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리직 한국사] 22년 1회차
계리직 한국사 기출문제

22년 1회차

총 20문항 · 객관식 · A4 약 1장

1 / 1
A4정답 포함
계리직 한국사 기출문제모두CBT · moducbt.com

22년 1회차

총 20문항 · 객관식 · 정답·해설 포함
문제 1
밑줄 친 ( )의 재위 기간에 있었던 사실로 옳은 것은?

( ) 9년 3월에 사방(四方)의 우역(郵驛)을 비로소 설치하고, 담당 관리에게 명하여 관도(官道)를 수리하게 하였다.
- 삼국사기 -
1처음으로 수도에 시장을 열어 사방의 물자를 유통시켰다.
2중앙관서를 22부로 정비하고 수도를 5부로 편제하였다.
3우산국으로 불리던 울릉도를 정복하여 영토로 편입하였다.
49주와 5소경을 설치하여 지방행정을 새롭게 정비하였다.
정답 및 해설

사방에 우역(郵驛)을 처음 설치하고 관도를 수리하게 한 왕은 신라 소지 마립간이므로, 처음으로 수도에 시장을 열어 사방의 물자를 유통시킨 사실이 옳다.

『삼국사기』에 따르면 소지 마립간은 재위 9년에 우역을 두었고, 재위 12년에 수도에 처음으로 시장을 열었다.

  • 중앙 관서를 22부로 정비하고 수도를 5부로 편제한 것은 백제 성왕 때의 일이다.
  • 우산국을 정복해 영토로 편입한 것은 지증왕 때 이사부의 활약이다.
  • 9주 5소경을 설치해 지방 행정을 정비한 것은 삼국 통일 이후 신문왕 때이다.
문제 2
삼국시대 고분 중 벽화가 남아 있는 것을 모두 고른 것은?

ㄱ. 호우총 ㄴ. 쌍영총 ㄷ. 무용총
ㄹ. 각저총 ㅁ. 천마총
1ㄱ, ㄴ, ㅁ
2ㄱ, ㄷ, ㄹ
3ㄴ, ㄷ, ㄹ
4ㄷ, ㄹ, ㅁ
정답 및 해설

삼국 시대 고분 가운데 벽화가 남아 있는 것은 고구려의 쌍영총·무용총·각저총이다.

고구려의 굴식 돌방무덤은 널방 벽과 천장에 그림을 그릴 수 있어 쌍영총의 인물도, 무용총의 무용도·수렵도, 각저총의 씨름도가 전한다. 반면 신라의 돌무지덧널무덤은 구조상 벽화가 없다.

  • 호우총은 신라의 돌무지덧널무덤으로, 광개토 대왕 관련 글자가 새겨진 호우명 그릇이 출토되었을 뿐 벽화는 없다.
  • 천마총도 신라의 돌무지덧널무덤이며, 천마도는 벽이 아니라 말다래에 그린 그림이다.
문제 3
(가)와 (나) 사이 시기 신라에서 있었던 사실로 옳은 것은?

(가) 당(唐)이 고구려 평양에 안동도호부를 설치하였다.
(나) 대조영이 동모산에서 진국(震國), 즉 발해를 건국하였다.
1일반 백성들에게 정전을 지급하였다.
2관리 채용을 위한 시험제도로 독서삼품과를 실시하였다.
3유교 교육을 진흥시키기 위해 국학을 설치하였다.
4관료전을 폐지하고 녹읍을 부활하였다.
정답 및 해설

(가) 668년과 (나) 698년 사이 신라에서는 신문왕이 유교 교육 기관인 국학을 설치하였다(682).

당은 고구려를 멸망시킨 668년 평양에 안동도호부를 두었고, 대조영은 698년 동모산에서 진국(발해)을 세웠다. 신문왕은 이 사이에 국학 설치와 함께 관료전 지급 등으로 왕권을 강화하였다.

  • 백성에게 정전을 지급한 것은 성덕왕 때(722)로 (나) 이후이다.
  • 독서삼품과는 원성왕 때(788) 실시되었다.
  • 관료전을 폐지하고 녹읍을 부활한 것은 경덕왕 때(757)이다.
문제 4
후삼국 통일 과정에 있었던 사건의 순서를 옳게 나열한 것은?

ㄱ. 완산주에 도읍을 정하고 후백제를 건국하였다.
ㄴ. 국호를 태봉, 연호를 수덕만세로 정하였다.
ㄷ. 금성이 함락되고 경애왕이 사망하였다.
ㄹ. 왕건이 궁예를 몰아내고 즉위하였다.
1ㄱ-ㄴ-ㄷ-ㄹ
2ㄱ-ㄴ-ㄹ-ㄷ
3ㄴ-ㄱ-ㄹ-ㄷ
4ㄴ-ㄱ-ㄷ-ㄹ
정답 및 해설

후삼국 통일 과정은 후백제 건국 → 태봉 국호 제정 → 왕건 즉위 → 경애왕 사망 순이다(ㄱ → ㄴ → ㄹ → ㄷ).

견훤은 900년 완산주에 도읍하여 후백제를 세웠고, 궁예는 911년 국호를 태봉, 연호를 수덕만세로 고쳤다. 918년 왕건이 궁예를 몰아내고 즉위하여 고려를 세웠으며, 927년 견훤이 금성을 습격해 경애왕이 죽었다.

  • 경애왕의 사망은 고려 건국 이후의 일이므로 왕건 즉위보다 앞에 둘 수 없다.
  • 태봉 국호 제정은 후백제 건국보다 늦으므로 맨 앞에 올 수 없다.
문제 5
밑줄 친 ( ) 제도를 개혁한 인물들로 옳은 것은?

개간된 토지의 넓이를 총괄해서 그 기름지고 메마른 것을 나누어 문무백관에서부터 부병(府兵) 한인(閑人)에게까지 과(科)에 따라 주지 않음이 없었고, 또 그 과에 따라 초채지(땔감을 얻을 수 있는 땅)를 주었는데, 이를 ( ) 제도라 한다.
- 고려사 -
1조준, 정도전
2정도전, 이색
3이색, 정몽주
4조준, 이인임
정답 및 해설

문무백관부터 부병·한인까지 과(科)에 따라 토지와 시지를 준 제도는 고려의 전시과이며, 이를 개혁한 인물은 조준과 정도전이다.

고려 말 권문세족의 농장 확대로 전시과가 무너지자 조준·정도전 등 급진 개혁파 신진 사대부가 사전 개혁을 주도하여 1391년 과전법을 제정하였다.

  • 이색은 사전 개혁에 반대한 온건 개혁파로, 전제 개혁의 주도 인물이 아니다.
  • 정몽주는 고려 왕조 유지를 주장한 온건 개혁파로, 과전법 제정을 주도하지 않았다.
  • 이인임은 우왕 때 권력을 잡은 권문세족으로 개혁 대상 쪽이었다.
문제 6
다음의 시(詩)를 지은 작자가 생존했던 시기에 있었던 사실로 옳은 것은?

