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가)남치근이 많은 군마를 이끌고 산 아래로 접근하며 1명도 내려오지 못하게 하니 적의 모사꾼 서림이 산에서 내려와 항복하였다. 군사를 몰아 숲을 샅샅이 뒤지며 올라가니 여러 적이 다 항복하되 대여섯 명이 꺽정을 따르므로 서림을 시켜 유인하여 다 죽였다. (나)홍경래는 괴수요, 우군칙은 참모였으며, 이희저는 소굴의 주인이요, 김창시는 선봉이었다. 김사용과 홍총각은 손발의 역할을 하였다. 그 졸개로는 의주부터 개성에 이르는 지역의 거의 대부분 부호ㆍ대상들이 망라되었다. (다)사노 만적 등 6인이 북산에서 나무하다가 공사 노비들을 불러 모의하였다. “요즈음 고관이 천민과 노비에서 많이 나왔다. 장수와 재상이 어찌 씨가 따로 있으랴, 때가 오면 누구나 할 수 있다. 우리가 왜 근육과 뼈를 괴롭게 하며 채찍 밑에서 고통을 겪어야 하는가?” 여러 노비가 그렇게 여겼다. |
(나)는 홍경래의 난으로, 세도 정치기 지배층의 수탈과 서북민(평안도민) 차별이 봉기의 원인이었다.
(가)는 명종 때 '꺽정'·'서림'이 나오는 임꺽정의 난, (다)는 고려 무신 집권기 최충헌의 사노 '만적'이 일으킨 만적의 난이다.
- 진주에서 시작되어 전국으로 번진 농민 항쟁은 철종 때의 임술 농민 봉기로, 임꺽정의 난과 무관하다.
- 만적의 난은 신분 해방을 내세운 고려 노비 봉기로, 천주교 평등 사상은 조선 후기에 전래되었다.
- 발생 순서는 고려의 만적의 난 → 16세기 임꺽정의 난 → 19세기 홍경래의 난이므로 (가)-(나)-(다) 순이 아니다.
| 제2조중국 상인이 조선 항구에서 만일 개별적으로 신소(伸訴)를 제기하였을 경우에는 중국 상무위원에 넘겨 심의ㆍ처리한다.…(후략)… 제4조…(전략)… 조선 상인이 북경(北京)에서 규정에 따라 물건을 팔고 사도록 하며 중국 상인이 조선의 양화진과 서울에 들어가서 영업소를 차려놓을 수 있도록 허락하는 외에 각종 화물을 내륙 지방으로 운반하여 상점을 차려놓고 파는 것은 승인하지 않는다. |
1876 1882 1884 1894 1896
| (가) | (나) | (다) | (라) |
강화도조약 임오군란 갑신정변 청ㆍ일전쟁 아관파천
제시된 조약은 조·청 상민 수륙 무역 장정으로, 임오군란(1882) 직후 청이 내정 간섭을 강화하며 체결했으므로 임오군란과 갑신정변(1884) 사이에 해당한다.
'중국 상무위원'의 재판권(치외법권)과 청 상인의 '양화진과 서울' 영업 허용이 단서이다.
- 강화도 조약과 임오군란 사이는 조·일 무역 규칙, 조·미 수호 통상 조약 등이 체결된 시기로 장정 체결 이전이다.
- 갑신정변과 청·일 전쟁 사이는 한성 조약·톈진 조약, 방곡령 사건이 있던 시기이다.
- 청·일 전쟁과 아관파천 사이는 갑오·을미개혁이 추진된 시기로, 이때는 청의 종주권이 부정되었다.
| 선왕은 정종의 유명(遺命)을 받고 아우로서 왕위를 계승한 후 예로써 아랫사람을 접하며 밝은 관찰력으로 사람을 잘 알아보았습니다. 종친과 귀족이라 해서 사정을 두지 않고 항상 호족과 공신 세력을 억제하였으며 소원하고 미천한 사람이라 해서 버리지 않고 의탁할 데 없는 백성들에게 혜택을 베풀었습니다. 그가 즉위한 해로부터 8년간 정치와 교화가 청백 공평하였고 형벌과 표창을 남용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쌍기(雙冀)를 등용한 후로부터 문사를 존중하고 대우하는 것이 지나치게 풍후하였습니다. |
상소의 '선왕'은 쌍기를 등용한 광종이며, 호족·공신 세력을 억제한 대표 정책은 노비안검법이다.
