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
(나)
①태조왕이 옥저를 복속하였다.②진흥왕이 화랑도를 개편하였다.
③장수왕이 남진 정책을 추진하였다.
④지증왕이 국호를 ‘신라’로 정하였다.
(가)·(나) 사이에 있었던 일로 옳지 않은 것은 태조왕의 옥저 복속으로, 이는 (가) 시기보다 훨씬 앞선 1세기의 일이다.
(가) 지도는 고구려 수도가 국내성, 백제 수도가 한성으로 표시되어 장수왕의 평양 천도(427) 이전 상황이다. (나) 지도는 고구려가 평양, 백제가 사비를 수도로 하고 신라가 한강 유역을 차지한 상태로, 성왕의 사비 천도(538)와 진흥왕의 한강 유역 장악(6세기 중엽) 이후 상황이다.
- 장수왕은 평양으로 천도(427)하고 남진 정책을 펼쳐 한성을 함락(475)하였으므로 두 시기 사이의 일이다.
- 지증왕은 6세기 초 국호를 ‘신라’로 정하였으므로 두 시기 사이의 일이다.
- 진흥왕은 6세기에 화랑도를 국가 조직으로 개편하였으므로 두 시기 사이의 일이다.
| (가) 건국강령 1.우리나라는 우리 민족이 반만년 이래로 같은 말과 글과 국토와 주권과 경제와 문화를 가지고 공동한 민족정기를 길러온, 우리끼리 형성하고 단결한 고정적 집단의 최고조직임. 2. 우리나라의 건국 정신은 삼균제도의 역사적 근거를 두었으니 … 이는 사회 각 계급‧계층이 지력과 권력과 부력의 향유를 균평하게 하여 국가를 진흥하며 태평을 보전유지하라고 한 것이니, 홍익인간과 이화세계하자는, 우리 민족의 지켜야 할 최고의 공리임. |
건국강령을 발표한 (가)는 대한민국 임시정부이며, 조선의용대 화북지대를 조선의용군으로 개편한 것은 임시정부가 아니다.
"건국강령"과 "삼균제도"는 조소앙의 삼균주의를 바탕으로 1941년 임시정부가 발표한 강령의 단서다. 조선의용대 화북지대는 화북 조선 독립 동맹 아래에서 조선의용군으로 개편되었다.
- 충칭에서 정규군인 한국광복군을 창설한 것은 1940년 임시정부의 활동이다.
- 태평양 전쟁 발발 직후인 1941년 임시정부는 대일 선전 성명서를 발표하였다.
- 1942년 무렵 조선 민족 혁명당 계열이 합류하며 임시정부는 좌우 통합 정부의 모습을 갖추었다.
| (가)명군 도독 이여송이 대병력의 관군을 거느리고 곧바로 평양성 밖에 다다라 제장에게 부서를 나누어 본성을 포위하였습니다. … 조선의 장군들이 군사를 거느리고 가서 매복하고 함께 대로로 나아가니 왜적들은 사방으로 도망가다가 복병의 요격을 입었습니다. (나)화의가 나라를 망친 것은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고 옛날부터 그러하였으나 오늘날처럼 심한 적은 없었습니다. 명은 우리나라에는 부모의 나라이고 노적은 우리나라에는 부모의 원수입니다. … 어찌 차마 이런 시기에 다시 화의를 제창할 수 있겠습니까? |
(가) 평양성 탈환과 (나) 척화 주장 사이에는 강홍립의 후금 항복이 있었다.
(가)는 임진왜란 중 조명 연합군이 "이여송"과 함께 평양성을 되찾은 1593년의 일이고, (나)는 "노적"(후금·청)과의 화의를 반대하는 척화론으로 병자호란 무렵의 주장이다. 광해군 때인 1619년 사르후 전투에서 강홍립이 후금에 항복하였으므로 두 시기 사이에 해당한다.
- 신립이 충주 탄금대에서 패배한 것은 1592년으로 평양성 탈환 이전이다.
- 인조의 삼전도 항복은 1637년 병자호란의 결과로 척화 주장 이후의 일이다.
- 대마도 정벌은 1419년 세종 때의 일로 임진왜란보다 훨씬 앞선다.
