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사진의 도구는 갈돌과 갈판, 빗살무늬 토기로 신석기 시대의 유물이므로, 이 시기에 새롭게 볼 수 있었던 장면은 가락바퀴로 실을 뽑는 모습이다.
신석기 시대에는 농경과 정착 생활이 시작되면서 곡물을 가는 갈돌·갈판과 저장용 토기가 쓰였고, 가락바퀴와 뼈바늘로 실을 뽑아 옷과 그물을 만들었다.
- 주먹도끼 제작은 구석기 시대의 모습이다.
- 고인돌의 굄돌을 끄는 장면은 청동기 시대 지배층 무덤 축조의 모습이다.
- 반달 돌칼로 곡식 이삭을 따는 것은 청동기 시대에 본격화된 모습이다.
| 그 나라 안의 대가들은 농사를 짓지 않으며 좌식자(坐食者)가 만여 명이나 된다. 하호는 식량과 고기와 소금을 멀리서 져다 이들에게 공급하고 있다. 10월에 하늘에 제사지내는데, 온 나라가 대회를 가지므로 이를 동맹(同盟)이라 한다. -『삼국지』위서 동이전 - |
자료의 나라는 고구려이며, 집집마다 부경이라는 작은 창고를 둔 나라가 바로 고구려다.
'좌식자'로 불리는 대가와 물자를 공급하는 '하호', 10월 제천 행사 '동맹'이 고구려를 가리키는 단서다.
- 여러 가가 사출도를 다스린 것은 부여의 모습이다.
- 철이 많이 나서 왜 등에 수출한 것은 변한(가야)의 모습이다.
- 범금 8조로 사회 질서를 유지한 것은 고조선이다.

| ① | ![]() | ② | ![]() |
| ③ | ![]() | ④ | ![]() |
(나)는 백제가 한성 함락 후 옮긴 웅진(공주)이며, 이 시기의 문화재는 중국 남조의 영향을 받은 벽돌무덤인 무령왕릉이다.
지도의 (가)는 한강 유역의 한성, (나)는 금강 상류의 웅진, (다)는 성왕이 천도한 사비(부여)이다. 아치형 천장의 벽돌무덤 내부 사진이 무령왕릉에 해당한다.
- 계단식 돌무지무덤(서울 석촌동 고분)은 한성 도읍 시기의 무덤이다.
- 목조탑 양식을 따른 익산 미륵사지 석탑은 사비 시기 무왕 때 세워졌다.
- 부여 정림사지 5층 석탑은 사비 시기의 석탑이다.
| 나는 13세 때 당나라로 유학을 떠났어. 당나라에서 벼슬살이를 하던 중 황소의 난이 일어났어. 그때 황소를 격퇴하자는 글을 써서 꽤 유명해졌지. 이후 벼슬살이를 그만두고 고국으로 돌아와 개혁안 10여 조를 건의하였지만 뜻을 이루지 못했지. 이에 절망하고 속세를 떠나 은둔 생활을 하였어. |
ㄱ.홍경래를 중심으로 일어난 농민 봉기
ㄴ.벽란도에서 비단을 파는 중국 상인
ㄷ.산둥 반도의 신라원에 도착한 신라 사신
ㄹ.빈공과 합격을 위해 당에서 공부하는 신라 유학생
회고의 인물은 신라 하대의 최치원이므로, 산둥 반도 신라원에 도착한 신라 사신과 빈공과를 준비하는 신라 유학생을 볼 수 있었다.
당 유학, '황소의 난' 때 쓴 격문(토황소격문), 귀국 후 '개혁안 10여 조'(시무 10여 조) 건의가 최치원을 가리킨다. 신라원과 빈공과 유학은 모두 신라 하대의 대당 교류 모습이다.
- 홍경래가 이끈 농민 봉기는 조선 순조 때의 일로 시대가 맞지 않는다.
