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아! 나라의 수치와 백성의 욕됨이 이에 이르렀으니 우리 인민은 장차 생존경쟁에서 잔멸하리라. 다만 영환은 한번 죽음으로써 임금의 은혜에 보답하고 이천만동포형제에게 사죄하노라. 영환은 죽어도 죽지 않고 구천 아래에서 여러분을 돕고자 하니··· 일심협력하여 우리의 자유와 독립을 회복하면 죽은 몸도 저승에서 기뻐 웃으리라. 아! 실망하지 말라. 우리 대한제국 이천만 동포형제들에게 이별을 고하노라. |
사료는 을사늑약(1905)에 항거해 자결한 민영환의 유서이므로, 이 시기의 의병은 을사의병이며 평민 의병장 신돌석이 울진·평해 일대에서 활약하였다.
‘나라의 수치’, ‘영환은 한번 죽음으로써’라는 구절이 단서이다. 을사의병에서는 양반 의병장(민종식·최익현)과 함께 평민 출신 의병장이 처음 등장하였다.
- 고종의 해산 권고 조칙으로 해산한 것은 단발령·명성황후 시해에 반발한 을미의병이다.
- 해산된 군인이 합류해 전력이 강화된 것은 군대 해산(1907) 이후의 정미의병이다.
- 남한 대토벌 작전(1909) 이후 연해주·만주로 이동한 것은 정미의병 이후의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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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시된 유물은 청동기 시대의 것이므로, 이 시기 한반도 북부 사람들이 비파형 동검과 미송리식 토기를 사용했다는 설명이 옳다.
아가리 아래에 구멍을 줄지어 뚫은 민무늬 계열의 구멍무늬 토기, 곡식 이삭을 따는 데 쓴 반달 돌칼, 지배층의 무덤인 탁자식 고인돌은 모두 청동기 시대를 대표하는 유물·유적이다. 미송리식 토기는 비파형 동검과 함께 고조선의 문화 범위를 보여 주는 자료이다.
- 무리를 지어 큰 짐승을 사냥하며 이동하고 평등한 공동체 생활을 한 것은 구석기 시대의 모습이다.
- 자연물에 정령이 있다고 믿는 애니미즘이 처음 나타난 것은 신석기 시대이다.
- 움집 중앙에 화덕을 둔 것은 신석기 시대의 특징이며, 청동기 시대에는 움집이 지상 가옥화되면서 화덕이 한쪽 벽으로 옮겨졌다.
| 신고산이 우루루 화물차 가는 소리에 지원병 보낸 어머니 가슴만 쥐어 뜯고요 어랑어랑 어허야 양곡배급 적어서 콩깻묵만 먹고 사누나 신고산이 우루루 화물차 가는 소리에 정신대 보낸 어머니 딸이 가엾어 울고요 어랑어랑 어허야 풀만 씹는 어미소 배가 고파서 우누나 신고산이 우루루 화물차 가는 소리에 금붙이 쇠붙이 밥그릇마저 모조리 긁어 갔고요 어랑어랑 어허야 이름 석 자 잃고서 족보만 들고 우누나 <신고산 타령> |
노래 속 ‘지원병’, ‘정신대’, ‘금붙이 쇠붙이’ 공출, ‘이름 석 자 잃고서’(창씨개명)는 중일전쟁 이후 전시 동원 체제의 모습이므로, 같은 시기인 한국광복군 창설(1940, 충칭)이 맞다.
일제는 1930년대 후반부터 지원병제·징용·정신대 동원, 금속 공출, 창씨개명을 강요하였고,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충칭에 정착한 뒤 한국광복군을 창설하였다.
- 국외 독립운동 기지 건설(삼원보·연해주 등)은 1910년대의 일이다.
- 참의부·정의부·신민부의 3부 성립은 1920년대 중반이다.
- 북로군정서군 중심의 청산리 대첩은 1920년이다.
○ 조선의 통치 체계 ○ 이조 의정부 6 조 호조 경관직 승정원 예조 의금부 병조 사헌부 형조 사간원 3 사 공조 왕 홍문관 한성부 춘추관 성균관 부 외관직 8 도 목 군 현 |
5품 이하 당하관 임명 시 동의를 얻는 서경권은 의정부·이조가 아니라 사헌부·사간원(대간)이 행사하였으므로, 의정부 재상과 이조 판서의 동의를 얻는다는 설명이 옳지 않다.