남편은 세상을 떴으나 뱃속에 아기가 있었지요. …… 포대기에 쌓인 갓난아기 장정으로 군적에 올려서 문이 닳도록 찾아와 군포를 바치라고 독촉하고 어제는 아기를 업고 관가에 점호를 받으러 갔다오. …… 점호라고 받고 돌아오니 아기는 이미 죽어 있었지요.이 시에서 나타낸 조세 제도를 감면한 뒤 발생한 재정 부족 문제를 해결한 방법은 무엇일까요?
밑줄 친 ‘방법’은 균역법 시행에 따른 재정 부족을 메운 조치로, 부유한 양민에게 선무군관포를 내게 한 것이 옳다.
시는 갓난아기까지 군적에 올려 군포를 거두는 황구첨정의 폐단을 그린 것으로, 영조는 균역법으로 군포를 1년 1필로 줄였다. 줄어든 수입은 결작(토지 1결당 쌀 2두), 어장세·염세·선박세, 일부 상류층에 대한 선무군관포 징수로 보충하였다.
- 관료전 지급과 녹읍 폐지는 통일 신라 신문왕의 정책으로 균역법과 무관하다.
- 풍흉에 관계없이 일정하게 조세를 거둔 것은 인조 때의 영정법으로 전세 제도의 개편이다.
- 공납을 쌀·동전 등으로 내게 한 것은 대동법으로 공납 제도의 개편이다.
| 노비를 상세히 조사하고 살펴서 옳고 그름을 따져 밝혀내도록 명하였다. 주인을 배반하는 노비들이 이루 다 셀 수가 없을 정도였다. 이로 말미암아 상전을 능멸하는 풍조가 크게 일어나 사람들이 모두 탄식하고 원망하므로 왕비가 간절하게 간언하였으나, 왕이 받아들이지 않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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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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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을 7월. 교(敎)하기를, “양민이 된 노비들은 해가 점차 멀어지면 반드시 그 본래의 주인을 가벼이 보고 업신여기게 된다. … 만약 그 주인을 욕하는 자가 있으면, 다시 천민으로 되돌려 부리게 할 것이다.”라고 하였다. |
노비안검법과 노비환천법 사이 시기에는 경종 때 전시과가 처음 제정되었다.
앞 사료는 "노비를 상세히 조사"하여 양민으로 해방한 광종의 노비안검법이고, 뒤 사료는 양민이 된 노비가 주인을 욕하면 "다시 천민으로 되돌려" 부리게 한 성종 때의 노비환천법이다. 그 사이인 경종 때 시정 전시과가 시행되었다.
- 강조의 정변은 목종 때의 일로 성종 이후이다.
- 거란이 개경을 점령한 것은 현종 때 거란의 2차 침입이다.
- 공신들에게 역분전을 지급한 것은 태조 때로 광종 이전이다.
| 김해․고령 등 (가)고분군 7곳, 유네스코 세계 문화 유산 됐다. 유네스코 “고대 문명의 주요 증거” 한반도 남부에 남아 있는 유적 7곳을 묶은 고분군이 유네스코 세계 문화 유산 됐다. … (가)은/는 기원 전후부터 562년까지 주로 낙동강 유역을 중심으로 번성한 작은 나라들의 총칭이다. - 2023. 9. 18. □□ 일보 - |
(가)는 가야이며, 골품에 따라 관등·관직 승진을 제한한 것은 가야가 아니라 신라의 제도이다.
"김해·고령" 고분군, "562년까지 낙동강 유역"에서 번성한 작은 나라들의 총칭이라는 단서로 가야를 확정할 수 있다. 골품제는 신라 특유의 신분 제도이다.
- 가야는 낙동강 하류의 변한 지역에서 성장하였다.
- 가야는 풍부한 철을 생산하여 낙랑과 왜 등에 수출하였다.