- 벽란도에서 비단을 파는 중국 상인은 고려 시대의 모습이다.
| (가)대업 9년(613년) 양제가 다시 친히 정벌하였다. 이때는 모든 군대에 상황에 맞게 적절히 대응하라고 하였다. 여러 장수가 길을 나누어 성을 공격하니 적의 군세가 날로 위축되었다. - 수서 - (나)당태종이 다시 고구려를 정벌하려 했으나, 조정에서 의논하기를 “고구려가 산에 의지하여 성을 만들어 갑자기 함락할 수 없습니다. …… 지금 소부대를 자주보내어 그 지방을 피곤하게 하고 쟁기를 놓고 보루에 들어가게 하여 1,000리가 쓸쓸해지면 인심이 저절로 떠나 압록강 이북은 싸우지 않고도 얻을 수 있습니다.”하니 이에 따랐다. - 삼국사기 - |
(가)와 (나) 사이에는 안시성 싸움에서 당 태종의 군대를 물리친 일이 들어간다.
(가)는 수 양제의 613년 재침입, (나)는 안시성 싸움(645) 이후 당이 소부대를 보내 고구려를 지치게 하자는 전략으로 바꾼 상황이다. 따라서 그 사이인 645년의 안시성 싸움이 해당한다.
- 영양왕의 요서 선제공격은 598년으로 (가) 이전이다.
- 을지문덕의 살수 대첩은 612년으로 (가) 이전이다.
- 광개토대왕이 신라에 침입한 왜군을 물리친 것은 400년의 일이다.
| 내가 위로는 천지 신령의 도움을 받고 아래로는 종묘 영령의 보살핌을 받아, 흠돌 등의 악행이 쌓이고 가득 차자 그 음모가 탄로나게 되었다. …… 이제는 이미 요망한 무리들을 숙청하여 멀고 가까운 곳에 염려할 것이 없으니, 소집하였던 병마를 속히 돌려보내고 사방에 포고하여 이 뜻을 알게 하라. - 삼국사기 - |
교서를 내린 국왕은 신문왕이며, 그의 재위 기간에 녹읍이 폐지되었다.
'흠돌 등의 악행'은 신문왕 즉위 직후 일어난 김흠돌의 난을 가리킨다. 신문왕은 이를 진압하며 귀족 세력을 숙청하고, 관료전을 지급한 뒤 녹읍을 폐지하였다.
- 독서삼품과는 원성왕 때 실시되었다.
- 김헌창의 난은 헌덕왕 때 일어났다.
- 완도의 청해진은 흥덕왕 때 장보고의 건의로 설치되었다.
| 그는 화엄경의 ‘일체 무애인은 한 길로 생사를 벗어난다.’라는 구절을 따다 이름을 무애라 하고 노래를 지어 세상에 퍼뜨렸다. 일찍이 이것을 가지고 많은 촌락에서 노래하고 춤추며 교화하고 읊다가 돌아왔으므로 가난하고 무지몽매한 무리들까지도 모두 부처의 이름을 알게 되었고 나무아미타불을 부르게 되었다. - 삼국유사 - |
자료의 인물은 원효이며, 그는 십문화쟁론을 저술하였다.
'무애'라는 노래를 지어 촌락을 돌며 교화하고, 무지한 백성까지 '나무아미타불'을 부르게 한 것은 원효의 불교 대중화 활동이다.
- 화엄일승법계도를 지은 것은 의상이다.
- 수선사 결사를 제창한 것은 고려의 지눌이다.
- 교관겸수를 내세운 것은 고려의 의천이다.
사진의 발해 석등과 고구려 양식을 계승한 이불병좌상은 발해의 문화유산이므로, 중앙군으로 10위를 둔 발해에 대한 설명이 옳다.
발해는 3성 6부의 중앙 관제를 갖추고, 왕궁과 수도의 경비를 맡는 중앙군으로 10위를 두었다.
- 좌평이 국정을 총괄한 것은 백제의 관제이다.
- 12목에 지방관을 파견한 것은 고려 성종의 정책이다.
- 상대등이 화백 회의 등 귀족 회의를 주관한 것은 신라이다.

(가)에서 (나)로의 변화는 세종 때 4군 6진 개척으로 압록강~두만강 국경선이 확정되는 과정이며, 같은 시기에 한양 기준 역법서인 칠정산이 편찬되었다.
세종은 최윤덕·김종서를 보내 여진을 몰아내고 4군 6진을 설치하였고, 문화 면에서는 원의 수시력과 아라비아의 회회력을 참고해 한양을 기준으로 한 칠정산 내·외편을 만들었다.
