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보 기 > ㄱ. 정착 생활이 시작되었다. ㄴ. 전문적인 기술자와 사유 재산 제도가 나타났다. ㄷ. 원시적인 수공업 생산이 이루어졌다. ㄹ. 명도전 등을 사용하여 중국과 활발하게 교류하였다. |
제시된 유물은 가락바퀴와 빗살무늬 토기로, 신석기 시대의 사회 모습인 정착 생활의 시작과 원시적 수공업을 고르면 된다.
신석기인은 농경과 목축을 시작하며 강가·해안에 움집을 짓고 정착하였고, 가락바퀴와 뼈바늘로 실을 뽑아 옷과 그물을 만드는 원시적인 수공업이 이루어졌다.
- 전문 기술자의 등장과 사유 재산 제도는 청동기 시대에 나타난 모습이다.
- 명도전을 사용한 중국과의 교류는 철기 시대의 모습이다.
| (가) 나라에는 군왕이 있다. 제가들은 별도로 사출도를 주관하였다. …… 옛 풍속에 가뭄이나 장마가 계속되어 5곡이 영글지 않으면 그 허물을 왕에게 돌려 ‘왕을 마땅히 바꾸어야 한다’고 하거나 ‘죽여야 한다’고 하였다. (나) 국읍(國邑)에 각각 한 사람씩을 세워 천신(天神)에 대한 제사를 주관하게 하였는데 이를 천군이라고 부른다. 또 여러 나라에는 각기 별읍(소도)이 있어 큰 나무를 세우고 방울과 북을 매달아 놓고 귀신을 섬긴다. |
(나) 삼한에는 신지·읍차 등의 군장이 있었고, 마한 소국인 목지국의 지배자가 진왕으로 추대되었다.
‘사출도’와 흉년 때 왕에게 책임을 묻는 풍속은 (가) 부여, ‘천군’과 ‘소도’는 (나) 삼한을 가리키는 단서이다.
- 10월 동맹과 국동대혈 제사는 부여가 아니라 고구려의 제천 행사이다.
- 부여와 삼한은 모두 연맹 왕국 단계에 머물렀고 중앙 집권 국가로 발전하지 못한 채 다른 나라에 통합되었다.
- 삼한은 제사장인 천군이 소도를 따로 다스린 제정 분리 사회였다.
| (가) 백제 동성왕은 신라 이벌찬 비지의 딸과 혼인 한 후 병사 3천 명을 보내 신라군을 도와 고구려 병사의 포위를 풀게 하였다. -『삼국사기』- (나) 6월에 수양제가 요동성 남쪽에서 공격하였으나 항복하지 않고 계속 항전을 하였다. 수양제는 부하 장수들에게 30만 5천의 병력으로 성을 우회하여 압록강으로 진격케 하였다. -『삼국사기』- |
| < 보 기 > ㄱ. 고구려는 신라에 침입한 왜를 격퇴하였다. ㄴ. 백제는 사비로 도읍을 옮기고 국호를 남부여로 고쳤다. ㄷ. 고구려는 안시성싸움에서 민·군이 협력하여 당군을 물리쳤다. ㄹ. 신라 지증왕은 국호를 신라로 바꾸고 왕의 칭호도 마립간에서 왕으로 고쳤다. |
(가)~(나) 사이의 사실은 백제 성왕의 사비 천도와 신라 지증왕의 국호·왕호 개정이다.
(가)는 5세기 말 동성왕 때 나·제 동맹이 강화된 시기이고, (나)는 612년 수양제의 고구려 침입이다. 사비 천도는 538년, 지증왕의 개혁은 6세기 초(503년)로 그 사이에 든다.
- 고구려가 신라에 침입한 왜를 격퇴한 것은 400년 광개토 대왕 때로 (가)보다 앞선다.
- 안시성 싸움은 645년 당 태종의 침입 때로 (나)보다 뒤이다.
