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 ![]() |
제시된 유물은 명도전·반량전과 붓으로, 철기 시대에 중국과 활발하게 교류하였음을 보여 준다.
명도전과 반량전은 중국 전국 시대~진·한 무렵의 화폐이고, 붓은 창원 다호리 유적에서 출토되어 이 시기 한자를 사용하였음을 알려 준다. 중국 화폐와 문자 사용의 흔적이 함께 나타나므로 중국과의 교역이 활발했음을 알 수 있다.
- 계급의 분화가 시작된 것은 청동기 시대의 일이다.
- 농경이 처음 시작된 것은 신석기 시대이다.
- 철제 농기구 사용의 보편화는 제시된 화폐·붓으로 알 수 있는 사실이 아니며, 이 유물들은 중국과의 교류와 한자 사용을 보여 준다.
| (가)가축 이름으로 관직명을 정하여 마가ㆍ우가ㆍ저가ㆍ구가는 별도로 사출도를 주관하였다. 적군이 침입하면 제가들이 몸소 전투를 하고, 하호는 양식을 져 날라 음식을 만들어준다. - 「삼국지」 위서 동이전 - (나)귀신을 믿기 때문에 국읍에 각각 한 사람씩 세워 천신의 제사를 주관하게 하는데, 이를 천군이라 부른다. 또 여러 나라에는 각각 별읍이 있으니 소도라 한다. 거기에 큰 나무를 세우고 방울과 북을 매달아 놓고 귀신을 섬긴다. 다른 지역에서 그 지역으로 도망 온 사람은 누구든 돌려보내지 않았다. - 「삼국지」 위서 동이전 - |
(가)는 부여, (나)는 삼한이며, 부여에서 소 굽으로 길흉을 점친 것이 옳다.
‘마가·우가·저가·구가’와 ‘사출도’는 부여의 단서이고, ‘천군’과 ‘소도’는 제정이 분리된 삼한의 단서이다. 부여에서는 전쟁이 일어나면 소를 잡아 그 굽의 모양으로 길흉을 점쳤다(우제점법).
- 족외혼을 엄격히 지킨 나라는 동예이다.
- 서옥제는 고구려의 혼인 풍습이다.
- 12월의 영고는 부여의 제천 행사로, 삼한의 제천 행사는 5월·10월의 계절제이다.
| 거서간 → 차차웅 → (가) → (나) → 왕 |
(가)는 이사금, (나)는 마립간이며, 마립간이 대군장의 뜻으로 왕권 성장을 반영한다는 설명이 옳다.
신라 왕호는 거서간 → 차차웅 → 이사금 → 마립간 → 왕으로 바뀌었다. 마립간은 우두머리 중의 우두머리라는 뜻으로, 내물 마립간 이후 김씨가 왕위를 세습하며 왕권이 강해진 사정을 보여 준다.
- 6부가 행정 구역으로 재편된 것은 중앙 집권 체제가 정비되는 시기의 일로, 이사금 시기의 모습이 아니다.
- 낙동강 유역 가야 세력의 정복은 법흥왕·진흥왕 때로 ‘왕’ 칭호 시기의 일이다.
- 박·석·김 3성이 교대로 왕위를 차지한 것은 이사금 시기의 모습이며, 마립간 시기에는 김씨가 세습하였다.
| 임병찬은 고종의 지시로 독립 의군부를 몰래 조직하였다. 그는 안으로 의롭고 용감한 사람들을 선발하여 기회를 보아 조선의 독립을 선언하고, 밖으로는 문명 열강의 도움을 받아 독립을 회복하려 하였다. |
임병찬이 고종의 밀명으로 조직한 독립 의군부는 의병 운동을 계승한 비밀 결사였다.
독립 의군부는 의병장 출신 임병찬이 주도하였고, 고종의 복위를 꾀하는 복벽주의를 내세우며 조선 총독 등에게 국권 반환 요구서를 보내려 하였다.
- 독립 의군부는 왕정 복고를 지향하였으므로 공화제 지향과 거리가 멀며, 공화제를 내세운 단체로는 대한 광복회가 대표적이다.
- 민족 자본의 육성 강조는 애국 계몽 계열 단체나 물산 장려 운동의 성격이다.