서경은 관리 임명 시 대간이 가문·인품 등을 심사해 동의하는 제도로, 왕권과 신권의 균형을 이루는 장치였다.
- 6조는 각 조마다 속사와 속아문을 두어 직능별로 행정을 분담하였다.
- 의금부는 고려 말 순군만호부 계통을 이어 개편된 왕 직속 사법 기관으로 국가 중죄인을 다스렸다.
- 승정원은 왕명 출납을 맡았으며 도승지 이하 6승지가 6조의 일을 나누어 맡았다.
| 마한정복 | → | 웅진(공주)천도 | → | (가) | → | 남부여로 국호개칭 |
(가)는 웅진 천도(475)와 사비 천도 후 남부여로 국호를 바꾼 성왕 대(538) 사이이므로, 이 시기 무령왕이 22담로에 왕족을 파견한 것이 맞다.
웅진 천도 이후 동성왕·무령왕 대에 왕권이 회복되었고, 무령왕은 지방 거점인 22담로에 왕족을 보내 지방 통제를 강화하였다.
- 관등제 정비와 관복제 도입은 3세기 고이왕 대의 일이다.
- 중국 요서·일본 규슈 진출은 4세기 근초고왕 대의 전성기와 관련된다.
- 불교 공인은 4세기 후반 침류왕 대의 일이다.
| ○ 5년 봄에 다시 완산주를 설치하고 용원으로 총관을 삼았다. 거열주를 승격하여 청주를 설치하니 비로소 9주가 갖추어져서 대아찬 복세로 총관을 삼았다. 3월 남원 소경을 설치하고 여러 주와 군의 백성들을 옮겨 살게 하였다. ○ 9년 봄 정월에 내외관의 녹읍을 폐지하고 해마다 차등을 두어 조(租)를 주도록 하교하고, 이를 고정된 법식으로 삼았다. 왕이 달구벌로 서울을 옮기려다 실현하지 못하였다. < 삼국사기 > |
ᄀ. 당을 축출하고 통일왕국을 형성하였다.
ᄂ. 김흠돌 모역사건을 계기로 귀족세력을 숙청했다.
ᄃ. 유학사상을 강조하고, 국학을 설립했다.
ᄅ. 이사부로 하여금 우산국을 정벌케 하였다.
ㅁ. 행정실무를 담당하는 세력으로 6두품이 성장했다.
사료의 ‘9주가 갖추어져’, ‘녹읍을 폐지’, ‘달구벌로 서울을 옮기려다’는 신문왕의 업적이므로, 옳은 것은 ㄴ, ㄷ, ㅁ이다.
신문왕은 즉위 직후 김흠돌의 난을 계기로 진골 귀족을 숙청하고, 국학을 설립해 유학을 진흥하였다. 이 시기 왕권과 결탁한 6두품이 행정 실무 세력으로 성장하였다.
- 당을 축출하고 삼국 통일을 완성한 것은 문무왕이다.
- 이사부를 보내 우산국을 정벌한 것은 지증왕이다.
| (가) 경종 원년(976) 11월에 비로소 직관(현직 관리), 산관(퇴직 관리) 각 품의 전시과를 제정하였는데 18품으로 나눈다. 1품은 전(田)과 시(柴)가 각각 110결, 18품은 전 33결․시 25결이다. (나) 목종 원년(998) 12월에 문무 관리와 군인, 한인에게 토지를 나누어 주는 것으로 전시과를 개정하였다. 제1과는 전 100결․시 70결, 제17과는 전 23결, 제18과는 전 20결로 한다. (다) 문종 30년(1076)에 전시과를 다시 개정하였다. 제1과는 전 100결․시 50결, 제17과는 전 20결, 제18과는 전 17결로 한다. |
(나) 목종 대의 개정 전시과는 관직만을 기준으로 하되 산관을 현직보다 낮게 지급하고 무관을 문관보다 차별하였으므로, 직·산관과 무관에게 같은 양을 지급하였다는 설명이 옳지 않다.
