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은 사회구성체 발전 단계론의 역사인식을 바탕으로 하면서 역사 발전의 원동력을 민중에게서 구했으며, 우리 역사를 유물사관의 방법론에 맞추려고 하였다. 백남운, 이청원 등이 대표적 인물이다.
○ ( ㉢ )은 순수 학문으로서의 역사학을 지향하며 문헌 고증을 중시하였다. 이병도, 손진태 등이 대표적 인물이다.
㉠ ㉡ ㉢
사학의 성격과 대표 인물을 맞추면 ㉠은 민족주의사학, ㉡은 사회경제사학, ㉢은 실증사학이다.
민족 정신·주체적 발전을 강조한 박은식·신채호는 민족주의사학, 유물사관과 사회구성체 발전 단계론을 적용한 백남운은 사회경제사학, 문헌 고증과 순수 학문을 지향한 이병도는 실증사학에 속한다.
- ㉠을 실증사학으로 보는 배열 — 민족 정신 고취·독립 의도는 실증사학이 아니라 민족주의사학의 특징이다.
- ㉡을 실증사학으로 보는 배열 — 유물사관·민중을 원동력으로 본 것은 사회경제사학이다.
- ㉠을 사회경제사학으로 보는 배열 — 박은식·신채호는 사회경제사학자가 아니다.
ㄴ. 강화도 천도에 대해 삼별초가 반대하였다.
ㄷ. 황룡사 구층목탑과 초조대장경이 불에 탔다.
ㄹ. 김윤후와 처인 부곡민들이 몽골 장수 살리타 군대를 물리쳤다.
ㅁ. 부처의 힘으로 몽골군을 물리치기 위해 팔만대장경을 조판하였다.
몽골 침입기(13세기 중반)의 사건은 황룡사 구층목탑·초조대장경 소실, 김윤후의 처인성 승리, 팔만대장경 조판이다.
몽골의 2차 침입 때 처인 부곡에서 김윤후가 살리타를 사살했고, 침입 과정에서 초조대장경과 황룡사 구층목탑이 불탔으며, 강화도 정부는 부처의 힘으로 몽골을 물리치려 재조대장경(팔만대장경)을 새겼다.
- 망이·망소이, 만적의 봉기 — 몽골 침입 이전 무신 집권기(12세기 후반)의 사건이다.
- 삼별초의 반대 — 삼별초는 강화도 천도가 아니라 몽골과 강화한 뒤의 개경 환도에 반대해 봉기하였다.
ㄴ. 여성은 호주가 될 수 없었다.
ㄷ. 부모의 재산은 아들과 딸의 구분 없이 고르게 상속되었다.
ㄹ. 결혼할 때 여성이 데려온 노비에 대한 소유권은 남편에게 귀속되었다.
고려 사회에 대한 옳은 설명은 여성의 재혼 가능과 자녀 균분 상속이다.
고려에서는 여성의 재혼이 비교적 자유로웠고, 재산은 아들딸 구분 없이 고르게 나누어 상속되었다.
- 여성은 호주가 될 수 없었다는 설명 — 고려에서는 여성도 호주가 될 수 있었다.
- 여성이 데려온 노비가 남편에게 귀속되었다는 설명 — 처가에서 받은 재산은 아내의 몫으로 유지되어 남편 소유가 되지 않았다.
-『삼국지』 위서 동이전-
5월 씨뿌리기 후와 10월 농사를 마친 뒤 제사를 지낸 나라는 삼한이며, 삼한에는 제사장인 천군이 있었다.
삼한에서는 정치적 지배자(신지·읍차 등)와 별도로 천군이 신성 지역인 소도를 주관하여 제정이 분리되어 있었다.
- 명주와 삼베를 짜는 방직기술 — 동예에 대한 설명이다.
- 민며느리제 — 옥저의 혼인 풍속이다.
- 간음한 자와 투기가 심한 부인을 사형에 처한 법 — 부여의 법이다.
옳지 않은 것은 1980년대 과외 활성화이다. 1980년 신군부의 7·30 교육 개혁 조치로 과외가 전면 금지되었다.
따라서 1980년대를 사교육 과외가 활성화된 시기로 본 설명은 시기별 교육 정책과 맞지 않는다.
- 중학교 무시험 진학 — 1960년대 후반에 처음 실시되었다.
- 고등학교 입학시험의 연합고사 전환 — 1970년대 고교 평준화 정책과 함께 이루어졌다.
- 대학수학능력시험 — 1990년대에 처음 실시되었다.
-『성종실록』-
㉠은 수령 칠사 중 하나인 학교를 일으키는 일이므로, 유학에 힘쓰게 한다는 설명이 옳다.
