龜何龜何
首其現也
若不現也
燔灼而喫也
- 「구지가」 -
「구지가」는 환기-요구-조건-위협의 순서로 전개된다.
'龜何龜何(거북아 거북아)'로 대상을 불러 주의를 환기하고, '首其現也(머리를 내어라)'로 요구한 뒤, '若不現也(만약 내놓지 않으면)'라는 조건을 걸고, '燔灼而喫也(구워서 먹으리라)'로 위협한다.
- 요구로 시작하는 배열은 첫 행이 호명이라는 점과 맞지 않는다.
- 위협으로 시작하는 배열은 위협이 마지막 행에 놓인다는 점과 어긋난다.
- 조건으로 시작하는 배열은 조건이 셋째 행에 나온다는 점과 어긋난다.
흐르는 것이 물뿐이랴
우리가 저와 같아서
강변에 나가 삽을 씻으며
거기 슬픔도 퍼다 버린다
일이 끝나 저물어
스스로 깊어 가는 강을 보며
쭈그려 앉아 담배나 피우고
나는 돌아갈 뿐이다.
삽자루에 맡긴 한 생애가
이렇게 저물고, 저물어서
샛강 바닥 썩은 물에
달이 뜨는구나
우리가 저와 같아서
흐르는 물에 삽을 씻고
먹을 것 없는 사람들의 마을로
다시 어두워 돌아가야 한다.
- 정희성, 「저문 강에 삽을 씻고」 -
이 시의 화자는 감정을 배제하지 않고 삶의 슬픔과 성찰을 직접 드러낸다. 따라서 풍경을 객관적으로만 전달한다는 분석이 옳지 않다.
'거기 슬픔도 퍼다 버린다', '우리가 저와 같아서'처럼 화자는 강물에 자신의 처지를 빗대며 주관적 정서를 표출한다.
- '일이 끝나 저물어' 강변에 나가 삽을 씻는다는 구절에서 일을 마치고 해 질 녘 강가에 나온 상황이 확인된다.
- '슬픔도 퍼다 버린다'와 '먹을 것 없는 사람들의 마을로 다시 어두워 돌아가야 한다'에서 슬픔을 버리고 가난한 마을로 돌아가야 하는 처지가 드러난다.
- '삽자루에 맡긴 한 생애'는 노동으로 살아온 삶 전체를 압축한 표현이다.
전국 시대 말, 진나라의 공격을 받은 조나라 혜문왕은 동생인 평원군을 초나라에 보내어 구원군을 청하기로 했다. 이십 명의 수행원이 필요한 평원군은 그의 삼천여 식객 중에서 십구 명은 쉽게 뽑았으나, 나머지 한 명을 뽑지 못한 채 고심했다. 이때에 모수라는 식객이 나섰다. 평원군은 어이없어하며 자신의 집에 언제부터 있었는지 물었다. 모수가 삼 년이 되었다고 대답하자 평원군은 재능이 뛰어난 사람은 숨어 있어도 저절로 사람들에게 알려지게 되는 법인데, 모수의 이름을 들어본 적이 없다고 답했다. 그러자 모수는 “나리께서 이제까지 저를 단 한 번도 주머니 속에 넣어 주시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이번에 주머니 속에 넣어 주신다면 끝뿐이 아니라 자루까지 드러날 것입니다.” 하고 재치 있는 답변을 했다. 만족한 평원군은 모수를 수행원으로 뽑았고, 초나라에 도착한 평원군은 모수가 활약한 덕분에 국빈으로 환대받고, 구원군도 얻을 수 있었다.
밑줄 친 말은 주머니 속 송곳이 끝을 드러내듯 재능 있는 사람은 저절로 드러난다는 뜻이므로 囊中之錐(낭중지추)가 가장 적절하다.
모수는 '주머니 속에 넣어 주신다면 끝뿐이 아니라 자루까지 드러날 것'이라며 기회만 주어지면 자신의 재능이 드러날 것임을 말했고, 이 고사에서 낭중지추가 나왔다.
- 吳越同舟(오월동주)는 사이가 나쁜 사람들이 한자리에 있거나 어려움 앞에서 서로 협력함을 뜻한다.
- 馬耳東風(마이동풍)은 남의 말을 귀담아듣지 않고 흘려버림을 뜻한다.