- 부호에게서 의연금을 거둬 군자금을 마련한 활동은 대한 광복회의 특징으로 꼽힌다.
| 신라와 백제 왕실은 신라 소지왕의 친척인 이찬 비지의 딸과 백제 동성왕이 결혼할 것임을 발표하였다. 이는 양국 간의 우호 증진과 협력 강화를 위한 방편으로, 이에 대해 신라의 한 관리는 “고구려의 간섭에서 벗어나 신라가 우뚝 설 수 있는 계기가 될 것”이라고 말해, 양국이 서로의 발전을 위해 결혼 동맹을 선택한 것으로 분석된다. |
427 433 475 554 663
| (가) | (나) | (다) | (라) |
평양 나ㆍ제 웅진 관산성 백강
천도 동맹 천도 전투 전투
신라 소지왕과 백제 동성왕의 결혼 동맹(493)은 웅진 천도와 관산성 전투 사이인 (다) 시기에 해당한다.
고구려 장수왕의 남진으로 백제가 웅진으로 천도(475)한 뒤, 나·제 동맹(433)을 결혼 동맹으로 강화하였다. 이 동맹은 진흥왕이 한강 하류를 차지하고 관산성 전투(554)가 벌어지면서 깨졌다.
- (가) 시기는 평양 천도(427)와 나·제 동맹(433) 사이로, 아직 동맹이 맺어지기 전이다.
- (나) 시기는 나·제 동맹과 웅진 천도 사이로, 백제는 아직 한성에 도읍하고 있었다.
- (라) 시기는 관산성 전투 이후로, 신라와 백제가 이미 적대 관계로 돌아선 때이다.

제시된 문화재는 팔각원당형 승탑으로, 선종이 유행한 신라 하대에 만들어졌다. 이 시기에는 원종과 애노의 난 등 농민 반란이 일어났다.
승탑은 선종 승려의 사리를 모신 탑으로, 지방 호족의 후원을 받은 선종 승려들이 늘어난 신라 말에 많이 세워졌다. 진성 여왕 때 중앙 정부의 가혹한 조세 수취에 반발해 사벌주에서 원종과 애노가 봉기하였다.
- 녹읍 폐지와 관료전 지급은 신문왕 때인 신라 중대의 왕권 강화 정책이다.
- 집사부 시중의 권한 강화도 왕권이 강했던 신라 중대의 모습이다.
- 신라 하대의 왕위 쟁탈전은 진골 귀족들 사이에서 벌어졌으며, 6두품은 왕위에 오를 수 없었다.
| 제1조 :국가 총동원이란 전시에 국방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국가의 전력을 가장 유효하게 발휘하도록 인적 및 물적 자원을 운용하는 것이다. 제4조 :정부는 전시에 국가 총동원상 필요할 때에는 칙령이 정하는 바에 따라 제국 신민을 징용하여 총동원 업무에 종사하게 할 수 있다. 제8조 :정부는 전시에 국가 총동원상 필요할 때에는 칙령이 정하는 바에 따라 물자의 생산, 수리, 배급, 양도, 기타의 처분, 사용, 소비, 소지 및 이동에 관하여 필요한 명령을 내릴 수 있다. |
ㄱ.한글을 사용하는 신문과 잡지를 강제 폐간시켰다.
ㄴ.소학교 대신 국민 학교라는 명칭을 사용토록 하였다.
ㄷ.조선 태형령과 경찰범 처벌 규칙을 만들어 시행하였다.
ㄹ.사회주의자들을 탄압하기 위해 치안유지법을 만들었다.
제시된 법령은 1938년의 국가 총동원법이므로, 민족 말살 통치기의 한글 신문·잡지 폐간과 국민학교 명칭 사용이 해당한다.
중일 전쟁 이후 일제는 인적·물적 수탈을 위해 국가 총동원법을 시행하였고, 1940년 조선일보·동아일보를 폐간하였으며 1941년 소학교를 국민학교로 바꾸었다.
- 조선 태형령과 경찰범 처벌 규칙은 1910년대 무단 통치기의 법령이다.