오랑캐들이 아무리 완악하다지만 어떻게 이 물을 뛰어 건너랴.
저들도 건널 수 없음을 알기에 와서 진 치고 시위만 하네.
(중략)
저들도 마땅히 저절로 물러가리니 나라가 어찌 갑자기 끝나겠는가.
- 『동국이상국집』 -
1별무반을 조직하여 여진을 정벌하였다.
2거란이 보낸 사신을 유배 보냈다.
3고려 국왕이 나주로 피난했다.
4경찰 업무를 수행하는 야별초를 만들었다.
정답 및 해설

『동국이상국집』은 무신 집권기의 문인 이규보의 문집이므로, 그가 생존한 최씨 무신 정권 시기에 경찰 업무를 맡는 야별초를 만든 사실이 옳다.

시는 오랑캐가 물을 건너지 못하고 진을 친 채 시위만 한다며 결국 물러갈 것이라 노래해, 몽골 침입기의 상황을 보여 준다. 야별초는 최우가 치안 유지를 위해 조직하였고 뒤에 삼별초로 확대되었다.

  • 별무반을 조직해 여진을 정벌한 것은 숙종·예종 때 윤관의 활동으로 이규보 이전이다.
  • 거란 사신을 유배 보낸 것은 태조 때의 만부교 사건이다.
  • 국왕이 나주로 피난한 것은 거란의 2차 침입 때 현종의 일이다.
문제 7
밑줄 친 내용에 해당하는 시기에 신설된 기구를 <보기>에서 모두 고른 것은?

문종이 태평한 통치를 펼치니 백성과 만물이 모두 빛났습니다. 그러나 후손들이 혼미하여 권신(權臣)이 정권을 멋대로 하면서 군병을 끌어안고 왕위를 노리게 되었으니 인종 때 이것이 한 번 벌어지자 신하가 정권을 잡는 일이 일어났고, 의종 때에 이르러서는 익숙해져 버렸습니다. 이로 말미암아 크고 간악한 권신들이 번갈아 가며 세력을 잡고서 임금을 앉히기를 바둑이나 장기 두듯이 하였으며, 강성한 적들은 번갈아 쳐들어와 백성들을 풀이나 갈대같이 베어 버렸지만, 원종이 위태롭고 의심스러운 상황에서 대란을 평정함으로써 겨우 선조들이 물려준 왕업을 보전할 수 있었습니다.
- 고려사 -

<보기>
ㄱ. 정방 ㄴ. 교정도감
ㄷ. 도평의사사 ㄹ. 정치도감
1ㄱ, ㄴ
2ㄱ, ㄹ
3ㄴ, ㄷ
4ㄷ, ㄹ
정답 및 해설

밑줄 친 내용은 권신들이 번갈아 집권하고 외적이 침입한 무신 집권기를 가리키므로, 이 시기에 신설된 기구는 정방과 교정도감이다.

최충헌은 국정 최고 기구로 교정도감을 설치하였고, 최우는 자기 집에 정방을 두어 인사권을 장악하였다.

  • 도평의사사는 원 간섭기 충렬왕 때 도병마사를 개편한 기구로, 무신 집권기 이후이다.
  • 정치도감은 원 간섭기 충목왕 때 권문세족의 불법을 바로잡기 위해 둔 개혁 기구이다.
문제 8
<보기>의 정책을 시행했던 국왕의 재위 기간에 있었던 일로 옳은 것은?

<보기>
- 귀법사를 창건하고 균여를 주지로 임명했다.
- 개경을 황도(皇都)라고 하고, 서경을 서도라고 하였다.
1전시과 제도를 시행하였다.
2백관의 사색 공복을 정했다.
3광군을 조직하여 거란의 침입에 대비하였다.
4왕권을 위협하던 왕규를 제거하였다.
정답 및 해설

귀법사를 창건해 균여를 주지로 삼고 개경을 황도라 부른 왕은 고려 광종이므로, 백관의 사색 공복을 정한 일이 옳다.

광종은 노비안검법과 과거제를 실시하고 칭제건원하는 등 왕권을 강화하였으며, 관리의 위계를 공복 색깔로 구분하였다.

  • 전시과 제도를 처음 시행한 것은 경종이다.
  • 광군을 조직해 거란 침입에 대비한 것은 정종이다.
  • 왕권을 위협하던 왕규를 제거한 것도 정종 즉위 과정의 일이다.
문제 9
<보기>는 조선시대 전세(田稅) 수취 제도에 대한 내용이다. 이 제도의 시행으로 나타난 변화상에 대한 설명으로 옳지 않은 것은?

<보기>
- 1결당 생산량을 300두에서 400두로 상향 조정하였다.
- 생산량의 1/10을 징수하던 것을 1/20로 조정하였다.
- 종래 3등으로 나누던 토지 등급을 6등으로 세분화하였다.
1토지 등급과 작황 정도에 따라 전세를 차등 징수하였다.
2이 제도는 전라도부터 시행하여 점차 전국으로 확산되었다.
3토지 등급에 따라 면적을 달리하는 이적동세를 실시하였다.
4이 제도의 시행으로 농민의 전세 부담이 낮아졌다.
정답 및 해설

<보기>는 세종 때의 공법이며, 토지 등급에 따라 면적을 달리하는 이적동세를 실시했다는 것은 이 제도 시행으로 나타난 변화로 볼 수 없다.

결의 면적을 비옥도에 따라 달리하는 결부법의 이적동세 원리는 고려 때부터 이어져 온 방식이다. 공법은 수확량의 1/20을 징수하도록 세율을 낮추고, 토지 등급을 전분 6등, 풍흉을 연분 9등으로 나누어 결당 세액을 정하였다.

  • 토지 비옥도와 작황에 따라 전세를 차등 징수한 것은 전분 6등법·연분 9등법의 내용으로 옳다.
  • 공법은 전라도부터 시행된 뒤 점차 전국으로 확대되었다.
  • 세율이 낮아져 농민의 전세 부담이 이전보다 줄었다.
문제 10
조선 전기의 노비에 대한 설명으로 옳은 것은?
1노와 양녀 사이에 태어난 소생을 모의 신분을 따라 양인으로 삼는 '노비종모법'이 시행되었다.
2중앙 관청에 소속된 공노비 가운데에는 하급 기술관직에 임용되기도 하였다.
3부족한 군역 자원을 확충하기 위해 양인과 함께 노비를 속오군에 편제하였다.
4국가에 소속된 공노비의 도망이 속출하자 내·시노비 중 일부를 속량하기도 하였다.
정답 및 해설

조선 전기에는 중앙 관청에 속한 공노비 일부가 하급 기술관직(잡직)에 임용되기도 하였다.

조선 전기 공노비는 관청에 신역이나 신공을 바치면서도 독립된 가정을 꾸릴 수 있었고, 일부는 공을 세우거나 기술을 인정받아 잡직 계통의 관직을 받았다. 나머지 내용은 모두 조선 후기의 변화이다.

  • 노비종모법: 현종 때 처음 시행된 뒤 번복을 거쳐 영조 때 확정된 조선 후기 정책이다.
  • 속오군: 임진왜란 중 편성된 지방군으로, 양인과 천인이 함께 편제된 조선 후기 군사 조직이다.
  • 내·시노비 속량: 공노비 도망이 늘자 순조 때(1801) 중앙 관청의 내노비·시노비를 해방한 조선 후기 조치이다.
문제 11
밑줄 친 ( ) 기구에 대한 설명으로 옳은 것은?

