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에 해당하는 인물은 장보고이다.
신라 말 해적의 약탈을 막기 위해 군진 설치를 건의했고, ‘흥덕왕’이 ‘청해진’을 두고 그를 ‘대사’로 임명했다는 단서가 청해진 대사 장보고를 가리킨다.
- 김유신은 신라의 삼국 통일 전쟁을 이끈 장군으로, 청해진보다 훨씬 앞선 시기의 인물이다.
- 대광현은 발해의 세자로, 발해 멸망 뒤 고려에 귀부한 인물이다.
- 연개소문은 고구려 말기에 정권을 장악한 인물로, 신라 흥덕왕 대와 시기가 맞지 않는다.
정동행성은 일본 정벌을 위해 설치되었다가 이후 고려 내정 간섭 기구로 남았다.
원은 충렬왕 대에 일본 원정을 준비하며 정동행성을 두었고, 원정이 실패한 뒤에도 이를 유지하며 고려에 영향력을 행사하였다.
- 충렬왕이 담판으로 폐지했다는 설명은 틀리다. 정동행성의 간섭 기능은 공민왕의 반원 개혁 때 이문소를 없애면서 크게 약화되었다.
- 수령을 보좌하고 수령과 향리를 감시한 것은 조선의 지방 자치 기구인 유향소에 해당한다.
- 개경 환도에 반대해 진도와 제주도로 옮겨 항전한 것은 삼별초이다.
옳지 않은 설명은 혜초를 고려시대 승려로 다룬 내용이다.
혜초는 통일 신라 시기의 승려로, 인도 등을 순례하고 『왕오천축국전』을 남겼으므로 고려시대 불교의 내용이 아니다.
- 지눌이 수선사에서 결사 운동을 전개한 것은 고려 후기 불교 개혁의 내용으로 옳다.
- 의천이 천태종을 개창하고 교종과 선종의 통합을 꾀한 것은 고려 중기의 일로 옳다.
- 몽골 침입 때 부처의 힘으로 외적을 물리치고자 팔만대장경을 만든 것은 옳다.
○ 정치ㆍ경제ㆍ사회를 망라한 조선의 최고 법전으로 조선시대 전반에 영향을 끼쳤다.
제시된 법전은 『경국대전』이다.
‘세조 대에 편찬이 시작되어 성종 대에 반포’되었다는 점과 조선의 최고 법전이라는 설명이 결정적 단서이다.
- 『대전통편』은 정조 때 편찬된 법전으로, 세조·성종 대의 편찬 시기와 맞지 않는다.
- 『조선경국전』은 정도전이 조선 초에 지어 태조에게 올린 사찬 법전이다.
- 『육전조례』는 조선 말 고종 때 간행된 법전으로, 시기가 훨씬 뒤이다.
(가)에 들어갈 말은 세도이다.
‘순조, 헌종, 철종’ 시기에 ‘몇몇 가문이 권력을 독점’하고 ‘비변사’에 권력이 집중되었다는 단서는 세도 정치의 특징이다.
- 붕당은 학문과 정치적 입장에 따라 나뉜 정치 집단으로, 소수 가문의 권력 독점과는 다르다.
- 민본은 백성을 나라의 근본으로 삼는 정치 이념으로, 특정 시기의 정치 형태를 가리키지 않는다.
- 탕평은 영조와 정조가 붕당 간 대립을 완화하고자 추진한 정책이다.
(가)에 들어갈 단체는 신간회이다.
‘정우회 선언’을 계기로 ‘1927년’에 창립되었고, ‘광주 학생 항일 운동’ 때 조사단을 파견하고 ‘민중 대회’를 추진했다는 단서가 민족 유일당 운동으로 결성된 신간회를 가리킨다.
- 중광단은 대종교 세력이 북간도에서 조직한 항일 무장 단체이다.
- 정의부는 1920년대 남만주에서 활동한 독립군 자치 조직이다.
- 참의부는 압록강 유역에서 활동하며 대한민국 임시 정부의 직할을 표방한 독립군 조직이다.
‘이 시기’에 있었던 사실은 조선 태형령 공포이다.
제시문의 ‘헌병 경찰제’와 ‘무단통치기’는 1910년대를 가리키며, 조선 태형령은 1912년에 공포되어 한국인에게만 태형을 적용하였다.