익산 미륵사지 석탑은 목탑 양식을 석재로 옮긴 백제 석탑으로, 3층 석탑이나 탑신 부조 불상과는 거리가 멀어 설명이 잘못되었다.
미륵사지 석탑은 현존 최고(最古)급·최대 규모의 석탑으로 목조 건축 기법을 그대로 보여 주는 것이 특징이다.
- 서울 석촌동 고분은 고구려식 돌무지무덤으로, 백제 건국 세력이 고구려 계통임을 보여 준다.
- 공주 무령왕릉은 중국 남조 양식의 벽돌무덤으로 남조와의 교류를 보여 준다.
- 부여 금동대향로는 신선 세계를 표현해 도교 사상이 반영된 유물이다.

지도는 백제가 고구려 평양을 공격하고 요서·산둥·규슈로 진출한 4세기 근초고왕 대의 형세이므로, 6세기의 가야와 신라의 결혼 동맹이 가장 거리가 멀다.
대가야는 신라 법흥왕 때(522) 결혼 동맹을 맺었는데, 이는 백제 전성기보다 훨씬 뒤의 일이다.
- 고구려 고국원왕은 근초고왕의 평양성 공격으로 전사하였다(371).
- 근초고왕 때 왕위의 부자 상속이 시작되었다고 본다.
- 신라 내물 마립간 때 고구려 광개토 대왕이 군대를 보내 왜를 물리쳐 주었다(400) — 4세기 말~5세기 초의 같은 시기 흐름이다.
| ㄱ. 강감찬이 거란의 대군을 상대로 귀주에서 대승을 거두었다. ㄴ. 윤관이 별무반을 편성하여 여진족을 북방으로 밀어내고, 동북 지방 일대에 9개의 성을 쌓았다. ㄷ. 김윤후가 이끄는 부대가 처인성에서 몽고 장수 살리타의 군대를 물리쳤다. ㄹ. 고려 정부가 개경으로 환도하자, 배중손의 지휘 아래 삼별초가 대몽항쟁을 벌였다. ㅁ. 500여 척의 함선을 이끌고 진포로 처들어온 왜구를 최무선이 만든 화포를 사용하여 물리쳤다. |
순서는 귀주 대첩 → 윤관의 9성 축조 → 처인성 전투 → 삼별초 항쟁 → 진포 대첩이다.
거란(11세기 초) → 여진(12세기 초) → 몽골(13세기) → 왜구(14세기 후반)의 순으로 대외 관계가 전개되었다.
- 강감찬의 귀주 대첩은 거란 3차 침입 때인 1019년이다.
- 윤관의 별무반 편성과 동북 9성 축조는 예종 때인 1107년 무렵이다.
- 김윤후의 처인성 승리는 몽골 2차 침입 때인 1232년으로 살리타가 사살되었다.
- 삼별초 항쟁은 1270년 개경 환도에 반발해 시작되었다.
- 최무선의 화포를 쓴 진포 대첩은 고려 말인 1380년이다.
| 지방에서 토산물을 공물로 바칠 때, (중앙 관청의 서리가) 공납을 일체 막고 본래 값의 백배가 되지 않으면 받지도 않습니다. 백성이 견디지 못하여 세금을 못 내고 도망하는 자가 줄을 이었습니다. -『선조실록』- |
사료가 고발한 방납의 폐단을 막기 위해 시행한 개혁은 대동법이다.
대동법은 공납을 토산물 대신 토지 결수에 따라 쌀·베·동전으로 걷게 해 방납인의 농간을 줄였다.
- 영정법은 전세를 풍흉에 관계없이 토지 1결당 일정액으로 고정한 제도이다.
- 균역법은 군포 부담을 줄인 군역 개혁이다.
