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원직 9급 한국사] 18년 1회차
법원직 9급 한국사 기출문제

18년 1회차

총 25문항 · 객관식 · A4 약 1장

1 / 1
A4정답 포함
법원직 9급 한국사 기출문제모두CBT · moducbt.com

18년 1회차

총 25문항 · 객관식 · 정답·해설 포함
문제 1
다음 (가), (나)의 선언문 사이의 시기에 있었던 사실로 가장 옳은 것은?
(가)남과 북은 …… 쌍방의 관계가 나라와 나라 사이의 관계가 아닌 통일을 지향하는 과정에서 잠정적으로 형성되는 특수 관계라는 것을 ……
제1조남과 북은 서로 상대방의 체제를 인정하고 존중한다.
제9조남과 북은 상대방에 대해 무력을 사용하지 않으며 상대방을 무력으로 침략하지 아니한다.
(나)1. 나라의 통일 문제를 우리 민족끼리 서로 힘을 합쳐 자주적으로 해결해 나가기로 하였다.
2.나라의 통일을 위한 남측의 연합제안과 북측의 낮은 단계의 연방제안이 서로 공통성이 있다고 인정하고, 이 방향에서 통일을 지향하기로 하였다.
1금강산 관광이 시작되었다.
2개성 공단 건설 사업이 시작되었다.
3최초로 남․북 이산가족이 상봉하였다.
4경의선 철로 복원 사업이 착공되었다.
정답 및 해설

두 선언 사이에 있었던 일은 금강산 관광의 시작(1998)이다.

(가)는 남북 관계를 ‘특수 관계’로 규정한 남북 기본 합의서(1991), (나)는 연합제·낮은 단계 연방제의 공통성을 인정한 6·15 남북 공동 선언(2000)이다.

  • 개성 공단 건설 사업은 6·15 선언 이후인 2000년대 초에 착공되었다.
  • 최초의 남북 이산가족 상봉은 1985년 고향 방문단 교환으로, (가)보다 앞선다.
  • 경의선 철로 복원 사업은 6·15 선언 이후인 2000년 9월에 착공되었다.
문제 2
다음 법령에 대한 설명으로 옳은 것은?
제5조 정부는 아래에 의하여 농지를 취득한다.
1. 아래의 농지는 정부에 귀속한다.
(가) 법령 내지 조약에 의하여 몰수 또는 국유로 된 농지
(나) 소유권의 명의가 분명치 않은 농지
2. 아래의 농지는 적당한 보상으로 정부가 매수한다.
(가) 농가 아닌 자의 농지
(나) 자경(自耕)하지 않는 자의 농지
제12조 농지의 분배는 농지의 종목, 등급 및 농가의 능력 기타에 기준한 점수제에 의거하되 1가당 총 경영 면적 3정보를 초과하지 못한다.
1미군정 시기에 제정되었다.
2유상매수․무상분배의 방식으로 실시되었다.
3법령이 실시되어 자작농이 크게 증가하였다.
4이에 영향을 받아 북한에서도 토지개혁 법령이 제정되었다.
정답 및 해설

제시된 법령은 농지 개혁법(1949)이며, 시행 결과 자작농이 크게 증가하였다.

‘농가 아닌 자’·‘자경하지 않는 자’의 농지를 정부가 매수하고, 1가당 ‘3정보’ 상한으로 분배한 점이 단서이다.

  • 미군정이 아니라 정부 수립 후 제헌 국회에서 제정되었다.
  • 유상 매수·유상 분배 방식이었으며, 무상 분배가 아니었다.
  • 북한의 토지 개혁(1946, 무상 몰수·무상 분배)이 이보다 먼저 실시되었으므로 영향 관계가 거꾸로이다.
문제 3
(가), (나)에 대한 설명으로 옳은 것은?
(가)5조 - 나는 삼한 산천 신령의 도움을 받아 왕업을 이루었다. 서경은 수덕이 순조로워 우리나라 지맥의 근본이 되니 만대 왕업의 땅이다. 1년에 100일 이상 머물러 왕실의 안녕을 이루어야할 것이다.
- 고려사 -
(나)20조 - 불교는 몸을 닦는 근본이며 유교는 나라를 다스리는 근원이니, 몸을 닦는 것은 내생을 위한 것이며, 나라를 다스리는 일은 곧 오늘의 할 일입니다. 오늘은 극히 가깝고 내생은 지극히 먼 것이니, 가까운 것을 버리고 먼 것을 구하는 일이 그릇된 일이 아니겠습니까?
- 고려사 -
1(나)가 (가)보다 먼저 발표되었다.
2(가)를 발표할 당시 양현고를 설치하였다.
3(가)를 발표한 왕이 과거제도를 실시하였다.
4(나)가 작성될 당시의 왕이 국자감을 설치하였다.
정답 및 해설

(나)를 올린 시기의 왕인 성종은 국자감을 설치하였다.

(가)는 ‘서경’ 중시와 ‘삼한 산천 신령’을 강조한 태조의 훈요 10조, (나)는 유교를 치국의 근원으로 삼자는 최승로의 시무 28조로 성종 때 올려졌다.

  • 훈요 10조(태조)가 시무 28조(성종)보다 먼저이다.
  • 양현고는 예종 때 설치된 장학 재단이다.
  • 과거 제도는 광종 때 쌍기의 건의로 처음 실시되었다.
문제 4
(가) 시기에 발생한 사건으로 옳은 것은?
너희 나라와 우리나라의 사이에는 애당초 소통이 없었고, 또 서로 은혜를 입거나 원수진 일도 없었다. 그런데 이번 덕산묘소에서 저지른 변고야말로 어찌 인간의 도리상 차마 할 수 있는 일이겠는가?

⇩
(가)
⇩
조약 체결 이후 조선국 항구에 거주하는 일본인은 쌀과 잡곡을 수출, 수입할 수 있게 되었으며, 일본국 소속의 선박은 항세를 납부하지 않게 되었다.
1영남 유생들은 “조선책략”의 내용을 비판하였다.
2원산과 인천이 개항되어 일본과의 무역이 시작되었다.
3정부는 통리기무아문을 새로 설치하여 정국을 운영하였다.
4어재연이 이끄는 부대가 전력의 열세로 결국 함락 당하였다.
정답 및 해설

(가) 시기의 사건은 신미양요(1871) 때 어재연 부대가 광성보에서 함락된 일이다.

앞 자료는 ‘덕산 묘소’의 변고, 곧 오페르트 도굴 사건(1868)이고, 뒤 자료는 양곡 수출입과 항세 면제를 규정한 조·일 무역 규칙(1876)이다.

  • 영남 유생들이 ‘조선책략’을 비판한 영남 만인소는 1881년의 일이다.
  • 원산(1880)과 인천(1883)의 개항은 강화도 조약 이후이다.
  • 통리기무아문은 1880년에 설치되었다.
문제 5
(가), (나)를 주장한 승려들에 관한 설명으로 옳은 것은?
(가)교(敎)를 배우는 이는 대개 안의 마음을 버리고 외면에서 구하고, 선(禪)을 익히는 이는 인연을 잊고 안의 마음을 밝히기를 좋아하니, 모두 한쪽에 치우친 것으로 두 극단에 모두 막힌 것이다.
(나)지금의 불교계를 보면, 아침저녁으로 하는 일들이 비록 부처의 법에 의지하였다고 하나, 자신을 내세우고 이익을 구하는 데 열중하여 세속의 일에 골몰한다. 도덕을 닦지 않고 옷과 밥만 허비하니, 비록 출가하였다고 하나 무슨 덕이 있겠는가?
1(가)-천태종의 신앙 결사체인 백련사를 조직하였다.
2(가)-중국에서 도입한 법안종을 중심으로 선종을 정리하였다.
3(나)-선을 중심으로 교학을 포용하고자 하였다.
4(나)-유교와 불교의 통합을 시도하며 유불 일치설을 주장하였다.
정답 및 해설

(나)를 주장한 지눌은 선을 중심으로 교학을 포용하고자 하였다.

(가)는 교와 선이 한쪽에 치우침을 비판한 의천의 교관겸수, (나)는 세속에 골몰한 불교계를 비판하며 결사를 제창한 지눌의 정혜결사문이다.

