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까스-케잌-플룻-모짜르트'는 네 단어가 모두 잘못된 외래어 표기이다.
바른 표기는 '가스', '케이크', '플루트', '모차르트'이다. 외래어 표기법은 파열음 표기에 된소리를 쓰지 않으므로 '까스'가 아닌 '가스'로 적는다.
- '커피숖-가운-필름-앙케이트': '커피숍'·'앙케트'가 바른 표기이지만 '가운'과 '필름'은 옳은 표기이다.
- '디지탈-슈퍼마켓-휘슬-꽁트': '디지털'·'콩트'가 바르지만 '슈퍼마켓'과 '휘슬'은 옳은 표기이다.
- '브라우스-사이다-디스켙-컨닝': '블라우스'·'디스켓'·'커닝'이 바르지만 '사이다'는 옳은 표기이다.
'안건을 회의에 부칩시다'가 바른 표기이다.
'부치다'는 '어떤 문제를 다른 곳이나 기회로 넘기어 맡기다'라는 뜻으로, '회의에 부치다', '표결에 부치다'처럼 쓴다. '붙이다'와 구별해야 한다.
- '무엇이길래': 시험 당시 표준어 규정에서는 '-길래'를 비표준으로 보아 '무엇이기에'로 써야 했다(이후 2011년에 '-길래'도 표준어로 인정되었다).
- '윗층': 거센소리 앞에서는 사이시옷 없이 '위'를 쓰므로 '위층'이 맞다.
- '곱배기': 음식의 두 그릇 몫을 뜻하는 말은 '곱빼기'로 적는다.
'성품이 착해서 丹脣皓齒라 할 만하다'는 한자 성어의 쓰임이 옳지 않다.
丹脣皓齒(단순호치)는 '붉은 입술과 흰 이'라는 뜻으로 아름다운 여자의 용모를 이르는 말이므로, 착한 성품을 표현하는 데 쓸 수 없다.
- 不撓不屈(불요불굴): 휘지도 굽히지도 않는다는 뜻으로, 목표를 향해 전진하는 의지에 어울린다.
- 蚌鷸之爭(방휼지쟁): 조개와 도요새가 다투는 사이 어부가 이득을 본다는 뜻으로, 두 대리의 경쟁 끝에 제삼자가 승진한 상황에 어울린다.
- 多岐亡羊(다기망양): 갈림길이 많아 양을 잃는다는 뜻으로, 학문의 길이 여러 갈래라 진리를 얻기 어려움을 탄식하는 맥락에 어울린다.
우리가 ㉠계승해야 할 민족 문화의 전통으로 여겨지는 것들이 연암의 예에서 알 수 있는 바와 같이, 과거의 인습을 ㉡타파하고 새로운 것을 창조하려는 노력의 ㉢결정이었다는 것은 지극히 중대한 사실이다. 세종대왕의 훈민정음의 창제 과정에서 이 점은 뚜렷이 나타나고 있다. 만일, 세종이 ㉣고루한 보수주의적 유학자들에게 한글 창제의 뜻을 굽혔던들, 우리 민족 문화의 최대 걸작품이 햇빛을 못 보고 말았을 것이 아니겠는가?
- 이기백, ‘민족문화의 전통과 계승’ 중에서 -
밑줄 친 ‘타파’의 한자를 打罷로 적은 것이 옳지 않다. 바른 표기는 打破이다.
‘타파’는 낡은 관습이나 제도를 깨뜨려 버린다는 뜻으로, ‘깨뜨릴 파(破)’를 쓴다. ‘罷(마칠 파)’는 ‘파업(罷業)’, ‘파면(罷免)’처럼 그만두거나 물리친다는 뜻이다.
- 계승(繼承): 이을 계, 이을 승 — 조상의 전통을 물려받아 이어 감으로 바른 표기이다.
- 결정(結晶): 맺을 결, 맑을 정 — 노력이 쌓여 이룬 보람 있는 결과로 바른 표기이다.
- 고루(固陋): 굳을 고, 좁을 루 — 낡은 관념에 젖어 고집이 세고 새것을 받아들이지 않음으로 바른 표기이다.
지방자치단체에서 추진하는 사업들은 그 특성상 ㉠가시적이거나, 혹은 ㉡현시적인 분야에 집중될 가능성이 있다.
‘가시’는 可視, ‘현시’는 顯示로 적는 조합이 모두 옳다.