이 제도는 젊고 재능 있는 문신들을 의정부에서 선발하여 ( )에 위탁 교육을 시키고, 40세가 되면 졸업시키는 인재양성의 장치였다. 교육 과정은 과강(課講)·과제(課製)의 강제(講製)가 주축이었다. 전자는 매달 15일 전과 20일 후에 행해졌고, 후자는 20일 후에 실시되었다. 이 제도는 국왕의 친위 세력을 육성하고자 하는 목적에서 시행되었다고 평가되고 있다.
1학및 정책 연구를 위하여 경복궁 안에 설치되었다.
2왕명 출납 등 국왕 측근에서 비서실의 기능을 하였다.
3정책을 비판하는 삼사의 하나로 국왕의 자문에 응하였다.
4창덕궁 후원에 설치되어 수만 권의 서적을 보관하였다.
정답 및 해설

젊은 문신을 선발해 재교육하고 40세에 졸업시킨 제도는 정조의 초계문신제이며, 밑줄 친 기구는 창덕궁 후원에 설치되어 수만 권의 서적을 보관한 규장각이다.

정조는 규장각을 왕실 도서관이자 학문·정책 연구 기관으로 키우고, 초계문신제를 통해 친위 세력을 길렀다.

  • 경복궁 안에 설치된 학문·정책 연구 기관은 세종 때의 집현전이다.
  • 왕명 출납을 맡은 비서 기관은 승정원이다.
  • 삼사의 하나로 국왕의 자문에 응한 기구는 홍문관이다.
문제 12
다음의 작품이 제작된 시기의 문학과 예술에 대한 설명으로 옳지 않은 것은?
1중국의 남종문인화를 우리의 자연에 맞추어 토착화하는 화풍이 발생하였다.
2『촌담해이』, 『필원잡기』 등 일정한 격식 없이 세상에 떠도는 이야기를 기록한 패설작품이 창작되었다.
3서양식 화법이 도입되어 원근법을 사용하거나 인물의 측면을 묘사하는 그림이 등장하였다.
4양반 사회를 비판하는 「양반전」, 「허생전」, 「호질」 등의 한문소설이 지어졌다.
정답 및 해설

그림은 김홍도의 「씨름」 등 18세기 후반의 풍속화이므로, 『촌담해이』·『필원잡기』 등 패설 작품이 창작되었다는 설명은 이 시기와 맞지 않는다.

『촌담해이』(강희맹)와 『필원잡기』(서거정)는 15세기 조선 전기의 설화·패관 문학이다.

  • 중국 남종문인화를 우리 자연에 맞게 토착화한 진경산수화는 18세기에 정선이 이끌었다.
  • 원근법 등 서양식 화법을 도입한 그림은 18세기 강세황 등에 의해 등장하였다.
  • 양반 사회를 비판한 「양반전」·「허생전」·「호질」은 18세기 박지원의 한문 소설이다.
문제 13
다음에서 ( ㉠ )과 ( ㉡ )에 들어갈 내용을 바르게 짝지은 것은?

조선 전기에 ( ㉠ )이/가 저술한 ( ㉡ )은/는 예로부터 사람들이 감상하고 길러온 꽃과 나무 몇십 종에 대한 재배법과 이용법을 설명하고 있으며, 또한 꽃과 나무의 품격과 그 의미, 상징성을 논하고 있다.

㉠㉡
①강희안『양화소록』
②양성지『농잠서』
③강희맹『금양잡록』
④신속『농가집성』
1①
2②
3③
4④
정답 및 해설

꽃과 나무의 재배법과 품격·상징성을 다룬 조선 전기의 원예서는 강희안의 『양화소록』이다.

강희안은 세종~세조 때의 문인 화가로, 『양화소록』에서 노송·국화·매화 등 화초의 기르는 법과 그 의미를 논하였다.

  • 양성지는 『동국지도』·『팔도지리지』 편찬 등 지리서 제작으로 알려진 학자이다.
  • 강희맹의 『금양잡록』은 경기 지방의 농사법을 정리한 농서이다.
  • 신속의 『농가집성』은 17세기 효종 때 벼농사 중심의 농법을 정리한 농서이다.
문제 14
<보기>의 궁궐에 대한 설명으로 옳은 것은?

<보기>
본래 월산대군의 집터였는데, 임진왜란 이후 선조의 임시 거처로 사용되어 정릉동 행궁으로 불리다가 광해군 때에 경운궁으로 개칭되었다. …(중략)… 궁내에 서양식 건물이 여럿 지어진 것이 주목된다. …(중략)… 1945년 광복 후 석조전에서 미소공동위원회가 열려 한반도 문제가 논의되었다. 1963년 1월 18일에 사적 제124호로 지정되었다.
1도성의 동쪽에 위치하여 동궐이라 불리기도 하였다.
2전통 정원 조경의 자연미와 인공미가 조화를 이룬 후원이 유명하다.
3흥선대원군의 왕권강화에 대한 강력한 의지에 따라 크게 중건되었다.
4아관파천 이후 고종이 옮겨와 대한제국을 선포하고 광무개혁을 실시하였다.
정답 및 해설

정릉동 행궁, 경운궁, 석조전 미소공동위원회로 보아 <보기>의 궁궐은 덕수궁이며, 아관파천 이후 고종이 옮겨와 대한제국을 선포하고 광무개혁을 실시한 곳이다.

고종은 러시아 공사관에서 경운궁으로 환궁한 뒤 환구단에서 황제 즉위식을 올리고 대한제국을 선포하였다.

  • 도성 동쪽에 있어 동궐이라 불린 것은 창덕궁과 창경궁이다.
  • 자연미와 인공미가 조화된 후원으로 유명한 곳은 창덕궁이다.
  • 흥선대원군이 왕권 강화를 위해 크게 중건한 곳은 경복궁이다.
문제 15
다음 정책의 결과로 옳지 않은 것은?

총독부는 15년 동안 토지개량과 농사개량을 통해 식량 생산을 대폭 늘려 일본으로 더 많은 쌀을 가져가고 조선의 농민생활도 안정시킨다는 계획을 세웠다. 이를 위해 논의 비중을 높이고 저수지와 같은 수리시설을 개선·확충하며, 다수확 품종과 비료 개발을 진행했다.
1조선인 자작농이 감소하고 소작농이 급증하였다.
2미(米) 단작화로 경제구조의 파행성이 심화되었다.
3전국 토지의 토지대장, 지적도, 등기부가 작성되었다.
4식량 부족분을 해결하기 위해 만주산 좁쌀 등이 수입되었다.
정답 및 해설

15년 동안 토지·농사 개량으로 쌀 생산을 늘려 일본으로 가져가려 한 정책은 산미 증식 계획이며, 토지대장·지적도·등기부 작성은 그 결과가 아니다.

토지대장과 지적도 작성은 1910년대 토지 조사 사업의 내용이다. 산미 증식 계획은 1920년부터 추진되었다.

  • 수리 조합비와 비료 대금 등의 부담이 농민에게 전가되어 자작농이 줄고 소작농이 늘었다.
  • 논농사 중심으로 재편되어 쌀 단작화가 진행되고 경제 구조의 파행성이 심해졌다.
  • 증산량보다 많은 쌀이 일본으로 반출되어 부족한 식량을 만주산 잡곡 수입으로 메웠다.
문제 16
다음 '시정방침'에 따른 통치가 이루어지던 시기에 일어난 대중운동으로 옳지 않은 것은?

