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립쌍을 이루는 단어들이 일정한 방향성을 이루고 있다.
성공:실패는 한쪽이 아니면 반드시 다른 쪽이 되는 상보적 대립일 뿐, 일정한 방향성을 이루지 않는다.
방향 반의어는 어떤 행위가 서로 반대 방향으로 이동하거나 주고받는 관계를 이루는 단어 쌍이다.
- 시상:수상은 상을 주는 쪽과 받는 쪽이 맞서는 방향 대립이다.
- 판매:구매는 물건이 파는 쪽에서 사는 쪽으로 옮겨 가는 방향 대립이다.
- 공격:방어는 치는 쪽과 막는 쪽이 서로 맞서는 방향 대립이다.
토론 사회자의 역할로 적절한 것은 토론의 전반적인 방향과 유의점을 안내하는 것이다.
사회자는 중립적 진행자로서 논제와 규칙을 소개하고, 발언 순서·시간을 조정하며, 쟁점을 정리해 토론이 원활히 이루어지도록 돕는다.
- 논제가 타당한지 토론자에게 묻는 것: 논제는 토론 전에 이미 확정되어 있으며, 사회자는 이를 소개할 뿐 타당성을 다시 묻지 않는다.
- 청중 의견을 모아 대안을 제시하며 쟁점을 약화시키는 것: 대안 제시는 토론자의 몫이며, 사회자가 쟁점을 약화시키면 토론의 본래 목적이 흐려진다.
- 토론자의 주장과 논거를 비판하는 견해를 개진하는 것: 사회자는 자기 견해를 드러내지 않고 중립을 지켜야 한다.
멕시코의 환경 운동가로 유명한 가브리엘 과드리는 1960년대 이후 중앙아메리카 숲의 25% 이상이 목초지 조성을 위해 벌채되었으며 1970년대 말에는 중앙아메리카 전체 농토의 2/3가 축산 단지로 점유되었다고 주장했다. 실제로 1987년 이후로도 멕시코에만 1,497만 3,900ha의 열대 우림이 파괴되었는데, 이렇게 중앙아메리카의 열대림을 희생하면서까지 생산된 소고기는 주로 유럽과 미국으로 수출되었다. 그렇지만 이 소고기들은 지방분이 적고 미국인의 입맛에 그다지 맞지 않아 대부분 햄버거의 재료로 사용되었다.
이 글은 통계 수치를 활용해 열대림 파괴에 대한 논거의 타당성을 높이고 있다.
‘숲의 25% 이상’, ‘전체 농토의 2/3’, ‘1,497만 3,900ha의 열대 우림’처럼 구체적 수치를 들어 주장을 뒷받침한다.
- 글에 제시된 것은 이미 일어난 벌채와 수출의 사실이며, 예측할 수 없는 결과를 나열하지 않는다.
- ‘목초지’, ‘축산 단지’ 같은 말의 뜻을 풀이하는 대목은 없다.
- 학설이나 이론적 근거를 나열하지 않고 실제 사례와 수치를 제시할 뿐이다.
어법에 맞는 것은 인사말이다.
합성어에서 뒷말의 첫소리가 된소리로 나거나 ‘ㄴ’ 소리가 덧날 때 사이시옷을 받치어 적는다. ‘인사말’은 [인사말]로 발음되어 소리의 변화가 없으므로 사이시옷을 넣지 않는다.
- ‘노래말’은 [노랜말]로 ‘ㄴ’ 소리가 덧나므로 ‘노랫말’로 적어야 한다.
- ‘순대국’은 [순대꾹/순댇꾹]으로 뒷말이 된소리로 나므로 ‘순댓국’으로 적어야 한다.
- ‘하교길’은 [하교낄/하굗낄]로 뒷말이 된소리로 나므로 ‘하굣길’로 적어야 한다.
(가) 반영론은 문학 작품이 사회를 반영하여 현실의 문제를 비판적으로 성찰할 수 있게 하는 매개체라는 관점을 취한 비평적 입장이다.