지문의 ‘가시적’은 눈으로 볼 수 있다는 뜻이므로 ‘볼 시(視)’를, ‘현시적’은 드러내 보인다는 뜻이므로 ‘보일 시(示)’를 쓴다.
- ‘가시’를 可示로 적은 조합: ‘보일 시(示)’는 볼 수 있다는 뜻에 맞지 않는다.
- ‘현시’를 顯視로 적은 조합: 드러내 보인다는 뜻에는 ‘보일 시(示)’를 써야 한다.
- 두 말을 모두 視로 적은 조합: ‘현시’의 표기가 틀렸다.
“그렇지 않다니까요. 저를 그렇게도 못 믿겠다는 겁니까?” “흐흥…. 자고로 오지랖 넓은 사람치고, 자기 앞가림 제대로 하는 경우를 내 아직 보지 못했네. 자네도 마찬가지야.”
‘오지랖’의 사전적 의미는 웃옷이나 윗도리에 입는 겉옷의 앞자락이다.
지문의 ‘오지랖 넓다’는 앞자락이 넓어 다른 옷을 덮는다는 데서 나온 관용 표현으로, 쓸데없이 남의 일에 간섭한다는 뜻이다. 자기 앞가림도 못 하면서 남의 일에 나선다는 문맥과 맞는다.
- 여자들의 치맛자락: ‘치맛자락’ 자체의 뜻으로 오지랖과 다르다.
- 갓의 테두리: 갓에서 둥글게 둘러 평평한 부분은 ‘갓양태’라 한다.
- 발바닥의 오목한 부분: 신체 부위를 이르는 뜻으로 옷자락인 오지랖과 관계없다.
우리네 학교 교육은, 그러니까 시작하던 그 때부터 우리 말과 우리 삶을 떠나 있었습니다. 학교에 가서 교육을 받는다는 것은 언제나 우리말과 우리 삶을 버리고 떠나는 것이었으므로, 교육을 많이 받으면 받을수록 우리말과 우리 얼로부터 멀어지고 육신마저 집과 고향을 멀리 떠나게 마련이었습니다. 제 것을 버리고 무시하고 떠나게 만드는 것이야말로 우리 교육이 오래도록 걸어온 길이었기에, 학교 교육을 받은 시간의 길이와 내 것을 버리고 떠나간 마음과 공간의 거리가 늘 비례했습니다. 높은 학교까지 가서 많이 배운 사람은 반드시 고향을 버리고 멀리 떠나가 살아야 마땅한 것으로 여기다 보니 어쩌다가 그런 사람이 고향으로 돌아와 살고자 하면 모두들 업신여겼습니다. 쓸모없이 버려진 사람으로 보고 그의 공부가 헛되었다고 안타까워했습니다. 참으로 서글픈 교육의 역사입니다.
필자의 취지는 올바른 교육은 자기 것에 바탕을 두어야 한다는 것이다.
필자는 학교 교육이 “우리 말과 우리 삶을 떠나 있었”고 “제 것을 버리고 무시하고 떠나게 만드는 것”이었다며 이를 “서글픈 교육의 역사”라고 비판한다. 비판의 이면에는 교육이 우리말과 우리 삶에 뿌리내려야 한다는 주장이 있다.
- 삶과 일정한 거리를 유지해야 한다는 진술: 삶을 떠난 교육을 비판한 필자의 입장과 정반대이다.
- 남의 것을 받아들이는 것을 중시해야 한다는 진술: 제 것을 버리게 한 교육을 비판했으므로 맞지 않는다.
- 고향에 돌아와 봉사해야 한다는 진술: 고향으로 돌아온 사람을 업신여긴 풍조를 사례로 들었을 뿐, 봉사의 의무를 주장한 것은 아니다.
중국에서 역사가 독창적인 학문으로서의 길이 열리기 시작한 것은 중국의 위대한 역사학자 사마천(司馬遷)에서부터였다. 사마천은 『사기(史記)』를 써서 오늘날 우리가 사용하는 ‘사(史)’라는 말의 근원을 밝히고 있다. 여기서 ‘사(史)’는 후한(後漢)의 『사연(辭淵)』에 따르면 기사적서(記事的書), 즉 사건을 기록한 책을 의미하는 것이다. 고대의 역사 문헌인 『상서(尙書)』와 『춘추(春秋)』는 한(漢)나라 때 유교 경전으로 중시되었으나, 이런 경전으로부터 독립시켜 역사를 하나의 독자적인 학문으로 정립한 이는 사마천이었다. 『사기』는 중국 고대로부터 사마천 당시의 한무제에 이르는 약 3,000년의 역사를 인물 중심으로 기록한 통사(通史)이다.
