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석기시대에는 농경과 목축이 시작되어 정착 생활을 하게 되었다.
신석기인은 강가·해안에 움집을 짓고 간석기와 빗살무늬 토기를 사용하며 조·피 등을 재배하였다.
- 미송리식 토기를 사용한 것은 청동기시대이다.
- 동굴과 바위 그늘에 살며 이동 생활을 한 것은 구석기시대이다.
- 연천 전곡리와 공주 석장리는 대표적인 구석기 유적이다.
진흥왕과 연합하여 한때 한강 유역을 회복했으나 바로 그
땅을 신라에 빼앗겼다. 이에 왕은 신라를 공격했으나 관산성
전투에서 패하여 목숨을 잃었다.
국호를 남부여로 바꾸고 관산성 전투에서 전사한 왕은 백제 성왕이며, 그는 사비로 천도하였다.
성왕은 웅진에서 사비로 도읍을 옮기고 국호를 남부여로 고쳐 중흥을 꾀하였으나, 진흥왕에게 한강 유역을 빼앗긴 뒤 관산성에서 전사하였다.
- 마한의 목지국을 병합한 것은 근초고왕 때의 일로 본다.
- 동진에서 온 마라난타를 통해 불교를 받아들인 것은 침류왕 때이다.
- 고구려 평양성을 공격해 고국원왕을 전사시킨 것은 근초고왕이다.
계기로 조선학 운동을 전개하였다. …(중략)… 이들은 그
가운데서도 (가) 을/를 실학을 집대성한 인물로 주목하여
그의 저서를 모아 『여유당전서』를 완간하였다.
『여유당전서』를 남긴 실학의 집대성자는 정약용이다.
1930년대 안재홍·정인보 등은 정약용 서거 99주년을 계기로 조선학 운동을 펼치며 그의 저서를 모아 『여유당전서』를 간행하였다.
- 김정호는 「대동여지도」를 만든 지리학자이다.
- 박지원은 『열하일기』를 쓴 중상학파 실학자이다.
- 박제가는 『북학의』를 저술해 소비와 수레·선박 이용을 강조하였다.
음양가들이 말하는 대화세입니다. 만약 궁궐을 짓고 옮기시면
천하를 다스릴 수 있습니다. 금이 예물을 가져와서 스스로 항복할
것이며, 주변의 36국이 모두 신하가 될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서경 천도를 건의한 ‘그’는 묘청이며, 그는 국호를 ‘대위’, 연호를 ‘천개’라 하고 난을 일으켰다.
사료의 ‘서경 임원역’, ‘대화세’, ‘금이 스스로 항복’ 등은 묘청의 서경 천도 운동과 칭제건원·금국 정벌 주장을 보여 준다.
- 『삼국사기』를 편찬한 인물은 묘청의 난을 진압한 김부식이다.
- 봉사 10조를 올린 인물은 무신 집권자 최충헌이다.
- 고구려 계승 의식을 담은 「동명왕편」은 이규보가 지었다.
…(중략)… 의정부는 오직 사형수를 심판하는 일만 하게 되므로
재상을 임명한 뜻에 어긋난다. 6조는 모든 업무를 먼저 의정부에
보고하고, 의정부의 협의를 거쳐 왕에게 보고하여 명령을 받고
그 내용을 다시 6조에 내려보내 시행하도록 하라.
6조 직계제를 거두고 의정부를 거쳐 보고하게 한 것은 세종의 의정부 서사제이므로, 「혼일강리역대국도지도」 제작은 세종 대의 사실이 아니다.
「혼일강리역대국도지도」는 태종 때 제작된 현존 동양 최고(最古)의 세계 지도이다.
- 『칠정산』은 세종 때 한양을 기준으로 만든 역법서이다.
- 『농사직설』은 세종 때 우리 풍토에 맞는 농법을 정리한 농서이다.
- 『향약집성방』은 세종 때 우리 약재와 처방을 정리한 의서이다.
(나) 고종이 홍범 14조를 반포하였다.
(다) 지계가 일부 지역에서 발급되었다.
(라) 군국기무처 주도로 개혁이 추진되었다.
