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삼국지』 -
사료의 나라는 고구려이며, 10월 제천행사(동맹)와 국동대혈 제사가 고구려의 풍습이다.
'큰 산과 깊은 골짜기', '좋은 농경지가 없어 배를 채우기 부족', '노략질하기를 좋아함'은 『삼국지』 위서 동이전이 전하는 고구려의 모습이다. 고구려는 10월에 동맹을 열고 수혈(국동대혈)에서 제사를 지냈다.
- 민며느리제라는 혼인 풍습은 옥저의 풍습이다.
- 마가·우가·저가 등 가축 이름을 딴 관리는 부여의 제가이다.
- 다른 부족의 생활권을 침범하면 노비·소·말로 변상하는 책화는 동예의 풍습이다.
밑줄 친 왕은 백제 무령왕이며, 그의 재위 기간에는 지방의 22담로에 왕족을 파견해 지방 통제를 강화하였다.
'영동대장군', '사마왕', '계묘년에 돌아가셨다'는 무령왕릉 지석의 내용이다. 무령왕은 22담로에 왕족을 보내 지방을 장악하였다.
- 16등급 관등과 공복 제정은 고이왕 대의 일로 전해진다.
- 수도 5부·지방 5방 정비는 성왕 대의 일이다.
- 마한 통합과 고구려 평양성 공격은 근초고왕 대의 일이다.

동그라미로 표시된 지역은 강화도이며, 이곳과 관계없는 제목은 지눌의 고려 불교 개혁이다.
지도에서 김포·파주와 맞닿은 섬이 '강화군'으로 표기되어 있다. 지눌은 정혜결사를 이끌고 순천 송광사(수선사)를 중심으로 불교 개혁 운동을 펼쳤으므로 강화도의 역사와는 거리가 멀다.
- 병자호란 때 왕족이 피란한 강화도가 청군에게 함락되었고, 결국 인조가 삼전도에서 항복하였다.
- 철종은 즉위 전 강화도에서 지내 '강화도령'으로 불렸다.
- 병인양요 때 프랑스군이 외규장각의 의궤를 약탈해 갔으며, 이후 반환되어 국내로 돌아왔다.
… (중략) …
제9조 대한국 대황제는 각 조약국에 사신을 파송(派送) 주재하게 하고 선전(宣戰), 강화 및 제반 약조를 체결한다. 공법에 이른바 사신을 자체로 파견하는 것이다.
- 「대한국 국제」 -
국가재정을 탁지아문으로 일원화한 것은 갑오개혁의 내용이므로 대한제국에 대한 설명으로 옳지 않다.
「대한국 국제」는 1899년 반포된 대한제국의 헌법적 규정이다. 대한제국은 광무개혁에서 재정을 오히려 황실 기구인 궁내부(내장원)로 집중시켰다.
- 양전 사업과 지계 발급은 광무개혁의 토지 정책으로 옳다.
- 서북철도국 설치와 경의철도 부설 시도는 대한제국의 식산흥업 정책으로 옳다.
- 원수부를 설치해 황제가 군 통수권을 장악한 것도 대한제국의 정책으로 옳다.
『직지심체요절』이 간행된 1377년은 우왕 대이며, 명이 철령위 설치를 통보한 것도 우왕 대의 일이다.
명의 철령위 설치 통보는 요동 정벌 추진과 위화도 회군으로 이어졌다.
- 원 황실이 북쪽으로 쫓겨나고 명이 건국된 것은 공민왕 대의 일이다.
- 토지 문서를 불태우고 과전법을 시행한 것은 공양왕 대의 일이다.
- 원에 만권당을 설치한 것은 충선왕 대의 일이다.
(나) 10정을 두었는데, 9주 가운데 8주에 1정씩 배치하고, 국경지대인 한주(漢州)에는 2개의 정을 두었다.
(다) 금위영이 설치되면서 5군영 체제가 갖추어졌다.
(라) 국왕의 친위 부대인 2군, 수도 및 국경 방어를 담당하는 6위로 구성되었다.
