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무덤과 널무덤이 유행한 것은 신석기시대가 아니라 철기시대의 모습이므로 옳지 않다.
신석기시대에는 농경과 정착 생활이 시작되었고, 토기를 만들어 쓰고 원시 신앙이 나타났다.
- 가락바퀴(방추차)와 뼈바늘로 옷감을 짜고 옷을 지어 입었다.
- 이른 민무늬 토기·덧무늬 토기는 신석기 초기 토기이고, 이후 빗살무늬 토기가 널리 쓰였다.
- 애니미즘·토테미즘·샤머니즘과 함께 영혼 숭배와 조상 숭배가 나타났다.
-『통전』-
백제의 요서 진출 기록은 4세기 근초고왕 때의 일로 보는 것이 통설이며, 근초고왕은 평양성을 공격해 고국원왕을 전사시켰다.
‘구려가 요동을 차지하니 백제 역시 요서를 차지했다’는 『통전』 기사는 근초고왕 대 백제의 대외 팽창을 보여 주는 사료로 쓰인다.
- 미륵사 창건은 7세기 무왕 때의 일이다.
- 웅진 천도 후 신라와 결혼 동맹을 맺어 동맹을 강화한 것은 동성왕 때이다.
- 중국 남조(양)와 활발히 교류하고 일본에 불교를 전한 것은 성왕 때이다.
과전법 시행을 주관한 기구는 급전도감이며, 전민변정도감은 공민왕 때 신돈이 주도한 개혁 기구이므로 옳지 않다.
과전법(1391)은 공양왕 때 이성계 일파가 마련한 토지 제도로, 전·현직 관리에게 경기 지역 토지의 수조권을 18과로 나누어 지급하였다.
- 제1과 150결에서 제18과 10결까지 품계에 따라 차등 지급하였다.
- 지방에 거주하는 한량관에게는 군전을 5결 또는 10결씩 지급하였다.
- 수조율은 공전·사전을 막론하고 1결당 30두(생산량의 10분의 1)로 정하였다.
‘치도를 쇄신해 재정을 풍족하게 했으나 쇄국으로 대세를 거슬렀다’는 평가의 인물은 흥선대원군이며, 그는 임오군란으로 재집권하여 5군영을 복구하였다.
임오군란(1882) 때 구식 군인들의 추대로 다시 정권을 잡은 흥선대원군은 별기군과 통리기무아문을 폐지하고 5군영과 삼군부를 되살렸다.
- 군국기무처의 총재관은 김홍집이 맡았다.
- 을미의병의 해산을 권고하는 조칙은 아관파천 이후 고종이 내렸다.
- 갑신정변 때 청군의 개입을 요청한 것은 민씨 정권 측이다.
임시정부가 군사조직법에 따라 조직해 연합군의 일원으로 항전한 단체는 한국광복군이며, 국내 진공을 위한 국내정진군을 편성하였다.
1940년 충칭에서 창설된 한국광복군은 대일 선전 포고 후 미국 전략정보국(OSS)과 협력하여 국내 진공 작전을 준비하였으나 일본의 항복으로 실행하지 못했다.
- 중국군과 연합한 쌍성보 전투는 지청천이 이끈 한국독립군의 활동이다.
- 팔로군과 함께 태항산 지구에서 일본군과 싸운 것은 조선의용대 화북지대(조선의용군)이다.
- 연해주에서 러시아 적군과 연합을 꾀한 것은 1920년대 초 자유시로 이동한 독립군 부대들의 일이다.
국내성 방어를 위해 쌓은 산성은 환도산성(산성자산성)이며, 오녀산성은 초기 도읍 졸본 일대의 산성으로 보므로 옳지 않다.
고구려는 평지성과 산성을 짝지어 도성을 방어하였는데, 졸본 시기에는 오녀산성, 국내성 시기에는 환도산성이 배후 산성 역할을 하였다.
- 고구려는 평양에 장안성을 쌓고 이곳으로 도읍을 옮겼다.
- 백제 사비도성은 중심 지역 바깥에 나성을 둘러 방어하였다.
- 신라는 명활산성·남산신성 등 산성을 쌓아 도성을 방어하였다.
고려는 일부일처제가 일반적이었으며, 다처병첩은 법으로 허용된 적이 없으므로 옳지 않다.
충렬왕 때 박유가 원의 풍속을 들어 처첩을 여럿 두자고 건의했으나 여론의 반대로 시행되지 못했다.
- 혼인 후 신랑이 처가에 머무는 서류부가혼의 풍속이 있었다.
- 왕실과 종실에서는 동성 근친 간 족내혼이 행해졌다.
- 원의 공녀 요구를 피하려고 조혼이 성행하면서 어린 사위를 처가에서 기르는 예서제가 나타났다.
아관파천 기간(1896~1897)에 볼 수 있었던 것은 백동화를 주조하는 모습이다.
백동화는 1892년부터 전환국에서 주조되기 시작해 1900년대 초 화폐 정리 사업 때까지 발행되었으므로 아관파천 기간과 겹친다.