  • 천태종 신앙 결사인 백련사를 조직한 승려는 요세이다.
  • 의천은 천태종을 개창해 교종 중심으로 선종을 통합하려 하였으며, 법안종 중심의 선종 정리와는 관계가 없다.
  • 유불 일치설을 주장한 승려는 지눌의 제자 혜심이다.
문제 6
(가) ∼ (라)를 일어난 순서대로 바르게 나열한 것은?
(가)국학을 태학(감)으로 고치고 학문을 장려하였다.
(나)원효는 모든 것이 한마음에서 나온다는 일심사상의 이론적 체계를 마련하였다.
(다)유교 경전에 대한 이해 수준에 따라 관리를 채용하는 독서삼품과를 실시하였다.
(라)최치원은 빈공과에 합격한 뒤에 황소를 격퇴하는 글을 써서 당에서 명문장가로 유명해졌다.
1(가) - (나) - (다) - (라)
2(가) - (다) - (나) - (라)
3(나) - (가) - (다) - (라)
4(나) - (가) - (라) - (다)
정답 및 해설

일어난 순서는 (나) - (가) - (다) - (라)이다.

원효의 일심 사상(7세기 통일 전후) → 경덕왕의 국학 개칭(8세기 중엽) → 원성왕의 독서삼품과(788) → 최치원의 토황소격문(9세기 후반) 순이다.

  • (가)를 맨 앞에 둔 배열은 원효가 경덕왕보다 앞선 인물이라는 점에 어긋난다.
  • (라)를 (다)보다 앞에 둔 배열은 최치원의 활동(9세기 후반)이 원성왕 대보다 늦다는 점에 어긋난다.
문제 7
(가), (나)에 관한 설명으로 옳은 것은?
왕도병마사식목도감(가)상서성중추원어사대(나)
1(가)-소속 관원인 승선은 대간으로 불렸다.
2(가)-국정을 총괄하고 정책을 심의․결정하는 최고 관서이다.
3(나)-관리의 비리를 감찰하는 기구이다.
4(나)-재신과 추밀이 모여 관리 임용을 결정하였다.
정답 및 해설

(가)는 중서문하성으로, 국정을 총괄하고 정책을 심의·결정하는 최고 관서이다.

고려 중앙 관제는 2성(중서문하성·상서성) 6부를 중심으로, 중추원·어사대·도병마사·식목도감 등이 함께 운영되었다. 도표에 상서성이 따로 있으므로 (가)는 그 짝인 중서문하성이다.

  • 승선은 중서문하성이 아니라 중추원 소속으로 왕명 출납을 맡았으며, 대간으로 불린 것은 어사대 관원과 중서문하성의 낭사이다.
  • 관리 비리 감찰은 도표에 따로 표시된 어사대의 기능이므로 (나)의 설명이 아니다.
  • 재신과 추밀이 모여 회의한 기구는 도표에 따로 표시된 도병마사·식목도감이며, 관리 임용 결정 기구도 아니다.
문제 8
다음 주장이 발표된 시기로 옳은 것은?
지금의 조선 민족에게는 왜 정치적 생활이 없는가? …… 일본이 조선을 병합한 이래로 조선인에게는 모든 정치 활동을 금지한 것이 첫째 원인이다. …… 지금까지 해 온 정치적 운동은 모두 일본을 적대시하는 운동뿐이었다. 이런 종류의 정치 운동은 해외에서나 할 수 있는 일이고, 조선 내에서는 허용되는 범위 내에서 일대 정치적 결사를 조직해야 한다는 것이 우리의 주장이다.
- 이광수, 동아일보 -

(가)(나)(다)(라)
1912 1919 1923 1927 1929
조선태형령 3.1운동 민립대학 신간회 광주학생
제정 발생 설립기성회 설립 항일운동
조직 발생
1(가)
2(나)
3(다)
4(라)
정답 및 해설

이 주장은 (다) 시기, 곧 민립 대학 설립 기성회 조직(1923)과 신간회 설립(1927) 사이에 발표되었다.

이광수가 동아일보에 실은 ‘민족적 경륜’(1924)으로, 일제가 허용하는 범위 안에서 정치적 결사를 조직하자는 자치론이다. 이 자치론에 맞서 비타협적 민족주의와 사회주의 세력이 연대해 신간회가 결성되었다.

  • (가) 시기(1912~1919)는 무단 통치기로 정치 결사 자체가 불가능했다.
  • (나) 시기(1919~1923)는 3·1 운동 직후 문화 통치로 전환되던 때로, 민족적 경륜 발표보다 앞선다.
  • (라) 시기(1927~1929)는 이미 자치론에 대항해 신간회가 결성된 이후이다.
문제 9
(가) 세금 제도에 관한 설명으로 옳은 것은?
우의정 김육이 아뢰다. “(중략) (가) 는/은 역을 고르게 하여 백성을 편안케 하니 실로 시대를 구할 수 있는 좋은 계책입니다. (중략) 다만 교활한 아전은 명목이 간단함을 싫어하고 모리배들은 방납하기 어려움을 원망하여 반드시 헛소문을 퍼뜨려 어지럽게 할 것입니다. 삼남에는 부호가 많은데 이 법의 시행을 부호들이 좋아하지 않으나 국가에서 법령을 시행할 때에는 마땅히 소민들이 원하는 대로 해야 합니다.”
1풍흉에 관계없이 1결당 쌀 4 ∼ 6두씩을 내게 하였다.
2(가)의 실시로 공인이라는 특허 상인이 등장하게 되었다.
3(가) 시행 이후에는 현물 납부가 완전히 사라지게 되었다.
4(가)의 시행으로 줄어든 재정을 보충하고자 선무군관포가 신설되었다.
정답 및 해설

(가)는 대동법이며, 그 실시로 관청에 물품을 조달하는 공인이 등장하였다.

김육이 ‘방납’의 폐단을 막고 삼남 지역까지 확대 시행을 주장한 점이 단서이다. 공납을 토지 결수 기준으로 쌀·베·동전으로 거두었다.

  • 풍흉에 관계없이 1결당 쌀 4~6두를 거둔 것은 전세 제도인 영정법이다.
  • 대동법 시행 후에도 별공·진상 등 현물 납부는 남아 있었다.
  • 선무군관포는 균역법 시행으로 줄어든 군포 수입을 보충하기 위한 것이다.
문제 10
다음 (가), (나) 사이의 시기에 있었던 사실로 옳지 않은 것은?
(가)대왕을 도와 조그마한 공을 이루어 삼한을 한 집으로 만들었으며, 백성들은 두 마음이 없게 되었습니다(三韓爲一家 百姓無二心). 비록 아직 태평한 세상에 이르지는 못하였으나 조금 편안한 상태는 되었습니다.
(나)원종과 애노 등이 사벌주에서 반란을 일으키니 왕이 나마(관직명) 영기에게 명하여 잡게 하였으나 영기가적진을 쳐다보고는 두려워하여 나아가지 못하였다.
1발해의 장문휴가 산둥 반도를 공격하였다.
2장보고의 도움을 받아 신무왕이 즉위하였다.
3궁예가 개성을 수도로 삼고 후고구려를 건국하였다.
4발해 문왕이 상경 용천부에서 동경 용원부로 수도를 옮겼다.
정답 및 해설

두 시기 사이에 있었던 일이 아닌 것은 궁예의 후고구려 건국(901)이다.

(가)는 ‘삼한을 한 집으로’ 만들었다는 삼국 통일기(7세기 후반) 김유신의 말, (나)는 진성 여왕 때 원종·애노의 난(889)이다. 후고구려 건국은 (나)보다 늦다.

  • 발해 장문휴의 산둥 반도 공격은 무왕 때(732)로 두 시기 사이이다.
  • 장보고의 도움으로 신무왕이 즉위한 것은 839년으로 두 시기 사이이다.
  • 발해 문왕이 동경 용원부로 천도한 것은 8세기 후반으로 두 시기 사이이다.
문제 11
다음 군사 조직에 대한 설명으로 가장 옳은 것은?
국왕의 행차가 서울로 돌아왔으나, …… 이때에 임금께서 도감을 설치하여 군사를 훈련시키라고 명하시고 나를 그 책임자로 삼으시므로, …… 얼마 안 되어 수천 명을 얻어 조총 쏘는 법과 창, 칼 쓰는 기술을 가르치게 하였다. 또 당번을 정하여 궁중을 숙직하게 하고, 국왕의 행차가 있을 때 이들로써 호위하게 하니 민심이 점차 안정되었다.
- 서애집 -
1갑사와 정군으로 구성되었다.
2포수, 사수, 살수로 조직되었다.
3제승방략 체제에 맞는 군사 조직이었다.
4신분 구분 없이 노비에서 양반까지 편성되었다.
정답 및 해설

자료의 군사 조직은 훈련도감으로, 포수·사수·살수의 삼수병으로 조직되었다.

‘서애집’(유성룡), 임진왜란 중 ‘도감’을 설치하여 ‘조총 쏘는 법’을 가르쳤다는 내용이 단서이다.

