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시 사람들의 생활 방식 체험 활동>
| 유적지 | 유적 개요 | 체험 활동 |
| 연천 전곡리 | 아슐리안 석기 형태를 갖춘 주먹도끼와 박편도끼가 동아시아에서 처음 발견됨 | (가) |
| 서울 암사동 | 한강변에 위치하며, 원형 혹은 귀퉁이를 없앤 사각형의 움집이 다수 발굴됨 | (나) |
| 여주 흔암리 | 구릉 경사지에 반움집 형태의 주거지를 형성하였으며 탄화된 쌀이 발견됨 | (다) |
| 강화 부근리 | 높이 2.6m, 덮개돌의 추정 무게 약 50톤 이상의 탁자식 고인돌을 비롯한 여러 기의 고인돌이 있음 | (라) |
청동기 유적인 여주 흔암리에 대응하는 체험으로는 흙을 빚어 그릇(민무늬 토기) 만들기가 알맞다.
흔암리는 탄화미가 출토된 대표적 청동기 시대 유적으로, 이 시기에는 민무늬 토기를 빚어 사용하였다.
- 돌을 갈아 돌도끼 만들기: 간석기는 신석기 이후의 것으로, 주먹도끼가 나온 전곡리(구석기 유적)에는 뗀석기 제작이 맞다.
- 반달 돌칼로 벼 이삭 따기: 반달 돌칼은 청동기 시대 농기구로, 신석기 유적인 암사동과 맞지 않는다.
- 쇠쟁기로 밭 갈기: 쇠 농기구는 철기 시대 이후의 것으로, 고인돌이 있는 청동기 유적 부근리와 맞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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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동기를 한반도 안에서 직접 주조했음을 보여 주는 유물은 거푸집이다.
청동 도끼 모양이 새겨진 돌 거푸집은 청동기를 들여온 것이 아니라 현지에서 제작했다는 증거여서, 청동기 문화의 독자적 발전을 보여 준다.
- 칼 모양의 화폐인 명도전은 중국 연나라 화폐로, 중국과의 교류를 보여 줄 뿐이다.
- 비파형 동검은 만주와 한반도에 걸친 고조선 문화권의 분포를 짐작하게 하는 유물로, 한반도 안에서 직접 만들었음을 보여 주는 유물은 아니다.
- 네모난 구멍의 둥근 동전인 반량전은 중국 진·한의 화폐로, 중국과의 교역을 보여 준다.
| ◦ 원종 10년에 설치하였는데 사, 부사가 있었다. ◦ 충렬왕 14년에 설치하였고, 27년에도 설치하였다. ◦ 공민왕 원년에 다시 설치하였다. ◦ 우왕 7년에 또 한 번 설치하였고, 14년에도 두었다. |
자료의 기구는 전민변정도감으로, 전민변정사업의 실시와 반발을 탐구할 수 있다.
전민변정도감은 권세가가 빼앗은 토지와 억울하게 노비가 된 사람을 바로잡기 위한 기구로, 원종 때 처음 설치된 뒤 충렬왕·공민왕(신돈)·우왕 때 거듭 설치되었으나 권문세족의 반발로 번번이 성과가 제한되었다.
- 정방: 최우가 설치한 인사 기구로, 자료의 ‘원종 10년’ 첫 설치 기록과 맞지 않는다.
- 정동행성 이문소: 원 간섭기의 기구로, 공민왕의 반원 개혁 때 폐지되었다.
- 관제 격하와 복구: 충렬왕 때 원의 압력으로 격하된 관제를 공민왕이 복구한 것으로, 자료의 반복 설치 기록과 관련이 없다.

나무덧널 위에 돌을 쌓고 흙으로 덮은 무덤은 신라의 돌무지덧널무덤이며, 천마도가 나온 천마총이 이 양식이다.
그림의 '나무덧널', '돌무지', '봉토'가 단서이다. 이 양식은 도굴이 어려워 껴묻거리가 많이 남았지만 벽화를 그릴 공간이 없다.