시대 순서는 (나) 통일 신라 → (라) 고려 → (가) 조선 전기 → (다) 조선 후기이다.
(나) 9주에 10정을 배치한 것은 통일 신라의 지방군, (라) 2군 6위는 고려의 중앙군, (가) 5위는 조선 전기의 중앙군, (다) 금위영 설치로 5군영이 완성된 것은 조선 숙종 대이다.
- (가)를 맨 앞에 둔 배열은 조선 전기의 5위를 신라·고려보다 앞에 두어 틀렸다.
- (나)→(가)→(다)→(라) 배열은 고려의 2군 6위를 조선 후기 뒤에 두어 틀렸다.
(가)는 대한광복회이며, 북간도에서 중광단을 조직한 것은 대한광복회가 아니므로 옳지 않다.
'총사령 박상진'이 단서이다. 중광단은 서일 등 대종교 계열이 북간도에서 조직한 단체로, 이후 북로 군정서로 이어졌다.
- 대한광복회는 공화제 국가 수립을 지향하였다.
- 군자금을 모집하고 친일 부호를 처단하는 활동을 벌였다.
- 대구에서 결성되어 경상도 일대를 기반으로 전국 조직으로 확대되었다.

지도의 도시는 한양이며, 거중기를 이용해 약 2년 만에 성곽을 완성한 것은 한양 도성이 아니라 수원 화성에 대한 설명이다.
지도에 '숙정문', '흥인지문', '돈의문', '숭례문'이 표시되어 있어 조선의 도성 한양임을 알 수 있다. 거중기는 정약용이 고안하여 정조 때 화성 축조에 활용되었고, 한양 도성은 태조 때 백성을 동원해 짧은 기간에 쌓았다.
- 한양 지역은 고려 문종 때 남경으로 승격되었다.
- 조선 후기 한양에서는 종루(시전), 이현, 칠패 등에서 상업 활동이 활발하였다.
- 정도전은 경복궁의 전각과 도성 성문 등의 이름을 지었다.
(나) 조선 수군이 명량 해전에서 크게 승리하였다.
(다) 이순신이 옥포 해전에서 승리하였다.
(라) 조명 연합 수군이 노량 해전에서 승리하였다.
(마) 조명 연합군이 평양성을 탈환하였다.
임진왜란의 순서는 옥포 해전 → 진주 대첩 → 평양성 탈환 → 명량 해전 → 노량 해전, 곧 (다)→(가)→(마)→(나)→(라)이다.
1592년 이순신의 옥포 해전이 먼저이고, 같은 해 김시민의 진주성 승리, 1593년 조명 연합군의 평양성 탈환이 이어졌다. 정유재란 때인 1597년 명량 해전, 1598년 노량 해전이 뒤따랐다.
- (가)→(다)→(마)→(라)→(나) 배열은 진주성 전투를 옥포 해전보다 앞에 두고 노량 해전을 명량 해전보다 앞에 두어 틀렸다.
- (가)→(마)→(다)→(나)→(라) 배열은 진주성 전투와 평양성 탈환을 옥포 해전보다 앞에 두어 틀렸다.
- (다)→(가)→(나)→(마)→(라) 배열은 1597년 명량 해전을 1593년 평양성 탈환보다 앞에 두어 틀렸다.
- 「순보서(旬報序)」 -
'박문국', '순보서'가 단서인 신문은 1883년 창간된 『한성순보』이며, 그 이전의 사실은 『해국도지』의 소개이다.
『해국도지』는 청의 위원이 지은 세계 지리서로, 개항 이전 연행사를 통해 조선에 들어와 개화사상 형성에 영향을 주었다.
- 『월남망국사』 번역은 1900년대 애국계몽 운동기의 일이다.
- 『대한자강회월보』는 1906년 결성된 대한자강회의 기관지이다.
- 『독립신문』은 1896년 서재필이 창간하였다.
밑줄 친 이 시대는 고려이며, 고려 때 편찬된 의학서는 『향약구급방』이다.