- 조선어학회 사건은 1942년에 일어난 민족 말살 통치기의 사건이다.
- 창씨개명은 1940년부터 강제로 시행되었다.
- 국민 징용령은 중일 전쟁 이후인 1939년에 제정되었다.
밑줄 친 ‘개혁’은 광무개혁이며, 양지아문을 설치해 양전 사업을 추진한 것이 그 내용이다.
‘대한국 국제’와 ‘구본신참’이 대한 제국의 광무개혁을 가리키는 단서이다. 대한 제국 정부는 1898년 양지아문을 설치해 토지 조사에 나섰다.
- 통리기무아문은 1880년 개화 정책을 추진하기 위해 설치한 기구로, 대한 제국 수립 이전의 일이다.
- 집강소는 1894년 동학 농민 운동 때 전주 화약 뒤 설치되었다.
- 조·미 수호 통상 조약은 1882년에 체결되어 대한 제국 수립보다 앞선다.
옳지 않은 설명은 평양 천도이다. 평양으로 수도를 옮긴 왕은 장수왕이다.
신라의 구원 요청을 받고 ‘보병과 기병 5만’을 보내 왜를 물리쳤다는 내용에서 ‘태왕’은 고구려의 광개토 대왕임을 알 수 있다.
- 요동을 포함한 만주 일대를 장악한 것은 광개토 대왕의 업적으로 옳다.
- ‘영락’이라는 독자적인 연호를 사용한 것은 옳다.
- 백제를 공격해 한강 이북 지역을 차지한 것은 옳다.
옳지 않은 설명은 미륵사지 석탑에서 무구정광대다라니경이 발견되었다는 내용이다.
무구정광대다라니경은 통일 신라의 불국사 3층 석탑에서 발견되었다. 미륵사지 석탑에서는 사리봉영기 등 사리 장엄구가 나왔다.
- 칠지도는 백제와 왜의 긴밀한 교류 관계를 보여 주는 유물로 옳다.
- 무령왕릉은 중국 남조의 영향을 받은 벽돌무덤으로 옳다.
- 정림사지 5층 석탑에는 당이 백제를 평정한 일을 기리는 글이 새겨져 있어 옳다.
(가) 국가는 발해이며, 교육 기관으로 주자감을 설립하였다.
‘무왕’이 수군을 보내 당의 ‘산둥 지방’을 공격했고, 뒤이은 ‘문왕’이 당과 친선 관계를 맺었다는 단서가 발해를 가리킨다.
- 9서당은 통일 신라의 중앙군 조직이다.
- 집사부 중심의 중앙 정치는 신라의 체제이다.
- 22개의 담로는 백제 무령왕 때 지방에 설치한 것이다.
- 『삼국사기』 -
옳지 않은 설명은 양길의 부하로 활동했다는 내용이다. 이는 궁예의 행적이다.
‘완산(전주)에 도읍’하고 ‘의자왕의 오래된 울분’을 씻겠다는 내용에서 밑줄 친 인물은 후백제를 세운 견훤임을 알 수 있다.
- 중국의 오월에 사신을 파견해 외교 관계를 맺은 것은 견훤의 행적으로 옳다.
- 신라 서남 해안을 지키던 군인 출신이라는 것은 옳다.
- 신라의 금성을 습격해 경애왕을 죽인 것은 옳다.
(나) 인종과 관료들이 서경 천도가 현실성 없다고 반대하자, 묘청 등이 서경에서 반란을 일으켰다.
(가)와 (나) 사이의 사실은 이자겸의 난이다.
(가) ‘별무반’ 편성은 숙종 대인 1104년, (나) ‘묘청’의 서경 반란은 인종 대인 1135년의 일이다. 이자겸의 난은 1126년에 일어나 두 사건 사이에 놓인다.
- 교정도감은 1209년 최충헌이 설치한 기구로, (나)보다 뒤이다.
- 『삼국유사』는 충렬왕 대에 일연이 편찬한 것으로, (나)보다 뒤이다.
- 12목은 성종 대인 983년에 설치되어 (가)보다 앞선다.
(가)에 들어갈 왕은 고려 태조이며, 후대 왕에게 훈요 10조를 남겼다.
