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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도는 조선의 8도 체제이므로, 각 도에 안찰사가 파견되었다는 설명이 옳지 않다.
지도에 '한성'을 중심으로 경기도·충청도·전라도·경상도·강원도·황해도·평안도·함경도의 8도가 표시되어 있다. 조선은 각 도에 관찰사를 파견하였고, 안찰사는 고려 시대 5도에 파견된 지방관이다.
- 모든 군현에 수령 파견: 조선은 속현을 없애고 모든 군현에 수령을 보내 중앙 집권을 강화하였다.
- 유향소 설치: 지방 사족이 자치 기구인 유향소를 두어 수령을 보좌하고 향리를 감찰하였다.
- 향리의 지위 하락: 조선의 향리는 수령을 보좌하는 세습 아전으로 격하되었다.
| (가)신시(申時)에 근정전에서 즉위하여 백관의 하례를 받고 대사령(大赦令)을 중외해 내렸으며, 대비의 명에 의하여 전왕을 폐위 연산군으로 강봉하여 교동에 옮기고, 왕비 신씨를 폐하여 사제(私第)로 내쳤으며, …… (나) 왕대비가 교서를 내려 중외에 선유하였다. “선조 대왕께서 불행히도 적사가 없어 임시방편으로 장유(長幼)의 차례를 어기고 광해로 세자를 삼았는데, … 위로는 종묘사직에 죄를 얻고 아래로는 만백성에게 원한을 맺었다. … 이에 (광해를) 폐위하고 적당한 데 살게 한다.” |
두 반정 사이에 있었던 사실은 사림이 동인과 서인으로 갈라진 일(동서 분당)이다.
(가)는 연산군을 폐위한 중종반정(1506), (나)는 광해군을 폐위한 인조반정(1623)이다. 이조 전랑 임명 문제로 인한 동서 분당은 선조 때인 1575년의 일이므로 두 시기 사이에 해당한다.
- 예송은 현종 때(1659·1674) 효종과 효종비의 상에 대한 자의대비의 복상 기간을 두고 일어났으므로 인조반정 이후이다.
- 경신환국(1680)은 숙종 때의 일로 인조반정 이후이다.
- 무오사화(1498)는 연산군 때의 일로 중종반정 이전이다.
| 고려 왕실과 몽골 황실 사이의 혼인은 충렬왕부터 공민왕까지 이어지면서 고려 국왕은 대대로 몽골 황실의 부마가 됐다. 그렇다고 고려가 단순히 몽골의 부마국이었던 것은 아니었다. 강화가 성립됐을 때 양국은 책봉-조공 관계를 맺었으며, 이를 통해 고려 국왕의 지위뿐 아니라 독립 왕국으로서의 지위도 보장받았다. 다만 이때의 책봉은 고려의 왕위 계승을 추인하는 형식적 절차에 그치지 않고 고려 국왕을 직접 임명하고 퇴위시키는 등 실질적으로 행사됐다. |
원 간섭기에 있었던 사실은 수시력의 채용이다.
자료의 ‘충렬왕부터 공민왕까지’ 이어진 왕실 혼인과 ‘부마’라는 단서는 원 간섭기를 가리킨다. 이 시기 충선왕 때 원의 역법인 수시력이 채용되었다.
- 최충의 9재 학당은 문종 때 세워진 사학으로 원 간섭기 이전이다.
- 초조대장경은 현종 때 거란 침입을 계기로 만들기 시작한 것으로 원 간섭기 이전이다.
- 상정고금예문의 금속 활자 인쇄는 몽골 항쟁기 강화도 천도 시기(고종)의 일로 원 간섭기 이전이다.
| 『경세유표』는 어떤 내용인가? 관직제도, 군현제도, 토지제도, 부역, 공시, 창저, 군사제도, 과거제도, 해세, 상세, *마정, 선박 관리 등 국가를 운영하는 제도에 대해 현재 실행 가능 여부에 구애되지 않고 경을 세우고 기를 나열하여 우리의 옛 나라를 새롭게 하려고 하는 것이다. *마정: 말의 사육, 개량, 번식, 수출입 따위에 관한 행정 |
『경세유표』의 저자는 정약용이며, 그는 정전제를 주장하였다.