- 무용도·수렵도·사신도 같은 벽화는 고구려의 굴식 돌방무덤과 관련된다.
- 무령왕릉은 백제의 벽돌무덤으로, 묘지석이 이곳에서 나왔다.
- 백제 건국 세력과 고구려의 관계를 보여 주는 무덤은 서울 석촌동의 돌무지무덤이다.

신라의 조선술이 왜관을 통해 전파되었다는 내용은 옳지 않다.
신라는 배 만드는 기술과 제방 쌓는 기술을 일본에 전해 '한인의 연못'이 생겼다. 왜관은 조선 시대에 일본인의 교역을 위해 설치한 시설로 고대 문화 전파와 시기가 맞지 않는다.
- 고구려의 담징은 종이·먹 제조법을 전하고 호류사 금당 벽화를 그린 것으로 알려져 회화 전파와 연결된다.
- 백제는 오경박사와 왕인 등을 보내 유학을 전하였다.
- 가야의 토기 제작 기술은 일본 스에키 토기에 영향을 주었다.
일본 공사가 주동이 되어 명성황후를 시해하였다.고종이 러시아 공사관으로 처소를 옮겼다.환구단에서 황제 즉위식을 거행하였다.(나) 시기에는 단발령 철회를 논의하는 관리들을 볼 수 있다.
(가)는 일본 공사 주도의 을미사변(1895)부터 아관파천(1896) 전까지, (나)는 아관파천부터 환구단 황제 즉위식(1897) 전까지이다. 아관파천 직후 친러 내각이 단발령을 철회하였다.
- 홍범 14조 반포는 을미사변 이전인 1895년 초의 일이다.
- 제국신문 창간(1898)과 전차 운행(1899)은 대한제국 수립 이후이다.
- 만민공동회에서 상권 수호를 외친 것은 대한제국 수립 이후인 1898년의 일이다.
| <도서 출판 계획> ◦ 제목 : 역사의 라이벌 ◦ 목차별 내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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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만과 김구는 모스크바 3국 외상회의 결정(신탁 통치)에 모두 반대하였으므로, 그 지지 여부를 놓고 대립했다는 내용은 옳지 않다.
두 사람이 대립한 지점은 남한 단독 정부 수립(이승만)과 남북 협상을 통한 통일 정부 수립(김구)의 노선 차이였다.
- 묘청과 김부식: 묘청은 서경 천도·칭제 건원을, 김부식은 개경 중심의 사대 노선을 주장해 대결하였다.
- 김상헌과 최명길: 병자호란 때 김상헌은 척화론, 최명길은 주화론을 펴 청에 대한 외교 노선을 두고 논쟁하였다.
- 김홍집과 김옥균: 온건 개화파와 급진 개화파로서 개화의 속도와 방법을 달리하였다.
| (가)을지문덕은 평양으로 직접 쳐들어오려는 수의 30만 대군을 청천강 부근에서 궤멸시키며 대승을 거두었다. (나)당 태종은 10만 명의 군대를 이끌고 고구려를 침략하였다. 고구려는 요동성을 비롯한 여러 성을 빼앗기고 곤경에 처하였으나, 안시성 전투에서 승리하여 당군을 물리쳤다. |
ㄱ.연개소문이 정변을 일으켜 권력을 장악하였다.
ㄴ.고구려는 요동 지방에 천리장성을 쌓기 시작하였다.
ㄷ.고구려는 말갈 세력과 손잡고 요서를 먼저 공격하였다.
ㄹ.장군 온달이 죽령 이북의 땅을 되찾고 신라를 압박하였다.
(가)는 살수 대첩(612), (나)는 안시성 전투(645)이므로, 그 사이의 사실은 천리장성 축조 시작과 연개소문의 정변이다.
고구려는 당의 침입에 대비해 631년 천리장성을 쌓기 시작했고, 642년 연개소문이 정변으로 권력을 장악한 뒤 당 태종의 침입을 맞았다.
