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가) 허정을 수반으로 하는 과도 정부가 수립되어, 내각 책임제와 양원제를 골자로 하는 헌법으로 개정하였다. (나) 일본의 사과와 정당한 보상을 요구하는 시민, 학생들의 격렬한 반대를 억누르고 정부는 한ㆍ일 국교를 정상화하였다. (다) 정부는 동유럽 공산주의 국가 및 소련, 중국과 외교 관계를 수립하는 북방 정책을 추진하였고, 유엔에 남북한이 함께 가입하는 성과를 올렸다. |
시간 순서는 허정 과도 정부(1960) → 한·일 국교 정상화(1965) → 북방 외교와 남북한 유엔 동시 가입(1991)이다.
4·19 혁명으로 이승만 정부가 무너진 뒤 허정 과도 정부가 내각 책임제·양원제 개헌을 하였고, 박정희 정부는 6·3 시위를 억누르고 한·일 협정을 체결하였다.
- 북방 정책과 남북한 유엔 동시 가입은 노태우 정부 때의 일로 셋 중 가장 늦다.
- 한·일 국교 정상화는 장면 정부 이후 집권한 박정희 정부 때이므로 허정 과도 정부보다 앞설 수 없다.
| (가) “토지 1결마다 2번에 걸쳐 8두씩 거두어 본청에 수납하고, 본청은 그 때의 물가 시세를 보아 쌀로써 공인에게 지급하여 수시로 물건을 납부하게 하소서.”라고 하니, 임금(광해군)이 이에 따랐다. (나) 감면한 것을 계산하면 모두 50여 만 필에 이른다. 돈으로 계산하면 1백여 만 냥이다. 아문과 군대의 비용을 줄인 것이 50여 만 냥이다. 부족한 부분은 어세, 염세, 선세와 선무군관에게 받은 것, 은여결에서 받아들이는 것으로 충당하였는데, 모두 합하면 십 수만 냥이다. |
(가)는 대동법으로, 공인이 관청 물품을 조달하면서 상품 화폐 경제가 한층 발전하였다.
'토지 1결마다' 쌀을 거두어 '공인에게 지급'한다는 데서 대동법, '감면한 것이 50여 만 필', '어세·염세·선세', '선무군관'에서 (나)가 영조의 균역법임을 알 수 있다.
- 전세를 1결당 일정액으로 고정한 것은 인조 때의 영정법이다.
- 공납을 토지 결수에 따라 쌀 등으로 내게 한 공납의 전세화는 대동법의 성격이다.
- 양반도 군포를 내게 한 것은 흥선 대원군의 호포제이며, 균역법은 군포를 1필로 줄이고 부족분을 결작·잡세 등으로 메웠다.
| 제1조 본법은 헌법에 의거하여 농지를 농민에게 적절히 분배함으로써 농가 경제의 자립과 농업 생산력의 증진으로 인한 농민 생활의 향상 내지 국민 경제의 균형과 발전을 기함을 목적으로 한다. 제5조 1. 법령 및 조약에 의하여 몰수 또는 국유로 된 농지, 소유권의 명의가 분명치 않은 농지는 정부에 귀속한다. 2. 농가 아닌 자의 농지, 자경 하지 않는 자의 농지, 3정보를 초과하는 부분의 농지, 과수원 등 다년성 식물 재배 토지를 3정보 이상 자영하는 자의 소유인 다년생 식물 재배 이외의 농지는 정부가 매수한다. 제12조 농지의 분배는 농지의 종목, 등급 및 농가의 능력 기타에 기준한 점수제에 의거하되 1가구당 총 경영 면적 3정보를 초과하지 못한다. |
북한의 토지 개혁(1946)이 남한 농지 개혁법(1949)보다 먼저 시행되었으므로, 이 법안이 북한 토지 개혁에 영향을 끼쳤다는 설명은 옳지 않다.
'농지를 농민에게 분배', '3정보를 초과하는 부분의 농지는 정부가 매수'라는 조항으로 보아 이승만 정부의 농지 개혁법이다. 북한은 무상 몰수·무상 분배 방식이었다.
- 제헌 국회에서 제정되어 이승만 정부가 추진한 개혁 법안이다.