- 김해의 금관가야를 중심으로 전기 가야 연맹이 형성되었다.
| (가)봉화백(奉化伯) 정도전․의성군(宜城君) 남은과 부성군(富城君) 심효생(沈孝生) 등이 여러 왕자들을 해치려 꾀하다가 성공하지 못하고 형벌에 복종하여 참형을 당하였다. (나)상왕이 말하기를, “만일 물리치지 못하고 항상 침노만 받는다면, 한(漢)나라가 흉노에게 욕을 당한 것과 무엇이 다르겠는가. … 구주(九州)에서 온 왜인만은 구류하여 경동하는 일이 없게 하라. 또 우리가 약한 것을 보이는 것은 불가하니, 후일의 환이 어찌 다함이 있으랴.” 하고, 곧 이종무를 삼군 도체찰사로 명하여, 중군을 거느리게 하였다. |
제1차 왕자의 난과 대마도 정벌 사이에는 태종 때 6조 직계제가 시행되었다.
(가)는 "정도전·남은" 등이 제거된 1398년 제1차 왕자의 난이고, (나)는 "상왕"(태종)이 "이종무"를 보내게 한 1419년 대마도 정벌이다. 태종은 재위 중 의정부를 거치지 않고 6조가 왕에게 직접 보고하는 6조 직계제를 실시하였다.
- 경연이 폐지된 것은 세조 때(이후 연산군 때에도)의 일로 이 시기와 맞지 않는다.
- 홍문관은 성종 때 설치되었다.
- 위화도 회군은 1388년 고려 말의 사건으로 조선 건국 이전이다.
| (가)에는 각각 우두머리가 있어서 세력이 강대한 사람은 스스로 신지라 하고, 그 다음은 읍차라 하였다. … 귀신을 믿기 때문에 국읍에 각각 한 사람씩 세워 천신의 제사를 주관하게 하는데, 이를 천군이라 부른다. -『삼국지』「위서 동이전」- |
(가)는 삼한이며, 여러 개의 소국으로 구성된 연맹체였다.
"신지·읍차"라는 우두머리와 제사장 "천군"이 단서이다. 삼한은 마한·진한·변한에 속한 수십 개의 소국 연맹체였다.
- 무천이라는 제천 행사는 동예의 풍속이다.
- 화백 회의에서 중요한 일을 결정한 것은 신라이다.
- 사출도라는 독자적 영역을 가진 것은 부여의 가(加)들이다.
| 신라가 사신을 보내 왕에게 말하기를 “왜인이 그 국경에 가득 차 성을 부수었으니, 노객은 백성된 자로서 왕에게 귀의하여 분부를 청합니다.”라고 하였다. … 10년(400)에 보병과 기병 5만을 보내(신라를) 구원하게 하였다. |
밑줄 친 왕은 광개토 대왕으로, 요동을 포함한 만주 일대를 장악하였다.
신라가 "왜인"의 침입을 알리자 "10년(400)"에 보병과 기병 5만을 보내 구원했다는 내용은 광개토 대왕릉비에 기록된 신라 구원 사실이다. 광개토 대왕은 후연을 물리치고 요동을 확보하는 등 영토를 크게 넓혔다.
- 태학을 설립하고 율령을 반포한 것은 소수림왕이다.
- 마한을 병합하고 평양성을 공격한 것은 백제 근초고왕이다.
- 마립간이라는 왕호를 처음 사용한 것은 신라 내물왕이다.
| 효종의 사망과 관련하여 인조의 계비 자의대비의 복제(服制)가 쟁점이 되었다. (가)은/는 효종이 적장자가 아니라는 근거를 들어 왕과 사대부에게 같은 예가 적용되어야 한다는 입장을 내세웠다. 반면 (나)은/는 왕에게는 일반 사대부와 다른 예가 적용되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
(가)는 서인, (나)는 남인이며, 서인은 경신환국으로 정권을 장악하였다.
기해예송에서 효종이 적장자가 아니므로 왕과 사대부에게 같은 예를 적용해야 한다고 본 쪽이 서인, 왕에게는 다른 예를 적용해야 한다고 본 쪽이 남인이다. 숙종 때 경신환국으로 남인이 축출되고 서인이 집권하였다.
- 인조반정으로 몰락한 것은 광해군을 지지한 북인이다.
- 노론과 소론으로 분화된 것은 남인이 아니라 서인이다.
