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 고산리 유적과 ‘이른 민무늬토기’가 가리키는 ㉠은 신석기 시대이며, 이 시대에는 가락바퀴로 실을 뽑아 옷감을 짰다.
고산리 유적은 기원전 8,000년경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초기 신석기 유적으로, 덧무늬토기 이전 단계의 토기가 출토되었다.
- 고인돌에 간돌검을 부장한 것은 청동기 시대의 무덤 양식이다.
- 명도전·반량전 등 중국 화폐는 철기 시대 유적에서 출토된다.
- 반달돌칼로 이삭을 거둔 것은 벼농사가 시작된 청동기 시대의 특징이다.
(나) 김윤후가 용인에서 살리타를 사살하였다.
(다) 김헌창이 공주를 근거로 반란을 일으켰다.
(라) 이시애가 길주에서 군사를 일으켰다.
시대순은 김헌창의 난 → 김윤후의 살리타 사살 → 이종무의 대마도 토벌 → 이시애의 난이다.
김헌창은 신라 헌덕왕 때(822) 웅천주(공주)에서 반란을 일으켰고, 김윤후는 고려 고종 때 몽골 2차 침입(1232) 당시 처인성에서 살리타를 사살하였다.
이종무의 대마도 토벌은 조선 세종 때(1419), 이시애의 난은 세조 때(1467) 함길도 길주에서 일어났다.
ㄴ. 담배․채소․약재 등을 상품작물로 재배하여 수익을 올리는 부농이 나타났다.
ㄷ. 청으로부터 유황․구리 등을 수입하여 일본에 수출하였다.
ㄹ. 지대납부 방식이 도조법에서 타조법으로 전환되었다.
옳은 것은 여러 농서의 편찬과 상품작물을 재배한 부농의 등장이다.
조선 후기에는 박지원의 『과농소초』, 서호수의 『해동농서』 등 농서가 편찬되었고, 담배·채소·약재 같은 상품작물 재배로 부를 쌓은 부농이 나타났다.
- 유황·구리는 일본에서 들여와 청에 넘긴 물품으로, 중계 무역의 방향이 반대로 서술되었다.
- 지대 납부는 수확량의 절반을 나누는 타조법에서 일정액을 내는 도조법으로 확대되는 방향으로 변하였다.
대한제국 정부는 광무개혁의 하나로 지계아문을 설치하고 토지 소유자에게 지계(토지 소유 증명서)를 발급하였다.
양전 사업과 함께 근대적 토지 소유권을 확인하려는 정책이었으나 일부 지역에서만 시행되고 중단되었다.
- 조·일 통상 장정은 개항 이후 1883년에 체결되어 대한제국 수립(1897) 이전의 일이다.
- 삼정이정청은 임술 농민 봉기(1862)를 계기로 철종 때 설치되었다.
- 군국기무처가 과거제를 폐지한 것은 1894년 제1차 갑오개혁 때이다.
-『삼국사기』-
| 낙랑․대방군 축출 | (가) | 모용황에 의해 환도성 함락 | (나) | 전진의 순도 불교 전래 | (다) | 평양 천도 | (라) | 백제 한성 함락 |
근초고왕의 평양성 공격으로 전사한 왕은 고구려 고국원왕(371)이므로, 이 사건은 환도성 함락과 불교 전래 사이에 해당한다.
미천왕이 낙랑·대방군을 축출하고(313·314), 고국원왕 때 전연의 모용황이 환도성을 함락하였다(342).
고국원왕 전사(371) 이후 소수림왕 때 전진의 순도가 불교를 전래하였고(372), 이어 장수왕의 평양 천도(427)와 백제 한성 함락(475)이 이어진다.
○ 왕이 왕성을 짓고자 하여 ( ㉡ )에게 의견을 묻자, “비록 들판의 초가집에 살아도 바른 도를 행하면 복업이 길어질 것이요, 그렇지 않으면 사람을 수고롭게 하여 애써 성(城)을 만들지라도 역시 이익이 없을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삼국사기』-
수에 군사를 청하는 글을 지은 ㉠은 원광이며, 원광은 화랑이 지킬 세속오계를 지어 주었다.
㉡은 문무왕의 왕성 축조를 만류한 의상이다.
- 왕에게 건의해 황룡사 9층 탑을 세우게 한 승려는 자장이다.
- 저잣거리에서 「무애가」를 부르며 대중을 교화한 승려는 원효이다.
- 당에 유학해 유식론을 독자적으로 발전시킨 승려는 원측이다.