  • 갑사와 정군(정병)은 조선 전기 중앙군인 5위의 구성이다.
  • 제승방략 체제는 조선 전기 지방 방어 체제로, 왜란 후 개편된 훈련도감과 맞지 않는다.
  • 노비에서 양반까지 신분 구분 없이 편성된 것은 지방군인 속오군이다.
문제 12
(가), (나) 시기의 지방 행정 제도에 대한 설명으로 옳은 것은?
(가)5도 양계를 중심으로 지방 제도가 마련되었다.
(나)전국을 8도로 나누고, 그 아래에 부·목·군·현을 설치하였다.
1(가)-5도에 관찰사가 파견되었다.
2(가)-모든 군현에 수령이 파견되었다.
3(나)-유향소를 설치하여 수령을 보좌하였다.
4(나)-향리는 행정·사법·군사권을 행사하는 국왕의 대리인이다.
정답 및 해설

(나) 조선 시대에는 유향소를 설치하여 수령을 보좌하고 향리를 감찰하였다.

(가)는 5도 양계의 고려, (나)는 8도 아래 부·목·군·현을 둔 조선의 지방 제도이다.

  • 고려의 5도에는 관찰사가 아니라 안찰사가 파견되었다.
  • 고려는 수령이 파견되지 않은 속현이 더 많았으며, 모든 군현에 수령을 파견한 것은 조선이다.
  • 조선에서 행정·사법·군사권을 가진 국왕의 대리인은 수령이며, 향리는 수령을 보좌하는 아전으로 지위가 낮아졌다.
문제 13
(가) 정책에 대한 설명으로 옳은 것은?
중농 학파인 유형원은 토지개혁을 주장하였는데, “반계수록”에서 자영농을 육성하는 방법으로 (가)을/를 주장하였다.
1영업전을 설정하여 최소한의 농민 생활을 보장하고자 하였다.
2신분 차별 없이 모든 사람에게 균등한 토지 분배를 강조하였다.
3관리, 선비, 농민 등에게 차등을 두어 토지를 분배할 것을 주장하였다.
4한 마을을 단위로 토지를 공동 소유하고 공동 경작할 것을 강조하였다.
정답 및 해설

(가)는 유형원의 균전론으로, 관리·선비·농민 등 신분에 따라 차등을 두어 토지를 분배하자는 주장이다.

‘반계수록’과 자영농 육성이 단서이다.

  • 영업전을 설정해 매매를 금지하자는 것은 이익의 한전론이다.
  • 균전론은 신분 차별 없는 균등 분배가 아니라 신분별 차등 분배를 전제로 하였다.
  • 마을 단위 공동 소유·공동 경작은 정약용의 여전론이다.
문제 14
다음 농법의 결과로 나타난 현상으로 옳지 않은 것은?
가물 때도 마르지 않는 무논을 가려 2월 하순에서 3월 상순까지에 갈아야 한다. 그 무논의 10분의 1에 모를 기르고 나머지 9분에는 모를 심을 수 있게 준비한다. 먼저, 모를 기를 자리를 갈아 법대로 잘 다듬고 물을 빼고서 부드러운 버드나무 가지를 꺾어다 두텁게 덮은 다음 밟아 주며, 바닥을 볕에 말린 뒤 물을 댄다. …… 모가 4촌(寸) 이상 자라면 옮겨 심을 수 있다.
1농민 수입의 증가로 농촌 내 빈부격차가 줄어들었다.
2농사에 필요한 노동력이 절감되어 광작이 가능해졌다.
3벼․보리의 이모작이 가능해져 보리 농사가 성행하였다.
4머슴을 고용하여 농토를 직접 경영하는 지주가 생겨났다.
정답 및 해설

제시된 농법은 이앙법(모내기법)이며, 그 결과 농촌의 빈부 격차는 줄어든 것이 아니라 더 커졌다.

못자리에서 모를 길러 옮겨 심는다는 내용이 단서이다. 소수 농민이 넓은 땅을 경작하면서 다수 농민은 토지에서 밀려났다.

  • 제초 노동력이 줄어 한 사람이 넓은 땅을 경작하는 광작이 가능해졌다.
  • 벼를 늦게 옮겨 심을 수 있어 벼·보리 이모작이 가능해졌다.
  • 머슴을 고용해 농토를 직접 경영하는 지주(경영형 부농)가 생겨났다.
문제 15
(가)∼(마)를 일어난 순서대로 바르게 나열한 것은?
(가)브라운 각서 체결
(나)한․일 기본 조약 조인
(다)전태일 분신자살 사건
(라)7․4 남북 공동 성명 발표
(마)김대중의 제7대 대통령 선거 출마
1(가) - (나) - (다) - (라) - (마)
2(가) - (다) - (나) - (마) - (라)
3(나) - (가) - (다) - (라) - (마)
4(나) - (가) - (다) - (마) - (라)
정답 및 해설

일어난 순서는 (나) - (가) - (다) - (마) - (라)이다.

한·일 기본 조약(1965) → 브라운 각서(1966) → 전태일 분신(1970.11) → 김대중의 제7대 대선 출마(1971.4) → 7·4 남북 공동 성명(1972) 순이다.

  • (가)를 맨 앞에 둔 배열은 한·일 기본 조약이 브라운 각서보다 먼저라는 점에 어긋난다.
  • (라)를 (마)보다 앞에 둔 배열은 1971년 대선이 1972년 공동 성명보다 먼저라는 점에 어긋난다.
문제 16
다음의 봉기를 일으킨 주동자에 관한 설명으로 옳은 것은?
경계 이후 공경대부는 천예 속에서 많이 나왔다. 장상의 종자가 어찌 따로 있겠는가? 때가 오면 누구나 할 수 있는 것이다. 우리가 어찌 상전의 채찍 밑에서 힘겨운 일에 시달리기만 하겠는가. (중략) 모두 자신의 주인을 죽이고 천예들의 호적을 불살라서 삼한에 천인이 없게 하면 공경과 장상은 우리 모두 할 수 있다.
- 고려사 -
1서경의 유수로서, 정권 탈취를 목적으로 하였다.
2개경에서 노비들을 모아서 노비 해방을 주장하였다.
3경주 지역 세력과 연합하여 신라 부흥을 주장하였다.
4공주 명학소에서 신분 차별에 반발하여 봉기를 일으켰다.
정답 및 해설

자료는 무신 정권기 만적의 난(1198)으로, 만적은 개경에서 노비들을 모아 노비 해방과 정권 장악을 꾀하였다.

‘장상의 종자가 어찌 따로 있겠는가’, ‘천예들의 호적을 불살라’라는 구절이 단서이다.

  • 서경 유수로서 무신 정권에 맞서 봉기한 인물은 조위총이다.
  • 경주 일대에서 신라 부흥을 내건 봉기는 이비·패좌 등의 난이다.
  • 공주 명학소에서 봉기한 것은 망이·망소이의 난이다.
문제 17
다음 자료가 반포되기 이전에 실시된 정책으로 옳은 것은?
1.청에 의존하는 생각을 버리고 자주독립의 기초를 세운다.
2.왕위 계승의 법칙과 종친․외척과의 구별을 명확히 한다.
6.납세는 법으로 정하고 함부로 세금을 거두지 않는다.
9.왕실과 관청의 1년 회계를 계획한다.
1한성 사범 학교가 설립되었다.
2중앙에 친위대, 지방에 진위대를 설치하였다.
3지방 행정 체제를 23부에서 13도로 개편하였다.
4청의 연호를 쓰지 않고 개국 기년을 사용하였다.
정답 및 해설

자료는 홍범 14조이며, 그 이전에 실시된 정책은 청의 연호 대신 개국 기년을 사용한 것이다(제1차 갑오개혁).

‘청에 의존하는 생각을 버리고 자주독립’이라는 제1조가 단서로, 홍범 14조는 제2차 갑오개혁 때 반포되었다.

  • 한성 사범 학교는 홍범 14조 이후 교육 입국 조서에 따라 설립되었다.
  • 중앙의 친위대·지방의 진위대 설치는 을미개혁 때이다.
  • 23부를 13도로 개편한 것은 1896년의 일로, 23부 자체가 제2차 갑오개혁 때 마련되었다.
문제 18
다음 자료를 주장한 인물에 관한 설명으로 옳은 것은?
미군정 아래에서 육성된 그들은 경찰을 시켜 선거를 독점하도록 배치하고 인민의 자유를 유린하고 있다. (중략) 나는 통일된 조국을 건설하려다 38선을 베고 쓰러질지언정, 일신의 구차한 안일을 위하여 단독 정부를 세우는 데는 협력하지 않겠다.
1한국 민주당을 결성하였다.
25․10 총선거에 불참하였다.
3건국 준비 위원회를 주도하였다.
4제헌 국회에서 대통령으로 당선되었다.
정답 및 해설

자료의 인물은 김구이며, 그는 단독 정부 수립에 반대하여 5·10 총선거에 불참하였다.

‘38선을 베고 쓰러질지언정’ 단독 정부 수립에 협력하지 않겠다는 ‘삼천만 동포에게 읍고함’이 단서이다.