- 곤여만국전도는 17세기 초 서양 문물 수용 과정에서 전래되었다.
- 지전설은 조선 후기 김석문·홍대용 등이 주장하였다.
- 팔만대장경은 고려 때 몽골 침입을 물리치려는 염원으로 조판되었다.
| 전하는 말에 의하면, (가) 은(는) 나주에 10년간 머무르게 되었는데, 어느날 진 위쪽 산 아래에 다섯가지 색의 상서로운 구름이 있어 가보니 샘에서 아리따운 여인이 빨래를 하고 있어 그가 물 한그릇을 청하자, 여인이 버들잎을 띄워 주었는데, 급히 물을 마시지 않게 하기 위함이었다 한다. 여인의 총명함과 미모에 끌려 그녀를 아내로 맞이하였는데 그 분이 장화왕후 오씨부인이고, 그 분의 몸에서 태어난 아들 무(武)가 혜종이 되었다. |
<나주 완사천>![]() |
'나주', '장화왕후 오씨', 아들 무가 '혜종'이 되었다는 내용으로 (가)는 고려 태조 왕건이며, 그는 후대 왕에게 훈요 10조를 남겼다.
왕건은 후백제 견훤과 겨루던 시기에 수군을 이끌고 나주를 공략하였고, 그곳 호족의 딸인 장화왕후와 혼인하였다.
- 과거 제도는 광종이 쌍기의 건의로 도입하였다.
- 향리 제도는 성종 때 지방 호족을 향리로 편입하며 마련되었다.
- 전시과 제도는 경종 때 처음 실시되었다.

지도의 존속 연대로 (가)는 여진(금), (나)는 거란(요), (다)는 송이며, 윤관이 별무반을 편성해 정벌한 대상은 여진이다.
숙종 때 윤관의 건의로 신기군·신보군·항마군으로 이루어진 별무반을 조직하였고, 예종 때 여진을 정벌해 동북 9성을 쌓았다.
- 최우가 강화도로 천도해 항전한 상대는 몽골로, 거란(요)이 아니다.
- 서희가 외교 담판으로 강동 6주를 확보한 상대는 거란(요)으로, 송이 아니다.
- 초조대장경은 거란의 침입을 물리치려는 염원으로 만들어졌으며, 송의 침략과는 관계가 없다.
| 6조는 각기 모든 직무를 먼저 의정부에 품의하고, 의정부는 가부를 헤아린 뒤에 왕에게 아뢰어 (왕의) 전지를 받아 6조에 내려보내어 시행한다. 다만 이조․병조의 제수, 병조의 군사업무, 형조의 사형수를 제외한 판결은 종래와 같이 각 조에서 직접 아뢰어 시행하고 곧바로 의정부에 보고한다. |
자료는 조선의 의정부 서사제이므로, 조선 통치 체제에 해당하는 모든 군현에 수령 파견이 옳다.
6조가 의정부에 먼저 품의하고 의정부가 왕에게 아뢰는 방식은 조선의 의정부 서사제다. 조선은 속현을 없애고 모든 군현에 수령을 보냈다.
- 국립대학 주자감은 발해의 교육 기관이다.
- 화폐와 곡식의 출납 회계를 맡은 삼사는 고려의 기구이며, 조선의 삼사는 언론 기관이다.
- 5품 이상 고위 관리의 자손에게 음서를 준 것은 고려이며, 조선은 음서 범위가 크게 축소되었다.
| 내가 일찍이 송도에 있을 때 의정부를 없애자는 의논이 있었으나, 지금까지 겨를이 없었다. 지난 겨울에 대간에서 작은 허물로 인하여 의정부를 없앨 것을 청하였으나 윤허하지 않았었다. 지난번에 좌정승이 말하기를 “중국에도 승상부가 없으니 의정부를 폐지해야 한다.”라고 하였다. 내가 골똘히 생각해보니 모든 일이 내 한 몸에 모이면 결재하기가 힘은 들겠지만, 임금인 내가 어찌 고생스러움을 피하겠는가. |
자료의 국왕은 태종이며, 그가 추진한 정책은 호패법 실시이다.
