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ㄱ. 농업 생산력이 증대되고 도시 인구가 증가하였다.
ㄴ. 국가에서는 향촌 교화를 위해 서원의 설립을 장려하였다.
ㄷ. 서얼 출신 학자들이 규장각 검서관으로 등용되었다.
ㄹ. 분청사기가 전국의 자기소와 도기소에서 널리 만들어졌다.
제시된 그림들은 조선 후기의 풍속화와 민화이므로, 이 시기의 모습은 농업 생산력 증대·도시 인구 증가와 서얼 출신 규장각 검서관 등용이다.
물레로 실을 잣는 아낙 옆에서 가장이 자리를 짜는 모습을 그린 김홍도의 '자리짜기', 까치와 호랑이를 그린 민화, 달밤의 남녀를 그린 신윤복의 '월하정인'은 모두 서민 문화가 성장한 18세기 이후의 작품이다. 이 시기 이앙법 확산 등으로 농업 생산력이 늘고 상업 발달로 도시 인구가 증가했으며, 정조는 박제가·유득공·이덕무 등 서얼 출신 학자를 규장각 검서관으로 등용했다.
- 국가가 향촌 교화를 위해 서원 설립을 장려한 것은 사액 서원이 등장한 16세기의 일이며, 조선 후기에는 오히려 서원이 정리·철폐되었다.
- 분청사기가 전국 자기소·도기소에서 널리 만들어진 것은 15세기 조선 전기이며, 16세기 이후에는 백자가 중심이 되었다.
| 과전법 | ⇨ | (가) | ⇨ | 관수관급제 | ⇨ | 녹봉제 |
(가)는 세조 때 시행된 직전법으로, 현직 관리에게만 수조권을 지급하였다.
과전법은 전·현직 관리에게 수조권을 주어 세습 과정에서 지급할 토지가 부족해졌고, 이를 해결하려고 직전법으로 바꾸었다. 이후 성종 때 관수관급제를 거쳐 16세기 중엽 수조권 지급이 사라지고 녹봉만 지급하게 되었다.
- 해당 지역의 조세와 역 징발권을 준 것은 신라의 녹읍이다.
- 국가가 직접 세금을 거두어 관리에게 지급한 것은 성종 때의 관수관급제이다.
- 인품과 관품에 따라 전지와 시지를 준 것은 고려 경종 때의 시정 전시과이다.
| ○경연을 통해 국왕, 의정부와 6조를 견제하는 역할을 하였다. ○5품 이하의 관리를 임명할 때, 인물의 경력, 신분 등을 조사하여 그 가부를 승인하는 권한을 가지고 있었다. ○왕에게 간언하거나 잘못된 정책을 비판할 수 있었다. ○잘못된 왕명을 시행하지 않고 되돌려 보낼 수 있었다.
|
제시된 권한은 삼사인 홍문관·사간원·사헌부의 기능이다.
홍문관은 경연을 주관하였고, 사헌부와 사간원(대간)은 5품 이하 관리 임명에 대한 서경권과 간쟁·봉박권을 행사하여 왕권과 고위 관료를 견제하였다.
- 승정원은 왕명의 출납을 맡은 왕의 비서 기관이다.
- 의금부는 왕명에 따라 반역 등 중죄인을 다스린 사법 기구이다.
- 춘추관은 시정기 작성과 실록 편찬 등 역사 기록을 맡았다.
| (가)왕이 어느 날 홀로 한참 동안 통곡하였다. 이자겸의 십팔자(十八字)가 왕이 된다는 비기(秘記)가 원인이 되어 왕위를 찬탈하려고 독약을 떡에 넣어 왕에게 드렸던바, 왕비가 은밀히 왕에게 알리고 떡을 까마귀에게 던져주었더니 그 까마귀가 그 자리에서 죽었다. - <고려사> (나)몽골병이 이르자 윤후가 처인성으로 난을 피하였는데, 몽골의 원수 살리타가 와서 성을 치매 윤후가 그를 사살하였다. 왕은 그 공을 가상히 여겨 상장군의 벼슬을 주었으나 이를 사양하고 받지 않았다. - <고려사> |
(가)는 1126년 이자겸의 난, (나)는 1232년 처인성 전투이므로 그 사이의 사실은 서경파의 대화궁 축조이다.
