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저 옛 성인들은 예악으로 나라를 융성케하고 인의(仁義)로 가르쳤으며, 괴상한 힘이나 난잡한 귀신을 말하지 아니했다. …(중략)… 삼국의 시조들이 모두 신이(神異)한 데서 나왔다고 해서 어찌 괴이하겠는가? 이것이 신이로써 다른 편보다 먼저 놓은 까닭이며, 그 의도도 바로 여기에 있다.
‘삼국의 시조가 모두 신이(神異)한 데서 나왔다’며 이를 다른 편보다 먼저 놓았다는 글은 일연의 『삼국유사』 기이편 서문이므로, 현전 신라 향가를 가장 많이 수록한 책이라는 설명이 옳다.
『삼국유사』에는 향가 14수가 실려 있어 현재 전하는 신라 향가의 대부분을 담고 있다. 고조선과 단군 신화, 불교 설화와 민간 전승도 폭넓게 수록하였다.
- 중국 정사의 기전체 형식을 따른 것은 김부식의 『삼국사기』이다.
- 열전에서 신라인의 비중이 높은 것도 『삼국사기』의 특징이다.
- 신라의 독자 연호 사용을 옳지 않다고 논한 것은 사대적 시각을 드러낸 『삼국사기』의 사론이다.
지금 ( )의 창고에는 옥으로 된 벽(璧)·규(珪)·찬(瓚) 등 여러 대에 걸쳐 내려온 물건이 있어 대대로 보물로 여기는데, 원로들이 말하길 선대(先代) 왕이 하사받은 것이라 한다. 그 인문(印文)은 ‘예왕지인(濊王之印)’ 이다.
- 삼국지, 「위서」 동이전 -
창고에 ‘예왕지인(濊王之印)’이 새겨진 인장을 보관했다는 기록은 『삼국지』 위서 동이전의 부여조이므로, 사출도를 두고 12월에 영고를 연 나라라는 설명이 옳다.
부여는 왕 아래 마가·우가·저가·구가가 별도로 사출도를 다스렸고, 수렵 사회의 전통이 남은 영고를 12월에 열었다.
- 10월의 제천 행사 동맹은 고구려의 풍속이다.
- 단궁·과하마·반어피와 10월 무천은 동예에 해당한다.
- 5월과 10월의 계절제는 삼한의 제천 행사이다.
ㄱ. 고령의 대가야를 병합하여 영토를 확장하였다.
ㄴ. 호국의 염원을 담아 황룡사 9층 목탑을 세웠다.
ㄷ. 행정기관인 병부(兵部)를 설치하여 왕권을 강화하였다.
ㄹ. 주군현(州郡縣)의 제도를 정하고 실직주(悉直州)를 두었다.
시대순은 지증왕의 주군현 제도·실직주 설치 → 법흥왕의 병부 설치 → 진흥왕의 대가야 병합 → 선덕여왕의 황룡사 9층 목탑 건립이다.
지증왕은 505년 주군현 제도를 정하고 실직주를 두어 이사부를 군주로 삼았다. 법흥왕은 517년 병부를 설치하고 율령을 반포해 왕권을 강화하였다.
- 진흥왕은 562년 이사부를 보내 고령의 대가야를 병합하였다.
- 황룡사 9층 목탑은 선덕여왕 때 자장의 건의로 645년에 완성되었다.
현종(玄宗) 개원(開元) 7년에 ( )이/가 죽었다. …(중략)… 아들이 왕위에 올라 영토를 크게 개척하니 동북의 모든 오랑캐들이 겁을 먹고 그를 섬겼으며, 또 사사로이 연호를 인안(仁安)으로 고쳤다.
- 신당서, 「열전」 북적 발해 -
개원 7년(719)에 죽고 아들이 연호를 ‘인안’으로 고쳤다고 했으므로 그 아들은 무왕이고, ( )는 발해를 세운 대조영이다. 따라서 천문령에서 당군을 물리치고 동모산에서 건국했다는 설명이 옳다.
대조영은 고구려 유민과 말갈인을 이끌고 천문령 전투에서 당군을 격파한 뒤 698년 동모산에서 나라를 세웠다.
- 5경 15부 62주의 지방 행정 체계는 선왕 때 갖추어졌다.
- 장문휴를 보내 등주를 공격한 것은 아들 무왕이다.