  • 한국 민주당은 송진우·김성수 등이 결성하였다.
  • 건국 준비 위원회는 여운형이 주도하였다.
  • 제헌 국회에서 대통령으로 선출된 인물은 이승만이다.
문제 19
다음의 사건이 벌어진 시기의 상황으로 가장 적절한 것은?
당나라 수군의 거점인 등주성에 한바탕 난리가 벌어졌다. 장문휴가 이끄는 발해 군대가 등주성을 기습했기 때문이다. 등주 자사까지 전사했다는 소식에 당 조정은 신라에 군사 지원을 요청하였다. 신라군은 발해를 공격했지만 추위와 폭설로 철수할 수밖에 없었다.
1‘대흥’이라는 연호를 사용하였다.
23성 6부제의 중앙관제를 정비하였다.
3전성기를 맞이하여 ‘해동성국’이라고 불리웠다.
4돌궐․일본과 친교를 강화하며 당․신라에 맞섰다.
정답 및 해설

사건은 발해 무왕 때로, 무왕은 돌궐·일본과 친교를 강화하며 당·신라에 맞섰다.

‘장문휴’가 ‘등주’를 기습했다는 내용이 단서이다. 당은 신라에 발해 공격을 요청하였다.

  • ‘대흥’ 연호는 문왕이 사용하였다.
  • 3성 6부의 중앙 관제를 정비한 왕은 문왕이다.
  • ‘해동성국’으로 불린 전성기는 선왕 때이다.
문제 20
다음 자료의 시기에 해당하는 상황으로 옳은 것을 <보기>에서 모두 고른 것은?
고려대왕 상왕공과 신라 매금은 세세토록 형제같이 지내기를 원하며 수천(守天)하기 위해 동으로 …… 동이 매금의 옷을 내려 주었다.

< 보기 >
ㄱ.중국에서 남북조가 대립하였다.
ㄴ.고구려는 남하정책을 추진하였다
ㄷ.백제는 수도를 사비로 천도하였다.
ㄹ.신라는 왕호를 중국식으로 바꾸었다.
1ㄱ, ㄴ
2ㄴ, ㄷ
3ㄷ, ㄹ
4ㄱ, ㄷ
정답 및 해설

자료는 5세기 장수왕 무렵의 충주 고구려비로, 해당 시기의 상황은 ㄱ, ㄴ이다.

‘고려대왕’과 ‘신라 매금’이 형제처럼 지내며 옷을 내렸다는 내용은 고구려가 신라를 아래로 둔 시기를 보여 준다. 이 시기 중국은 남북조가 대립하였고(ㄱ), 고구려는 평양 천도 후 남하 정책을 추진하였다(ㄴ).

  • ㄷ을 포함한 조합 — 백제의 사비 천도는 6세기 성왕 때이다.
  • ㄹ을 포함한 조합 — 신라가 ‘마립간’ 대신 중국식 ‘왕’ 호칭을 쓴 것은 6세기 초 지증왕 때로, 자료의 ‘매금’ 칭호와 맞지 않는다.
문제 21
다음 인물에 대한 설명으로 옳지 않은 것은?
1907년 헤이그 만국 평화 회의 밀사로 임명되었다.
1909년 밀산 한흥동에 독립 운동 기지를 건설하였다.
1914년 대한 광복군 정부의 대통령이 되었다.
1권업회를 결성하였다.
2서전서숙을 설립하였다.
313도 의군에 참여하였다.
4대한 국민 의회를 조직하였다.
정답 및 해설

자료의 인물은 이상설이며, 대한 국민 의회는 그가 조직한 단체가 아니다.

헤이그 특사, 밀산 한흥동 기지, 대한 광복군 정부 대통령이 단서이다. 대한 국민 의회는 이상설 사후인 1919년 연해주에서 문창범 등이 조직하였다.

  • 권업회는 연해주에서 이상설 등이 결성하였다.
  • 서전서숙은 이상설이 북간도 용정에 세운 민족 교육 기관이다.
  • 이상설은 연해주에서 조직된 13도 의군에 참여하였다.
문제 22
다음 유적이 형성된 시기에 대한 설명으로 가장 옳은 것은?
1최초의 예술품이 나타났다.
2처음으로 농경이 시작되었다.
3사유재산과 계급이 발생하였다.
4씨족들이 모여서 부족 사회를 이루었다.
정답 및 해설

사진은 바위 면에 동심원과 방패(검파) 모양의 기하학 무늬를 새긴 고령 장기리(양전동) 암각화로, 청동기 시대의 유적이다.

청동기 시대에는 농업 생산력이 늘어 잉여 생산물이 생기면서 사유재산과 계급이 발생하였고, 이를 바탕으로 지배자인 군장이 등장하였다. 동심원 무늬는 태양 숭배 등 농경 사회의 풍요를 비는 의식과 관련된 것으로 해석된다.

  • 최초의 예술품이 나타난 것은 뼈·뿔·돌에 동물 등을 새긴 조각품이 만들어진 구석기 시대이다.
  • 처음으로 농경이 시작된 것은 신석기 시대이다.
  • 혈연 중심의 씨족들이 모여 부족 사회를 이룬 것은 신석기 시대의 사회 모습이다.
문제 23
다음 합의문을 작성한 독립군에 관한 설명으로 옳은 것은?
중국(의용군)과 한국 양국의 군민은 한마음 한뜻으로 일제에 대항하여 싸우고, 인력과 물자는 서로 나누어 쓰며, 합작의 원칙하에 국적에 관계없이 그 능력에 따라 항일 공작을 나누어 맡는다.
1양세봉을 중심으로 활동하였다.
21940년대에 옌안으로 이동하였다.
3북만주 지역에서 주로 활동하였다.
4쌍성보 전투에서 일본군을 격파하였다.
정답 및 해설

합의문을 작성한 독립군은 조선 혁명군으로, 양세봉을 중심으로 활동하였다.

‘중국(의용군)’과의 한·중 연합이 단서로, 조선 혁명군은 남만주에서 중국 의용군과 연합해 영릉가·흥경성 전투에서 승리하였다.

  • 1940년대 옌안으로 이동한 것은 조선 의용대 일부(이후 조선 의용군)이다.
  • 북만주에서 주로 활동한 것은 지청천의 한국 독립군이며, 조선 혁명군은 남만주에서 활동하였다.
  • 쌍성보 전투는 한국 독립군이 중국 호로군과 연합해 승리한 전투이다.
문제 24
다음 사회현상에 대한 설명으로 옳지 않은 것은?
영덕의 오래된 가문은 모두 남인이며, 이른바 신향(新鄕)은 모두 서리와 품관의 자손으로 자칭 서인이라고 하는 자들이다. 근래 신향이 향교를 주관하면서 구향(舊鄕)과 마찰을 빚었다.
- 승정원 일기 -
1부농층은 수령과 결탁하여 향안에 이름을 올렸다.
2수령과 결탁한 부농층은 향촌사회를 완전히 장악하였다.
3향전은 수령과 향리의 권한이 강해지는 결과를 가져왔다.
4세도정치 아래에서 농민수탈이 극심해지는 배경이 되었다.
정답 및 해설

자료는 조선 후기 향전이며, 부농층이 향촌 사회를 완전히 장악했다는 설명은 옳지 않다.

‘신향’이 향교를 주관하며 ‘구향’과 마찰을 빚었다는 내용이 단서이다. 향전 결과 향촌의 주도권은 수령과 향리 쪽으로 넘어갔고, 구향의 영향력도 남아 있었다.

  • 부농층은 수령과 결탁해 향안에 이름을 올리며 지위를 높였다.
  • 향전은 사족의 향촌 지배력을 약화시켜 수령과 향리의 권한을 강화하였다.
  • 수령·향리 권한의 강화는 세도 정치기 농민 수탈이 극심해지는 배경이 되었다.
문제 25
(가) ∼ (다)를 일어난 순서대로 옳게 나열한 것은?
(가)낙랑군을 축출하여 대동강 유역을 확보하였다.
(나)요동지역으로 진출을 도모하고, 동옥저를 복속하였다.
(다)순노부, 소노부 등의 5부를 행정단위 성격의 5부로 개편하였다.
1(가) - (나) - (다)
2(가) - (다) - (나)
3(나) - (다) - (가)
4(다) - (나) - (가)
정답 및 해설

일어난 순서는 (나) - (다) - (가)이다.

태조왕의 동옥저 복속·요동 진출 → 고국천왕의 5부 행정 개편 → 미천왕의 낙랑군 축출(313) 순이다.