- 천리장성 축조 시작(631): 두 시기 사이로 맞다.
- 연개소문의 정변(642): 두 시기 사이로 맞다.
- 말갈과 손잡고 요서 선공: 영양왕 때(598)의 일로 수 문제의 침입을 부른 사건이어서 살수 대첩보다 앞선다.
- 온달의 죽령 이북 회복 시도: 영양왕 즉위 초(590)의 일로 살수 대첩보다 앞선다.
| ◦감찰하는 관리 자신이 도적질하거나 감찰할 때에 재물을 받고 법을 어긴 자는 도형(徒刑)과 장형(杖刑)으로 논하지 말고 직전(職田)을 회수한 다음 귀향시킨다. ◦승인(僧人)으로 사원의 미곡을 훔친 자는 귀향시켜 호적에 편제한다. ◦관가의 물품을 무역한 자는 귀향형을 제외하고는 법에 따라 단죄한다. |
관리·승려에게 내린 귀향형은 고려의 형벌이므로, 이 시기의 사실은 사위와 외손자에게도 음서 혜택이 주어진 것이다.
고려의 음서는 공신과 5품 이상 관리의 자손에게 적용되었고, 아들뿐 아니라 손자·사위·외손자까지 범위가 넓었다.
- 노론과 소론의 대립과 환국: 조선 후기 숙종 무렵의 붕당 정치에 해당한다.
- 성주·장군을 자칭한 세력: 신라 말 호족의 등장으로, 고려 건국 이전의 일이다.
- 법전에 의한 형벌·민사 규율: 고려는 당률을 참작한 형법 외에 대부분 관습법에 따랐으며, 법전 중심의 통치는 조선의 특징이다.
| (가)후세 임금들은 천명을 받아 임금의 자리에 오른 만큼 그 책임이 지극히 무겁고 지극히 크지만, 자신을 다스리는 도구는 하나도 갖추어지지 않았습니다.
…… 바라옵건데 밝으신 임금께서는 이러한 이치를 깊이 살피시어, 먼저 뜻을 세워 “노력하면 나도 순임금처럼 될 수 있다.”라고 생각하십시오. -성학십도- (나)제왕의 학문은 기질을 바꾸는 것보다 절실한 것이 없고, 제왕의 정치는 정성을 다해 어진 이를 등용하는 것보다 우선하는 것이 없을 것입니다. 기질을 바꾸는 데는 병을 살펴 약을 쓰는 것이 효과를 거두고, 어진 이를 쓰는 데는 상하가 틈이 없는 것이 성과를 얻습니다. -성학집요- |
(가) 이황의 『성학십도』와 (나) 이이의 『성학집요』는 군주가 성리학을 닦아 성군이 되기를 강조한 것으로, 사림의 성장 속에 성리학적 통치 이념이 강화되었음을 보여 준다.
두 책은 사림이 정국을 주도하게 된 선조 때 저술되어 성리학적 군주론을 체계화하였다.
- 사화 촉발: 사화는 이보다 앞선 연산군~명종 때의 일로, 두 책은 사림 집권 이후의 저술이다.
- 반정과 환국 초래: 인조반정·환국은 17세기의 정치 변동으로, 자료의 성학론과 직접 관련이 없다.
- 이기론보다 의리·명분 실천 중시: 이황과 이이는 오히려 이기론을 깊이 탐구해 성리학을 심화시켰다.
| (가) | (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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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존 최고(最古)의 금속 활자본인 직지심체요절은 고려 말에 간행되어 조선 후기의 모습이 아니다.
(가)는 모내기법(이앙법), (나)는 '常平通寶'가 새겨진 상평통보로, 둘 다 보편화된 시기는 조선 후기이다.
- 조선 후기에는 서당 교육이 보급되어 서민 의식이 성장하였다.
- 조선 후기에는 민간인의 광산 개발이 허용되어 덕대 등이 광산 경영으로 부를 쌓았다.