- 호포법은 흥선 대원군이 양반에게도 군포를 걷게 한 군역 개혁이다.
| 지금 불교계를 보면, 아침 저녁으로 행하는 일들이 비록 부처의 법에 의지하였다고 하나, 자신을 내세우고 이익을 구하는데 열중하며, 세속의 일에 골몰한다. 도덕을 닦지 않고 옷과 밥만 허비하니, 비록 출가하였다고 하나 무슨 덕이 있겠는가? -『권수정혜결사문』- |
| 〈 보 기 〉 ㄱ. 내가 곧 부처라는 깨달음을 위한 노력과 함께, 꾸준한 수행으로 깨달음의 확인을 강조하는 돈오점수(頓悟漸修)를 주장하였다. ㄴ. 자신의 행동을 진정으로 참회하는 법화 신앙에 중점을 둔 백련 결사를 제창하였다. ㄷ. 교학과 선을 함께 수행하되, 교학의 수련을 중심으로 선을 포용하려는 사상 체계인 교관겸수(敎觀兼修)를 제창하였다. ㄹ. 승려 본연의 자세로 돌아가 독경과 선 수행, 노동에 고루 힘쓰자는 개혁 운동인 수선사 결사를 제창하였다. |
『권수정혜결사문』을 지은 인물은 지눌로, 돈오점수와 수선사 결사가 그의 주장이다.
지눌은 타락한 불교계를 비판하며 선을 중심으로 교학을 포용하는 정혜쌍수·돈오점수를 내세웠다.
- 법화 신앙에 중점을 둔 백련 결사는 요세가 제창하였다.
- 교학을 중심으로 선을 포용한 교관겸수는 의천의 사상이다.
| 교사 : 현재 퇴직 공무원의 노후를 보장해주기 위하여 마련된 것이 공무원 연금이야. 학생 : 공무원연금수급자가 사망 시 어떻게 되나요? 교사 : 공무원연금법에 의해 유족이 연금을 승계 받게 되지. 학생 : 그럼 고려시대에도 일종의 퇴직금이 있었나요? 교사 : 시정 전시과는 수조권을 죽을 때까지 지급했는데 이는 퇴직 관리에게는 퇴직금의 성격도 지니고 있었지. 학생 : 관료에게 지급해야 할 토지가 부족하지 않았을까요? 교사 : 그래서 경정 전시과에서 현직 관리 위주로 토지를 지급하기로 했던 거야. 학생 : 그럼 퇴직금이 없어진 거네요. 퇴직 후 가족들은 어떻게 생계를 유지하였을까요? 교사 : 그래서 퇴직 관료나 사망 관료의 유가족을 위해 마련된 토지제도가 있지. 그것이 바로 ( )이야 |
| < 보 기 > ㄱ. 내장전 ㄴ. 구분전 ㄷ. 공해전 ㄹ. 공음전 |
퇴직·사망 관료와 그 유가족의 생계를 위한 토지는 구분전과 공음전이다.
구분전은 하급 관리와 군인의 유가족에게 생계를 위해 지급하였고, 공음전은 5품 이상 고위 관료에게 지급해 자손에게 세습할 수 있게 하였다.
- 내장전은 왕실의 경비를 충당하기 위한 토지이다.
- 공해전은 중앙과 지방 관청의 경비를 충당하기 위한 토지이다.
| 신하 : 토지 1결당 최대 생산량을 300두로 정하고 수확량에 따라 1/10의 조세를 걷어왔습니다. 그러나 작황을 살피는 관리들의 농간으로 농민의 고통이 심하니 대책을 강구해주시기 바랍니다. 왕 : ( ) |
세종은 공법을 제정해 토지 비옥도에 따른 전분 6등법과 풍흉에 따른 연분 9등법으로 조세를 걷게 하였다.
관리가 작황을 직접 살피는 답험손실법의 농간을 없애기 위한 대책이다.
- 관청이 세금을 거두어 관리에게 나누어 주는 관수 관급제는 성종 때 시행되었다.
- 현직 관리에게만 수조지를 지급한 직전법은 세조 때 시행되었다.