총독은 문무관 어느 쪽이라도 임용될 수 있는 길을 열고, 나아가 헌병에 의한 경찰 제도를 바꿔 보통 경찰에 의한 경찰 제도를 채택할 것이다. 그리고 복제를 개정하여 일반 관리, 교원이 제복을 입고 칼을 차던 것을 폐지하고, 조선인의 임용, 대우를 더 많이 고려하고자 한다.
-사이토 마코토, ‘시정방침’-
1전국적 규모의 노동자조직으로서 조선노동공제회가 결성되었다.
2빈농을 주체로 한 토지혁명을 주장하는 농민조합운동이 일어났다.
3대중운동 전국적 조직화의 일환으로 조선청년총동맹이 결성되었다.
4백정들이 신분에 대한 불만을 타파하고자 조선형평사를 설립하였다.
정답 및 해설

사이토 마코토의 ‘시정방침’은 1920년대 문화 통치를 내건 것이므로, 빈농 중심의 토지 혁명을 주장한 농민조합운동은 이 시기의 대중운동이 아니다.

토지 혁명을 내건 혁명적 농민조합운동은 사회주의 계열이 주도하여 1930년대에 전개되었다.

  • 조선노동공제회는 1920년에 결성되었다.
  • 백정의 신분 차별 철폐를 내건 조선형평사는 1923년에 설립되었다.
  • 조선청년총동맹은 1924년에 결성되었다.
문제 17
(가)와 (나) 사이 시기의 사실로 옳은 것은?

(가) 김종필과 오히라 일본 외상의 밀실회담 이후 한일회담은 급격히 진전되었다. 이에 대해서 전 사회적인 한일회담 반대 투쟁이 일어나 서울의 주요 대학 학생들을 중심으로 격렬한 거리시위가 전개되었다.
(나) 한일 양국은 일본 도쿄에서 한일기본조약 조인식을 강행하였다. 하지만 막상 이 과정에서 한일 과거사에 대한 일본의 사죄는 명시되지 않았다.
1정부는 계엄령을 선포하고 인민혁명당 사건을 조작, 발표하였다.
2베트남 전쟁에 대한 전투부대 파병동의안이 국회에서 통과되었다.
3반공법과 데모규제법 제정을 추진하여 거센 반대운동을 불러왔다.
4대통령이 각종 법의 효력을 정지시킬 수 있는 긴급조치가 발동되었다.
정답 및 해설

(가)는 1964년의 6·3 시위, (나)는 1965년 6월의 한일 기본 조약 조인이므로, 그 사이에 정부가 계엄령을 선포하고 인민혁명당 사건을 발표한 사실이 옳다.

박정희 정부는 1964년 6월 3일 서울 일원에 비상계엄을 선포해 시위를 진압하였고, 같은 해 8월 1차 인민혁명당 사건을 발표하였다.

  • 전투 부대 파병 동의안은 1965년 8월에 국회를 통과하여 (나) 이후이다.
  • 반공법과 데모 규제법 제정 추진은 장면 정부 때의 일이다.
  • 긴급조치는 1970년대 유신 체제에서 발동되었다.
문제 18
<보기>의 내용을 일어난 시간 순서대로 바르게 나열한 것은?

<보기>
ㄱ. 아름이의 작은 할아버지는 거제도 포로수용소에서 제3국행을 결정하여 아르헨티나로 갔다.
ㄴ. 수지의 할아버지는 미군과 함께 인천에 상륙하여 서울 수복을 위해 진격하였다.
ㄷ. 지연이의 큰 고모부는 흥남 부두에서 가족들과 헤어져 메러디스 빅토리호를 타고 부산으로 향했다.
1ㄱ-ㄴ-ㄷ
2ㄴ-ㄱ-ㄷ
3ㄴ-ㄷ-ㄱ
4ㄷ-ㄱ-ㄴ
정답 및 해설

6·25 전쟁 관련 사건은 인천 상륙 → 흥남 철수 → 포로의 제3국행 순이다(ㄴ → ㄷ → ㄱ).

국군과 유엔군은 1950년 9월 인천 상륙 작전으로 서울을 수복하였고, 중국군 개입 뒤 1950년 12월 흥남 철수 때 메러디스 빅토리호가 피란민을 실어 날랐다. 포로 송환 문제는 정전 협정(1953)으로 정리되었고, 이후 송환을 거부한 일부 포로가 중립국을 거쳐 제3국으로 갔다.

  • 제3국행은 전쟁 막바지 포로 송환 문제의 결과이므로 인천 상륙이나 흥남 철수보다 앞설 수 없다.
  • 흥남 철수는 인천 상륙 이후 북진했다가 후퇴하는 과정에서 일어났다.
문제 19
밑줄 친 단어의 한자 표기가 옳지 않은 것은?
1김 과장은 자산을 효율적으로 운용하여 이윤(利閏)을 남겼다.
2박 과장은 국장의 격려(激勵)를 받자 업무에 더욱 몰두하였다.
3이 과장은 전염병에 감염(感染)되어 확진 판정을 받게 되었다.
4최 과장은 사표를 제출하였으나 국장이 수리(受理)하지 않았다.
정답 및 해설

‘이윤’의 바른 한자는 利潤(이로울 리, 윤택할 윤)으로, ‘利閏’은 잘못된 표기이다.

‘閏’은 ‘윤달 윤’으로 윤년·윤달에 쓰이며, 이익이 남는다는 뜻의 ‘이윤’에는 윤택할 윤(潤)을 쓴다.

  • 격려(激勵): 격할 격, 힘쓸 려 — 용기나 의욕을 북돋워 줌으로 바른 표기이다.
  • 감염(感染): 느낄 감, 물들 염 — 병원체가 몸에 옮음으로 바른 표기이다.
  • 수리(受理): 받을 수, 다스릴 리 — 서류를 받아 처리함으로 바른 표기이다.
문제 20
밑줄 친 한자 성어의 사용이 적절하지 않은 것은?
1그는 온 세상을 덮을 만한 재주를 지니고 있어 蓋世之才라는 평가를 받았다.
2그는 실로 傍若無人하여 주변 사람을 전혀 의식하지 않고 마음대로 떠들었다.
3그가 얼굴이 어두워져 들어온 것으로 볼 때 그 일의 결과는 不問可知였다.
4그가 시험에 응시하여 마침내 합격한 것은 衆寡不敵이라고 칭찬할 만했다.
정답 및 해설

시험에 합격한 것을 칭찬하는 문맥에 衆寡不敵(중과부적)을 쓴 것은 적절하지 않다.

‘衆寡不敵’은 적은 수로는 많은 수를 대적할 수 없다는 뜻으로, 노력 끝의 성취를 칭찬하는 상황과 맞지 않는다.