(나) 강나루 건너서
밀밭 길을
구름에 달 가듯이
가는 나그네
길은 외줄기
남도 삼백리
술 익는 마을마다
타는 저녁 놀
구름에 달 가듯이
가는 나그네
- 박목월, 「나그네」 -
반영론의 관점에서는 「나그네」가 삶의 고통스러운 단면을 외면한 채 유유자적한 삶만 그렸다고 비판할 수 있다.
(가)에서 반영론은 작품이 ‘현실의 문제를 비판적으로 성찰할 수 있게 하는 매개체’라고 보므로, 작품이 사회 현실을 반영했는지를 따진다.
- 민요적 율격과 정형적 형식은 작품의 형식에 주목한 것으로, 사회 현실과 무관한 내재적 관점이다.
- 선경후정과 비슷하다는 감상은 다른 갈래와의 구성 비교일 뿐 현실 반영 여부와 관계없다.
- 풍경 이미지가 그림 같다는 감상은 심상에 주목한 것으로 현실 비판과 거리가 멀다.
책은 벗입니다. 먼 곳에서 찾아온 반가운 벗입니다. 배움과 벗에 관한 이야기는 『논어』의 첫 구절에도 있습니다. ‘배우고 때때로 익히니 어찌 기쁘지 않으랴. 벗이 먼 곳에서 찾아오니 어찌 즐겁지 않으랴.’가 그런 뜻입니다.
그러나 오늘 우리의 현실은 그렇지 못합니다. 인생의 가장 빛나는 시절을 수험 공부로 보내야 하는 학생들에게 독서는 결코 반가운 벗이 아닙니다. 가능하면 빨리 헤어지고 싶은 불행한 만남일 뿐입니다. 밑줄 그어 암기해야 하는 독서는 진정한 의미의 독서가 못 됩니다.
독서는 모름지기 자신을 열고, 자신을 확장하고, 자신을 뛰어넘는 비약이어야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독서는 삼독(三讀)입니다. 먼저 글을 읽고 다음으로 그 글을 집필한 필자를 읽어야 합니다. 그 글이 제기하고 있는 문제뿐만 아니라 필자가 어떤 시대, 어떤 사회에 발 딛고 있는지를 읽어야 합니다. 그리고 최종적으로 그것을 읽고 있는 독자 자신을 읽어야 합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자신의 처지와 우리 시대의 문맥을 깨달아야 합니다.
이 글은 독서를 타인의 경험이나 생각을 자기화하는 과정으로 본다.
글쓴이는 독서가 ‘삼독(三讀)’이라 하며, 글과 필자를 읽은 뒤 ‘최종적으로 그것을 읽고 있는 독자 자신을 읽어야’ 자신의 처지와 시대의 문맥을 깨닫는다고 말한다.
- 『논어』의 벗 이야기는 독서를 벗에 빗댄 것일 뿐, 교우 관계가 배운 것의 적용에 중요하다는 내용은 없다.
- 시대와 불화한 독자일수록 자신의 위치를 쉽게 발견한다는 내용은 글에 없다.
- 반가운 벗과 함께하는 독서가 첩경이라는 말은 없으며, ‘벗’은 책 자체를 비유한 것이다.
띄어쓰기가 옳은 것은 ‘옛 책을’이다.
‘옛’은 ‘지나간 때의’를 뜻하는 관형사이므로 뒤의 명사 ‘책’과 띄어 쓴다.
- ‘그 중에’: ‘그중’은 ‘범위가 정해진 여럿 가운데’를 뜻하는 한 단어이므로 ‘그중에’로 붙여 쓴다.
- ‘한 번’: 횟수가 아니라 ‘기회 있는 어떤 때’나 시도의 뜻이므로 한 단어 ‘한번’으로 붙여 쓴다.
- ‘굴 속으로’: ‘굴속’은 ‘굴의 안’을 뜻하는 한 단어이므로 ‘굴속으로’로 붙여 쓴다.