- 정부가 지주의 농지를 사들여 농민에게 값을 받고 나누어 주는 유상 매수·유상 분배 방식이었다.
- 농가 경제의 자립을 내세워 자영농을 육성하려는 목적이었다.
| (가) ㆍ청에 잡혀간 흥선대원군을 곧 돌아오게 하며, 종래의 청에 대하여 행하던 조공의 허례를 폐지한다. ㆍ지조법을 개혁해 관리의 부정을 막고 백성을 보호하며, 국가 재정을 넉넉하게 한다. ㆍ혜상공국을 혁파한다. ㆍ대신과 참찬은 의정부에 모여 정령을 의결하고 반포한다. (나) ㆍ외국인에게 기대하지 아니하고 관민이 동심 협력하여 전제 황권을 공고히 할 것. ㆍ국가 재정은 탁지부에서 모두 관리하고 예산, 결산을 국민에게 공포할 것. ㆍ지방관을 임명할 때에는 정부에 그 뜻을 물어 중의에 따를 것. ㆍ중대 범죄를 공판하되, 피고의 인권을 존중할 것. |
(가) 갑신정변은 민씨 정권의 요청으로 출병해 있던 청군의 개입으로 3일 만에 실패하였다.
'흥선대원군을 곧 돌아오게', '혜상공국 혁파'는 갑신정변 14개조 정강이고, '전제 황권을 공고히', '탁지부에서 모두 관리'는 독립협회가 관민 공동회에서 결의한 헌의 6조이다.
- 갑신정변 정강은 입헌 군주제적 개혁을 지향하였으며 민주 공화국 수립을 목표로 하지 않았다.
- 화폐 정리 사업(1905)은 독립협회가 해산(1898)된 뒤의 일이다.
- 독립협회는 고종의 해산 명령과 황국 협회의 습격으로 타격을 받았으며, 흥선 대원군의 재집권과는 관련이 없다.
| 지난 2년 간 미국은 얄타 협정을 실천하는 방도에 관하여 소련과 합의를 통해 한국을 독립시키고자 노력하여 왔으나 한국 독립 과업은 2년 전에 비해 추호도 진전된 것이 없다. 미․소 양군 점령 지구 간에는 38도선을 경계로 물자 교류 및 교통 왕래가 거의 두절된 상태이며 이로 말미암아 한국의 경제는 불구 상태에 빠졌는데, 이와 같은 상태를 계속 용인할 수 없다. 서울에서 두 차례 개최한 미․소 공동 위원회는 합의를 보지 못하고 있는 형편이므로 더 이상 미․소 양국의 교섭에 의하여 한국 문제를 해결하려는 기도는 다만 한국의 독립을 지연시킬 뿐이다. |
자료는 미·소 공동 위원회가 결렬되자 미국이 한국 문제를 유엔에 이관하려 한 1947년의 상황이며, 그 직후 한반도 문제가 유엔 총회로 넘어갔다.
'서울에서 두 차례 개최한 미·소 공동 위원회는 합의를 보지 못하고'라는 표현이 단서로, 유엔 총회는 이어 인구 비례에 의한 남북한 총선거를 결의하였다.
- 남북 지도자 회의(남북 협상)는 유엔 소총회의 남한 단독 선거 결정에 반발해 1948년에 열린 것으로, 유엔 이관 다음 단계이다.
- 모스크바 3국 외상 회의(1945)는 미·소 공동 위원회 개최의 출발점이므로 자료보다 앞선다.
- 좌우 합작 운동은 제1차 미·소 공동 위원회 휴회 뒤인 1946년에 시작되었으므로 자료 이전의 일이다.
| 국권 피탈 이후 많은 한국인이 이곳으로 이주하였다. 일제가 만주 침략에 이어 중․일 전쟁을 도발하자 일본군이 이곳을 침략하기 위해 한국인을 첩자로 이용한다는 소문이 떠돌기 시작했고 이것이 강제 이주의 구실이 되었다. 이곳의 한인들은 두 달 동안 곡식 씨앗과 옷가지, 책꾸러미들만을 보따리에 싸든 채 화물 열차에 실려 중앙 아시아로 끌려갔다. |
ㄱ. 성명회 조직 ㄴ. 대한 국민 의회 조직
ㄷ. 대조선 국민군단 창설 ㄹ. 대한 광복군 정부 결성
'이곳'은 1937년 한인이 중앙아시아로 강제 이주당한 연해주이며, 성명회·대한 국민 의회·대한 광복군 정부가 이곳에서 활동하였다.