노비안검법은 불법으로 노비가 된 양인을 해방해 호족의 경제·군사 기반을 약화시켰다.
- 국자감 정비는 성종 때의 유교 교육 진흥책이다.
- 정계와 계백료서는 태조 왕건이 신하들이 지킬 도리를 밝히려고 지은 것이다.
- 지방에 경학 박사를 파견한 것은 성종 때이다.
| 제1호내가 재가한 공문 식제(式制)를 반포하게 하고 종전의 공문 반포 규례는 오늘부터 폐지하며 승선원, 공사청도 아울러 없애도록 한다. 제3호내가 동지날에 백관들을 거느리고 태묘(太廟)에 나아가 우리나라가 독립하고 모든 제도를 이정(釐正)한 사유를 고하고, 다음 날에는 태사(太社)에 나아가겠다. 제4호박영효를 내무대신으로, 서광범을 법무대신으로 …(중략)… 삼도록 하라고 명하였다. - 이상은 총리대신 김홍집, 외무대신 김윤식, 탁지대신 어윤중, 학무대신 박정양이 칙령을 받았다. |
칙령은 제2차 갑오개혁을 추진한 김홍집·박영효 연립 내각의 성립을 보여 주며, 이 내각은 지방 행정 구역을 23부로 재편하였다.
'박영효를 내무대신'으로 삼고 종묘에 독립과 제도 개정을 고한 것(홍범 14조 반포)이 단서이다.
- 과거 제도 폐지는 군국기무처 중심의 제1차 갑오개혁 때이다.
- 재정을 탁지아문으로 일원화한 것도 제1차 갑오개혁 때이다.
- 서울에 친위대, 지방에 진위대를 둔 것은 을미개혁 때이다.
| 제2조국어를 상용하는 자의 보통 교육은 소학교령, 중학교령 및 고등여학교령에 의함. 제3조국어를 상용치 아니하는 자에 보통 교육을 하는 학교는 보통학교, 고등보통학교 및 여자고등보통학교로 함. 제5조보통학교의 수업 연한은 6년으로 함. 보통학교에 입학하는 자는 연령 6년 이상의 자로 함. 제7조고등보통학교의 수업 연한은 5년으로 함. 고등보통학교에 입학하는 자는 수업 연한 6년의 보통학교를 졸업한 자 또는 조선 총독이 정하는 바에 의하여 이와 동등 이상의 학력이 있다고 인정된 자로 함. |
법령은 '국어 상용' 여부로 학교를 구분하고 보통학교를 6년으로 한 제2차 조선 교육령(1922)이며, 조선어 학회 사건(1942)은 이 법령이 바뀐 뒤 민족 말살 통치기에 일어났다.
제2차 조선 교육령은 1938년 제3차 조선 교육령으로 대체되었다.
- 치안 유지법은 1925년에 제정되어 시행기에 해당한다.
- 경성 제국 대학은 1924년에 설립되어 시행기에 해당한다.
- 문자 보급 운동(1929~)과 브나로드 운동(1931~)도 1930년대 전반에 전개되어 시행기에 해당한다.
| 정치 세력 | 주 장 |
| (가) | •대한민국 임시 정부 개조 •민족주의 실력 양성 |
| (나) | •새로운 대한민국 임시 정부 건설 •무장 투쟁 강조 |
| (다) | •임시 정부 유지 •국민 대표 회의 불참 |
(나)는 임시 정부를 해체하고 새 정부를 세우자는 창조파로, 이승만의 위임 통치 청원을 강하게 비판하였다.
(가)는 임시 정부의 개편을 주장한 개조파, (다)는 회의에 불참하고 임시 정부를 지킨 유지파이다.
- 국민 대표 회의 소집은 베이징의 군사 통일 회의 측 등 임시 정부 비판 세력이 먼저 요구했으며, 개조파가 처음 제기한 것이 아니다.