- 송시열을 중심으로 세력을 확대한 것은 서인이다.
| (가)황사영 백서 사건이 일어났다. (나)이승훈이 최창현ㆍ홍낙민 등과 함께 서소문 밖에서 참수되었다. (다)윤지충과 권상연을 사형에 처하고, 진산군(珍山郡)은 현(縣)으로 강등하라는 명이 내려졌다. |
사건의 순서는 신해박해 → 이승훈 처형 → 황사영 백서 사건이다.
(다) 윤지충·권상연 처형과 진산군 강등은 정조 때인 1791년 신해박해이다. (나) 이승훈의 참수는 순조 즉위 초인 1801년 신유박해 때이고, (가) 황사영 백서 사건은 같은 해 신유박해의 상황을 청의 주교에게 알리려던 백서가 발각된 일로 이승훈 처형 이후이다.
| 조선은 김기수와 김홍집을 수신사로 (가)에 파견하였다. (나)에는 김윤식을 영선사로 삼아 무기 제조 기술 등을 배우는 유학생을 보냈다. 또한 조선은 민영익 등을 보빙사로 (다)에 파견하였다. |
(가)는 일본, (나)는 청, (다)는 미국이며, 일본과 청은 톈진 조약을 체결하였다.
수신사는 일본에, 김윤식의 영선사는 청에, 민영익의 보빙사는 미국에 파견되었다. 갑신정변 뒤인 1885년 청과 일본은 조선에서 양국 군대를 철수하는 톈진 조약을 맺었다.
- 흥선 대원군을 납치한 것은 임오군란 직후의 청이다.
- 조선과 강화도 조약을 맺은 것은 일본이다.
- 거문도를 불법 점령한 것은 영국이다.
| 신라 왕 김부가 항복해 오니 그를 경주의 사심관으로 임명하여 부호장 이하의 관직 등에 관한 일을 맡게 하였다. 이에 여러 공신들 역시 이를 본받아 각각 자기 주의 사심관이 되게 하였다. |
사심관 제도와 같은 목적의 정책은 기인 제도이다.
태조 왕건은 김부(경순왕)를 경주의 사심관으로 삼는 등 지방 출신 인물에게 출신지를 책임지게 하여 지방 호족을 통제하였다. 기인 제도는 호족의 자제를 인질로 수도에 머물게 하여 호족을 견제한 정책으로 목적이 같다.
- 북진 정책은 고구려 계승 의식에 따라 영토를 북쪽으로 넓히려는 정책이다.
- 정혜쌍수는 지눌이 제창한 불교 수행론이다.
- 독서삼품과는 신라 원성왕 때의 관리 선발 제도이다.
| ○○ : 고려 시대 중서문하성의 낭사와 어사대의 관원을 합쳐서 불렀다. 이들은 (가)의 역할을 담당하였다. -「한국사 용어 사전」- |
○○은 대간이며, 중추원의 추밀과 함께 법제와 격식을 제정한 것은 대간의 역할이 아니다.
중서문하성의 낭사와 어사대 관원을 합쳐 대간이라 하였다. 법제·격식 제정은 중서문하성의 재신과 중추원의 추밀이 모인 식목도감에서 담당하였다.
- 왕의 잘못을 논하는 간쟁은 대간의 역할이다.
- 관원 임명 시 동의 여부를 서명하는 서경은 대간의 권한이다.
- 잘못된 왕명을 시행하지 않고 되돌려 보내는 봉박도 대간의 권한이다.
| (가)전라도 각지에 집강소가 설치되었다. (나)고부에서 만석보가 허물어졌다. (다)청과 일본이 시모노세키 조약을 체결하였다. |
순서는 만석보 파괴 → 집강소 설치 → 시모노세키 조약이다.