  • 蓋世之才(개세지재): 온 세상을 덮을 만한 뛰어난 재주로, 문맥에 맞는다.
  • 傍若無人(방약무인): 곁에 사람이 없는 것처럼 함부로 행동함으로, 문맥에 맞는다.
  • 不問可知(불문가지): 묻지 않아도 알 수 있음으로, 어두운 표정에서 결과를 짐작하는 문맥에 맞는다.
계리직 한국사 기출문제모두CBT · moducbt.com
22년 1회차
총 20문항 · 객관식 · 정답·해설 포함
문제 1
밑줄 친 ( )의 재위 기간에 있었던 사실로 옳은 것은?

( ) 9년 3월에 사방(四方)의 우역(郵驛)을 비로소 설치하고, 담당 관리에게 명하여 관도(官道)를 수리하게 하였다.
- 삼국사기 -
1처음으로 수도에 시장을 열어 사방의 물자를 유통시켰다.
2중앙관서를 22부로 정비하고 수도를 5부로 편제하였다.
3우산국으로 불리던 울릉도를 정복하여 영토로 편입하였다.
49주와 5소경을 설치하여 지방행정을 새롭게 정비하였다.
정답 및 해설

사방에 우역(郵驛)을 처음 설치하고 관도를 수리하게 한 왕은 신라 소지 마립간이므로, 처음으로 수도에 시장을 열어 사방의 물자를 유통시킨 사실이 옳다.

『삼국사기』에 따르면 소지 마립간은 재위 9년에 우역을 두었고, 재위 12년에 수도에 처음으로 시장을 열었다.

  • 중앙 관서를 22부로 정비하고 수도를 5부로 편제한 것은 백제 성왕 때의 일이다.
  • 우산국을 정복해 영토로 편입한 것은 지증왕 때 이사부의 활약이다.
  • 9주 5소경을 설치해 지방 행정을 정비한 것은 삼국 통일 이후 신문왕 때이다.
문제 2
삼국시대 고분 중 벽화가 남아 있는 것을 모두 고른 것은?

ㄱ. 호우총 ㄴ. 쌍영총 ㄷ. 무용총
ㄹ. 각저총 ㅁ. 천마총
1ㄱ, ㄴ, ㅁ
2ㄱ, ㄷ, ㄹ
3ㄴ, ㄷ, ㄹ
4ㄷ, ㄹ, ㅁ
정답 및 해설

삼국 시대 고분 가운데 벽화가 남아 있는 것은 고구려의 쌍영총·무용총·각저총이다.

고구려의 굴식 돌방무덤은 널방 벽과 천장에 그림을 그릴 수 있어 쌍영총의 인물도, 무용총의 무용도·수렵도, 각저총의 씨름도가 전한다. 반면 신라의 돌무지덧널무덤은 구조상 벽화가 없다.

  • 호우총은 신라의 돌무지덧널무덤으로, 광개토 대왕 관련 글자가 새겨진 호우명 그릇이 출토되었을 뿐 벽화는 없다.
  • 천마총도 신라의 돌무지덧널무덤이며, 천마도는 벽이 아니라 말다래에 그린 그림이다.
문제 3
(가)와 (나) 사이 시기 신라에서 있었던 사실로 옳은 것은?

(가) 당(唐)이 고구려 평양에 안동도호부를 설치하였다.
(나) 대조영이 동모산에서 진국(震國), 즉 발해를 건국하였다.
1일반 백성들에게 정전을 지급하였다.
2관리 채용을 위한 시험제도로 독서삼품과를 실시하였다.
3유교 교육을 진흥시키기 위해 국학을 설치하였다.
4관료전을 폐지하고 녹읍을 부활하였다.
정답 및 해설

(가) 668년과 (나) 698년 사이 신라에서는 신문왕이 유교 교육 기관인 국학을 설치하였다(682).

당은 고구려를 멸망시킨 668년 평양에 안동도호부를 두었고, 대조영은 698년 동모산에서 진국(발해)을 세웠다. 신문왕은 이 사이에 국학 설치와 함께 관료전 지급 등으로 왕권을 강화하였다.

  • 백성에게 정전을 지급한 것은 성덕왕 때(722)로 (나) 이후이다.
  • 독서삼품과는 원성왕 때(788) 실시되었다.
  • 관료전을 폐지하고 녹읍을 부활한 것은 경덕왕 때(757)이다.
문제 4
후삼국 통일 과정에 있었던 사건의 순서를 옳게 나열한 것은?

ㄱ. 완산주에 도읍을 정하고 후백제를 건국하였다.
ㄴ. 국호를 태봉, 연호를 수덕만세로 정하였다.
ㄷ. 금성이 함락되고 경애왕이 사망하였다.
ㄹ. 왕건이 궁예를 몰아내고 즉위하였다.
1ㄱ-ㄴ-ㄷ-ㄹ
2ㄱ-ㄴ-ㄹ-ㄷ
3ㄴ-ㄱ-ㄹ-ㄷ
4ㄴ-ㄱ-ㄷ-ㄹ
정답 및 해설

후삼국 통일 과정은 후백제 건국 → 태봉 국호 제정 → 왕건 즉위 → 경애왕 사망 순이다(ㄱ → ㄴ → ㄹ → ㄷ).

견훤은 900년 완산주에 도읍하여 후백제를 세웠고, 궁예는 911년 국호를 태봉, 연호를 수덕만세로 고쳤다. 918년 왕건이 궁예를 몰아내고 즉위하여 고려를 세웠으며, 927년 견훤이 금성을 습격해 경애왕이 죽었다.

  • 경애왕의 사망은 고려 건국 이후의 일이므로 왕건 즉위보다 앞에 둘 수 없다.
  • 태봉 국호 제정은 후백제 건국보다 늦으므로 맨 앞에 올 수 없다.
문제 5
밑줄 친 ( ) 제도를 개혁한 인물들로 옳은 것은?

개간된 토지의 넓이를 총괄해서 그 기름지고 메마른 것을 나누어 문무백관에서부터 부병(府兵) 한인(閑人)에게까지 과(科)에 따라 주지 않음이 없었고, 또 그 과에 따라 초채지(땔감을 얻을 수 있는 땅)를 주었는데, 이를 ( ) 제도라 한다.
- 고려사 -
1조준, 정도전
2정도전, 이색
3이색, 정몽주
4조준, 이인임
정답 및 해설

문무백관부터 부병·한인까지 과(科)에 따라 토지와 시지를 준 제도는 고려의 전시과이며, 이를 개혁한 인물은 조준과 정도전이다.

고려 말 권문세족의 농장 확대로 전시과가 무너지자 조준·정도전 등 급진 개혁파 신진 사대부가 사전 개혁을 주도하여 1391년 과전법을 제정하였다.

  • 이색은 사전 개혁에 반대한 온건 개혁파로, 전제 개혁의 주도 인물이 아니다.
  • 정몽주는 고려 왕조 유지를 주장한 온건 개혁파로, 과전법 제정을 주도하지 않았다.
  • 이인임은 우왕 때 권력을 잡은 권문세족으로 개혁 대상 쪽이었다.
문제 6
다음의 시(詩)를 지은 작자가 생존했던 시기에 있었던 사실로 옳은 것은?

