 규정을 다룬 임시 기구는 고려의 식목도감이다.
문제 12
다음은 고려의 대외 관계와 관련한 사료들이다. 순서대로 알맞게 나열한 것은?
(가) 개경은 기업이 이미 쇠하여 궁궐이 다 불타 남은 것이 없으나, 서경은 왕기가 크게 일어나고 있으니 주상께서 그 곳으로 옮기시어 수도로 삼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나) 과인은 이제 개경으로 환도하고자 하노라. 이제 출륙하여 백성을 도모하고자 하니, 모든 백관들은 과인의 뜻을 헤아리기 바라노라.
(다) 지금 요동을 정벌하는 것은 네 가지 불가한 점이 있습니다. 소로써 대를 거역하는 것이 첫째요, 여름에 군대를 동원하는 것이 그 둘째입니다.
(라) 우리나라는 고구려를 계승한 나라이므로 국호를 고려라 부르며, 평양에 도읍한 것이다. 양국의 국경을 따진다면, 너희 나라 동경도 본래 우리나라 영토인데 어찌 침략이란 말이냐?
1(가) - (나) - (라) - (다)
2(가) - (다) - (라) - (나)
3(다) - (가) - (나) - (라)
4(라) - (가) - (나) - (다)
정답 및 해설

순서는 서희의 외교 담판 → 묘청의 서경 천도 주장 → 개경 환도 → 이성계의 4불가론이다.

각 사료의 단서어로 시기를 확정하면 고려의 대외 관계 흐름(거란 → 금 → 몽골 → 명)과 일치한다.

  • ‘고구려를 계승’, ‘동경도 본래 우리 영토’: 993년 거란 1차 침입 때 서희가 소손녕과 담판한 내용이다.
  • ‘서경은 왕기가 크게 일어나’: 1135년 전후 금에 대한 사대에 반발한 묘청의 서경 천도 주장이다.
  • ‘개경으로 환도’, ‘출륙’: 1270년 원종이 몽골과 강화한 뒤 개경으로 돌아간 일이다.
  • ‘요동을 정벌하는 것은 네 가지 불가’: 1388년 요동 정벌에 반대한 이성계의 4불가론이다.
문제 13
다음 사료에서 주장하는 바와 입장이 같은 것은?
군신, 부자, 부부, 붕우, 장유의 윤리는 하늘에서 얻은 것이고, 인간의 본성에 부여된 것으로서 천지를 통하는 만고불변의 이치입니다. 그리고 위에 존재하는 것으로서 도(道)가 됩니다. 이에 대해 배, 차, 군대, 농업, 기계 등 백성을 편하고 국가를 이롭게 하는 것들은 외형적인 것으로 기(器)가 됩니다. 신이 변혁을 꾀하고자 하는 것은 기이지 도가 아닙니다.
1안으로는 탐학한 관리의 머리를 베고 밖으로는 횡포한 강적의 무리를 구축하자.
2서양 오랑캐가 침범하는 데도 싸우지 않으면 화친하는 것이요, 화친을 주장하는 것은 나라를 팔아먹는 것이다.
3저들의 종교는 사악하다. 하지만 저들의 기술은 이롭다. 종교는 배척하되 기술을 본받는 것은 함께할 수 있다.
4강화가 한번 이루어지면 사악한 서적과 천주의 초상화가 함께 들어와 사악한 기운이 온 나라를 덮게 될 것이다.
정답 및 해설

사료는 유교 윤리(도)는 지키고 서양의 기술(기)만 받아들이자는 동도서기론이며, 같은 입장은 종교는 배척하되 기술은 본받자는 주장이다.

‘변혁을 꾀하고자 하는 것은 기이지 도가 아니다’라는 구절이 단서로, 1880년대 온건 개화파와 정부의 개화 정책을 뒷받침한 논리이다.

  • 탐학한 관리를 베고 강적을 몰아내자는 것은 동학 농민 운동의 반봉건·반외세 주장이다.
  • 싸우지 않으면 화친이고 화친 주장은 매국이라는 것은 흥선 대원군의 척화비 문구로, 서양과의 교류 자체를 거부하였다.
  • 강화가 이루어지면 사악한 서적이 들어온다는 것은 개항에 반대한 위정척사파의 왜양일체론이다.
문제 14
다음 중 고려의 가족제도에 대한 설명으로 옳은 것을 모두 고른 것은?
ㄱ. 여성이 재가할 경우, 그 소생 자식의 사회적 진출에 차별을 두지 않았다.
ㄴ. 아들이 없을 경우 양자를 들여 제사를 받들게 하였다.
ㄷ. 사위가 처가의 호적에 입적하여 처가에서 생활하는 경우가 적지 않았다.
ㄹ. 혼인의 형태는 일부일처제가 일반적인 현상이었다.
1ㄱ,ㄷ,ㄹ
2ㄴ,ㄷ,ㄹ
3ㄱ,ㄷ
4ㄴ,ㄷ
정답 및 해설

고려의 가족 제도로 옳은 것은 재가녀 소생의 차별 없음, 사위의 처가 입적·생활, 일부일처제이다.

고려는 여성의 지위가 비교적 높아 재산을 자녀에게 균분하고, 제사도 아들딸이 돌아가며 지냈다.

  • 여성의 재가가 비교적 자유로웠고 그 소생 자녀의 사회 진출에도 차별이 없었다.
  • 아들이 없을 때 양자를 들여 제사를 잇게 한 것은 성리학적 종법 질서가 자리 잡은 조선 후기의 모습이며, 고려에서는 딸이나 외손이 제사를 받드는 경우가 많았다.
  • 혼인 후 남자가 처가에서 생활하는 경우가 많아 사위가 처가 호적에 오르기도 하였다.
  • 혼인은 일부일처제가 일반적이었다.
문제 15
다음 글과 관련 있는 시대의 유물은 ?
기원전 8000년경에 후빙기가 시작되면서 기후는 차차 따뜻해졌지만, 기원전 5000년대 중반까지는 아직 기후가 추운 편이었다. 후빙기에 들어서면서 한반도의 자연 환경은 크게 변화하기 시작하여 해수면이 높아지고 동식물이 바뀌어 갔다. 그러나 기원전 5500년경부터 3000년경까지는 기후가 따뜻하여 소나무 숲에 상록 활엽수, 낙엽 활엽수가 첨가되어 현재와 비슷한 산림 형태를 이루게 되었다. 이 무렵의 한반도는 대략 지금과 비슷한 형태를 하고 있었으나, 서해안에서는 해수면이 현재보다 7미터쯤 낮아 사람들은 현재의 해안선보다 바다 쪽으로 더 나가 생활할 수 있었다.
1거푸집
2주먹도끼
3반달 돌칼
4빗살무늬 토기
정답 및 해설

자료는 후빙기 이후 기후가 따뜻해진 신석기 시대의 환경을 설명하므로, 해당 시대의 유물은 빗살무늬 토기이다.

‘후빙기’, ‘기원전 5500년경부터 3000년경’, ‘현재와 비슷한 산림 형태’가 단서이다. 신석기인은 토기를 만들어 식량을 저장·조리하였다.

  • 거푸집은 청동기를 주조하는 틀로 청동기 시대 이후의 유물이다.
  • 주먹도끼는 빙하기에 해당하는 구석기 시대의 뗀석기이다.
  • 반달 돌칼은 곡식 이삭을 따는 데 쓴 청동기 시대의 간석기이다.
문제 16
다음 각 조약과 관련한 설명으로 옳지 않은 것은?
(가) 조선국은 부산 외에 두 곳의 항구를 개항하고 일본인이 와서 통상을 하도록 허가한다.
(나) 조선국이 어느 때든지 어느 국가나 어느 나라 상인에게 본 조약에 의하여 부여되지 않는 어떤 특혜를 허가할 때는 이와 같은 특혜는 미합중국의 관민과 상인 및 공민에게도 무조건 균점된다.
(다) 북경과 한성, 양화진에서 청과 조선 양국 상인의 무역을 허용한다. 지방관이 발행한 여행 허가증이 있으면 내지 행상도 할 수 있다.
1(가) - 부산에 이어 목포, 인천이 차례로 개항되었다.
2(나) - 강화도 조약과 달리 관세 조항이 들어 있었다.
3(다) - 조선에서 청 상인과 일본 상인의 경쟁이 격화되었다.
4(가), (나), (다) - 조선에 불리한 불평등 조약이었다.
정답 및 해설

옳지 않은 것은 강화도 조약에 따라 목포·인천이 개항되었다는 설명으로, 부산에 이어 개항된 곳은 원산과 인천이다.

세 사료는 각각 강화도 조약(1876), 조·미 수호 통상 조약(1882), 조·청 상민 수륙 무역 장정(1882)이다. 목포는 1897년 조선 정부가 스스로 개항한 항구이다.