  • (가)를 맨 앞에 둔 배열은 낙랑군 축출이 4세기 초로 가장 늦다는 점에 어긋난다.
  • (다)를 (나)보다 앞에 둔 배열은 고국천왕이 태조왕보다 뒤의 왕이라는 점에 어긋난다.
법원직 9급 한국사 기출문제모두CBT · moducbt.com
18년 1회차
총 25문항 · 객관식 · 정답·해설 포함
문제 1
다음 (가), (나)의 선언문 사이의 시기에 있었던 사실로 가장 옳은 것은?
(가)남과 북은 …… 쌍방의 관계가 나라와 나라 사이의 관계가 아닌 통일을 지향하는 과정에서 잠정적으로 형성되는 특수 관계라는 것을 ……
제1조남과 북은 서로 상대방의 체제를 인정하고 존중한다.
제9조남과 북은 상대방에 대해 무력을 사용하지 않으며 상대방을 무력으로 침략하지 아니한다.
(나)1. 나라의 통일 문제를 우리 민족끼리 서로 힘을 합쳐 자주적으로 해결해 나가기로 하였다.
2.나라의 통일을 위한 남측의 연합제안과 북측의 낮은 단계의 연방제안이 서로 공통성이 있다고 인정하고, 이 방향에서 통일을 지향하기로 하였다.
1금강산 관광이 시작되었다.
2개성 공단 건설 사업이 시작되었다.
3최초로 남․북 이산가족이 상봉하였다.
4경의선 철로 복원 사업이 착공되었다.
정답 및 해설

두 선언 사이에 있었던 일은 금강산 관광의 시작(1998)이다.

(가)는 남북 관계를 ‘특수 관계’로 규정한 남북 기본 합의서(1991), (나)는 연합제·낮은 단계 연방제의 공통성을 인정한 6·15 남북 공동 선언(2000)이다.

  • 개성 공단 건설 사업은 6·15 선언 이후인 2000년대 초에 착공되었다.
  • 최초의 남북 이산가족 상봉은 1985년 고향 방문단 교환으로, (가)보다 앞선다.
  • 경의선 철로 복원 사업은 6·15 선언 이후인 2000년 9월에 착공되었다.
문제 2
다음 법령에 대한 설명으로 옳은 것은?
제5조 정부는 아래에 의하여 농지를 취득한다.
1. 아래의 농지는 정부에 귀속한다.
(가) 법령 내지 조약에 의하여 몰수 또는 국유로 된 농지
(나) 소유권의 명의가 분명치 않은 농지
2. 아래의 농지는 적당한 보상으로 정부가 매수한다.
(가) 농가 아닌 자의 농지
(나) 자경(自耕)하지 않는 자의 농지
제12조 농지의 분배는 농지의 종목, 등급 및 농가의 능력 기타에 기준한 점수제에 의거하되 1가당 총 경영 면적 3정보를 초과하지 못한다.
1미군정 시기에 제정되었다.
2유상매수․무상분배의 방식으로 실시되었다.
3법령이 실시되어 자작농이 크게 증가하였다.
4이에 영향을 받아 북한에서도 토지개혁 법령이 제정되었다.
정답 및 해설

제시된 법령은 농지 개혁법(1949)이며, 시행 결과 자작농이 크게 증가하였다.

‘농가 아닌 자’·‘자경하지 않는 자’의 농지를 정부가 매수하고, 1가당 ‘3정보’ 상한으로 분배한 점이 단서이다.

  • 미군정이 아니라 정부 수립 후 제헌 국회에서 제정되었다.
  • 유상 매수·유상 분배 방식이었으며, 무상 분배가 아니었다.
  • 북한의 토지 개혁(1946, 무상 몰수·무상 분배)이 이보다 먼저 실시되었으므로 영향 관계가 거꾸로이다.
문제 3
(가), (나)에 대한 설명으로 옳은 것은?
(가)5조 - 나는 삼한 산천 신령의 도움을 받아 왕업을 이루었다. 서경은 수덕이 순조로워 우리나라 지맥의 근본이 되니 만대 왕업의 땅이다. 1년에 100일 이상 머물러 왕실의 안녕을 이루어야할 것이다.
- 고려사 -
(나)20조 - 불교는 몸을 닦는 근본이며 유교는 나라를 다스리는 근원이니, 몸을 닦는 것은 내생을 위한 것이며, 나라를 다스리는 일은 곧 오늘의 할 일입니다. 오늘은 극히 가깝고 내생은 지극히 먼 것이니, 가까운 것을 버리고 먼 것을 구하는 일이 그릇된 일이 아니겠습니까?
- 고려사 -
1(나)가 (가)보다 먼저 발표되었다.
2(가)를 발표할 당시 양현고를 설치하였다.
3(가)를 발표한 왕이 과거제도를 실시하였다.
4(나)가 작성될 당시의 왕이 국자감을 설치하였다.
정답 및 해설

(나)를 올린 시기의 왕인 성종은 국자감을 설치하였다.

(가)는 ‘서경’ 중시와 ‘삼한 산천 신령’을 강조한 태조의 훈요 10조, (나)는 유교를 치국의 근원으로 삼자는 최승로의 시무 28조로 성종 때 올려졌다.

  • 훈요 10조(태조)가 시무 28조(성종)보다 먼저이다.
  • 양현고는 예종 때 설치된 장학 재단이다.
  • 과거 제도는 광종 때 쌍기의 건의로 처음 실시되었다.
문제 4
(가) 시기에 발생한 사건으로 옳은 것은?
너희 나라와 우리나라의 사이에는 애당초 소통이 없었고, 또 서로 은혜를 입거나 원수진 일도 없었다. 그런데 이번 덕산묘소에서 저지른 변고야말로 어찌 인간의 도리상 차마 할 수 있는 일이겠는가?

⇩
(가)
⇩
조약 체결 이후 조선국 항구에 거주하는 일본인은 쌀과 잡곡을 수출, 수입할 수 있게 되었으며, 일본국 소속의 선박은 항세를 납부하지 않게 되었다.
1영남 유생들은 “조선책략”의 내용을 비판하였다.
2원산과 인천이 개항되어 일본과의 무역이 시작되었다.
3정부는 통리기무아문을 새로 설치하여 정국을 운영하였다.
4어재연이 이끄는 부대가 전력의 열세로 결국 함락 당하였다.
정답 및 해설

(가) 시기의 사건은 신미양요(1871) 때 어재연 부대가 광성보에서 함락된 일이다.

앞 자료는 ‘덕산 묘소’의 변고, 곧 오페르트 도굴 사건(1868)이고, 뒤 자료는 양곡 수출입과 항세 면제를 규정한 조·일 무역 규칙(1876)이다.

  • 영남 유생들이 ‘조선책략’을 비판한 영남 만인소는 1881년의 일이다.
  • 원산(1880)과 인천(1883)의 개항은 강화도 조약 이후이다.
  • 통리기무아문은 1880년에 설치되었다.
문제 5
(가), (나)를 주장한 승려들에 관한 설명으로 옳은 것은?
(가)교(敎)를 배우는 이는 대개 안의 마음을 버리고 외면에서 구하고, 선(禪)을 익히는 이는 인연을 잊고 안의 마음을 밝히기를 좋아하니, 모두 한쪽에 치우친 것으로 두 극단에 모두 막힌 것이다.
(나)지금의 불교계를 보면, 아침저녁으로 하는 일들이 비록 부처의 법에 의지하였다고 하나, 자신을 내세우고 이익을 구하는 데 열중하여 세속의 일에 골몰한다. 도덕을 닦지 않고 옷과 밥만 허비하니, 비록 출가하였다고 하나 무슨 덕이 있겠는가?
1(가)-천태종의 신앙 결사체인 백련사를 조직하였다.
2(가)-중국에서 도입한 법안종을 중심으로 선종을 정리하였다.
3(나)-선을 중심으로 교학을 포용하고자 하였다.
4(나)-유교와 불교의 통합을 시도하며 유불 일치설을 주장하였다.
정답 및 해설

(나)를 주장한 지눌은 선을 중심으로 교학을 포용하고자 하였다.

(가)는 교와 선이 한쪽에 치우침을 비판한 의천의 교관겸수, (나)는 세속에 골몰한 불교계를 비판하며 결사를 제창한 지눌의 정혜결사문이다.

  • 천태종 신앙 결사인 백련사를 조직한 승려는 요세이다.
  • 의천은 천태종을 개창해 교종 중심으로 선종을 통합하려 하였으며, 법안종 중심의 선종 정리와는 관계가 없다.
  • 유불 일치설을 주장한 승려는 지눌의 제자 혜심이다.
문제 6
(가) ∼ (라)를 일어난 순서대로 바르게 나열한 것은?
(가)국학을 태학(감)으로 고치고 학문을 장려하였다.
(나)원효는 모든 것이 한마음에서 나온다는 일심사상의 이론적 체계를 마련하였다.
(다)유교 경전에 대한 이해 수준에 따라 관리를 채용하는 독서삼품과를 실시하였다.
(라)최치원은 빈공과에 합격한 뒤에 황소를 격퇴하는 글을 써서 당에서 명문장가로 유명해졌다.
1(가) - (나) - (다) - (라)
2(가) - (다) - (나) - (라)
3(나) - (가) - (다) - (라)
4(나) - (가) - (라) - (다)
정답 및 해설

일어난 순서는 (나) - (가) - (다) - (라)이다.