시기순은 군국기무처 개혁 → 홍범 14조 반포 → 종두법 시행 → 지계 발급이다.
1894년 군국기무처 주도의 제1차 갑오개혁 뒤, 제2차 갑오개혁 때 고종이 홍범 14조를 반포하였다. 이어 을미개혁 때 종두법이 시행되었고, 지계는 대한제국의 광무개혁 양전·지계 사업에서 발급되었다.
- 홍범 14조를 맨 앞에 둔 배열은 군국기무처 개혁이 그보다 앞선다는 점에서 틀렸다.
- 종두법 시행을 홍범 14조보다 앞에 둔 배열은 을미개혁이 제2차 갑오개혁 뒤라는 점에서 틀렸다.
(가) 관제를 반포하였다. 민선과 관선, 절반씩 구성되는
(가) 은/는 근대적인 상원 의회를 지향한 기구였다.
○ 일제는 한국인의 정치 참여를 선전할 목적으로 친일 인사들로
구성된 (가) (이)라는 조선 총독부 자문 기관을 설치
하였으나, 아무런 실권이 없는 형식적인 기구에 불과하였다.
(가)는 중추원이다.
독립 협회의 헌의 6조 채택 후 관선·민선 의관으로 구성하는 중추원 관제가 반포되었고, 일제 강점기에는 조선 총독부의 형식적 자문 기구로 중추원이 설치되었다.
- 교정청은 1894년 조선 정부가 자주적 개혁을 위해 설치한 기구이다.
- 집강소는 전주 화약 이후 동학 농민군이 전라도 각지에 설치한 자치 기구이다.
- 원수부는 광무개혁 때 황제가 군대를 직접 통솔하려고 설치한 기구이다.
…(중략)… 사람이 죽으면 시체는 임시로 매장하여 가죽과 살을
모두 썩게 한 후, 뼈만 추려 곽 속에 안치한다. 온 집 식구의
유골을 모두 하나의 곽 속에 넣어 두며, 죽은 사람의 숫자만큼
나무를 깎아 살아 있을 때와 같은 모습으로 만든다.
‘개마대산 동쪽’, 가족 공동 무덤 풍습으로 보아 ‘이 나라’는 옥저이며, 지배자를 읍군·삼로라고 불렀다.
옥저는 왕이 없이 읍군·삼로 등 군장이 읍락을 다스렸고, 뼈만 추려 가족 공동 목곽에 안치하는 장례 풍습과 민며느리제가 있었다.
- 신성 지역인 소도는 삼한에 있었다.
- 읍락의 경계를 침범하면 배상하게 한 책화는 동예의 풍습이다.
- 여러 가(加)가 사출도를 나누어 다스린 나라는 부여이다.
(가)는 소수림왕과 장수왕의 평양 천도 사이 시기로, 이 시기 광개토 대왕은 동쪽으로 동부여를 정복하였다.
율령 반포·불교 공인은 소수림왕(4세기 후반), 평양 천도는 장수왕 때(427)이며, 광개토 대왕은 그 사이에 재위하며 동부여를 복속시켰다.
- 진대법은 고국천왕 때 실시되어 (가)보다 앞선다.
- 전연의 침입으로 국내성·환도성이 함락된 것은 고국원왕 때로 (가)보다 앞선다.
- 한성을 함락하고 개로왕을 죽인 것은 평양 천도 이후 장수왕 때의 일이다.
(나) 김유신이 지휘하는 신라군이 황산벌에서 계백의 결사대를
격파하였다.
(다) 신라가 보덕국을 세우고, 안승을 왕으로 임명하였다.
(라) 나당 연합군이 평양성을 포위하자 보장왕이 항복하였다.
시기순은 황산벌 전투 → 백강 전투 → 평양성 함락 → 보덕국 수립이다.
황산벌 전투(660)로 백제가 멸망한 뒤 백제 부흥군과 왜의 연합군이 백강 전투(663)에서 패하였다. 이어 평양성이 함락되어 고구려가 멸망(668)하였고, 신라는 고구려 유민 안승을 왕으로 삼아 보덕국을 세웠다.
- 백강 전투를 맨 앞에 둔 배열은 황산벌 전투가 먼저라는 점에서 틀렸다.