‘역사’란 말은 ‘역(歷)’과 ‘사(史)’로 구성되어 있는데, 이 중에서 ‘사(史)’자는 입 구(口)와 사람 인(人)을 합친 글자이다. 따라서 이것은 ‘사람이 한 말’ 또는 ‘말을 전하는 사람’의 의미를 가지고 있다. 또 다른 해석으로는 ‘사(史)’가 사람이 책을 받쳐 들고 있는 형상을 나타내므로 ‘사물이나 사건을 글로 써서 남기는 인간’의 의미를 가지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결국 중국에서의 ‘사(史)’의 개념은 서양에서와 같이 역사적 사실 그 자체와 역사 서술이라는 이중의 뜻을 지니고 있는 동시에, 다른 한편으로는 역사를 기록하는 사람, 즉 사관(史官)이라는 의미가 강하게 내포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필자의 중심 내용은 동양의 역사 개념이 서양보다 다층적이라는 것이다.
마지막 문장에서 중국의 ‘사(史)’ 개념은 “서양에서와 같이 역사적 사실 그 자체와 역사 서술이라는 이중의 뜻”을 지니면서 “사관(史官)이라는 의미가 강하게 내포”되어 있다고 결론짓는다. 서양의 이중 의미에 의미 하나가 더해진 셈이다.
- 역사는 사관의 기록일 뿐이라는 진술: 사관의 의미는 여러 의미 중 하나로 덧붙은 것이지 역사의 전부라고 하지 않았다.
- 경전과 사서의 차이라는 진술: 사마천이 역사를 경전에서 독립시켰다는 것은 도입부의 배경 설명이다.
- 사서가 본래 인물 중심이라는 진술: 『사기』가 인물 중심의 통사라는 것은 세부 정보이며 서양 사서에 대한 언급은 없다.
‘박제(剝製)가 되어 버린 천재’를 아시오? 나는 유쾌하오. 이런 때 연애까지가 유쾌하오.
육신이 흐느적흐느적하도록 피로했을 때만 정신이 은화(銀貨)처럼 맑소. 니코틴이 내 횟배 앓는 뱃속으로 스미면 머릿속에 으레 백지가 준비되는 법이오. 그 위에다 나는 위트와 패러독스를 바둑 포석처럼 늘어놓소. 가공할 상식의 병이오.
나는 또 여인과 생활을 설계하오. 연애 기법에마저 서먹서먹해진, 지성의 극치를 흘깃 좀 들여다본 일이 있는, 말하자면 일종의 정신 분일자(精神奔逸者) 말이오. 이런 여인의 반(半)―그것은 온갖 것의 반이오―만을 영수(領受)하는 생활을 설계한다는 말이오. 그런 생활 속에 한 발만 들여 놓고 흡사 두 개의 태양처럼 마주 쳐다보면서 낄낄거리는 것이오. 나는 아마 어지간히 인생의 제행(諸行)이 싱거워서 견딜 수가 없게끔 되고 그만둔 모양이오. 굿바이. 굿바이. 그대는 이따금 그대가 제일 싫어하는 음식을 탐식(貪食)하는 아이러니를 실천해 보는 것도 좋을 것 같소. 위트와 패러독스와…….
그대 자신을 위조하는 것도 할 만한 일이오. 그대의 작품은 한 번도 본 일이 없는 기성품에 의하여 차라리 경편(輕便)하고 고매(高邁)하리라.
19세기는 될 수 있거든 봉쇄하여 버리오. 도스토예프스키 정신이란 자칫하면 낭비인 것 같소. 위고를 불란서의 빵 한 조각이라고는 누가 그랬는지 지언(至言)인 듯싶소. 그러나 인생 혹은 그 모형에 있어서 디테일 때문에 속는 다거나 해서야 되겠소? 화(禍)를 보지 마오. 부디 그대께 고하는 것이니…….
(테이프가 끊어지면 피가 나오. 생채기도 머지않아 완치 될 줄 믿소. 굿바이.)
감정은 어떤 포즈. [그 포즈의 소(素)만을 지적하는 것이 아닌지 나도 모르겠소.] 그 포즈가 부동자세에까지 고도화 할 때 감정은 딱 공급을 정지합네다.