- 치안 유지법은 1925년 문화 통치기에 사회주의 운동을 탄압하려고 제정되었다.
| 왕은 여러 가지 과감한 조처를 통하여 왕권을 강화시켰다. 혁신 정치를 대체적으로 일단락 지은 즉위 11년에 칭제건원하고, 개경을 황도, 서경을 서도라 칭한 것은 그와 같은 기반 위에서 취한 자부심의 한 표현이라 볼 수 있다. |
‘칭제건원’하고 개경을 ‘황도’라 칭한 왕은 고려 광종이며, 그는 쌍기의 건의로 과거 제도를 도입하였다.
광종은 노비안검법과 과거제 실시, 공복 제정 등으로 호족 세력을 누르고 왕권을 강화하였으며, 광덕·준풍 등 독자 연호를 사용하였다.
- 정방과 정동행성 이문소의 폐지는 공민왕의 반원 개혁이다.
- 광군사를 설치해 거란 침입에 대비한 왕은 정종(定宗)이다.
- 유교 정치 이념을 채택하고 국자감을 정비한 왕은 성종이다.
| (가)거란의 군사가 귀주를 지나니 강감찬 등이 동쪽 들에서 맞아 싸웠는데, …(중략)… 죽은 적의 시체가 들판을 덮고 사로잡은 군사와 말, 낙타, 갑옷, 투구, 병기는 이루 다 헤아릴 수가 없었다. (나)여진의 추장들은 땅을 돌려달라고 떼를 쓰면서 해마다 와서 분쟁을 벌였다. …(중략)… 이에 왕은 신하들을 모아 의논한 후에 그들의 요구에 따라 9성을 돌려주었다. |
(가) 강감찬의 귀주 대첩(1019)과 (나) 동북 9성 반환(1109) 사이에는 별무반 편성(1104)이 있었다.
숙종 때 여진과의 싸움에서 패하자 윤관의 건의로 신기군·신보군·항마군으로 이루어진 별무반을 만들었고, 예종 때 여진을 정벌해 9성을 쌓았다가 돌려주었다.
- 발해의 멸망(926)은 귀주 대첩보다 앞선 일이다.
- 쌍성총관부 폐지는 공민왕 때(1356)의 일이다.
- 묘청의 서경 천도 운동은 인종 때(1135)로 9성 반환 이후이다.
| ◦증류 방식의 술인 소주가 등장하였다. ◦임금의 음식을 가리키는 ‘수라’라는 말이 사용되었다. ◦남자들 사이에서 머리의 뒷부분만 남겨놓고 주변의 머리털을 깎아 나머지 모발을 땋아서 등 뒤로 늘어뜨리는 머리 스타일이 나타났다. |
소주, ‘수라’, 변발은 원 간섭기의 몽골풍이며, 이 무렵 경천사지 십층 석탑이 세워졌다.
경천사지 십층 석탑은 충목왕 때 원의 석탑 양식의 영향을 받아 대리석으로 만들어졌다.
- 최충의 9재 학당은 고려 문종 무렵인 11세기의 사학이다.
- 김부식의 삼국사기는 인종 때인 12세기 중엽에 편찬되었다.
- 의천의 해동 천태종 창시는 11세기 후반의 일이다.
| (가)겨울에 왕이 태자와 함께 정예 군사 3만 명을 거느리고 고구려에 쳐들어가 평양성을 공격하였다. 고구려의 왕 사유가 힘을 다해 싸워 막다가 빗나간 화살에 맞아 죽었다. 왕이 군사를 이끌고 물러났다. (나)왕 9년 기해에 백잔(百殘)이 맹서를 어기고 왜와 화통하였다. 이에 왕이 평양으로 내려갔다. 그 때 신라가 사신을 보내 아뢰기를 …(중략)… 왕 10년 경자에 보병과 기병 5만을 보내 신라를 구원하게 하였다. |
(가) 백제 근초고왕의 평양성 공격으로 고국원왕이 전사(371)한 뒤, (나) 광개토 대왕의 신라 구원(400) 이전에 고구려는 율령을 반포(373)하였다.
고국원왕의 전사 이후 즉위한 소수림왕은 불교 수용, 태학 설립, 율령 반포로 국가 체제를 정비하였다.