(가)는 경종의 시정 전시과, (나)는 목종의 개정 전시과, (다)는 문종의 경정 전시과이다.
- 시정 전시과는 관품과 함께 인품을 반영한 다원적 기준을 적용하였다.
- 경정 전시과는 현직 관리에게만 지급하였으며 별사전시·무산계 전시도 마련하였다.
- 전시과는 관리를 18등급(과)으로 나누어 전지와 시지의 수조권을 지급한 제도이다.
북학파 실학자홍대용, 박지원, 박제가통상개화론자박규수, 오경석, 유홍기양무운동문명개화론온건개화파A
자료에서 A는 ‘문명개화론’을 바탕으로 온건개화파와 갈라진 세력, 곧 급진개화파이므로 입헌군주제를 지향하며 갑신정변을 일으켰다는 설명이 맞다.
개화파는 북학파와 통상개화론(박규수·오경석·유홍기)을 계승해, 청의 양무운동을 모델로 한 온건개화파와 일본 메이지 유신을 모델로 한 급진개화파(김옥균·박영효 등)로 나뉘었다.
- 김홍집·어윤중은 온건개화파의 인물이다.
- 친청 외교 노선은 청과의 관계를 유지하려 한 온건개화파의 입장이다.
- 반외세·반침략 운동을 주도한 것은 위정척사 세력이나 동학 농민군 등이다.
| 천체가 운행하는 것이나 지구가 자전하는 것은 그 세가 동일하니, 분리해서 설명할 필요가 없다. 다만, 9만 리의 둘레를 한 바퀴 도는 데 이처럼 빠르며, 저 별들과 지구와의 거리는 겨우 반경(半徑)밖에 되지 않는데도 몇천만억의 별들이 있는지 알 수 없다. 하물며 천체들이 서로 의존하고 상호 작용하면서 이루고 있는 우주 공간의 세계 밖에도 또다른 별들이 있다. ······칠정(七政)이 수레바퀴처럼 자전함과 동시에, 멧돌을 돌리는 나귀처럼 둘러싸고 있다. 지구에서 가까이 보이는 것을 사람들은 해와 달이라 하고, 지구에서 멀어 작게 보이는 것을 사람들은 오성(五星)이라 하지만, 사실은 모두가 동일하다. <담헌집> |
‘담헌집’과 지구의 자전, 무한한 우주를 말한 내용은 홍대용의 지전설·무한우주론으로, 이는 중국 중심의 성리학적 세계관을 비판하는 근거가 되었다.
홍대용은 『의산문답』 등에서 지구가 자전하며 우주에 중심이 없다고 보아, 화이론적 세계관을 상대화하였다.
- 원의 수시력은 고려 충선왕 대에 도입되었다.
- 서울을 기준으로 천체 운동을 계산한 역법서는 세종 대의 칠정산이다.
- 천문·역법을 맡은 사천대는 고려 시대의 관청이다.
| 이조전랑 통청권의 폐지와 한천법의 개혁은 결과적으로 선조대 이래 지속되어온 파당정치의 사실상의 붕괴를 의미하였다. 1742년 “周而弗比 乃君子之公心 比而弗周 寔小人之私意(원만해 편벽되지 않음은 곧 군자의 공정한 마음이고, 편벽해 원만하지 않음은 바로 소인의 사사로운 마음이다)”라는 문구를 친히 지어 비(碑)에 새겨 성균관 반수교(泮水橋) 위에 세워 ‘탕평비(蕩平碑)’라 하였다. 한편으로는 성균관 유생들에게 당론을 금하도록 계책하여 자신의 탕평정책에 대한 열의를 보여주었다. |
‘이조전랑 통청권 폐지’, ‘탕평비’는 영조의 정책이므로, 정조가 실시한 초계문신제는 영조의 업적에 해당하지 않는다.
초계문신제는 정조가 규장각을 중심으로 젊은 문신을 재교육한 제도이다.
- 사형수에 대한 삼심제를 엄격히 시행한 것은 영조이다.
- 신문고를 부활시킨 것은 영조이다.