조선의 수령 칠사는 농상성(농업·양잠 장려), 호구증, 학교흥, 군정수, 부역균, 사송간, 간활식으로, 사료에 빠진 항목이 학교흥이다.
- 도적이 없게 한다는 설명 — 학교 진흥과 관계없는 치안 업무이다.
- 호적 정리와 군역·요역 감독 — 사료의 호구를 늘리는 일·부역을 고르게 하는 일과 관련된 업무이다.
- 중앙의 명령 전달 — 학교를 일으키는 일과 무관하다.
2. 미․소공동위원회 속개를 요청하는 공동성명을 발(發)할 것.
3. 토지개혁에 있어 몰수, 유조건 몰수, 체감매상 등으로 토지를 농민에게 …
4. … 본 합작위원회에서 입법기구에 제안하여 입법기구로 하여금 심리 결정케 하여 실시케 할 것.
… (후략)
자료는 좌우 합작 7원칙이며, 밑줄 친 입법기구는 남조선 과도 입법 의원이다. 초대 의장은 여운형이 아니라 김규식이었다.
미군정은 좌우 합작 위원회의 건의를 받아 1946년 입법 의원을 설치했고, 좌우 합작 운동을 이끈 김규식이 의장을 맡았다.
- 입법의원 의원선거법 제정 — 입법 의원이 제정한 법령이다.
- 관선과 민선 의원 — 입법 의원은 미군정이 임명한 관선 의원과 선거로 뽑은 민선 의원으로 구성되었다.
- 민족반역자·부일협력자·간상배에 대한 특별법 — 입법 의원이 제정했으나 미군정의 인준을 받지 못해 시행되지 못하였다.
ㄴ. 삼포에 대한 조선 정부의 통제가 강화되자, 삼포왜란이 일어났다.
ㄷ. 김종서를 함경도 관찰사로 임명하여 두만강 유역에 6진을 개척하였다.
ㄹ. 압록강 방면에 여진족의 침입이 잦아지자, 최윤덕을 파견하여 그들을 토벌하였다.
ㅁ. 쓰시마 도주(島主)와 계해약조를 맺어 연간 50척의 세견선을 파견할 수 있게 하였다.
세종 재위 기간의 사실은 쓰시마 정벌, 김종서의 6진 개척, 최윤덕의 여진 토벌(4군), 계해약조이다.
세종 즉위 직후 이종무가 쓰시마를 정벌했고, 이후 북방에서는 4군 6진을 개척했으며, 쓰시마 도주와 계해약조를 맺어 세견선을 제한된 범위에서 허용하였다.
- 삼포왜란 — 세종 대가 아니라 중종 때 일어난 사건이다.
자료는 조준의 전제 개혁 상소로, 이후 과전법이 시행되어 과전은 경기 지역에 한정해 전·현직 관리에게 지급되었다.
고려 말 권문세족의 토지 겸병을 비판한 이 상소를 바탕으로 신진 사대부는 과전법을 마련해 국가 재정과 관리의 경제 기반을 확보하였다.
- 전시과 공포 — 고려 전기의 토지 제도로, 자료보다 훨씬 앞선 시기이다.
- 신진 사대부가 심각한 타격을 받았다는 설명 — 과전법으로 타격을 입은 것은 권문세족이며, 신진 사대부는 오히려 경제 기반을 마련하였다.
- 이성계 반대 신하에게 토지를 분배하지 않았다는 설명 — 과전법은 관직 복무를 기준으로 지급한 제도로, 이런 원칙은 없었다.
○ ( ㉡ )는 수령들이 백성을 수탈하는 도적으로 변한 현실을 바로잡기 위해 백성을 기르는 목민관으로서 지켜야 할 규범을 제시한 일종의 수신교과서이다.
○ ( ㉢ )는 백성들이 억울한 벌을 받지 않도록 형법을 신중하게 집행하기 위해 지은 책이다.
㉠ ㉡ ㉢
세 책은 모두 정약용의 저술로, ㉠ 경세유표, ㉡ 목민심서, ㉢ 흠흠신서이다.
경세유표는 『주례』를 모범으로 중앙·지방 행정 제도의 개혁을 제안했고, 목민심서는 수령이 지켜야 할 규범을, 흠흠신서는 형벌을 신중히 집행하기 위한 형법 지침을 다루었다.
- ㉠을 목민심서로 보는 배열 — 제도 개혁안은 목민심서가 아니라 경세유표이다.
- ㉠을 흠흠신서로 보는 배열 — 흠흠신서는 형법서이다.
- ㉡을 흠흠신서로 보는 배열 — 목민관의 규범을 제시한 책은 목민심서이다.