(나) 고부 군수 조병갑의 수탈에 맞서 농민들이 만석보를 허문 것은 1894년 초 고부 농민 봉기이다. (가) 전주 화약 이후 전라도 각지에 집강소가 설치되었고, (다) 청일 전쟁이 끝난 1895년 시모노세키 조약이 체결되었다.
| (가)이미 우리 고향을 현으로 승격하고 또 수령을 두어 어루만지고 위로하더니, 돌이켜 다시 군대를 일으켜 토벌하러 와서 우리 어머니와 아내를 옥에 가두었으니 그 뜻은 어디에 있는가? (나)의천이 불전과 경서 1,000권을 바치고, 또 흥왕사에 교장도감을 둘 수 있기를 아뢰었다. 요와 송에서 책을 사들여 4,000권에 이를 정도로 많았는데 죄다 간행하였으며, 천태종을 처음 열어 국청사에 두었다. (다)성균관을 다시 정비하고 이색을 판개성부사 겸 성균대사성으로 삼았다. … 이색이 다시 가르치는 방법을 정하고 매일 명륜당에 앉아서 경전을 나누어 수업하였는데, 강의를 마치면 함께 논쟁하느라 지루함을 잊을 정도였다. |
순서는 의천의 교장 간행 → 망이·망소이의 난 → 공민왕의 성균관 정비이다.
(나) "의천"이 교장도감을 두고 천태종을 연 것은 11세기 후반 선종·숙종 때의 일이다. (가) 고향을 "현으로 승격"한 뒤 다시 토벌했다는 원망은 무신 집권기 명종 때 공주 명학소에서 일어난 망이·망소이의 난이다. (다) "이색"을 성균대사성으로 삼아 성균관을 정비한 것은 고려 말 공민왕 때이다.
| ‧(가)은/는 본래 고구려의 별종이다. … 무리를 이끌고 동쪽으로 가서 계루부의 옛 땅을 차지하고 동모산에 성을 쌓고 살았다. ‧부여씨가 망하고 고씨가 망하게 되니 김씨가 그 남쪽 땅을 차지하고 대씨가 그 북쪽 땅을 차지하여 (나)라 하였다. 이것을 남북국이라 한다. |
| < 보 기 > ㄱ.(가)은/는 고구려의 왕족 출신이다. ㄴ.(가)은/는 당의 산둥반도를 공격하였다. ㄷ.(나)은/는 거란의 침략으로 멸망하였다. ㄹ.(나)의 군사제도로 9서당 10정이 있었다. |
(가)는 대조영, (나)는 발해이며, 옳은 설명은 발해가 거란의 침략으로 멸망하였다는 것뿐이다.
"고구려의 별종"으로 "동모산"에 성을 쌓은 인물은 대조영이고, "대씨"가 북쪽 땅을 차지하여 남북국을 이룬 나라는 발해이다. 발해는 926년 거란의 침략으로 멸망하였다.
- 대조영은 고구려 장수 출신으로 전해지며 고구려 왕족(고씨)은 아니다.
- 당의 산둥반도(등주)를 공격한 것은 대조영이 아니라 무왕 때 장문휴이다.
- 9서당 10정은 통일 신라의 군사 제도이다.
| ◦왕 3년(889) 나라 안의 여러 주(州)⋅군(郡)에서 공물과 조세를 보내지 않아 나라의 창고가 텅 비어 나라의 씀씀이가 궁핍하게 되었으므로 왕이 사자를 보내 독촉하였다. 이로 말미암아 도적들이 곳곳에서 벌떼처럼 일어났다. |
| < 보 기 > ㄱ.적고적의 난이 발생하였다. ㄴ.김헌창의 반란이 진압되었다. ㄷ.만적이 신분 해방을 주창하였다. ㄹ.원종과 애노가 사벌주에서 봉기하였다. |
밑줄 친 왕은 신라 진성 여왕이며, 그 시기에는 원종·애노의 난과 적고적의 난이 일어났다.
"왕 3년(889)"에 조세를 독촉하자 도적이 벌떼처럼 일어났다는 것은 진성 여왕 때 사벌주에서 일어난 원종·애노의 난을 가리킨다. 이후 붉은 바지를 입은 적고적도 봉기하였다.
- 김헌창의 반란은 헌덕왕 때의 일로 진성 여왕보다 앞선다.
