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 존엄성의 수호를 위해, 평화로운 사회를 만들기 위해
스포츠 경기를 하는 것이다.”라고 말합니다. 이것이 올림픽
정신이며, 스포츠의 가능성과 힘을 보여 주는 것이라고 저는
굳게 믿습니다. 열 살 때 남북 선수단이 올림픽 경기장에
동시 입장하는 것을 보고 처음으로 스포츠의 힘을 느꼈습니다.
오늘 저는 유엔 총회의 ‘올림픽 휴전 결의안’ 초안 승인을
통해 그때 목격했던 스포츠의 힘을 다시 한번 볼 수 있기를
바랍니다.
이 연설은 권위 있는 자료를 인용해 설득력을 높이고 있다.
연설 첫머리에서 “올림픽 헌장은 ‘올림픽의 목적은 …’이라고 말합니다”라며 올림픽 헌장을 직접 인용하고, 이를 근거로 올림픽 휴전 결의안 승인을 호소한다.
- 반대되는 사례 제시: 연설자는 남북 동시 입장이라는 자신의 경험을 들 뿐, 주장과 반대되는 사례는 나오지 않는다.
- 설의적 표현: “굳게 믿습니다”, “바랍니다”처럼 평서형으로 말할 뿐 답이 정해진 의문문은 쓰지 않았다.
- 연설자의 공신력 강조: 열 살 때의 개인적 경험을 말했을 뿐, 자신의 지위나 전문성을 내세우지 않았다.
위한 공공 건축을 낳는다. 공공 건축은 정부나 지방자치
단체가 주도하면서 사적 자본이 생산해 낼 수 없는 공간을
생산해 내어야 한다. 이곳은 자본의 논리에서 소외된 영역을
보살피는 공적인 영역이다. 따라서 공공 건축은 국민의 삶의
질을 한 단계 높이는 데 기여할 수 있어야 한다. 그리고
특정 개인의 취향이 반영된 것이 아니라 보다 큰 다수가
누릴 수 있는 것을 배려하는 보편성을 갖추어야 한다.
그러면서도 사적 건축으로는 하기 어려운 지역의 정체성과
문화적 전통도 보존해야 한다. 이렇게 공공 건축은 공적인
소통의 장이 되어야 하는 것이다.
공공 건축은 지역의 정체성을 반영한 소통의 장이 되어야 한다는 진술이 글과 부합한다.
글은 공공 건축이 “지역의 정체성과 문화적 전통도 보존해야 한다”고 하고, “이렇게 공공 건축은 공적인 소통의 장이 되어야 하는 것이다”라고 맺는다.
- 사적 건축이 국민의 삶의 질을 높여야 한다: 글에서 삶의 질 향상은 공공 건축의 역할로 제시된다.
- 사적 건축이 다수의 보편적 취향을 반영해야 한다: 보편성 역시 공공 건축이 갖추어야 할 조건이며, 사적 건축은 사적인 필요에서 나온다고 했다.
- 공공 건축이 사적 자본을 활용해야 한다: 글은 공공 건축이 “사적 자본이 생산해 낼 수 없는 공간”을 정부·지방자치단체 주도로 생산해야 한다고 했다.
혼자 공모전에 신청했더라.
채연: 글쎄, 왜 그랬을까?
민서: 그러게 말이야. 정말 기분 나빠.
채연: 정국이도 나름대로 사정이 있었을 거야.
민서: 사정은 무슨 사정? 자기 혼자 튀어 보고 싶은 거겠지.
채연: 내가 지난 학기에 과제를 함께 해 봐서 아는데, 그럴
애가 아니야. 민서야, 정국이에 대해 다시 한번 생각해
보는 건 어때?
민서: 너 자꾸 이럴 거야? 도대체 왜 정국이 편만 드는 거야?
채연은 자신의 경험을 예로 들어 민서를 설득하고 있다.
채연은 “내가 지난 학기에 과제를 함께 해 봐서 아는데, 그럴 애가 아니야”라며 직접 겪은 일을 근거로 정국이를 다시 생각해 보라고 권한다.
- 채연이 민서의 의견을 수용한다: 채연은 “사정이 있었을 거야”라며 민서와 다른 견해를 계속 유지하고, 대화는 갈등이 커진 채 끝난다.
- 민서가 정국이의 상황과 감정을 고려한다: 민서는 “사정은 무슨 사정?”이라며 정국이의 사정을 일축한다.
- 민서가 채연의 답변에서 모순을 찾아 논리적으로 비판한다: 민서는 “왜 정국이 편만 드는 거야?”라며 감정적으로 반발할 뿐 모순을 지적하지 않는다.
수 있게 한다. 별도의 동력에 의지하지 않고도 추진력을
얻는 것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우주선도 별도의 동력 없이
먼 우주 공간까지 갈 수 있을 것이다. 우주 공간에도 태양에서
방출되는 입자들이 일으키는 바람이 있어서 ‘햇살 돛’을
만들면 그 태양풍의 힘으로 추진력을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이 글의 주된 서술 방식은 유추이다.