- 서대문~청량리 간 전차는 1899년에 개통되어 아관파천이 끝난 뒤의 일이다.
- 한성순보는 1883년 창간되어 갑신정변(1884)으로 발행이 중단되었다.
- 대한천일은행은 1899년에 설립되었다.
토지조사령에는 황무지를 국유지로 편입한다는 규정이 없으므로 옳지 않다.
토지조사령(1912)은 정해진 기한 안에 토지 소유자가 직접 신고하는 기한부 신고주의를 규정하였고, 이 과정에서 미신고지와 왕실·관청 소유지 등이 조선총독부 소유로 넘어갔다.
- 조선광업령으로 한국인의 광산 경영을 막고 일본 자본의 광산 진출을 도왔다.
- 회사령으로 회사를 설립할 때 총독의 허가를 받게 하였다.
- 조선어업령으로 황실·한국인 소유 어장을 일본인 중심으로 재편하였다.
고려청자의 비색을 기록한 글은 송 사신 서긍의 『고려도경』이며, 그가 만난 국왕은 인종으로, 경사 6학을 정비하고 향학을 증설하였다.
서긍은 1123년(인종 원년) 고려에 와서 보고 들은 것을 『고려도경』으로 남겼고, 인종은 국자감의 경사 6학을 정비하고 지방에 향학을 늘려 유학 교육을 확산시켰다.
- 국자감에 7재를 설치하고 양현고를 둔 것은 예종 때이다.
- 평양에 기자 사당을 세워 제사한 것은 숙종 때이다.
- 5도 양계와 3경·5도호부·8목 체제로 지방 제도를 정비한 것은 현종 때이다.
(나) 사람이 죽으면 누구나 가매장하여 형체만 덮이도록 했다가 가죽과 살이 썩으면 뼈를 취하여 곽 가운데 넣는다.
-『삼국지』-
‘영고’의 (가)는 부여, 뼈를 추려 곽에 넣는 가족 공동묘의 (나)는 옥저이며, 도둑질하면 12배로 배상하게 한 것은 부여의 법이다.
부여에는 살인자 사형, 도둑질 12배 배상 등을 담은 1책 12법이 있었다.
- 대군장 없이 읍락마다 대대로 장수가 다스린 것은 옥저·동예의 모습으로 부여와 맞지 않는다.
- 서옥제는 고구려의 혼인 풍속이다.
- 다른 부족의 경계를 침범하면 노비·소·말로 갚게 한 책화는 동예의 풍습이다.
ㄴ. 왕위가 처음으로 형제 상속에서 부자 상속으로 바뀌었다.
ㄷ. 평양으로 도읍을 옮기고 죽령일대에서 남양만 선까지 판도를 넓혔다.
ㄹ. 천리장성을 쌓고 방어체제를 강화하는 등 당의 침략에 대비하였다.
고구려의 사건을 순서대로 나열하면 부자 상속 확립 → 낙랑군 축출 → 평양 천도 → 천리장성 축조이다.
고국천왕 때 왕위의 부자 상속이 확립되었고, 미천왕이 313년 낙랑군을 몰아냈으며, 장수왕이 427년 평양으로 천도해 남진하였고, 7세기 영류왕~보장왕 때 천리장성을 쌓았다.
- ㄱ → ㄴ → ㄷ → ㄹ 배열은 4세기 미천왕의 낙랑군 축출을 2세기 고국천왕 대의 부자 상속보다 앞에 두어 맞지 않는다.
- ㄱ → ㄷ → ㄹ → ㄴ 배열은 2세기의 부자 상속을 7세기 천리장성 축조보다도 뒤로 보내 맞지 않는다.
- ㄷ → ㄹ → ㄱ → ㄴ 배열은 5세기 평양 천도와 7세기 천리장성 축조를 4세기 낙랑군 축출·2세기 부자 상속보다 앞세워 선후가 뒤바뀌었다.
임진왜란 이후 통신사는 매년이 아니라 막부의 요청에 따라 모두 12회 파견되었으므로 옳지 않다.
통신사는 쇼군 습직 등 일본의 요청이 있을 때 파견되었고, 19세기 초 쓰시마에서 국서를 교환한 것을 끝으로 중단되었다.
- 조선 전기 명에 간 사신은 조천사, 조선 후기 청에 간 사신은 연행사로 불렸다.
- 홍대용·박지원·박제가 등 연행 경험이 있는 인물들을 중심으로 북학이 전개되었다.
- 사행에 동행한 역관들은 팔포무역 등으로 국제 무역을 활성화하였다.
‘탐학한 관리를 베고 횡포한 왜적을 내몬다’는 격문은 동학 농민군의 것으로, 이들은 각종 무명잡세의 폐지를 요구하였다.
동학 농민군은 백산 봉기 때 이 격문을 발표하였고, 폐정 개혁안에서 무명잡세 혁파, 탐관오리 처벌 등을 주장하였다.