- 천리장성은 7세기 영류왕~보장왕 때 당의 침입에 대비해 쌓았다.
- 평양 천도는 장수왕 때(427)로 (나) 이후이다.
- 낙랑군 축출은 미천왕 때(313)로 (가) 이전이다.
| 고려 문화의 향기를 찾아서 | ||||
| 주제 | 소주제 | 답사지 | 답사 주안점 | |
| (가) | 불교 | 결사 운동 | 강진 만덕사 | 조계종 발달 |
| (나) | 공예 | 자기 기술 | 부안ㆍ강진 도요지 | 상감청자 제작법 |
| (다) | 건축 | 목조 건축 | 안동 봉정사 | 다포 양식 건물 |
| (라) | 인쇄술 | 금속 활자 | 청주 흥덕사 | 상정고금예문 인쇄 |
부안·강진 도요지에서 상감 청자 제작법을 살피는 (나)가 옳게 연결되었다.
고려는 12세기 무렵 그릇 표면을 파내고 다른 흙을 메워 무늬를 내는 상감법을 개발하였고, 전라도 강진과 부안이 대표적인 청자 생산지였다.
- (가) 강진 만덕사는 요세의 백련 결사가 일어난 곳으로, 조계종이 아니라 천태종 계통의 결사 운동이다.
- (다) 안동 봉정사 극락전은 다포 양식이 아니라 주심포 양식 건물이다.
- (라) 청주 흥덕사에서 인쇄된 것은 상정고금예문이 아니라 직지심체요절이다.
| 조선은 개국 후에도 여전히 고려 때 사용하였던 중국의 역법을 썼으나 우리 실정에 맞지 않는 점이 있었다. (가)이/가 즉위한 후 정인지, 정초 등에게 명하여 한양을 기준으로 천체의 운행을 관측하도록 하고, 수시력과 회회력을 자세히살펴우리의실정에맞게바로잡아『칠정산내편』과 『칠정산 외편』을 만들게 하였다. |
『칠정산』 내·외편을 만들게 한 (가)는 세종이며, 그는 전분 6등법과 연분 9등법을 실시하였다.
세종은 공법을 제정해 토지 비옥도에 따라 6등급, 풍흉에 따라 9등급으로 나누어 전세를 거두었다.
- 대동법은 광해군 때 경기도에서 처음 실시되었다.
- 과전법을 직전법으로 바꾼 왕은 세조이다.
- 시전 상인의 금난전권 폐지는 정조 때 신해통공의 내용이다.
| ◦소격서는 본래 이단이며 예(禮)에도 어긋나는 것이니 비록 수명을 빌고자 해도 복을 얻을 수 없습니다. 소비가 많고 민폐도 커서 나라의 근본을 손상시키니 어찌 애석하지 않겠습니까. ◦지방에서는 감사와 수령이, 서울에서는 홍문관과 육경(六卿), 대간이 등용할 만한 사람을 천거하여, 대궐에 모아 놓고 친히 대책으로 시험한다면 인물을 많이 얻을 수 있을 것입니다. 이는 이전에 우리나라에서 하지 않았던 일이요, 한(漢)나라 현량과의 뜻을 이은 것입니다. |
ㄱ.3사에서 언론과 문한을 담당하였다.
ㄴ.왕도 정치와 향촌 자치를 주장하였다.
ㄷ.세조 이후 공신 세력으로서 정권을 장악하였다.
ㄹ.성리학 이외의 학문과 사상에 대해 관용적이었다.
‘소격서’ 폐지와 ‘현량과’ 실시를 주장한 세력은 조광조 등 사림으로, 3사에서 언론·문한을 맡고 왕도 정치와 향촌 자치를 주장하였다.
사림은 성종 이후 3사의 언관직에 진출해 훈구 세력을 비판하였고, 성리학적 왕도 정치와 향약 보급을 통한 향촌 자치를 내세웠다.
- 세조 이후 공신으로서 정권을 장악한 세력은 훈구파이다.