- ㉠ 가을일[가을릴]
- ㉡ 텃마당[턴마당]
- ㉢ 입학생[이팍쌩]
- ㉣ 흙먼지[흥먼지]
‘입학생[이팍쌩]’은 ㅂ과 ㅎ이 ㅍ으로 합쳐지는 거센소리되기(축약)가 일어나 음운 개수가 변동 전과 달라진다.
변동 전 ‘ㅣ, ㅂ, ㅎ, ㅏ, ㄱ, ㅅ, ㅐ, ㅇ’의 8개가 변동 후 ‘ㅣ, ㅍ, ㅏ, ㄱ, ㅆ, ㅐ, ㅇ’의 7개로 줄어든다. 된소리되기는 교체이므로 개수에 영향이 없다.
- ‘가을일[가을릴]’은 ㄴ 첨가 뒤 유음화가 일어나 두 가지 유형의 변동이 나타난다.
- ‘텃마당[턴마당]’의 비음화는 조음 위치가 아니라 조음 방식이 같아지는 동화이다.
- ‘흙먼지[흥먼지]’는 겹받침 ㄺ 중 하나가 탈락하는 자음군 단순화와 비음화가 일어나며, 받침이 7개 대표음으로 바뀌는 교체 규칙이 적용된 것이 아니다.
적절하지 않은 것은 ‘접수되었을 때에는’을 ‘접수될 때에는’으로 고친 것이다.
‘먼저 접수된 것이 우선한다’는 판단은 제안의 접수가 이미 이루어진 뒤에야 가능하므로, 완료를 나타내는 ‘-었-’이 쓰인 원문이 오히려 자연스럽다. 따라서 이 수정과 설명은 근거가 맞지 않는다.
- ‘관계자에게 열람한다’: ‘열람하다’는 ‘~에게’와 호응하지 않으므로 사동 표현 ‘열람하게 한다’로 고친 것은 적절하다.
- ‘수역을 제외된’: 목적어 ‘수역을’은 피동사 ‘제외되다’와 호응하지 않으므로 ‘제외한’으로 고친 것은 적절하다.
- ‘과업 지시서 교부는 … 교부한다’: ‘교부’가 의미상 중복되므로 앞의 ‘교부’를 삭제한 것은 적절하다.

| 단어 | 의미 | 문장 |
|---|---|---|
| 살다 | 경기나 놀이에서, 상대편에게 잡히지 않고 제 기능을 하다. | ㉠ |
| 살다 | 어떤 직분이나 신분의 생활을 하다. | ㉡ |
| 살다 | 마음이나 의식 속에 남아 있거나 생생하게 일어나다. | ㉢ |
| 살다 | 움직이던 물체가 멈추지 않고 제 기능을 하다. | ㉣ |
‘옷에 풀기가 아직 살아 있다’의 ‘살다’는 본디 지녔던 성질이 그대로 있다는 뜻이어서 ‘마음이나 의식 속에 남아 있다’는 뜻과 맞지 않는다.
제시된 의미에 맞으려면 ‘그 기억이 아직도 마음속에 살아 있다’처럼 의식 속에 남아 있는 대상이 와야 한다.
- 장기에서 차만 살아 있다는 것은 상대편에게 잡히지 않고 제 기능을 한다는 뜻에 맞다.
- 벼슬을 산다는 것은 어떤 직분의 생활을 한다는 뜻에 맞다.
- 세게 부딪혔는데도 시계가 살아 있다는 것은 움직이던 물체가 멈추지 않고 제 기능을 한다는 뜻에 맞다.