이자겸의 난 이후 묘청 등 서경파가 서경 천도를 주장하며 대화궁을 지었고, 이는 1135년 묘청의 서경 천도 운동으로 이어졌다.
- 삼별초의 항쟁은 1270년 개경 환도에 반발해 일어나 (나) 이후의 일이다.
- 강감찬의 귀주대첩은 1019년 거란의 3차 침입 때로 (가) 이전이다.
- 윤관의 동북 9성 축조는 1107년 예종 때로 (가) 이전이다.
![]() | ㄱ.(가) 시기에 신라와 백제가 동맹 관계를 맺었다. ㄴ.(나) 시기에 백제는 불교를 받아들여 정치 안정을 꾀하였다. ㄷ.(가), (나) 시기를 입증하는 비석이 다수 발견되었다. ㄹ.(가)는 6세기, (나)는 7세기 한반도의 세력 판도이다. |
(가)는 고구려가 한강 유역까지 장악한 5세기, (나)는 신라가 한강 유역과 동북 해안까지 차지한 6세기의 판도이므로, 나제 동맹 체결과 비석 자료에 대한 설명이 옳다.
(가) 시기 고구려 장수왕의 남진에 맞서 신라와 백제는 433년 나제 동맹을 맺었다. 이 시기는 광개토대왕릉비·충주 고구려비로, (나) 시기 신라의 영토 확장은 북한산비·황초령비·마운령비·창녕비 등 진흥왕 순수비로 입증된다.
- 백제가 불교를 받아들인 것은 4세기 후반 침류왕 때로, (나) 시기보다 훨씬 이전이다.
- (가)는 5세기, (나)는 6세기의 세력 판도이므로 6세기·7세기로 본 설명은 옳지 않다.
| 우리나라에서 (가)을/를 금하시는 것은 그 뜻이 정녕 어디에 있습니까? 먼저 그 뜻과 이치가 어떠한지 물어보지도 않고 지극히 죄악이라는 말로 사교(邪敎)라 하여 반역의 법률로 다스려 신유년 앞뒤로 인명이 크게 손상하였으나 한 사람도 그 원인을 알아보지 않았습니다. …(중략)… 이 도는 천자로부터 서민에 이르기까지 날마다 사용하고 늘 실행해야 할 도리이니 가히 해가 되고 난(亂)으로 된다고 할 수 없습니다. -정하상, <상재전서> |
(가)는 천주교이며, 천주교는 남인 계열의 실학자들이 학문을 넘어 신앙으로 받아들였다.
'사교', '신유년' 박해, 천주교 신자 '정하상'의 글이 단서이다. 18세기 후반 이승훈·정약용 형제 등 남인 계열 학자들이 신앙 활동을 벌였다.
- 시천주와 인내천 사상은 최제우가 창시한 동학의 교리이다.
- 홍경래의 난은 서북민 차별에 대한 반발과 정감록 등 예언 사상이 배경이었다.
- 안동 김씨 세도 정치 시기에는 천주교 탄압이 비교적 완화되었고, 대규모 박해는 신유박해·기해박해·병인박해 때 일어났다.
| 이것을 혜정교와 종묘 앞에 처음으로 설치하여 해 그림자를 관측하였다. 집현전 직제학 김돈이 명을 짓기를, ‘…구리를 부어서 그릇을 만들었는데, 모양이 가마솥과 같다. 지름에는 둥근 송곳을 설치하여 북에서 남으로 마주 대하게 했고, 움푹 파인 곳에서 (선이) 휘어서 돌게 했으며, 점을 깨알같이 찍었는데, 그 속에 도(度)를 새겨서 반주천(半周天)을 그렸다. … 길가에 설치한 것은 보는 사람이 모이기 때문이다. 이로부터 백성도 이것을 만들 줄 알게 되었다.’라고 하였다. |
'이것'은 세종 때 만든 해시계 앙부일구이므로, 같은 시기의 문화는 의학 백과사전 『의방유취』 편찬이다.
가마솥 모양의 그릇, '해 그림자 관측', '집현전 직제학 김돈'이 단서이며, 세종 때 의방유취가 편찬되었다.
- 100리척을 사용한 동국지도는 영조 때 정상기가 제작하였다.