- 대동법 시행으로 특산물 대신 쌀·무명·삼베·동전 등으로 공납을 낼 수 있게 되었다.
| 우리나라가 중국을 섬겨 온 것이 2백여 년이다. 의리로는 군신이며, 은혜로는 부자와 같다. 임진년에 입은 은혜는 만세토록 잊을 수 없다. .... 광해군은 배은망덕하여 천명을 두려워하지 않고, 속으로 다른 뜻을 품고 오랑캐에게 성의를 베풀었다. |
자료는 광해군의 중립 외교를 비판한 인조반정의 명분으로, 명의 ‘임진년 은혜’를 강조하는 숭명 의식은 청을 정벌하자는 북벌 운동과 맥락이 같다.
반정 이후 친명배금 정책이 이어졌고, 호란 이후에는 청에 당한 치욕을 씻고 명의 은혜를 갚자는 북벌론이 효종 때 추진되었다.
- 여진에 강경·회유책 병행: 조선 초기의 대여진 정책으로, 재조지은 의식과 관련이 없다.
- 만동묘 철폐와 서원 정리: 흥선 대원군의 정책으로, 오히려 명을 제사하던 만동묘를 없앤 것이다.
- 통신사 파견: 일본과의 교린 관계에 해당한다.
| (가)시정을 논하여 바르게 이끌고, 모든 관원을 살피며, 풍속을 바로잡고, 원통하고 억울한 일을 밝히며, 건방지고 거짓된 행위를 금하는 등의 일을 맡는다. (나)임금에게 간언하고, 정사의 잘못을 논박하는 직무를 관장한다. (다)궁궐 안에 있는 경적(經籍)을 관리하고, 문서를 처리하며, 왕의 자문에 대비한다. 모두 경연(經筵)을 겸임한다. -경국대전- |
(나)는 간쟁을 맡은 사간원인데, 고려에서 간쟁을 담당한 기관은 삼사가 아니라 중서문하성의 낭사였으므로 옳지 않다.
고려의 삼사는 화폐·곡식의 출납과 회계를 맡은 기관이며, 감찰은 어사대, 간쟁·봉박은 낭사가 맡아 함께 대간을 이루었다.
- (가) 사헌부: 관리 감찰 기구로 발해의 중정대와 기능이 비슷하다.
- (다) 홍문관: 집현전을 계승해 설치되었고 옥당이라 불렸으며 경연을 담당하였다.
- 사헌부·사간원·홍문관(삼사): 언론 기능을 통해 왕권의 독주와 권신의 대두를 견제하였다.
| 왕에게 유교 경전과 사서를 가르쳐 유교의 이상 정치를 실현하려는 것이 목적이었다. 강의는 매일 아침에 실시하는 것(조강 朝講)이 원칙이었으며, 주강(晝講)과 석강(夕講)을 포함하여 세 번 강의하던 시기도 있었다. 교재는 4서 5경과 역사 및 성리학 서적이었으며, 성종 이후에는 홍문관의 관원이 이를 담당하였다. |
자료의 제도는 경연으로, 세종 때에는 집현전 학사들이 경연을 담당하였다.
경연은 성종 이후 홍문관이 맡기 전, 집현전이 설치되어 있던 시기에는 집현전 학사들이 강의를 맡았다.
- 세조 때 활성화: 세조는 집현전을 폐지하고 경연을 사실상 중단하였다.
- 조선 때 처음 도입: 경연은 이미 고려 시대에 시행되었다.