- 近墨者黑(근묵자흑)은 나쁜 사람을 가까이하면 물들기 쉬움을 뜻한다.
사방이 어두워지자 그들도 얘기를 그쳤다. 어디에나 눈이 덮여 있어서 길을 잘 분간할 수가 없었다. 뒤에 처졌던 백화가 눈 덮인 길의 고랑에 빠져 버렸다. 발이라도 삐었는지 백화는 꼼짝 못하고 주저앉아 신음을 했다. 영달이가 달려들어 싫다고 뿌리치는 백화를 업었다. 백화는 영달이의 등에 업히면서 말했다.
“무겁죠?”
영달이는 대꾸하지 않았다. 백화가 어린애처럼 가벼웠다. 등이 불편하지도 않았고 어쩐지 가뿐한 느낌이었다. 아마 쇠약해진 탓이리라 생각하니, 영달이는 어쩐지 대전에서의 옥자가 생각나서 눈시울이 화끈했다. 백화가 말했다.
“어깨가 참 넓으네요. 한 세 사람쯤 업겠어.”
“댁이 근수가 모자라니 그렇다구.”
- 황석영, 「삼포 가는 길」 중에서 -
'어린애처럼'은 업힌 백화의 몸무게를 표현한 말이므로, 영달이가 대전의 옥자를 생각이 깊지 않은 존재로 인식한다는 추론은 적절하지 않다.
영달이는 백화가 쇠약해져 가볍다고 생각하자 '대전에서의 옥자가 생각나서 눈시울이 화끈했다'고 하여, 옥자를 안타까움과 연민으로 떠올린다.
- 백화가 '눈 덮인 길의 고랑에 빠져' 발을 삐고 신음했으므로 고랑은 신음의 계기가 된다.
- 업힌 백화가 가볍게 느껴지면서 영달이가 옥자를 떠올리므로 업힌 백화가 그 계기가 된다.
- 백화는 처음에 '싫다고 뿌리치는' 태도였으나 업힌 뒤에는 '어깨가 참 넓으네요'라며 싫은 내색 없이 말을 건넨다.
고장 난 시계를 고치다.
'고장 난 시계를 고치다'의 '고치다'는 고장 나거나 못 쓰게 된 물건을 손질하여 제대로 되게 하다라는 뜻이므로, 자동차를 고치는 경우와 의미가 같다.
두 경우 모두 고장 난 기계를 수리한다는 뜻으로 쓰였다.
- 부엌을 입식으로 고치는 것은 모양이나 구조를 바꾼다는 뜻이다.
- 상호를 순 우리말로 고치는 것은 이름을 다른 것으로 바꾼다는 뜻이다.
- 낡은 법을 고치는 것은 잘못되거나 틀린 것을 바로잡는다는 뜻이다.
아이들이야 학교 가는 시간을 빼고는 내내 밖에서만 노는데, 놀아도 여간 시망스럽게 놀지 않았다.
- 최일남, 「노새 두 마리」 중에서 -
'시망스럽다'는 몹시 짓궂은 데가 있다는 뜻이다.
아이들이 밖에서 놀 때 '여간 시망스럽게 놀지 않았다'는 것은 매우 짓궂게 장난치며 놀았다는 의미이다.
- 생기 있고 힘차며 시원스럽다는 뜻은 '활발하다'의 풀이이다.
- 어수선하여 질서나 통일성이 없다는 뜻은 '산만하다'의 풀이이다.
- 태도나 행동이 가벼운 데가 있다는 뜻은 경박함을 가리킬 뿐 짓궂음과는 거리가 있다.
'강기침'의 '강-'은 고유어 접두사로, 한자에서 온 말이 아니다.
고유어 '강-'은 '마른, 물기가 없는'의 뜻을 더해 '강기침(마른기침)·강서리'처럼 쓰이고, 그 밖에 '다른 것이 섞이지 않은'(강술), '억지스러운'(강울음), '호된, 심한'(강추위)의 뜻도 더한다. 반면 한자 접두사 '강(強)-'은 '매우 센', '호된'의 뜻을 더한다.
- '강염기'의 '강-'은 '강(強)'으로, 세기가 강한 염기를 뜻한다.
- '강타자'의 '강-'은 '강(強)'으로, 타격이 강한 타자를 뜻한다.
- '강행군'의 '강-'은 '강(強)'으로, 호되게 무리하여 하는 행군을 뜻한다.