숭의전은 조선이 고려 태조 등을 제사하고 신숭겸·정몽주를 배향한 곳이다. 『향약구급방』은 고려 후기 우리 약재로 응급 처방을 정리한, 현존 최고(最古)의 우리 의학서이다.
- 『의방유취』는 조선 세종 때 편찬된 의학 백과사전이다.
- 『향약집성방』은 조선 세종 때 우리 약재와 처방을 집대성한 책이다.
- 『동의수세보원』은 조선 말 이제마가 사상 의학을 정리한 책이다.
- 『동아일보』 1926년 6월 12일 -
(가)는 1926년 서거한 순종이며, 대한제국의 외교권 박탈과 통감부 설치는 고종 재위 때의 일이므로 순종 재위 기간의 사실이 아니다.
1926년 6월 기사의 '황제가 영원히 가시던 길'은 순종의 인산을 가리키며, 이날 6·10 만세 운동이 일어났다. 외교권 박탈은 1905년 을사늑약으로, 순종 즉위(1907) 이전이다.
- 동양척식주식회사 설립(1908)은 순종 재위 기간의 일이다.
- 간도를 청에 귀속한 간도 협약(1909)도 순종 재위 기간이다.
- 13도 창의군 결성(1907)은 고종 강제 퇴위 이후 순종 재위 기간에 이루어졌다.
초대 대통령의 중임 제한을 철폐한 사사오입 개헌은 1954년으로, 정전협정(1953) 이후의 일이므로 옳지 않다.
6·25 전쟁은 1950년 발발하여 1953년 7월 정전협정으로 멈추었다. 사사오입 개헌은 그 이듬해에 통과되었다.
- 이승만 정부의 반공 포로 석방은 정전협정 직전인 1953년 6월의 일이다.
- 유엔군 측의 자유 송환 방침 제안은 휴전 회담 중 포로 문제 협상 과정의 일이다.
- 대통령 직선제로 바꾼 발췌 개헌은 전쟁 중인 1952년 부산에서 통과되었다.
고구마 종자는 청에 간 연행사가 아니라 일본에 파견된 통신사(조엄)가 들여왔으므로 옳지 않다.
고구마는 18세기 영조 때 통신사를 통해 일본에서 전래되어 구황 작물로 보급되었다.
- 이앙법 보급으로 노동력이 절감되고 수확량이 늘어난 것은 조선 후기의 변화이다.
- 담배·인삼·채소 등 상품작물 재배가 확대된 것도 조선 후기의 모습이다.
- 밭고랑에 씨를 뿌리는 견종법이 보급된 것도 조선 후기의 일이다.
○ 만국평화회의가 열린 헤이그에 특사로 파견되었다.
서전서숙 설립과 헤이그 특사 파견의 인물은 이상설이며, 그는 연해주에서 대한광복군정부를 조직하였다.
이상설은 북간도 용정에 서전서숙을 세웠고, 1907년 헤이그 특사로 파견되었다. 이후 1914년 연해주에서 이동휘 등과 대한광복군정부를 세웠다.
- 경학사는 이회영·이상룡 등이 서간도에서 조직하였다.
- 독립의군부는 임병찬이 고종의 밀지를 받아 조직하였다.
- 대한인국민회는 미주 지역 한인 단체들이 통합해 조직하였다.
(나) 불교를 행하는 것은 몸을 닦는 근본이며, 유교를 행하는 것은 나라를 다스리는 근원이니 몸을 닦는 것은 내생을 위한 것이며, 나라를 다스리는 것은 오늘의 할 일입니다.
(다) 나는 옛날 공의 문하에 있었고 공은 지금 우리 수선사에 들어왔으니, 공은 불교의 유생이요, 나는 유교의 불자입니다. … (중략) … 유교와 불교는 다름이 없다고 보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ㄴ. (나) - 불교 행사를 장려하는 구실이 되었다.
ㄷ. (다) - 성리학 수용의 사상적 토대를 마련하였다.
옳게 짝지어진 것은 ㄱ과 ㄷ이다.