'화물 열차에 실려 중앙 아시아로 끌려갔다'는 대목이 스탈린 정권의 연해주 한인 강제 이주를 가리킨다.
- 성명회는 국권 피탈 무렵 연해주에서 조직되어 한·일 병합 반대 성명을 발표하였다.
- 대한 국민 의회는 3·1 운동 직후 연해주에서 조직된 임시 정부 성격의 단체이다.
- 대한 광복군 정부는 권업회를 바탕으로 연해주에서 결성되었다.
- 대조선 국민군단은 박용만이 하와이에서 창설한 것이므로 연해주와 관련이 없다.
| 제1조 다음의 각호에 해당하는 자는 구류 또는 과료에 처한다. 2. 일정한 주거 또는 생업 없이 이곳 저곳 배회하는 자 8. 단체 가입을 강요하는 자 14. 신청하지 않은 신문, 잡지, 기타의 출판물을 배부하고 그 대금을 요구하거나 억지로 그 구독 신청을 요구하는 자 20. 불온한 연설을 하거나 또는 불온 문서, 도서, 시가(詩歌)를 게시, 반포, 낭독하거나 큰 소리로 읊는 자 21. 남을 유혹하는 유언비어 또는 허위 보도를 하는 자 -『조선 총독부 관보』- |
| 제1조 3월 이하의 징역 또는 구류에 처하여야 할 자는 그 정상에 따라 태형에 처할 수 있다. 제6조 태형은 태로서 볼기를 치는 방법으로 집행한다. 제11조 태형은 감옥 또는 즉결 관서에서 비밀리에 집행한다. 제13조 본령은 조선인에 한하여 적용한다. -『조선 총독부 관보』- |
제시된 법령은 경범죄 처벌 규칙과 조선 태형령으로 1910년대 무단 통치기의 것이며, 이 시기에는 대한 독립 의군부·대한 광복회 같은 비밀 결사가 활동하였다.
'태형에 처할 수 있다', '본령은 조선인에 한하여 적용한다'는 조항이 헌병 경찰을 앞세운 무단 통치의 상징이며, 태형령은 3·1 운동 이후 폐지되었다.
- 한인 애국단의 이봉창·윤봉길 의거는 1930년대 초의 일이다.
- 한국 광복군 창설과 대일 선전 포고는 1940년대 초의 일이다.
- 언론 기관과 조선어 학회의 문자 보급·문맹 퇴치 운동은 1920~1930년대의 일이다.
| 이 무덤은 1971년 공주 송산리 고분군의 배수로 공사 중에 우연히 발견되었다. 그래서 무덤의 봉토가 드러난 다른 무덤과는 달리, 완전한 형태로 빛을 보게 되었다. 무덤의 안에서는 지석이 발견되어 무덤의 주인공이 누구인지를 정확히 알려주고 있다. 또한, 왕과 왕비의 장신구와 금관 장식, 귀고리, 팔찌 등 껴묻거리가 출토되어 백제 미술의 귀족적 특성을 알려준다. 아울러 무덤의 연도 입구에서는 진묘수가 발견되었다. |
'이 무덤'은 공주 송산리에서 지석과 함께 발견된 무령왕릉으로, 중국 남조의 영향을 받아 연꽃무늬 벽돌로 내부를 쌓은 벽돌무덤이다.
'지석이 발견되어 무덤의 주인공이 누구인지 정확히 알려준다', '진묘수'가 단서로, 무령왕릉은 백제와 남조의 교류를 보여 준다.
- 말다래에 천마를 그린 천마도는 신라의 돌무지덧널무덤인 천마총에서 나왔다.
- 돌로 방을 만들고 통로를 연결한 것은 굴식 돌방무덤으로, 벽돌무덤인 무령왕릉과 양식이 다르다.