정약용은 『경세유표』에서 관제·토지·군사 등 국가 제도 전반의 개혁안을 제시하였다. 토지 제도로는 앞서 「전론」에서 여전론을 내세웠고, 『경세유표』에서는 현실적 방안으로 정전제를 주장하였다.
- 『주자서절요』는 이황이 주희의 서간을 간추려 편찬한 책이다.
- 검약보다 소비를 권장하여 생산을 자극해야 한다고 본 인물은 박제가이다.
- 지전설과 무한우주론을 제시한 인물은 홍대용이다.
| (가)제2조한국 정부는 지금부터 일본국 정부의 중개를 거치지 않고서는 국제적 성질을 가진 어떤 조약이나 약속을 맺지 않을 것을 서로 약속한다. (나)제1조대한 정부는 일본 정부가 추천한 일본인 1명을 재정 고문으로 삼아 재무에 관한 사항은 일체 그의 의견을 물어서 시행해야 한다. 제2조대한 정부는 일본 정부가 추천한 외국인 1명을 외교 고문으로 삼아 외교에 관한 중요한 사무는 일체 그의 의견을 물어서 시행해야 한다. (다)제1조한국 정부는 시정 개선에 관해 통감의 지도를 받을 것. 제4조한국 고등 관리의 임면은 통감의 동의에 의해 집행 할 것. 제5조한국 정부는 통감이 추천한 일본인을 한국 관리로 임명할 것. |
체결 순서는 제1차 한일 협약 → 을사늑약 → 한일 신협약(정미 7조약)이다.
(나)는 재정·외교 고문을 두게 한 제1차 한일 협약(1904), (가)는 외교권을 박탈한 을사늑약(1905), (다)는 통감이 내정까지 간섭하고 일본인 차관을 두게 한 한일 신협약(1907)이다.
따라서 (나) - (가) - (다)의 순서가 된다.
| (가)교학(敎學)과 지관(止觀)을 함께 해야 한다. 교종은 외적인 공부에 치중하고, 선종은 내적인 공부에 치중한다. 따라서 내외겸전(內外兼全)하지 못하는 수행은 참다운 수행의 방법이 아니다. (나)선정(定)은 본체(體)이고 지혜(慧)는 작용(用)이다. 지혜는 본체를 마주하여 나온 작용이므로 선정을 떠나지 않고, 선정은 작용을 마주하여 나온 본체이므로 지혜를 떠나지 않는다. |
| < 보 기 > ㄱ. (가) - 유불일치설을 주장하였다. ㄴ. (가) - 수행 방법으로 교관겸수를 주장하였다. ㄷ. (나) - 수선사 결사운동을 전개하였다. ㄹ. (나) - 천태종을 창시하여 불교를 통합하고자 하였다. |
(가)는 의천, (나)는 지눌이며, 옳은 설명은 의천의 교관겸수와 지눌의 수선사 결사이다.
‘교학과 지관을 함께’, ‘내외겸전’은 의천의 교관겸수를, ‘선정은 본체, 지혜는 작용’은 지눌의 정혜쌍수를 나타낸다. 지눌은 송광사를 중심으로 수선사 결사를 전개하였다.
- 유불일치설은 지눌의 제자 혜심이 주장한 것이므로 의천과 맞지 않다.
- 천태종을 창시해 교종 중심으로 불교 통합을 꾀한 인물은 의천이므로 지눌과 맞지 않다.
| 호암사에는 정사암이 있다. 국가에서 장차 재상(宰相)을 뽑을 때 서너 명의 이름을 써서 상자에 넣고 봉하여 바위 위에 두었다. 얼마 후에 열어 보아 이름 위에 도장이 찍힌 자국이 있는 사람을 재상으로 삼았다. -『삼국유사』- |
정사암 회의로 재상을 뽑은 국가는 백제이며, 백제는 22담로에 왕족을 파견하였다.
‘호암사 정사암’에서 재상을 선출한 일은 백제 귀족 회의인 정사암 회의를 보여 준다. 무령왕은 지방의 22담로에 왕족을 보내 지방 통제를 강화하였다.