- 3성 6부의 중앙 관제 정비는 문왕 때의 일이다.
옳지 않은 설명은 고려 여성이 사회 활동에 아무런 제한 없이 남성과 대등했다는 내용이다.
고려 여성은 가정 안에서 지위가 비교적 높았지만 관직 진출이 불가능했으므로 사회 활동에 제한이 없었다고 볼 수 없다.
- 아들과 딸이 모두 제사를 주관할 수 있었다는 설명은 옳다 — 자녀가 돌아가며 제사를 지내는 윤회봉사도 행해졌다.
- 일부일처가 일반적이었으나 축첩도 가능했다는 설명은 옳다.
- 여성이 호주가 될 수 있고 호적에 자녀를 아들딸 구분 없이 나이순으로 기록했다는 설명은 옳다.

안평대군의 꿈 이야기를 듣고 그린 그림은 안견의 「몽유도원도」로 세종 때인 15세기 작품이므로, 『용비어천가』를 지은 것이 같은 시기의 문화이다.
세종 때 훈민정음을 창제한 뒤 왕조 창업 과정과 선조의 업적을 찬양한 『용비어천가』를 한글로 지어 간행하였다.
- 「청산별곡」은 고려 시대의 속요이다.
- 강화도 외규장각은 조선 후기 정조 때 설치되었다.
- 중인·서얼의 시사를 중심으로 한 위항문학은 조선 후기에 유행하였다.
이여송이 휘하의 병사들을 거느리고 말을 몰아 급히 진격하였다. 왜적은 벽제관 부근에서 거짓으로 패하는 척하면서 명군을 진흙수렁으로 유인하였다. 명군이 함부로 전진하다가 여기에 빠지자 왜적들이 갑자기 달려들어 명군을 마구 척살하였다. 겨우 죽음을 면한 이여송은 나머지 부하들을 이끌고 파주, 개성을 거쳐 평양으로 후퇴하였다.
- 『연려실기술』, 선조조 고사본말 -
<보기>
신립이 탄금대 전투에서 패하고 자결하다.
⇩ (가)
이순신이 이끄는 조선군이 한산도 해상에서 일본군을 크게 이기다.
⇩ (나)
김시민 휘하의 조선 군인과 백성들이 진주성에서 일본군의 침입을 막아내다.
⇩ (다)
권율이 지휘하는 조선군이 행주산성에서 일본군을 물리치다.
⇩ (라)
원균이 칠천량 부근에서 전사하다.
이여송의 명군이 패한 벽제관 전투는 1593년 1월의 일로, 1차 진주성 전투와 행주산성 전투 사이인 (다) 시기에 해당한다.
1592년 4월 탄금대 패전, 7월 한산도 대첩, 10월 김시민의 진주성 승리가 이어졌다. 1593년 1월 조·명 연합군이 평양성을 되찾은 뒤 남하하던 명군이 벽제관에서 패하였고, 이어 2월에 권율이 행주산성에서 승리하였다.
- 칠천량 해전에서 원균이 전사한 것은 정유재란 때인 1597년이다.
수령이라는 직책은 관장하지 않는 것이 없으니, 여러 조목을 열거하여도 오히려 직책을 다하지 못할까 두려운데, 하물며 스스로 실행하기를 기대할 수 있겠는가? 이 책은 첫머리의 부임(赴任)과 맨 끝의 해관(解官) 2편을 제외한 나머지 10편에 들어 있는 것만 해도 60조나 되니, 진실로 어진 수령이 있어 제 직분을 다할 것을 생각한다면 아마도 방법에 어둡지는 않을 것이다.
수령의 직책을 부임에서 해관까지 12편으로 정리한 책은 『목민심서』이고 지은이는 정약용이므로, 조세 제도 개혁으로 정전제의 이념을 구현하려 했다는 설명이 옳다.
정약용은 여전론을 거쳐 현실적 대안으로 정전론을 내세워 토지 제도와 조세 제도를 함께 개혁하고자 하였다.
- 노론의 중심 인물로 대의명분을 중시한 인물은 송시열이다.
- 자영농 육성을 위한 균전론은 유형원이 제기하였다.
- 연행 경험을 바탕으로 상공업 진흥과 기술 발전을 제안한 것은 박지원·박제가 등 북학파이다.