| 진행자 | 안녕하십니까? 오늘은 고령자의 운전면허 자진 반납 제도에 대해 홍○○ 교수님 모시고 말씀 들어 보겠습니다. |
| 홍교수 | 네, 반갑습니다. |
| 진행자 | 나와 주셔서 감사합니다. 우선 이 제도가 어떤 제도인가요? |
| 홍교수 | 지자체마다 조금씩 다르기는 하지만 고령 운전자들이 운전면허를 자발적으로 반납하게 유도하여 고령 운전자에 의한 교통사고를 줄이고자 하는 제도입니다. |
| 진행자 | 고령 운전자에 의한 교통사고가 심각한가요? 뒷받침할 만한 자료가 있나요? |
| 홍교수 | 네, 도로교통공단의 통계에 따르면, 전체 교통사고 대비 고령 운전자에 의한 교통사고 비율이 2014년에는 9.0%였으나 매년 조금씩 증가하여 2017년에는 12.3%를 차지하고 있습니다. |
| 진행자 | 그렇군요. 아무래도 고령화 사회로 진입하다 보니 전체 운전자 중에서 고령 운전자에 해당하는 비율이 늘었기 때문인 것 같은데요. |
| 홍교수 | 네, 그렇습니다. 이전보다 차량 성능이 월등히 좋아진 점도 하나의 요인이 될 것입니다. |
| 진행자 | 그렇다고 해도 무작정 운전면허를 반납하라고만 할 수는 없을 테고, 뭔가 보완책이 있나요? |
| 홍교수 | 네, 지자체마다 차이가 있지만 소정의 교통비를 지급함으로써 대중교통 이용을 권장하고 있습니다. |
| 진행자 | 취지 자체만으로는 긍정적으로 평가할 수 있을 것 같은데, 혹시 제도 시행상의 문제점은 없나요? |
| 홍교수 | 일회성이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
| 진행자 | 아, 운전면허를 반납한 당시에만 교통비가 한 차례 지원된다는 말씀이군요. |
| 홍교수 | 네, 이분들이 더 이상 운전을 하지 않아도 이동권을 확보할 수 있도록 지속적인 지원이 이루어져야 이 제도가 효과를 얻을 수 있습니다. |
| 진행자 | 그에 더해 장기적으로는 고령자 친화적인 대중교통 인프라를 구축하는 일도 필요할 듯합니다. 교수님, 오늘 말씀 감사합니다. |
진행자는 상대방의 의견이 합리적이지 않다고 지적하지 않고, 오히려 의견에 보충 제안을 덧붙이며 인터뷰를 마무리한다.
마지막 발화 ‘그에 더해 장기적으로는 고령자 친화적인 대중교통 인프라를 구축하는 일도 필요할 듯합니다’는 교수의 지속적 지원 주장에 동조하며 덧붙인 말이다.
- 통계에 대해 ‘고령화 사회로 진입하다 보니 … 비율이 늘었기 때문인 것 같은데요’라며 자기 나름의 해석을 제시한다.
- ‘뭔가 보완책이 있나요?’, ‘제도 시행상의 문제점은 없나요?’라며 추가 정보를 요구한다.
- ‘뒷받침할 만한 자료가 있나요?’라며 제도 시행 배경에 대한 객관적 근거를 요구한다.
계몽주의 사상가들은 명백히 모순되는 두 개의 견해를 취했다. 그들은 인간의 위치를 자연계 안에서 해명하려고 애썼다. 역사의 법칙이란 것을 자연의 법칙과 동일한 것으로 여겼다. 다른 한편, 그들은 진보를 믿었다. 그렇다면 그들이 자연을 진보하는 것으로, 다시 말해 끊임없이 어떤 목적을 향해서 전진하는 것으로 받아들인 데에는 어떤 근거가 있었던가? 헤겔은 역사는 진보하는 것이고 자연은 진보하지 않는 것이라고 뚜렷이 구분했다. 반면, 다윈은 진화와 진보를 동일한 것으로 주장함으로써 모든 혼란을 정리한 듯했다. 자연도 역사와 마찬가지로 진보하는 것으로 본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진화의 원천인 생물학적인 유전(biological inheritance)을 역사에서의 진보의 원천인 사회적인 획득(social acquisition)과 혼동함으로써 훨씬 더 심각한 오해에 이를 수 있는 길을 열어 놓았다. 오늘날 그 둘이 분명히 구별된다는 것은 익히 알려진 것이다.