- 진대법은 고구려 고국천왕 때 을파소의 건의로 실시되었다.
- 박·석·김 3성이 교대로 이사금을 맡은 것은 신라 초기의 일이다.
- 낙랑과 왜를 잇는 중계 무역으로 번성한 나라는 금관가야이다.
| 부여씨가 망하고 고씨가 망하자 김씨가 그 남쪽을 영유하였고, 대씨가 그 북쪽을 영유하여 (가)(이)라고 하였다. 이것이 남북국이라고 부르는 것으로 마땅히 남북국사가 있어야 했음에도 고려가 이를 편찬하지 않은 것은 잘못된 일이다. |
(가)는 발해이며, 발해 무왕은 장문휴를 보내 당의 산둥반도를 공격하였다.
‘대씨가 그 북쪽을 영유’, ‘남북국’이라는 표현은 유득공의 『발해고』 서문으로, 대조영이 세운 발해를 가리킨다.
- 원종과 애노의 난은 신라 하대 진성여왕 때 일어났다.
- 국자감은 고려 성종 때 설치된 중앙 교육 기관이다.
- 집사부를 중심으로 한 정치 운영은 신라 중대의 특징이다.
| (가)에서 사신을 보내 낙타 50필을 가져왔다. 그러나 왕은 “(가)이/가 예전부터 발해와 화목하게 지내오다가 문득 다른 생각을 내어 옛날의 맹약을 돌아보지 않고 하루아침에 멸망시켰으니 무도함이 심하다. 그러니 멀리 화친을 맺어 이웃으로 삼을 만하지 못하다.” 하고 교빙을 끊었으며, 그 사자 30명을 바다에 있는 섬으로 귀양보내고 낙타는 만부교 밑에 매어 놓아 모두 굶어 죽게 했다. - 『고려사절요』권1, 태조 25년 10월 - |
(가)는 거란이며, 고려는 광군 30만을 조직하여 거란의 침입에 대비하였다.
‘발해를 멸망시켰다’, ‘낙타를 만부교 밑에 매어 굶어 죽게 했다’는 태조 때의 만부교 사건으로, 상대는 거란이다. 이후 정종 때 거란 침입에 대비해 광군을 조직하였다.
- 강화도 천도와 장기 항전은 몽골의 침입에 대한 대응이다.
- 윤관의 건의로 편성한 별무반은 여진에 대비한 것이다.
- 최무선의 화포로 진포에서 적선을 격파한 것은 왜구에 대한 대응이다.
| 1.마산, 서울, 기타 각지의 학생 데모는 주권을 빼앗긴 국민의 울분을 대신하여 궐기한 학생들의 순진한 정의감의 발로이며 부정과 불의에 항거하는 민족정기의 표현이다. 4.누적된 부패와 부정과 횡포로써 민권을 짓밟고 민족적 참극과 국제적 수치를 가져오게 한 현 정부와 집권당은 그 책임을 지고 속히 물러가라. 5.3⋅15 선거는 부정 선거이다. 공명선거에 의해 정⋅부통령 선거를 다시 시행하라. |
선언문은 4·19 혁명 때의 것이며, 그 영향으로 장면 내각이 수립되었다.
‘마산’의 학생 시위, ‘3·15 선거는 부정 선거’라는 표현은 4·19 혁명 당시 대학 교수단의 시국 선언문임을 보여 준다. 이승만 정부가 무너진 뒤 내각 책임제 개헌이 이루어지고 장면 내각이 들어섰다.
- 진보당 사건(1958)은 4·19 혁명 이전 이승만 정부 때의 일이다.
- 반민 특위는 정부 수립 직후인 1948년에 결성되었다.
- 발췌 개헌은 6·25 전쟁 중인 1952년에 단행되었다.
| 왕이 사신을 보내 겸손한 말과 중후한 예로 을파소를 불러, 중외대부의 벼슬을 주고 직을 더하여 우태로 삼고 말했다. … (을)파소는 비록 뜻은 나라에 허락했지만 받은 직위가 일을 하기에는 부족하다고 생각하고 대답하여 말했다. … 왕이 그 뜻을 알고, 곧 을파소를 국상에 제수하여 정사를 맡게 했다. |
밑줄 친 ‘왕’은 고구려 고국천왕이며, 그는 진대법을 실시하였다.
