ㄴ. 반달돌칼을 사용하여 농작물을 수확하였다.
ㄷ. 뼈바늘을 사용하여 옷이나 그물을 만들었다.
ㄹ. 벼농사를 널리 짓게 되었다.
신석기시대의 설명은 갈돌·갈판으로 곡물을 간 것과 뼈바늘로 옷·그물을 만든 것이다.
신석기시대에는 조·피 등을 재배하는 초기 농경이 시작되어 갈돌과 갈판으로 곡물을 가공했고, 가락바퀴와 뼈바늘로 실을 뽑아 옷이나 그물을 만들었다.
- 반달돌칼로 농작물을 수확한 것은 청동기시대의 특징이다.
- 벼농사는 청동기시대에 일부 저습지에서 시작되었으며, 신석기시대의 농경은 조·피 등 잡곡 재배가 중심이었다.
- 『삼국지』 위서 동이전 -
흉년이 들면 왕에게 책임을 물었다는 풍속은 부여에 관한 기록이며, 부여에는 마가·우가 등 가축 이름을 딴 관리가 있었다.
부여는 왕 아래 마가·우가·저가·구가의 여러 가(加)가 사출도를 다스리는 연맹 왕국으로, 왕권이 약해 자연재해의 책임을 왕에게 묻기도 하였다.
- 읍락의 우두머리가 스스로 삼로라 칭한 것은 옥저·동예의 군장에 관한 기록이다.
- 질병으로 사람이 죽으면 살던 집을 버리고 새집을 지은 것은 동예의 풍속이다.
- 다른 읍락의 경계를 침범하면 노비·소·말로 배상하게 한 책화도 동예의 풍속이다.
‘무예’라는 이름과 ‘고구려의 옛 터전을 회복하고 부여의 유속을 가졌다’는 표현은 발해 무왕이 일본에 보낸 국서이므로, 집사부 시중이 행정을 총괄한 것은 발해가 아닌 신라의 제도이다.
집사부는 신라의 최고 행정 기구로 장관인 시중(중시)이 왕명을 받들어 기밀 사무를 총괄했다. 발해의 중앙 행정은 정당성의 대내상이 총괄하였다.
- 무왕 때 장문휴가 수군을 이끌고 당의 등주를 공격하였다.
- 발해는 지방 행정 구역을 5경 15부 62주로 정비하였다.
- 발해는 ‘인안’ 등 독자적 연호를 쓰고, 국왕을 ‘황상’이라 부르기도 하였다.
이차돈의 순교로 불교를 공인한 국왕은 신라 법흥왕이며, 국호를 신라로 정하고 우산국을 정벌한 것은 지증왕의 업적이다.
지증왕은 국호를 ‘신라’로, 군주의 칭호를 ‘왕’으로 고쳤고, 이사부를 보내 우산국을 복속하였다.
- 법흥왕은 율령을 반포하고 귀족 회의를 주관하는 상대등을 설치하였다.
- 법흥왕은 병부를 설치해 군사권을 장악하고 금관가야를 병합하였다.
- 법흥왕은 ‘건원’이라는 독자적 연호를 사용하였다.
태학 설립 → (가) → 평양 천도
태학 설립(소수림왕)과 평양 천도(장수왕) 사이에 해당하는 사건은 광개토대왕이 후연을 격파하고 요동을 차지한 것이다.
태학은 소수림왕 때인 372년에 설립되었고, 평양 천도는 장수왕 때인 427년이다. 광개토대왕은 그 사이 시기에 재위하며 후연을 공격해 요동 지역을 확보하였다.
- 동옥저 정벌은 태조왕 때의 일로 태학 설립보다 앞선다.
- 전연의 침입으로 도성이 함락된 것은 고국원왕 때로 태학 설립보다 앞선다.
- 한성을 함락하고 개로왕을 살해한 것은 장수왕 때인 475년으로 평양 천도 이후이다.
김부(경순왕)를 경주의 사심관으로 임명한 국왕은 고려 태조 왕건이며, 개경을 ‘황도’라 부른 것은 광종 때의 일이다.
광종은 ‘광덕’·‘준풍’ 등 독자적 연호를 쓰고 개경을 황도, 서경을 서도라 칭하며 왕권을 강화하였다.
- 태조는 지방 호족의 자제를 개경에 머물게 하는 기인제도를 시행하였다.
- 태조는 거란에 멸망한 발해의 유민을 받아들였다.
- 태조는 후대 왕들에게 정치의 지침으로 훈요10조를 남겼다.
서 희: 우리는 고구려를 계승하여 나라 이름을 고려라 하였다. 땅의 경계를 논한다면 그대 나라의 동경도 모두 우리 땅이다.
| 고려 건국 | (가) | 귀주대첩 | (나) | 무신정변 | (다) | 개경 환도 | (라) | 위화도 회군 |
소손녕과 서희의 대화는 거란의 1차 침입 때 벌어진 서희의 외교 담판으로, 고려 건국과 귀주대첩 사이인 (가) 시기에 해당한다.