이 글의 제목으로는 진보와 진화에 관한 견해들이 가장 적절하다.
글은 계몽주의 사상가, 헤겔, 다윈이 자연과 역사의 진보·진화를 각각 어떻게 보았는지 차례로 소개하고, 생물학적 유전과 사회적 획득을 혼동한 오해를 지적한다.
- 역사의 법칙과 자연의 법칙은 계몽주의 사상가의 견해를 설명하는 일부 내용에 그친다.
- 인간 유전의 사회적 의미는 다루지 않으며, 오히려 유전과 사회적 획득을 구별해야 한다고 본다.
- 자연이 진보한다는 증거를 제시하지 않으며, 그러한 견해가 오해를 낳을 수 있다고 본다.
유 소사가 말하기를, “신부(新婦)가 이제 내 집에 들어왔으니 어떻게 남편을 도울꼬?”
사씨 대답하여 말하기를, “첩(妾)이 일찍 아비를 여의고 자모(慈母)의 사랑을 입사와 본래 배운 것이 없으니 물으시는 말씀에 대답치 못하옵거니와 어미 첩을 보낼 제 중문(中門)에 임(臨)하여 경계하여 말씀하시기를 ‘반드시 공경(恭敬)하며 반드시 경계(警戒)하여 남편을 어기오지 말라.’ 하시니 이 말씀이 경경(耿耿)하여 귓가에 있나이다.”
유 소사가 말하기를, “남편의 뜻을 어기오지 말면 장부(丈夫) 비록 그른 일이 있을지라도 순종(順從)하랴?”
사씨 대 왈, “그런 말이 아니오라 부부(夫婦)의 도(道) 오륜(五倫)을 겸(兼)하였으니 아비에게 간(諫)하는 자식이 있고 나라에 간하는 신하 있고 형제(兄弟) 서로 권하고 붕우(朋友) 서로 책(責)하나니 어찌 부부라고 간쟁(諫諍)치 않으리이까? 그러하나 자고로 장부(丈夫) 부인(婦人)의 말을 편청(偏聽)하면 해로움이 있삽고 유익(有益)함이 없으니 어찌 경계 아니 하리이까?”
유 소사가 모든 손님을 돌아보며 말하기를, “나의 며느리는 가히 조대가*에 비할 것이니 어찌 시속(時俗) 여자가 미칠 바리오.”라고 하였다.
- 김만중, 『사씨남정기』에서 -
* 조대가: 『한서(漢書)』를 지은 반고(班固)의 누이동생인 반소(班昭). 학식이 뛰어나고 덕망이 높아 왕실 여성의 스승으로 칭송이 자자했다.
사씨는 부부의 도리에 따라 남편이 잘못하면 이를 지적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사씨는 ‘부부(夫婦)의 도(道) 오륜(五倫)을 겸(兼)하였으니 … 어찌 부부라고 간쟁(諫諍)치 않으리이까?’라고 말한다.
- 사씨의 어머니는 시집가는 딸에게 남편을 어기지 말라고 당부했을 뿐, 딸이 남편에게 맞선 일을 비판한 것이 아니다.
- 사씨가 배운 것이 없다고 한 까닭은 일찍 아비를 여의었기 때문이라고 겸손하게 말한 것이며, 홀어머니를 모시느라 배우지 못했다는 내용은 없다.
- 유 소사가 흡족해한 것은 부부의 도리에 대한 사씨의 식견 때문이지 효성 때문이 아니다.
바깥은 어둡고 뜰 변두리의 늙은 나무들은 바람에 불려 서늘한 소리를 내었다. 처마 끝 저편에 퍼진 하늘에는 별이 총총하게 박혀 있으나, 아스무레한 초여름 기운에 잠겨 있었다. 집은 전체로 조용하고 썰렁했다.
꽝 당 꽝 당.
먼 어느 곳에서는 이따금 여운이 긴 쇠붙이 두드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밑 거리의 철공소나 대장간에서 벌겋게 단 쇠를 쇠망치로 뚜드리는 소리 같았다.