-『삼국사기』-
9주 명칭과 관직명을 한자식으로 고친 ‘왕’은 신라 경덕왕이며, 경덕왕 때 녹읍이 부활되었다.
경덕왕은 한화 정책을 추진했으나, 귀족의 반발 속에 관료전을 폐지하고 녹읍을 다시 지급하였다.
- 국학은 신문왕 때 설치되었다.
- 독서삼품과는 원성왕 때 시행되었다.
- 백성에게 정전을 처음 지급한 것은 성덕왕 때이다.
현릉 부근에서 발견된 통천관을 쓴 청동 인물상은 고려 태조 왕건의 상이며, 태조는 역분전을 처음 지급하였다.
역분전은 후삼국 통일에 공을 세운 사람에게 인품과 공로를 기준으로 나누어 준 토지이다.
- 국자감은 성종 때 설치되었다.
- 거란에 대비한 30만 광군은 정종 때 조직되었다.
- 개경을 황도, 서경을 서도로 격상한 것은 광종 때이다.
ㄴ. 음서로 등용된 사람들은 고위 관직에 오르지 못했다.
ㄷ. 사위나 외손자에게도 적용되었다.
ㄹ. 공신의 자손, 조종 묘예, 문무 5품 이상 관인의 자손 등이 대상이었다.
고려 음서는 사위·외손자에게도 적용되었고, 공신·종실의 자손과 5품 이상 관인의 자손이 대상이었다.
음서는 문벌 귀족이 가문의 지위를 대대로 유지하는 기반이 되었다.
- 음서는 문종 이전인 고려 전기부터 시행되었으므로 문종 때 처음 실시되었다는 서술은 틀리다.
- 음서 출신도 재상 등 고위 관직에 오를 수 있었다.
-『고려사절요』-
홍건적의 침입으로 복주(안동)까지 피란한 ‘왕’은 공민왕이며, 이 시기에 이제현이 『사략』을 편찬하였다.
『사략』은 성리학적 사관이 반영된 역사서로, 오늘날에는 사론만 전한다.
- 『향약구급방』은 고종 때 간행된 현존 최고의 의학서이다.
- 정치도감은 충목왕 때 설치되어 부원 세력의 불법 토지를 정리하였다.
- 『직지심체요절』은 우왕 때 청주 흥덕사에서 금속활자로 인쇄되었다.
만민 공동회와 관민 공동회를 열어 헌의 6조를 채택한 ㉠은 독립협회이며, 독립협회는 러시아의 절영도 조차 요구에 반대하였다.
독립협회는 자주 국권·자유 민권·자강 개혁을 내걸고 열강의 이권 침탈을 비판하였다.
- 홍범 14조는 제2차 갑오개혁 때 고종이 반포하였다.
- 국채 보상 운동은 대구에서 서상돈 등의 제안으로 시작되었다.
- 방곡령은 함경도·황해도의 지방관이 내린 조치이다.
1929년 광주에서 시작된 ‘이 운동’은 광주 학생 항일 운동이며, 신간회는 진상 조사단을 현지에 파견하였다.
신간회는 민중 대회를 열어 운동을 확산시키려 했으나 일제에 간부들이 대거 체포되었다.
- 조선 형평사는 1923년 진주에서 백정 차별 철폐를 위해 창립되어 이 운동보다 앞선다.
- 조선 민립 대학 설립 운동은 1920년대 전반에 전개되었다.
- 조선 민흥회는 1926년에 결성되어 신간회 창립으로 이어졌다.
의열단의 요청으로 ‘조선혁명선언’을 쓴 ‘그’는 신채호이며, 신채호는 『독사신론』을 저술하였다.
『독사신론』은 민족을 역사 서술의 중심에 둔 민족주의 역사학의 출발점으로 평가된다.
- 문헌 고증을 강조하며 진단학회를 조직한 것은 이병도·손진태 등 실증 사학자이다.
- 동학을 천도교로 개편한 인물은 손병희이다.
- 『조선사회경제사』를 집필한 사회 경제 사학자는 백남운이다.
-『신증동국여지승람』-
○ 지난 왕조 때 5도와 양계에 있던 역과 진에서 역을 부담한 사람과 ( ㉡ )의 사람은 모두 고려 태조 때의 명령을 거역한 사람이므로, 고려는 이들에게 천하고 힘든 일을 맡게 했다.