- 연해주(대한 국민 의회) 출신 인사들은 주로 창조파에 가담했으며, 유지파는 임시 정부 내 인사들이 중심이었다.
- 국무령 중심 체제는 회의 결렬 뒤 임시 정부가 헌법을 고쳐 도입한 것으로, 개조파·창조파가 함께 제기한 것이 아니다.
| 좌의정 박세채(朴世采)가 상소를 올려, “해서(=황해도) 일대는 부역이 번다하고 무거워 백성들이 제대로 살아가지 못합니다... 신이 이 고장을 왕래한 지가 거의 30년이나 되는데, 다른 여러 도에서 실시하는 (가) 을/를 시행하지 못하는 것을 한탄하는 말을 많이 들었습니다. 대개 그 법의 기원은 율곡 이이에게서 시작된 것인데, 그 동안에 선혜청(宣惠廳)을 두었으며, 먼저 관동(=강원도)과 경기에 시행했는데, 명칭은 달랐지만 실속은 같았습니다. 그 뒤에 호남(湖南)과 영남(嶺南)에도 시행하였으니, 백성들이 모두 신뢰하였습니다.”라고 하였다. |
(가)는 대동법으로, 집집마다 거두던 공물 대신 토지 결수에 따라 쌀·삼베·무명 등을 내게 하였다.
'선혜청', 경기에서 먼저 시행한 뒤 다른 도로 확대한 점, 이이의 수미법 주장이 단서이다.
- 지주에게 결작을 부담시킨 것은 영조 때 균역법의 보완책이다.
- 전세를 1결당 4두로 고정한 것은 인조 때 영정법이다.
- 연분 9등법으로 세액을 정한 것은 세종 때 공법이다.
![]() | |
| (가) | (나) |
갑 : (가)와 뼈바늘을 활용해서 옷과 그물을 만들었어요.
을 : (가)는 조개껍데기로 만든 치레걸이였어요.
병 : (나)는 벼 이삭을 자를 때 사용했어요.
정 : (가)와 (나)는 신석기 시대의 대표적인 도구였어요.
옳은 답변은 갑과 병이다. (가)는 가운데 구멍이 뚫린 원판 모양의 가락바퀴, (나)는 구멍 두 개가 뚫린 반달 돌칼이다.
가락바퀴는 신석기 시대에 실을 뽑는 데 쓰여 뼈바늘과 함께 옷과 그물을 만드는 데 활용되었고, 반달 돌칼은 청동기 시대에 곡식(벼) 이삭을 자르던 수확 도구이다.
- 을의 답변: 가락바퀴는 실을 뽑는 방추차로, 조개껍데기로 만든 치레걸이(장신구)가 아니므로 틀렸다.
- 정의 답변: 반달 돌칼은 청동기 시대의 대표적 농기구이므로 둘 다 신석기 시대 도구라는 설명은 틀렸다.
명동 성당![]() | 원각사![]() |
두 건물 완공 사이의 사실이 아닌 것은 광혜원 설립이다. '명동 성당'은 1898년에 완공되었고, 최초의 서양식 극장 '원각사'는 1908년에 세워졌다.
최초의 서양식 병원 광혜원(곧 제중원으로 개칭)은 갑신정변 이듬해인 1885년에 설립되어 두 건물보다 앞선다.
- 서울과 부산 간 철도(경부선)는 1905년에 개통되어 두 시점 사이에 해당한다.
- 서대문~청량리 간 전차는 1899년 한성 전기 회사가 운행을 시작해 두 시점 사이에 해당한다.
- 최초의 중등 교육 기관인 한성 중학교는 1900년에 설립되어 두 시점 사이에 해당한다.
| 제1조북위 38도선 이남의 조선 영토와 조선 인민에 대한 통치의 모든 권한은 당분간 본관의 권한하에 시행한다. 제2조정부 등 모든 공공 사업 기관에 종사하는 유급ㆍ무급 직원과 고용인, 그리고 기타 중요한 제반 사업에 종사하는 자는 별도의 명령이 있을 때까지 종래의 정상 기능과 업무를 수행할 것이며, 모든 기록 및 재산을 보호, 보존하여야 한다. 제5조군정 기간 동안 영어를 모든 목적을 위해 사용하는 공용어로 한다. |
조항은 미군 진주 직후인 1945년 9월의 맥아더 포고령 제1호이며, 이 무렵에는 해방 직후 조직된 조선 건국 준비 위원회가 치안대 등을 통해 치안과 행정을 맡고 있었다.