- 만적이 신분 해방을 주창한 것은 고려 무신 집권기 최충헌 때이다.
| 후(煦)는 문종의 넷째 아들로서 송나라 황제와 이름이 같으므로 그것을 피하여 자(字)로 행세하였다. 문종이 여러 아들에게, “누가 승려가 되어 복전(福田)의 이익을 짓겠느냐?”라고 물으니 후(煦)가, “상(上)의 명령대로 하겠다.” 하고, 출가하여 영통사(靈通寺)에 거처하였다. 그는 송나라에 들어가 법을 구하려 했으나 문종이 허락하지 않았다. 하지만 후(煦)는 송나라로 들어가 황제를 만나 여러 절을 다니며 법을 묻겠다고 하였다. |
후(煦)는 대각국사 의천이며, 교관겸수를 제창하였다.
"문종의 넷째 아들"로 출가하여 "송나라"에 들어가 법을 구한 인물은 의천이다. 의천은 교리 공부와 참선을 함께 닦아야 한다는 교관겸수를 내세워 천태종을 열었다.
- 왕오천축국전을 남긴 것은 신라의 혜초이다.
- 유불 일치설을 주장한 것은 지눌의 제자 혜심이다.
- 수선사 결사를 조직한 것은 지눌이다.
| (가)삼가 말하건대 남의 무덤을 파는 것은 예의가 없는 행동에 가깝지만 무력을 동원하여 백성들을 도탄 속에 빠뜨리는 것보다 낫기 때문에 하는 수 없이 그렇게 하였습니다. (나)정족 산성 수성장 양헌수가 … 우리 군사들이 좌우에 매복했다가 일제히 총탄을 퍼부었습니다. 저들은 죽은자가 6명이고 아군은 죽은 자가 1명입니다. (다)흉악한 적들을 무찌르다가 수많은 총알을 고슴도치의 털처럼 맞아서 순직하였으니 … 죽은 진무중군 어재연에게 특별히 병조 판서와 지삼군부사의 관직을 내리노라. (라)일본국 인민이 조선국의 각 항구에서 머무르는 동안 죄를 범한 것이 조선국 인민과 관계되는 사건일 때에는 모두 일본국 관원이 심판한다. |
순서는 병인양요 → 오페르트 도굴 사건 → 신미양요 → 강화도 조약이다.
(나) "정족산성"의 "양헌수"는 1866년 병인양요, (가) "남의 무덤을 파는 것"을 변명한 글은 1868년 오페르트의 남연군 묘 도굴 사건이다. (다) "어재연"의 순직은 1871년 신미양요이고, (라) 일본 관원이 심판한다는 영사 재판권 조항은 1876년 강화도 조약이다.
| (가)대한 정부는 일본 정부가 추천한 일본인 1명을 재정 고문으로 삼아 대한 정부에 용빙하여 재무에 관한 사항은 일체 그의 의견을 물어서 시행해야 한다. (나)한국 정부는 금후 일본국 정부의 중개를 거치지 않고서는 국제적 성질을 가진 어떠한 조약이나 약속을 하지 않을 것을 약속한다. (다)러시아는 일본이 한국에서 정치상 군사상 및 경제상의 특수한 이익을 갖는다는 것을 승인하고 일본 정부가 한국에서 필요하다고 인정하는지도, 보호 및 감리의 조치에 대해 방해하거나 간섭하지 않을 것을 약속한다. |
(다) 포츠머스 조약 이전에 일본은 이미 독도를 불법 편입하였으므로 이 설명이 옳지 않다.
(가)는 재정 고문을 두게 한 1904년 제1차 한일 협약, (나)는 외교권을 박탈한 1905년 11월 을사늑약, (다)는 러일 전쟁을 끝낸 1905년 9월 포츠머스 조약이다. 일본은 1905년 2월 시마네현 고시로 독도를 불법 편입하였다.
- 제1차 한일 협약으로 재정 고문이 된 메가타는 화폐 정리 사업을 실시하였다.
- 을사늑약으로 외교권을 빼앗긴 뒤 일본은 청과 간도 협약을 체결하였다.
- 체결 순서는 제1차 한일 협약, 포츠머스 조약, 을사늑약 순이 맞다.
| 제1조회사의 설립은 조선 총독의 허가를 받아야 한다. 제2조조선 밖에서 설립된 회사가 한국에 본점 또는 지점을 설치하고자 하는 경우, 조선 총독의 허가를 받아야 한다. 제3조조선 밖에서 설립되어 조선에서 사업을 운영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회사가 그 사업을 경영하는 경우, 조선에 본점 또는 지점을 설립하여야 한다. |
제시된 법령은 회사령이며, 그 시기에는 헌병 경찰이 대한 광복회를 체포하려는 모습을 볼 수 있다.