'소손녕'과 '서희', 그리고 '고구려를 계승하여 나라 이름을 고려라 하였다'는 단서로 성종 때(993) 담판임을 알 수 있다. 서희는 이 담판으로 강동 6주를 확보하였고, 이는 고려 건국(918) 이후이자 강감찬의 귀주대첩(1019) 이전이다.
- (나) 귀주대첩~무신정변(1170): 윤관의 별무반 편성과 동북 9성 축조, 이자겸의 난, 묘청의 서경 천도 운동 등이 있었던 시기이다.
- (다) 무신정변~개경 환도(1270): 무신 집권기로, 몽골의 침입과 강화도 천도가 이어진 시기이다.
- (라) 개경 환도~위화도 회군(1388): 원 간섭기와 공민왕의 반원 개혁이 전개된 시기이다.
훈민정음을 창제한 국왕은 세종이며, 세종 때 『삼강행실도』가 편찬되었다.
『삼강행실도』는 충신·효자·열녀의 행적을 그림과 글로 엮어 유교 윤리를 보급하려 한 윤리서이다.
- 『경국대전』은 세조 때 편찬이 시작되어 성종 때 완성·반포되었다.
- 『국조오례의』는 성종 때 완성된 국가 의례서이다.
- 『동국여지승람』은 성종 때 편찬된 지리지이다.
수선사 결사를 주도하고 돈오점수를 내세운 인물은 보조국사 지눌이며, 그는 정혜쌍수를 실천 수행 방법으로 제시하였다.
지눌은 선종을 중심으로 교종을 포용하는 선교 일치를 추구하며, 선정과 지혜를 함께 닦는 정혜쌍수를 강조하였다.
- 천태종을 창시한 인물은 대각국사 의천이다.
- 원으로부터 임제종을 도입한 인물은 고려 말의 보우이다.
- 교종의 입장에서 선종을 통합하려 한 인물도 의천이다.
성균관 앞에 탕평비를 세운 국왕은 영조이며, 영조는 균역법을 실시하였다.
균역법은 군포 부담을 2필에서 1필로 줄이고, 부족분은 결작·어염세·선무군관포 등으로 보충한 제도이다.
- 수원 화성 건설은 정조의 정책이다.
- 초계문신제 시행도 정조의 정책이다.
- 『대전회통』은 고종 즉위 초 흥선대원군 집권기에 편찬되었다.
『성학십도』를 지어 올린 인물은 이황이며, 그의 학문은 유성룡 등에게 이어져 영남학파를 형성하였다.
이황은 이(理)의 능동성을 강조하는 주리론을 체계화하였고, 그 학통은 경상도 지역을 중심으로 계승되었다.
- 한전론으로 토지 소유의 균등을 꾀한 인물은 실학자 이익이다.
- 김장생 등에게 이어져 기호학파를 이룬 것은 이이의 학문이다.
- 여전제로 마을 단위 공동 소유·경작을 주장한 인물은 정약용이다.
제4조 한국 고등관리의 임면(任免)은 통감의 동의를 받아 이를 집행할 것.
제5조 한국 정부는 통감이 추천한 일본인을 한국 관리로 임명할 것.
통감의 지도와 일본인 차관 임명을 규정한 조약은 1907년의 한일신협약(정미7조약)이며, 고종의 강제 퇴위는 이 조약 체결 직전의 일이다.
헤이그 특사 파견을 구실로 일제가 고종을 강제 퇴위시킨 직후 한일신협약이 체결되었으므로, 조약 이후의 사실이 아니다.
- 대한제국 군대는 한일신협약의 부속 밀약에 따라 조약 체결 이후 해산되었다.
- 안중근이 하얼빈에서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한 것은 1909년이다.
- 일제가 호남 의병을 진압한 이른바 ‘남한 대토벌 작전’도 1909년에 전개되었다.
제37관조선국에서 가뭄과 홍수, 전쟁 등으로 인하여 국내에 양식이 결핍할 것을 우려하여 일시 쌀 수출을 금지하려고 할 때에는 1개월 전에 지방관이 일본 영사관에게 통지하여 미리 그 기간을 항구에 있는 일본 상인들에게 전달하여 일률적으로 준수하는 데 편리하게 한다.
관세 납부와 방곡령 사전 통지를 규정한 조약은 1883년의 개정 조일통상장정이며, 이 조약에는 최혜국 대우 조항이 포함되었다.
이 조약으로 관세 부과가 이루어지고 방곡령 선포 시 1개월 전 통보가 규정되었으며, 일본도 최혜국 대우를 인정받았다.
- 갑신정변의 영향으로 체결된 조약은 일본과의 한성 조약이다.
- 일본 경비병의 공사관 주둔을 명시한 조약은 임오군란 후의 제물포 조약이다.
- 부산 외 두 곳의 개항을 가져온 조약은 강화도 조약이다.
ㄴ. 상하이에서 한인 애국단을 조직하였다.