- 봉토 둘레에 둘레돌을 두르고 12지 신상을 새긴 것은 통일 신라 무덤의 특징이다.
| (가) 에는 대군장(大君長)이 없고 … 후(侯)․읍군(邑君)․삼로(三老)의 관직이 있어서 하호(下戶)를 통치하였다. … 언어와 예절 및 풍속은 대체로 고구려와 같지만 의복은 다르다. … 풍속은 산천을 중요시하여 산과 내마다 각기 구분이 있어 함부로 들어가지 않는다. 동성끼리는 결혼하지 않는다. … 해마다 10월이면 하늘에 제사를 지내는데 … 주야로 술 마시며 노래 부르고 춤춘다. <삼국지> |
(가)는 동예이며, 다른 부족의 영역을 침범하면 노비·소·말로 갚게 하는 책화의 풍습이 있었다.
'대군장이 없고 후·읍군·삼로', '산과 내마다 구분이 있어 함부로 들어가지 않는다', '동성끼리는 결혼하지 않는다', '10월 하늘에 제사'(무천)가 동예의 단서이다.
- 동예는 왕이 없이 읍군·삼로 같은 군장이 다스린 단계로, 연맹 왕국으로 발전하지 못하였다.
- 수렵 사회의 전통을 이은 제천 행사는 12월에 열린 부여의 영고이다.
- 하호는 생산을 담당한 일반 백성(평민)이며, 주인에게 예속된 천민층은 노비이다.
| (가) 제1조 대한 제국 정부는 대일본 제국 정부가 추천한 일본인 1명을 재정 고문에 초빙하여 재무에 관한 사항은 모두 그의 의견을 들어 시행할 것. (나) 제4조 제3국의 침해 또는 내란으로 대한 제국 황실의 안녕과 영토의 보전에 위험이 있을 경우에는 대일본 제국 정부는 곧 필요한 조치를 취할 것이며, …… 대일본 제국 정부는 전항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하여 전략상 필요한 지점을 수시로 사용할 수 있다. (다) 각서제3-1. 육군 1대대를 존치하여 황궁 수위를 담당하게 하고 기타 부대는 해체한다. 제5. 중앙 정부 및 지방청에 일본인을 한국 관리로 임명함. |
세 조약의 실제 체결 순서는 한·일 의정서(나) → 제1차 한·일 협약(가) → 한·일 신협약 부속 각서(다)이므로, (가)-(나)-(다) 순서라는 설명은 옳지 않다.
'전략상 필요한 지점을 수시로 사용'은 러·일 전쟁 직후의 한·일 의정서, '재정 고문에 초빙'은 고문 정치를 연 제1차 한·일 협약, '황궁 수위 1대대 외 해체'는 정미 7조약 부속 각서의 군대 해산 조항이다.
- 제1차 한·일 협약은 러·일 전쟁에서 일본이 우세해지자 고문을 두어 내정 간섭을 강화한 것이다.
- 한·일 의정서는 대한 제국의 국외 중립 선언을 무시하고 강제로 체결되었다.
- 군대 해산 각서는 헤이그 특사 사건으로 고종이 강제 퇴위된 뒤 체결된 한·일 신협약(정미 7조약)에 딸린 것이다.
| 구 분 | (가) 붕당 | (나) 붕당 |
| 효종 복상기간(1차) (기해 예송) | 3년 | 1년 |
| 효종비 복상기간(2차) (갑인 예송) | 1년 | 9개월 |
| 근 거 | 국조오례의 | 주자가례 |
| 정치적 입장 | 왕권 강화 | 신권 강화 |
(나)는 서인으로, 광해군을 몰아낸 인조반정을 주도하였다.
기해 예송에서 효종의 복상을 3년으로 주장하고 왕권 강화를 내세운 (가)는 남인, 1년(기년)을 주장하고 신권 강화를 내세운 (나)는 서인이다.
- 이이의 학맥을 계승한 것은 서인이며, 남인은 이황의 학맥을 이었다.
- 노론과 소론으로 나뉜 것은 서인이다.
- 정여립 모반 사건(기축옥사)을 계기로 남인과 북인으로 갈라진 것은 동인이다.
왕
상서성
중추원
어사대
삼사
도병마사
식목도감
ㄱ. 발해의 중정대와 같은 기능을 하는 기구가 있다.