바람으로 추진력을 얻는 배의 돛과 태양풍으로 추진력을 얻는 ‘햇살 돛’ 우주선의 유사성에 기대어, 익숙한 대상(배)으로 낯선 대상(우주선)의 원리를 설명한다. “이와 마찬가지로”라는 표현이 이를 드러낸다.
- 정의: ‘햇살 돛’이 무엇인지 개념을 규정하는 진술 방식이 중심이 아니다.
- 분류: 대상을 기준에 따라 종류별로 나누는 내용이 없다.
- 서사: 시간의 흐름에 따른 사건 전개가 없다.
쉼표를 하나하나 지웠다가 다시 한번 읽으면서 쉼표를
원래 있던 자리에 되살려 놓는 과정을 거치면 단편 하나가
완성된다고 했다. 강박증 환자처럼 보이지만 실은 치열한
문장가가 아닌가! 불필요한 곳에 나태하게 찍혀 있는 쉼표는
글의 논리와 리듬을 망쳐 놓는다. 쉼표를 사용할 필요가
없는 (가)의 문장을 쓰거나 쉼표의 앞뒤를 섬세하게
짚게 하는 치밀한 문장을 만들어야 한다.
(가)에는 天衣無縫(천의무봉)이 들어가는 것이 가장 적절하다.
천의무봉은 ‘선녀의 옷에는 꿰맨 자국이 없다’는 뜻으로, 시가나 문장이 꾸민 흔적 없이 자연스럽고 완벽함을 이른다. 쉼표를 쓸 필요조차 없을 만큼 흠 없는 문장이라는 문맥에 맞는다.
- 髀肉之歎(비육지탄): 넓적다리에 살만 찐다는 탄식으로, 뜻을 펼 기회 없이 세월만 보냄을 한탄하는 말이다.
- 聲東擊西(성동격서): 동쪽에서 소리 내고 서쪽을 친다는 뜻으로, 상대를 속여 허를 찌르는 전략을 이른다.
- 苦盡甘來(고진감래): 쓴 것이 다하면 단 것이 온다는 뜻으로, 고생 끝에 낙이 옴을 이른다.
한자 표기가 옳은 것은 노익장(老益壯)이다.
노익장은 ‘늙을 노(老)·더할 익(益)·씩씩할 장(壯)’으로, 늙었지만 의욕과 기력이 더욱 왕성함을 뜻한다.
- 백미: 촉한 마씨 다섯 형제 가운데 흰 눈썹이 있던 마량(馬良)이 가장 뛰어났다는 고사에서 온 말로 ‘白眉’로 써야 한다. ‘百眉’는 틀린 표기이다.
- 등용문: 잉어가 용문(龍門)을 오르면 용이 된다는 고사에서 온 말로 ‘오를 등(登)’을 쓴 ‘登龍門’이 옳다. ‘燈’은 등불이다.
- 미봉책: 꿰매어 깁는다는 뜻의 ‘彌縫’을 써서 ‘彌縫策’이 옳다. ‘未’는 ‘아닐 미’이다.
표준어가 아닌 것은 ‘꼬매고’이며, ‘꿰매고’로 써야 한다.
해지거나 뚫어진 데를 바늘로 깁는다는 뜻의 표준어는 ‘꿰매다’이고, ‘꼬매다’는 비표준어(방언)이다.
- 빠삭하다: 어떤 일을 자세히 알고 있어서 환하다는 뜻의 표준어이다.
- 계면쩍다: ‘겸연쩍다’와 함께 쓰이는 표준어로, 쑥스럽고 미안하다는 뜻이다.
- 어중되다: 이것도 저것도 아니어서 알맞지 않다는 뜻의 표준어이다.
먼저 실현되는 위치에 따라 ㉠선어말 어미와 어말 어미로
나뉜다. 다음으로 어말 어미는 그 기능에 따라 ㉡연결 어미,
㉢종결 어미, ㉣전성 어미로 나뉜다.
‘드리셨을’을 ‘어간+㉠+㉠+㉡’으로 분석한 것이 옳지 않다. 마지막 ‘-을’은 연결 어미가 아니라 관형사형 전성 어미(㉣)이다.
‘드리셨을’은 ‘드리-(어간)+-시-(주체 높임 선어말)+-었-(과거 선어말)+-을’로, ‘-을’이 뒤의 의존 명사 ‘터(텐데)’를 꾸미므로 어간+㉠+㉠+㉣이 맞다.
- 모시겠지만: ‘모시-+-겠-(선어말)+-지만(연결 어미)’이므로 어간+㉠+㉡이 맞다.
- 오갔기: ‘오가-+-았-(선어말)+-기(명사형 전성 어미)’이므로 어간+㉠+㉣이 맞다.