- 상감법은 고려 12세기 상감 청자 제작에 활용되었다.
- 역대 문물을 정리한 동국문헌비고는 영조 때 편찬되었다.
(가)
(나)
갑신정변 거문도사건 동학농민운동 러․일전쟁 을사늑약
(가)·(나) 시기에 공통으로 나타난 것은 조선 중립화 주장이다.
1885년 거문도 사건 무렵 독일 부영사 부들러와 유길준이 한반도 중립화론을 제기하였고, 1904년 러·일 전쟁 직전 대한 제국은 국외 중립을 선언하였다.
- 미국에 거중 조정을 요구한 것은 을사늑약 전후 고종이 조·미 수호 통상 조약을 근거로 시도한 일이다.
- 청·일 양국군의 동시 철수 요구는 1894년 동학 농민 운동 때 조선 정부가 제기한 것이다.
| 검색 요약 : 공신과 호족에 대한 숙청을 단행했고, 노비안검법을 실시하여 호족의 경제적, 군사적 기반을 약화시키고 국가의 수입 기반을 확대하였다. 백관의 공복(公服)을 제정했으며, 동북계·서북계에 많은 성을 쌓는 등 치적이 많다. 별칭 : 자는 일화(日華) 휘는 소(昭). 시호는 대성(大成) 활동분야 : 정치 업적 : (가) |
노비안검법과 백관의 공복 제정으로 알 수 있는 인물은 고려 광종이며, 그는 황제를 칭하고 독자적인 연호를 사용하였다.
광종은 '광덕'·'준풍' 등 독자적 연호를 쓰고 개경을 황도라 부르며 왕권을 과시하였다.
- 지방관 파견과 향리 제도 마련은 12목을 설치한 성종의 업적이다.
- 청천강에서 영흥에 이르는 국경선 확보는 북진 정책을 편 태조 때의 일이다.
| 9년(399) 기해에 백잔(百殘)이 맹서를 어기고 왜와 화통하였다. 이에 왕이 평양으로 행차하여 내려갔다. 그 때 신라가 사신을 보내어 아뢰기를, “왜인이 그 국경에 가득 차 성지를 부수고 노객으로 하여금 왜의 민으로 삼으려 하니 이에 왕께 귀의하여 구원을 요청합니다”라고 하였다. … 10년(400) 경자에 보병과 기병 5만을 보내 신라를 구원하게 하였다. |
'백잔'과 '왜'를 물리치고 신라를 구원한 '왕'은 고구려 광개토대왕이며, 그는 '영락'이라는 연호를 사용하였다.
400년 보병·기병 5만을 보내 신라에 침입한 왜를 격퇴한 사실이 광개토대왕릉비에 기록되어 있다.
- 평양 천도와 한강 유역 장악은 장수왕의 업적이다.
- 형제 상속에서 부자 상속으로 바뀐 것은 고국천왕 때이다.
- 태학 설립·율령 반포·불교 수용은 소수림왕의 업적이다.
| (가)8도 군포는 수량이 90만 필(疋)에 지나지 않는데, 절반인 45만 필의 돈을 내어놓고 군포 1필을 감해 준다면, 2필을 바치던 무리들이 반드시 힘을 펼 수 있을 것입니다. (나)호역(戶役)으로써 군역(軍役)을 대신하고 … 호수(戶數)에 따라 귀천(貴賤)과 존비(尊卑)를 물론하고 일체로 부역(賦役)을 균평하게 한다면 내는 자는 심히 가볍고 거두는 자도 손실이 없을 것입니다. |
방납의 폐단을 해결하려는 방책은 대동법이므로, (가)를 그렇게 설명한 것이 옳지 않다.
(가)는 군포를 2필에서 1필로 줄인 영조의 균역법, (나)는 신분과 관계없이 호 단위로 군포를 거둔 흥선대원군의 호포법이다.
- 호포법은 양반에게도 군포를 물려, 성리학적 명분론을 내세운 양반의 반발이 컸다.
- 균역법은 영조, 호포법은 흥선대원군 때 시행되었다.