ㄷ. 조선 의용대를 창설하여 항일 무장 투쟁을 전개하였다.
ㄹ. 조선 혁명군을 지휘하여 영릉가 전투를 승리로 이끌었다.
‘나의 소원’의 일부인 이 글을 쓴 ‘내’는 김구로, 대한민국 임시정부 주석을 지냈고 상하이에서 한인 애국단을 조직하였다.
김구는 임시정부의 침체를 타개하려 한인 애국단을 조직해 이봉창·윤봉길 의거를 이끌었고, 충칭 시기에 임시정부 주석이 되었다.
- 조선 의용대를 창설한 인물은 김원봉이다.
- 조선 혁명군을 지휘해 영릉가 전투에서 승리한 인물은 양세봉이다.
제시된 선언은 기미독립선언서로 3·1 운동을 가리키며, 이 운동 이후 일제는 이른바 ‘문화 통치’로 통치 방식을 바꾸었다.
3·1 운동으로 무단 통치의 한계가 드러나자 일제는 헌병 경찰제를 보통 경찰제로 바꾸는 등 기만적인 문화 통치를 내세웠다.
- 형평 운동은 1923년에 시작되어 3·1 운동과 연도가 다르다.
- 신간회가 진상 조사단을 파견한 것은 광주 학생 항일 운동 때이다.
- 준비 과정에서 민족주의 세력과 사회주의 세력이 연대한 것은 6·10 만세 운동이다.
ㄴ. 남한산성
ㄷ. 석촌동 고분군
ㄹ. 가야 고분군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된 것은 남한산성과 가야 고분군이다.
남한산성은 2014년에, 가야 고분군은 2023년에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었다.
- 경복궁은 세계문화유산이 아니며, 조선 궁궐 중에서는 창덕궁이 등재되었다.
- 석촌동 고분군은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지 않았으며, 백제역사유적지구는 공주·부여·익산의 유적으로 구성된다.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조직한 (가)는 한국광복군이며, 쌍성보 전투에서 중국군과 연합해 승리한 것은 지청천의 한국 독립군이다.
한국 독립군은 1930년대 초 북만주에서 중국 호로군과 연합하여 쌍성보 전투 등에서 승리하였다.
- 한국광복군에는 김원봉이 이끌던 조선 의용대 일부가 합류해 군사력이 강화되었다.
- 한국광복군은 충칭에서 중국 국민당 정부의 지원을 받아 창설되었다.
- 한국광복군은 영국군의 요청으로 인도·미얀마 전선에 대원을 파견하였다.
제4조 상호적 합의에 의하여 미합중국의 육군, 해군, 공군을 대한민국의 영토 내와 그 부근에 배치하는 권리를 대한민국은 이를 허가하고 미합중국은 이를 수락한다.
상호 협의와 미군 배치를 규정한 조약은 1953년의 한미 상호 방위 조약이며, 그 이후의 일은 베트남 파병이다.
한미 상호 방위 조약은 정전협정 체결 뒤인 1953년 10월에 조인되었고, 한국군 전투 부대의 베트남 파견은 1960년대 박정희 정부 때이다.
- 판문점 정전협정은 1953년 7월로 조약 체결보다 앞선다.
- 이승만 대통령의 반공 포로 석방은 1953년 6월로 정전협정보다도 앞선다.
- 맥아더의 인천 상륙 작전은 6·25 전쟁 초기인 1950년 9월이다.
제10조 산림, 토지, 전답, 가옥은 (가) 인(人) 이외에는 소유주가 될 수 없을 것임. 단, 각 개항장 내에서는 이러한 제한이 없을 것임.
지계아문을 설치해 지계를 발급한 (가)는 대한제국이며, 교육 입국 조서는 대한제국 수립 이전 갑오개혁 시기에 반포되었다.
교육 입국 조서는 1895년 고종이 반포한 것으로, 1897년 대한제국 선포보다 앞선다.
- 대한제국은 ‘광무’라는 연호를 사용하였다.
- 대한제국은 구본신참의 원칙 아래 광무개혁을 추진하였다.
- 대한제국 시기 한성전기회사가 서대문과 청량리 사이에 전차를 부설하였다.
(나) 양헌수의 부대가 정족산성에서 프랑스군을 물리쳤다.
(다) 독일인 오페르트가 남연군의 묘를 도굴하려다 실패하였다.
(라) 미국 상선 제너럴셔먼호가 평양 부근까지 들어와 통상을 요구하였다.
시기 순서는 제너럴셔먼호 사건 → 정족산성 전투 → 오페르트 도굴 사건 → 광성보 전투이다.
각 사건의 연도는 다음과 같다.
- 제너럴셔먼호가 평양까지 들어와 통상을 요구한 것은 1866년 7월이다.
- 양헌수 부대가 정족산성에서 프랑스군을 물리친 것은 같은 해 병인양요 때이다.
- 오페르트의 남연군 묘 도굴 시도는 1868년이다.
- 어재연 부대가 광성보에서 미군에 패한 것은 1871년 신미양요 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