- 보덕국 수립을 평양성 함락보다 앞에 둔 배열은 고구려 멸망 뒤에 유민을 포섭했다는 점에서 틀렸다.
○ (가) 에서는 몰락 양반 유계춘을 중심으로 경상 우병사
백낙신의 수탈에 항거하는 농민 봉기가 일어났다.
김시민의 대첩과 유계춘의 봉기가 일어난 (가)는 진주이며, 이곳에서 처음으로 조선 형평사가 조직되었다.
진주는 임진왜란 때 진주 대첩, 1862년 임술 농민 봉기(진주 농민 봉기)의 무대였고, 1923년 백정 차별 철폐를 내건 형평 운동이 시작된 곳이다.
- 최초의 근대 학교인 원산 학사는 원산에 세워졌다.
- 제너럴셔먼호 사건은 평양 대동강에서 일어났다.
- 대한민국 임시 정부는 중국 상하이에서 수립되었다.
화폐만큼 중요한 것이 없다. …(중략)… 화폐를 주조하는 법을
제정하니, 이에 따라 주조한 화폐 15,000관을 재추와 문무 양반
및 군인에게 나누어 주어 화폐 사용의 시작점으로 삼으라.”고
하였다.
주전도감을 두고 화폐를 주조해 나누어 준 ‘왕’은 고려 숙종이며, 지폐인 저화는 그 시기에 만든 것이 아니다.
저화는 고려 말 공양왕 때 처음 발행되었고, 조선 태종 때 다시 발행되었다.
- 숙종 때 의천의 건의로 주전도감이 설치되어 화폐 주조가 추진되었다.
- 당시 동전은 널리 쓰이지 못하고 주로 주점·다점 등에서 유통되었다.
- 숙종 때 해동통보 등의 동전과 은병인 활구가 만들어졌다.
(가)는 임진왜란 중(1592~1598)이며, 이 시기에 훈련도감이 설치되었다.
선조의 의주 피란은 1592년, 일본군 철수는 1598년이다. 훈련도감은 1593년 유성룡의 건의로 설치되어 삼수병을 양성하였다.
- 회답겸쇄환사 파견은 전쟁 후 일본과 국교를 재개하는 과정에서 이루어졌다.
- 기유약조는 전쟁 후인 광해군 때 체결되었다.
- 2군 6위는 고려의 중앙군 조직이다.
저술하였다.
유형원의 사상을 계승하고 『곽우록』을 쓴 ‘그’는 이익으로, 영업전 매매를 금지하는 한전론을 주장하였다.
이익은 『반계수록』을 쓴 유형원의 학통을 이어 성호학파를 이루었고, 생활에 필요한 최소한의 토지를 영업전으로 정해 매매를 금지하자고 하였다.
- 여전제를 주장했다가 정전제로 바꾼 인물은 정약용이다.
- 『우서』를 지어 사농공상의 직업적 평등을 주장한 인물은 유수원이다.
- 신분에 따라 토지를 차등 분배하는 균전론은 유형원의 주장이다.
공물이 관청의 방납인에 의해 저지되어, 한 물건의 값이 몇 배
혹은 수십 배까지 올라 그 폐해가 극심하고, 특히 경기 지방이
그러합니다. …(중략)… 본청은 그때의 시세를 보아 방납인에게
쌀을 지급하여 물건을 구입하게 하십시오.”라고 하니 왕이 이에
따랐다. 이때 왕의 교지 중에 선혜라는 말이 있어 이를 이름으로
삼았다.
‘이원익’, ‘선혜’로 보아 자료는 대동법이며, 결작미 부과는 대동법이 아니라 균역법의 내용이다.
균역법은 군포를 1필로 줄인 부족분을 메우려고 지주에게 결작을 부과하였다.
- 대동법은 광해군 때 경기도에서 먼저 시행된 뒤 점차 전국으로 확대되었다.
- 정부는 공인에게 공가를 지급해 관청 수요품을 조달하게 하였다.
- 토산물 대신 토지 결수에 따라 쌀·삼베·무명·동전 등을 내게 하였다.
(나) 현종이 거란의 침략 때 나주로 피난하였다.