○ 다른 나라에 철도부설권을 허용하지 말 것
○ 시급히 방곡령을 실시하고 구민법을 채용할 것
○ 금광의 채굴을 금지하고 인민의 방책을 꾀할 것
외국 상인 출입 금지·철도부설권 반대·방곡령 실시·금광 채굴 금지를 요구한 단체는 활빈당이다. 정치적·경제적 각성 촉진과 단결 공고를 강령으로 한 것은 신간회이므로 옳지 않다.
활빈당은 「대한사민논설」을 통해 반외세·반봉건 개혁안을 제시한 무장 농민 집단이다.
- 1900년 전후 충청·경기·경상도 지역 활동 — 활빈당의 활동 지역에 해당한다.
- 『홍길동전』에서 따온 이름 — 가난한 사람을 살리는 무리라는 뜻으로 소설 속 집단의 이름을 썼다.
- 을사늑약 이후 의병 참여 — 활빈당 일부는 이후 의병 운동에 합류하였다.
-「성주사낭혜화상백월보광탑비문」-
(나) 최치원은 난랑비(鸞郞碑) 서문에서 우리나라에는 현묘한 도가 있으니 풍류(風流)라 일컬었다. … 실로 이는 삼교(유․불․선)를 포함하고 중생을 교화한다.
-『삼국사기』-
(가)는 골품제(진골에서 한 등급 떨어진 ‘득난’ = 6두품), (나)는 화랑도(‘풍류’)이다. 귀족 회의로 국사를 결정한 것은 화백 회의이므로 (나)에 대한 설명으로 옳지 않다.
화랑도는 진흥왕 때 국가적 조직으로 정비되어 인재 양성 기능을 맡았다.
- (가)의 사회 활동·일상생활 규제 — 골품에 따라 가옥·복색·수레 등 일상까지 제한되었다.
- (가)의 관등 승진 상한선 — 골품에 따라 오를 수 있는 관등의 한계가 정해져 있었다.
- (나)의 진흥왕 때 인재 양성 제도로 정착 — 화랑도에 대한 옳은 설명이다.
ㄴ. 민주주의에 입각한 정치형태를 갖추었으나, 국내와는 연결된 적이 없었다.
ㄷ. 블라디보스토크와 상해, 한성(서울) 등 세 곳의 임시정부가 협력하여 구성하였다.
ㄹ. 기관지로 『독립신문』을 간행하여 주로 독립 운동에 관한 사실을 보도하였다.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대한 옳은 설명은 파리 강화 회의 외교 활동, 세 임시정부의 통합, 『독립신문』 간행이다.
임시정부는 대한국민의회(연해주)·상하이 임시정부·한성 정부를 통합해 상하이에서 출범했고, 파리 위원부 등을 통한 외교 활동과 기관지 『독립신문』 발행을 전개하였다.
- 국내와 연결된 적이 없었다는 설명 — 임시정부는 연통제와 교통국을 조직해 국내와 연락하고 자금을 모았다.
옳지 않은 것은 『금양잡록』·『농서집요』로, 이들은 조선 전기에 편찬·간행된 농서이다.
『금양잡록』은 성종 때 강희맹이 경기 지역 농법을 정리한 책이고, 『농서집요』는 태종 때 중국 농서를 이두로 번역해 간행한 책이다.
- 광작을 통한 부농 성장 — 이앙법 보급으로 경작 규모를 넓힌 조선 후기의 모습이다.
- 광산 경영의 덕대제 — 조선 후기 광산 경영 방식이다.
- 독립 수공업자의 등장 — 상품 화폐 경제 발달에 따른 조선 후기의 변화이다.

지도의 ㉣은 신라 금성에서 왜로 향하는 점선 교역로이므로, ㉣에 곡물·비단을 넣은 것이 옳다.
범례상 실선은 중국과의 교역, 점선은 왜와의 교역이다. 화살표 방향을 보면 ㉠은 고구려 평양에서 중국으로 나가는 수출품, ㉡은 중국에서 평양·사비·금성으로 들어오는 수입품, ㉢은 백제 사비에서 중국으로 나가는 수출품이다.
삼국은 중국에서 비단·도자기·서적 같은 고급 물품과 문물을 들여왔고, 고구려는 금·은·모피류 같은 북방 특산물을 내보냈다.
- 도자기·비단·서적은 중국에서 들여온 수입품이므로 중국으로 나가는 ㉠에 들어갈 수 없다.
- 인삼·직물류는 삼국이 중국에 내보낸 수출품이므로 중국에서 들어오는 ㉡에 들어갈 수 없다.
- 금·은·모피류는 고구려의 대표 수출품으로, 백제 사비에서 출발하는 ㉢과 맞지 않는다.