ㄴ. 도병마사는 재신과 추밀이 함께 모여 회의하는 곳이다.
ㄷ. 어사대는 중서문하성의 낭사와 더불어 대간으로 불렸다.
ㄹ. 삼사의 언론은 고관은 물론 왕이라도 함부로 막을 수 없었다.
고려 중앙 정치 제도에 대한 옳은 설명은 어사대의 감찰 기능, 도병마사의 구성, 대간 제도에 관한 것 세 가지이다.
도병마사는 중서문하성의 재신과 중추원의 추밀이 모여 국방·군사 문제를 논의하던 회의 기구였다.
- 관리를 감찰하는 어사대는 발해의 중정대와 같은 기능을 하였다.
- 어사대 관원과 중서문하성의 낭사는 함께 대간으로 불리며 간쟁·봉박·서경권을 행사하였다.
- 고려의 삼사는 화폐와 곡식의 출납·회계를 맡은 기구로, 왕도 막을 수 없는 언론 기능을 한 것은 조선의 삼사이다.
| (가) 정치와 외교도 교육을 기다려서 비로소 그 효능을 다 할 것이요. 산업도 교육을 기다려서 비로소 그 작흥(作興)을 기할 것이니, 교육은 우리들의 진로를 개척함에 있어서 유일한 방편이요, 수단임이 명료하다. 그런데 교육에도 단계와 종류가 있어서 …(중략)… 사회 최고의 비판을 구하며, 유위유능(有爲有能)의 인물을 양성하려면 최고 학부의 존재가 가장 필요하도다. (나)의복은 우선 남자는 두루마기, 여자는 치마를 음력 계해 정월 1월부터 조선인 산품 또는 가공품을 염색하여 착용할 것이며, 일용품은 조선인 제품으로 대응하기 가능한 것은 이를 사용할 것 |
(가) 민립 대학 설립 운동과 (나) 물산 장려 운동이 성과를 거두지 못하자 일부 민족주의자 사이에서 자치론(타협적 민족주의)이 대두하였으므로, 비타협적 민족 운동이 강화되었다는 설명은 옳지 않다.
'최고 학부의 존재가 가장 필요하도다'는 민립 대학 설립 운동, '조선인 산품'을 입고 쓰자는 것은 물산 장려 운동으로, 모두 1920년대 실력 양성 운동이다.
- 일제는 경성 제국 대학을 세워 민립 대학 설립 운동을 무력화하였다.
- 물산 장려 운동은 조만식 등이 평양에서 시작해 전국으로 확산되었다.
- 두 운동은 실력을 길러야 생존할 수 있다는 사회 진화론의 입장에 서 있었다.
| (가) 그는 유불 일치설을 주장하며 심성의 도야를 강조하여 장차 성리학을 수용할 수 있는 사상적 토대를 마련하기도 하였다. (나) 그는 ‘내가 곧 부처’라는 깨달음을 위한 노력과 함께, 꾸준한 수행으로 깨달음의 확인을 아울러 강조한 돈오점수를 주장하였다. (다) 그는 화엄 사상을 바탕으로 교단을 형성하여 많은 제자를 양성하고, 부석사를 비롯한 여러 사원을 건립하여 불교 문화의 폭을 확대하였다. (라) 그는 흥왕사를 근거지로 삼아 화엄종을 중심으로 교종을 통합하려 하였으며, 또 선종을 통합하기 위하여 국청사를 창건하여 천태종을 창시하였다. |
시대 순서는 의상(통일 신라) → 의천(고려 중기) → 지눌(고려 무신 집권기) → 혜심이다.
'부석사', '화엄 사상'은 의상, '흥왕사', '국청사', '천태종'은 의천, '돈오점수'는 지눌, '유불 일치설'은 지눌의 제자 혜심이다.
- 의상은 7세기 통일 신라의 승려로 넷 중 가장 앞선다.
- 의천은 11세기 문종의 아들로, 무신 집권기의 지눌보다 앞선다.