오랑캐들이 아무리 완악하다지만 어떻게 이 물을 뛰어 건너랴.
저들도 건널 수 없음을 알기에 와서 진 치고 시위만 하네.
(중략)
저들도 마땅히 저절로 물러가리니 나라가 어찌 갑자기 끝나겠는가.
- 『동국이상국집』 -
1별무반을 조직하여 여진을 정벌하였다.
2거란이 보낸 사신을 유배 보냈다.
3고려 국왕이 나주로 피난했다.
4경찰 업무를 수행하는 야별초를 만들었다.
정답 및 해설

『동국이상국집』은 무신 집권기의 문인 이규보의 문집이므로, 그가 생존한 최씨 무신 정권 시기에 경찰 업무를 맡는 야별초를 만든 사실이 옳다.

시는 오랑캐가 물을 건너지 못하고 진을 친 채 시위만 한다며 결국 물러갈 것이라 노래해, 몽골 침입기의 상황을 보여 준다. 야별초는 최우가 치안 유지를 위해 조직하였고 뒤에 삼별초로 확대되었다.

  • 별무반을 조직해 여진을 정벌한 것은 숙종·예종 때 윤관의 활동으로 이규보 이전이다.
  • 거란 사신을 유배 보낸 것은 태조 때의 만부교 사건이다.
  • 국왕이 나주로 피난한 것은 거란의 2차 침입 때 현종의 일이다.
문제 7
밑줄 친 내용에 해당하는 시기에 신설된 기구를 <보기>에서 모두 고른 것은?

문종이 태평한 통치를 펼치니 백성과 만물이 모두 빛났습니다. 그러나 후손들이 혼미하여 권신(權臣)이 정권을 멋대로 하면서 군병을 끌어안고 왕위를 노리게 되었으니 인종 때 이것이 한 번 벌어지자 신하가 정권을 잡는 일이 일어났고, 의종 때에 이르러서는 익숙해져 버렸습니다. 이로 말미암아 크고 간악한 권신들이 번갈아 가며 세력을 잡고서 임금을 앉히기를 바둑이나 장기 두듯이 하였으며, 강성한 적들은 번갈아 쳐들어와 백성들을 풀이나 갈대같이 베어 버렸지만, 원종이 위태롭고 의심스러운 상황에서 대란을 평정함으로써 겨우 선조들이 물려준 왕업을 보전할 수 있었습니다.
- 고려사 -

<보기>
ㄱ. 정방 ㄴ. 교정도감
ㄷ. 도평의사사 ㄹ. 정치도감
1ㄱ, ㄴ
2ㄱ, ㄹ
3ㄴ, ㄷ
4ㄷ, ㄹ
정답 및 해설

밑줄 친 내용은 권신들이 번갈아 집권하고 외적이 침입한 무신 집권기를 가리키므로, 이 시기에 신설된 기구는 정방과 교정도감이다.

최충헌은 국정 최고 기구로 교정도감을 설치하였고, 최우는 자기 집에 정방을 두어 인사권을 장악하였다.

  • 도평의사사는 원 간섭기 충렬왕 때 도병마사를 개편한 기구로, 무신 집권기 이후이다.
  • 정치도감은 원 간섭기 충목왕 때 권문세족의 불법을 바로잡기 위해 둔 개혁 기구이다.
문제 8
<보기>의 정책을 시행했던 국왕의 재위 기간에 있었던 일로 옳은 것은?

<보기>
- 귀법사를 창건하고 균여를 주지로 임명했다.
- 개경을 황도(皇都)라고 하고, 서경을 서도라고 하였다.
1전시과 제도를 시행하였다.
2백관의 사색 공복을 정했다.
3광군을 조직하여 거란의 침입에 대비하였다.
4왕권을 위협하던 왕규를 제거하였다.
정답 및 해설

귀법사를 창건해 균여를 주지로 삼고 개경을 황도라 부른 왕은 고려 광종이므로, 백관의 사색 공복을 정한 일이 옳다.

광종은 노비안검법과 과거제를 실시하고 칭제건원하는 등 왕권을 강화하였으며, 관리의 위계를 공복 색깔로 구분하였다.

  • 전시과 제도를 처음 시행한 것은 경종이다.
  • 광군을 조직해 거란 침입에 대비한 것은 정종이다.
  • 왕권을 위협하던 왕규를 제거한 것도 정종 즉위 과정의 일이다.
문제 9
<보기>는 조선시대 전세(田稅) 수취 제도에 대한 내용이다. 이 제도의 시행으로 나타난 변화상에 대한 설명으로 옳지 않은 것은?

<보기>
- 1결당 생산량을 300두에서 400두로 상향 조정하였다.
- 생산량의 1/10을 징수하던 것을 1/20로 조정하였다.
- 종래 3등으로 나누던 토지 등급을 6등으로 세분화하였다.
1토지 등급과 작황 정도에 따라 전세를 차등 징수하였다.
2이 제도는 전라도부터 시행하여 점차 전국으로 확산되었다.
3토지 등급에 따라 면적을 달리하는 이적동세를 실시하였다.
4이 제도의 시행으로 농민의 전세 부담이 낮아졌다.
정답 및 해설

<보기>는 세종 때의 공법이며, 토지 등급에 따라 면적을 달리하는 이적동세를 실시했다는 것은 이 제도 시행으로 나타난 변화로 볼 수 없다.

결의 면적을 비옥도에 따라 달리하는 결부법의 이적동세 원리는 고려 때부터 이어져 온 방식이다. 공법은 수확량의 1/20을 징수하도록 세율을 낮추고, 토지 등급을 전분 6등, 풍흉을 연분 9등으로 나누어 결당 세액을 정하였다.

  • 토지 비옥도와 작황에 따라 전세를 차등 징수한 것은 전분 6등법·연분 9등법의 내용으로 옳다.
  • 공법은 전라도부터 시행된 뒤 점차 전국으로 확대되었다.
  • 세율이 낮아져 농민의 전세 부담이 이전보다 줄었다.
문제 10
조선 전기의 노비에 대한 설명으로 옳은 것은?
1노와 양녀 사이에 태어난 소생을 모의 신분을 따라 양인으로 삼는 '노비종모법'이 시행되었다.
2중앙 관청에 소속된 공노비 가운데에는 하급 기술관직에 임용되기도 하였다.
3부족한 군역 자원을 확충하기 위해 양인과 함께 노비를 속오군에 편제하였다.
4국가에 소속된 공노비의 도망이 속출하자 내·시노비 중 일부를 속량하기도 하였다.
정답 및 해설

조선 전기에는 중앙 관청에 속한 공노비 일부가 하급 기술관직(잡직)에 임용되기도 하였다.

조선 전기 공노비는 관청에 신역이나 신공을 바치면서도 독립된 가정을 꾸릴 수 있었고, 일부는 공을 세우거나 기술을 인정받아 잡직 계통의 관직을 받았다. 나머지 내용은 모두 조선 후기의 변화이다.

  • 노비종모법: 현종 때 처음 시행된 뒤 번복을 거쳐 영조 때 확정된 조선 후기 정책이다.
  • 속오군: 임진왜란 중 편성된 지방군으로, 양인과 천인이 함께 편제된 조선 후기 군사 조직이다.
  • 내·시노비 속량: 공노비 도망이 늘자 순조 때(1801) 중앙 관청의 내노비·시노비를 해방한 조선 후기 조치이다.
문제 11
밑줄 친 ( ) 기구에 대한 설명으로 옳은 것은?