- 균역법은 결작·선무군관포 등으로, 호포법은 양반 호까지 징수하여 과세 대상을 넓혔다.
| 춘추좌씨전이나 예기나 문선을 읽어 그 뜻을 잘 통하고 논어ㆍ효경에도 밝은 자를 상(上)으로 하고, 곡례ㆍ논어ㆍ효경을 읽은 자를 중(中)으로 하고, 곡례ㆍ효경을 읽은 자를 하(下)로 하되, 만일 5경ㆍ3사와 제자백가의 서(書)를 능히 겸통하는 자가 있으면 등급을 넘어 등용한다. |
제시된 제도는 독서삼품과로, 신문왕이 아니라 원성왕 때 처음 시행되었다.
국학 학생의 유교 경전 이해 수준을 상·중·하로 나누어 관리 선발에 참고한 제도이며, 신문왕은 그보다 앞서 국학을 설립하였다.
- 학문 실력으로 인재를 뽑으려 했으므로 6두품이 적극 지지하였다.
- 학문과 유학을 널리 보급하는 데 이바지하였다.
- 진골 귀족 중심의 골품 제도 때문에 제 기능을 발휘하지 못하였다.
| 꿈속에 신선이 나타나서 "나는 초나라 회왕 손심인데 서초패왕에게 살해되어 빈강에 버려졌다"고 말하고 사라졌다. 잠에서 깨어나 생각해보니 회왕은 중국 초나라 사람이고, 나는 동이 사람으로 거리가 만리(萬里)나 떨어져 있는데 꿈에 나타난 징조는 무엇일까? 역사를 살펴보면 시신을 강물에 버렸다는 기록이 없으니 아마 항우가 사람을 시켜서 회왕을 죽이고 시체를 강물에 버린 것인지 알 수 없는 일이다. 이제야 글을 지어 의제를 조문한다. |
제시된 글은 김종직의 「조의제문」이며, 그는 길재의 학통을 이어받아 김굉필 등 제자를 길렀다.
항우에게 죽은 초 회왕(의제)을 조문하는 형식으로 세조의 왕위 찬탈을 비판한 글로, 연산군 때 무오사화의 원인이 되었다.
- 최초의 서원인 백운동 서원은 중종 때 주세붕이 세웠다.
- 유교 경전을 독자적으로 해석해 사문난적으로 몰린 인물은 윤휴·박세당이다.
| 저번에 사절선이 온 것은 오로지 수호(修好)때문이니 우리가 선린(善隣)하는 뜻에서도 이번에는 사신을 전위(專委)하여 수신(修信)해야겠습니다. 사신의 호칭은 수신사라 하고 김기수를 특별히 차출하고 따라가는 인원은 일을 아는 자로 적당히 가려서 보내십시오. 이는 수호 조약을 체결한 뒤에 처음 있는 일이니, 이번에는 특별히 당상관을 시켜 서계(書契)를 가지고 들어가게 하고, 이 뒤로는 서계를 옛날처럼 동래부에 내려 보내어 에도로 옮겨 보내는 것이 어떠하겠습니까. - <승정원일기> |
'수신사 김기수' 파견의 계기가 된 강화도 조약(조·일 수호 조규)은 일본에 해안 측량권을 인정하였다.
1876년 체결된 이 조약은 부산 외 2개 항구 개항, 해안 측량권, 치외 법권 등을 담은 불평등 조약이다.
- 거중 조정 규정은 1882년 조·미 수호 통상 조약에 들어 있다.
- 내지 통상권은 1882년 조·청 상민 수륙 무역 장정에서 처음 허용되었다.
- 「조선책략」의 영향으로 체결된 것은 조·미 수호 통상 조약이다.
| 나라라 하는 것은 사람을 두고 이름이니, 만일 빈 강산에 초목금수만 있고 해와 달만 내왕하는 곳이면 어찌 나라라고 칭하리오. 그러므로 사람이 토지에 의거하여 나라를 세울 때 임금과 정부와 백성이 동심 합력하여 나라를 세웠나니, …… 백성의 권리로 나라가 된다고 말하는 것이요. …… 해외 강국이 와서 나라를 빼앗는데 종묘사직과 임금과 나라 이름을 그대로 두고 사람의 권리와 토지 이익만 가져가고 또 총명 강대한 백성을 옮겨다 가두고 주장을 하나니, …… 관민이 합심하여 정부와 백성의 권리가 절반씩 함께 한 후에야 대한이 억만 년 무강할 줄로 나는 아노라. -1898. 12. 15. |
'1898. 12.'의 연설로 민권과 관민 합심을 강조한 단체는 독립협회이며, 독립협회는 러시아의 절영도 조차 요구를 저지하였다.