원효의 일심 사상(7세기 통일 전후) → 경덕왕의 국학 개칭(8세기 중엽) → 원성왕의 독서삼품과(788) → 최치원의 토황소격문(9세기 후반) 순이다.

  • (가)를 맨 앞에 둔 배열은 원효가 경덕왕보다 앞선 인물이라는 점에 어긋난다.
  • (라)를 (다)보다 앞에 둔 배열은 최치원의 활동(9세기 후반)이 원성왕 대보다 늦다는 점에 어긋난다.
문제 7
(가), (나)에 관한 설명으로 옳은 것은?
왕도병마사식목도감(가)상서성중추원어사대(나)
1(가)-소속 관원인 승선은 대간으로 불렸다.
2(가)-국정을 총괄하고 정책을 심의․결정하는 최고 관서이다.
3(나)-관리의 비리를 감찰하는 기구이다.
4(나)-재신과 추밀이 모여 관리 임용을 결정하였다.
정답 및 해설

(가)는 중서문하성으로, 국정을 총괄하고 정책을 심의·결정하는 최고 관서이다.

고려 중앙 관제는 2성(중서문하성·상서성) 6부를 중심으로, 중추원·어사대·도병마사·식목도감 등이 함께 운영되었다. 도표에 상서성이 따로 있으므로 (가)는 그 짝인 중서문하성이다.

  • 승선은 중서문하성이 아니라 중추원 소속으로 왕명 출납을 맡았으며, 대간으로 불린 것은 어사대 관원과 중서문하성의 낭사이다.
  • 관리 비리 감찰은 도표에 따로 표시된 어사대의 기능이므로 (나)의 설명이 아니다.
  • 재신과 추밀이 모여 회의한 기구는 도표에 따로 표시된 도병마사·식목도감이며, 관리 임용 결정 기구도 아니다.
문제 8
다음 주장이 발표된 시기로 옳은 것은?
지금의 조선 민족에게는 왜 정치적 생활이 없는가? …… 일본이 조선을 병합한 이래로 조선인에게는 모든 정치 활동을 금지한 것이 첫째 원인이다. …… 지금까지 해 온 정치적 운동은 모두 일본을 적대시하는 운동뿐이었다. 이런 종류의 정치 운동은 해외에서나 할 수 있는 일이고, 조선 내에서는 허용되는 범위 내에서 일대 정치적 결사를 조직해야 한다는 것이 우리의 주장이다.
- 이광수, 동아일보 -

(가)(나)(다)(라)
1912 1919 1923 1927 1929
조선태형령 3.1운동 민립대학 신간회 광주학생
제정 발생 설립기성회 설립 항일운동
조직 발생
1(가)
2(나)
3(다)
4(라)
정답 및 해설

이 주장은 (다) 시기, 곧 민립 대학 설립 기성회 조직(1923)과 신간회 설립(1927) 사이에 발표되었다.

이광수가 동아일보에 실은 ‘민족적 경륜’(1924)으로, 일제가 허용하는 범위 안에서 정치적 결사를 조직하자는 자치론이다. 이 자치론에 맞서 비타협적 민족주의와 사회주의 세력이 연대해 신간회가 결성되었다.

  • (가) 시기(1912~1919)는 무단 통치기로 정치 결사 자체가 불가능했다.
  • (나) 시기(1919~1923)는 3·1 운동 직후 문화 통치로 전환되던 때로, 민족적 경륜 발표보다 앞선다.
  • (라) 시기(1927~1929)는 이미 자치론에 대항해 신간회가 결성된 이후이다.
문제 9
(가) 세금 제도에 관한 설명으로 옳은 것은?
우의정 김육이 아뢰다. “(중략) (가) 는/은 역을 고르게 하여 백성을 편안케 하니 실로 시대를 구할 수 있는 좋은 계책입니다. (중략) 다만 교활한 아전은 명목이 간단함을 싫어하고 모리배들은 방납하기 어려움을 원망하여 반드시 헛소문을 퍼뜨려 어지럽게 할 것입니다. 삼남에는 부호가 많은데 이 법의 시행을 부호들이 좋아하지 않으나 국가에서 법령을 시행할 때에는 마땅히 소민들이 원하는 대로 해야 합니다.”
1풍흉에 관계없이 1결당 쌀 4 ∼ 6두씩을 내게 하였다.
2(가)의 실시로 공인이라는 특허 상인이 등장하게 되었다.
3(가) 시행 이후에는 현물 납부가 완전히 사라지게 되었다.
4(가)의 시행으로 줄어든 재정을 보충하고자 선무군관포가 신설되었다.
정답 및 해설

(가)는 대동법이며, 그 실시로 관청에 물품을 조달하는 공인이 등장하였다.

김육이 ‘방납’의 폐단을 막고 삼남 지역까지 확대 시행을 주장한 점이 단서이다. 공납을 토지 결수 기준으로 쌀·베·동전으로 거두었다.

  • 풍흉에 관계없이 1결당 쌀 4~6두를 거둔 것은 전세 제도인 영정법이다.
  • 대동법 시행 후에도 별공·진상 등 현물 납부는 남아 있었다.
  • 선무군관포는 균역법 시행으로 줄어든 군포 수입을 보충하기 위한 것이다.
문제 10
다음 (가), (나) 사이의 시기에 있었던 사실로 옳지 않은 것은?
(가)대왕을 도와 조그마한 공을 이루어 삼한을 한 집으로 만들었으며, 백성들은 두 마음이 없게 되었습니다(三韓爲一家 百姓無二心). 비록 아직 태평한 세상에 이르지는 못하였으나 조금 편안한 상태는 되었습니다.
(나)원종과 애노 등이 사벌주에서 반란을 일으키니 왕이 나마(관직명) 영기에게 명하여 잡게 하였으나 영기가적진을 쳐다보고는 두려워하여 나아가지 못하였다.
1발해의 장문휴가 산둥 반도를 공격하였다.
2장보고의 도움을 받아 신무왕이 즉위하였다.
3궁예가 개성을 수도로 삼고 후고구려를 건국하였다.
4발해 문왕이 상경 용천부에서 동경 용원부로 수도를 옮겼다.
정답 및 해설

두 시기 사이에 있었던 일이 아닌 것은 궁예의 후고구려 건국(901)이다.

(가)는 ‘삼한을 한 집으로’ 만들었다는 삼국 통일기(7세기 후반) 김유신의 말, (나)는 진성 여왕 때 원종·애노의 난(889)이다. 후고구려 건국은 (나)보다 늦다.

  • 발해 장문휴의 산둥 반도 공격은 무왕 때(732)로 두 시기 사이이다.
  • 장보고의 도움으로 신무왕이 즉위한 것은 839년으로 두 시기 사이이다.
  • 발해 문왕이 동경 용원부로 천도한 것은 8세기 후반으로 두 시기 사이이다.
문제 11
다음 군사 조직에 대한 설명으로 가장 옳은 것은?
국왕의 행차가 서울로 돌아왔으나, …… 이때에 임금께서 도감을 설치하여 군사를 훈련시키라고 명하시고 나를 그 책임자로 삼으시므로, …… 얼마 안 되어 수천 명을 얻어 조총 쏘는 법과 창, 칼 쓰는 기술을 가르치게 하였다. 또 당번을 정하여 궁중을 숙직하게 하고, 국왕의 행차가 있을 때 이들로써 호위하게 하니 민심이 점차 안정되었다.
- 서애집 -
1갑사와 정군으로 구성되었다.
2포수, 사수, 살수로 조직되었다.
3제승방략 체제에 맞는 군사 조직이었다.
4신분 구분 없이 노비에서 양반까지 편성되었다.
정답 및 해설

자료의 군사 조직은 훈련도감으로, 포수·사수·살수의 삼수병으로 조직되었다.

‘서애집’(유성룡), 임진왜란 중 ‘도감’을 설치하여 ‘조총 쏘는 법’을 가르쳤다는 내용이 단서이다.