의정부를 없애고 모든 일을 왕이 직접 결재하겠다는 주장은 태종의 6조 직계제 시행과 관련된다. 태종은 호패법으로 인구를 파악하고 국가 재정과 군역 기반을 강화하였다.
- 경연을 폐지한 것은 세조이다.
- 집현전을 설치한 것은 세종이다.
- 경국대전은 세조 때 편찬을 시작해 성종 때 완성되었다.
| 1차 예송 (효종 사망) | 2차 예송 (효종비 사망) | |
|---|---|---|
| 1년 주장 | → 9개월 주장 | (가) |
| 3년 주장 | → 1년 주장 | (나) |
1차 예송에서 1년, 2차 예송에서 9개월을 주장한 (가)는 서인이며, 서인은 숙종 때 노론과 소론으로 분화되었다.
3년·1년을 주장한 (나)는 남인이다. 1차 기해예송에서는 서인의 기년설이, 2차 갑인예송에서는 남인의 기년설이 채택되었다.
- 명과 후금 사이 중립 외교는 광해군과 북인 정권의 정책이다.
- 남인의 주장은 2차 예송에서만 채택되었고 1차 예송에서는 서인의 주장이 채택되었다.
- 사화는 16세기 훈구와 사림의 대립으로 일어난 것으로, 17세기 예송 이후의 일이 아니다.
| 1876 | 1882 | 1894 | 1897 | 1905 | |||||||
| (가) | (나) | (다) | (라) | ||||||||
| 강화도조약 | 임오군란 | 갑오개혁 | 대한제국 | 을사늑약 | |||||||
(나) 시기(임오군란~갑오개혁)에 최초의 근대식 병원인 광혜원이 설립되었다는 설명이 옳다.
광혜원은 1885년 알렌의 건의로 세워졌으므로 1882년과 1894년 사이인 (나)에 해당한다.
- 박문국 설치와 한성순보 발간은 1883년으로 (가)가 아니라 (나) 시기이다.
- 덕원 주민들이 세운 원산학사는 1883년으로 (다)가 아니라 (나) 시기이다.
- 영국의 거문도 불법 점령은 1885년으로 (라)가 아니라 (나) 시기이다.
| 임술일에 왕이 다음과 같은 조서를 내렸다. “…… 나에게 불평을 품은 나머지 당돌하게 병란을 일으켜 관원들을 잡아 가두었으며 천개(天開)라는 연호를 표방하고 군호(軍號)를 충의(忠義)라고 하였으며 공공연히 병졸들을 규합하여 서울을 침범하려 한다. 사변이 뜻밖에 발생하여 그 세력을 막을 도리가 없다.” - 고려사 - |
밑줄 친 '병란'은 묘청의 서경 천도 운동이며, 이 세력은 칭제건원과 금국 정벌을 주장하였다.
'천개'라는 연호와 '충의'라는 군호를 내세운 것은 인종 때 묘청 등이 서경에서 일으킨 반란의 단서다.
- 중방을 중심으로 권력을 행사한 것은 무신 정권 초기의 모습이다.
- 웅천주를 기반으로 반란을 일으킨 것은 신라 하대 김헌창이다.
- 왕의 측근을 제거하고 인종을 감금한 것은 이자겸의 난이다.

종로의 시전과 함께 이현·칠패가 사상의 상권으로 성장한 것은 조선 후기이므로, 고려 성종 때 주조된 건원중보를 받는 보부상의 모습은 적절하지 않다.
조선 후기에는 상평통보가 전국적으로 유통되었고, 서울에서는 이현(동대문 안)과 칠패(남대문 밖)의 난전이 시전과 경쟁하였다.
- 이앙법 확산과 쌀의 상품화로 밭을 논으로 바꾸는 일은 조선 후기의 모습이다.
- 균역법 시행으로 생긴 결작을 지주가 소작농에게 떠넘긴 것도 조선 후기의 모습이다.