독립협회는 만민 공동회·관민 공동회를 열어 자주 국권과 민권 신장을 주장하였다.
- 대성학교와 오산학교 설립은 신민회의 활동이다.
- 일제의 황무지 개간권 요구 반대는 보안회의 활동이다.
- 월보 간행과 고종 퇴위 반대 운동은 대한 자강회의 활동이다.
| 제1조국내의 육군을 친위와 진위 2종으로 나눈다. 제2조친위는 경성에 주둔하여 왕성 수비를 전적으로 맡는다. 제3조진위는 부(府) 혹은 군(郡)의 중요한 지방에 주둔하여 지방 진무와 변경 수비를 전적으로 맡는다. |
친위대·진위대 설치는 을미개혁의 내용이며, 그 배경은 명성황후 시해(을미사변)이다.
1895년 을미사변 뒤 일본의 영향 아래 김홍집 내각이 단발령, 태양력 사용, 친위대·진위대 설치 등을 추진하였다.
- 러·일 전쟁 발발 뒤에는 고문 정치와 을사늑약으로 이어졌다.
- 통리기무아문 설치는 1880년 개화 정책 추진 기구의 마련으로, 별기군 창설과 연결된다.
- 동학 농민 운동은 군국기무처 중심의 제1차 갑오개혁의 배경이다.
| (가)지계업무를 소관 지방으로 가서 실시하되 전답ㆍ산림ㆍ천택ㆍ가옥을 모두 조사 측량하여 결부와 사표의 분명함과 칸수 및 척량의 적확함과 시주 및 구권의 증거를 반드시 확인한 후 발급할 것 (나)토지 소유자는 조선 총독이 정하는 기간 내에 주소ㆍ씨명, 명칭 및 소유지의 소재, 지목, 자번호, 사료, 등급, 지적, 결수를 임시 토지 조사 국장에게 신고해야 한다. |
(가) 대한 제국의 양전·지계 사업과 (나) 일제의 토지 조사 사업은 경자유전 원칙의 실현과는 관계가 없다.
두 사업 모두 토지를 측량하고 소유자를 확정해 지세를 안정적으로 거두려는 것이었으며, 경작 농민에게 토지를 나누어 주려는 개혁이 아니었다.
- 지세 징수 기반을 정비하여 재정 확보에 기여하였다.
- 토지 소유권을 문서로 확인하는 근대적 토지 소유 제도를 도입하였다.
- 소유권이 문서로 보장되어 토지 매매가 쉬워졌다.
| 내각 명단 좌의정 이재원 우의정 홍영식 전후영사 박영효 좌우영사 서광범 병조참판 서재필 호조참판 김옥균 |
김옥균·박영효·홍영식·서광범·서재필이 포함된 내각은 갑신정변 개화당 정부이며, 그 개혁 정강에 지조법 개혁이 들어 있다.
14개조 정강은 청에 대한 사대 폐지, 문벌 폐지와 인민 평등, 지조법 개혁 등을 내세웠다.
- 과거제 폐지는 1894년 제1차 갑오개혁 때 이루어졌다.
- 토지의 평균 분작은 동학 농민군의 폐정 개혁안에 나온다.
- 태양력 사용과 종두법 시행은 을미개혁 때 추진되었다.
| ○이 단체의 중심 인물은 안창호, 양기탁, 신채호 등이다. ○서북 지방의 기독교인들이 다수 참가한 항일 비밀 결사 조직이다. ○공화 정체의 근대 국가 수립을 목적으로 했다. ○일제가 날조한 105인 사건으로 국내 조직이 해체되었다. |
안창호·양기탁이 중심이고 105인 사건으로 해체된 단체는 신민회이며, 요인 암살과 식민 통치 기관 파괴는 신민회와 관련이 없다.
요인 암살·식민 기관 파괴는 1919년 김원봉이 조직한 의열단의 대표적 활동이다.
- 신민회는 자기 회사와 태극서관을 세워 민족 산업을 육성하였다.
- 대성학교와 오산학교를 세워 민족 교육을 실시하였다.