- 붕당의 근거지가 된 서원을 대폭 정리하고 산림의 존재를 부정한 것은 영조이다.
| (가) 1년에 2필의 군포를 납부하던 농민 장정들에게 1년에 군포 1필만 부담하게 하였다. (나) 농민 집집마다 부과하여 토산물을 징수하였던 공물 납부 방식을 토지의 면적에 따라 쌀, 삼베나 무명, 동전 등으로 납부하게 하였다. (다) 농토의 비옥도와 그 해의 풍흉에 따라서 전세를 납부하던 연분 9등법을 따르지 않고 풍년이건 흉년이건 관계없이 인조 때 전세를 토지 1결 단위로 고정시켰다. |
(나)는 공납을 토지 결수에 따라 쌀·베·동전으로 내게 한 대동법으로, 방납의 폐단을 시정하기 위해 광해군 때 경기도에서 처음 시행되었다.
(가)는 균역법, (다)는 영정법이다.
- 균역법 이후에도 양반은 군역을 지지 않았으므로 양반과 농민의 부담이 균등해진 것은 아니다.
- 균역법의 재정 부족분을 메운 결작은 토지 1결당 2두였다.
- 영정법은 풍흉에 관계없이 전세를 1결당 4~6두로 고정하였다.
| 고려 말 공민왕의 개혁이 실패한 후, 사대부층은 점차 고려 왕조의 테두리 안에서의 점진적인 개혁을 추구하려는 온건파와, 왕조 자체를 바꾸려는 혁명파로 갈렸다. (가)정도전 등의 혁명파 사대부는 위화도 회군을 계기로, 권문세족과 (나)정몽주를 비롯한 온건파 사대부를 제거하고 이성계를 왕으로 추대하여 새 왕조를 개창하였다. |
(가) 혁명파 사대부는 훈구, (나) 온건파 사대부는 사림으로 이어졌으며, 사림은 도덕과 의리를 숭상하는 왕도 정치를 추구하였다.
사림은 향촌에서 성리학적 명분과 의리를 중시하며 학문을 닦다가 성종 이후 중앙 정계에 진출하였다.
- 훈구(관학파)는 성리학 이외의 사상과 학문에도 비교적 포용적이었다.
- 자주적 사관으로 단군을 중시한 것은 훈구 계열의 특징이며, 사림은 기자를 중시하였다.
- 붕당 정치는 정권을 잡은 사림 내부가 동인·서인으로 나뉘며 전개되었고, 훈구와 사림의 대립은 사화로 나타났다.
| 1. 청에 의존하는 생각을 버리고, 자주 독립의 기초를 세운다. 2. 임금은 각 대신과 의논하여 정사를 행하고 종실, 외척의 내정 간섭을 용납하지 않는다. 7. 조세의 징수와 경비 지출은 모두 탁지아문의 관할에 속한다. 14. 문벌을 가리지 않고 인재 등용의 길을 넓힌다. |
‘청에 의존하는 생각을 버리고’, ‘탁지아문’ 등은 제2차 갑오개혁 때 반포한 홍범 14조이므로, 전통적 사회 질서를 타파하고 농민층의 개혁 요구 일부를 반영한 개혁 방향이 맞다.
갑오개혁은 신분제 폐지 등 동학 농민군이 요구한 사항 일부를 반영하였다.
- 경복궁 중건과 의정부·삼군부 기능 회복은 흥선 대원군의 정책이다.
- 민중에게 근대 지식·자주 국권·자유 민권 사상을 고취한 것은 독립 협회이다.
- 국권 회복과 공화 정체의 국민 국가 건설을 목표로 한 것은 신민회이다.
| (가) 은진 강경장에서 상평통보를 가지고 거래하는 보부상 (나) 청 상인에게 비단, 약재를 사는 의주의 상인 (다) 황해도 수안에 금광을 찾아 몰려든 광꾼 (라) 철점(대장간)에서 제품을 생산하고 판매하는 민간 수공업자 |
조선 후기 광산 경영에서는 상인 물주가 자본을 대고, 경영 전문가인 덕대가 채굴업자와 노동자를 고용하였으므로, 물주를 경영 전문가로 설명한 것이 적절하지 않다.
이러한 덕대제 광산 경영은 자본과 경영이 분리된 형태였다.
- 장시는 15세기 말에 등장해 대개 5일마다 열렸고 18세기 중엽에는 전국에 1천여 개소로 늘었다.