이 제도는 젊고 재능 있는 문신들을 의정부에서 선발하여 ( )에 위탁 교육을 시키고, 40세가 되면 졸업시키는 인재양성의 장치였다. 교육 과정은 과강(課講)·과제(課製)의 강제(講製)가 주축이었다. 전자는 매달 15일 전과 20일 후에 행해졌고, 후자는 20일 후에 실시되었다. 이 제도는 국왕의 친위 세력을 육성하고자 하는 목적에서 시행되었다고 평가되고 있다.
1학및 정책 연구를 위하여 경복궁 안에 설치되었다.
2왕명 출납 등 국왕 측근에서 비서실의 기능을 하였다.
3정책을 비판하는 삼사의 하나로 국왕의 자문에 응하였다.
4창덕궁 후원에 설치되어 수만 권의 서적을 보관하였다.
정답 및 해설

젊은 문신을 선발해 재교육하고 40세에 졸업시킨 제도는 정조의 초계문신제이며, 밑줄 친 기구는 창덕궁 후원에 설치되어 수만 권의 서적을 보관한 규장각이다.

정조는 규장각을 왕실 도서관이자 학문·정책 연구 기관으로 키우고, 초계문신제를 통해 친위 세력을 길렀다.

  • 경복궁 안에 설치된 학문·정책 연구 기관은 세종 때의 집현전이다.
  • 왕명 출납을 맡은 비서 기관은 승정원이다.
  • 삼사의 하나로 국왕의 자문에 응한 기구는 홍문관이다.
문제 12
다음의 작품이 제작된 시기의 문학과 예술에 대한 설명으로 옳지 않은 것은?
1중국의 남종문인화를 우리의 자연에 맞추어 토착화하는 화풍이 발생하였다.
2『촌담해이』, 『필원잡기』 등 일정한 격식 없이 세상에 떠도는 이야기를 기록한 패설작품이 창작되었다.
3서양식 화법이 도입되어 원근법을 사용하거나 인물의 측면을 묘사하는 그림이 등장하였다.
4양반 사회를 비판하는 「양반전」, 「허생전」, 「호질」 등의 한문소설이 지어졌다.
정답 및 해설

그림은 김홍도의 「씨름」 등 18세기 후반의 풍속화이므로, 『촌담해이』·『필원잡기』 등 패설 작품이 창작되었다는 설명은 이 시기와 맞지 않는다.

『촌담해이』(강희맹)와 『필원잡기』(서거정)는 15세기 조선 전기의 설화·패관 문학이다.

  • 중국 남종문인화를 우리 자연에 맞게 토착화한 진경산수화는 18세기에 정선이 이끌었다.
  • 원근법 등 서양식 화법을 도입한 그림은 18세기 강세황 등에 의해 등장하였다.
  • 양반 사회를 비판한 「양반전」·「허생전」·「호질」은 18세기 박지원의 한문 소설이다.
문제 13
다음에서 ( ㉠ )과 ( ㉡ )에 들어갈 내용을 바르게 짝지은 것은?

조선 전기에 ( ㉠ )이/가 저술한 ( ㉡ )은/는 예로부터 사람들이 감상하고 길러온 꽃과 나무 몇십 종에 대한 재배법과 이용법을 설명하고 있으며, 또한 꽃과 나무의 품격과 그 의미, 상징성을 논하고 있다.

㉠㉡
①강희안『양화소록』
②양성지『농잠서』
③강희맹『금양잡록』
④신속『농가집성』
1①
2②
3③
4④
정답 및 해설

꽃과 나무의 재배법과 품격·상징성을 다룬 조선 전기의 원예서는 강희안의 『양화소록』이다.

강희안은 세종~세조 때의 문인 화가로, 『양화소록』에서 노송·국화·매화 등 화초의 기르는 법과 그 의미를 논하였다.

  • 양성지는 『동국지도』·『팔도지리지』 편찬 등 지리서 제작으로 알려진 학자이다.
  • 강희맹의 『금양잡록』은 경기 지방의 농사법을 정리한 농서이다.
  • 신속의 『농가집성』은 17세기 효종 때 벼농사 중심의 농법을 정리한 농서이다.
문제 14
<보기>의 궁궐에 대한 설명으로 옳은 것은?

<보기>
본래 월산대군의 집터였는데, 임진왜란 이후 선조의 임시 거처로 사용되어 정릉동 행궁으로 불리다가 광해군 때에 경운궁으로 개칭되었다. …(중략)… 궁내에 서양식 건물이 여럿 지어진 것이 주목된다. …(중략)… 1945년 광복 후 석조전에서 미소공동위원회가 열려 한반도 문제가 논의되었다. 1963년 1월 18일에 사적 제124호로 지정되었다.
1도성의 동쪽에 위치하여 동궐이라 불리기도 하였다.
2전통 정원 조경의 자연미와 인공미가 조화를 이룬 후원이 유명하다.
3흥선대원군의 왕권강화에 대한 강력한 의지에 따라 크게 중건되었다.
4아관파천 이후 고종이 옮겨와 대한제국을 선포하고 광무개혁을 실시하였다.
정답 및 해설

정릉동 행궁, 경운궁, 석조전 미소공동위원회로 보아 <보기>의 궁궐은 덕수궁이며, 아관파천 이후 고종이 옮겨와 대한제국을 선포하고 광무개혁을 실시한 곳이다.

고종은 러시아 공사관에서 경운궁으로 환궁한 뒤 환구단에서 황제 즉위식을 올리고 대한제국을 선포하였다.

  • 도성 동쪽에 있어 동궐이라 불린 것은 창덕궁과 창경궁이다.
  • 자연미와 인공미가 조화된 후원으로 유명한 곳은 창덕궁이다.
  • 흥선대원군이 왕권 강화를 위해 크게 중건한 곳은 경복궁이다.
문제 15
다음 정책의 결과로 옳지 않은 것은?

총독부는 15년 동안 토지개량과 농사개량을 통해 식량 생산을 대폭 늘려 일본으로 더 많은 쌀을 가져가고 조선의 농민생활도 안정시킨다는 계획을 세웠다. 이를 위해 논의 비중을 높이고 저수지와 같은 수리시설을 개선·확충하며, 다수확 품종과 비료 개발을 진행했다.
1조선인 자작농이 감소하고 소작농이 급증하였다.
2미(米) 단작화로 경제구조의 파행성이 심화되었다.
3전국 토지의 토지대장, 지적도, 등기부가 작성되었다.
4식량 부족분을 해결하기 위해 만주산 좁쌀 등이 수입되었다.
정답 및 해설

15년 동안 토지·농사 개량으로 쌀 생산을 늘려 일본으로 가져가려 한 정책은 산미 증식 계획이며, 토지대장·지적도·등기부 작성은 그 결과가 아니다.

토지대장과 지적도 작성은 1910년대 토지 조사 사업의 내용이다. 산미 증식 계획은 1920년부터 추진되었다.

  • 수리 조합비와 비료 대금 등의 부담이 농민에게 전가되어 자작농이 줄고 소작농이 늘었다.
  • 논농사 중심으로 재편되어 쌀 단작화가 진행되고 경제 구조의 파행성이 심해졌다.
  • 증산량보다 많은 쌀이 일본으로 반출되어 부족한 식량을 만주산 잡곡 수입으로 메웠다.
문제 16
다음 '시정방침'에 따른 통치가 이루어지던 시기에 일어난 대중운동으로 옳지 않은 것은?