- 전세를 토지 1결당 4두로 고정한 영정법은 인조 때 시행되었다.




ㄱ ㄴ ㄷ ㄹ
부석사 소조 고달사지 승탑 월정사 8각 광주 춘궁리
아미타여래좌상 9층 석탑 철불
월정사 8각 9층 석탑은 송나라의 영향을 받은 고려 전기의 다각 다층탑이므로, 원나라 탑의 영향을 받았다는 설명이 바르지 않다.
원의 영향을 받은 탑은 고려 후기의 경천사지 10층 석탑이다.
- 부석사 소조 아미타여래좌상과 고달사지 승탑은 통일 신라의 양식을 계승하였다.
- 고달사지 승탑은 선종의 유행과 함께 조성된 팔각원당형 승탑이다.
- 부석사 소조 아미타여래좌상, 고달사지 승탑, 월정사 8각 9층 석탑, 광주 춘궁리 철불은 모두 고려 시대 미술품이다.
장례원은 노비 문서와 노비 소송을 담당한 기관이므로, 예송·산송 판결을 맡겠다는 소감은 직책과 어울리지 않는다.
조선의 사법은 행정 기관과 겸하는 경우가 많아 사헌부·한성부·관찰사도 각자의 사법 기능을 가졌다.
- 사헌부는 관리의 비리를 감찰·탄핵하는 기관으로 대사헌이 수장이다.
- 한성부는 수도의 행정과 치안, 토지·가옥 관련 소송을 맡았다.
- 관찰사는 관할 도의 행정·사법·군사권을 가져 노비·상속 등 민사 분쟁도 처리하였다.
| · 신권 5,000원 지폐 인물 · 임금에게 성학집요를 지어 올려, 현명한 신하가 성학을 군주에게 가르쳐 그 기질을 변화시켜야 한다는 군주 개조론을 주장 |
제시된 인물은 이이로, 10만 양병설과 수미법 등 현실적인 개혁 방안을 제시하였다.
5,000원권 인물이며 『성학집요』를 지어 현명한 신하가 군주를 이끌어야 한다고 주장한 점이 단서이다.
- 임진왜란 이후 일본 성리학 발달에 큰 영향을 준 인물은 이황이다.
- 인간의 심성과 도덕적 근거를 중시하는 근본적·이상주의적 성향은 이황의 학풍이다.
- 성리학을 상대화하고 제자백가 등에서 해결책을 찾은 경향은 17세기 후반 윤휴·박세당 등에게서 나타났다.
| 제 4관 토지 소유자는 조선 총독이 정하는 기간 내에 주소·씨명, 명칭 및 소유지의 소재, 지목, 자번호(字番號), 사표(四標), 등급, 지적, 결수(結數)를 임시 토지 조사국장에게 신고하여야 한다. 단 국유지는 보관 관청이 임시 토지 조사국장에게 통지해야 한다. 제 6관 토지의 조사 및 측량을 할 때, 조사 및 측량 지역 내의 2인 이상의 지주로 총대를 선정하고, 조사 및 측량에 관한 사무에 종사하게 할 수 있다. |
| < 보 기 > ㄱ. 창씨개명의 강요 ㄴ. 산미증식계획 실시 ㄷ. 의병장 채응언의 활약 ㄹ. 헌병경찰제도 실시 |
자료는 토지 조사령(1912)으로, 토지 조사 사업이 진행된 1910년대에는 헌병 경찰 제도와 의병장 채응언의 활동이 해당한다.
1910년대는 무단 통치기로 헌병이 경찰 업무를 맡았고, 채응언은 1915년 체포될 때까지 국내에서 항전하였다.
- 창씨개명 강요는 1940년 민족 말살 통치기의 일이다.