- 성리학 이외의 학문과 사상에 관용적이었던 쪽도 훈구파이며, 사림은 성리학 이외의 사상을 배척하였다.
| 개원 20년 무예가 장수 장문휴를 보내 해적을 이끌고 등주자사(登州刺史) 위준을 공격하자, 당이 문예를 보내 병사를 징발하여 토벌하게 하였다. 이어 김사란을 신라로 보내 병사를 일으켜 발해 남쪽 국경을 공격하게 하였다. - 「신당서」 - |
장문휴의 등주 공격은 발해 무왕 때의 일이며, 이 시기 발해는 독자적인 연호(인안)를 사용하였다.
‘무예’는 무왕의 이름으로, 무왕은 영토를 확장하고 당의 등주를 공격하는 등 당·신라와 대립하였다.
- 발해는 여진이 아니라 거란의 침략으로 멸망하였다.
- 해동성국이라 불린 전성기는 9세기 선왕 때이다.
- 당과 친선 관계를 맺고 신라도를 통해 신라와 교류한 것은 문왕 때이다.
| (가)조․명 연합군과 이순신의 활약으로 전세가 불리해진 왜군은 명에게 휴전을 제의하였다. 이에 따라 명과 왜군의 휴전 회담이 시작되었다. (나)김류, 이귀, 이괄 등 서인이 광해군을 무력으로 몰아 내고 능양군을 추대하여 왕으로 삼았다. 광해군과 대북파는 명을 배신하고 폐모살제(廢母殺弟)의 패륜을 저질렀다는 죄목으로 쫓겨났다. |
(가) 임진왜란 중 명·왜의 휴전 회담과 (나) 인조반정(1623) 사이에는 광해군의 중립 외교가 있었다.
광해군은 명과 후금 사이에서 강홍립에게 상황에 따라 대처하도록 하는 등 신중한 외교를 폈고, 서인은 이를 명분 삼아 반정을 일으켰다.
- 청으로부터 군신 관계를 요구받은 것은 인조반정 이후 병자호란 무렵의 일이다.
- 백두산 정계비는 숙종 때 세워졌다.
- 계해약조는 세종 때 일본과 맺은 조약이다.
| 당론(黨論)의 폐단이 거의 1백 년이나 되었으니 어찌 갑자기 크게 변할 수 있겠습니까마는 세월을 두고 힘쓰면 혹 줄어드는 보람이 있을 것입니다. 위에서 지극한 정성으로 탕평하시면, 신하로서 어찌 감동하는 마음이 없겠습니까? |
탕평을 건의받아 실시한 영조의 정책으로 볼 수 없는 것은 산림을 중용한 것이다.
영조는 붕당의 근거지가 된 산림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았으며, 탕평파를 육성해 왕권을 강화하려 하였다.
- 영조는 붕당의 근거지인 서원을 대폭 정리하였다.
- 영조는 이조 전랑의 후임자 추천권 등을 없애 그 권한을 약화시켰다.
- 영조는 탕평책에 따라 각 붕당의 인물을 고르게 등용하였다.
| 동학 농민 운동은 안으로 정치와 사회 개혁을 이루고 밖으로는 외세의 침략을 막으려 했던 대규모 농민 운동이었다. 비록 정부와 일본군의 공격으로 실패하였지만 농민군의 반봉건적 개혁 요구는 갑오개혁에 영향을 끼쳐 전통적 봉건 질서의 붕괴를 촉진하였다. 그리고 반침략적 정신은 의병 운동에 투영되어 외세에 저항하는 구국 무장 투쟁으로 이어졌다. |
갑오개혁에 반영된 농민군의 반봉건적 요구는 노비 문서를 불태우라는 것이다.
폐정 개혁안의 노비 문서 소각 요구는 갑오개혁의 공사 노비법 혁파로 이어져 신분제 폐지에 영향을 주었다.
- 토지의 평균 분작 요구는 갑오개혁에 반영되지 않았다.
- 왜적과 통하는 자를 엄징하라는 요구는 반봉건이 아니라 반침략적 성격이다.
- 지조법 개혁은 갑신정변 14개조 정강의 내용이다.
성명 : ▢▢▢ 본관 : ○○부곡 직역 : 부호장 나이 : 42세 처 : ▢▢ (40세) 자(여) : ▢▢ (21세) 사위 : ▢▢▢ 25세 자(남) : ▢▢ 17세ㄱ.적서의 차별이 없었을 것이다.