- 이회영 형제 등이 남만주 삼원보에 독립운동 기지를 건설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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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시된 유물은 신석기 시대의 것이므로, 이 시기에 농경과 목축이 시작되었다는 설명이 맞다.
실을 뽑는 가락바퀴, 밑이 뾰족한 빗살무늬 토기, 갈아서 만든 간석기, 흙으로 빚은 사람 얼굴 조각은 모두 신석기 시대 유물이다. 이 시기에는 조·피 등을 재배하는 농경과 가축 사육이 시작되어 정착 생활이 이루어졌다.
- 청동 무기의 보급으로 정복 활동이 활발해진 것은 청동기 시대의 모습이다.
- 채집과 사냥을 하며 동굴이나 막집에서 이동 생활을 한 것은 구석기 시대의 모습이다.
- 부여·고구려·옥저·동예·삼한 등 여러 나라가 성립한 것은 철기 시대의 일이다.
| … 오늘은 한국의 위대한 날이다. … 오후 2시, 중학교를 비롯한 각급 학교들이 일본의 한국 지배에 항거하는 시위를 벌였고, 거리로 나가 양손을 위로 올리고 모자를 흔들며 ‘대한 독립 만세’를 외치며 행진을 하기 시작했다. 거리의 사람들 역시 이 대열에 합류했고, 도시 전역에 기쁨의 외침 소리들이 울려 퍼졌다. … 최근 일본정부는 소위 ‘역도들’을 제압할 수 있는 더 ‘근본적인 대책’을 마련했다고 한다. 우리는 맨손으로 단순히 ‘독립 만세’를 외치는 사람들에게 … 보병대 2사단, 포병대 1사단, 기병대 2사단이 일본으로부터 파병되고 난 후 … 마을들이 불타고 있다는 소문이 무성하다는 것이다. - 『노블일지』- |
'대한 독립 만세' 시위를 다룬 사건은 3·1 운동이며, 민족 유일당 운동은 3·1 운동이 직접 촉발한 것이 아니다.
민족 유일당 운동은 1920년대 중반 이후 민족주의·사회주의 세력의 협력 움직임 속에서 전개되어 1927년 신간회 결성으로 이어졌다.
- 3·1 운동 이후 일제는 무단 통치를 이른바 문화 통치로 바꾸었다.
- 3·1 운동을 계기로 1919년 상하이에 대한민국 임시 정부가 수립되었다.
- 만주·연해주 등지의 무장 독립 투쟁이 더욱 활발해졌다.
| <해외 동포에게 드리는 격문> 동포들이여! 우리는 함께 뭉쳐 우리의 조국을 위해 헌신하여 우리의 독립을 되찾아야 한다. 우리는 야만 일본 제국의 잘못과 광란에 대해서 전 세계에 호소해야 한다. 간교하고 잔인한 일본 제국주의자들은 인류의 적이요, 진보의 적이다. 우리는 모두 일본놈들과 그들의 첩자, 그들의 동맹인과 야만스런 제국주의 군인을 모조리 죽이는 데 힘을 다해야 한다. - 대한 관동 창의대장 이인영 - |
| 1895 1905 1907 1909 1910 | |||||
| (가) | (나) | (다) | (라) | ||
| 을미개혁 을사조약 고종 퇴위 남한대토벌작전 한일병합 | |||||
'대한 관동 창의대장 이인영'의 격문은 정미의병과 관계 깊으며, 이는 고종 퇴위 이후인 (다) 시기에 전 계층이 참여한 전국적 항일 구국 운동이다.
1907년 고종 강제 퇴위와 군대 해산 뒤 해산 군인이 합류해 전력이 강화되었고, 이인영을 총대장으로 한 13도 창의군이 서울 진공 작전을 펼쳤다.
- 명성황후 시해와 단발령에 반발한 것은 을미의병이다.
- 평민 의병장 신돌석이 처음 등장한 것은 을사의병이다.