'북위 38도선 이남', '군정 기간', 영어 공용어 규정이 미 군정 개시를 보여 준다.
- 신탁 통치 반대 운동은 1945년 12월 모스크바 3국 외상 회의 결정이 알려진 뒤 일어났다.
- 서울에서 미·소 공동 위원회가 열린 것은 1946년 3월부터이다.
- 카이로 회담에서 한국 독립을 약속한 것은 해방 전인 1943년이다.
| 옛날에는 고씨가 북에서 고구려를, 부여씨가 서남에서 백제를, 박ㆍ석ㆍ김씨가 동남에서 신라를 각각 세웠으니, 이것이 삼국이다. 여기에는 반드시 삼국사가 있어야 할 것인데, 고려가 편찬한 것은 잘한 일이다. 그러나 부여씨와 고씨가 멸망한 다음에 김씨의 신라가 남에 있고, 대씨의 나라가 북에 있으니 이것이 남북국이다. 여기에는 마땅히 남북사가 있어야 할 터인데, 고려가 편찬하지 않은 것은 잘못이다. |
'대씨의 나라'는 발해로, 무왕의 '인안', 문왕의 '대흥' 등 독자적 연호를 사용하였다.
사료는 유득공이 『발해고』에서 남북국이라는 용어를 쓴 대목이다.
- 골품제로 관료제를 운영한 나라는 신라이다.
- 2성 6부제는 고려의 중앙 조직이며, 발해는 3성 6부제를 운영하였다.
- 사심관과 기인 제도로 호족을 견제한 것은 고려 태조이다.
| 김효원이 알성 과거에 장원으로 합격하여 이조 전랑의 물망에 올랐으나, 그가 윤원형의 문객이었다 하여 심의겸이 반대하였다. 그 후에 심의겸의 동생 심충겸이 장원 급제하여 전랑으로 천거되었으나, 외척이라 하여 김효원이 반대하였다. 이 때 이들을 지지하는 세력이 서로 상대방을 배척하여 붕당이 형성되었다. 심의겸을 지지하는 기성 사림을 중심으로 ㉠ 이 형성되고, 김효원을 지지하는 신진 사림을 중심으로 ㉡ 이 형성되었다. |
㉠은 심의겸 중심의 서인, ㉡은 김효원 중심의 동인이며, 동인은 정여립 모반 사건(기축옥사) 등을 계기로 남인과 북인으로 분열하였다.
이조 전랑 자리를 둘러싼 대립이 선조 때 동서 분당의 계기가 되었다.
- 이황·조식·서경덕의 문인이 가담한 쪽은 동인이다.
- 예송 논쟁은 현종 때 서인과 남인 사이에서 벌어졌다.
- 광해군 때 정권을 잡은 것은 북인, 인조 때는 서인이므로 서술이 뒤바뀌었다.
| 경신환국 (숙종 6) | ➡ | 기사환국 (숙종 15) | ➡ | 갑술환국 (숙종 20) | ➡ | 신임사화 (경종 1∼2) | ➡ | 이인좌의 난 (영조 4) |
| (가) | (나) | (다) | (라) | 소론 강경파 주도 |
갑술환국 때 폐비 민씨가 복위되면서 남인이 몰락하고 서인 정권이 재수립되었다.
숙종 대 환국은 경신(서인 집권) → 기사(남인 집권) → 갑술(서인 재집권) 순으로 정권이 바뀌었다.
- 왕위 계승(연잉군의 세제 책봉·대리청정) 문제로 소론이 노론을 공격한 것은 경종 때 신임사화이다.
- 남인이 역모 혐의로 몰락하고 서인이 집권한 것은 경신환국이다.