- 사무역인 후시가 허용되면서 의주의 만상, 동래의 내상이 두드러지게 활동하였다.
- 민간 수공업자는 대체로 상업 자본의 선대제 지배를 받았으나, 18세기 후반에는 독자적으로 생산·판매하는 수공업자가 나타났다.
| 가을에 한 늙은 아전이 대궐에서 돌아와 처와 자식에게 “요즘 이름 있는 관리들이 모여서 하루 종일 이야기하여도 나랏일에 대한 계획이나 백성을 위한 걱정은 전혀 하지 않는다. 오로지 각 고을에서 보내오는 뇌물의 많고 적음과 좋고 나쁨 만에 관심을 가지고, 어느 고을의 수령이 보낸 물건은 극히 정묘하고, 또 어느 수령이 보낸 물건은 매우 넉넉하다고 말한다. 이름 있는 관리들이 말하는 것이 이러하다면, 지방에서 거둬들이는 것이 반드시 늘어날 것이다. 나라가 어찌 망하지 않겠는가?” 하고 한탄하면서 눈물을 흘려 마지않았다. <목민심서> |
사료는 『목민심서』가 묘사한 세도 정치기의 수탈로, 이 시기 향촌에서는 사족의 영향력이 약해지고 수령과 향리의 권한이 커져 농민을 수탈하였다.
따라서 수령의 역할이 배제되고 지방 사족이 수탈을 주도했다는 설명이 옳지 않다.
- 세도 정치기에는 비변사가 핵심 기구가 되었고 소수 유력 가문이 권력을 장악하였다.
- 사회 불안 속에 『정감록』 같은 비기와 무격·미륵 신앙이 유행하였다.
- 벽서·괘서 형태의 저항은 점차 홍경래의 난, 임술 농민 봉기 같은 농민 봉기로 발전하였다.
| ○ 성현에 대한 제사와 유생의 교육, 지방민의 교화를 위해 설치하였다. ○ 규모와 지역에 따라 중앙에서 교수 또는 훈도를 파견하였다. |
성현 제사·유생 교육·지방민 교화를 맡고 중앙에서 교수·훈도를 파견한 기관은 향교이며, 향교는 부·목·군·현에 하나씩 설립된 중등 교육 기관이다.
향교는 국가가 지방에 세운 관학으로, 고을 규모에 따라 정원과 파견 교관이 달랐다.
- 생원·진사를 입학 자격으로 한 최고 학부는 성균관이다.
- 8, 9세부터 15, 16세 정도가 다닌 사립 초등 교육 기관은 서당이다.
- 국자학·태학·사문학 같은 유학부를 둔 것은 고려의 국자감이다.
| (가) 민족의 전통과 현실에 대한 관심이 깊어지는 가운데 실증적이며 비판적 역사 서술로 중국 중심의 역사관을 벗어날 것을 주장한 학자가 나타나기도 하였다. (나) 왕조의 정통성에 대한 명분을 밝히고 건국의 정당성을 밝히기 위하여 국가적 차원에서 역사서를 편찬하였는데 오늘날까지 전하고 있다. (다) 유교적 합리주의 사관에 기초하여 기전체로 서술한 삼국사기가 있다. (라) 민족적 자주의식을 바탕으로 전통문화를 올바르게 이해하려는 경향이 대두되었는데 대표적으로 이승휴의 제왕운기 등이 있다. |
(다) 고려 중기 『삼국사기』 → (라) 고려 후기 『제왕운기』 → (나) 조선 초기 국가 편찬 사서 → (가) 조선 후기 실학적 역사 서술 순이므로 (다)-(라)-(나)-(가)가 맞다.
『삼국사기』는 김부식이 유교적 합리주의 사관에 따라 기전체로 편찬하였고, 『제왕운기』는 원 간섭기 이승휴가 단군을 우리 역사의 시작으로 서술하였다.
- (나)는 조선 건국의 정당성을 밝히려 국가 차원에서 『고려사』 등을 편찬한 15세기의 경향이다.