- 보내셨을걸: ‘보내-+-시-+-었-+-을걸(종결 어미)’이므로 어간+㉠+㉠+㉢이 맞다.
고장 난 전등을 새것으로 갈아 끼웠다.
음식을 가리지 말고 골고루 먹어야 한다.
벽난로에서 장작불이 활활 타고 있다.
모닥불이 지면 한기가 느껴지기 시작한다.
‘입술이 타다’와 ‘장작불이 타다’가 다의어 관계이다.
둘 다 ‘타다’의 한 표제어 안에 묶인 뜻으로, 불이 붙어 타오르는 중심 의미에서 입술이나 입 안이 바싹 마르는 상태로 의미가 확장된 것이다.
- 무를 ‘갈다’와 전등을 ‘갈다’: 문질러 잘게 부수는 뜻과 다른 것으로 바꾸는 뜻은 서로 다른 표제어인 동음이의어이다.
- 안개에 ‘가리다’와 음식을 ‘가리다’: 보이지 않게 막히는 뜻과 골라서 따지는 뜻은 동음이의어이다.
- 경기에서 ‘지다’와 모닥불이 ‘지다’: 승부에서 패하는 뜻과 불이 사그라지는 뜻은 동음이의어이다.
고모장ᄌᆞ 셰살장ᄌᆞ 가로다지 여다지에 암돌져귀 수돌져귀
ᄇᆡ목걸새 ᄯᅮᆨ닥 박고 용(龍) 거북 ᄌᆞ물쇠로 수기수기 ᄎᆞ엿ᄂᆞᆫ듸
병풍(屛風)이라 덜걱 져븐 족자(簇子)ㅣ라 ᄃᆡᄃᆡ글 ᄆᆞᆫ다 네
어ᄂᆡ 틈으로 드러온다
어인지 너 온 날 밤이면 ᄌᆞᆷ 못 드러 ᄒᆞ노라
- 작자 미상, 「한숨아 셰 한숨아」 -
‘의인화한 시적 대상과의 대화를 통해 시상을 전개한다’는 이해가 적절하지 않다.
화자는 ‘한숨’을 의인화해 “네 어ᄂᆡ 틈으로 드러온다”고 묻지만, 한숨의 대답은 없다. 시적 대상에게 일방적으로 말을 건넬 뿐 말을 주고받는 대화 구조는 아니다.
- 부사어 활용: ‘ᄯᅮᆨ닥’, ‘수기수기’, ‘덜걱’, ‘ᄃᆡᄃᆡ글’ 같은 부사어로 문을 꼭꼭 걸어 잠갔는데도 스며드는 한숨의 존재를 부각한다.
- 동일 구절 반복: “네 어ᄂᆡ 틈으로 드러온다”를 되풀이해 한숨에 대한 답답함과 원망을 강조한다.
- 유사한 사물의 열거: 고모장지·세살장지 같은 문과 돌쩌귀·걸쇠·자물쇠 같은 잠금장치를 늘어놓아 한숨을 막으려는 화자의 의지를 드러낸다.
조계사에 있어야지…….” “에이, 대흥사도 대찰(大刹)이에요.”
“그래도 중들의 중앙청은 역시 조계사 아닌가?” “스님들에게
중앙청이 어디 있어요? 그거 싫다고 떠난 사람들인데.”
“그래서 가짜가 많다고…….” “네?” “책은 많이 썼는가?”
“책이라뇨?” “스님들이 책 많이 쓰지 않나, 요즘?” “에이,
지명 스님은 그런 거 안 써요.” “그러면 테레비에는 나와?”
“테레비에도 안 나와요. 지명 스님, 그런 거 할 사람이
아니에요.” “그러면 라디오에는? 요새는 불교방송이라는
라디오 방송도 생겼다는데?” “나대는 스님이 아니라니까요.”
“에이, 그러면 공부 많이 한 스님이 아니야.” “네?”
그는 내 인내를 시험해 보기로 작정했던 모양인가? 이유
없이 따귀를 한 대 맞은 느낌이었다. … (중략) …
나는, 정말이지 가만히 있을 수가 없었다.
“이 세상에는 학생을 가르치는 교수도 있고, 더 잘 가르칠
수 있도록 그런 교수를 가르치는 교수도 있어요. 이 세상에는
중생을 제도하는 스님도 있고 더 잘 제도할 수 있도록 그런
스님을 가르치는 스님도 있어요. 텔레비전 시청자나 라디오
청취자에게 적합한 지식을 가진 사람도 있고, 텔레비전이나
라디오에 나갈 사람을 가르치는 사람도 있어요.” “에이,
그것은 못 나간 사람들이 만들어 낸 변명이야.”
- 이윤기, 「숨은그림찾기1-직선과 곡선」에서 -
‘책’을 쓰는 것을 ‘공부 많이 한 스님’의 조건으로 보는 것은 ‘나’가 아니라 ‘그’의 입장이므로 적절하지 않다.