- 장희빈 소생의 세자 책봉으로 남인이 재집권한 것은 기사환국이다.
| 적전(籍田)을 가는 쟁기를 잡으시니 근본을 중시하는 거동이 아름답고, 혹독한 형벌을 없애라는 명을 내리시니 살리기를 좋아하는 덕이 성대하였습니다. …(중략)… 정포(丁布)를 고루 줄이신 은혜로 말하면 천명을 받아 백성을 보전할 기회에 크게 부합되었거니와 위를 덜어 아래를 더하며 어염세(魚鹽稅)도 아울러 감면되고, 여자ㆍ남자가 기뻐하여 양잠ㆍ농경이 각각 제자리를 얻었습니다. - (가) 대왕 시책문 - |
(가)는 영조이며, 영조는 붕당의 근거지가 된 서원을 대폭 정리하였다.
'정포를 고루 줄인' 균역법, 어염세 감면, 혹독한 형벌 폐지가 단서이다.
- 초계문신 제도는 정조가 실시하였다.
- 시헌력은 효종 때 채택되었다.
- 백두산정계비를 세워 청과 국경을 정한 것은 숙종 때이다.
| 토질은 비옥하며, 산을 등지고 바다를 향해 있어 오곡이 잘 자라며 농사짓기에 적합하다. 그들은 장사 지낼 적에는 큰 나무 곽을 만드는데, 길이가 10여 척이나 되며 한쪽 머리를 열어 놓아 문을 만든다. 사람이 죽으면 시체는 모두 가매장을 하되 겨우 형체만 덮일 만큼 묻었다가 가죽과 살이 다 썩은 다음에 뼈만 추려 곽 속에 안치한다. - 삼국지 위서 동이전 - |
가매장 후 뼈를 추려 큰 나무 곽에 넣는 가족 공동묘 풍습은 옥저의 것이며, 옥저에는 민며느리제가 있었다.
민며느리제는 어린 여자를 신랑 집에서 키운 뒤 대가를 치르고 혼인하는 매매혼의 일종이다.
- 신지·읍차는 삼한의 지배자 칭호이다.
- 단궁·과하마·반어피는 동예의 특산물이다.
- 훔친 물건 값의 12배를 배상하게 한 것은 부여의 법(1책 12법)이다.
| 회원 김정현이 급히 배재학당으로 가서 교사 이승만 및 학도 40∼50인과 함께 경무청 앞에 갔고 다른 회원들은 백목전 도가(都家)*에 모여 윤시병을 만민공동회 회장으로 삼아 경무청 앞으로 갔다. 이때 인민들이 다투어 모인 자가 수천 인이었다. <대한계년사> *도가 : 상인들이 모여 의논하는 집 |
'만민 공동회'를 연 단체는 독립 협회이며, 관민 공동회에서 헌의 6조를 결의해 고종에게 건의하였다.
배재학당 교사 이승만, 윤시병 등이 만민 공동회를 이끈 대목이 단서이다.
- 해외 독립군 기지 건설은 신민회의 활동이다.
- 을사조약을 비판한 사설 「시일야방성대곡」은 황성신문에 실렸다.
- 일본의 황무지 개간권 요구 반대 운동은 보안회가 주도하였다.
| 피고는 일본 군대가 대궐에 들어갔다는 말을 듣고 필시 일본인이 우리나라를 병합하고자 하는 뜻인 줄 알고 일본병을 물리치고 그 거류민을 국외로 쫓아낼 마음으로 다시 기병(起兵)을 도모하였다. 9월경 태인을 출발하여 삼례역에 이르러 그곳을 기병하는 핵심 본부로 삼았다. |
피고는 전봉준으로, 1차 봉기 때 전주성을 점령하고 정부와 전주 화약을 맺었다.
일본군의 경복궁 점령 후 '삼례'에서 다시 기병한 것은 동학 농민군의 2차 봉기이다.
- 영남 만인소는 『조선책략』 유포에 반발한 이만손 등 유생들이 올렸다.
- 한반도 중립화론은 유길준이 집필하였다.