나는 내 비범한 발육을 회고하여 세상을 보는 안목을 규정하였소.
여왕봉(女王蜂)과 미망인 - 세상의 하고많은 여인이 본질적으로 이미 미망인 아닌 이가 있으리까? 아니! 여인의 전부가 그 일상에 있어서 개개 ‘미망인’이라는 내 논리가 뜻밖에도 여성에 대한 모독이 되오? 굿바이.
- 이상, ‘날개’ 프롤로그 중에서 -
일상어로 앞으로 전개될 내용을 비논리적으로 소개한다는 설명이 옳지 않다.
프롤로그는 ‘위트와 패러독스’, ‘정신 분일자’, ‘제행(諸行)’ 같은 관념적·역설적 표현을 계산해 늘어놓은 글이다. 일상어의 익숙한 표현으로 소개한다고 볼 수 없고, 독자를 ‘그대’로 불러내는 의도된 전략 아래 서술되어 있다.
- ‘정신 분일자’라는 조롱 섞인 설명: 지성의 극치를 엿본 ‘정신 분일자’와의 생활을 설계한다며 자조적 어조로 이야기를 시작하는 대목과 맞는다.
- ‘박제가 되어 버린 천재’로 ‘나’의 입장을 토로한다는 설명: 첫 문장에서 그대로 확인된다.
- 독자를 상정한 엄격한 전략이라는 설명: “그대는 이따금…”처럼 독자를 직접 부르며 서술한다.
텔레비전은 어른이나 아이 모두 함께 보는 매체이다. 더구나 텔레비전을 보고 이해하는 데는 인쇄 문화처럼 어려운 문제 해득력이나 추상력이 필요 없다. 그래서 아이들은 어른에게서보다 텔레비전이나 컴퓨터에서 더 많은 것을 배운다. 이 때문에 오늘날의 어린이나 젊은이들에게서 어른에 대한 외포나 존경을 찾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전통적인 역할과 행동을 기대하는 어른들이 어린이나 젊은이의 불손, 거만, 경망, 무분별한 ‘반사회적’ 행동에 대해 불평하게 되는 것도 이런 이유 때문일 것이다.
적절한 반응은 전자미디어가 사회 체제에 크고 작은 변화를 유발한다는 것이다.
지문은 아이들이 “어른에게서보다 텔레비전이나 컴퓨터에서 더 많은 것을 배”우게 되면서 어른에 대한 외포나 존경이 사라지고 세대 간 불평이 생긴다고 말한다. 전자미디어가 전통적 위계와 관계를 바꾼다는 것이다.
- 정보 사회를 선도한다는 반응: 지문은 정보 사회의 주도 여부를 다루지 않는다.
- 쓸데없는 노동에서 해방시킨다는 반응: 노동에 관한 언급이 없다.
- 인간의 필요를 위해 발명했다는 반응: 매체의 발명 동기는 지문에 나오지 않는다.
가문 섬진강을 따라가며 보라
퍼 가도 퍼 가도 전라도 실핏줄 같은
개울물들이 끊기지 않고 모여 흐르며
해 저물면 저무는 강변에
쌀밥 같은 토끼풀꽃,
숯불 같은 자운영 꽃 머리에 이어 주며
지도에도 없는 동네 강변
식물도감에도 없는 풀에
어둠을 끌어다 죽이며
그을린 이마 훤하게
꽃등도 달아 준다
흐르다 흐르다 목메이면
영산강으로 가는 물줄기를 불러
뼈 으스러지게 그리워 얼싸안고
지리산 뭉툭한 허리를 감고 돌아가는
섬진강을 따라가며 보라
섬진강 물이 어디 몇 놈이 달려들어
퍼낸다고 마를 강물이더냐고,
지리산이 저문 강물에 얼굴을 씻고
일어서서 껄껄 웃으며
무등산을 보며 그렇지 않느냐고 물어보면
노을 띤 무등산이 그렇다고 훤한 이마 끄덕이는
고갯짓을 바라보며
저무는 섬진강을 따라가며 보라
어디 몇몇 애비 없는 후레자식들이
퍼 간다고 마를 강물인가를.
- 김용택, ‘섬진강’ -
‘섬진강’의 이미지로 볼 수 없는 것은 한과 설움으로 억눌린 존재이다.