(가)는 지눌의 정혜결사문, (나)는 최승로의 시무 28조, (다)는 혜심의 유불 일치설이다. 최승로는 불교 행사의 폐단을 지적하며 연등회·팔관회 축소를 건의하였다.
- ㄱ. 지눌은 불교의 세속화를 비판하고 수행 중심의 불교를 회복하려 하였으므로 옳다.
- ㄴ. 최승로는 유교를 치국의 근본으로 삼고 불교 행사를 억제하자고 하였으므로 옳지 않다.
- ㄷ. 혜심의 유불 일치설은 성리학 수용의 사상적 토대가 되었으므로 옳다.
(나)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한국광복군을 창설하였다.
ㄴ. 징병제로 한국인 청년들이 군인으로 끌려갔다.
ㄷ. 항일 무장 부대인 조선의용대가 결성되었다.
ㄹ. 비밀결사 조직인 조선건국동맹이 조직되었다.
중·일 전쟁(1937)과 한국광복군 창설(1940) 사이의 사실은 ㄱ과 ㄷ이다.
두 기준 사건의 연도는 중·일 전쟁 1937년, 한국광복군 창설 1940년이다.
- ㄱ. 「국가총동원법」 제정은 1938년으로 사이에 해당한다.
- ㄴ. 징병제 시행은 1940년대 중반으로 광복군 창설 이후이다.
- ㄷ. 조선의용대 결성은 1938년으로 사이에 해당한다.
- ㄹ. 여운형의 조선건국동맹 조직은 1944년으로 광복군 창설 이후이다.
- 『삼국사기』 -
김춘추의 대당 청병(648)의 배경은 백제의 대야성 함락(642)이다.
사료의 '백제가 대대적으로 쳐들어와 수십 성을 함락했다'가 단서이다. 의자왕의 공격으로 대야성이 무너지자 신라는 고구려와 당에 차례로 원병을 청하였고, 이것이 나당 동맹으로 이어졌다.
- 계백의 5천 결사대 항전(660)은 나당 연합군의 백제 공격 때로 이후의 일이다.
- 대무예(발해 무왕)의 당 등주 공격은 8세기 전반의 일이다.
- 백제 부흥군의 200여 성 탈환은 백제 멸망(660) 이후의 일이다.

(가)는 여진(금)이며, 『고려도경』을 남긴 서긍은 여진이 아니라 송의 사신이므로 옳지 않다.
지도에서 (가)는 요(거란) 동쪽, 고려 북방에 자리하여 고려와 교류하였고, 1115년 금을 세운 여진임을 알 수 있다. 서긍은 송 휘종 때 고려에 와서 『고려도경』을 지어 고려청자의 아름다움을 기록하였다.
- 윤관은 별무반을 이끌고 여진을 몰아낸 뒤 동북 9성을 쌓았다.
- 여진이 9성 지역의 반환을 간청하며 조공을 약속하자 고려는 9성을 돌려주었다.
- 여진은 1115년 금을 건국한 뒤 고려에 군신 관계를 요구하였고, 이자겸 정권이 이를 수용하였다.
| 7․4 남북 공동 성명 | 남북 기본 합의서 채택 | 금강산 해로 관광 사업 시작 | 6․15 남북 공동 선언 | 10․4 남북 공동 선언 | ||||
|---|---|---|---|---|---|---|---|---|
| (가) | (나) | (다) | (라) |
금융실명제 담화는 1993년 김영삼 정부의 것으로, 남북 기본 합의서 채택과 금강산 해로 관광 시작 사이인 (나) 시기이다.
남북 기본 합의서는 1991년 노태우 정부, 금강산 해로 관광은 1998년 김대중 정부 때 시작되었다. 금융실명제는 1993년 대통령 긴급 명령으로 실시되었다.
- (가) 시기는 7·4 남북 공동 성명(1972)과 1991년 사이로 담화보다 이르다.
- (다) 시기는 1998년과 6·15 남북 공동 선언(2000) 사이로 담화보다 늦다.
- (라) 시기는 2000년과 10·4 남북 공동 선언(2007) 사이로 담화보다 늦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