- 산미 증식 계획은 1920년부터 실시되었다.
| ․죽은 사람 앞에 술과 음식을 차려 놓는 것은 (가)에서 금하는 일입니다. 살아 있을 동안에도 영혼은 술과 밥을 받아먹을 수 없는데,하물며 죽은 뒤에 영혼이 어찌하겠습니까? … 자식된 도리로 어찌 허위와 가식의 예(禮)로써 이미 죽은 부모를 섬기겠습니까? -『상재상서』- ․사람이 곧 하늘이라. 그러므로 사람은 평등하며 차별이 없나니 사람이 마음대로 귀천을 나눔은 하늘을 거스르는 것이다. 우리 (나)은 차별을 없애고 선사의 뜻을 받들어 생활하기를 바라노라 |
(가) 천주교가 17세기에 프랑스 신부에 의해 처음 소개되었다는 설명은 옳지 않다.
천주교는 17세기 중국에 다녀온 사신들이 서학으로 들여왔고, 프랑스 신부의 입국은 19세기의 일이다. 제사 거부(『상재상서』)는 천주교, ‘사람이 곧 하늘’(인내천)은 동학의 단서이다.
- 천주교는 정조 때 비교적 관대한 대우를 받다가 순조 즉위 직후 신유박해(1801)로 대탄압을 받았다.
- 동학은 주문과 부적 등 민간 신앙 요소를 결합해 민중적 성격을 띠었다.
- 최시형이 『동경대전』과 『용담유사』를 간행해 교리를 정리하였다.
| ․법령 및 조약에 의해 몰수하거나 국유로 된 농지, 직접 땅을 경작하지 않는 사람의 농지, 직접 땅을 경작하더라도 농가 1가구당 3정보(1정보는 약 1만㎡)를 초과하는 농지 등은 정부가 사들인다. ․분배 농지는 1가구당 총 경영 면적이 3정보를 넘지 못한다. ․분배받은 농지에 대한 상환액은 평년작을 기준으로 하여 주생산물의 1.5배로 하고, 5년 동안 균등 상환하도록 한다. |
자료는 이승만 정부의 농지 개혁법으로, 지주의 토지 자본을 산업 자본으로 전환해 산업화의 토대를 마련하려 하였다.
3정보 상한, 유상 매수·유상 분배, 평년작의 1.5배를 5년간 상환하는 내용이 단서이다.
- 신한공사는 미 군정기 귀속 농지를 관리한 기구로, 이 법은 정부 수립 후 제정·시행되었다.
- 북한의 토지 개혁은 무상 몰수·무상 분배 방식이었다.
- 6·25 전쟁과 인플레이션으로 지가 증권의 가치가 떨어져 대다수 중소 지주는 몰락하였다.
1882 1894 1896 1904 1910
| ㄱ | ㄴ | ㄷ | ㄹ |
임오군란 청일전쟁 아관파천 러일전쟁 한일합방
국한문체 한성주보는 1886년 발간되어 임오군란(1882)~청일 전쟁(1894) 사이 시기에 들어간다.
각 사건 연도를 연표 구간과 맞추어 보면 나머지는 모두 시기가 어긋난다.
- 경인선 개통은 1899년으로 아관파천(1896)~러일 전쟁(1904) 사이이다.
- 일제의 화폐 정리 사업은 1905년으로 러일 전쟁~국권 피탈 사이이다.
- 영국의 거문도 사건은 1885~1887년으로 임오군란~청일 전쟁 사이이다.
| (가) 명성 황후 시해와 단발령 실시에 항거하여 일어났다. (나) 고종의 강제 퇴위와 군대 해산을 계기로 일어났다. (다) 외교권을 빼앗고, 통감부를 설치한 것을 계기로 확산되었다. |
| 〈 보 기 〉 ㄱ. (가) - (나) - (다)순으로 의병 운동이 전개되었다. ㄴ. (나)의 의병은 13도 창의군을 결성하고 서울 진공 작전을 시도하였다. ㄷ. (다)의 의병때 평민 출신 신돌석의 활약이 두드러졌다. ㄹ. (다)의 의병은 (나)에 비해 전투력이 한층 강화되었다. |
옳은 것은 정미의병의 13도 창의군·서울 진공 작전과 을사의병 때 신돌석의 활약이다.