- 객주 등 도고 상인의 매점매석으로 물가가 오른 것도 조선 후기의 모습이다.
| ㆍ연등은 부처를 섬기는 것이고, ( 가 )은/는 하늘의 신령과 5악, 명산, 대천, 용신을 섬기는 것이다. 후세에 간신이 가감을 건의하는 자가 있으면, 마땅히 이를 금지시키도록 하라. - 훈요 10조 - ㆍ우리나라는 봄에 연등을 베풀고, 겨울에는 ( 가 )을/를 열어 널리 사람을 동원하고 노역이 매우 번다하오니 원컨대 이를 감하여 백성들이 힘을 펴게 하소서. - 시무 28조 - |
(가)는 고려의 팔관회이며, 외국 상인들에게 무역의 장이 되기도 하였다.
훈요 10조의 '하늘의 신령과 5악, 명산, 대천, 용신을 섬기는 것', 시무 28조의 '겨울에 여는 행사'가 팔관회를 가리킨다. 팔관회 때 송·여진·아라비아 상인 등이 와서 축하하고 교역하였다.
- 소격서는 조선에서 도교 제사를 주관한 관청이다.
- 향음주례와 향사례는 조선 향촌 사회의 유교 의례이다.
- 향나무를 묻는 매향 활동은 향도가 행한 불교 신앙 활동이다.
| 문․무관, 유생 중에 어리고 총명한 자 40명을 뽑아 입학시키고 벙커와 길모어 등을 교사로 초빙하여 서양 문자를 가르쳤다. 문관으로는 김승규와 신대균 등 여러 명이 있고, 유사로는 이만재와 서상훈 등 여러 명이 있었다. 사색당파를 골고루 배정하여 당대 명문 집안에서 선발하였다. - 매천야록 - |
자료의 교육 기관은 육영공원이며, 학생을 좌원과 우원의 두 반으로 편성하였다.
'벙커와 길모어' 등 미국인 교사를 초빙해 명문가 자제와 젊은 관리에게 서양 학문을 가르친 정부 설립 학교가 육영공원이다. 좌원에는 현직 관리, 우원에는 양반 자제를 입학시켰다.
- 관민이 합심하여 설립한 학교는 원산학사이다.
- 육영공원은 경성 제국 대학으로 이어지지 않았다.
- 근대식 사관 양성을 목적으로 한 기관은 연무공원이다.
![]() | <외규장각 의궤> 145년 만에 2011년 의궤반환 …… |
외규장각 의궤는 병인양요 때 강화도를 침공한 프랑스군이 약탈해 간 문화재이므로, 병인양요의 전개 과정을 조사하는 것이 적절하다.
병인박해를 구실로 프랑스 함대가 강화도를 점령하였다가 양헌수 부대에 패해 물러나면서 외규장각 도서를 가져갔고, 2011년에 대여 형식으로 돌아왔다.
- 운요호 사건은 일본이 일으킨 사건으로 강화도 조약 체결의 계기가 되었다.
- 제너럴 셔먼호 사건은 미국 상선이 평양에서 불탄 사건으로 신미양요의 배경이 되었다.
- 오페르트 도굴 사건은 남연군 묘 도굴 시도로 통상 수교 거부 정책을 강화하는 결과를 낳았다.
| 구분 | 홍범도(1868∼1943) | 김좌진(1889∼1930) |
| 출신 | 가난한 농민의 아들, 포수 | 홍성 지주의 아들 |
| 1907년 전후 | 의병 항쟁에 가담 | 애국 계몽 운동 (교육 운동) 전개 |
| 1910년대 | 연해주와 만주에서 활동 | 국내 비밀 결사에 가입하여 활동 |
| 3·1 운동 이후 | 대한 독립군 조직 | 북로 군정서 조직 |
| 1920년 | (가) | |
| 1921년 이후 | 연해주에서 후진 양성 | 만주에서 독립군 활동, 신민부 간부 |
(가)에는 1920년 두 인물이 함께 일본군을 크게 물리친 청산리 전투가 들어간다.
김좌진의 북로 군정서와 홍범도의 대한 독립군 등 연합 부대가 1920년 만주 화룡현 청산리 일대에서 대승을 거두었다.
- 한·중 연합 작전은 1930년대 만주의 한국 독립군·조선 혁명군이 전개하였다.
- 의열단은 김원봉이 조직한 단체로 두 인물의 1920년 활동과 관련이 없다.