- 전제 왕권 강화 목적: 경연은 신하가 왕에게 유교 정치를 강론하는 제도로, 오히려 왕권을 견제하는 기능을 하였다.
| (가)적선이 바다를 덮어오니 부산 첨사 정발은 마침 절영도에서 사냥을 하다가, 조공하러 오는 왜라 여기고 대비하지 않았는데 미처 진(鎭)에 돌아오기도 전에 적이 이미 성에 올랐다. 이튿날 동래부가 함락되고 부사 송상현이 죽었다. (나)정주 목사 김진이 아뢰기를, “금나라 군대가 이미 선천·정주의 중간에 육박하였으니 장차 얼마 후에 안주에 도착할 것입니다.” 하였다. 임금께서 묻기를, “이들이 명나라 장수 모문룡을 잡아가려고 온 것인가, 아니면 전적으로 우리나라를 침략하기 위하여 온 것인가?” 하니, 장만이 아뢰기를, “듣건대 홍태시란 자가 매번 우리나라를 침략하고자 했다고 합니다.” 하였다. |
(가)는 임진왜란(1592)의 부산·동래 함락, (나)는 후금이 침입한 정묘호란(1627)이므로, 그 사이의 사실은 광해군 정책에 반발한 인조반정(1623)이다.
사료의 ‘금나라 군대’, ‘모문룡’, ‘홍태시’가 정묘호란을 가리키는 단서이며, 인조반정 후의 친명배금 정책이 후금 침입의 배경이 되었다.
- 비변사 임시 설치: 중종 때 왜구·여진에 대비해 임시 기구로 설치한 것으로 임진왜란 이전이다.
- 사화로 인한 사림의 피해: 연산군~명종 때의 일로 임진왜란 이전이다.
- 탕평파 중심의 정국 운영: 영조·정조 때의 일로 정묘호란 이후이다.
| 첫째,사람을 함부로 죽이지 말고 가축을 잡아먹지 말라. (不殺人 不殺物) 둘째,충효를 다하여 세상을 구하고 백성을 편안케 하라. (忠孝雙全 濟世安民) 셋째,일본 오랑캐를 몰아내고 나라의 정치를 바로 잡는다. (逐滅倭夷 澄淸聖道) 넷째,군사를 몰아 서울로 쳐들어가 권신귀족을 모두 제거한다. (驅兵入京 盡滅權貴) -정교,『대한계년사』- |
자료는 동학 농민 운동의 4대 강령이므로, 전주 화약 후 해산하여 집강소를 설치하고 행정·치안을 맡은 사실이 옳다.
농민군은 전주성 점령 후 정부와 전주 화약을 맺고 해산하였으며, 전라도 각 고을에 집강소를 두어 폐정 개혁을 실천하였다.
- 진주에서 시작해 전국 확산: 1862년 임술 농민 봉기에 대한 설명이다.
- 지조법 개혁 요구와 교정청 실시: 지조법 개혁은 갑신정변 정강의 내용이며, 교정청은 정부가 설치했으나 일본의 경복궁 점령으로 개혁을 실현하지 못하였다.
- 우금치 재봉기가 청일 전쟁 유발: 청일 전쟁이 먼저 일어났고, 이후 남접·북접이 연합해 재봉기하여 우금치에서 패하였다.

강화도 조약에는 최혜국 대우 조항이 없으므로 일본에 관한 서술은 옳지 않다.
지도의 '상민 수륙 무역 장정'은 청, '아관파천'은 러시아, '제물포 조약'은 일본, '거문도 사건'은 영국을 가리킨다. 강화도 조약은 치외법권을 인정했지만, 최혜국 대우는 조·미 수호 통상 조약에서 처음 규정되었다.
- 청은 상민 수륙 무역 장정으로 내지 통상권을 얻어 일본 상인과 경쟁하며 압박하였다.
- 러시아는 석탄 저장고를 확보하려고 절영도 조차를 요구하였다.
- 영국은 러시아를 견제하기 위해 일본과 영·일 동맹을 맺었다.
| ㉠ 좌우 합작 7원칙 발표 ㉡ 조선 인민 공화국 수립 선포 ㉢ 모스크바 3국 외상회의 개최 ㉣ UN소총회 결의에 따른 총선거 실시 |
해방 이후의 순서는 조선 인민 공화국 선포 → 모스크바 3국 외상회의 → 좌우 합작 7원칙 → 5·10 총선거이다.
건국 준비 위원회의 조선 인민 공화국 선포가 가장 앞서고, 5·10 총선거가 가장 나중이다.