(가)는 을미의병(1895), (다)는 을사의병(1905), (나)는 정미의병(1907)이다.
- 전개 순서는 (가) → (다) → (나)이므로 (가)-(나)-(다) 순이라는 설명은 틀렸다.
- 해산 군인이 합류해 전투력이 크게 강화된 것은 을사의병이 아니라 정미의병이다.
| 덕원(원산) 부사 정현석이 장계를 올립니다. 신이 다스리는 이곳읍은 해안의 요충지에 있고 아울러 개항지가 되어 소중함이 다른 곳에 비할 바가 못됩니다. 개항지를 빈틈 없이 운영해 나가는 방도는 인재를 선발하여 쓰는 데 달려 있고, 인재 선발의 요체는 교육에 있습니다. 그러므로 학교를 설립하여 연소하고 총명한 자를 뽑아 교육하고자 합니다. -『덕원부계록』- |
| < 보 기 > ㄱ. 1876년 강화도조약을 맺어 개항하였다. ㄴ. 1883년 정부에서 근대교육기관을 설립하여 상류층 자제에게 영어교육을 하였다. ㄷ. 1904년 미국에 의하여 경원선이 부설되었다. ㄹ. 1929년 노동자들이 총파업을 실행하였다. |
‘덕원(원산)’ 부사의 장계이므로 이곳은 원산이며, 강화도 조약에 따른 개항과 1929년 원산 총파업이 옳다.
원산은 강화도 조약(1876)에 따라 부산에 이어 개항되었고, 1929년 일제 강점기 최대 규모의 노동자 총파업이 일어났다.
- 1883년 원산에 세워진 원산 학사는 정부가 아닌 관민이 함께 세운 최초의 근대 사립 학교로, 상류층 자제 영어 교육과는 관계없다(정부의 영어 교육 기관은 동문학·육영 공원).
- 경원선은 미국이 아니라 일제가 1914년에 완공하였다.
| (가) 한국정부는 일본정부가 추천하는 일본인 1명을 재정고문으로 하여 한국정부에 용빙하고, 재무에 관한 사항은 일체 그 의견을 물어 시행할 것. -제1차 한․일 협약- (나) 한국 황제 폐하는 한국 전체에 관한 통치권을 완전 또는 영구히 일본 황제 폐하에게 양여한다. -한․일 병합조약- |
| < 보 기 > ㄱ. 신채호는 대한매일신보에 '독사신론'을 연재하였다. ㄴ. 평양에서 경제 자립을 위한 물산장려운동이 일어났다. ㄷ. 식민지 현실을 고발하는 카프(KAPF)문학단체가 결성되었다. ㄹ. 독립 협회는 외국의 이권 침탈을 저지하는 활동을 벌였다. |
(가)~(나) 사이의 구국 운동은 신채호의 독사신론 연재(1908)뿐이다.
(가)는 1904년 제1차 한·일 협약, (나)는 1910년 한·일 병합 조약으로, 이 시기는 애국 계몽 운동이 전개된 때이다.
- 평양의 물산 장려 운동은 1920년에 시작되었다.
- 카프(KAPF)는 1925년에 결성되었다.
- 독립 협회의 이권 침탈 저지 활동은 1896~1898년의 일이다.
각기 담당했던 기능이 비슷한 것끼리 묶인 것은?
| 통일 신라 | 발 해 | 고 려 | ||
| ㄱ | 국정 총괄 | 집사부 | 정당성 | 중추원 |
| ㄴ | 법률 담당 | 좌·우이방부 | 예 부 | 형 부 |
| ㄷ | 감찰 담당 | 사정부 | 중대성 | 어사대 |
| ㄹ | 국립 대학 | 국 학 | 주자감 | 국자감 |
기능이 바르게 묶인 것은 법률 담당(좌·우이방부-예부-형부)과 국립 대학(국학-주자감-국자감)이다.