‘최승로’가 ‘성종’에게 올린 상소에서 ‘삼한을 통합’했다고 언급한 왕이므로 후삼국을 통일한 태조 왕건을 가리킨다.
- 만권당은 충선왕이 원의 수도에 세운 학문 연구 기관이다.
- 노비안검법은 광종이 호족 세력을 누르기 위해 실시하였다.
- 전민변정도감은 공민왕이 신돈을 등용해 권문세족의 토지와 노비를 바로잡게 한 기구로 널리 알려져 있다.
밑줄 친 ‘왕’은 세종이며, 그의 업적은 『농사직설』 편찬이다.
‘공법’을 시행하고 토지를 ‘6등급’, 풍흉을 ‘9등급’으로 나눈 것은 세종 대의 전분 6등법과 연분 9등법이다.
- 대동법은 광해군 때 경기도에서 처음 시행되었다.
- 훈련도감은 선조 때 임진왜란 중에 설치되었다.
- 현직 관리에게만 과전을 지급한 것은 세조 때의 직전법이다.
| 병인양요 발생 |
| (가) |
| 강화도조약 체결 |
| (나) |
| 동학농민군 전주성 점령 |
| (다) |
| 독립협회 창립 |
| (라) |
| 일제의 을사늑약 강요 |
제시된 사건은 신미양요이며, 발생 시기는 (가) 구간이다.
'제너럴 셔먼호 사건'을 구실로 한 미국의 강화도 침략, '초지진'·'광성보' 점령, '어재연' 부대의 항전이 단서이다. 신미양요는 1871년의 일로, 1866년 병인양요와 1876년 강화도 조약 사이에 해당한다.
- (나) 구간은 1876년 강화도 조약 체결부터 1894년 동학 농민군의 전주성 점령까지로, 신미양요보다 뒤의 시기이다.
- (다) 구간은 1894년 전주성 점령부터 1896년 독립 협회 창립까지로, 신미양요보다 뒤의 시기이다.
- (라) 구간은 1896년 독립 협회 창립부터 1905년 을사늑약 강요까지로, 신미양요보다 뒤의 시기이다.
(가) 인물은 최익현이며, 을사늑약에 반대해 의병 운동을 전개하였다.
‘이항로의 문하’, 흥선대원군 비판 상소, 개항 반대 상소와 ‘왜양일체론’이 최익현을 가리키는 단서이다.
- 정주에 오산학교를 설립한 인물은 이승훈이다.
- 삼원보에 신흥 무관 학교를 만든 것은 이회영 등 신민회 계열 인사들이다.
- 황성신문에 「시일야방성대곡」을 발표한 인물은 장지연이다.
(가) 신문은 대한매일신보이며, 국채 보상 운동에 참여하였다.
‘양기탁’과 ‘베델’이 창간하고 항일 논조를 펴 통감부의 탄압을 받았다는 내용이 대한매일신보를 가리킨다.
- 브나로드 운동은 1930년대 초 동아일보가 추진하였다.
- 대한민국 임시 정부의 기관지는 『독립신문』이다.
- 조선 물산 장려회는 1920년대에 조만식 등 민족주의 계열 인사들이 주도해 만들었다.
밑줄 친 ‘그’는 신채호이며, 의열단의 활동 지침인 「조선 혁명 선언」을 작성하였다.
을지문덕·이순신 전기, ‘독사신론’, ‘대동단결선언’ 참여가 신채호를 가리키는 단서이다.
- 육영공원은 조선 정부가 세운 근대식 관립 학교로, 개인의 업적이 아니다.
- 『조선책략』은 청의 외교관 황준헌이 저술하였다.
- 한인 애국단을 조직한 인물은 김구이다.
(가) 시기의 사실은 미·소 공동 위원회 개최이다.
조선 건국 준비 위원회 조직은 1945년, 제헌 국회를 위한 총선거는 1948년의 일이다. 미·소 공동 위원회는 1946년과 1947년에 열렸으므로 그 사이에 놓인다.
- 농지 개혁법은 1949년에 제정되어 총선거보다 뒤이다.
- 국가 총동원법은 일제가 1938년에 공포해 시기가 앞선다.
- 6·25 전쟁은 1950년에 일어나 총선거보다 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