ㄴ. 중앙 관제로 당과 비슷한 3성 6부제를 시행하였다.
ㄷ. 동해안을 따라 신라에 이르던 교통로를 ‘신라도’라 하였다.
ㄹ. 무왕은 스스로 전륜성왕이라 자처하고, 일본에도 사신을 파견하였다.
발해에 대한 옳은 설명은 독자적 연호 사용, 3성 6부제, 신라도이다.
발해는 무왕의 인안, 문왕의 대흥 등 독자 연호를 썼고, 당의 제도를 받아들이되 명칭과 운영을 독자적으로 한 3성 6부를 두었으며, 신라와 통하는 교통로를 신라도라 불렀다.
- 무왕이 전륜성왕을 자처했다는 설명 — 불교적 성왕인 전륜성왕을 자처한 것은 무왕이 아니라 문왕이다.
옳지 않은 것은 서얼이 관직에 진출할 수 없었다는 설명이다. 조선 후기 서얼은 신분 상승 운동을 통해 관직 진출의 길을 넓혔다.
정조 때 유득공·이덕무·박제가 등 서얼 출신이 규장각 검서관으로 등용되었고, 이후 서얼에 대한 차별 제한이 크게 완화되었다.
- 양반 증가와 상민·노비 감소 — 납속·공명첩·족보 매입 등으로 나타난 조선 후기 신분 구조 변화이다.
- 역관의 외래문화 수용 — 중국을 오가며 서양 문물과 서적을 들여오는 데 앞장섰다.
- 노비의 신분 상승과 공노비 해방 — 군공·납속으로 신분이 상승했고, 순조 때 공노비가 해방되었다.
-『삼국사기』-
진흥왕 때 이사부·사다함의 공격으로 멸망한 가야는 대가야이며, 대가야가 망할 즈음 우륵이 가야금을 가지고 신라에 귀화하였다.
대가야는 고령을 중심으로 후기 가야 연맹을 이끌었으나 562년 신라에 병합되었다.
- 시조 수로왕과 구지봉 전설 — 금관가야의 건국 설화이다.
- 낙동강 하류 도읍과 해상 중계 교역 — 김해의 금관가야에 해당한다.
- 국주 김구해의 항복과 식읍 — 법흥왕 때 신라에 항복한 금관가야의 사실이다.
제1조 울릉도를 울도라 개칭하여 강원도에 부속하고, 도감을 군수로 개정하여 관제 중에 편입하고, 군의 등급은 5등으로 한다.
제2조 군청 위치는 태하동으로 정하고, 구역은 울릉전도(鬱陵全島)와 죽도, ( ㉠ )을/를 관할한다.
칙령 제41호에서 울도군이 관할한 ㉠은 석도, 곧 독도이다. 1952년 평화선 선포 당시 일본은 이를 묵인한 것이 아니라 강하게 항의하였으므로 옳지 않다.
이승만 정부의 ‘인접 해양의 주권에 관한 대통령 선언’은 독도를 포함한 해역에 대한 주권을 밝힌 것으로, 이후 일본은 지속적으로 이의를 제기하였다.
- 『세종실록지리지』의 우산 표기 — 강원도 울진현 소속으로 우산·무릉 두 섬을 기록하였다.
- 숙종 때 안용복의 활동 — 일본에 건너가 울릉도·독도가 조선 땅임을 주장했고, 당시 일본은 독도를 송도로 불렀다.
- 일본의 1905년 편입 — 1870년대 태정관 지령 등으로 조선 영토임을 인정하고도, 러일 전쟁 중 무주지라는 명목으로 시마네현에 편입하였다.
○ 이인영은 부친상을 당하자 ‘불효는 불충’이라면서 귀가해버려 결국 서울진공작전은 실패하고 말았다.
자료는 을사의병의 최익현과 정미의병의 이인영으로, 두 의병장 모두 유교적 충효 관념에 따라 행동한 양반 유생이었다는 점에서 의병장이 주로 양반 유생이었다는 설명이 옳다.
‘임금의 군대와 싸울 수 없다’, ‘불효는 불충’이라는 태도는 위정척사 사상에 바탕을 둔 유생 의병장의 한계를 보여 준다.
- 입헌군주제 지향 — 유생 의병은 근왕적 성격이 강했으며, 입헌군주제는 독립협회 등 개화 세력의 지향이다.
- 관군 합류를 위한 투항 — 최익현은 관군과 싸우기를 거부해 체포된 것이지 관군에 합류하려 한 것이 아니다.
- 천도교 배경 — 동학 계열 운동에 해당하며, 이 의병 운동은 유교적 위정척사 사상이 배경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