- 조선 인민 공화국 수립 선포: 1945년 9월, 건국 준비 위원회가 선포하였다.
- 모스크바 3국 외상회의: 1945년 12월, 임시 정부 수립과 신탁 통치를 결정하였다.
- 좌우 합작 7원칙 발표: 1946년 10월, 제1차 미소 공동 위원회 결렬 이후 좌우 합작 위원회가 발표하였다.
- UN 소총회 결의에 따른 총선거: 1948년 5월 10일, 남한 지역에서 실시되었다.
| 1886년 우리나라에 왔다. 을사늑약 사건 후 고종의 밀서를 휴대하고 미국에 가서 국무장관과 대통령을 면담하려 했으나 실현하지 못하였다. 1906년 다시 내한하였으며, 고종에게 헤이그에서 열리는 제2차 만국 평화 회의에 밀사를 보내도록 건의하였다. 그는 이상설 등 헤이그 특사보다 먼저 도착하여 ‘회의시보’에 한국 대표단의 호소문을 싣게 하는 등 한국의 국권 회복을 위해 노력하였다. |
자료의 인물은 헐버트로, 1886년 육영공원의 교사로 초빙되어 왔다.
헐버트는 을사늑약 후 고종의 밀서를 미국에 전하려 했고, 헤이그 특사 파견을 건의하는 등 국권 회복을 도왔다.
- 대한매일신보 발행인: 영국인 베델이다.
- 광혜원 설립 관여: 미국인 선교 의사 알렌이다.
- 최초의 서양인 고문: 개항기 외교 고문으로 초빙된 묄렌도르프이다.
| 급진 개화파는 우정총국 낙성 기념 축하연을 이용하여 정변을 개시하였다. 이후 급진 개화파는 국가 전반의 개혁 정책을 담고 있는 혁신정강 14개조를 공포하였다. |
갑신정변의 14개조 정강에는 문벌 폐지와 인민 평등권 제정, 능력에 따른 인재 등용이 담겨 있었다.
급진 개화파는 우정총국 개국 축하연을 계기로 정변을 일으켜 청에 대한 사대 폐지, 지조법 개혁 등도 정강에 담았다.
- 토지의 평균 분작: 동학 농민군의 폐정 개혁안에 전하는 내용이다.
- 공사 문서에 개국 기원 사용: 갑오개혁 때 청의 연호 대신 시행한 내용이다.
- 이권 조약에 대신과 중추원 의장 합동 날인: 관민 공동회의 헌의 6조 내용이다.
| (가) 쌍방은 다음과 같은 조국 통일 원칙들에 합의를 보았다, 첫째,통일은 외세에 의존하거나 외세의 간섭을 받음이 없이 자주적으로 해결하여야 한다. 둘째,통일은 상대방을 반대하는 무력행사에 의거하지 않고 평화적 방법으로 실현하여야 한다. 셋째,사상과 이념, 제도의 차이를 초월하여 우선 하나의 민족으로서 민족적 대단결을 도모하여야 한다. (나) 1.남과 북은 나라의 통일 문제를 그 주인인 우리 민족끼리 서로 힘을 합쳐 자주적으로 해결해 나가기로 하였다. 2.남과 북은 나라의 통일을 위한 남측의 연합제 안과 북측의 낮은 단계의 연방제 안이 서로 공통성이 있다고 인정하고 앞으로 이 방향에서 통일을 지향시켜 나가기로 하였다. |
(가)는 7·4 남북 공동 성명(1972), (나)는 6·15 남북 공동 선언(2000)이므로, (나)를 남북 기본 합의서라고 한 서술이 옳지 않다.
남북 기본 합의서는 노태우 정부 때인 1991년 채택되었고, (나)의 ‘연합제 안과 낮은 단계의 연방제 안’은 김대중 정부의 6·15 선언을 가리키는 단서이다.
- (가) 직후 긴급조치권이 포함된 개헌: 1972년 10월 유신 헌법이 제정되었다.