  • 조·미 수호 통상 조약은 최혜국 대우를 규정한 불평등 조약이지만, 개항 초 일본과의 무관세 무역과 달리 관세 조항이 들어 있었다.
  • 조·청 상민 수륙 무역 장정으로 청 상인의 내지 통상이 허용되자 조선 시장에서 청·일 상인의 경쟁이 치열해졌다.
  • 세 조약 모두 치외 법권이나 최혜국 대우 등이 포함된 조선에 불리한 불평등 조약이었다.
문제 17
다음 성명서가 발표된 직접적 배경을 이해하기 위한 사료로 적절한 것은?
…한국이 있어야 한국 사람이 있고, 한국 사람이 있고야 민주주의도 공산주의도 또 무슨 단체도 있을 수 있는 것이다. …내가 불초하나 일생을 독립 운동에 희생하였다. 내 나이가 이제 73세인바 이제 새삼스럽게 재물을 탐내며 명예를 탐낼 것이냐? 더구나 외국 군정 하에 있는 정권을 탐낼 것이냐? 내가 대한민국 임시 정부를 지켜온 것도 다 조국의 독립과 민족의 해방을 위하는 것뿐이다. 나의 단일한 염원은 3천만 동포와 손을 잡고 통일된 조국의 달성을 위하여 공동 분투하는 것뿐이다. 이 육신을 조국이 수요(需要)로 한다면 당장에라도 제단에 바치겠다.…
- 『삼천만 동포에게 읍고함』 -
1북위 38도선 이남의 조선 영토와 조선 인민에 대한 통치의 모든 권한은 당분간 본관 권한 하에 시행한다.
2우리는 남방만이라도 임시 정부 혹은 위원회 같은 것을 조직하여 38 이북에서 소련이 철퇴하도록 세계 공론에 호소하여야 할 것이다.
3공동 위원회는 최고 5년 기간의 4개국 통치 협약을 작성하는데 공동으로 참작할 수 있는 제안을 조선 임시 정부와 협의하여 제출하여야 한다.
4지난 2월 결의에서 유엔 소총회가 표명한 견해에 따라 위원단이 접근 가능한 한국 지역에서 선거 실시를 감시하며 동선거는 5월 10일 이전에 실시한다.
정답 및 해설

성명서는 김구의 「삼천만 동포에게 읍고함」(1948)이며, 직접적 배경은 유엔 감시하의 남한만의 총선거 추진이다.

‘통일된 조국의 달성’을 호소한 김구는 남한 단독 선거에 반대하며 남북 협상을 추진하였다. 이 흐름을 보여 주는 사료는 유엔 소총회 결의에 따라 위원단이 접근 가능한 지역에서 5월 10일 이전 선거를 감시한다는 내용이다.

  • 북위 38도선 이남 통치를 선언한 것은 1945년 맥아더 포고령으로 미군정 실시에 관한 것이다.
  • 남방만이라도 임시 정부를 조직하자는 것은 1946년 이승만의 정읍 발언으로 단독 정부론의 출발점이지만, 성명 직전의 선거 결정과는 거리가 있다.
  • 최고 5년 기간의 4개국 통치 협약은 1945년 모스크바 3국 외상 회의의 신탁 통치 결정이다.
문제 18
다음 법령의 시행 결과에 대한 설명으로 옳은 것을 <보기>에서 모두 고른 것은?
제4조 : 토지 소유자는 조선 총독이 정하는 기간 내에 주소ㆍ씨명, 명칭 및 소유지의 소재, 지목, 자번호(字番號), 사표(四標), 등급, 지적, 결수(結數)를 임시 토지 조사 국장에게 신고해야 한다. 단, 국유지는 보관 관청이 임시 토지 조사 국장에게 통지해야 한다.

<보기>
ㄱ. 조선인 지주 계급이 몰락하였다.
ㄴ. 동양 척식 주식 회사가 설립되었다.
ㄷ. 경작권 등 소작 농민의 권리가 부정되었다.
ㄹ. 공유지에 대한 농민의 입회권이 부정되었다.
1ㄱ, ㄴ
2ㄱ, ㄷ
3ㄴ, ㄷ
4ㄷ, ㄹ
정답 및 해설

법령은 토지 조사령(1912)이며, 그 결과 소작농의 경작권과 공유지 입회권이 부정되었다.

일제는 기한부 신고주의로 소유권만 인정하고 관습적으로 인정되던 농민의 여러 권리를 부정하였으며, 신고되지 않은 토지와 공유지는 총독부 소유로 편입하였다.

  • 조선인 지주는 소유권을 법적으로 인정받아 오히려 지위가 강화되었으므로 지주 계급이 몰락했다는 설명은 틀리다.
  • 동양 척식 주식회사는 1908년에 이미 설립되어 토지 조사 사업의 결과가 아니다.
  • 경작권 등 소작 농민의 권리가 부정되어 농민은 기한부 계약 소작농으로 전락하였다.
  • 마을 공유지에서 땔감·풀을 얻던 입회권이 부정되었다.
문제 19
다음과 같은 조선 교육령이 발표된 때와 가장 가까운 시기에 시행한 일제의 정책은?
제1조 소학교는 국민 도덕의 함양과 보통의 지능을 갖게 함으로써 충량한 황국 신민을 육성하는데 있다.
제13조 심상 소학교 교과목은 수신, 국어(일어), 산술, 국사, 지리, 이과, 직업, 도화이다. 조선어는 수의(隨意:선택) 과목으로 한다.
1토지 조사 사업을 실시하여 소작농들의 경작권을 박탈하였다.
2관세 철폐령을 내려 일본 상품의 조선 진출의 길을 확대하였다.
3한국인의 전시 동원을 위한 국가 총동원령을 발표하였다.
4징병제를 실시하여 20만여 명의 조선 청년들을 징집하였다.
정답 및 해설

교육령은 ‘황국 신민’, 조선어 ‘수의 과목’이 나타난 제3차 조선 교육령(1938)이며, 가장 가까운 시기의 정책은 국가 총동원령이다.

중·일 전쟁 이후 일제는 민족 말살 통치를 강화하고, 1938년 국가 총동원법을 조선에 적용해 인력과 물자를 전쟁에 동원하였다.

  • 토지 조사 사업은 1910년대 무단 통치 시기의 정책이다.
  • 관세 철폐는 1920년대 초 일본 자본의 조선 진출을 위한 조치이다.
  • 징병제는 태평양 전쟁 말기인 1940년대 중반에 시행되어 제3차 교육령보다 늦다.
문제 20
아래의 여러 정책들과 그 정치적 목적이 가장 유사한 사실은?
○ 신문왕 : 문무관리에게 관료전을 지급하고 녹읍을 폐지하였다.
○ 광 종 : 과거제도를 시행하고 관리의 공복을 제정하였다.
○ 태 종 : 6조 직계제를 채택하고 호패법을 실시하였다.
1중국에서 유행한 풍수지리설을 수용하였다.
2집사부 시중보다 상대등의 권력을 강화하였다.
3향약과 사창제를 실시하고 서원을 설립하였다.
4장용영을 설치하고 규장각을 확대 개편하였다.
정답 및 해설

제시된 정책들의 공통 목적은 왕권 강화이며, 같은 목적의 사실은 정조의 장용영 설치와 규장각 확대 개편이다.

신문왕의 녹읍 폐지, 광종의 과거제·공복 제정, 태종의 6조 직계제·호패법은 모두 귀족·공신 세력을 억누르고 국왕 중심 체제를 세우려는 조치였다. 정조도 친위 부대와 학문·정책 기구를 두어 왕권을 뒷받침하였다.

  • 풍수지리설은 신라 말 지방 호족 세력의 성장을 사상적으로 뒷받침하였다.
  • 상대등은 귀족 세력을 대표하므로 그 권력 강화는 왕권 약화를 뜻하며, 왕권이 강할 때는 집사부 시중의 권한이 컸다.
  • 향약·사창제·서원은 사림이 향촌 사회에서 영향력을 키운 수단이다.
문제 21
다음 ㉠ ~ ㉣에 대한 설명으로 옳은 것을 <보기>에서 고른 것은?
㉠ 사림들은 훈구 세력과 대립할 때는 단결하였으나, ㉡ 훈구 세력이 무너진 직후 자체 분열하여 붕당이 형성되고 붕당 간에 치열한 정권 다툼이 벌어지게 되었다. 처음에는 상대 붕당을 소인당으로, 자기 붕당을 군자당이라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선배 사림이 물러간 뒤에는 서로 군자당이라 하며 ㉢ 붕당 간의 견제와 협력을 바탕으로 하는 붕당 정치를 전개하였다. 이어 ㉣ 공론이 중시되는 정국이 되면서 상대 세력을 견제하고 자기 세력을 옹호하면서 3사 언관과 이조 전랑의 정치적 비중이 높아졌다.

<보기>
(가) ㉠ - 사화가 발생하였다.
(나) ㉡ - 노론과 소론으로 나뉘었다.
(다) ㉢ - 경신환국으로 상호 공존이 가능하였다.
(라) ㉣ - 공론은 재야의 산림이 주도하였다.
1(가), (나)
2(가), (라)
3(나), (다)
4(나), (라)
정답 및 해설

옳은 것은 훈구와의 대립 속에 사화가 일어났다는 것과 공론을 재야의 산림이 주도했다는 것이다.