'불은'의 기본형은 '불다'가 아니라 '붇다'이므로 기본형이 잘못 제시되었다.
'붇다(물에 젖어 부피가 커지다)'는 ㄷ 불규칙 용언으로, 모음 어미 앞에서 'ㄷ'이 'ㄹ'로 바뀌어 '불어, 불은'이 된다. '불다'였다면 관형형은 ㄹ 탈락으로 '분'이 된다.
- '가니'는 '갈다'에 '-니'가 붙으며 어간 끝 'ㄹ'이 탈락한 형태로, 기본형이 맞다.
- '일렀다'는 '이르다(말하다)'가 르 불규칙 활용을 한 형태로, 기본형이 맞다.
- '들렀다'는 '들르다'의 어간 끝 'ㅡ'가 탈락한 형태로, 기본형이 맞다('들리다'가 아님).
일주일에 한 번쯤 돼지고기를 반 근, 혹은 반의 반 근 사러 가는 푸줏간이었다. 어머니는 돈을 들려 보내며 매양 같은 주의를 잊지 않았다.
적게 주거든, 애라고 조금 주느냐고 말해라, 그리고 또 비계는 말고 살로 주세요, 해라.
푸줏간에서는 한쪽 볼에 힘껏 쥐어질린 듯 여밤톨만한 혹이 달리고 그 혹부리에, 상기도 보이지 않는 손에 의해 끄들리고 있는 듯 길게 뻗힌 수염을 기른 홀아비 중국인이 고기를 팔았다.
애라고 조금 주세요?
키가 작아 발돋움질로 간신히 진열대에 턱을 올려놓고 돈을 밀어 넣는 것과 동시에 나는 총알처럼 내뱉었다.
고기를 자르기 위해 벽에 매단 가죽 끈에 칼을 문질러 날을 세우던 중국인은 미처 무슨 말인지 몰라 뚱한 얼굴로 나를 바라보았다. 나는 비계는 말고 살로 달래라 하던 어머니가 일러준 말을 하기 전 중국인이 고기를 자를까 봐 허겁지겁 내쏘았다.
고기로 달래요.
중국인은 꾸룩꾸룩 웃으며 그때야 비로소 고기를 덥석 베어 내었다.
왜 고기만 주니, 털도 주고 가죽도 주지.
- 오정희, 「중국인 거리」 중에서 -
이 글에는 시간적 배경의 특성이나 공간적 배경의 역할이 드러나지 않는다. 푸줏간이라는 장소가 나올 뿐 그 공간이 사건에서 어떤 기능을 하는지는 서술되지 않는다.
반면 어머니의 당부, 그것을 그대로 따르는 '나', 이를 받아 주는 중국인의 반응은 대화와 행동으로 분명히 제시된다.
- '나'는 어머니가 일러준 '애라고 조금 주세요', '고기로 달래요'를 그대로 말하므로 어머니의 주의를 수용한다.
- 어머니는 돈을 들려 보내며 '매양 같은 주의를 잊지 않았다'고 하여 심부름을 시키는 태도가 드러난다.
- 중국인은 '꾸룩꾸룩 웃으며' '털도 주고 가죽도 주지'라고 농담하여 '나'의 말에 대한 정서를 보여 준다.
우리는 우리가 생각한 것을 말로 나타낸다. 또 다른 사람의 말을 듣고, 그 사람이 무슨 생각을 가지고 있는가를 짐작한다. 그러므로 생각과 말은 서로 떨어질 수 없는 깊은 관계를 가지고 있다.
그러면 말과 생각이 얼마만큼 깊은 관계를 가지고 있을까? 이 문제를 놓고 사람들은 오랫동안 여러 가지 생각을 하였다. 그 가운데 가장 두드러진 것이 두 가지 있다. 그 하나는 말과 생각이 서로 꼭 달라붙은 쌍둥이인데 한 놈은 생각이 되어 속에 감추어져 있고 다른 한 놈은 말이 되어 사람 귀에 들리는 것이라는 생각이다. 다른 하나는 생각이 큰 그릇이고 말은 생각 속에 들어가는 작은 그릇이어서 생각에는 말 이외에도 다른 것이 더 있다는 생각이다.