  • 갑사와 정군(정병)은 조선 전기 중앙군인 5위의 구성이다.
  • 제승방략 체제는 조선 전기 지방 방어 체제로, 왜란 후 개편된 훈련도감과 맞지 않는다.
  • 노비에서 양반까지 신분 구분 없이 편성된 것은 지방군인 속오군이다.
문제 12
(가), (나) 시기의 지방 행정 제도에 대한 설명으로 옳은 것은?
(가)5도 양계를 중심으로 지방 제도가 마련되었다.
(나)전국을 8도로 나누고, 그 아래에 부·목·군·현을 설치하였다.
1(가)-5도에 관찰사가 파견되었다.
2(가)-모든 군현에 수령이 파견되었다.
3(나)-유향소를 설치하여 수령을 보좌하였다.
4(나)-향리는 행정·사법·군사권을 행사하는 국왕의 대리인이다.
정답 및 해설

(나) 조선 시대에는 유향소를 설치하여 수령을 보좌하고 향리를 감찰하였다.

(가)는 5도 양계의 고려, (나)는 8도 아래 부·목·군·현을 둔 조선의 지방 제도이다.

  • 고려의 5도에는 관찰사가 아니라 안찰사가 파견되었다.
  • 고려는 수령이 파견되지 않은 속현이 더 많았으며, 모든 군현에 수령을 파견한 것은 조선이다.
  • 조선에서 행정·사법·군사권을 가진 국왕의 대리인은 수령이며, 향리는 수령을 보좌하는 아전으로 지위가 낮아졌다.
문제 13
(가) 정책에 대한 설명으로 옳은 것은?
중농 학파인 유형원은 토지개혁을 주장하였는데, “반계수록”에서 자영농을 육성하는 방법으로 (가)을/를 주장하였다.
1영업전을 설정하여 최소한의 농민 생활을 보장하고자 하였다.
2신분 차별 없이 모든 사람에게 균등한 토지 분배를 강조하였다.
3관리, 선비, 농민 등에게 차등을 두어 토지를 분배할 것을 주장하였다.
4한 마을을 단위로 토지를 공동 소유하고 공동 경작할 것을 강조하였다.
정답 및 해설

(가)는 유형원의 균전론으로, 관리·선비·농민 등 신분에 따라 차등을 두어 토지를 분배하자는 주장이다.

‘반계수록’과 자영농 육성이 단서이다.

  • 영업전을 설정해 매매를 금지하자는 것은 이익의 한전론이다.
  • 균전론은 신분 차별 없는 균등 분배가 아니라 신분별 차등 분배를 전제로 하였다.
  • 마을 단위 공동 소유·공동 경작은 정약용의 여전론이다.
문제 14
다음 농법의 결과로 나타난 현상으로 옳지 않은 것은?
가물 때도 마르지 않는 무논을 가려 2월 하순에서 3월 상순까지에 갈아야 한다. 그 무논의 10분의 1에 모를 기르고 나머지 9분에는 모를 심을 수 있게 준비한다. 먼저, 모를 기를 자리를 갈아 법대로 잘 다듬고 물을 빼고서 부드러운 버드나무 가지를 꺾어다 두텁게 덮은 다음 밟아 주며, 바닥을 볕에 말린 뒤 물을 댄다. …… 모가 4촌(寸) 이상 자라면 옮겨 심을 수 있다.
1농민 수입의 증가로 농촌 내 빈부격차가 줄어들었다.
2농사에 필요한 노동력이 절감되어 광작이 가능해졌다.
3벼․보리의 이모작이 가능해져 보리 농사가 성행하였다.
4머슴을 고용하여 농토를 직접 경영하는 지주가 생겨났다.
정답 및 해설

제시된 농법은 이앙법(모내기법)이며, 그 결과 농촌의 빈부 격차는 줄어든 것이 아니라 더 커졌다.

못자리에서 모를 길러 옮겨 심는다는 내용이 단서이다. 소수 농민이 넓은 땅을 경작하면서 다수 농민은 토지에서 밀려났다.

  • 제초 노동력이 줄어 한 사람이 넓은 땅을 경작하는 광작이 가능해졌다.
  • 벼를 늦게 옮겨 심을 수 있어 벼·보리 이모작이 가능해졌다.
  • 머슴을 고용해 농토를 직접 경영하는 지주(경영형 부농)가 생겨났다.
문제 15
(가)∼(마)를 일어난 순서대로 바르게 나열한 것은?
(가)브라운 각서 체결
(나)한․일 기본 조약 조인
(다)전태일 분신자살 사건
(라)7․4 남북 공동 성명 발표
(마)김대중의 제7대 대통령 선거 출마
1(가) - (나) - (다) - (라) - (마)
2(가) - (다) - (나) - (마) - (라)
3(나) - (가) - (다) - (라) - (마)
4(나) - (가) - (다) - (마) - (라)
정답 및 해설

일어난 순서는 (나) - (가) - (다) - (마) - (라)이다.

한·일 기본 조약(1965) → 브라운 각서(1966) → 전태일 분신(1970.11) → 김대중의 제7대 대선 출마(1971.4) → 7·4 남북 공동 성명(1972) 순이다.

  • (가)를 맨 앞에 둔 배열은 한·일 기본 조약이 브라운 각서보다 먼저라는 점에 어긋난다.
  • (라)를 (마)보다 앞에 둔 배열은 1971년 대선이 1972년 공동 성명보다 먼저라는 점에 어긋난다.
문제 16
다음의 봉기를 일으킨 주동자에 관한 설명으로 옳은 것은?
경계 이후 공경대부는 천예 속에서 많이 나왔다. 장상의 종자가 어찌 따로 있겠는가? 때가 오면 누구나 할 수 있는 것이다. 우리가 어찌 상전의 채찍 밑에서 힘겨운 일에 시달리기만 하겠는가. (중략) 모두 자신의 주인을 죽이고 천예들의 호적을 불살라서 삼한에 천인이 없게 하면 공경과 장상은 우리 모두 할 수 있다.
- 고려사 -
1서경의 유수로서, 정권 탈취를 목적으로 하였다.
2개경에서 노비들을 모아서 노비 해방을 주장하였다.
3경주 지역 세력과 연합하여 신라 부흥을 주장하였다.
4공주 명학소에서 신분 차별에 반발하여 봉기를 일으켰다.
정답 및 해설

자료는 무신 정권기 만적의 난(1198)으로, 만적은 개경에서 노비들을 모아 노비 해방과 정권 장악을 꾀하였다.

‘장상의 종자가 어찌 따로 있겠는가’, ‘천예들의 호적을 불살라’라는 구절이 단서이다.

  • 서경 유수로서 무신 정권에 맞서 봉기한 인물은 조위총이다.
  • 경주 일대에서 신라 부흥을 내건 봉기는 이비·패좌 등의 난이다.
  • 공주 명학소에서 봉기한 것은 망이·망소이의 난이다.
문제 17
다음 자료가 반포되기 이전에 실시된 정책으로 옳은 것은?
1.청에 의존하는 생각을 버리고 자주독립의 기초를 세운다.
2.왕위 계승의 법칙과 종친․외척과의 구별을 명확히 한다.
6.납세는 법으로 정하고 함부로 세금을 거두지 않는다.
9.왕실과 관청의 1년 회계를 계획한다.
1한성 사범 학교가 설립되었다.
2중앙에 친위대, 지방에 진위대를 설치하였다.
3지방 행정 체제를 23부에서 13도로 개편하였다.
4청의 연호를 쓰지 않고 개국 기년을 사용하였다.
정답 및 해설

자료는 홍범 14조이며, 그 이전에 실시된 정책은 청의 연호 대신 개국 기년을 사용한 것이다(제1차 갑오개혁).

‘청에 의존하는 생각을 버리고 자주독립’이라는 제1조가 단서로, 홍범 14조는 제2차 갑오개혁 때 반포되었다.

  • 한성 사범 학교는 홍범 14조 이후 교육 입국 조서에 따라 설립되었다.
  • 중앙의 친위대·지방의 진위대 설치는 을미개혁 때이다.
  • 23부를 13도로 개편한 것은 1896년의 일로, 23부 자체가 제2차 갑오개혁 때 마련되었다.
문제 18
다음 자료를 주장한 인물에 관한 설명으로 옳은 것은?
미군정 아래에서 육성된 그들은 경찰을 시켜 선거를 독점하도록 배치하고 인민의 자유를 유린하고 있다. (중략) 나는 통일된 조국을 건설하려다 38선을 베고 쓰러질지언정, 일신의 구차한 안일을 위하여 단독 정부를 세우는 데는 협력하지 않겠다.
1한국 민주당을 결성하였다.
25․10 총선거에 불참하였다.
3건국 준비 위원회를 주도하였다.
4제헌 국회에서 대통령으로 당선되었다.
정답 및 해설

자료의 인물은 김구이며, 그는 단독 정부 수립에 반대하여 5·10 총선거에 불참하였다.

‘38선을 베고 쓰러질지언정’ 단독 정부 수립에 협력하지 않겠다는 ‘삼천만 동포에게 읍고함’이 단서이다.