사림은 연산군~명종 대 여러 차례 사화를 겪은 뒤 선조 때 정권을 잡았고, 이후 붕당 정치에서 산림이 공론을 이끌며 3사와 이조 전랑의 비중이 커졌다.

  • 사림이 훈구 세력과 대립하는 과정에서 무오·갑자·기묘·을사사화가 일어났다.
  • 훈구 세력이 무너진 직후의 분열은 선조 때 동인과 서인의 분당이며, 노론과 소론은 숙종 때 서인이 다시 나뉜 것이다.
  • 경신환국은 서인이 남인을 몰아낸 사건으로, 상호 공존이 무너지고 일당 전제화가 시작되는 계기였다.
  • 붕당 정치 시기에는 재야의 산림이 공론을 주도하였다.
문제 22
다음과 같은 남북한의 공동 성명 직후 나타난 상황은?
첫째, 통일은 외세에 의존하거나 외세의 간섭을 받음이 없이 자주적으로 해결하여야 한다.
둘째, 통일은 상대방을 반대하는 무력 행사에 의거하지 않고 평화적 방법으로 실현하여야 한다.
셋째, 사상과 이념, 제도의 차이를 초월하여 우선 하나의 민족으로서 민족적 대단결을 도모하여야 한다.
1남한과 북한이 유엔에 동시 가입하고 대화 및 교류를 늘렸다.
2북한에서는 국가 주석에게 절대적 지위를 부여하는 사회주의 헌법을 만들었다.
3김일성의 갑작스러운 죽음과 뒤이은 조문 파동으로 남북관계가 다시 차가워졌다.
4북한에서는 서방 사회에 대한 개방과 교역 확대 등의 새로운 변화를 모색하였다.
정답 및 해설

자주·평화·민족 대단결의 통일 3원칙은 7·4 남북 공동 성명(1972)이며, 직후 북한은 주석에게 절대 권력을 부여한 사회주의 헌법을 제정하였다.

성명 이후 남한은 유신 헌법을, 북한은 사회주의 헌법을 만들어 남북 모두 성명을 체제 강화에 이용하였다.

  • 남북한의 유엔 동시 가입은 1991년 노태우 정부 때의 일이다.
  • 김일성의 사망과 조문 파동은 1994년 김영삼 정부 때의 일이다.
  • 북한의 대외 개방과 교역 확대 모색은 1980년대 이후 합영법 제정 등으로 나타났다.
문제 23
다음 기록과 관련하여 임금의 명에 따라 새로이 개수된 역사서에 대한 설명으로 옳은 것은?
임금이 말하기를, “․․․ 고려 실록에 기록되어 있는 천변과 지괴를 정사(正史)에 기록하지 않은 것은, 전례에 의하여 다시 첨가하여 기록하지 말고, 또 그 군왕의 시호는 아울러 실록에 의하여 태조 신성왕, 혜종 의공왕이라 하고, 묘호와 시호도 그 사실을 인멸하지 말 것이며, 그 태후, 태자와 관제(官制)도 또한 모름지기 고치지 말고, 오직 대사천하(大赦天下)라고 한 곳에는 천하 두 글자만 고칠 것이요, 또한 천하를 경내로 고칠 필요는 없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 『조선왕조실록, 세종5년』 -
1고조선부터 고려 말까지의 통사였다.
2고려의 역사를 기전체로 서술하였다.
3박상의 동국사략의 역사관을 극복하였다.
4이제현이 성리학적 사관에 입각하여 편찬하였다.
정답 및 해설

사료는 세종 대 고려사 개수 지시로, 이 작업은 문종 때 고려 역사를 기전체로 정리한 『고려사』의 완성으로 이어졌다.

‘고려 실록’, ‘태조 신성왕, 혜종 의공왕’ 등 고려 군주의 호칭과 관제를 고치지 말라는 지시가 단서로, 조선 초 고려사 서술을 둘러싼 개찬 과정을 보여 준다.

  • 고조선부터 고려 말까지의 통사는 성종 때 편찬된 『동국통감』이다.
  • 박상의 『동국사략』은 16세기 사림의 역사서로, 세종 대 개수된 고려사보다 늦게 나왔다.
  • 이제현이 성리학적 사관으로 편찬한 것은 고려 말의 『사략』이다.
문제 24
다음 선언과 관련한 민주주의 운동의 성과는?
오늘 우리는 전 세계 이목이 주시하는 가운데 40년 독재 정치를 청산하고 희망찬 민주 국가를 건설하기 위한 거보를 전 국민과 함께 내딛는다. 국가의 미래요 소망인 꽃다운 젊은이를 야만적인 고문으로 죽여 놓고 그것도 모자라서 국민을 속이려 했던 현 정권에게 국민의 분노가 무엇인지 분명히 보여 주고, 국민적 여망인 개헌을 일방적으로 파기한 4.13호헌 조치를 철회시키기 위한 민주 장정을 시작한다.
1강압적 유신 체제의 종말을 맞이하였다.
2내각 책임제와 국회의 양원제가 실시되었다.
35년 단임의 대통령 직선제 개헌이 이루어졌다.
4최초로 평화적 여·야 정권 교체가 이루어졌다.
정답 및 해설

선언은 1987년 6월 민주 항쟁 당시의 것이며, 그 성과로 5년 단임의 대통령 직선제 개헌이 이루어졌다.

‘젊은이를 야만적인 고문으로 죽여’(박종철 고문 치사)와 ‘4·13 호헌 조치’가 단서이다. 항쟁 결과 6·29 민주화 선언이 나왔고 직선제 개헌이 실현되었다.

  • 유신 체제는 1979년 10·26 사태로 막을 내렸다.
  • 내각 책임제와 양원제는 4·19 혁명 직후의 개헌으로 실시되었다.
  • 최초의 평화적 여·야 정권 교체는 1997년 대통령 선거로 이루어졌다.
문제 25
다음 글에 나타난 발해사에 대한 인식을 반박하기 위한 적절한 활동을 <보기> 에서 고른 것은?
속말 말갈은 당나라 초기에 이미 당에 귀속되었다. 7세기 말엽에 속말 말갈의 수령 대조영은 여러 종족을 통일하고 정권을 세웠다. 713년에 당 현종이 대조영을 발해군왕으로 책봉하고 발해도독부 도독에 임명하였다. 이때부터 속말 말갈이 수립한 정권을 발해라고 이름하게 되었다.
- 82년 판 중국 초급중학교 교과서, 『중국력사1』, 21쪽 -

<보기>
ㄱ. 발해가 중앙 관제로 3성 6부를 두게 된 과정을 조사한다.
ㄴ. 발해의 촌락에서 주민의 다수를 차지했던 종족을 알아본다.
ㄷ. 발해가 일본에 보낸 외교 문서에 고구려 왕을 칭한 이유를 살펴본다.
ㄹ. 발해가 멸망한 후 고려가 발해 유민을 적극 받아들인 사실의 의미를 파악한다.
1ㄱ, ㄷ
2ㄴ, ㄷ
3ㄴ, ㄹ
4ㄷ, ㄹ
정답 및 해설

발해를 당에 귀속된 말갈의 정권으로 보는 인식을 반박하려면 고구려 계승 의식과 고려의 발해 유민 수용을 살펴보는 것이 적절하다.

발해는 일본에 보낸 국서에서 스스로 ‘고려(고구려) 국왕’을 칭했고, 멸망 후 고려는 발해 유민을 동족으로 여겨 받아들였다. 이는 발해가 고구려를 계승한 우리 역사임을 보여 준다.

  • 3성 6부는 당의 제도를 받아들인 것이어서, 그 성립 과정을 조사하는 것만으로는 오히려 당의 영향을 강조하게 된다.
  • 촌락 주민의 다수는 말갈인이었으므로 이를 확인하는 것은 말갈 정권이라는 주장을 반박하는 근거가 되지 못한다.
  • 일본에 보낸 외교 문서의 고구려 왕 칭호는 지배층의 고구려 계승 의식을 보여 준다.
  • 고려의 발해 유민 포용은 발해를 같은 민족의 나라로 인식했음을 보여 준다.
법원직 9급 한국사 기출문제모두CBT · moducbt.com
08년 1회차
총 25문항 · 객관식 · 정답·해설 포함
문제 1
다음은 어느 민족 운동가의 약력이다. (가)에 들어갈 활동으로 올바른 것은?
1919년 만주 지린성에서 윤세주 등과 조선 의열단 조직
1932년 난징으로 이동, 이후 조선 혁명 간부 학교 창립
1935년 민족 혁명당 조직
1938년 조선 민족 전선 연맹 결성, 조선 의용대 창설
1942년 (가)
1958년 북한에서 숙청됨
1국내 민족주의자 및 공산주의자들과 손을 잡고 함경도 보천보를 습격하였다.
2조선 독립 동맹이 이끄는 조선 의용군에 흡수되어 태평양 전쟁에 참전하였다.
3중국의 국공 내전에 참전하였다가 그 뒤 북한으로 들어가 인민군으로 편입되었다.
4일부 병력을 이끌고 한국 광복군에 합류하여 광복군의 조직과 병력이 증강되었다.
정답 및 해설

약력의 주인공은 김원봉이며, 1942년 그는 조선 의용대 일부를 이끌고 한국광복군에 합류하였다.