발해의 6부는 유교 덕목으로 이름을 붙였는데, 그중 예부가 형률을 맡았다.
- 고려의 국정 총괄 기구는 중서문하성이며, 중추원은 군사 기밀과 왕명 출납을 맡았다.
- 발해의 감찰 기구는 중정대이며, 중대성은 정책을 수립하는 기구였다.
| ․의회 설립 운동 전개 ․러시아의 절영도 조차 요구 저지 |
의회 설립 운동과 절영도 조차 저지는 독립 협회의 활동이며, 헌의 6조의 중대 범죄 공개 재판·피고 인권 존중이 이들의 개혁안이다.
독립 협회는 관민 공동회에서 헌의 6조를 결의해 고종에게 건의하였다.
- 노비 문서 소각은 동학 농민군의 폐정 개혁안이다.
- 대황제의 육해군 통솔은 대한 제국의 대한국 국제 조항이다.
- 지조법 개혁은 갑신정변 14개조 정강의 내용이다.
| 〈 보 기 〉 ㄱ. 통일 신라 - 독서 삼품과의 실시로 귀족세력이 약화되었다. ㄴ. 고려 - 백정은 과거에 응시할 수 없었다. ㄷ. 조선 - 서얼은 무과나 잡과에는 제한이 없었다. ㄹ. 갑오개혁 이후 - 과거제가 폐지되고, 관리임용제도가 실시되었다. |
옳은 것은 조선 서얼의 무과·잡과 응시 가능과 갑오개혁의 과거제 폐지이다.
조선의 서얼은 문과 응시만 제한되었고, 갑오개혁 때 과거제를 폐지하고 새로운 관리 임용 제도를 마련하였다.
- 통일 신라의 독서삼품과는 진골 귀족의 반발로 제대로 시행되지 못해 귀족 세력을 약화시키지 못하였다.
- 고려의 백정은 일반 농민(양인)으로 법적으로 과거 응시가 가능하였다.

ㄱ ㄴ ㄷ
빈칸은 차례로 조선 의용군 – 한국 광복군 – 조선 의용대이다.
연안의 조선 독립 동맹은 조선 의용대 화북 지대를 조선 의용군으로 개편해 군사 조직으로 두었고, 충칭의 대한민국 임시 정부는 1940년 한국 광복군을 창설하였다. 우한에서는 조선 민족 혁명당이 1938년 조선 의용대를 조직하였다.
- 한국 독립군은 1930년대 초 북만주에서 한국 독립당이 조직한 부대로, 중국 관내 임시 정부의 군대가 아니다.
- 조선 의용대는 우한에서 조선 민족 혁명당이 만든 부대이므로 연안의 조선 독립 동맹 자리에 들어갈 수 없다.
| ㄱ. 지조법을 개혁하여 간악한 관리를 근절하고 국가 재정을 충실히 하라. ㄴ. 토지는 평균으로 나누어 경작하게 하라. ㄷ. 조세의 금납제와 외국 화폐를 혼용하게 하였다. ㄹ. 전국의 토지를 측량하고 지계를 발급하였다. |
순서는 갑신정변 → 동학 농민 운동 → 갑오개혁 → 광무개혁이다.
각 내용이 어느 개혁의 강령인지 확인하면 선후가 정해진다.
- 지조법 개혁은 1884년 갑신정변 14개조 정강의 내용이다.
- 토지 평균 분작은 1894년 동학 농민군의 폐정 개혁안 내용이다.
- 조세 금납제와 외국 화폐 혼용은 1894년 갑오개혁 때 시행되었다.
- 양전 사업과 지계 발급은 대한 제국의 광무개혁 때 시행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