ㄴ.재산은 균분 상속되었을 것이다.
ㄷ.친영 제도가 일반화되었을 것이다.
ㄹ.제사는 반드시 큰아들이 지냈을 것이다.
본관이 부곡이고 직역이 부호장이며, 딸이 아들보다 먼저 기재되고 사위가 처가 호적에 함께 올라 있으므로 고려 시대의 호적이다. 이 무렵 가족 제도에 대한 추론으로 옳은 것은 ㄱ, ㄴ이다.
고려에서는 자녀를 성별과 관계없이 태어난 순서대로 호적에 올렸고, 혼인 후 남자가 처가에서 생활하는 경우가 많았다. 재산은 아들과 딸에게 균분 상속되었으며, 서얼 차별이 법제화된 조선과 달리 적서의 차별이 심하지 않았다.
- 친영 제도(신부를 신랑 집으로 맞아들이는 혼례)가 일반화된 것은 성리학적 의례가 정착한 조선 후기의 일이다.
- 제사를 반드시 큰아들이 지내는 장자 봉사 역시 조선 후기에 굳어진 관행이며, 고려에서는 자녀가 돌아가며 제사를 지내기도 하였다.
|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1919년 정부가 공포한 군사 조직법에 의거하여 중화민국 총통 장개석 원수의 특별 허락으로 중화민국 영토 내에서 (가) 을(를) 창설함을 선포한다. 중화민국 국민과 합작하여 우리 두 나라의 독립을 회복하고자 공동의 적인 일본 제국주의자들을 타도하기 위하여 연합군의 일원으로 항전을 계속한다. |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중국 영토 내에서 창설한 (가)는 한국광복군이며, 국내 진공 작전을 계획하였으나 일본의 패망으로 무산되었다.
한국광복군은 1940년 충칭에서 창설되어 대일 선전 포고 후 연합군과 함께 싸웠고, 미국 전략정보국(OSS)과 협력해 국내 진공을 준비하였다.
- 자유시로 이동한 것은 1920년대 초 대한 독립 군단이다.
- 화북 지방에서 중국군과 공동 작전을 편 것은 조선 의용군이다.
- 쌍성보·대전자령 전투에서 승리한 것은 지청천이 이끈 한국 독립군이다.
| 지난 6월 9일 오후 교내 시위 도중 경찰이 쏜 최루탄 파편에 맞아 중상을 입고 입원중인 연세대생 이한열군은 4일째 의식을 회복하지 못한 채 중태다. 연세대 상경대 교수 일동은 ‘이한열군 사건에 당하여’라는 제목의 성명서를 작성하여 “이번 불상사에 대한 책임을 통감하여 학생 시위와 이 같은 불상사를 유발하는 오늘의 현실을 개탄한다.”면서 당국은 최루탄 난사를 포함한 과잉진압을 금지하고 이 같은 사태의 재발을 방지하기 위한 근본적인 대책을 수립하라고 요구하였다. |
‘이한열’ 사건과 관련된 운동은 6월 민주 항쟁(1987)이며, 학생과 시민들은 민주 헌법 쟁취를 구호로 내세웠다.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과 4·13 호헌 조치에 맞서 ‘호헌 철폐, 독재 타도’를 외쳤고, 그 결과 6·29 선언으로 대통령 직선제 개헌이 이루어졌다.
- 인권 탄압과 긴급조치 비판은 1970년대 유신 체제에 대한 저항이다.
- 야당 당수의 국회 제명이 계기가 된 것은 1979년 부마 민주 항쟁이다.
- 비상 계엄 해제와 신군부 퇴진 요구는 1980년 5·18 민주화 운동의 내용이다.
| (가)비록 우리 재화가 남의 재화보다 품질상 또는 가격상으로 개인 경제상 다소 불이익이 있다 할지라도 민족 경제의 이익에 유의하여 이를 애호하며 장려하여 수요하며 구매하지 아니치 못할지라. (나)민중의 보편적 지식은 보통 교육으로 능히 수여할 수 있으나 심원한 지식과 심오한 학리는 고등 교육에 기대하지 아니하면 불가할 것은 설명할 필요도 없거니와 사회 최고의 비판을 구하며 유능한 인물을 양성하려면 최고 학부의 존재가 가장 필요하도다. |
(가)는 물산 장려 운동, (나)는 민립 대학 설립 운동이며, 물산 장려 운동이 사회주의자 주도였다는 설명이 옳지 않다.