‘의열단 조직’, ‘조선 혁명 간부 학교’, ‘민족 혁명당’, ‘조선 의용대 창설’이 단서이다. 김원봉은 광복군 부사령관을 맡았고, 이 합류로 광복군의 조직과 병력이 보강되었다.

  • 보천보 습격은 1937년 동북 항일 연군 계열 부대가 국내 조직과 연계해 벌인 일로, 김원봉의 활동이 아니다.
  • 조선 독립 동맹 산하 조선 의용군으로 개편된 것은 화북으로 이동한 조선 의용대 주력이며, 김원봉은 이에 가담하지 않았다.
  • 국공 내전 참전 후 북한 인민군으로 편입된 것은 조선 의용군의 행로이다.
문제 2
일제 시기 밑줄 친 이것을 이론적으로 반박한 사학자의 활동은?
이것은 한국이 여러 정치적 사회적 변화를 겪으면서도 능동적으로 발전하지 못하였으며, 개항 당시 조선 사회가 10세기 말 고대 일본의 수준과 비슷하다는 주장이다. 특히 근대 사회로 이행하는데 필수적인 봉건 사회가 형성되지 못하여 사회․경제적으로 낙후한 상태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주장은 우리나라의 근대화를 위해서는 일본의 역할이 필요하다는 침략 미화론으로 이어졌다.
1사적 유물론에 입각하여 한국사를 세계사적 보편성 위에 체계화하였다.
2개별적 사실을 객관적으로 밝히려는 실증주의 역사 연구 방법론을 따랐다.
3고대사 연구에 초점을 맞추었으며 민족주의 사학자들의 정신 사관을 비판하였다.
4민족의 고유한 문화 전통과 정신을 강조하여 민족 독립의 정신적 기반을 마련하였다.
정답 및 해설

밑줄 친 주장은 식민 사관의 정체성론이며, 이를 이론적으로 반박한 것은 사적 유물론에 입각한 사회 경제 사학이다.

백남운 등은 『조선사회경제사』 등에서 한국사도 세계사의 보편적 발전 법칙에 따라 단계적으로 발전해 왔음을 체계화하여 ‘봉건 사회 결여론’을 정면으로 반박하였다.

  • 개별 사실의 객관적 고증을 추구한 것은 진단 학회 중심의 실증 사학으로, 발전 단계론을 내세워 정체성론을 반박하지는 않았다.
  • 고대사 연구 집중과 정신 사관 비판만으로는 한국사가 단계적으로 발전했다는 논증이 되지 못해 정체성론 반박의 핵심이 아니다.
  • 민족 고유의 문화와 정신을 강조한 것은 민족주의 사학으로, 정체성론을 사회 발전 이론으로 반박한 흐름과는 다르다.
문제 3
다음 조약들을 순서대로 바르게 나열한 것은?
(가) 을사 조약
(나) 제2차 영ㆍ일 동맹
(다) 포츠머스 강화 조약
(라) 가쓰라ㆍ태프트 밀약
1(가) - (나) - (다) - (라)
2(나) - (라) - (다) - (가)
3(다) - (가) - (나) - (라)
4(라) - (나) - (다) - (가)
정답 및 해설

네 조약은 모두 1905년에 체결되었으며, 순서는 가쓰라·태프트 밀약 → 제2차 영·일 동맹 → 포츠머스 강화 조약 → 을사조약이다.

일본은 미국·영국·러시아로부터 차례로 한국 지배를 인정받은 뒤 을사조약으로 외교권을 박탈하였다.

  • 가쓰라·태프트 밀약(1905.7): 미국의 필리핀 지배와 일본의 한국 지배를 서로 인정하였다.
  • 제2차 영·일 동맹(1905.8): 영국이 일본의 한국 보호권을 인정하였다.
  • 포츠머스 강화 조약(1905.9): 러·일 전쟁을 끝내며 러시아가 일본의 한국 지배권을 인정하였다.
  • 을사조약(1905.11): 통감부 설치와 외교권 박탈로 이어졌다.
문제 4
다음 중 주심포 양식의 목조 건물을 모두 고른 것은?
ㄱ. 안동 봉정사 극락전 ㄴ. 영주 부석사 무량수전
ㄷ. 예산 수덕사 대웅전 ㄹ. 사리원 성불사 응진전
1ㄱ
2ㄱ, ㄴ
3ㄱ, ㄴ, ㄷ
4ㄱ, ㄴ, ㄷ, ㄹ
정답 및 해설

주심포 양식 건물은 봉정사 극락전, 부석사 무량수전, 수덕사 대웅전의 세 곳이다.

주심포 양식은 기둥 위에만 공포를 짜 올린 방식으로 고려 전·중기 건물에 주로 나타나고, 기둥 사이에도 공포를 둔 다포 양식은 고려 후기에 등장해 조선으로 이어졌다.

  • 안동 봉정사 극락전은 현존 최고(最古) 목조 건물로 꼽히는 주심포 양식 건물이다.
  • 영주 부석사 무량수전은 배흘림기둥으로 유명한 주심포 양식 건물이다.
  • 예산 수덕사 대웅전은 건립 연대가 확인되는 주심포 양식 건물이다.
  • 사리원 성불사 응진전은 다포 양식 건물이므로 제외된다.
문제 5
다음 자료에 나오는 지역과 관련한 설명으로 옳은 것은?
복잡한 역사적 논박 뒤에 숨겨진 중국의 ‘동북공정’은 결국 이 지역에 대한 영토적 욕망의 표현이라는 분석이 일반적이다. 이 지역은 대략적으로 중국 지린성 동남쪽, 지금의 옌볜 조선인 자치주에 해당되는 곳인데, 1909년 청과 일본이 체결한 조약에 의해 청의 영토로 편입되었다.
- ○○신문 -
1원·명 교체기를 이용하여 공민왕 때 무력으로 수복하였다.
2조선 초기부터 지속적으로 사민 정책을 실시하여 개발하였다.
3이곳에 거주하던 한인들은 1937년 중앙아시아로 강제 이주당하였다.
4토문강의 해석 차이로 조선과 청 사이에 영토 귀속 문제가 발생하였다.
정답 및 해설

자료의 지역은 1909년 청·일 사이의 간도 협약으로 청에 넘어간 간도이며, 백두산정계비의 ‘토문강’ 해석 차이로 조선과 청 사이에 귀속 분쟁이 일어났다.

조선은 토문강을 송화강 지류로, 청은 두만강으로 해석하였고, 대한 제국은 이범윤을 간도 관리사로 파견하기도 하였다.

  • 공민왕이 원·명 교체기에 무력으로 되찾은 곳은 쌍성총관부가 있던 철령 이북 지역이다.
  • 조선 초 사민 정책으로 개발한 곳은 4군 6진이 설치된 압록강·두만강 이남 지역이다.
  • 1937년 중앙아시아로 강제 이주된 한인은 소련의 연해주에 살던 사람들이다.
문제 6
다음은 조선 후기 경제 변화에 대한 글이다. 밑줄 친 내용에 대한 설명으로 옳은 것을 <보기>에서 모두 고르면?
서민들은 점차 경제적 변화를 적극적으로 의식하고, 이에 대응하여 삶의 자세를 바꾸어 갔다. 농민들은 생산력을 높이기 위하여 ㉠새로운 영농방법을 추구하였고, ㉡상품 작물을 재배하여 소득을 늘리려고 하였다. ㉢상인들도 상업 활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여 대자본을 가진 상인들도 출현하였다. ㉣수공업 생산도 활발해져 민간에서 생산 활동을 주도하여 갔다. 이러한 과정에서 자본 축적이 이루어지고, 지방의 상공업 활동이 활기를 띠었으며, 상업 도시가 출현할 수 있었다.

<보기>
(가) ㉠ - 남부 지방 일부에 처음으로 이앙법이 보급되기 시작하였다.
(나) ㉡ - 쌀의 상품화가 활발해지면서 밭을 논으로 바꾸는 현상이 활발해졌다.
(다) ㉢ - 금난전권이 폐지되어 시전 상인의 활동이 크게 활성화되었다.
(라) ㉣ - 원료의 구입과 제품의 처분에서 대부분 상업 자본의 지배를 받았다.
1(가), (다)
2(나), (라)
3(가), (다), (라)
4(가), (나), (다), (라)
정답 및 해설

옳은 것은 밭을 논으로 바꾸는 현상과 상업 자본의 지배를 받은 수공업에 관한 설명이다.