- 혜심은 지눌의 뒤를 이어 수선사를 이끌었으므로 지눌보다 뒤이다.
| ◦농민군 이끌고 고부 관아 습격 → 군수 추방, 아전 징벌 ◦정부, 안핵사로 이용태 파견 → 동학농민군 탄압 | (가) ⇨ | ◦6조를 8아문으로 개편 ◦과거제 폐지 ◦은본위화폐제실시 ◦도량형 통일 | (나) ⇨ | ◦태양력 사용 ◦종두법 시행 ◦소학교 설치 ◦‘건양’이라는 새연호 사용 |
(가) 시기, 곧 고부 농민 봉기 이후 제1차 갑오개혁 이전에는 정부가 교정청을 설치해 자주적 개혁을 시도하였다.
(가)는 고부 봉기(1894년 초)부터 '6조를 8아문으로', '과거제 폐지'의 제1차 갑오개혁까지, (나)는 그 이후부터 '태양력', '건양' 연호의 을미개혁까지이다. 교정청은 전주 화약 뒤 농민의 요구를 반영하려 설치되었다.
- 러시아·프랑스·독일의 삼국 간섭은 청·일 전쟁이 끝난 1895년의 일로 (나) 시기에 해당한다.
- 단발령은 을미개혁 때 공포되었고 이에 반발한 을미의병은 그 뒤에 일어났으므로 (나) 시기에 들지 않는다.
- 영국의 거문도 불법 점령(1885~1887)은 동학 농민 운동보다 훨씬 앞선다.
친영제도가 정착한 조선 후기에는 장자 중심의 제사가 굳어져 장남 이외의 아들은 제사 권리를 잃어 갔다.
신랑이 신부를 맞아 본가에서 혼례를 올리는 친영제는 성리학적 종법 질서가 확산된 17세기 이후 정착하였으며, 이와 함께 부계 중심 가족 제도가 강화되었다.
- 여성의 재가가 비교적 자유로웠던 것은 고려 시대의 모습이다.
- 자녀를 연령순으로 호적에 기재한 것은 고려~조선 전기의 관행이며, 후기에는 아들을 먼저 기재하였다.
- 제사를 잇는 자식에게 5분의 1을 더 주고 나머지는 균분한 것은 조선 전기의 상속 관행이며, 후기에는 장자 우대 상속이 일반화되었다.
| (가) | (나) | (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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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는 비파형 동검, (나)는 미송리식 토기로, 둘 다 탁자식 고인돌과 함께 우리 민족이 최초로 세운 국가인 고조선의 문화 범위를 보여 주는 대표 유물이다.
(다)는 밑이 뾰족하고 표면에 빗살 모양 무늬를 새긴 빗살무늬 토기로 신석기 시대 유물이다.
- 한반도 안에서 독자적으로 발전한 청동기 형태는 세형동검(한국식 동검)이며, 비파형 동검은 요령 지방을 중심으로 분포한다.
- 애니미즘·토테미즘 같은 원시 신앙은 신석기 시대에 등장했으나, 미송리식 토기는 청동기 시대에 제작되었다.
- 주춧돌을 사용한 지상 가옥화는 청동기 시대 이후의 특징이고, 빗살무늬 토기는 신석기 시대 강가·해안의 움집 터에서 주로 출토된다.
| ◦ 질문 : 산미 증식 계획을 실시하는 과정에서 쌀 생산은 늘어났는데 한국 농민의 생활은 오히려 궁핍해졌습니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요? ◦ 답변 : 여러 요인이 있는데, 그중 하나는 (가) 때문입니다. |
산미 증식 계획 과정에서 수리 조합비와 비료 대금 등 증산 비용이 농민에게 전가되어 생활이 궁핍해졌다.
늘어난 쌀보다 더 많은 양이 일본으로 반출되었고, 증산 비용 부담까지 겹치면서 소작농은 몰락하고 국내 1인당 쌀 소비량은 오히려 줄었다.
- 토지 조사 사업은 1910년대에 실시되어 산미 증식 계획보다 앞선 정책이다.
- 미곡 공출 제도는 중·일 전쟁 이후 전시 체제에서 시행된 것으로 산미 증식 계획 시기보다 뒤이다.
- 만주산 잡곡 수입은 쌀 유출로 부족해진 식량을 메우기 위한 것으로, 궁핍의 원인이 아니라 결과에 가깝다.