시 속 섬진강은 “퍼 간다고 마를 강물인가를”이라는 당당한 반문으로 끝맺으며, 억눌린 모습이 아니라 어떤 훼손에도 마르지 않는 힘을 지닌 존재로 그려진다.
- 부드럽고 포용력 있는 존재: 개울물들을 모아 흐르고 영산강 물줄기를 “얼싸안”는 모습에서 드러난다.
- 주변 사물과 조화로운 존재: 토끼풀꽃·자운영을 이어 주고 지리산·무등산과 어울리는 장면에서 드러난다.
- 끈질긴 생명력을 지닌 존재: “퍼 가도 퍼 가도” 끊기지 않고 흐르는 모습에서 드러난다.

말소리와 그것이 싣고 있는 뜻 사이의 관계는 자의적(혹은 임의적)이다. 밤하늘에 떠서 세상을 비춰 주는 물체를 반드시 [달]이라고 불러야 할 필연적인 이유가 있는 것은 아니다. 만약 필연적인 이유가 있다면 어떤 언어에서나 [달]이라고 해야 할 텐데 그렇지 않기 때문이다. 영어에서는 [문]이라 하고 스페인어에서는 [루나], 헝가리어에서는 [홀드], 일본어에서는 [쓰키]라고 한다. 그것은 마치 붉은 교통신호등이 정지를 표시하는 것과 같다. 붉은색이 정지를 뜻해야 할 필연적인 이유는 없다. 푸른색을 정지, 붉은색을 진행 표시로 정해도 상관없다. 그것은 약속으로 통용되기만 하면 된다. 교통신호는 색깔로 진행이나 정지를 표시하지만, 언어는 말소리로 어떤 뜻을 전달하는 것이다. 말소리는 그릇과 같은 것이요, 뜻은 거기에 담긴 내용이다. 그래서 언어는 자의적인 음성 기호의 체계라고 한다. 청각장애인들의 수화(手話)는 손짓으로 뜻을 전하며 밤중에 항해하는 배들은 불빛으로 의사소통을 한다. 그러나 언어는 말소리로 뜻을 전달하며, 말소리와 뜻 사이의 관계는 필연적이 아니고 자의적이다.
언어의 자의성이 가장 약하게 반영된 것은 수탉의 울음소리를 ‘꼬끼오’라고 하는 예이다.
지문은 말소리와 뜻 사이에 필연적인 관계가 없다는 자의성을 설명한다. 의성어는 실제 소리를 흉내 낸 말이어서 소리와 뜻 사이에 어느 정도 유연성(有緣性)이 있으므로 자의성이 상대적으로 약하다.
- ‘호랑이’와 ‘범’의 동의어: 같은 대상을 다른 소리로 부르므로 자의성을 잘 보여 준다.
- 중세어 단어가 후대에 사라진 예: 말소리와 뜻의 결합이 역사적으로 바뀔 수 있음을 보여 주며, 이는 자의적 결합이기에 가능하다.
- ‘부추’를 방언에서 ‘솔’이라 하는 예: 지역에 따라 같은 뜻에 다른 소리를 쓰므로 자의성의 예이다.
“바람을 피다.”는 잘못된 말이다. 왜냐하면 ‘피다’는 자동사이므로 목적어와 함께 올 수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타동사 ‘피우다’를 사용하여 “바람을 피우다.”와 같이 써야 한다. 이처럼 자동사와 타동사의 구분을 하지 못해 오류를 저지르는 경우가 많으니 글을 쓸 때는 이를 유의할 필요가 있다.
‘마음이 설레였다’는 자동사·타동사 혼동 유형이 아니다.
‘설레다’의 과거형은 ‘설레었다/설렜다’인데 불필요한 ‘-이-’를 넣은 활용 오류이다. 지문이 제시한 유형은 자동사와 타동사를 구분하지 못한 오류이다.
- 밤을 ‘새지’: 목적어 ‘밤을’을 취해야 하므로 자동사 ‘새다’ 대신 타동사 ‘새우다’를 써서 ‘새우지’로 해야 한다.
- 담배를 ‘필’: 자동사 ‘피다’가 아니라 타동사 ‘피우다’를 써서 ‘피울’로 해야 한다.
- 턱이 ‘벴다’: 주어 ‘턱이’에 맞게 타동사 ‘베다’ 대신 피동사 ‘베이다’를 써서 ‘베였다’로 해야 한다.
'시험을 치르고 나니 허탈감이 엄습했다'가 표준어로만 이루어진 문장이다.