- 대한민국 임시 정부 참여는 표에 나타난 두 인물의 공통 활동이 아니다.
| •장수왕은 수도를 이곳으로 옮겨 왕권을 강화하고 남진 정책을 추진하였다. •묘청은 이곳으로 천도하여 칭제건원과 금을 정벌할 것을 주장하였다. |
'이곳'은 평양이며, 탐구 활동으로는 물산 장려 운동이 시작된 지역을 찾아보는 것이 적절하다.
장수왕이 천도해 남진 정책을 편 곳, 묘청이 천도를 주장한 서경이 모두 평양이다. 물산 장려 운동은 1920년 조만식 등이 평양에서 시작하였다.
- 강화도 조약에 따른 개항장은 부산·원산·인천으로 평양이 아니다.
- 의열단은 만주 지린에서 결성되어 중국 관내를 근거지로 활동하였다.
- 조선 형평사는 진주에서 조직되었다.
| 학생, 대중이여 궐기하라! 우리의 슬로건 아래로! •검거된 학생들을 즉시 우리 손으로 탈환하자. •경찰의 교내 진입을 절대 반대한다. •언론․출판․집회․결사․시위의 자유를 획득하자. •식민지적 노예 교육 제도를 철폐하라. •전국 학생 대표자 회의를 개최하라. - 학생 투쟁 지도 본부 격문 - |
자료의 민족 운동은 광주 학생 항일 운동이며, 이때 신간회가 진상 조사단을 파견하였다.
'검거된 학생 탈환', '식민지적 노예 교육 제도 철폐', '전국 학생 대표자 회의' 등의 구호는 1929년 광주에서 시작된 학생 운동의 격문이다.
- 학도 지원병제는 1940년대 전시 동원 정책으로 이 운동과 시기가 맞지 않는다.
- 대한민국 임시 정부 수립에 영향을 준 것은 3·1 운동이다.
- 일제 허용 범위 내 자치권 획득 운동은 타협적 민족주의자들의 자치 운동이다.
| (가)마산, 서울 기타 각지의 데모는 주권을 빼앗긴 국민의 울분을 대신하여 궐기한 학생들의 순수한 정의감의 발로이며 부정과 불의에 항거하는 민족 정기의 표현이다. …… 3․15 선거는 불법 선거이다. 공명 선거에 의하여 정․부통령 선거를 다시 실시하라. (나)국가의 미래요 소망인 꽃다운 젊은이를 야만적인 고문으로 죽여놓고 …… 현 정권에게 국민의 분노가 무엇인지를 분명히 보여 주고, 국민적 여망인 개헌을 일방적으로 파기한 4ㆍ13 호헌 조치를 철회시키기 위한 민주 장정을 시작한다. |
(가) 4·19 혁명과 (나) 6월 민주 항쟁은 모두 그 결과로 헌법이 개정되었다.
4·19 혁명 뒤에는 내각 책임제 개헌이, 6월 민주 항쟁 뒤에는 대통령 직선제 개헌이 이루어졌다. '3·15 선거', '4·13 호헌 조치'가 각각의 단서다.
- 유신 체제에 대한 저항은 1970년대의 일로 4·19 혁명과 관련이 없다.
- 신군부의 권력 장악은 10·26 사태 이후의 일로 4·19 혁명의 결과가 아니다.
- 대통령이 하야한 계기는 4·19 혁명이며, 6월 민주 항쟁은 6·29 선언으로 이어졌다.
| (가) | |||||||||||
| 모스크바 3국 외상회의 | 1차 미․소 공동위원회 | 좌우합작 7원칙 합의 | 제헌 국회 개원 | 여수․순천 10․19 사건 | |||||||
이승만의 정읍 발언은 (가) 시기의 일이 아니다.
(가)는 좌우 합작 7원칙 합의(1946.10)와 제헌 국회 개원(1948.5) 사이이다. 정읍 발언은 1946년 6월로 좌우 합작 7원칙 합의 이전이다.
- 제주 4·3 사건은 1948년 4월로 (가) 시기에 해당한다.
- 5·10 총선거는 1948년 5월 10일로 제헌 국회 개원 직전, (가) 시기에 해당한다.
- 제2차 미·소 공동 위원회는 1947년 5월로 (가) 시기에 해당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