이 두 가지 생각 가운데서 앞의 것은 조금만 깊이 생각해 보면 틀렸다는 것을 즉시 깨달을 수 있다. 우리가 생각한 것은 거의 대부분 말로 나타낼 수 있지만, 누구든지 가슴속에 응어리진 어떤 생각이 분명히 있기는 한데 그것을 어떻게 말로 표현해야 할지 애태운 경험을 가지고 있을 것이다. 이것 한 가지만 보더라도 말과 생각이 서로 안팎을 이루는 쌍둥이가 아님은 쉽게 판명된다.
인간의 생각이라는 것은 매우 넓고 큰 것이며 말이란 결국 생각의 일부분을 주워 담는 작은 그릇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나 아무리 인간의 생각이 말보다 범위가 넓고 큰 것이라고 하여도 그것을 가능한 한 말로 바꾸어 놓지 않으면 그 생각의 위대함이나 오묘함이 다른 사람에게 전달되지 않기 때문에 생각이 형님이요, 말이 동생이라고 할지라도 생각은 동생의 신세를 지지 않을 수가 없게 되어 있다. 그러니 말을 통하지 않고는 생각을 전달할 수가 없는 것이다.
필자는 '말을 통하지 않고는 생각을 전달할 수가 없는 것이다'라고 결론지으므로, 말 없이도 얼마든지 생각을 전달할 수 있다는 진술은 필자의 견해가 아니다.
필자는 생각이 말보다 넓지만, 생각을 말로 바꾸어 놓지 않으면 다른 사람에게 전달되지 않는다며 생각이 말의 신세를 질 수밖에 없다고 본다.
- '말이란 결국 생각의 일부분을 주워 담는 작은 그릇'이라 하여 말이 생각보다 범위가 좁다고 본다.
- '우리가 생각한 것을 말로 나타낸다'고 하여 말을 생각을 나타내는 매개체로 본다.
- '생각과 말은 서로 떨어질 수 없는 깊은 관계'라 하여 둘을 불가분의 관계로 본다.
아무도 그에게 수심(水深)을 일러준 일이 없기에
흰나비는 도무지 바다가 무섭지 않다.
청(靑)무우밭인가 해서 내려갔다가는
어린 날개가 물결에 절어서
공주처럼 지쳐서 돌아온다.
삼월(三月)달 바다가 꽃이 피지 않아서 서글픈
나비 허리에 새파란 초생달이 시리다.
- 김기림, 「바다와 나비」 -
화자는 나비를 연민의 시선으로 바라볼 뿐, 나비의 의지 부족이나 방관적 태도를 비판하지 않는다.
'공주처럼 지쳐서 돌아온다'는 냉혹한 현실(바다)에 부딪혀 상처 입은 연약하고 순진한 존재로서의 나비를 그린 비유이다.
- '청무우밭'은 나비가 꿈꾸는 생명의 공간으로, 냉혹한 현실인 '바다'와 대립된다.
- '아무도 그에게 수심(水深)을 일러준 일이 없기에' 나비는 바다의 실체를 모른 채 무서워하지 않는다.
- 꽃이 피지 않는 '삼월달 바다'와 허리에 '시리다'는 '새파란 초생달'은 모두 차가운 이미지이다.
<보기>
어떤 특정한 시기의 풍속이나 세태의 한 단면을 그리는 소설 양식을 세태 소설이라 한다. 세태 소설은 당대 사회의 모순이나 부조리 등을 있는 그대로 묘사하여 그 사회에 대한 비판 의식을 드러낸다. 그 대표적인 소설로 박태원의 ‘소설가 구보 씨의 일일’이 있다.
㉠ 개찰구 앞에 두 명의 사내가 서 있었다. 낡은 파나마에 모시 두루마기 노랑 구두를 신고, 그리고 손에 조그만 보따리 하나도 들지 않은 그들을, 구보는, 확신을 가져 무직자라고 단정한다. 그리고 이 시대의 무직자들은, 거의 다 ㉡ 금광 브로커에 틀림없었다. 구보는 새삼스러이 대합실 안팎을 둘러본다. 그러한 인물들은, 이곳에도 저곳에도 눈에 띄었다.
㉢ 황금광 시대(黃金狂時代).