조선 후기에는 쌀의 상품화로 밭을 논으로 바꾸는 현상이 늘었고, 민영 수공업자는 상인에게 원료와 대금을 미리 받는 선대제 방식으로 상업 자본에 예속되는 경우가 많았다.

  • 이앙법은 고려 말에 이미 남부 일부에 보급되었고, 조선 후기에는 전국으로 확산되었으므로 ‘처음 보급되기 시작’은 틀리다.
  • 신해통공으로 금난전권이 폐지되면서 활성화된 것은 시전 상인이 아니라 사상(私商)의 활동이다.
문제 7
다음은 조선 후기 호락논쟁에 관련한 글이다. ㉠ 사상과 ㉡ 사상에 대한 설명으로 옳은 것을 <보기>에서 고르면?
호락논쟁(湖洛論爭)은 인간과 사물의 본성이 다르다는 인물성이론(人物性異論)을 주장한 충청도지역의 호론과 인간과 사물의 본성이 같다는 인물성동론(人物性同論)을 주장한 서울·경기지역의 낙론 사이의 논쟁이다. 뒤에 호론은 ㉠ 으로 연결되었으며, 낙론은 ㉡ 으로 연결되었다.

<보기>
(가) ㉠ - 흥선대원군의 대외 정책을 지지하였다.
(나) ㉡ - 의병 항쟁의 사상적 바탕이 되었다.
(다) ㉠ - 박규수, 오경석 등에게 영향을 주었다.
(라) ㉡ - 청의 문물을 수용하자고 주장하였다.
1(가), (나)
2(가), (라)
3(나), (다)
4(다), (라)
정답 및 해설

호론은 위정척사 사상으로, 낙론은 북학 사상을 거쳐 개화 사상으로 이어졌으므로 옳은 것은 위정척사의 대원군 정책 지지와 북학의 청 문물 수용이다.

인간과 사물의 본성을 구별한 호론은 화이론을 강조해 척사론의 바탕이 되었고, 같다고 본 낙론은 청 문물 수용론으로 연결되었다.

  • 위정척사 사상은 흥선 대원군의 통상 수교 거부 정책을 지지하였으므로 옳다.
  • 의병 항쟁의 사상적 바탕이 된 것은 위정척사 사상이므로 낙론 계열에 연결한 것은 틀리다.
  • 박규수·오경석 등 초기 개화파에 영향을 준 것은 북학 사상이므로 호론 계열에 연결한 것은 틀리다.
  • 북학 사상은 청의 선진 문물 수용을 주장하였으므로 옳다.
문제 8
다음 주장을 배격하면서 나타난 민족 운동은?
지금의 조선 민족에게는 왜 정치적 생활이 없는가? 일본이 조선을 병합한 이래로 조선인에게는 모든 정치 활동을 금지한 것이 첫째 원인이다. 지금까지 해온 정치 운동은 모두 일본인을 적대시 하는 운동뿐이었다. 이런 종류의 운동은 해외에서나 할 수 있는 일이고, 조선 내에서는 허용되는 범위 내에서 일대 정치적 결사를 조직해야 한다는 것이 우리의 주장이다.
- 이광수, 『민족적 경륜』 -
1신간회가 조직되었다.
2조선사 편수회가 조직되었다.
3실력 양성 운동이 전개되었다.
4해외에서 독립운동기지가 건설되었다.
정답 및 해설

이광수의 「민족적 경륜」이 내세운 자치론을 배격하며 나타난 운동은 신간회 조직이다.

1920년대 중반 일부 민족주의자가 일제 통치 아래 자치를 주장하자, 비타협적 민족주의자와 사회주의자가 민족 유일당 운동을 벌여 1927년 신간회를 결성하였다.

  • 조선사 편수회는 식민 사관에 따른 한국사 편찬을 위해 일제가 만든 기구로 민족 운동이 아니다.
  • 실력 양성 운동은 자치론과 같은 타협적 흐름과 맞닿아 있어, 자치론을 배격한 결과로 볼 수 없다.
  • 해외 독립운동 기지 건설은 국권 피탈 전후 1910년대에 본격화된 활동으로 시기가 맞지 않는다.
문제 9
조선 정부가 다음과 같은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실시한 것은?
무릇 백성의 근심은 재해를 살피는 것이 밝지 않고 등분을 정하는 것이 공평하지 않은데 있습니다. 감사가 수령을 뽑아 보내어 답험하게 하면 수령은 길만 따라가서 위관에게 맡기고 위관은 서리에게 맡깁니다. 서리는 산 넘고 물 건너는 험한 길을 꺼려서 평탄한 길로만 다닙니다. 음식 접대를 받고 뇌물을 기대합니다. 그러므로 힘 있는 자에게는 곡식이 여물어도 재해를 입는 것으로 하고, 가난한 자에게는 재해를 입어도 여문 것이라 합니다. 수령은 많이 거두어들이는 데에 힘쓰므로 흉년이 들어도 흉년이 아니라고 하고 곡식이 조금만 잘되어도 아주 잘 되었다고 하여 그 등급을 높입니다. 애달픈 백성들은 어디에 호소하겠습니까
- 『중종실록』 -
1토지 1결당 4두로 조세 부담을 고정하여 거두었다.
2수조권자가 직접 농민에게 세금을 거두도록 하였다.
3공인을 통해 관청에서 필요한 물품을 납부하도록 하였다.
4토지의 비옥도에 따라 등급을 나누는 전분 6등법을 만들었다.
정답 및 해설

사료는 해마다 풍흉을 따져 세액을 정하는 과정의 폐단을 지적하고 있으며, 이를 해결하기 위해 풍흉과 관계없이 1결당 4두로 고정한 영정법이 시행되었다.

‘재해를 살피는 것’, ‘등분을 정하는 것’이 공평하지 않다는 지적이 단서로, 연분 판정 과정에서 수령·서리의 자의와 뇌물이 개입하는 문제였다. 인조 때 영정법은 전세를 정액화하여 이러한 판정 과정을 줄였다.

  • 수조권자가 농민에게 직접 거두는 방식은 오히려 수탈을 낳아 성종 때 관수관급제로 국가가 대신 거두게 하였다.
  • 공인을 통한 물품 조달은 대동법의 결과로 공납의 폐단을 해결하려는 것이지 전세 문제와는 관계가 없다.
  • 전분 6등법은 세종 때 이미 공법으로 시행된 제도로, 중종 대 사료가 지적한 폐단 이후의 대책이 아니다.
문제 10
다음 자료와 관련하여 당시 농촌 사회의 모습을 추론한 것으로 옳지 않은 것은?
농민이 밭에 심는 것은 곡물만이 아니다. 모시, 오이, 배추, 도라지 등의 농사도 잘 지으면 그 이익이 헤아릴 수 없이 크다. 도회지 주변에는 파밭, 마늘밭, 배추밭, 오이밭 등이 많다. 특히 서도 지방의 담배밭, 북도 지방의 삼밭, 한산의 모시밭, 전주의 생강밭, 강진의 고구마밭, 황주의 지황밭에서의 수확은 모두 상상등전(上上等田)의 논에서 나는 수확보다 그 이익이 10배에 이른다.
- 『경세유표』 -
1부농층의 성장으로 관권이 약화되었다.
2소작료가 도조법 방식으로 변화되었다.
3토지에서 밀려난 임노동자가 출현하였다.
4지주와 전호가 경제적 관계로 바뀌어 갔다.
정답 및 해설

옳지 않은 것은 부농층의 성장으로 관권이 약화되었다는 추론이다. 조선 후기에는 오히려 수령을 중심으로 한 관권이 강화되었다.

『경세유표』는 상품 작물 재배로 큰 이익을 얻는 조선 후기 농촌을 보여 준다. 이 시기 성장한 부농층은 수령과 결탁해 향촌 영향력을 키웠지만 재지 사족의 향권이 약해지면서 수령·향리의 권한이 커졌다.

  • 일정 액수를 내는 도조법이 확산되어 소작료 수취 방식이 변화하였다.
  • 광작과 농민층 분화로 토지에서 밀려난 농민이 임노동자로 전락하였다.
  • 지주와 전호의 관계가 신분적 예속에서 경제적 계약 관계로 바뀌어 갔다.
문제 11
다음은 고대 국가의 통치 조직을 정리한 것이다. ㉠ ~ ㉣에 대한 설명으로 옳은 것은?
구 분고구려백제신라통일 신라
최고 관직㉠상좌평상대등시중
지방 행정 조직5부5방㉡9주
특수 행정 구역3경㉢2소경5소경
최고 회의 기구제가 회의정사암 회의㉣
1㉠ - 정당성의 장관으로 국정을 총괄하였다.
2㉡ - 지방 행정 조직은 군사 조직을 겸하였다.
3㉢ - 풍수지리설의 영향으로 지방 거점에 설치하였다.
4㉣ - 임시 기구로 법 제정이나 시행 규정을 다루었다.
정답 및 해설

옳은 것은 신라의 지방 행정 조직인 주(州)에 대한 설명으로, 삼국의 지방 행정 조직은 군사 조직을 겸하였다.