‘그’가 “책은 많이 썼는가?”, “그러면 공부 많이 한 스님이 아니야”라고 말하자, ‘나’는 “이유 없이 따귀를 한 대 맞은 느낌”을 받고 가르치는 사람을 가르치는 사람도 있다며 반박한다.
- ‘나’에게 조계사와 대흥사는 우열 관계가 아니다: ‘나’는 “대흥사도 대찰이에요”, “스님들에게 중앙청이 어디 있어요?”라고 말한다.
- ‘그’에게 지명 스님은 ‘못 나간 사람들’에 속한다: 책도 안 쓰고 방송에도 안 나오는 지명 스님을 두고 ‘나’가 변호하자 ‘그’는 “못 나간 사람들이 만들어 낸 변명”이라고 한다.
- ‘그’에게 중앙청의 스님이 더 공부를 많이 한 사람이다: ‘그’는 공부를 많이 했다면 “서울 조계사에 있어야지”라며 조계사를 “중들의 중앙청”이라 부른다.
가진 예술가의 작품을 귀족과 같은 상층 사람들이 제한된
장소에서 감상하기만 했다. 그러나 사진기와 같은 새로운
기술의 발명으로 기존의 걸작품이 복제되어 인테리어 소품이나
낭만적인 엽서로 사용되면서 대중도 예술 작품을 공유할 수
있게 되었다. 원작에 버금가는 위작이 만들어지고, 게다가
일상의 생필품처럼 사용되는 작품도 등장하게 되면서는,
대중은 더 이상 예술 작품을 수동적으로 감상하는 데에 머물지
않고 능동적으로 소비하고 실용적으로 사용하게 되었다.
이런 상황의 변화는 예술이 무엇인가를 고민하게 만들었다.
이전까지는 예술 작품이 진본성, 유일성을 가져야 한다고
보았지만 이러한 기술 복제 시대에는 이와 같은 조건이
적용될 수 없었기 때문이다. 또한 공원에 타도록 설치된
그네를 예술 작품이라 하는 것과 같이 일상의 물품 역시
과거와 달리 예술의 범주에 들어갈 수 있게 되었기 때문이다.
‘기술 복제 시대 전에도 귀족은 예술 작품을 실용적으로 사용했다’는 진술이 글과 부합하지 않는다.
글은 과거에 귀족 같은 상층 사람들이 작품을 제한된 장소에서 “감상하기만 했다”고 하며, 실용적 사용은 복제 기술 이후 대중의 변화로 설명한다.
- 복제 기술이 예술을 둘러싼 상황을 바꾸었다: 사진기 같은 기술로 걸작이 복제되며 대중이 예술을 공유하게 되었다고 했다.
- 기술 복제 시대에는 진본성이 필수 조건이 되지 못했다: 진본성·유일성 조건이 “적용될 수 없었기 때문”이라고 했다.
- 인테리어 소품이 기술 복제 시대에는 예술에 포함될 수 있었다: 일상의 물품도 “과거와 달리 예술의 범주에 들어갈 수 있게 되었다”고 했다.
흰색 옷을 입은 6명이 두 개의 농구공을 가지고 패스를
주고받는 동안 고릴라 복장의 사람을 지나가게 하고 그
장면을 동영상으로 촬영했다. 그리고 실험 참가자들에게
이 동영상을 보여 주면서 흰색 옷을 입은 사람들이 몇 번
패스를 주고받았는지 세어 달라고 요청했다. 이에 대해
참가자들은 패스 횟수에 대해서는 각자의 답을 말했는데,
동영상 중간 중간에 출현한 고릴라 복장의 사람에 대해서는
하나같이 보지 못했다고 답했다. 참가자들이 패스 횟수를
세는 데 집중하느라 1분이 채 안 되는 동영상 가운데 9초에
걸쳐 등장하는 고릴라 복장의 사람을 인지하지 못한 것이다.
A는 이 실험을 통해 다음의 결론을 도출했다. (가).
이 실험 결과를 우리의 일상에서도 확인해 볼 수 있다.
오토바이 운전자의 안전을 위해 눈에 잘 띄는 밝은색 옷을
입도록 권하는데, 밝은색 옷의 오토바이 운전자는 시각적으로
더 잘 보이고, 덕분에 더 쉽게 알아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해도 모든 자동차 운전자가 밝은색 옷을 입은
오토바이 운전자를 다 알아보는 것은 아니다. 바라보는
행위는 인지의 (나) 없기 때문이다.
(나): 충분조건일 수는 있어도 필요조건일 수는
(나): 필요조건일 수는 있어도 충분조건일 수는
(나): 충분조건일 수는 있어도 필요조건일 수는
(나): 필요조건일 수는 있어도 충분조건일 수는
(가)에는 ‘인간은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것 위주로 주의를 기울인다’, (나)에는 ‘필요조건일 수는 있어도 충분조건일 수는’이 들어가야 한다.