‘을파소를 국상에 제수’했다는 단서로 고국천왕임을 알 수 있다. 고국천왕은 을파소의 건의에 따라 춘대추납의 빈민 구제 제도인 진대법을 실시하였다.
- 율령 반포는 소수림왕의 업적이다.
- 불교 수용은 소수림왕 때 전진으로부터 이루어졌다.
- 태학 설립도 소수림왕의 업적이다.
| 제1조토지의 조사 및 측량은 이 명령에 따른다. 제4조토지의 소유자는 조선 총독이 정하는 기간 내에 그 주소, 성명⋅명칭 및 소유지의 소재, 지목, 자번호, 사방의 경계, 등급, 지적, 결수를 임시 토지 조사 국장에게 신고하여야 한다. |
제시된 법령은 토지 조사령(1912)이며, 같은 무단 통치기에 조선 태형령이 공포되었다.
‘임시 토지 조사국장에게 신고’라는 기한부 신고주의는 1910년대 토지 조사 사업의 근거 법령인 토지 조사령의 내용이다. 같은 시기 헌병 경찰 통치 아래 한국인에게만 적용되는 조선 태형령이 시행되었다.
- 치안 유지법은 1925년 이른바 문화 통치기에 시행되었다.
- 국가 총동원법은 1938년 민족 말살 통치기에 마련되었다.
- 황국 신민 서사는 1937년 민족 말살 통치기에 제정되었다.
| 여자의 나이가 열 살이 되면 서로 혼인을 약속하고, 신랑 집에서는 (그 여자를) 맞이하여 장성하도록 길러 아내로 삼는다. (여자가) 성인이 되면 다시 친정으로 돌아가게 한다. 여자의 친정에서는 돈을 요구하는데, (신랑 집에서) 돈을 지불한 후 다시 신랑 집으로 돌아온다. - 『삼국지』, 「위서 동이전」- |
자료는 옥저의 민며느리제이며, 옥저에는 왕 없이 읍군·삼로 등의 군장이 있었다.
여자아이를 신랑 집에서 길러 성인이 되면 돈을 치르고 아내로 삼는 풍습은 옥저의 혼인 풍속이다. 옥저와 동예는 왕이 없이 읍군·삼로가 각 읍락을 다스렸다.
- 무천은 동예의 제천 행사이다.
- 제가 회의에서 국가 중대사를 결정한 나라는 고구려이다.
- 낙동강 하류에서 철기 문화와 벼농사가 발달한 것은 변한(가야)이다.
| 조선은 아시아의 요충지에 있어 반드시 쟁탈의 대상이 될 것이다. 조선이 위태로워지면 중앙 및 동아시아의 정세도 날로 위급해질 것이다. 러시아가 영토를 확장하려 한다면 반드시 조선부터 시작할 것이다. …… 오늘날 조선의 책략은 러시아를 막는 일보다 더 급한 것이 없다. 러시아를 막는 책략은 무엇인가? 중국과 친하고 일본과 맺고, 미국과 연결하여 스스로 강해지는 것이다. |
자료는 1880년에 들어온 『조선책략』이며, 이후 통리기무아문이 설치되었다.
‘러시아를 막기 위해 중국과 친하고 일본과 맺고 미국과 연결’하라는 내용은 2차 수신사 김홍집이 들여온 황준헌의 『조선책략』이다. 같은 해 말 개화 정책을 총괄하는 통리기무아문이 설치되었다.
- 제너럴 셔먼호 사건은 1866년의 일로 그 이전이다.
- 조일 무역 규칙은 1876년 강화도 조약의 부속 조약으로 체결되어 그 이전이다.
- 강화도 조약 직후 김기수를 1차 수신사로 파견한 것은 1876년으로 그 이전이다.