신라는 주에 군주를 파견해 행정과 군사를 함께 맡겼으며, 고구려 5부·백제 5방도 마찬가지로 지방관이 군사 지휘권을 가졌다.

  • 고구려 최고 관직은 대대로로, 정당성 장관(대내상)은 발해의 관직이다.
  • 백제의 특수 행정 구역은 22담로이며, 풍수지리설은 신라 말 이후 확산된 사상이어서 관련이 없다.
  • 신라의 화백 회의는 만장일치제의 귀족 회의이며, 법 제정이나 시행 규정을 다룬 임시 기구는 고려의 식목도감이다.
문제 12
다음은 고려의 대외 관계와 관련한 사료들이다. 순서대로 알맞게 나열한 것은?
(가) 개경은 기업이 이미 쇠하여 궁궐이 다 불타 남은 것이 없으나, 서경은 왕기가 크게 일어나고 있으니 주상께서 그 곳으로 옮기시어 수도로 삼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나) 과인은 이제 개경으로 환도하고자 하노라. 이제 출륙하여 백성을 도모하고자 하니, 모든 백관들은 과인의 뜻을 헤아리기 바라노라.
(다) 지금 요동을 정벌하는 것은 네 가지 불가한 점이 있습니다. 소로써 대를 거역하는 것이 첫째요, 여름에 군대를 동원하는 것이 그 둘째입니다.
(라) 우리나라는 고구려를 계승한 나라이므로 국호를 고려라 부르며, 평양에 도읍한 것이다. 양국의 국경을 따진다면, 너희 나라 동경도 본래 우리나라 영토인데 어찌 침략이란 말이냐?
1(가) - (나) - (라) - (다)
2(가) - (다) - (라) - (나)
3(다) - (가) - (나) - (라)
4(라) - (가) - (나) - (다)
정답 및 해설

순서는 서희의 외교 담판 → 묘청의 서경 천도 주장 → 개경 환도 → 이성계의 4불가론이다.

각 사료의 단서어로 시기를 확정하면 고려의 대외 관계 흐름(거란 → 금 → 몽골 → 명)과 일치한다.

  • ‘고구려를 계승’, ‘동경도 본래 우리 영토’: 993년 거란 1차 침입 때 서희가 소손녕과 담판한 내용이다.
  • ‘서경은 왕기가 크게 일어나’: 1135년 전후 금에 대한 사대에 반발한 묘청의 서경 천도 주장이다.
  • ‘개경으로 환도’, ‘출륙’: 1270년 원종이 몽골과 강화한 뒤 개경으로 돌아간 일이다.
  • ‘요동을 정벌하는 것은 네 가지 불가’: 1388년 요동 정벌에 반대한 이성계의 4불가론이다.
문제 13
다음 사료에서 주장하는 바와 입장이 같은 것은?
군신, 부자, 부부, 붕우, 장유의 윤리는 하늘에서 얻은 것이고, 인간의 본성에 부여된 것으로서 천지를 통하는 만고불변의 이치입니다. 그리고 위에 존재하는 것으로서 도(道)가 됩니다. 이에 대해 배, 차, 군대, 농업, 기계 등 백성을 편하고 국가를 이롭게 하는 것들은 외형적인 것으로 기(器)가 됩니다. 신이 변혁을 꾀하고자 하는 것은 기이지 도가 아닙니다.
1안으로는 탐학한 관리의 머리를 베고 밖으로는 횡포한 강적의 무리를 구축하자.
2서양 오랑캐가 침범하는 데도 싸우지 않으면 화친하는 것이요, 화친을 주장하는 것은 나라를 팔아먹는 것이다.
3저들의 종교는 사악하다. 하지만 저들의 기술은 이롭다. 종교는 배척하되 기술을 본받는 것은 함께할 수 있다.
4강화가 한번 이루어지면 사악한 서적과 천주의 초상화가 함께 들어와 사악한 기운이 온 나라를 덮게 될 것이다.
정답 및 해설

사료는 유교 윤리(도)는 지키고 서양의 기술(기)만 받아들이자는 동도서기론이며, 같은 입장은 종교는 배척하되 기술은 본받자는 주장이다.

‘변혁을 꾀하고자 하는 것은 기이지 도가 아니다’라는 구절이 단서로, 1880년대 온건 개화파와 정부의 개화 정책을 뒷받침한 논리이다.

  • 탐학한 관리를 베고 강적을 몰아내자는 것은 동학 농민 운동의 반봉건·반외세 주장이다.
  • 싸우지 않으면 화친이고 화친 주장은 매국이라는 것은 흥선 대원군의 척화비 문구로, 서양과의 교류 자체를 거부하였다.
  • 강화가 이루어지면 사악한 서적이 들어온다는 것은 개항에 반대한 위정척사파의 왜양일체론이다.
문제 14
다음 중 고려의 가족제도에 대한 설명으로 옳은 것을 모두 고른 것은?
ㄱ. 여성이 재가할 경우, 그 소생 자식의 사회적 진출에 차별을 두지 않았다.
ㄴ. 아들이 없을 경우 양자를 들여 제사를 받들게 하였다.
ㄷ. 사위가 처가의 호적에 입적하여 처가에서 생활하는 경우가 적지 않았다.
ㄹ. 혼인의 형태는 일부일처제가 일반적인 현상이었다.
1ㄱ,ㄷ,ㄹ
2ㄴ,ㄷ,ㄹ
3ㄱ,ㄷ
4ㄴ,ㄷ
정답 및 해설

고려의 가족 제도로 옳은 것은 재가녀 소생의 차별 없음, 사위의 처가 입적·생활, 일부일처제이다.

고려는 여성의 지위가 비교적 높아 재산을 자녀에게 균분하고, 제사도 아들딸이 돌아가며 지냈다.

  • 여성의 재가가 비교적 자유로웠고 그 소생 자녀의 사회 진출에도 차별이 없었다.
  • 아들이 없을 때 양자를 들여 제사를 잇게 한 것은 성리학적 종법 질서가 자리 잡은 조선 후기의 모습이며, 고려에서는 딸이나 외손이 제사를 받드는 경우가 많았다.
  • 혼인 후 남자가 처가에서 생활하는 경우가 많아 사위가 처가 호적에 오르기도 하였다.
  • 혼인은 일부일처제가 일반적이었다.
문제 15
다음 글과 관련 있는 시대의 유물은 ?
기원전 8000년경에 후빙기가 시작되면서 기후는 차차 따뜻해졌지만, 기원전 5000년대 중반까지는 아직 기후가 추운 편이었다. 후빙기에 들어서면서 한반도의 자연 환경은 크게 변화하기 시작하여 해수면이 높아지고 동식물이 바뀌어 갔다. 그러나 기원전 5500년경부터 3000년경까지는 기후가 따뜻하여 소나무 숲에 상록 활엽수, 낙엽 활엽수가 첨가되어 현재와 비슷한 산림 형태를 이루게 되었다. 이 무렵의 한반도는 대략 지금과 비슷한 형태를 하고 있었으나, 서해안에서는 해수면이 현재보다 7미터쯤 낮아 사람들은 현재의 해안선보다 바다 쪽으로 더 나가 생활할 수 있었다.
1거푸집
2주먹도끼
3반달 돌칼
4빗살무늬 토기
정답 및 해설

자료는 후빙기 이후 기후가 따뜻해진 신석기 시대의 환경을 설명하므로, 해당 시대의 유물은 빗살무늬 토기이다.

‘후빙기’, ‘기원전 5500년경부터 3000년경’, ‘현재와 비슷한 산림 형태’가 단서이다. 신석기인은 토기를 만들어 식량을 저장·조리하였다.

  • 거푸집은 청동기를 주조하는 틀로 청동기 시대 이후의 유물이다.
  • 주먹도끼는 빙하기에 해당하는 구석기 시대의 뗀석기이다.
  • 반달 돌칼은 곡식 이삭을 따는 데 쓴 청동기 시대의 간석기이다.
문제 16
다음 각 조약과 관련한 설명으로 옳지 않은 것은?
(가) 조선국은 부산 외에 두 곳의 항구를 개항하고 일본인이 와서 통상을 하도록 허가한다.
(나) 조선국이 어느 때든지 어느 국가나 어느 나라 상인에게 본 조약에 의하여 부여되지 않는 어떤 특혜를 허가할 때는 이와 같은 특혜는 미합중국의 관민과 상인 및 공민에게도 무조건 균점된다.
(다) 북경과 한성, 양화진에서 청과 조선 양국 상인의 무역을 허용한다. 지방관이 발행한 여행 허가증이 있으면 내지 행상도 할 수 있다.
1(가) - 부산에 이어 목포, 인천이 차례로 개항되었다.
2(나) - 강화도 조약과 달리 관세 조항이 들어 있었다.
3(다) - 조선에서 청 상인과 일본 상인의 경쟁이 격화되었다.
4(가), (나), (다) - 조선에 불리한 불평등 조약이었다.
정답 및 해설

옳지 않은 것은 강화도 조약에 따라 목포·인천이 개항되었다는 설명으로, 부산에 이어 개항된 곳은 원산과 인천이다.