- (가)는 안정복·한치윤 등이 실증적·비판적 서술로 중국 중심 역사관을 벗어나려 한 조선 후기의 경향이다.
| 한 가정의 생활을 유지하는 데 필요한 규모의 토지를 영업전으로 정한 다음, 영업전은 법으로 매매를 금지하고, 나머지 토지만 매매를 허용하자 |
영업전의 매매를 금지하고 나머지만 매매를 허용하자는 주장은 이익의 한전론이며, 이익은 나라를 좀먹는 여섯 가지 폐단(육두)으로 노비·과거·양반 문벌·사치와 미신·승려·게으름을 지적하였다.
이익은 성호학파를 이끈 중농학파 실학자이다.
- 생산과 소비를 우물물에 비유하며 소비를 권장한 것은 박제가이다.
- 수레·선박 이용과 화폐 유통, 영농 혁신·상업적 농업을 주장한 것은 박지원이다.
- 신분에 따라 차등 있게 토지를 재분배하자는 균전론을 주장한 것은 유형원이다.
| 오호라, 어떻게 하면 우리 이천만의 귀에 항상 애국이란 한 글자가 울리게 할까. 가로되 오직 역사로써 할지니라. 오호라, 어떻게 하면 우리 이천만의 눈에 항상 나라라는 한 글자가 배회하게 할까. 가로되 오직 역사로써 할지니라. -신채호- |
ㄱ. 이병도, 손진태에 의해 ‘진단학회’ 가 창립되었다.
ㄴ. <월남망국사>와 같은 외국의 망국사를 번역하였다.
ㄷ. ‘조선사편수회’ 에서 <조선사>를 편찬하였다.
ㄹ. <을지문덕전>과 같은 영웅들의 전기가 저술되었다.
신채호의 글은 역사를 통해 애국심을 고취하자는 애국 계몽기 민족주의 사학의 주장이므로, 이를 뒷받침하는 것은 ㄴ, ㄹ이다.
이 시기에는 『월남망국사』 같은 외국 망국사를 번역해 위기의식을 일깨우고, 『을지문덕전』 같은 영웅전을 저술해 민족의식을 고취하였다.
- 진단 학회는 1930년대 이병도·손진태 등이 창립한 실증 사학 단체로, 애국 계몽기의 민족주의 사학과 거리가 있다.
- 조선사편수회의 『조선사』 편찬은 일제의 식민 사학 작업이다.
| 효종이 인조의 적장자라면 어머니인 자의대비가 아들을 위해 3년복을 입어야 한다. 그러나 효종은 인조의 둘째 아들로 왕위에 올랐기 때문에 한 등급 내려 중자복인 1년복의 상복을 입어야 한다. |
효종이 둘째 아들이므로 자의대비가 1년복을 입어야 한다는 것은 기해예송 때 서인의 주장이며, 논쟁 결과 서인의 1년복(기년복)이 채택되었으므로 3년복이 채택되어 남인이 물러났다는 설명이 옳지 않다.
기해예송은 현종 즉위 직후 효종의 국상을 두고 벌어졌고, 남인은 3년복을 주장하였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 효종의 왕위 계승 정통성과 관련된 기해예송의 내용이다.
- 서인은 왕실 예법도 사대부와 같다고 보아 왕권과 신권의 차별성보다 보편성을 중시하였다.
- 서인은 숙종 때 경신환국 이후 남인 처벌 문제를 둘러싸고 노론과 소론으로 분열하였다.
ㄱ. “내 살림 내 것으로”라는 구호를 내걸고 민족 기업을 육성하여 경제 자립을 이루려는 운동이 일어났다.
ㄴ.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충칭에서 한국광복군을 창설하였다.
ㄷ. 조선어 연구회가 조선어 학회로 개편되면서 더욱 활발한 한글 보급 활동이 전개되었다.
ㄹ. 일제가 조선의 식민지적 토지소유관계를 공고히 하기 위하여 시행한 대규모의 국토조사사업이 실행되었다.
1910 1919 1937 1945
국권피탈 파리강화회의 중일전쟁 8·15광복 |
(가)는 파리 강화 회의(1919)와 중일 전쟁(1937) 사이이므로, 1920년대의 물산 장려 운동과 1931년 조선어 학회 개편인 ㄱ, ㄷ이 해당한다.
‘내 살림 내 것으로’는 평양에서 시작해 전국으로 확산된 물산 장려 운동의 구호이다.