![]() 조선의 새로운 수도인 한양 건설 책임은 (가) 이/가 맡았습니다. 그는 조선 왕조의 상징인 경복궁을 세우고, 유교 경전인 『주례』의 규정에 따라 경복궁의 동쪽에는 왕실의 사당인 종묘를, 서쪽에는 토지신과 곡식신을 모신 사직단을 두었습니다. ![]() |
(가)는 정도전으로, 『불씨잡변』을 저술하여 불교의 폐단을 비판하였다.
'한양 건설 책임', '경복궁'을 세우고 『주례』에 따라 '종묘'와 '사직단'을 배치했다는 단서는 조선 건국을 주도하고 도성 건설을 맡은 정도전을 가리킨다.
- 삼국사기 저술: 고려 인종의 명으로 김부식이 편찬하였다.
- 양명학 연구와 강화 학파 형성: 조선 후기 정제두의 활동이다.
- 성학십도 저술: 성리학의 핵심을 도식화한 것은 이황이다.
| 제1조지금으로부터 20일 이내에 조선국은 흉도들을 잡고 수괴를 엄히 징계한다. 일본국은 관리를 파견해 함께 조사하고 처리한다. 만약 기한 내로 잡지 못하면 마땅히 일본국이 판단해 처리한다. 제4조흉도들의 폭거로 인해 일본국이 받은 손해와 공사를 호위한 수군과 육군의 비용 중에서 50만 원을 조선국에서 낸다. 제5조일본 공사관에 약간의 군인을 두어 경비하게 한다. |
제시된 조약은 제물포 조약(1882)이며, 그 계기는 구식 군인들이 일으킨 임오군란이다.
‘흉도들의 폭거’로 일본이 입은 손해 배상, ‘일본 공사관에 군인을 두어 경비’하게 한 조항은 임오군란 뒤 일본과 맺은 제물포 조약의 내용이다.
- 동학 농민군의 전주성 점령(1894)은 청일 전쟁의 계기가 되었다.
- 이만손 등의 영남 만인소(1881)는 『조선책략』 유포에 반발한 상소이다.
- 김옥균·박영효 등의 갑신정변(1884)은 한성 조약 체결의 계기가 되었다.
| 7조왕이 백성을 다스린다고 해서 집집마다 가거나 날마다 그들을 살펴보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므로 수령을 나누어 보내어 백성의 이익과 손해를 살피게 하는 것입니다. …… 요청하건대 외관(지방관)을 두시옵소서. 20조불교를 믿는 것은 자신을 다스리는 근본이며, 유교를 행하는 것은 나라를 다스리는 근본을 구하는 것입니다. 자신을 다스리는 것은 내세에 복을 구하는 일이며, 나라를 다스리는 것은 오늘의 급한 일입니다. -『고려사』- |
자료는 최승로의 시무 28조이며, 이를 받아들인 고려 성종은 12목을 설치하고 목사를 파견하였다.
‘외관(지방관)을 두시옵소서’, ‘유교는 나라를 다스리는 근본’이라는 내용은 최승로가 성종에게 올린 시무 28조이다. 성종은 이를 받아들여 지방 주요 거점에 12목을 두었다.
- 쌍기의 건의에 따른 과거제 실시는 광종의 업적이다.
- 노비안검법을 실시해 호족 세력을 약화한 것도 광종이다.
- 북진 정책으로 청천강에서 영흥 일대까지 영토를 넓힌 것은 태조 때이다.
| ●고려의 독자성을 보여주는 (가)은/는 나랏일을 결정하는 임시 기구로서 국방과 군사 문제를 논의하였다. ●고려의 최고 관서인 (나)은/는 정책을 계획하여 결정하는 일을 맡았으며, 그 장관인 문하시중이 국정을 총괄하였다. |
(가)는 도병마사, (나)는 중서문하성이며, 중서문하성은 2품 이상의 재신과 3품 이하의 낭사로 구성되었다.
국방·군사 문제를 논의한 고려의 독자적 임시 회의 기구는 도병마사이고, 문하시중이 장관인 최고 관서는 중서문하성이다.
- 원 간섭기에 상서성과 합쳐 첨의부로 개편된 것은 중서문하성이며, 도병마사는 도평의사사로 바뀌었다.