(다) 강감찬의 고려군이 귀주에서 거란군을 대파하였다.
(라) 압록강 하구에서 도련포까지 천리장성을 완성하였다.
시기순은 현종의 나주 피난 → 귀주 대첩 → 개경 나성 완성 → 천리장성 완성이다.
거란의 2차 침입 때 현종이 나주로 피난하였고, 3차 침입 때 강감찬이 귀주에서 대승하였다. 이후 방비를 위해 개경에 나성을 쌓고, 이어 압록강 하구에서 도련포까지 천리장성을 완성하였다.
- 천리장성 완성을 맨 앞에 둔 배열은 거란 전쟁이 끝난 뒤 축조되었다는 점에서 틀렸다.
- 나성 완성을 귀주 대첩보다 앞에 둔 배열은 나성이 전쟁 후에 완성되었다는 점에서 틀렸다.
준할 수 있는 것은 1개당 2전 5리의 가격으로 새 화폐로
교환한다. 전항에 합당하지 않은 부정 백동화는 1개당
1전의 가격으로 정부에서 매수하되, …(중략)… 단,
형태나 품질이 조악하여 화폐로 인정할 수 없는 것은
매수하지 않는다.
백동화를 등급별로 교환·매수한 법령은 1905년 화폐 정리 사업이며, 그 이후의 사실은 동양 척식 주식회사 설립(1908)이다.
화폐 정리 사업은 탁지부 고문 메가타가 주도하여 일본 제일은행권 중심으로 화폐를 정리하였고, 동양 척식 주식회사는 그 뒤 토지 수탈을 위해 세워졌다.
- 혜상공국은 1880년대 보부상 보호를 위해 설치되었다.
- 황국 중앙 총상회는 1898년 시전 상인들이 조직하였다.
- 조·일 통상 장정은 1883년에 체결되었다.
있어서는 한국어 신문 중에 발군입니다. 그런데 이 신문 기사는
궁중을 출입하는 소위 잡배들의 비밀 운동 자료가 됨으로써
그 해악이 큰 형편입니다.
영국인이 발행한 ‘이 신문’은 대한매일신보이며, 국채 보상 운동의 확산에 기여하였다.
대한매일신보는 영국인 베델과 양기탁이 창간하여 일제의 검열을 피해 항일 논조를 펼쳤고, 국채 보상 운동을 적극 보도·지원하였다.
- 박문국에서 간행된 신문은 한성순보이다.
- 치안 유지법은 1925년 제정되어 대한매일신보 발행 시기와 맞지 않는다.
- 브나로드 운동은 1930년대 동아일보가 전개하였다.
따라 태형에 처할 수 있다.
제11조 태형은 감옥 또는 즉결 관서에서 비밀리에 집행한다.
태형을 규정한 법령은 조선 태형령으로 1910년대 무단 통치기에 시행되었으며, 이 시기에는 회사령에 따라 회사 설립에 총독의 허가가 필요하였다.
조선 태형령은 1912년 제정되어 3·1 운동 뒤 문화 통치로 바뀌며 1920년에 폐지되었고, 회사령 역시 1920년 신고제로 바뀌었다.
- 원산 총파업은 1929년에 일어났다.
- 경성 제국 대학은 1920년대 민립 대학 설립 운동에 대응해 세워졌다.
- 제2차 조선 교육령은 1922년에 발표되었다.
독립군을 공격하였다.
(나) 일제는 만주 군벌과 미쓰야 협정을 맺고 독립군을 탄압
하였다.
훈춘 사건(1920)과 미쓰야 협정(1925) 사이에 일어난 사건은 자유시 참변(1921)이다.
훈춘 사건을 구실로 한 일본군의 공격과 간도 참변 이후 독립군은 러시아 자유시로 이동했다가 적색군의 공격으로 큰 피해를 입었다.
- 봉오동 전투는 1920년 6월로 훈춘 사건보다 앞선다.
- 영릉가 전투는 1930년대 초 조선 혁명군의 한중 연합 작전으로 미쓰야 협정 이후이다.
- 2·8 독립 선언은 1919년 도쿄에서 발표되어 훈춘 사건보다 앞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