-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한국광복군 창설(1940)은 중일 전쟁 이후의 일이다.
- 토지 조사 사업(1910~1918)은 1910년대 무단 통치기의 일이다.
ᄀ. 중국 한(漢)에 맞서 대항하다 왕검성이 함락되었다.
ᄂ. 요서 지방을 경계로 연나라와 대립할 만큼 강성하였다.
ᄃ. 위만이 왕검성에 쳐들어가 준왕을 몰아내었다.
ᄅ. 고조선의 8조법이 60여조로 증가하고 풍속도 각박해졌다.
고조선은 연과 대립할 만큼 성장한 뒤 위만이 집권하였고, 한의 공격으로 멸망한 뒤 한 군현 아래에서 법조항이 늘었으므로 ㄴ-ㄷ-ㄱ-ㄹ 순이 맞다.
기원전 4세기경 요서를 경계로 연과 대립하였고, 기원전 194년 위만이 준왕을 몰아내 위만 조선이 성립하였다.
- 기원전 108년 한의 공격으로 왕검성이 함락되어 고조선이 멸망하였다.
- 이후 한 군현이 설치되면서 8조법이 60여 조로 늘고 풍속이 각박해졌다.
세종은 공법을 제정해 토지 비옥도에 따른 전분 6등법과 풍흉에 따른 연분 9등법을 실시하였으므로 이 설명이 옳다.
공법은 토지 등급과 해마다의 작황을 함께 반영해 전세를 거두도록 한 제도이다.
- 평안도·함경도의 조세는 경창으로 보내지 않고 현지의 군사비·사신 접대비 등으로 쓰는 잉류 지역이었다.
- 현직 관리와 학생은 군역이 면제되었고, 서리·향리는 직역을 지는 대신 군역을 지지 않았다.
- 요역은 토지 8결당 1인을 기준으로 정남을 뽑아 동원하였다.

지도의 (가)는 공민왕이 무력으로 되찾은 쌍성총관부 지역이므로, 같은 시기의 일인 정동행성 이문소 혁파가 옳은 설명이다.
공민왕은 원의 쇠퇴를 틈타 반원 자주 정책을 펴, 친원 세력을 숙청하고 내정 간섭 기구였던 정동행성 이문소를 없앴으며, 화주의 쌍성총관부를 공격해 철령 이북의 땅을 수복하였다.
- 주현공부법은 고려 초 광종 때 주현 단위로 공물과 부역의 액수를 정한 제도로, 공민왕 대와 거리가 멀다.
- 윤관의 건의로 별무반이 창설된 것은 여진 정벌을 준비하던 숙종 때이다.
- 다루가치가 파견되어 내정에 간섭한 것은 몽골 침입과 원 간섭기 초기의 일로, 반원 정책을 편 공민왕 대와 반대되는 상황이다.
| (가) 법성은 원융하여 두 모습이 없으니 모든 불법은 부동하여 본래 고요하다. ···하나 안에 일체이며, 모두 안에 하나이다. 하나가 곧 일체이며 모두가 곧 하나이다. 하나의 작은 먼지 안에 모든 방향을 포함하고 일세의 먼지 안에 역시 이와 같다. (나) ···열면 헬 수 없고 가없는 뜻이 대종(大宗)이 되고, 합하면 이문(二門) 일심(一心)의 법이 그 요차가 되어 있다. 그 이문 속에 만 가지 뜻이 다 포용되어 조금도 혼란됨이 없으며 가없는 뜻이 일심과 하나가 되어 혼융된다. |
(가)는 ‘하나가 곧 일체’를 말한 의상, (나)는 ‘일심’과 ‘이문’을 말한 원효이며, 현세의 고난 구제를 바라는 관음 신앙을 이끈 것은 원효가 아니라 의상이므로 이 설명이 옳지 않다.
원효는 ‘나무아미타불’만 외우면 극락에 갈 수 있다는 아미타 신앙으로 불교 대중화에 힘썼다.
- 의상은 『화엄일승법계도』를 저술해 화엄 사상을 정립하였다.
- 의상은 영주 부석사를 비롯한 여러 사찰을 세웠다.
- 원효는 『십문화쟁론』에서 여러 종파의 사상적 대립을 조화시키려 하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