- 만주·연해주로 근거지를 옮긴 것은 남한 대토벌 작전 이후의 의병이다.
| …… 강도 일본을 쫓아내려면 오직 혁명으로만 가능하며, 혁명이 아니고는 강도 일본을 쫓아낼 방법이 없는 바이다. …… 우리의 민중을 깨우쳐 강도의 통치를 타도하고 우리 민족의 신생명을 개척하자면 양병 10만이 폭탄을 한 번 던진 것만 못하며, 천억 장의 신문, 잡지가 한 번의 폭동만 못할지니라.…… - ‘조선 혁명 선언’, 신채호 - |
「조선 혁명 선언」은 의열단의 행동 강령이며, 의열단은 김구가 아니라 김원봉이 조직하였다.
의열단은 1919년 만주 지린에서 결성되었고, 김구가 상하이에서 조직한 단체는 한인 애국단이다.
- 나석주·김상옥·김익상·박재혁 등이 의열 투쟁을 벌였다.
- 개인 폭력 투쟁으로 민중 직접 혁명을 달성하려 하였다.
- 1920년대 후반 단원들이 황푸 군관 학교에 입교하는 등 조직적 무장 투쟁 노선으로 전환하였다.
| 이 운동의 사상적 도화수가 된 것은 누구인가? 저들의 사회적 지위로 보나 계급적 의식으로 보나 결국 중산 계급임을 벗어나지 못하였으며, 적어도 중산 계급의 이익에 충실한 대변인인 지식 계급 아닌가. … 실상을 말하면 노동자에게는 … 말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 그네는 자본가 중산 계급이 양복이나 비단 옷을 입는 대신 무명과 베옷을 입었고, 저들 자본가가 위스키나 브랜디나 정종을 마시는 대신 소주나 막걸리를 먹지 않았는가? …… 이리하여 저들은 민족적, 애국적 하는 감상적 미사(美辭)로써 눈물을 흘리면서 저들과 이해가 전연 상반한 노동 계급의 후원을 갈구하는 것이다. - 이성태, “동아일보”- 〈 보 기〉 ㄱ.평양에서 시작하여 전국으로 확산되었다. ㄴ.사회주의 운동이 크게 확산되는 계기가 되었다. ㄷ.황성신문, 대한매일신보 등의 적극적인 지원을 받았다. ㄹ.일본 상품에 대한 관세 철폐 움직임에 대응하여 시작되었다. |
글이 비판하는 운동은 물산 장려 운동이며, 평양에서 시작해 전국으로 확산된 점과 일본 상품 관세 철폐 움직임에 대응해 시작된 점이 옳다.
1920년 평양에서 조만식 등이 시작하였고, 관세 철폐 움직임에 맞서 1923년 무렵 전국으로 확산되었다. 사회주의자들은 이 운동이 자본가 계급의 이익만 대변한다고 비판하였다.
- 이 운동은 오히려 사회주의자의 비판을 받았으며, 사회주의 확산의 계기가 된 것은 아니다.
- 황성신문·대한매일신보 등의 지원을 받은 것은 1907년 국채 보상 운동이다.
| ○대통령은 임기가 6년으로 중임 제한이 없으며, 통일주체국민회의에서 토론 없이 무기명으로 선출한다. ○대통령은 국회의원 정수의 3분의 1에 대한 추천권을 가지며, 국회 해산을 명할 수 있다. ○대통령은 필요한 경우 국민의 자유와 권리를 잠정적으로 제한하는 긴급 조치권을 가지며, 긴급 조치는 사법적 심사의 대상이 아니다. |
| 1960 1965 1972 1979 1987 | ||||||||||||
| (가) | (나) | (다) | (라) | |||||||||
| 4.19 혁명 | 한ㆍ일국교 정상화 | 7ㆍ4 남북 공동 성명 | 10ㆍ26 사태 | 6월 민주항쟁 | ||||||||
통일주체국민회의 간선과 긴급 조치권을 담은 헌법은 유신 헌법으로, 7·4 남북 공동 성명과 10·26 사태 사이인 (다) 시기에 제정되었다.
1972년 7월 7·4 남북 공동 성명 발표 뒤 같은 해 10월 유신이 선포되었고, 12월 공포된 유신 헌법은 1979년 10·26 사태까지 유지되었다.
- (가) 시기에는 장면 내각과 5·16 군사 정변, 제3공화국 출범이 있었다.
- (나) 시기에는 1969년 3선 개헌이 이루어졌다.
- (라) 시기에는 1980년 7년 단임 대통령 간선제의 제8차 개헌이 있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