9세기 전반 한반도 남부의 (가)는 통일 신라, 만주와 한반도 북부의 (나)는 발해이며, 통일 신라는 지방군으로 10정을 두되 국경 지대인 한주(한산주)에만 2정을 배치하였다.
통일 신라는 중앙군 9서당과 지방군 10정을 갖추었고, 발해는 당의 제도를 받아들이되 독자적으로 운영하였다.
- 당의 영향을 받은 3성 6부(정당성·선조성·중대성) 체제는 발해의 중앙 제도이다.
- 지방 세력을 통제하기 위한 상수리 제도는 통일 신라가 실시한 제도이다.
- 군사·행정상 요지에 5소경을 두고 장관으로 사신을 파견한 것은 통일 신라이며, 발해는 5경을 두었다.
| (가) 헌정 연구회를 모체로 설립된 단체로 독립을 위해 ‘자강(自强)’을 주장하였다. 자강의 방법으로는 교육을 진작하고 산업을 일으켜 흥하게 하는 것이라 강조하였으며, 전국 각지에 지회를 설치하고 월보의 간행과 강연회를 개최하였다. (나) 안창호, 양기탁 등이 중심이 되어 회원 800여명이 참여하여 결성된 단체로 평양에 대성학교와 정주에 오산 학교를 세워 민족 교육을 실시하였다. 또한 평양에 자기 회사를 운영하여 민족 자본 육성에도 힘썼다. |
(가) 대한 자강회는 통감부 설치 반대가 아니라 교육·산업 진흥을 통한 자강을 목적으로 설립되었으므로, 이 설명이 옳지 않다.
'헌정 연구회를 모체로', '자강', '월보 간행'은 대한 자강회, '안창호, 양기탁', '대성 학교', '오산 학교', '자기 회사'는 비밀 결사 신민회이다.
- 대한 자강회는 고종 강제 퇴위와 정미 7조약 체결 반대 운동을 벌이다 해산당하였다.
- 신민회는 국권 회복과 함께 공화 정체의 근대 국민 국가 건설을 목표로 하였다.
- 신민회는 국외 독립군 기지 건설에 나서 국내 계몽 운동의 한계를 극복하는 데 기여하였다.

빗금 친 곳은 압록강 하구 동쪽의 평안북도 서부(용천 일대)로, 정묘호란 때 정봉수가 의병을 일으켜 용골산성에서 후금군을 물리친 지역이다.
정묘호란(1627) 당시 후금군의 침입로인 평안도 일대에서는 정봉수·이립 등의 의병이 활약하였다.
- 나·당 전쟁 중 신라가 당의 20만 대군을 격파한 매소성은 임진강 유역(지금의 경기도 연천 일대)으로 추정된다.
- 김윤후가 살리타를 사살한 처인성 전투는 경기도 용인에서 벌어졌다.
- 신돌석은 경상북도 영해를 중심으로 강원·경북 동해안 일대에서 활약한 평민 의병장이다.
| ‘신인 일치(神人一致)로 중외 협응(中外協應)하야 한성(漢城)에서 의(義)를 일으킨 이래 30여 일간에 평화적 독립을 3백여 주에 광복하고, … 항구히 자주 독립의 복리로 아(我) 자손 여민(子孫黎民)에게 세전(世傳)하기 위해 임시 의정원의 결의로 임시 헌장을 선포하노라’ |
자료는 1919년 대한민국 임시 정부의 임시 헌장으로, 3·1 운동이라는 거족적 민족 운동 이후 독립운동을 조직적으로 이끌 필요에서 발표되었다.
'한성에서 의를 일으킨 이래 30여 일간', '임시 의정원의 결의로 임시 헌장을 선포'라는 표현이 3·1 운동 직후 상하이 임시 정부 수립을 가리킨다.
- 자치론을 경계한 민족 협동 전선 운동은 1920년대 중반 신간회 결성으로 이어진 흐름이다.
- 중·일 전쟁 이후 무장 세력 결집은 1930년대 후반의 일이다.