세 사료는 각각 강화도 조약(1876), 조·미 수호 통상 조약(1882), 조·청 상민 수륙 무역 장정(1882)이다. 목포는 1897년 조선 정부가 스스로 개항한 항구이다.

  • 조·미 수호 통상 조약은 최혜국 대우를 규정한 불평등 조약이지만, 개항 초 일본과의 무관세 무역과 달리 관세 조항이 들어 있었다.
  • 조·청 상민 수륙 무역 장정으로 청 상인의 내지 통상이 허용되자 조선 시장에서 청·일 상인의 경쟁이 치열해졌다.
  • 세 조약 모두 치외 법권이나 최혜국 대우 등이 포함된 조선에 불리한 불평등 조약이었다.
문제 17
다음 성명서가 발표된 직접적 배경을 이해하기 위한 사료로 적절한 것은?
…한국이 있어야 한국 사람이 있고, 한국 사람이 있고야 민주주의도 공산주의도 또 무슨 단체도 있을 수 있는 것이다. …내가 불초하나 일생을 독립 운동에 희생하였다. 내 나이가 이제 73세인바 이제 새삼스럽게 재물을 탐내며 명예를 탐낼 것이냐? 더구나 외국 군정 하에 있는 정권을 탐낼 것이냐? 내가 대한민국 임시 정부를 지켜온 것도 다 조국의 독립과 민족의 해방을 위하는 것뿐이다. 나의 단일한 염원은 3천만 동포와 손을 잡고 통일된 조국의 달성을 위하여 공동 분투하는 것뿐이다. 이 육신을 조국이 수요(需要)로 한다면 당장에라도 제단에 바치겠다.…
- 『삼천만 동포에게 읍고함』 -
1북위 38도선 이남의 조선 영토와 조선 인민에 대한 통치의 모든 권한은 당분간 본관 권한 하에 시행한다.
2우리는 남방만이라도 임시 정부 혹은 위원회 같은 것을 조직하여 38 이북에서 소련이 철퇴하도록 세계 공론에 호소하여야 할 것이다.
3공동 위원회는 최고 5년 기간의 4개국 통치 협약을 작성하는데 공동으로 참작할 수 있는 제안을 조선 임시 정부와 협의하여 제출하여야 한다.
4지난 2월 결의에서 유엔 소총회가 표명한 견해에 따라 위원단이 접근 가능한 한국 지역에서 선거 실시를 감시하며 동선거는 5월 10일 이전에 실시한다.
정답 및 해설

성명서는 김구의 「삼천만 동포에게 읍고함」(1948)이며, 직접적 배경은 유엔 감시하의 남한만의 총선거 추진이다.

‘통일된 조국의 달성’을 호소한 김구는 남한 단독 선거에 반대하며 남북 협상을 추진하였다. 이 흐름을 보여 주는 사료는 유엔 소총회 결의에 따라 위원단이 접근 가능한 지역에서 5월 10일 이전 선거를 감시한다는 내용이다.

  • 북위 38도선 이남 통치를 선언한 것은 1945년 맥아더 포고령으로 미군정 실시에 관한 것이다.
  • 남방만이라도 임시 정부를 조직하자는 것은 1946년 이승만의 정읍 발언으로 단독 정부론의 출발점이지만, 성명 직전의 선거 결정과는 거리가 있다.
  • 최고 5년 기간의 4개국 통치 협약은 1945년 모스크바 3국 외상 회의의 신탁 통치 결정이다.
문제 18
다음 법령의 시행 결과에 대한 설명으로 옳은 것을 <보기>에서 모두 고른 것은?
제4조 : 토지 소유자는 조선 총독이 정하는 기간 내에 주소ㆍ씨명, 명칭 및 소유지의 소재, 지목, 자번호(字番號), 사표(四標), 등급, 지적, 결수(結數)를 임시 토지 조사 국장에게 신고해야 한다. 단, 국유지는 보관 관청이 임시 토지 조사 국장에게 통지해야 한다.

<보기>
ㄱ. 조선인 지주 계급이 몰락하였다.
ㄴ. 동양 척식 주식 회사가 설립되었다.
ㄷ. 경작권 등 소작 농민의 권리가 부정되었다.
ㄹ. 공유지에 대한 농민의 입회권이 부정되었다.
1ㄱ, ㄴ
2ㄱ, ㄷ
3ㄴ, ㄷ
4ㄷ, ㄹ
정답 및 해설

법령은 토지 조사령(1912)이며, 그 결과 소작농의 경작권과 공유지 입회권이 부정되었다.

일제는 기한부 신고주의로 소유권만 인정하고 관습적으로 인정되던 농민의 여러 권리를 부정하였으며, 신고되지 않은 토지와 공유지는 총독부 소유로 편입하였다.

  • 조선인 지주는 소유권을 법적으로 인정받아 오히려 지위가 강화되었으므로 지주 계급이 몰락했다는 설명은 틀리다.
  • 동양 척식 주식회사는 1908년에 이미 설립되어 토지 조사 사업의 결과가 아니다.
  • 경작권 등 소작 농민의 권리가 부정되어 농민은 기한부 계약 소작농으로 전락하였다.
  • 마을 공유지에서 땔감·풀을 얻던 입회권이 부정되었다.
문제 19
다음과 같은 조선 교육령이 발표된 때와 가장 가까운 시기에 시행한 일제의 정책은?
제1조 소학교는 국민 도덕의 함양과 보통의 지능을 갖게 함으로써 충량한 황국 신민을 육성하는데 있다.
제13조 심상 소학교 교과목은 수신, 국어(일어), 산술, 국사, 지리, 이과, 직업, 도화이다. 조선어는 수의(隨意:선택) 과목으로 한다.
1토지 조사 사업을 실시하여 소작농들의 경작권을 박탈하였다.
2관세 철폐령을 내려 일본 상품의 조선 진출의 길을 확대하였다.
3한국인의 전시 동원을 위한 국가 총동원령을 발표하였다.
4징병제를 실시하여 20만여 명의 조선 청년들을 징집하였다.
정답 및 해설

교육령은 ‘황국 신민’, 조선어 ‘수의 과목’이 나타난 제3차 조선 교육령(1938)이며, 가장 가까운 시기의 정책은 국가 총동원령이다.

중·일 전쟁 이후 일제는 민족 말살 통치를 강화하고, 1938년 국가 총동원법을 조선에 적용해 인력과 물자를 전쟁에 동원하였다.

  • 토지 조사 사업은 1910년대 무단 통치 시기의 정책이다.
  • 관세 철폐는 1920년대 초 일본 자본의 조선 진출을 위한 조치이다.
  • 징병제는 태평양 전쟁 말기인 1940년대 중반에 시행되어 제3차 교육령보다 늦다.
문제 20
아래의 여러 정책들과 그 정치적 목적이 가장 유사한 사실은?
○ 신문왕 : 문무관리에게 관료전을 지급하고 녹읍을 폐지하였다.
○ 광 종 : 과거제도를 시행하고 관리의 공복을 제정하였다.
○ 태 종 : 6조 직계제를 채택하고 호패법을 실시하였다.
1중국에서 유행한 풍수지리설을 수용하였다.
2집사부 시중보다 상대등의 권력을 강화하였다.
3향약과 사창제를 실시하고 서원을 설립하였다.
4장용영을 설치하고 규장각을 확대 개편하였다.
정답 및 해설

제시된 정책들의 공통 목적은 왕권 강화이며, 같은 목적의 사실은 정조의 장용영 설치와 규장각 확대 개편이다.

신문왕의 녹읍 폐지, 광종의 과거제·공복 제정, 태종의 6조 직계제·호패법은 모두 귀족·공신 세력을 억누르고 국왕 중심 체제를 세우려는 조치였다. 정조도 친위 부대와 학문·정책 기구를 두어 왕권을 뒷받침하였다.

  • 풍수지리설은 신라 말 지방 호족 세력의 성장을 사상적으로 뒷받침하였다.
  • 상대등은 귀족 세력을 대표하므로 그 권력 강화는 왕권 약화를 뜻하며, 왕권이 강할 때는 집사부 시중의 권한이 컸다.
  • 향약·사창제·서원은 사림이 향촌 사회에서 영향력을 키운 수단이다.
문제 21
다음 ㉠ ~ ㉣에 대한 설명으로 옳은 것을 <보기>에서 고른 것은?
㉠ 사림들은 훈구 세력과 대립할 때는 단결하였으나, ㉡ 훈구 세력이 무너진 직후 자체 분열하여 붕당이 형성되고 붕당 간에 치열한 정권 다툼이 벌어지게 되었다. 처음에는 상대 붕당을 소인당으로, 자기 붕당을 군자당이라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선배 사림이 물러간 뒤에는 서로 군자당이라 하며 ㉢ 붕당 간의 견제와 협력을 바탕으로 하는 붕당 정치를 전개하였다. 이어 ㉣ 공론이 중시되는 정국이 되면서 상대 세력을 견제하고 자기 세력을 옹호하면서 3사 언관과 이조 전랑의 정치적 비중이 높아졌다.