- (나) 이후 이산가족 서신 교환: 6·15 선언 이후 이산가족 상봉과 서신 교환이 이루어졌다.
- (가)와 (나) 사이 해로 금강산 관광: 1998년에 시작되어 두 선언 사이에 해당한다.
| 1860년대 | 1870년대 | 1880년대 | 1890년대 | |||
| (가) | ⇒ | (나) | ⇒ | (다) | ⇒ | (라) |
| 통상 반대 운동 | 개항 반대 운동 | 개화 반대 운동 | 항일 의병 운동 |
1880년대 개화 반대 운동으로 이만손이 『조선책략』 유포에 반대해 영남 만인소를 올린 것이 맞다.
위정척사 운동은 통상 반대(1860년대) → 개항 반대(1870년대) → 개화 반대(1880년대) → 항일 의병(1890년대)으로 전개되었다.
- 최익현의 척화주전론: 1860년대 통상 반대는 이항로·기정진의 척화주전론이며, 최익현은 1870년대 왜양일체론으로 개항에 반대하였다.
- 이항로의 미·러 수교 반대 상소: 미국 등과의 수교 반대는 1880년대 개화 반대 운동의 내용이며, 1870년대 개항 반대는 최익현이 주도하였다.
- 신돌석의 유격전: 평민 의병장 신돌석의 활약은 을사의병(1905년 이후) 때이며, 1890년대 을미의병은 유생 의병장이 주도하였다.
| ◦주석 : 김구 ◦ 부주석 : 김규식 ◦ 국무위원 : 이시영, 조성환, 조소앙, … 김원봉, 김성숙 |
‘주석 김구, 부주석 김규식’ 체제는 1944년 개헌 이후의 임시 정부이므로, 이 시기의 사실은 국내 정진군을 통한 국내 진입 작전 추진이다.
김원봉 등 좌파 세력이 국무위원으로 참여한 좌우 연합 정부 아래에서 한국광복군은 미국 OSS와 협력해 국내 진공 작전을 준비하였다.
- 삼균주의 건국 강령 공포: 1941년의 일로, 부주석제 도입 이전이다.
- 조선 의용대 일부의 광복군 편입: 1942년의 일로, 부주석제 도입 이전이다.
- 한인 애국단 조직: 1931년 김구가 침체된 임시 정부를 타개하려 조직한 것이다.
| 1945 1962 1972 1980 1998 | |||||||||
| (가) | (나) | (다) | (라) | ||||||
| 해방 | 제1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 | 유신 헌법 | 5. 18 광주 민주화 운동 | 김대중 정부 출범 | |||||
1949년 제정된 농지 개혁법은 유상 매수·유상 분배 방식이었으므로, 무상 몰수·유상 분배라는 서술이 옳지 않다.
무상 몰수·무상 분배는 북한의 토지 개혁 방식이며, 남한은 3정보 상한을 넘는 농지를 정부가 사들여 농민에게 유상으로 분배하였다.
- (나) 브라운 각서: 1966년 베트남 파병의 대가로 미국의 경제·군사 지원을 약속받았다.
- (다) 중화학 공업화와 수출 100억 달러: 1970년대 유신 체제 아래에서 추진·달성되었다.
- (라) 외환 위기: 1997년 외환 보유고 부족으로 IMF 구제 금융을 받았다.
조선의 음서는 대상이 축소되었고 음서 출신은 고관 승진에 제약이 있었으므로, 문과 합격자보다 고관으로 승진할 수 있었다는 서술이 옳지 않다.
조선은 문과를 중시하여 고위 관직에 오르려면 사실상 문과 합격이 필요하였다.
- 상피제: 친인척이 같은 관서나 연고지에 근무하지 못하게 하여 권력 집중과 부정을 막았다.
- 재가녀 자손·서얼의 문과 응시 제한: 경국대전에 따라 문과 응시가 금지되었다.
- 취재: 과거를 거치지 않고 간단한 시험으로 하급 실무직을 뽑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