'치르다'는 '치르고, 치러'로 활용하며, '허탈감'과 '엄습'도 모두 표준어이다.
- '통털어서': '있는 대로 모두 합하다'는 뜻의 말은 '통틀다'이므로 '통틀어서'가 맞다.
- '티각태각': 서로 뜻이 맞지 않아 다투는 모양은 '티격태격'이 표준어이다.
- '놀랜': 기본형이 '놀라다'이므로 '놀란 가슴'이 맞다. '놀래다'는 남을 놀라게 한다는 뜻이다.
우리는 올바른 행동을 하지 않는 사람이 오히려 더 큰 소리를 치면서 막무가내로 행동하는 경우를 종종 보게 된다. 법을 어긴 자가 법을 집행하는 사람에게 “나를 처벌하려면 ㉠법 대로 해라.”라는 식으로 도리어 큰소리치기도 한다. 나이가 얼마 되지도 않으면서 삼촌뻘 되는 상대에게 “나도 나이를 ㉡먹을 만큼 먹었어.”라며 삿대질을 하기도 한다. 무릇 사람이란 본 대로 들은 대로 행하는 것이 도리에 어긋나지 않는 행동을 하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뿐인 자기 존엄을 스스로 내팽개치는 사람이 있으니 개탄스럽지 ㉣않을 수 없다.
띄어쓰기가 옳지 않은 것은 ‘법 대로’이다. ‘법대로’로 붙여 써야 한다.
‘대로’가 체언 뒤에 붙어 ‘앞에 오는 말에 근거하거나 달라짐이 없음’을 나타낼 때는 조사이므로 앞말에 붙여 쓴다. 관형어 뒤의 ‘본 대로’, ‘들은 대로’는 의존 명사이므로 띄어 쓴다.
- ‘먹을 만큼’: 관형어 뒤의 ‘만큼’은 의존 명사이므로 띄어 쓴 것이 맞다.
- ‘하나뿐인’: 체언 뒤의 ‘뿐’은 조사이므로 붙여 쓴 것이 맞다.
- ‘않을 수’: ‘수’는 의존 명사이므로 띄어 쓴 것이 맞다.
'선생님, 제 말씀 좀 들어 주십시오'가 높임법에 맞는 표현이다.
'말씀'은 남의 말을 높일 때뿐 아니라 자기의 말을 낮출 때(겸양)도 쓰이므로, 화자가 선생님께 자기 말을 낮추어 이르는 것은 옳다.
- '할아버지께서는 이빨이 참 좋으십니다': '이빨'은 낮잡는 말이므로 '이(치아)'로 써야 한다.
- '교수님은 두 살 된 따님이 계신다': 높일 대상의 소유물·관련 인물을 통한 간접 높임에서는 '계시다'가 아니라 '따님이 있으시다'로 써야 한다.
- '이 책은 우리 선생님이 준 책이야': 주체인 선생님을 높여 '선생님께서 주신 책'으로 써야 한다.
'떡볶기'는 잘못된 표기로, '떡볶이'로 적어야 한다.
'볶다'의 어간에 명사를 만드는 접미사 '-이'가 붙은 말이므로 원형을 밝혀 '떡볶이'로 적는다.
- '본때': 본보기가 될 만한 모양새를 뜻하는 말로 바른 표기이다.
- '금세': '금시에'가 줄어든 말이므로 '금새'가 아니라 '금세'가 맞다.
- '눈곱': 눈에서 나오는 진득한 액을 뜻하는 말로 '눈꼽'이 아닌 '눈곱'이 바른 표기이다.
'끝을[끄츨]'은 발음이 옳지 않으며, [끄틀]로 발음해야 한다.
받침 'ㄷ, ㅌ'이 [ㅈ, ㅊ]으로 바뀌는 구개음화는 모음 'ㅣ'로 시작하는 조사·접미사 앞에서만 일어난다. 조사 '을'은 'ㅣ'가 아니므로 받침 'ㅌ'을 그대로 연음한다.
- '맑게[말께]': 겹받침 'ㄺ'은 용언 어간 말음일 때 'ㄱ' 앞에서 [ㄹ]로 발음하므로 옳다.
- '주의[주이]': 단어의 첫음절 이외의 '의'는 [이]로 발음하는 것도 허용하므로 옳다.
- '밟고[밥ː꼬]': '밟-'은 자음 앞에서 [밥]으로 발음하는 예외에 해당하므로 옳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