회사 설립에 "조선 총독의 허가"를 받게 한 회사령은 1910년부터 1920년까지 시행되었다. 이 시기는 헌병 경찰 통치(무단 통치) 시기이며, 대한 광복회는 1915년에 결성되었다.
- 국민학교라는 명칭은 1941년부터 사용되었다.
- 치안 유지법은 1925년에 제정되어 회사령 폐지 이후의 일이다.
- 농촌 진흥 운동은 1930년대에 전개되었다.
| 평서 대원수는 급히 격문을 띄우노니 관서 지역의 부로자제와 공사천민은 모두 이 격문을 들으라. … 조정에서는 관서 지역을 썩은 흙과 같이 버렸다. 심지어 권세 있는 집의 노비들도 서토 사람만 보면 반드시 ‘평안도 놈’이라고 말한다. 어찌 억울하고 원통하지 않은 자 있겠는가. … 이제 격문을 띄워 먼저 여러 고을의 군후에게 알리노니, 절대로 동요하지 말고 성문을 활짝 열어 우리 군대를 맞으라. |
제시된 사건은 홍경래의 난이며, 이 시기에는 왕실과 혼인한 일부 가문이 정권을 장악하였다.
"평서 대원수", "관서 지역", "평안도 놈"이라는 서북인 차별이 단서로, 순조 때인 1811년 일어난 홍경래의 난이다. 순조 때는 외척 가문이 권력을 독점한 세도 정치 시기였다.
- 유득공 등 서얼을 규장각 검서관으로 등용한 것은 정조 때이다.
- 대동법을 처음 실시한 것은 광해군 때 경기도에서이다.
- 육의전을 제외한 시전 상인의 금난전권을 폐지한 것은 정조 때의 신해통공이다.
| 이지영이 장군이 되었다. 그가 최충수 집의 비둘기를 빼앗았는데, 최충수가 화가 나서 그 형인 ㉠최충헌에게 그 사실을 아뢰고 ㉡이의민 부자를 죽이자고 하니, 최충헌이 그렇게 하자고 하였다. 이의민이 미타산 별장에 갔을 때, 최충헌 등이 가서 그를 죽이고 머리를 저자에 내걸었다. 당시 이지순은 대장군이었고, 이지광은 장군이었는데, 변란의 소식을 듣고 가동을 이끌고 길에서 싸웠다. - 「고려사」- |
㉠ 최충헌은 교정도감을 설치하여 국정을 장악하였다.
최충헌은 동생 최충수와 함께 이의민을 제거하고 집권한 뒤, 최고 권력 기구인 교정도감을 두어 국정을 총괄하였다.
- 하층민(천민) 출신의 권력자는 최충헌이 아니라 이의민이다.
- 개혁안 봉사 10조를 올린 것은 이의민이 아니라 최충헌이다.
- 정방을 설치해 인사권을 장악한 것은 최충헌의 아들 최우이다.
| 국왕은 현륭원(顯隆園)을 수원에 봉안하고 1년에 한 번씩 참배할 준비를 하였다. 옛 규례에는 한강을 건널 때 용배[龍舟]를 사용하였으나, 그 방법이 불편한 점이 많다 하여 배다리의 제도로 개정하고 묘당으로 하여금 그 세목을 만들어 올리게 하였다. 그러나 뜻에 맞지 않았기에 국왕은 주교지남(舟橋指南)을 편찬하였다. |
밑줄 친 국왕은 정조이며, 탕평비를 세운 것은 정조가 아니라 영조이다.
"현륭원"(사도 세자의 묘)을 수원으로 옮기고 한강에 배다리를 놓게 한 왕은 정조이다. 탕평비는 영조가 성균관 앞에 세웠다.
- 정조는 국왕 친위 부대인 장용영을 설치하였다.
- 정조 때 종합 무예서인 무예도보통지가 간행되었다.
- 정조는 젊은 문신을 재교육하는 초계문신 제도를 시행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