- 정치의 잘잘못을 논하고 관리의 비리를 감찰한 것은 어사대(와 중서문하성의 낭사)의 기능이다.
- 왕명 출납과 군사 기밀을 담당한 기구는 중추원이다.
| 세도정치는 정조가 죽고 순조(純祖)가 12세의 어린 나이로 즉위하자, 김조순이 정조의 유훈을 받들고 자신의 딸을 왕비로 들이면서 비롯됐다. 그 뒤 효명세자의 빈으로 조만영의 딸이 간택되고 그 소생인 헌종이 8세의 나이로 등극하자, 헌종의 외척인 조인영을 비롯한 풍양 조씨가 세도 정권을 주도했다. 그러나 철종(哲宗)이 즉위하자 김문근의 딸이 왕비로 간택되면서 다시 안동 김씨가 주도하는 세도정권이 지속됐다. |
세도 정치 시기에 있었던 사실은 임술 농민 봉기이다.
순조·헌종·철종 3대에 걸친 세도 정치 시기에 삼정의 문란이 심해져, 철종 때인 1862년 진주에서 시작된 임술 농민 봉기가 전국으로 확산되었다.
- 원종·애노의 난은 신라 하대 진성여왕 때의 일이다.
- 조위총이 서경에서 일으킨 반란은 고려 무신 집권기의 일이다.
- 공주 명학소의 망이·망소이 봉기도 고려 무신 집권기의 일이다.
| 팔도의 선비들이 서원을 세워 이름난 유학자를 제사하고 …… 무리를 모아 교육을 하는데 그 폐단이 백성의 생활에 미쳤다. (가)이/가 만동묘를 철폐하고 폐단이 큰 서원을 철폐하도록 명령을 내렸다. 유생들이 서원 철폐령에 항의하자 (가)이/가 말하였다. “백성을 해치는 자는 공자가 다시 살아난다 하여도 용서하지 못한다.” |
(가)는 흥선 대원군이며, 그는 『육전조례』를 편찬하였다.
‘만동묘를 철폐’, ‘서원 철폐령’이라는 단서로 흥선 대원군임을 알 수 있다. 그는 통치 체제 정비를 위해 『대전회통』과 『육전조례』를 편찬하였다.
- 장용영은 정조가 설치한 국왕 친위 부대이다.
- 현량과는 중종 때 조광조의 건의로 실시되었다.
- 균역법은 영조 때 시행되었다.
| 무릇 우리 한국인은 내외를 논할 것 없이 통일 연합으로 그 길을 정하고, 독립과 자유로 그 목적을 세워야 할 것이다. 이는 (가)이/가 발원하는 바이며 (가)이/가 품고 있는 바이다. 요컨대 새로운 정신을 불러 깨우치고 새로운 단체를 조직해서 새로운 국가를 건설할 뿐이다. - 주한 일본 공사관 기록, 1909 - |
(가)는 신민회이며, 신민회는 태극 서관과 자기 회사를 운영하였다.
1909년 기록, ‘새로운 단체를 조직해서 새로운 국가를 건설’이라는 내용은 공화정체의 국민 국가 수립을 목표로 한 비밀 결사 신민회의 취지를 보여 준다.
- 복벽주의를 표방한 단체는 임병찬의 독립 의군부이다.
- 민립 대학 설립 운동은 1920년대 조선 교육회 등이 주도하였다.
- 일제의 황무지 개간권 요구를 저지한 단체는 보안회이다.
| (가)미국은 5척의 군함과 1,200명의 병력으로 조선을 침략했다. 우선 미군은 함포 사격으로 강화도의 진지들을 초토화시킨 뒤 4월 23일 강화도에 상륙하여 초지진을 함락시켰으며 여세를 몰아 덕진진에 이어 광성보를 공격했다. (나)미국은 오페르트 등을 내세워 통상을 요구했다. 오페르트는 자신의 뜻을 관철하기 위해 차이나 호를 타고 프랑스 신부 페론과 미국인 젠킨스를 대동하고 아산만의 흥선대원군 아버지 남연군묘를 도굴하려 하였다. (다)대원군이 베르뇌 주교에게 천주교를 버리고 개종할 것을 강요했으나, 베르뇌가 배교를 거부하자, 대원군은 이들을 처형하기로 결정했다. 3월 7일 베르뇌⋅브르뜨니애르⋅볼리외⋅도리 등 천주교 신부 4명은 노량 사장에서 처형 효수했다. |
사건의 순서는 병인박해 → 오페르트 도굴 사건 → 신미양요이다.