- 단발령과 을미사변을 계기로 일어난 의병은 유인석 등 유생이 주도한 을미의병이다.
| (가)거란 군사가 귀주를 지나니 강감찬 등이 동쪽 들에서 맞아 크게 싸웠는데 …(중략)… 넘어져 죽은 적의 시체가 들판을 덮고, 사로잡은 군사와 말, 낙타, 갑옷, 투구, 병기는 이루 다 헤아릴 수가 없었다. (나)윤관이 여진을 쳐서 적을 크게 패퇴시켰다. 여러 장수들을 보내어 경계를 정하고 웅주, 영주, 복주, 길주의 4개 주에 성을 쌓았다. |
(가) 강감찬의 귀주 대첩(1019)과 (나) 윤관의 동북 9성 축조(1107) 사이에 천리장성(1033~1044)이 축조되었다.
천리장성은 거란 전쟁 이후 거란과 여진의 침입에 대비해 압록강 하구에서 동해안 도련포까지 쌓았다.
- 만호부는 원 간섭기에 설치된 군사 기구이다.
- 김윤후가 처인성에서 살리타를 사살한 것은 몽골의 2차 침입(1232) 때이다.
- 강동 6주 획득은 거란 1차 침입 때 서희의 외교 담판(993)의 결과로, 귀주 대첩 이전이다.
| 아침 일찍 프랑스 공무국에서 비밀리에 통지가 왔다. 과거 10년간 프랑스 관헌이 나를 보호하였으나, 이번에 나의 부하가 일왕에게 폭탄을 던진 것에 대해서는 일본의 체포 및 인도 요구를 거절할 수 없다는 것이다. 중국 국민당 기관지 <국민일보>는 “한국인이 일왕을 저격했으나 불행히도 맞지 않았다.”고 썼다. |
'나'는 김구이며, 일왕에게 폭탄을 던진 이봉창 의거를 이끈 한인 애국단을 결성하였다.
프랑스 조계의 보호를 받던 임시 정부 인사, '부하가 일왕에게 폭탄'을 던진 사건이 단서이다.
- 『유교 구신론』은 박은식이 저술하였다.
- 「조선 혁명 선언」은 신채호가 의열단의 요청으로 집필하였다.
- 신한촌에서 대한 광복군 정부를 세운 것은 이상설·이동휘 등이다.
| 원년8월 - 김흠돌, 흥원, 진공 등이 반역을 모의하다가 참형을 당하였다. 2년4월 - 위화부령 두 명을 두어 선거 사무를 맡게 했다. 5년봄 - 완산주를 설치하였다. 거열주를 승격시켜 청주를 설치하니 비로소 9주가 갖추어졌다. 서원과 남원에 각각 소경을 설치하였다. |
국왕은 김흠돌의 난을 진압하고 9주 5소경을 완비한 신문왕이며, 문무 관리에게 관료전을 지급하였다.
신문왕은 이어 녹읍을 폐지해 귀족의 경제 기반을 약화시켰다.
- 거칠부에게 『국사』를 편찬하게 한 것은 진흥왕이다.
- 시장 감독 관청인 동시전은 지증왕 때 설치되었다.
- 화랑도를 국가 조직으로 개편한 것은 진흥왕이다.
1359 1377 1388 1419 1434
| (가) | (나) | (다) | (라) |
홍건적침입 화통도감 설치 위화도 회군 대마도 정벌 6진설치
위화도 회군(1388)과 대마도 정벌(1419) 사이에 과전법(1391)이 마련되었다.
과전법은 위화도 회군으로 권력을 잡은 이성계 일파가 전제 개혁으로 단행하였다.
- 철령 이북 수복은 공민왕이 쌍성총관부를 공격한 1356년으로, 홍건적 침입 이전이다.
- 신돈의 전민변정도감 개혁은 1366년으로, 홍건적 침입과 화통도감 설치 사이에 해당한다.
- 정도전의 『고려국사』 편찬은 1395년으로, 위화도 회군과 대마도 정벌 사이에 해당한다.
| 중국 한커우[漢口]에서 이 부대가 조직되었다. 부대는 1개 총대, 3개 분대로 편성되었는데 100여 명의 대원은 대부분 조선 민족혁명당원이다. 총대장은 황포 군관 학교 제4기 출신인 진국빈이며, 부대는 대일 선전 공작과 대일 유격전을 수행함을 목적으로 하였다. |
'이 부대'는 1938년 한커우에서 김원봉(진국빈)이 조직한 조선 의용대이며, 일부 대원이 한국 광복군에 편입되었다.