(가): 참가자들은 패스 횟수를 세는 데 “집중하느라” 고릴라를 인지하지 못했다. 눈에 보였는데도 인지하지 못했으므로, 결론은 시각 자체가 아니라 주의의 선택성에 관한 것이어야 한다.
(나): 밝은색 옷 덕분에 더 잘 보여도 모든 운전자가 알아보는 것은 아니다. 바라보는 것은 인지가 일어나는 데 필요하지만 바라보기만으로 인지가 보장되지는 않으므로, 인지의 필요조건이지 충분조건이 아니다.
- (가)를 ‘인지는 시각과 밀접하다’로 보는 경우: 고릴라가 시야에 있었는데도 인지하지 못한 실험 결과를 설명하지 못한다.
- (나)를 ‘충분조건일 수는 있어도 필요조건일 수는 없다’로 보는 경우: 바라보았는데도 알아보지 못하는 상황과 정반대의 관계가 된다.
繁花壓柔枝 만발한 꽃이 보드라운 가지를 누르네
香經梅雨歇 향기는 장맛비 지나면 옅어지고
影帶麥風欹 그림자는 보리바람 맞으면 흔들리겠지
車馬誰見賞 수레 탄 사람들이 누가 보아 주리
蜂蝶徒相窺 벌과 나비만 기웃거리는구나
自慙生地賤 천한 땅에 태어난 것 부끄러우니
堪恨人棄遺 사람들에게 버림받은 것 어찌 원망하리오
- 최치원, 「촉규화(蜀葵花)」 -
지은 것으로 추정된다. 길가의 촉규화에 자신을 투영하여
출중한 능력에도 원하는 바를 성취할 수 없었던 서글픈
처지를 노래하였다. ㉠이 시에서 “만발한 꽃”은 작가 자신이
지니고 있는 빼어난 능력을 가리킨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능력이 있다고 해서 곧바로 등용될 수 있는 것은 아니었는데,
㉡그에게는 자신의 능력을 알아보고 등용의 기회를 부여해
줄 “수레 탄 사람들”이 필요했다. 뿐만 아니라 ㉢“수레 탄
사람들”과 자신을 이어줄 수 있는 “벌과 나비” 역시 절실했다.
이 작품에서 ㉣“천한 땅”은 시적 대상인 촉규화가 피어난 곳을
의미하기도 하고 작가 자신이 태어난 땅을 의미하기도 한다.
적절하지 않은 것은 ㉢이다. “벌과 나비”는 수레 탄 사람들과 작가를 이어 주는 존재가 아니다.
시에서 “수레 탄 사람들이 누가 보아 주리 / 벌과 나비만 기웃거리는구나”는 정작 알아주어야 할 높은 사람들은 외면하고 하찮은 존재들만 관심을 보인다는 탄식이다. 벌과 나비가 매개자로서 절실했다는 근거는 없다.
- ㉠: 묵정밭 가에 “만발한 꽃”은 출중한 능력을 지닌 작가 자신을 투영한 것으로 볼 수 있다.
- ㉡: “수레 탄 사람들이 누가 보아 주리”에서, 능력을 알아보고 등용해 줄 높은 사람들이 필요함을 드러낸다.
- ㉣: “천한 땅”은 촉규화가 핀 묵정밭 가이자, 당나라에서 이방인인 작가의 출신지를 겹쳐 가리킨다.
나무이다
자기 온몸으로 나무는 나무가 된다
자기 온몸으로 헐벗고 零下 十三度
零下 二十度 地上에
온몸을 뿌리박고 대가리 쳐들고
무방비의 裸木으로 서서
두 손 올리고 벌 받는 자세로 서서
아 벌 받은 몸으로, 벌 받는 목숨으로 起立하여, 그러나
이게 아닌데 이게 아닌데
온 魂으로 애타면서 속으로 몸속으로 불타면서
버티면서 거부하면서 零下에서
零上으로 零上 五度 零上 十三度 地上으로
밀고 간다, 막 밀고 올라 간다
온몸이 으스러지도록
으스러지도록 부르터지면서
터지면서 자기의 뜨거운 혀로 싹을 내밀고
천천히, 서서히, 문득, 푸른 잎이 되고
푸르른 사월 하늘 들이받으면서
나무는 자기의 온몸으로 나무가 된다
아아, 마침내, 끝끝내
꽃 피는 나무는 자기 몸으로
꽃 피는 나무이다
- 황지우, 「겨울-나무로부터 봄-나무에로」 -
‘공감각적 심상을 활용해 시적 대상의 상황을 보여 준다’는 이해가 적절하지 않다.
이 시에는 한 감각을 다른 감각으로 옮겨 표현한 공감각적 심상이 나타나지 않는다. 시는 겨울나무가 고통을 견디고 봄에 꽃 피는 나무가 되는 과정을 그린다.