물산 장려 운동은 민족주의 계열이 주도하였고, 사회주의자들은 이 운동이 자본가 계급의 이익만 늘린다고 비판하였다.
- 민립 대학 설립 운동은 조선 민립 대학 기성회를 중심으로 전국적인 모금 운동으로 전개되었다.
- 물산 장려 운동은 평양에서 조만식 등이, 민립 대학 설립 운동은 이상재 등이 이끌었다.
- 두 운동 모두 경제·교육 분야에서 민족의 실력 양성을 목표로 하였다.
| 이른 새벽 보슬비에 담배 심기 참 좋다네 담배 모종 옮겨다가 울 밑 밭에 심어 보세 금년 봄엔 가꾸는 법 영양법을 배워 들여 황금 같은 잎담배를 팔아 일 년 살아보세 |
담배를 팔아 생계를 꾸리는 모습은 조선 후기 상품 작물 재배를 보여 주며, 이 시기에는 포구에서 물품을 거래하는 객주를 볼 수 있다.
조선 후기에는 담배·인삼 등 상품 작물 재배가 늘고, 포구를 중심으로 객주·여각이 상품의 매매·중개와 운송·숙박 등을 맡았다.
- 정전을 받아 농사짓는 농민은 통일 신라 성덕왕 때의 모습이다.
- 활구(은병)는 고려 숙종 때 만든 화폐이다.
- 대식국인(아라비아 상인)이 드나든 것은 고려 벽란도 무역의 모습이다.
| 첫째,통일은 외세에 의존하거나 외세의 간섭을 받음이 없이 자주적으로 해결하여야 한다. 둘째,통일은 서로 상대방을 반대하는 무력행사에 의거하지 않고 평화적 방법으로 실현하여야 한다. 셋째,사상과 이념, 제도의 차이를 초월하여 우선 하나의 민족으로서 민족적 대단결을 도모하여야 한다. |
자주·평화·민족적 대단결의 통일 원칙을 밝힌 문서는 7·4 남북 공동 성명(1972)이며, 남과 북에서 정치권력 강화에 이용되었다.
공동 성명 발표 뒤 남한은 유신 헌법을, 북한은 사회주의 헌법을 제정해 각각 독재 체제를 강화하였다.
- 최초의 이산가족 상봉은 1985년에 이루어졌으므로 합의 직후의 일이 아니다.
- 남북한 유엔 동시 가입 직후에 채택된 것은 남북 기본 합의서이다.
- 한반도 비핵화 공동 선언은 1991년 남북 기본 합의서 무렵에 합의되었다.
| 정부에서 일하는 관리는 임금의 신하요 백성의 종이니 위로 임금을 섬기고 아래로는 백성을 섬기는 것이라. …(중략)… 바라건대 정부에 계신 이들은 관찰사나 군수들을 자기들이 천거하지 말고 각 지방 인민으로 하여금 그 지방에서 뽑게 하면, 국민 간에 유익한 일이 있는 것을 불과 1~2년 동안이면 가히 알리라. - 독립신문, 1896. 4. 14. - |
관찰사·군수를 ‘각 지방 인민’이 뽑게 하자는 주장은 독립 협회의 국민 참정권 실현 목표를 보여 준다.
독립 협회는 관리를 백성을 섬기는 존재로 보고 민권 신장을 주장하였으며, 중추원을 개편한 의회 설립 운동으로 이어졌다.
- 왕도 정치의 구현은 유교적 정치 이념으로, 민권 사상에 근거한 자료의 주장과 맞지 않는다.
- 전제 군주권의 강화는 대한국 국제에 나타난 광무 정권의 방향이며, 독립 협회는 입헌 군주제를 지향하였다.
- 독립 협회는 군주제를 유지하는 입장이었으므로 민주 공화정 수립을 목표로 하지 않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