- 장교를 육성하고 징병제를 실시하자는 내용은 홍범 14조에 들어 있다.
- 조약 체결 때 중추원 의장이 함께 서명하자는 것은 독립협회의 헌의 6조이다.
- 민법과 형법을 제정해 인민의 생명과 재산을 보호하자는 것은 홍범 14조의 내용이다.
‘황제’의 조칙이므로 대한제국의 광무개혁 시기이며, 공무아문은 그보다 앞선 제1차 갑오개혁 때 설치되었으므로 옳지 않다.
광무개혁은 구본신참을 내세워 식산흥업 정책을 펼쳤고, 상공업 진흥을 위한 학교와 시험장을 세웠다.
- 양잠전습소와 잠업시험장을 설립해 양잠업을 장려하였다.
- 화폐 조례를 공포하여 금본위제 실시를 시도하였다.
- 상공학교와 광무학교 등 실업 교육 기관을 세웠다.
-『삼국유사』-
ㄱ. 감은사지 삼층석탑
ㄴ. 석굴암
ㄷ. 상원사 동종
ㄹ. 불국사 청운교·백운교
당 대종에게 만불산을 바친 ‘왕’은 경덕왕이며, 경덕왕 때 김대성이 조성한 석굴암과 불국사 청운교·백운교가 해당한다.
석굴암과 불국사는 경덕왕 때 김대성의 발원으로 짓기 시작해 혜공왕 때 완성되었다.
- 감은사지 삼층석탑은 신문왕 때 감은사를 완공하면서 세워졌다.
- 상원사 동종은 성덕왕 때 만들어진 현존 최고(最古)의 신라 범종이다.
ㄴ. 지방의 각 진관에서 방군수포가 행해졌다.
ㄷ. 평민에게만 징수해 온 군포를 양반에게도 징수하는 호포제를 실시하였다.
ㄹ. 종래 군역이 면제되었던 상층 양인들을 선무군관으로 처음 편성하여 수포하였다.
군역 제도의 변화를 시기순으로 나열하면 보법 → 방군수포 → 선무군관 → 호포제이다.
세조 때 보법으로 군정 수가 늘었고, 15세기 말 이후 진관에서 방군수포가 성행했으며, 영조의 균역법 때 선무군관포를 걷었고, 흥선대원군이 호포제를 실시하였다.
- ㄱ → ㄴ → ㄷ → ㄹ 배열은 19세기 흥선대원군의 호포제를 18세기 균역법의 선무군관 편성보다 앞세워 선후가 뒤바뀌었다.
- ㄴ → ㄱ → ㄷ → ㄹ 배열은 방군수포를 세조 때 보법보다 앞에 두고, 호포제도 선무군관보다 앞세워 맞지 않는다.
- ㄴ → ㄱ → ㄹ → ㄷ 배열은 15세기 말 이후 성행한 방군수포를 세조 때의 보법보다 앞에 두어 맞지 않는다.
국조보감은 태종 때가 아니라 세조 때 처음 편찬되었으므로 옳지 않다.
세조 때 태조·태종·세종·문종 4대의 훌륭한 언행을 모아 처음 『국조보감』을 만들었고, 이후 여러 차례 이어 편찬되었다.
- 춘추관은 각 관청의 등록을 모아 시정기를 편찬하였고, 이는 실록 편찬의 기초 자료가 되었다.
- 의궤는 조선 초기부터 만들어졌으나 임진왜란 이전 것은 전하지 않는다.
- 승정원의 주서가 왕명 출납과 국왕의 일과를 날마다 기록해 승정원일기를 작성하였다.
‘아홉 편의 전을 지어 세태를 풍자했다’는 ‘아버지’는 박지원으로, 그는 정조의 문체반정에서 주된 대상이 되었다.
박지원은 『방경각외전』에 실린 아홉 편의 전으로 양반 사회를 풍자했고, 『열하일기』의 새로운 문체가 문체반정의 표적이 되었다.
- 주자 성리학을 비판하고 양명학을 체계화한 인물은 정제두이다.
- 김시습 등 도가 관련 인물의 행적을 정리한 저술은 박지원의 저작이 아니다.
- 호민(豪民)은 허균이 「호민론」에서 쓴 개념으로, 박지원의 주장과 관련이 없다.
해방 직전 엔도 정무총감과 교섭해 치안권을 넘겨받은 ‘이 사람’은 여운형이며, 그는 미군정의 지원을 받은 좌우 합작 위원회에 참여하였다.
여운형은 조선 건국 준비 위원회를 이끌었고, 1946년 김규식과 함께 좌우 합작 위원회를 구성해 좌우 합작 7원칙을 발표하였다.
- 반탁을 주도한 독립촉성중앙협의회는 이승만이 조직하였다.
- 신민족주의를 내세워 국민당을 창당한 인물은 안재홍이다.
- 연합성 신민주주의를 표방해 신민당을 결성한 인물은 백남운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