- 의인화: “대가리 쳐들고”, “두 손 올리고 벌 받는 자세로”, “뜨거운 혀로 싹을 내밀고”처럼 나무를 사람처럼 표현한다.
- 감탄사 활용: “아 벌 받은 몸으로”, “아아, 마침내, 끝끝내”에서 감탄사로 화자의 정서를 드러낸다.
- 시간의 흐름에 따른 변화: “零下 二十度”에서 “零上 十三度”, “푸르른 사월 하늘”로 이어지며 겨울나무가 봄나무로 변하는 과정을 보여 준다.
것을 싫어하는 자들이 이 말을 듣고 제 세상 만난 듯
기뻐하여 앉고 서고 움직이는 예절을 마음에 내키는
대로 한다.
(나) 성인께서도 사람을 가르치실 때 먼저 겉모습부터
단정히 해야만 바야흐로 자신의 마음을 안정시킬 수
있다고 하시었다. 세상에 비스듬히 눕고 기대서서
멋대로 말하고 멋대로 보면서 주경존심(主敬存心)※
할 수 있는 사람은 없다.
(다) 근래 어떤 자가 반관(反觀)※으로 이름을 떨쳐 겉모습을
단정하게 꾸미는 것을 가식이요, 허위라고 한다.
(라) 나도 예전에 이 병에 깊이 걸렸던 터라 늙어서까지
예절을 익히지 못했으니 비록 후회해도 고치기가 어렵다.
(마) 지난번 너를 보니 옷깃을 가지런히 하여 똑바로 앉는
것을 즐기지 않아 장중하고 엄숙한 기색을 조금도 볼 수
없었는데, 이는 내 병통이 한 바퀴 돌아 네가 된 것이다.
- 정약용, 「두 아들에게 부침」에서 -
※ 반관(反觀): 남들이 하는 대로 보지 않고 거꾸로 보거나 반대로 생각하는 것.
가장 자연스러운 순서는 (다)-(가)-(라)-(마)-(나)이다.
(다)에서 겉모습을 단정히 하는 것을 가식이라 하는 ‘반관’의 주장을 소개하고, (가)에서 젊은이들이 “이 말을 듣고” 예절을 멋대로 한다고 이어 간다. (라)의 “이 병”은 (가)의 행태를 가리키고, (마)는 그 병통이 “한 바퀴 돌아 네가 된 것”이라며 아들에게로 옮겨 온다. 끝으로 (나)에서 성인의 가르침을 근거로 겉모습부터 단정히 하라는 결론을 맺는다.
- (가)로 시작하는 배열: (가)의 “이 말”이 가리킬 앞의 내용이 없어 첫머리에 올 수 없다.
- (나)-(라)로 이어지는 배열: (라)의 “이 병”이 (나)의 성인 가르침을 받을 수 없어 지시 관계가 어긋난다.
- (마)로 시작하는 배열: (마)의 “내 병통”이 무엇인지 앞에서 밝혀지지 않아 성립하지 않는다.
여성이 등장한다는 것은 그녀들이 직면한 여러 문제들을
다룰 기회가 마련되었다는 점에서 일단은 긍정적이다.
하지만 ㉠그녀들이 농촌에 정착하는 과정에서 경험하게
되는 다양한 문제들을 단순화할 수 있는 위험성도 내포하고
있다.
이 드라마에는 모문화와 이문화 사이의 차이로 인해
힘겨워하는 여성, 민족적 정체성에 혼란을 겪는 여성, 아이의
출산과 양육 문제로 갈등을 겪는 여성 등이 등장한다. 문제는
이 드라마에서 이러한 갈등의 원인을 제대로 규명하는
것보다는 ㉡부부간의 사랑이나 가족애를 통해 극복하는
낭만적인 해결 방식을 주로 선택한다는 데에 있다.
예를 들어, ○○화에서는 여성 주인공이 아이의 태교 문제로
내적 갈등을 겪다가 결국 자신의 생각을 포기함으로써
그 갈등이 해소된 것처럼 마무리된다. 태교에 대한 문화적
차이가 주된 원인이었지만, 이 드라마에서는 그것에 주목
하기보다 ㉢남편과 갈등을 일으키는 여성 주인공의 모습을
부각하여 사랑과 이해에 기반한 순종과 순응을 결혼이주여성이
갖추어야 할 덕목으로 묘사한 것이다.
이 드라마에서 ㉣이러한 강요된 선택과 해소되지 않은
심적 갈등이 사실대로 재현되지 않음으로써 실질적인 원인은
은폐되고 여성의 일방적인 양보와 희생을 통해 해당 문제들이
성급히 봉합된다. 이는 어디까지나 한국인의 시선으로만
결혼이주여성과 다문화가정을 바라보고 있기 때문이다.
㉢을 “남편의 의견을 따르는 여성 주인공의 모습”으로 고치는 것이 가장 적절하다.