근처에는 그런 곳은 없을 것이었다. 그렇다면 굉장히 먼 곳일 것이었다. 굉장히 굉장히 먼 곳일 것이었다.
꽝 당 꽝 당.
단조로운 소리이면서 송곳처럼 쑤시는 구석이 있는, 밤중에 간헐적으로 들려오는 그 소리는 이상하게 신경을 자극했다.
“참, 저거 무슨 소리유?”
영희가 미간을 찌푸리면서 말했다.
“글쎄, 무슨 소릴까…….”
정애가 심드렁하게 대답했다.
“이 근처에 철공소는 없을 텐데.”
“…….”
정애는 표정으로만 수긍을 했다.
꽝 당 꽝 당.
그 쇠붙이에 쇠망치 부딪치는 소리는 여전히 간헐적으로 이어지고 있었다. 밤내 이어질 모양이었다. 자세히 그 소리만 듣고 있으려니까 바깥의 선들대는 늙은 나무들도 초여름 밤의 바람에 불려서 그런 것이 아니라 저 소리의 여운에 울려 흔들리고 있었다. 저 소리는 이 방안의 벽 틈서리를 쪼개고도 있었다. 형광등 바로 위의 천장에 비수가 잠겨 있을 것이었다.
- 이호철, 「닮아지는 살들」에서 -
‘소리의 여운’은 갈등 해소의 기미를 강화하지 않고, 오히려 불안과 긴장을 고조시킨다.
여운에 울려 나무가 흔들리고 ‘벽 틈서리를 쪼개고’, ‘천장에 비수가 잠겨 있을 것’이라는 표현은 위협적인 분위기를 심화한다.
- 늙은 나무들이 내는 ‘서늘한 소리’는 썰렁한 집의 분위기와 어울려 예사롭지 않은 분위기를 조성하기 시작한다.
- ‘꽝 당 꽝 당’ 소리는 ‘이상하게 신경을 자극’해 영희가 미간을 찌푸리게 하는 등 인물의 심리 변화를 촉발한다.
- ‘단조로운 소리’는 거듭 반복되면서 ‘송곳처럼 쑤시는 구석’을 지닌 것으로 모종의 의미가 부여된다.
그동안 나는 <일 포스티노>를 세 번쯤 빌려 보았다. 그 이유는 이 아름다운 영화 속에 아스라이 문학이 똬리를 틀고 앉아 있기 때문이다. 특히 시란 무엇인가에 대한 해답을 이처럼 쉽고도 절실하게 설명해 놓은 문학 교과서를 나는 아직까지 보지 못했다. 그래서 학생들에게 시를 가르칠 때 나는 종종 영화 <일 포스티노>를 활용한다. 수백 마디의 말보다 <일 포스티노>를 함께 보고 토론하는 것이 시의 본질에 훨씬 깊숙이, 훨씬 빨리 가 닿을 수 있다는 것을 경험하기도 했다. 시를 공부하면서 은유에 시달려 본 사람이라면 이 영화를 보고 수차례 무릎을 쳤을 것이다. 마리오 루폴로가 네루다에게 보내기 위해 고향의 여러 가지 소리를 녹음하는 인상적인 장면이 있다. 여기서 해변의 파도 소리를 녹음하는 것이 은유의 출발이라면 어부들이 그물을 걷어 올리는 소리를 담고자 하는 모습은 은유의 확장이라고 할 수 있다. 더 나아가 밤하늘의 별빛을 녹음하는 기막히게 아름다운 장면에 이르면 은유는 절정에 달한다. 더 이상의 구차한 설명이 필요하지 않다.
영화 속 인물들이 은유의 본질과 의미를 잘 알고 있다는 내용은 글에서 확인할 수 없다.
마리오가 소리를 녹음하는 장면을 은유의 출발·확장·절정으로 읽은 것은 글쓴이의 해석이지 인물의 인식이 아니다.