총독은 문무관 어느 쪽이라도 임용될 수 있는 길을 열고, 나아가 헌병에 의한 경찰 제도를 바꿔 보통 경찰에 의한 경찰 제도를 채택할 것이다. 그리고 복제를 개정하여 일반 관리, 교원이 제복을 입고 칼을 차던 것을 폐지하고, 조선인의 임용, 대우를 더 많이 고려하고자 한다.
-사이토 마코토, ‘시정방침’-
1전국적 규모의 노동자조직으로서 조선노동공제회가 결성되었다.
2빈농을 주체로 한 토지혁명을 주장하는 농민조합운동이 일어났다.
3대중운동 전국적 조직화의 일환으로 조선청년총동맹이 결성되었다.
4백정들이 신분에 대한 불만을 타파하고자 조선형평사를 설립하였다.
정답 및 해설

사이토 마코토의 ‘시정방침’은 1920년대 문화 통치를 내건 것이므로, 빈농 중심의 토지 혁명을 주장한 농민조합운동은 이 시기의 대중운동이 아니다.

토지 혁명을 내건 혁명적 농민조합운동은 사회주의 계열이 주도하여 1930년대에 전개되었다.

  • 조선노동공제회는 1920년에 결성되었다.
  • 백정의 신분 차별 철폐를 내건 조선형평사는 1923년에 설립되었다.
  • 조선청년총동맹은 1924년에 결성되었다.
문제 17
(가)와 (나) 사이 시기의 사실로 옳은 것은?

(가) 김종필과 오히라 일본 외상의 밀실회담 이후 한일회담은 급격히 진전되었다. 이에 대해서 전 사회적인 한일회담 반대 투쟁이 일어나 서울의 주요 대학 학생들을 중심으로 격렬한 거리시위가 전개되었다.
(나) 한일 양국은 일본 도쿄에서 한일기본조약 조인식을 강행하였다. 하지만 막상 이 과정에서 한일 과거사에 대한 일본의 사죄는 명시되지 않았다.
1정부는 계엄령을 선포하고 인민혁명당 사건을 조작, 발표하였다.
2베트남 전쟁에 대한 전투부대 파병동의안이 국회에서 통과되었다.
3반공법과 데모규제법 제정을 추진하여 거센 반대운동을 불러왔다.
4대통령이 각종 법의 효력을 정지시킬 수 있는 긴급조치가 발동되었다.
정답 및 해설

(가)는 1964년의 6·3 시위, (나)는 1965년 6월의 한일 기본 조약 조인이므로, 그 사이에 정부가 계엄령을 선포하고 인민혁명당 사건을 발표한 사실이 옳다.

박정희 정부는 1964년 6월 3일 서울 일원에 비상계엄을 선포해 시위를 진압하였고, 같은 해 8월 1차 인민혁명당 사건을 발표하였다.

  • 전투 부대 파병 동의안은 1965년 8월에 국회를 통과하여 (나) 이후이다.
  • 반공법과 데모 규제법 제정 추진은 장면 정부 때의 일이다.
  • 긴급조치는 1970년대 유신 체제에서 발동되었다.
문제 18
<보기>의 내용을 일어난 시간 순서대로 바르게 나열한 것은?

<보기>
ㄱ. 아름이의 작은 할아버지는 거제도 포로수용소에서 제3국행을 결정하여 아르헨티나로 갔다.
ㄴ. 수지의 할아버지는 미군과 함께 인천에 상륙하여 서울 수복을 위해 진격하였다.
ㄷ. 지연이의 큰 고모부는 흥남 부두에서 가족들과 헤어져 메러디스 빅토리호를 타고 부산으로 향했다.
1ㄱ-ㄴ-ㄷ
2ㄴ-ㄱ-ㄷ
3ㄴ-ㄷ-ㄱ
4ㄷ-ㄱ-ㄴ
정답 및 해설

6·25 전쟁 관련 사건은 인천 상륙 → 흥남 철수 → 포로의 제3국행 순이다(ㄴ → ㄷ → ㄱ).

국군과 유엔군은 1950년 9월 인천 상륙 작전으로 서울을 수복하였고, 중국군 개입 뒤 1950년 12월 흥남 철수 때 메러디스 빅토리호가 피란민을 실어 날랐다. 포로 송환 문제는 정전 협정(1953)으로 정리되었고, 이후 송환을 거부한 일부 포로가 중립국을 거쳐 제3국으로 갔다.

  • 제3국행은 전쟁 막바지 포로 송환 문제의 결과이므로 인천 상륙이나 흥남 철수보다 앞설 수 없다.
  • 흥남 철수는 인천 상륙 이후 북진했다가 후퇴하는 과정에서 일어났다.
문제 19
밑줄 친 단어의 한자 표기가 옳지 않은 것은?
1김 과장은 자산을 효율적으로 운용하여 이윤(利閏)을 남겼다.
2박 과장은 국장의 격려(激勵)를 받자 업무에 더욱 몰두하였다.
3이 과장은 전염병에 감염(感染)되어 확진 판정을 받게 되었다.
4최 과장은 사표를 제출하였으나 국장이 수리(受理)하지 않았다.
정답 및 해설

‘이윤’의 바른 한자는 利潤(이로울 리, 윤택할 윤)으로, ‘利閏’은 잘못된 표기이다.

‘閏’은 ‘윤달 윤’으로 윤년·윤달에 쓰이며, 이익이 남는다는 뜻의 ‘이윤’에는 윤택할 윤(潤)을 쓴다.

  • 격려(激勵): 격할 격, 힘쓸 려 — 용기나 의욕을 북돋워 줌으로 바른 표기이다.
  • 감염(感染): 느낄 감, 물들 염 — 병원체가 몸에 옮음으로 바른 표기이다.
  • 수리(受理): 받을 수, 다스릴 리 — 서류를 받아 처리함으로 바른 표기이다.
문제 20
밑줄 친 한자 성어의 사용이 적절하지 않은 것은?
1그는 온 세상을 덮을 만한 재주를 지니고 있어 蓋世之才라는 평가를 받았다.
2그는 실로 傍若無人하여 주변 사람을 전혀 의식하지 않고 마음대로 떠들었다.
3그가 얼굴이 어두워져 들어온 것으로 볼 때 그 일의 결과는 不問可知였다.
4그가 시험에 응시하여 마침내 합격한 것은 衆寡不敵이라고 칭찬할 만했다.
정답 및 해설

시험에 합격한 것을 칭찬하는 문맥에 衆寡不敵(중과부적)을 쓴 것은 적절하지 않다.

‘衆寡不敵’은 적은 수로는 많은 수를 대적할 수 없다는 뜻으로, 노력 끝의 성취를 칭찬하는 상황과 맞지 않는다.

  • 蓋世之才(개세지재): 온 세상을 덮을 만한 뛰어난 재주로, 문맥에 맞는다.
  • 傍若無人(방약무인): 곁에 사람이 없는 것처럼 함부로 행동함으로, 문맥에 맞는다.
  • 不問可知(불문가지): 묻지 않아도 알 수 있음으로, 어두운 표정에서 결과를 짐작하는 문맥에 맞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