- 창조파와 개조파의 갈등은 임시 정부 수립 이후 1923년 국민 대표 회의에서 벌어졌다.
| 신돈이 전민변정도감을 두기를 청하였다. 스스로 판사(장관)가 되어 전국에 알렸다. “요즈음 기강이 크게 무너져서 탐욕스러움이 풍속으로 되었다. 종묘·학교·창고·사사·녹전·군수의 땅은 백성이 대대로 지어온 땅이나 권세가들이 거의 다 뺏었다. 돌려주라고 판결한 것도 그대로 가지며 양민을 노예로 삼고 있다. (줄임) 이제 그 잘못을 알고 스스로 고치는 자는 묻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기한을 지났는데도 고치지 않고 있다가 발각되면 조사하여 엄히 다스릴 것이다.” -『고려사』- |
공민왕 때 신돈이 설치한 전민변정도감은 권문세족이 빼앗은 토지와 노비를 되돌려 국가 재정 수입 기반을 확대하려는 것이었다.
'권세가들이 거의 다 뺏었다', '양민을 노예로 삼고 있다'는 대목처럼, 불법 점탈한 토지를 원주인에게 돌려주고 억울하게 노비가 된 자를 양민으로 회복시켜 조세·역 부담층을 늘리고자 하였다.
- 관수관급제는 조선 성종 때 직전법의 폐단을 줄이려 시행한 제도이다.
- 전시과는 고려 경종 때 처음 실시된 토지 제도로 공민왕 대 개혁과 시기가 다르다.
- 지방 호족 세력의 약화는 고려 초기 광종 등의 정책 목표이며, 전민변정도감의 대상은 권문세족이었다.
| ◦재물정사(財物政事)는 비유컨대 사람의 온몸의 피와 맥과 같으니 그 혈맥을 보호하여 기르는 것은 각각 자기들에게 있지 남이 보호하여 주고 길러주지 못한다. ◦국내에 금․은․석탄광이 있으면 마땅히 스스로 취하여 그 이익을 얻을 것이지 하필 외국에 넘겨 본국은 날로 가난케 하고 타인으로 하여금 부강케 하리오. ◦대한 토지는 선왕의 크신 업이요 1천 2백만 인구의 사는 땅이니 한 자, 한 치라도 다른 나라 사람에게 빌려주면 이는 곧 선왕의 죄인이요 1천 2백만 동포 형제의 원수이다. |
ㄱ. 일본이 황무지 개간권을 요구하였다.
ㄴ. 러시아가 절영도의 조차를 요구하였다.
ㄷ. 프랑스와 독일이 광산 채굴권을 요구하였다.
ㄹ. 일본이 시설개선의 명목으로 차관을 제공하였다.
자료는 독립협회의 이권 수호 주장으로, 그 배경은 러시아의 절영도 조차 요구와 프랑스·독일의 광산 채굴권 요구이다.
'한 자, 한 치라도 다른 나라 사람에게 빌려주면'은 절영도 조차 반대, '금·은·석탄광'을 외국에 넘기지 말자는 것은 열강의 광산 이권 요구 반대를 가리킨다.
- 일본의 황무지 개간권 요구(1904)는 독립협회 해산 뒤의 일로, 보안회가 반대 운동을 벌였다.
- 일본의 시설 개선 명목 차관 제공은 통감부 시기의 일로, 이에 맞서 국채 보상 운동이 일어났다.
| ◦ 윤관이 별무반을 이끌고 동북 지방 일대에 9성을 쌓았다. ↓(가) ↓ ◦ 금이 군신 관계를 요구해 오자 이자겸이 그 요구를 받아들였다. ↓ (나) ↓ ◦ 몽골이 금을 공격한 후 고려를 침공하였다. |
(나) 시기에는 묘청이 서경 천도 운동(1135)을 일으켰다.
윤관의 동북 9성 축조는 12세기 초, 이자겸의 금에 대한 사대 수용은 1126년, 몽골의 고려 침공은 1231년이므로 (나)는 1126년부터 1231년 사이이다.
- 서희의 외교 담판으로 강동 6주를 확보한 것은 거란의 1차 침입(993) 때로 9성 축조보다 앞선다.
- 강감찬의 귀주 대첩(1019)도 9성 축조보다 앞선다.
- 삼별초의 대몽 항쟁은 개경 환도(1270) 이후로 몽골 침공보다 뒤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