(다)는 베르뇌 주교 등 프랑스 신부를 처형한 병인박해(1866), (나)는 남연군묘 도굴을 시도한 오페르트 도굴 사건(1868), (가)는 미군이 초지진·덕진진·광성보를 공격한 신미양요(1871)이다.
따라서 (다) - (나) - (가)의 순서가 된다.
| (가)남과 북은 … 쌍방 사이의 관계가 나라와 나라 사이의 관계가 아닌 특수 관계라는 것을 인정하고 평화 통일을 성취하기 위한 공동의 노력을 경주할 것을 다짐하면서 다음과 같이 합의했다. 제1조 남과 북은 서로 상대방의 체제를 인정하고 존중한다. 제9조 남과 북은 상대방에 대해 무력을 사용하지 않으며 상대방을 무력으로 침략하지 아니한다. (나)첫째, 통일은 외세에 의존하거나 외세의 간섭을 받음이 없이 자주적으로 해결해야 한다. 둘째, 통일은 서로 상대방을 반대하는 무력행사에 의거하지 않고 평화적 방법으로 실현해야 한다. 셋째, 사상과 이념, 제도의 차이를 초월해 우선 하나의 민족으로서 민족적 대단결을 도모해야 한다. (다)1. 남과 북은 나라의 통일 문제를 그 주인인 우리 민족끼리 서로 힘을 합쳐 자주적으로 해결해 나가기로 했다. 2. 남과 북은 나라의 통일을 위한 남측의 연합제 안과 북측의 낮은 단계의 연방제 안이 서로 공통성이 있다고 인정하고 앞으로 이 방향에서 통일을 지향해 나가기로 했다. |
발표 순서는 7·4 남북 공동 성명 → 남북 기본 합의서 → 6·15 남북 공동 선언이다.
(나)는 자주·평화·민족 대단결의 통일 3대 원칙을 밝힌 7·4 남북 공동 성명(1972), (가)는 남북 관계를 ‘특수 관계’로 규정한 남북 기본 합의서(1991), (다)는 연합제와 낮은 단계 연방제의 공통성을 인정한 6·15 남북 공동 선언(2000)이다.
따라서 (나) - (가) - (다)의 순서가 된다.
| ●왕의 이름은 명농이며 무령왕의 아들이다. 지혜와 식견이 빼어나고 일을 잘 결단하였다. 무령왕이 죽고 왕위에 올랐다. ●왕이 봄에 도읍을 사비로 옮기고, 나라 이름을 남부여라고 하였다. |
밑줄 친 ‘왕’은 백제 성왕이며, 그는 관산성 전투에서 전사하였다.
‘이름은 명농’, ‘무령왕의 아들’, ‘사비 천도’, ‘남부여’라는 단서로 성왕임을 알 수 있다. 성왕은 신라 진흥왕에게 한강 유역을 빼앗긴 뒤 관산성을 공격하다 전사하였다.
- 익산 미륵사를 건립한 왕은 무왕이다.
- 윤충을 보내 신라 대야성을 함락한 왕은 의자왕이다.
- 평양성을 공격해 고국원왕을 전사시킨 왕은 근초고왕이다.
| (가)이찬 김지정이 난을 일으켜 궁궐을 포위하고 공격했다. (나)녹읍(祿邑)을 폐지하고 매년 조(租)를 나누어 줄 것을 지시하였다. (다)독서삼품과를 제정하여 관직을 주었다. |
사건의 순서는 녹읍 폐지 → 김지정의 난 → 독서삼품과 제정이다.
(나)의 녹읍 폐지는 신라 중대 신문왕(689), (가)의 김지정의 난은 혜공왕 말기(780), (다)의 독서삼품과는 원성왕(788) 때의 일이다.
따라서 (나) - (가) - (다)의 순서가 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