예로 든 회차에서 주인공은 갈등 끝에 “자신의 생각을 포기”하고, 드라마는 이를 “순종과 순응”의 덕목으로 묘사한다고 했다. 따라서 부각되는 것은 갈등을 일으키는 모습이 아니라 남편을 따르는 모습이다.
- ㉠을 ‘탐색할 수 있는 가능성’으로 고치는 것: 앞 문장의 긍정적 평가와 “하지만”으로 대비되는 자리이므로 원래의 ‘단순화할 수 있는 위험성’이 맞다.
- ㉡을 ‘온정적 소통을 통한 구체적인 해결 방식’으로 고치는 것: 글은 원인 규명 없이 사랑으로 덮는 해결을 비판하므로 ‘낭만적인 해결 방식’이 문맥에 맞는다.
- ㉣을 ‘외적 갈등이 여과 없이 노출됨으로써’로 고치는 것: 뒤에서 원인이 “은폐”된다고 했으므로 심적 갈등이 재현되지 않는다는 원래 표현이 맞다.
어떤 관계가 있을까? A는 자율 방범대원들에게 이 일의
자원 동기에 대해 물어보았다. 자기지향적 동기만 말한
사람과 타인지향적 동기만 말한 사람, 그리고 둘 다 말한
사람이 고르게 분포되었다. 그 후 설문에 참여한 사람들이
2개월간 방범 순찰에 참여한 횟수를 살펴보았다. 그 결과
자기지향적 동기를 말한 사람들 모두가 자기지향적 동기를
말하지 않은 사람들보다 순찰 횟수가 더 많은 것으로 나타났다.
그리고 전자 중 타인지향적 동기를 말한 사람들의 순찰 횟수가
그렇지 않은 사람들보다 유의미하게 많은 것으로 나타났다.
A는 이를 토대로 (가) 고 추정하였다.
(가)에는 ‘자기지향적 동기만 가진 사람은 타인지향적 동기만 가진 사람보다 행위의 적극성이 높다’가 들어가야 한다.
자기지향적 동기를 말한 사람(자기만·둘 다)은 모두 그렇지 않은 사람(타인만)보다 순찰이 많았고, 그중 타인지향적 동기도 말한 사람(둘 다)이 더 많았다. 따라서 순찰 횟수는 둘 다>자기만>타인만 순이다.
- 타인지향적 동기를 가진 사람이 자기지향적 동기를 가진 사람보다 적극적이다: 타인지향적 동기만 가진 사람의 순찰 횟수가 가장 적으므로 성립하지 않는다.
- 자기지향적 동기가 부정적 영향을 주기도 한다: 자기지향적 동기를 말한 사람은 모두 순찰이 더 많았으므로 부정적 영향의 근거가 없다.
- 자기지향적 동기가 긍정적일 때 타인지향적 동기는 부정적이다: 둘을 함께 가진 사람이 가장 많이 순찰했으므로 반대이다.
‘우리 엄마’라는 표현을 자주 쓰곤 하는데, 좀 이상하지
않아? ‘우리 동네’라는 표현과 비교하면 무엇이 문제인지
분명하게 알 수 있어. ‘우리 동네’는 화자의 동네이기도
하면서 청자의 동네이기도 한 특정한 하나의 동네를
지칭하잖아. 그런 식이라면 ‘우리 엄마’는 형제가 아닌
화자와 청자가 공유하는 엄마를 지칭하는 이상한 표현이
되는 셈이지. 그러니까 이 경우의 ‘우리 엄마’는 잘못된
어법이고 ‘내 엄마’라고 하는 것이 올바른 어법이라고
할 수 있어.
을: 청자가 사는 동네와 화자가 사는 동네가 다른 경우에도
‘우리 동네’라는 표현을 쓸 수 있어. 물론 이 표현이
의미하는 것은 청자가 사는 동네와 다른, 화자가 사는
동네가 되겠지. 이 경우 ‘우리 동네’라는 표현은 ‘그
표현을 말하는 사람이 사는 동네’ 정도를 의미할 거야.
갑이 문제를 제기한 ‘우리 엄마’의 경우도 마찬가지라고
볼 수 있어.
병: ‘우리 엄마’와 ‘내 엄마’가 같은 뜻을 갖는 것은 아니야.
‘내 동네’라고 하지 않고 ‘우리 동네’라고 하는 것은
동네를 공유하는 공동체가 존재하기 때문이겠지.
마찬가지로 ‘내 엄마’라고 하지 않고 ‘우리 엄마’라고
하는 것은 우리가 늘 가족 공동체 속에서의 엄마를
생각하기 때문일 거야. 즉, 가족 구성원 중의 한 명인
엄마를 공유하는 공동체가 존재한다는 것이지.
ㄱ. 갑은 ‘우리 엄마’라는 표현이 화자와 청자 모두의 엄마를
가리킨다고 보는 입장이다.