<보기>
(가) ㉠ - 사화가 발생하였다.
(나) ㉡ - 노론과 소론으로 나뉘었다.
(다) ㉢ - 경신환국으로 상호 공존이 가능하였다.
(라) ㉣ - 공론은 재야의 산림이 주도하였다.
1(가), (나)
2(가), (라)
3(나), (다)
4(나), (라)
정답 및 해설

옳은 것은 훈구와의 대립 속에 사화가 일어났다는 것과 공론을 재야의 산림이 주도했다는 것이다.

사림은 연산군~명종 대 여러 차례 사화를 겪은 뒤 선조 때 정권을 잡았고, 이후 붕당 정치에서 산림이 공론을 이끌며 3사와 이조 전랑의 비중이 커졌다.

  • 사림이 훈구 세력과 대립하는 과정에서 무오·갑자·기묘·을사사화가 일어났다.
  • 훈구 세력이 무너진 직후의 분열은 선조 때 동인과 서인의 분당이며, 노론과 소론은 숙종 때 서인이 다시 나뉜 것이다.
  • 경신환국은 서인이 남인을 몰아낸 사건으로, 상호 공존이 무너지고 일당 전제화가 시작되는 계기였다.
  • 붕당 정치 시기에는 재야의 산림이 공론을 주도하였다.
문제 22
다음과 같은 남북한의 공동 성명 직후 나타난 상황은?
첫째, 통일은 외세에 의존하거나 외세의 간섭을 받음이 없이 자주적으로 해결하여야 한다.
둘째, 통일은 상대방을 반대하는 무력 행사에 의거하지 않고 평화적 방법으로 실현하여야 한다.
셋째, 사상과 이념, 제도의 차이를 초월하여 우선 하나의 민족으로서 민족적 대단결을 도모하여야 한다.
1남한과 북한이 유엔에 동시 가입하고 대화 및 교류를 늘렸다.
2북한에서는 국가 주석에게 절대적 지위를 부여하는 사회주의 헌법을 만들었다.
3김일성의 갑작스러운 죽음과 뒤이은 조문 파동으로 남북관계가 다시 차가워졌다.
4북한에서는 서방 사회에 대한 개방과 교역 확대 등의 새로운 변화를 모색하였다.
정답 및 해설

자주·평화·민족 대단결의 통일 3원칙은 7·4 남북 공동 성명(1972)이며, 직후 북한은 주석에게 절대 권력을 부여한 사회주의 헌법을 제정하였다.

성명 이후 남한은 유신 헌법을, 북한은 사회주의 헌법을 만들어 남북 모두 성명을 체제 강화에 이용하였다.

  • 남북한의 유엔 동시 가입은 1991년 노태우 정부 때의 일이다.
  • 김일성의 사망과 조문 파동은 1994년 김영삼 정부 때의 일이다.
  • 북한의 대외 개방과 교역 확대 모색은 1980년대 이후 합영법 제정 등으로 나타났다.
문제 23
다음 기록과 관련하여 임금의 명에 따라 새로이 개수된 역사서에 대한 설명으로 옳은 것은?
임금이 말하기를, “․․․ 고려 실록에 기록되어 있는 천변과 지괴를 정사(正史)에 기록하지 않은 것은, 전례에 의하여 다시 첨가하여 기록하지 말고, 또 그 군왕의 시호는 아울러 실록에 의하여 태조 신성왕, 혜종 의공왕이라 하고, 묘호와 시호도 그 사실을 인멸하지 말 것이며, 그 태후, 태자와 관제(官制)도 또한 모름지기 고치지 말고, 오직 대사천하(大赦天下)라고 한 곳에는 천하 두 글자만 고칠 것이요, 또한 천하를 경내로 고칠 필요는 없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 『조선왕조실록, 세종5년』 -
1고조선부터 고려 말까지의 통사였다.
2고려의 역사를 기전체로 서술하였다.
3박상의 동국사략의 역사관을 극복하였다.
4이제현이 성리학적 사관에 입각하여 편찬하였다.
정답 및 해설

사료는 세종 대 고려사 개수 지시로, 이 작업은 문종 때 고려 역사를 기전체로 정리한 『고려사』의 완성으로 이어졌다.

‘고려 실록’, ‘태조 신성왕, 혜종 의공왕’ 등 고려 군주의 호칭과 관제를 고치지 말라는 지시가 단서로, 조선 초 고려사 서술을 둘러싼 개찬 과정을 보여 준다.

  • 고조선부터 고려 말까지의 통사는 성종 때 편찬된 『동국통감』이다.
  • 박상의 『동국사략』은 16세기 사림의 역사서로, 세종 대 개수된 고려사보다 늦게 나왔다.
  • 이제현이 성리학적 사관으로 편찬한 것은 고려 말의 『사략』이다.
문제 24
다음 선언과 관련한 민주주의 운동의 성과는?
오늘 우리는 전 세계 이목이 주시하는 가운데 40년 독재 정치를 청산하고 희망찬 민주 국가를 건설하기 위한 거보를 전 국민과 함께 내딛는다. 국가의 미래요 소망인 꽃다운 젊은이를 야만적인 고문으로 죽여 놓고 그것도 모자라서 국민을 속이려 했던 현 정권에게 국민의 분노가 무엇인지 분명히 보여 주고, 국민적 여망인 개헌을 일방적으로 파기한 4.13호헌 조치를 철회시키기 위한 민주 장정을 시작한다.
1강압적 유신 체제의 종말을 맞이하였다.
2내각 책임제와 국회의 양원제가 실시되었다.
35년 단임의 대통령 직선제 개헌이 이루어졌다.
4최초로 평화적 여·야 정권 교체가 이루어졌다.
정답 및 해설

선언은 1987년 6월 민주 항쟁 당시의 것이며, 그 성과로 5년 단임의 대통령 직선제 개헌이 이루어졌다.

‘젊은이를 야만적인 고문으로 죽여’(박종철 고문 치사)와 ‘4·13 호헌 조치’가 단서이다. 항쟁 결과 6·29 민주화 선언이 나왔고 직선제 개헌이 실현되었다.

  • 유신 체제는 1979년 10·26 사태로 막을 내렸다.
  • 내각 책임제와 양원제는 4·19 혁명 직후의 개헌으로 실시되었다.
  • 최초의 평화적 여·야 정권 교체는 1997년 대통령 선거로 이루어졌다.
문제 25
다음 글에 나타난 발해사에 대한 인식을 반박하기 위한 적절한 활동을 <보기> 에서 고른 것은?
속말 말갈은 당나라 초기에 이미 당에 귀속되었다. 7세기 말엽에 속말 말갈의 수령 대조영은 여러 종족을 통일하고 정권을 세웠다. 713년에 당 현종이 대조영을 발해군왕으로 책봉하고 발해도독부 도독에 임명하였다. 이때부터 속말 말갈이 수립한 정권을 발해라고 이름하게 되었다.
- 82년 판 중국 초급중학교 교과서, 『중국력사1』, 21쪽 -

<보기>
ㄱ. 발해가 중앙 관제로 3성 6부를 두게 된 과정을 조사한다.
ㄴ. 발해의 촌락에서 주민의 다수를 차지했던 종족을 알아본다.
ㄷ. 발해가 일본에 보낸 외교 문서에 고구려 왕을 칭한 이유를 살펴본다.
ㄹ. 발해가 멸망한 후 고려가 발해 유민을 적극 받아들인 사실의 의미를 파악한다.
1ㄱ, ㄷ
2ㄴ, ㄷ
3ㄴ, ㄹ
4ㄷ, ㄹ
정답 및 해설

발해를 당에 귀속된 말갈의 정권으로 보는 인식을 반박하려면 고구려 계승 의식과 고려의 발해 유민 수용을 살펴보는 것이 적절하다.

발해는 일본에 보낸 국서에서 스스로 ‘고려(고구려) 국왕’을 칭했고, 멸망 후 고려는 발해 유민을 동족으로 여겨 받아들였다. 이는 발해가 고구려를 계승한 우리 역사임을 보여 준다.

  • 3성 6부는 당의 제도를 받아들인 것이어서, 그 성립 과정을 조사하는 것만으로는 오히려 당의 영향을 강조하게 된다.
  • 촌락 주민의 다수는 말갈인이었으므로 이를 확인하는 것은 말갈 정권이라는 주장을 반박하는 근거가 되지 못한다.
  • 일본에 보낸 외교 문서의 고구려 왕 칭호는 지배층의 고구려 계승 의식을 보여 준다.
  • 고려의 발해 유민 포용은 발해를 같은 민족의 나라로 인식했음을 보여 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