- 영화 속에 ‘문학이 똬리를 틀고 앉아 있다’고 하므로 문학과 영화의 미적 자질에서 공통점을 찾을 수 있다.
- 영화를 보고 토론하면 ‘시의 본질에 훨씬 깊숙이, 훨씬 빨리 가 닿을 수 있다’고 하므로 시의 본질 탐구에 참고할 만하다.
- 시를 이처럼 설명한 ‘문학 교과서를 나는 아직까지 보지 못했다’고 하므로 영화가 교과서와 같다고 볼 수 있다.
방랑시인 김삿갓의 시는 해학과 풍자로 가득 차 있는데, 무슨 시든 단숨에 써 내리는 一筆揮之인데다 가히 ( )의 상태라서 일부러 꾸미지 않았는데도 자연스럽고 아름답다.
빈칸에는 시문이 꾸밈없이 자연스럽고 완전함을 뜻하는 천의무봉(天衣無縫)이 들어가야 한다.
천의무봉은 ‘선녀의 옷에는 바느질한 자리가 없다’는 뜻으로, ‘일부러 꾸미지 않았는데도 자연스럽고 아름답다’는 문맥과 맞는다.
- 화조월석(花朝月夕)은 꽃 피는 아침과 달 밝은 저녁, 곧 경치가 좋은 때를 이른다.
- 위편삼절(韋編三絶)은 책을 맨 가죽끈이 세 번 끊어질 만큼 열심히 책을 읽음을 이른다.
- 막무가내(莫無可奈)는 달리 어찌할 수 없음을 이르는 말이다.
한자 표기가 잘못된 것은 ‘유명세’이다.
‘유명세’는 세상에 이름이 알려져 겪는 곤욕이나 불편을 세금에 빗댄 말이므로 ‘세금 세’를 쓴 有名稅가 옳다. ‘기세 세(勢)’를 쓴 有名勢는 잘못이다.
- 복불복(福不福): ‘복 복’과 ‘아닐 불’을 써서 복이 있고 없음, 곧 운수를 뜻하므로 바른 표기이다.
- 대증요법(對症療法): 병의 원인이 아닌 겉으로 나타난 증상(症)에 대응해 치료하는 방법이므로 바른 표기이다.
- 경위(經緯): ‘날 경’과 ‘씨 위’로 일이 진행되어 온 과정을 뜻하므로 바른 표기이다.
우리는 도시화, 산업화, 고도성장 과정에서 우리 경제의 뒷방살이 신세로 전락한 한국 농업의 새로운 가치에 주목해야 한다. 농업은 경제적 효율성이 뒤처져서 사라져야 할 사양 산업이 아니다. 전 지구적인 기후 변화와 식량 및 에너지 등 자원 위기에 대응하여 나라와 생명을 살릴 미래 산업으로서 농업의 전략적 가치가 크게 부각되고 있다. 농본주의의 기치를 앞세우고 농업 르네상스 시대의 재연을 통해 우리 경제가 당면한 불확실성의 터널을 벗어나야 한다.
우리는 왜 이런 주장을 하는가? 농업은 자원 순환적이고 환경 친화적인 산업이기 때문이다. 땅의 생산력에 기초해서 한계적 노동력을 고용하는 지연(地緣) 산업인 동시에 식량과 에너지를 생산하는 원천적인 생명 산업이기 때문이다. 물질적인 부의 극대화를 위해서 한 지역의 자원을 개발하여 이용한 뒤에 효용 가치가 떨어지면 다른 곳으로 이동하는 유목민적 태도가 오늘날 위기를 낳고 키워 왔는지 모른다. 급변하는 시대의 흐름에 부응하지 못하는 구시대의 경제 패러다임으로는 오늘날의 역사에 동승하기 어렵다. 이런 맥락에서, 지키고 가꾸어 후손에게 넘겨주는 정주민의 문화적 지속성을 존중하는 농업의 가치가 새롭게 조명 받는 이유에 주목할 만하다. 과학 기술의 눈부신 발전 성과를 수용하여 새로운 상품과 시장을 창출할 수 있는 녹색 성장 산업으로서 농업의 잠재적 가치가 중시되고 있는 것이다.