ㄴ. 형제가 서로 대화하면서 ‘우리 엄마’라는 표현을 쓸 때
이 표현이 형과 동생 모두의 엄마를 가리킨다는 것은
을의 입장을 약화한다.
ㄷ. 무인도에 혼자 살아온 사람이 그 섬을 ‘우리 마을’이라고
말하면 어색하게 느껴진다는 것은 병의 입장을 약화하지
않는다.
적절한 평가는 ㄱ, ㄷ이다.
ㄱ은 옳다. 갑은 ‘우리 엄마’가 “화자와 청자가 공유하는 엄마를 지칭하는” 표현이라 보고 이를 잘못된 어법이라 한다.
ㄷ도 옳다. 병은 ‘우리’를 쓰는 까닭이 그것을 공유하는 공동체가 있기 때문이라 하므로, 공동체 없이 혼자 사는 사람의 ‘우리 마을’이 어색하다는 사실은 병의 입장을 오히려 뒷받침한다.
- ㄴ은 옳지 않다. 을은 ‘우리 엄마’를 ‘말하는 사람의 엄마’ 정도로 보는데, 형제가 쓸 때 그 엄마는 화자인 형의 엄마이기도 하므로 을의 입장과 충돌하지 않아 약화하지 않는다.
차원으로 진행된다고 주장한다. 그에 따르면 말을 배우기
시작하는 2~3세경에 ‘자기중심적 언어’가 나타났다가
8세경에 학령이 되면서 자기중심적 언어는 소멸하고 ‘사회적
언어’의 단계로 진입한다고 주장한다.
B는 A가 주장한 자기중심적 언어의 존재를 인정하면서도
그것의 성격에 있어서는 다른 견해를 지닌다. A와 달리 그는
자기중심적 언어가 문제에 대한 해결방법을 구안하는 데
중요한 사고의 도구가 된다고 주장한다. 그에 따르면 자기
중심적 언어는 아동이 자기 자신과 대화할 때 나타나는데,
아동은 자신과 대화하는 방식으로 소리 내며 사고한다. 그는
자기중심적 언어가 자연적 존재를 문화적 존재로 변모시키는
기능을 하며, 학령이 되면서 소멸하는 게 아니라 내면화되어
소리 없는 ‘내적 언어’를 구성함으로써 정신기능을 발달시킬
수 있는 원동력이 된다고 본다.
이러한 두 사람의 입장 차이는 자기중심적 언어의 전(前)
단계에 대한 서로 다른 생각에서 기인한 것으로 보인다. A는
출생 이후 약 2세까지의 아이가 언어 이전의 ‘환상적
사고’의 단계에 머물러 있는 것으로 보는데, 여기서 환상적
사고는 자신과 대상 세계를 구분하지 못하는 것을 가리킨다.
자신과 대상 세계를 구분하지 못하면 의사소통 행위가
불가능하므로 A는 이 단계의 아이가 보여주는 타인과의
상호작용을 의사소통 행위가 아니라고 주장한다. 반면, B의
경우 출생 이후 약 2세까지의 상호작용을 의사소통 행위로
판단한다. 그에 따르면 이때의 의사소통 행위는 타자의
규제와 이에 따른 자기규제가 작동하는 대화적 상호작용의
일종으로, 사회적 언어를 통해 수행된다.
B 역시 A와 마찬가지로 아동의 언어와 사고의 발달이
3단계로 진행된다고 보지만, 그 방향에 있어서는 사회적
언어에서 출발하여 자기중심적 언어를 거쳐 내적 언어
순으로 진행된다고 본다.
ㄱ. ‘자기중심적 언어’의 단계 전에 A는 의사소통 행위가
이루어지지 않는 것으로, B는 이루어지는 것으로 본다.
ㄴ. A는 ‘자기중심적 언어’가 학령이 되면 없어지는 것으로
보는 반면, B는 없어지지 않는 것으로 본다.
ㄷ. A와 B는 ‘사회적 언어’의 단계로 진입하는 시기에 대해
견해를 달리한다.
ㄱ, ㄴ, ㄷ이 모두 적절한 평가이다.
- ㄱ: A는 약 2세까지의 ‘환상적 사고’ 단계의 상호작용을 “의사소통 행위가 아니라고” 보고, B는 이를 “의사소통 행위로 판단”한다.
- ㄴ: A는 8세경 학령이 되면 자기중심적 언어가 “소멸”한다고 보고, B는 소멸하지 않고 내면화되어 ‘내적 언어’를 구성한다고 본다.
- ㄷ: A는 학령기인 8세경에 사회적 언어 단계로 진입한다고 보지만, B는 발달이 사회적 언어에서 출발한다고 보아 출생 직후부터 사회적 언어 단계로 본다.
두 사람은 발달 단계가 셋이라는 점은 같지만, A는 개인적 차원에서 사회적 차원으로, B는 사회적 언어→자기중심적 언어→내적 언어 순으로 방향을 달리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