운종가는 오가는 수많은 사람들의 바다
수레와 말들은 우레 소리 일으키네.
점포마다 온갖 상품 가득 쌓여
비단 가게에는 능라(綾羅)와 금수(錦繡)
어물 가게에는 싱싱한 갈치, 준치, 숭어, 붕어, 잉어
숭례문 밖 풍경을 보니 창고에는 곡식이 억만섬
- 『성시전도(城市全圖)』 -
‘운종가’와 ‘숭례문’이 등장하므로 묘사한 도시는 조선 후기의 한양이며, 국가의 허가를 받아 영업하는 육의전이 번성했다는 설명이 옳다.
운종가(종로)에는 국가에 물품을 대는 대가로 특권을 받은 시전이 늘어섰고, 그중 비단·면포 등 여섯 종류를 취급한 육의전이 대표적이었다.
- 동시·서시·남시를 개설한 곳은 신라의 수도 경주이다.
- 건원중보와 해동통보는 고려 시대에 주조된 화폐이다.
- 벽란도를 통해 송과 교역한 것은 고려의 수도 개경이다.
반란을 일으킨 적도들은 평안도 가산읍 북쪽 다복동에서 무리를 모아 봉기하여 가산과 선천, 곽산 등 청천강 북쪽의 주요 고을들을 점령하고 기세를 떨쳤다.
- 『서정록(西征錄)』 -
<보기>
ㄱ. 평안도 지역에 대한 차별에 저항하였다.
ㄴ. 반정 후의 논공행상에 대한 불만이 원인이었다.
ㄷ. 지역의 무반 출신과 광산노동자들이 적극 가담하였다.
ㄹ. 의주와 안주를 연이어 점령하여 조정에 큰 위협이 되었다.
가산 다복동에서 봉기해 청천강 이북을 점령한 반란은 1811년 홍경래의 난이므로, 평안도 차별에 대한 저항과 무반·광산노동자의 가담이 옳은 설명이다.
홍경래의 난은 세도 정치기의 수탈과 서북 지역 차별에 반발해 일어났으며, 몰락 양반·향임층·상인·광산노동자 등이 폭넓게 참여하였다.
- 반정 후 논공행상에 대한 불만이 원인이 된 것은 인조 때의 이괄의 난이다.
- 홍경래군은 정주성에서 관군에 진압되었으며, 의주와 안주를 연이어 점령하지는 못하였다.
ㄱ. 근대식 우편 제도와 전신 시설은 모두 1884년에 시작하여 원거리 통신의 새로운 시대를 열었다.
ㄴ. 근대식 의료는 갑오개혁 이후 더욱 확산하여 1895년 정부에 위생국을 설치하고 전염병 예방 규칙도 제정하였다.
ㄷ. 전등은 1887년 고종과 미국인의 합작으로 설립한 한성전기회사가 경복궁에 처음 설치하여 운영하였다.
ㄹ. 철도는 광무개혁 때 경인선을, 러일전쟁 때 경부선을, 간도협약으로 경의선을 모두 일본이 개통하였다.
옳은 것은 1884년 우편·전신의 시작과 갑오개혁 이후 위생국 설치·전염병 예방 규칙 제정의 두 가지이다.
1884년 홍영식의 건의로 우정총국이 개설되었고, 같은 해 부산과 나가사키를 잇는 해저 전신선이 개통되었다. 갑오개혁 때 내무아문 아래 위생국이 설치되고 1895년 전염병 예방 규칙이 마련되었다.
- 1887년 경복궁 건청궁에 처음 켜진 전등은 미국 에디슨 전기회사가 설치한 것이며, 한성전기회사는 1898년에 세워졌다.
- 경의선은 러일전쟁 중 일본이 군용으로 부설하였고, 간도협약의 대가로 일본이 얻은 것은 안봉선 개축권 등이다.
전에는 …(중략)… 개화당을 꾸짖는 자도 많이 있었으나, 개화가 아름답다는 것을 말하면 듣는 사람들도 감히 크게 반대하지는 않았다. 그런데 정변을 겪은 뒤부터 조정과 민간에서 모두 “이른바 개화당이라고 하는 자들은 충의를 모르고 외국인과 연결하여 나라를 팔고 겨레를 배반하였다.”라고 말하고 있다.