  • 한국 민주당은 송진우·김성수 등이 결성하였다.
  • 건국 준비 위원회는 여운형이 주도하였다.
  • 제헌 국회에서 대통령으로 선출된 인물은 이승만이다.
문제 19
다음의 사건이 벌어진 시기의 상황으로 가장 적절한 것은?
당나라 수군의 거점인 등주성에 한바탕 난리가 벌어졌다. 장문휴가 이끄는 발해 군대가 등주성을 기습했기 때문이다. 등주 자사까지 전사했다는 소식에 당 조정은 신라에 군사 지원을 요청하였다. 신라군은 발해를 공격했지만 추위와 폭설로 철수할 수밖에 없었다.
1‘대흥’이라는 연호를 사용하였다.
23성 6부제의 중앙관제를 정비하였다.
3전성기를 맞이하여 ‘해동성국’이라고 불리웠다.
4돌궐․일본과 친교를 강화하며 당․신라에 맞섰다.
정답 및 해설

사건은 발해 무왕 때로, 무왕은 돌궐·일본과 친교를 강화하며 당·신라에 맞섰다.

‘장문휴’가 ‘등주’를 기습했다는 내용이 단서이다. 당은 신라에 발해 공격을 요청하였다.

  • ‘대흥’ 연호는 문왕이 사용하였다.
  • 3성 6부의 중앙 관제를 정비한 왕은 문왕이다.
  • ‘해동성국’으로 불린 전성기는 선왕 때이다.
문제 20
다음 자료의 시기에 해당하는 상황으로 옳은 것을 <보기>에서 모두 고른 것은?
고려대왕 상왕공과 신라 매금은 세세토록 형제같이 지내기를 원하며 수천(守天)하기 위해 동으로 …… 동이 매금의 옷을 내려 주었다.

< 보기 >
ㄱ.중국에서 남북조가 대립하였다.
ㄴ.고구려는 남하정책을 추진하였다
ㄷ.백제는 수도를 사비로 천도하였다.
ㄹ.신라는 왕호를 중국식으로 바꾸었다.
1ㄱ, ㄴ
2ㄴ, ㄷ
3ㄷ, ㄹ
4ㄱ, ㄷ
정답 및 해설

자료는 5세기 장수왕 무렵의 충주 고구려비로, 해당 시기의 상황은 ㄱ, ㄴ이다.

‘고려대왕’과 ‘신라 매금’이 형제처럼 지내며 옷을 내렸다는 내용은 고구려가 신라를 아래로 둔 시기를 보여 준다. 이 시기 중국은 남북조가 대립하였고(ㄱ), 고구려는 평양 천도 후 남하 정책을 추진하였다(ㄴ).

  • ㄷ을 포함한 조합 — 백제의 사비 천도는 6세기 성왕 때이다.
  • ㄹ을 포함한 조합 — 신라가 ‘마립간’ 대신 중국식 ‘왕’ 호칭을 쓴 것은 6세기 초 지증왕 때로, 자료의 ‘매금’ 칭호와 맞지 않는다.
문제 21
다음 인물에 대한 설명으로 옳지 않은 것은?
1907년 헤이그 만국 평화 회의 밀사로 임명되었다.
1909년 밀산 한흥동에 독립 운동 기지를 건설하였다.
1914년 대한 광복군 정부의 대통령이 되었다.
1권업회를 결성하였다.
2서전서숙을 설립하였다.
313도 의군에 참여하였다.
4대한 국민 의회를 조직하였다.
정답 및 해설

자료의 인물은 이상설이며, 대한 국민 의회는 그가 조직한 단체가 아니다.

헤이그 특사, 밀산 한흥동 기지, 대한 광복군 정부 대통령이 단서이다. 대한 국민 의회는 이상설 사후인 1919년 연해주에서 문창범 등이 조직하였다.

  • 권업회는 연해주에서 이상설 등이 결성하였다.
  • 서전서숙은 이상설이 북간도 용정에 세운 민족 교육 기관이다.
  • 이상설은 연해주에서 조직된 13도 의군에 참여하였다.
문제 22
다음 유적이 형성된 시기에 대한 설명으로 가장 옳은 것은?
1최초의 예술품이 나타났다.
2처음으로 농경이 시작되었다.
3사유재산과 계급이 발생하였다.
4씨족들이 모여서 부족 사회를 이루었다.
정답 및 해설

사진은 바위 면에 동심원과 방패(검파) 모양의 기하학 무늬를 새긴 고령 장기리(양전동) 암각화로, 청동기 시대의 유적이다.

청동기 시대에는 농업 생산력이 늘어 잉여 생산물이 생기면서 사유재산과 계급이 발생하였고, 이를 바탕으로 지배자인 군장이 등장하였다. 동심원 무늬는 태양 숭배 등 농경 사회의 풍요를 비는 의식과 관련된 것으로 해석된다.

  • 최초의 예술품이 나타난 것은 뼈·뿔·돌에 동물 등을 새긴 조각품이 만들어진 구석기 시대이다.
  • 처음으로 농경이 시작된 것은 신석기 시대이다.
  • 혈연 중심의 씨족들이 모여 부족 사회를 이룬 것은 신석기 시대의 사회 모습이다.
문제 23
다음 합의문을 작성한 독립군에 관한 설명으로 옳은 것은?
중국(의용군)과 한국 양국의 군민은 한마음 한뜻으로 일제에 대항하여 싸우고, 인력과 물자는 서로 나누어 쓰며, 합작의 원칙하에 국적에 관계없이 그 능력에 따라 항일 공작을 나누어 맡는다.
1양세봉을 중심으로 활동하였다.
21940년대에 옌안으로 이동하였다.
3북만주 지역에서 주로 활동하였다.
4쌍성보 전투에서 일본군을 격파하였다.
정답 및 해설

합의문을 작성한 독립군은 조선 혁명군으로, 양세봉을 중심으로 활동하였다.

‘중국(의용군)’과의 한·중 연합이 단서로, 조선 혁명군은 남만주에서 중국 의용군과 연합해 영릉가·흥경성 전투에서 승리하였다.

  • 1940년대 옌안으로 이동한 것은 조선 의용대 일부(이후 조선 의용군)이다.
  • 북만주에서 주로 활동한 것은 지청천의 한국 독립군이며, 조선 혁명군은 남만주에서 활동하였다.
  • 쌍성보 전투는 한국 독립군이 중국 호로군과 연합해 승리한 전투이다.
문제 24
다음 사회현상에 대한 설명으로 옳지 않은 것은?
영덕의 오래된 가문은 모두 남인이며, 이른바 신향(新鄕)은 모두 서리와 품관의 자손으로 자칭 서인이라고 하는 자들이다. 근래 신향이 향교를 주관하면서 구향(舊鄕)과 마찰을 빚었다.
- 승정원 일기 -
1부농층은 수령과 결탁하여 향안에 이름을 올렸다.
2수령과 결탁한 부농층은 향촌사회를 완전히 장악하였다.
3향전은 수령과 향리의 권한이 강해지는 결과를 가져왔다.
4세도정치 아래에서 농민수탈이 극심해지는 배경이 되었다.
정답 및 해설

자료는 조선 후기 향전이며, 부농층이 향촌 사회를 완전히 장악했다는 설명은 옳지 않다.

‘신향’이 향교를 주관하며 ‘구향’과 마찰을 빚었다는 내용이 단서이다. 향전 결과 향촌의 주도권은 수령과 향리 쪽으로 넘어갔고, 구향의 영향력도 남아 있었다.

  • 부농층은 수령과 결탁해 향안에 이름을 올리며 지위를 높였다.
  • 향전은 사족의 향촌 지배력을 약화시켜 수령과 향리의 권한을 강화하였다.
  • 수령·향리 권한의 강화는 세도 정치기 농민 수탈이 극심해지는 배경이 되었다.
문제 25
(가) ∼ (다)를 일어난 순서대로 옳게 나열한 것은?
(가)낙랑군을 축출하여 대동강 유역을 확보하였다.
(나)요동지역으로 진출을 도모하고, 동옥저를 복속하였다.
(다)순노부, 소노부 등의 5부를 행정단위 성격의 5부로 개편하였다.
1(가) - (나) - (다)
2(가) - (다) - (나)
3(나) - (다) - (가)
4(다) - (나) - (가)
정답 및 해설

일어난 순서는 (나) - (다) - (가)이다.

태조왕의 동옥저 복속·요동 진출 → 고국천왕의 5부 행정 개편 → 미천왕의 낙랑군 축출(313) 순이다.

  • (가)를 맨 앞에 둔 배열은 낙랑군 축출이 4세기 초로 가장 늦다는 점에 어긋난다.
  • (다)를 (나)보다 앞에 둔 배열은 고국천왕이 태조왕보다 뒤의 왕이라는 점에 어긋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