조선 민족 혁명당원 중심, 대일 선전 공작 수행이 단서이며, 화북으로 이동하지 않은 대원들이 1942년 광복군에 합류하였다.
- 자유시 참변(1921)으로 피해를 입은 것은 대한 독립 군단이다.
- 국민부 산하의 군대는 조선 혁명군이다.
- 쌍성보·대전자령 전투에서 승리한 것은 지청천의 한국 독립군이다.
| 한강 유역에 있던 초기 한성 시기에 (가)계단식 돌무지무덤을 만들었는데, 서울 석촌동에 일부가 남아 있다. 웅진 시기의 고분은 굴식 돌방무덤 또는 널방을 벽돌로 쌓은 (나)벽돌무덤으로 바뀌었다. 벽돌무덤은 중국 남조의 영향을 받은 것이다. 사비 시기에는 규모는 작지만 세련된 굴식 돌방무덤을 만들었다. |
(나) 웅진 시기의 벽돌무덤인 공주 송산리 6호분에는 벽에 사신도가 그려져 있다.
(가) 서울 석촌동의 계단식 돌무지무덤은 고구려 무덤과 같은 양식으로 백제 건국 세력이 고구려 계통임을 보여 준다.
- 도굴이 어려워 껴묻거리가 많이 남은 것은 신라의 돌무지덧널무덤이다.
- 봉토 둘레에 둘레돌을 두르고 12지 신상을 새긴 것은 통일 신라의 무덤 양식이다.
- 모줄임 천장 구조는 고구려 굴식 돌방무덤의 특징이다.
| 목종 8년과거에 장원으로 급제 현종 4년국사수찬관으로 (가)《칠대실록》을 편찬 정종 1년지공거(知貢擧)가 되어 과거를 주관 문종 1년(나)문하시중이 되어 율령서산(律令書算)을 정함 문종 4년도병마사를 겸하게 되자 (다)동여진에 대한 대비책을 건의함 문종 9년퇴직 후 학당을 설립, (라)9개의 전문강좌를 개설 |
이력의 주인공은 최충이며, (나) 문하시중은 재신과 낭사로 구성된 최고 관서 중서문하성의 장관이다.
퇴직 후 9개 전문 강좌를 둔 사학(9재 학당)을 세운 점이 단서이다.
- 『7대 실록』은 전하지 않으며,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관찬 역사서는 『삼국사기』이다.
- 동북 9성은 숙종·예종 때 별무반을 편성한 윤관이 여진을 정벌하고 쌓았다.
- 양현고는 예종이 관학(국자감) 진흥을 위해 둔 장학 재단으로, 사학인 9재 학당과 관계없다.
| 내가 비록 부덕하더라도 일국의 국모 노릇을 한 지 여러 해가 되었다. (가) 은(는) 선왕(先王)의 아들이다. 나를 어미로 여기지 않을 수 없는데도 내부모를 죽이고 품속의 어린 자식을 빼앗아 죽였으며, 나를 유폐하여 곤욕을 치루게 했다. 어디 그뿐인가, 중국이 우리나라를 다시 일으켜 준 은혜를 저버리고, 속으로 다른 뜻을 품고 오랑캐에게 성의를 베풀었다. - 「계축일기」- |
ㄱ.북벌 운동을 전개하였다.
ㄴ.이괄의 난을 진압하였다.
ㄷ.동의보감을 편찬하게 하였다.
ㄹ.경기도에 대동법을 시행하였다.
(가)는 인목 대비를 유폐한 광해군이며, 광해군 대에 『동의보감』이 완성되고 경기도에 대동법이 시행되었다.
『계축일기』의 '부모를 죽이고', '나를 유폐', '오랑캐에게 성의'(중립 외교)가 단서이다.
- 북벌 운동은 효종 때 추진되었다.
- 이괄의 난은 인조반정 이후 인조 때 일어났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