- 『윤치호 일기』 -
개화당이 외국인(일본)과 연결해 일으켰다고 비난받은 정변은 1884년 갑신정변이므로, 주도 세력이 혜상공국 혁파 등 개혁을 시도했다는 설명이 옳다.
김옥균 등 급진 개화파는 14개조 정강에서 문벌 폐지, 지조법 개혁, 혜상공국 혁파, 호조로의 재정 일원화 등을 내세웠다.
- 박정양을 주미공사로 파견한 것은 1887년으로, 갑신정변을 계기로 한 것이 아니다.
- 통리기무아문은 1880년에 설치되어 갑신정변보다 앞선다.
- 제물포조약은 임오군란의 사후 처리로 체결되었고, 갑신정변 뒤에는 한성조약과 톈진조약이 맺어졌다.
1920년대 후반 민족유일당운동의 결과, 만주 지역 민족해방운동의 중심 단체이던 정의·신민·참의 3부가 국민부와 혁신의회로 재편되었다. 이후 1930년대에 국민부 계통은 (가)을/를 조직하여 남만주 일대를 중심으로 활약했다.
국민부 계통이 조직해 남만주에서 활약한 (가)는 조선혁명군이므로, 영릉가·흥경성 전투에서 일본군을 격파했다는 설명이 옳다.
조선혁명군은 양세봉의 지휘 아래 중국 의용군과 연합하여 1932년 영릉가 전투, 1933년 흥경성 전투에서 승리하였다.
- 보천보 습격은 동북항일연군 소속 부대의 활동이다.
- 쌍성보·대전자령 전투는 혁신의회 계통의 한국독립군이 북만주에서 거둔 승리이다.
- 청산리 대첩은 1920년 김좌진의 북로군정서와 홍범도 부대 등이 이끌었다.
조선총독부는 「조선농지령」을 제정하여 지주의 소작료 수탈을 어느 정도 통제하고 소작인의 소작료 감면청구권을 법제화했다. 이는 소작인의 소작권을 안정시켜 농촌사회의 불안을 완화하려는 것이었으나, 실제 운영과정에서는 지주의 권익을 옹호하고 마름의 횡포를 통제하지 않았다.
| ① | ② | ③ | ④ |
|---|---|---|---|
| 국권피탈 ~ 3·1운동 | 3·1운동 ~ 신간회 해산 | 신간회 해산 ~ 조선어학회 사건 | 조선어학회 사건 ~ 8·15 해방 |
「조선농지령」은 1934년에 제정되었으므로, 신간회 해산(1931)과 조선어학회 사건(1942) 사이의 시기에 해당한다.
1920년대 후반부터 소작 쟁의가 격화되자 총독부는 농촌 진흥 운동과 함께 1932년 조선소작조정령, 1934년 조선농지령을 시행해 소작 쟁의를 체제 안으로 흡수하려 하였다.
- 국권 피탈부터 3·1 운동까지는 토지 조사 사업이 진행된 무단 통치기이다.
- 3·1 운동부터 신간회 해산까지는 산미 증식 계획이 추진된 문화 통치기로, 조선농지령보다 앞선다.
- 조선어학회 사건 이후는 전시 동원 체제가 극에 달한 시기로, 조선농지령 제정보다 늦다.
옳지 않은 설명은 대통령 직선제 부활 개헌을 1990년대의 일로 본 내용이다.
직선제를 되살린 개헌은 6월 민주 항쟁 직후인 1987년(9차 개헌)에 이루어졌으므로 1980년대의 사실이다.
- 1960년대 노동집약적 수출 주도형 공업화로 높은 성장률을 기록했다는 설명은 옳다.
- 1970년 전태일의 분신이 노동 문제에 대한 사회적 관심을 높였다는 설명은 옳다.
- 1980년대 중반 이후 저금리·저유가·저달러의 3저 호황으로 고성장을 이루었다는 설명은 옳다.
ㄱ. 사람을 죽인 자는 바로 사형에 처하고, 남에게 상해를 입힌 자는 곡물로 배상하게 한다. 남의 물건을 훔친 자는 재산을 몰수하고 그 집의 노비로 삼는다.
ㄴ. 태조께서 나라를 통일한 후에 외관을 두고자 하였으나 …(중략)… 시행할 겨를이 없었습니다. …(중략)… 청컨대 외관을 두소서.