글은 과학 기술의 부작용을 성찰하자는 것이 아니라 과학 기술의 발전 성과를 수용해 녹색 성장 산업으로 나아가자고 한다.
마지막 문장에서 ‘과학 기술의 눈부신 발전 성과를 수용하여 새로운 상품과 시장을 창출할 수 있는’ 산업으로 농업의 가치를 제시한다.
- 유목민적 태도가 위기를 키웠고 정주민의 문화적 지속성을 존중하는 농업이 조명받는다고 하므로, 정주 민족이 농업의 가치 증진에 더 기여할 수 있다고 추론할 수 있다.
- 농업이 ‘경제적 효율성이 뒤처져서 사라져야 할 사양 산업이 아니다’라고 하므로 효율성 중심 경제 시스템의 한계를 추론할 수 있다.
- 고도성장 과정에서 농업이 ‘뒷방살이 신세로 전락’했다고 하므로 농업 중심 패러다임을 지양했음을 추론할 수 있다.
효(孝)가 개인과 가족, 곧 일차적인 인간관계에서 일어나는 행위를 규정한 것이라면, 충(忠)은 가족이 아닌 사람들과의 관계, 곧 이차적인 인간관계에서 일어나는 사회적 행위를 규정한 것이었다.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우리는 효를 순응적 가치관을 주입하는 봉건 가부장제 사회의 유습이라고 오해하는가 하면, 충과 효를 동일시하는 오류를 저지르는 경향이 많아졌다. 다음을 보자.
“부모에게 효도하고 형제를 사랑하는 사람은 윗사람의 명령을 거역하는 경우가 드물다. 또 윗사람의 명령을 어기지 않는 사람은 난동을 일으키는 경우도 드물다. 군자는 근본에 힘쓴다. 근본이 확립되면 도가 생기기 때문이다. 효도와 우애는 인(仁)의 근본이다.”
위 구절에 담긴 입장을 기준으로 보면 효는 윗사람에 대한 절대 복종으로 연결된다. 곧 종족 윤리의 기본이 되는 연장자에 대한 예우는 물론이고 신분 사회의 엄격한 상하 관계까지 포괄적으로 인정하는 것이다. 하지만 이 구절만을 근거로 효를 복종의 윤리라고 보는 것은 성급한 판단이다. 왜냐하면 원래부터 효란 가족 윤리 또는 종족 윤리로서 사회 윤리였던 충보다 우선시되었을 뿐만 아니라, 유교의 기본 입장은 설사 부모의 명령이라 하더라도 옳고 그름을 가리지 않는 맹목적인 복종은 그 자체가 불효라고 보았기 때문이다.
유교에서는 부모와 자식의 관계가 자연에 의해서 결정된다고 한다. 이 때문에 부모와 자식의 관계는 인위적으로 끊을 수 없다고 본다. 이에 비해 임금과 신하의 관계는 공동의 목표를 위한 관계로서 의리에 의해서 맺어진 관계로 본다. 의리가 맞지 않는다면 언제라도 끊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글쓴이는 윗사람에 대한 복종을 절대시하지 않는 것이 유교적 윤리의 바탕이라고 본다.
‘유교의 기본 입장은 설사 부모의 명령이라 하더라도 옳고 그름을 가리지 않는 맹목적인 복종은 그 자체가 불효라고 보았기 때문이다’라고 밝힌다.
- 효를 봉건 가부장제 사회의 유습으로 보는 것을 글쓴이는 ‘오해’라고 한다.
- 부모와 자식의 관계는 자연에 의해 결정되어 끊을 수 없다고 할 뿐, 조건 없는 신뢰에 기초한다고 하지 않으며 맹목적 복종도 부정한다.
- 효는 충보다 우선시되었고 효도와 우애가 인(仁)의 근본이라 하므로, 충을 다해 효에 도달한다는 것은 글쓴이의 입장과 반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