저도 모를 사이에 구보의 입술에서는 무거운 한숨이 새어 나왔다. 황금을 찾아, 황금을 찾아, 그것도 역시 숨김없는 인생의, 분명히, 일면이다. 그것은 적어도, 한 손에 단장과 또 한 손에 공책을 들고, 목적 없이 거리로 나온 자기보다는 좀 더 진실한 인생이었을지도 모른다. 시내에 산재한 무수한 광무소(鑛務所), 인지대 백 원, 열람비 오 원, 수수료 십 원, 지도대 십팔 전……, 출원 등록된 광구, 조선 전토(全土)의 칠 할, 시시각각으로 사람들은 졸부가 되고, 또 몰락해 갔다. 황금광 시대. 그들 중에는 평론가와 시인, 이러한 문인들조차 끼어 있었다. 구보는 일찍이 창작을 위해 그의 벗의 광산에 가 보고 싶다 생각하였다. 사람들의 사행심, 황금의 매력, 그러한 것들을 구보는 보고, 느끼고, 하고 싶었다. 그러나 고도의 금광열은, 오히려, ㉣ 총독부 청사, 동측 최고층, 광무과 열람실에서 볼 수 있었다…….
- 박태원, 「소설가 구보 씨의 일일」 중에서 -
'금광 브로커'는 구보가 무직자로 단정한 인물들이 몰려든 대상으로, 서술자가 예찬하는 존재가 아니라 비판적으로 바라보는 세태의 한 단면이다.
<보기>에 따르면 세태 소설은 사회의 모순을 있는 그대로 묘사해 비판 의식을 드러내므로, 일확천금을 좇는 금광 브로커는 비판의 대상으로 읽어야 한다.
- 개찰구 앞은 무직자이자 금광 브로커인 사내들이 서 있는 곳으로 세태의 단면이 드러나는 공간이다.
- 황금광 시대는 구보에게 '무거운 한숨'을 자아내며, 사람들이 졸부가 되거나 몰락해 가는 부조리한 현실로 비판된다.
- 총독부 청사 광무과 열람실은 '고도의 금광열'을 볼 수 있는 곳으로 설정된 공간이다.
빌기를 다 함에 지성이면 감천이라 황천인들 무심할까. 단상의 오색구름이 사면에 옹위하고 산중에 ㉠백발 신령이 일제히 하강하여 정결케 지은 제물 모두 다 흠향한다. 길조(吉兆)가 여차(如此)하니 귀자(貴子)가 없을쏘냐. 빌기를 다한 후에 만심 고대하던 차에 일일은 한 꿈을 얻으니, ㉡천상으로서 오운(五雲)이 영롱하고, 일원(一員) 선관(仙官)이 청룡(靑龍)을 타고 내려와 말하되,
“나는 청룡을 다스리던 선관이더니 익성(翼星)이 무도(無道)한 고로 상제께 아뢰되 익성을 치죄하야 다른 방으로 귀양을 보냈더니 익성이 이걸로 함심(含心)하야 ㉢백옥루 잔치 시에 익성과 대전(對戰)한 후로 상제전에 득죄하여 인간에 내치심에 갈 바를 모르더니 남악산 신령들이 부인 댁으로 지시하기로 왔사오니 부인은 애휼(愛恤)하옵소서.”
하고 타고 온 청룡을 오운 간(五雲間)에 방송(放送)하며 왈,
“㉣일후 풍진(風塵) 중에 너를 다시 찾으리라.”
하고 부인 품에 달려들거늘 놀래 깨달으니 일장춘몽이 황홀하다.
정신을 진정하야 정언주부를 청입(請入)하야 몽사를 설화(說話)한대 정언주부가 즐거운 마음 비할 데 없어 부인을 위로하야 춘정(春情)을 부쳐 두고 생남(生男)하기를 만심 고대하더니 과연 그달부터 태기 있어 십 삭이 찬 연후에 옥동자를 탄생할 제, 방 안에 향취 있고 밖에 서기(瑞氣)가 뻗질러 생광(生光)은 만지(滿地)하고 서채(瑞彩)는 충천하였다.