ㄷ. 골품을 따져 사람을 쓰기 때문에 그 족속이 아니면 비록 뛰어난 재주와 큰 공이 있어도 자기 신분의 한계를 넘지 못한다.
ㄹ. 이들은 집합하자마자 우선 독립 만세를 소리 높여 외쳐 …(중략)… 군중의 사기를 높이고 마침내는 경찰 관서를 습격하여 때때로 파괴적 행동에 빠지려 하였다.
태조가 외관을 두려다 못 했으니 외관을 두라고 청한 글은 최승로의 시무 28조로 고려 성종 때이며, 이 시기에 12목을 설치하고 목사를 파견하였다.
성종은 최승로의 건의를 받아들여 983년 처음으로 지방에 12목을 두고 지방관을 상주시켰다.
- 살인·상해·절도를 처벌한 법은 고조선의 8조법이며, 5부와 욕살은 고구려의 지방 제도이다.
- 골품에 따른 인재 등용은 신라의 모습이며, 8도와 관찰사는 조선의 지방 제도이다.
- 독립 만세를 외치며 경찰 관서를 습격한 것은 일제 강점기 3·1 운동의 모습이고, 23부와 관찰사는 1895년 제2차 갑오개혁 때의 제도이다.
옳지 않은 설명은 백제와 신라가 모두 국학을 설립했다는 내용이다.
국학은 통일 신라 신문왕 때 세운 유학 교육기관이며, 백제는 국학을 두지 않고 오경박사 등 박사 제도를 운영하였다(고구려는 태학).
- 고려에서 국자감·향교 외에 최충의 문헌공도 등 사학 12도가 나타났으며 문헌공도가 9재로 운영되었다는 점에서 옳다.
- 조선의 서원은 선현 제사와 함께 교육 기능을 담당했다는 설명은 옳다.
- 갑오개혁 때 교육 행정을 전담하는 학무아문을 설치했다는 설명은 옳다.

부근리 고인돌, 정족산성, 초지진이 있는 (가)는 강화도이며, 을사조약에 반대해 최익현이 의병을 일으킨 곳은 강화도가 아니다.
최익현은 1906년 전라도 태인에서 의병을 일으켰다가 순창에서 체포되어 쓰시마로 압송되었다.
- 고려 최씨 무신 정권은 몽골의 침입에 맞서 강화도로 도읍을 옮겼다.
- 병인양요 때 프랑스군은 강화도를 점령하고 외규장각 의궤 등 문화재를 약탈하였다.
- 1907년 군대 해산에 맞서 강화 진위대 군인들이 봉기하였다.
ㄱ. 코로나 19로 인해 일을 쉬는 날이 많아졌다.
ㄴ. 이 연극에서 가장 뛰어난 부분은 마지막 장면이었다.
ㄷ. 그는 마음속에 간직하고 아직 드러내지 않은 생각이 따로 있었다.
ㄹ. 다국적 기업들이 시장 점유율을 높이기 위해 치열하게 다투고 있다.
‘마음속에 간직하고 아직 드러내지 않은 생각’은 배 복(腹) 자를 쓴 腹案(복안)이므로, 뒤집힐 복(覆) 자를 쓴 覆案과 연결한 것이 옳지 않다.
覆案은 ‘다시 조사하여 살핌’이라는 뜻으로 쓰이는 말이어서 음이 같아도 의미가 다르다.
- ‘일을 쉬는’ 것은 休務(휴무)와 통한다.
- ‘가장 뛰어난 부분’은 壓卷(압권)과 통한다.
- ‘치열하게 다투는’ 것은 角逐(각축)과 통한다.
한자 표기가 모두 옳은 것은 예금거래 기본 약관(約款)의 교부(交付)를 청구한다는 문장이다.
나머지 문장에는 소리가 같거나 비슷한 다른 한자를 잘못 쓴 표기가 하나씩 들어 있다.
- 의견을 모은다는 뜻의 의견수렴은 意見收斂으로 써야 하며, 收廉은 틀린 표기이다(보험 保險은 옳다).
- 주춧돌을 뜻하는 초석은 礎石으로 써야 하며, 楚石은 틀린 표기이다(우편 郵便은 옳다).
- 일정 기간 그대로 두는 거치식은 据置式으로 써야 하며, 据値式은 틀린 표기이다(예금 預金은 옳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