-『태조실록』-
현의 규모가 되지 못한 곳에 둔 ㉠·㉡은 향·부곡이며, 그 주민은 향리층의 지배를 받았다.
향·부곡민은 법적으로 양인이었으나 일반 군현민보다 세금 부담이 무겁고 거주 이전이 제한되었다.
- 향·부곡민은 관직 진출이나 국자감 입학에 제한을 받았다.
- 고려에서 백정이라 불린 것은 일반 농민이며, 이들은 조세·공물·역을 부담하였다.
- 매매·증여·상속의 대상이 된 것은 노비이다.
조선이 1년에 세 차례 이상의 사신 파견을 요구했고 명은 오히려 3년에 한 번을 요구하였으므로, 명이 요청했다는 서술이 옳지 않다.
조선은 명과 사대 관계를 맺어 정기 사절을 자주 보내 경제적·문화적 실리를 얻고자 하였다.
- 유구와 교류하며 불경·유교 경전·범종 등을 전해 주었다.
- 세종 때 대마도주와 계해약조를 맺어 세견선과 세사미두를 제한하였다.
- 여진·일본과는 교린 관계를 유지하며 토벌과 회유의 양면 정책을 폈다.
국정 논의 자리에 참석한 예문관 사관이 작성한 것은 사초이며, 시정기는 춘추관이 각 관청의 문서를 모아 편찬한 기록이므로 이 서술이 옳지 않다.
사관이 쓴 사초와 춘추관의 시정기는 왕이 죽은 뒤 실록 편찬의 기초 자료가 되었다.
- 실록은 왕이 죽은 뒤 실록청을 설치하고 사초·시정기·『승정원일기』 등을 바탕으로 편찬하였다.
- 임진왜란 이전에는 춘추관과 전주·성주·충주의 4대 사고에 실록을 보관하였다.
- 『국조보감』은 역대 국왕의 모범적 언행을 실록에서 뽑아 후대 왕의 귀감으로 삼았다.
1954년 ‘사사오입’ 논리로 통과된 개헌안은 초대 대통령에 한해 중임 제한을 철폐한 제2차 개헌(사사오입 개헌)이다.
이 개헌으로 이승만은 세 번째 대통령 선거에 출마할 수 있게 되었다.
- 대통령이 국회의원 3분의 1을 사실상 지명하도록 한 것은 유신 헌법이다.
-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는 1980년 신군부가 설치한 기구이다.
- 대통령선거인단에 의한 간접 선거는 1980년 제8차 개헌의 내용이다.
1940년 한국국민당·조선혁명당·한국독립당이 통합해 만든 ㉠은 (충칭) 한국독립당이며, 이 정당은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주도적으로 이끌었다.
김구를 중심으로 한 한국독립당은 임시정부의 여당 역할을 하며 한국광복군 창설을 뒷받침하였다.
- 조선의용대 화북지대를 바탕으로 조선의용군을 조직한 것은 조선독립동맹이다.
- 만주의 신흥무관학교는 신민회 계열 인사들이 세운 신흥강습소에서 비롯되었다.
- 쌍성보·대전자령 전투는 1930년대 초 북만주의 한국독립군이 거둔 승리이다.
| 도쿄에서 2․8 독립선언 발표 | (가) | 국내에서 6․10 만세 운동 발발 |
2·8 독립 선언(1919)과 6·10 만세 운동(1926) 사이에 있었던 일은 상하이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1919)이다.
3·1 운동 직후 여러 임시 정부가 통합되어 상하이에서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출범하였다.
- 박상진의 대한광복회 조직은 1910년대 중반으로 (가) 시기 이전이다.
- 「국가총동원법」 적용은 중일 전쟁 이후인 1938년의 일이다.
- 임병찬의 독립의군부 조직은 1910년대 초반으로 (가) 시기 이전이다.
임시 정부 수립을 위한 협의 대상 단체를 두고 미국과 소련이 대립한 ㉠은 미·소 공동 위원회이다.
모스크바 3국 외상 회의 결정에 따라 열린 제1차 미·소 공동 위원회(1946)는 신탁 통치 반대 세력의 참여 여부를 두고 대립하다 휴회되었다.
- 모스크바 3상 회의는 임시 정부 수립과 신탁 통치 방안을 결정한 회의 자체로, 공동 위원회 설치를 결정하였다.
- 좌·우 합작 위원회는 미·소 공동 위원회 휴회 뒤 여운형·김규식 등이 결성하였다.
- 조선 건국 준비 위원회는 광복 직후 여운형이 조직한 단체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