…(중략)…
이때에 조정에 두 신하가 있으니 하나는 도총대장 정한담이요, 또 하나는 병부상서 최일귀라. 본대 천상 익성으로 자미원 대장성과 백옥루 잔치에 대전한 죄로 상제께 득죄하여 인간 세상에 적강(謫降)하여 대명국 황제의 신하가 되었는지라 본시 천상지인(天上之人)으로 지략이 유여하고 술법이 신묘한 중에 금산사 옥관도사를 데려다가 별당에 거처하게 하고 술법을 배웠으니 만부부당지용(萬夫不當之勇)이 있고 백만군중대장지재(百萬軍中大將之才)라 벼슬이 일품이요 포악이 무쌍이라 일상 마음이 천자를 도모코자 하되 다만 정언주부인 유심의 직간을 꺼려하고 또한 퇴재상(退宰相) 강희주의 상소를 꺼려 주저한 지 오래라.
- 「유충렬전」 중에서 -
㉣은 선관이 타고 온 청룡을 놓아 보내며 한 말로, 훗날 인간 세상의 풍진 속에서 청룡을 다시 찾겠다는 뜻이다. 남악산 신령이 천상으로 복귀한다는 풀이는 옳지 않다.
'타고 온 청룡을 오운 간(五雲間)에 방송(放送)하며' 한 말이므로 말하는 이는 선관, '너'는 청룡이다. 남악산 신령은 선관을 부인 댁으로 안내했을 뿐이다.
- ㉠ 뒤에 '길조(吉兆)가 여차(如此)하니 귀자(貴子)가 없을쏘냐'라고 하여 좋은 일이 일어날 것을 암시한다.
- ㉡은 '일일은 한 꿈을 얻으니' 뒤에 이어지므로 부인이 꾼 꿈의 상황이다.
- ㉢의 백옥루 잔치 때 익성과 싸운 일로 '상제전에 득죄하여 인간에 내치심'을 받았으므로 귀양의 계기이다.
글의 진술 방식에는 ㉠ 설명, ㉡ 묘사, ㉢ 서사, ㉣ 논증 등 네 가지 방식이 있다.
네 진술 방식의 바른 한자 표기는 說明, 描寫, 敍事, 論證이다.
설명은 '말씀 설(說)'과 '밝을 명(明)', 묘사는 '그릴 묘(描)'와 '베낄 사(寫)', 서사는 '펼 서(敍)'와 '일 사(事)', 논증은 '논할 론(論)'과 '증거 증(證)'을 쓴다.
- '設明'은 '베풀 설(設)'을 써서 설명의 '설'이 틀렸고, '論症'은 '증세 증(症)'을 써서 논증의 '증'이 틀렸다.
- '猫鯊'는 '고양이 묘(猫)'와 '상어 사(鯊)', '徐事'는 '천천할 서(徐)'를 써서 묘사와 서사가 틀렸다.
- 논증을 論證으로 바르게 썼더라도 묘사를 猫鯊, 서사를 徐事로 쓴 표기는 틀렸다.
'잠갔다'는 기본형 '잠그다'의 활용형으로 어문 규정에 맞다.
'잠그다'는 어간 끝 'ㅡ'가 모음 어미 앞에서 탈락하므로 '잠그-+-았-+-다'가 '잠갔다'가 된다. '잠궜다'는 기본형을 '잠구다'로 잘못 안 비표준형이다.
- 병이 회복되었다는 뜻은 '낫다'이며 ㅅ 불규칙 활용으로 '나았다'가 맞다. '낳았다'는 출산의 뜻이다.
- '넉넉하지'는 '하' 앞이 안울림소리 'ㄱ'이므로 '하'가 통째로 줄어 '넉넉지'로 적는다.
- '잇다'도 ㅅ 불규칙 용언이므로 '이어서'로 적어야 하며 '이여서'는 틀린 표기이다.
'ㅸ(순경음 비읍)'은 훈민정음 28자에 들지 않는 글자이다.
28자는 초성 17자(ㄱ ㅋ ㆁ ㄷ ㅌ ㄴ ㅂ ㅍ ㅁ ㅈ ㅊ ㅅ ㆆ ㅎ ㅇ ㄹ ㅿ)와 중성 11자(ㆍ ㅡ ㅣ ㅗ ㅏ ㅜ ㅓ ㅛ ㅑ ㅠ ㅕ)로 이루어진다. 'ㅸ'은 'ㅂ' 아래 'ㅇ'을 이어 쓴 연서(連書)로 만든 글자라 기본 자모에 포함되지 않는다.
- 'ㆆ(여린히읗)'은 초성 17자에 속한다.
- 'ㅿ(반치음)'은 초성 17자에 속한다.
- 'ㅠ'는 중성 11자 중 재출자에 속한다.
'한밤중'은 한 단어(합성어)이므로 '한밤중에'로 붙여 쓴 것이 옳다.
'한밤중'은 사전에 오른 하나의 명사이므로 붙여 쓴다. 나머지는 어미와 의존 명사, 한 단어 여부를 혼동한 경우이다.
- '-ㄹ뿐더러'는 하나의 연결 어미이므로 '잘할뿐더러'로 붙여 써야 한다.
- 시간의 경과를 나타내는 '만'은 의존 명사이므로 '두 시간 만에'로 띄어 써야 한다.
- '일이 잘 이루어지지 않다'는 뜻의 '안되다'는 한 단어이므로 '장사가 잘 안된다'로 붙여 써야 한다.
'探險(탐험)·矛盾(모순)·貨幣(화폐)'는 독음이 모두 바르다.
나머지 묶음은 각각 한 단어씩 독음이 틀렸다. 모양이 비슷한 글자나 여러 음을 가진 한자에 유의해야 한다.
- '灼熱'은 '불사를 작(灼)'을 써서 '작열'로 읽는다('치열'은 '熾烈').
- '荊棘'은 '가시나무 극(棘)'을 써서 '형극'으로 읽는다.
- '惡寒'은 '미워할 오(惡)'로 읽어 '오한'이다.
'ㄴ, ㅁ, ㅇ'은 유음이 아니라 비음이므로 설명이 옳지 않다.
비음은 코로 공기를 내보내며 내는 소리로 'ㄴ, ㅁ, ㅇ'이 해당하고, 국어의 유음은 'ㄹ' 하나뿐이다.
- 'ㅅ, ㅆ, ㅎ'은 입안이나 목청 사이를 좁혀 마찰을 일으켜 내는 마찰음이다.
- 'ㅡ, ㅓ, ㅏ'는 혀의 최고점이 뒤쪽에 놓이는 후설 모음이다.
- 'ㅟ, ㅚ, ㅗ, ㅜ'는 입술을 둥글게 오므려 내는 원순 모음이다.
(가) 사물은 저것 아닌 것이 없고, 또 이것 아닌 것이 없다. 이쪽에서 보면 모두가 저것, 저쪽에서 보면 모두가 이것이다.
(나) 그러므로 저것은 이것에서 생겨나고, 이것 또한 저것에서 비롯된다고 한다. 이것과 저것은 저 혜시(惠施)가 말하는 방생(方生)의 설이다.
(다) 그래서 성인(聖人)은 이런 상대적인 방법에 의하지 않고, 그것을 절대적인 자연의 조명(照明)에 비추어 본다. 그리고 커다란 긍정에 의존한다. 거기서는 이것이 저것이고 저것 또한 이것이다. 또 저것도 하나의 시비(是非)이고 이것도 하나의 시비이다. 과연 저것과 이것이 있다는 말인가. 과연 저것과 이것이 없다는 말인가.
(라) 그러나 그, 즉 혜시(惠施)도 말하듯이 삶이 있으면 반드시 죽음이 있고, 죽음이 있으면 반드시 삶이 있다. 역시 된다가 있으면 안 된다가 있고, 안 된다가 있으면 된다가 있다. 옳다에 의거하면 옳지 않다에 기대는 셈이 되고, 옳지 않다에 의거하면 옳다에 의지하는 셈이 된다.
바른 순서는 (가)-(나)-(라)-(다)이다.
(가)에서 사물의 상대성을 제시하고, (나)가 '그러므로'로 받아 이를 혜시의 방생설로 정리한다. (라)는 혜시의 말을 이어 삶과 죽음, 옳음과 그름도 서로 기대어 있음을 확장하고, (다)가 '그래서 성인은 이런 상대적인 방법에 의하지 않고'로 결론을 맺는다.
- (다)를 (나) 바로 뒤에 두면, 상대적 대립의 예를 확장하는 (라)가 성인의 경지를 밝힌 결론 뒤에 놓여 흐름이 끊긴다.
- (라)를 (가) 바로 뒤에 두면, (라)의 '그, 즉 혜시'가 가리킬 대상이 아직 나오지 않은 상태가 된다.
- (다)를 (가) 바로 뒤에 두면, '이런 상대적인 방법'이 받을 방생설과 삶·죽음의 상대성 논의가 나오기도 전에 결론이 앞서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