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국사기」는 유교적 합리주의 사관에 따라 신라 중심으로 서술된 역사서이다.
김부식은 고려 인종 때 왕명을 받아 「삼국사기」를 편찬하였고, 신라 계승 의식을 바탕으로 삼국의 역사를 정리하였다.
-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역사서는 맞지만 편년체가 아니라 기전체로 서술되었다.
- 민간 전승과 불교 관련 설화를 많이 담은 것은 일연의 「삼국유사」이다.
- 원 간섭기에 민족 고유 문화를 강조한 것은 「삼국유사」·「제왕운기」 등으로, 「삼국사기」는 원 간섭기 이전에 편찬되었다.
민정문서에서 남녀별·연령별 구분은 호가 아니라 인구를 기록하는 방식이었으므로 이 서술이 옳지 않다.
호(戶)는 사람의 많고 적음에 따라 9등급으로, 인구는 남녀별·연령별로 6등급으로 나누어 기록하였다.
- 서원경(청주) 부근 4개 촌락의 문서라는 서술은 옳다.
- 토지 면적, 인구, 호, 소·말, 뽕나무·잣나무 등의 수를 기록한 것은 옳다.
- 조세·공물·요역을 부과하기 위한 자료로 작성되었다는 서술도 옳다.
삼한통보·해동통보·활구(은병)는 조선 초기가 아니라 고려 숙종 때 만들어진 화폐이다.
고려 숙종 때 의천의 건의로 주전도감을 설치해 해동통보 등을 주조하였고, 은병(활구)도 이 시기에 제작되었다. 조선 초기에는 저화·조선통보 등을 발행하였다.
- 시전상인은 왕실·관청에 물품을 공급하는 대가로 특정 상품의 독점판매권을 얻었다.
- 보부상은 일용잡화·농수산물·약재 등을 지고 다니며 장시를 중심으로 판매하였다.
- 경시서(뒤의 평시서)는 시전의 불법 상행위와 도량형을 감독하였다.
조선시대의 혼인 형태는 일부일처를 기본으로 하였지만 남자들은 첩을 들일 수 있었다. 양반들의 처와 첩 사이에는 엄격한 구분이 있었고, 첩의 자식은 처가 낳은 자식에 비해 차별을 받았다.
밑줄 친 계층은 서얼이며, 이들은 18·19세기에 수차례 집단 상소를 올려 허통을 이루어 냈다.
사료의 "첩의 자식"은 서얼을 가리킨다. 서얼은 문과 응시가 제한되는 등 차별을 받았으나, 영·정조 대 이후 집단 상소를 통해 청요직 진출 제한이 점차 풀려 철종 때 신해허통으로 청요직 진출까지 허용되었다.
- 서얼은 문과 응시가 금지되었을 뿐 무과·잡과에는 응시할 수 있었고 한품서용으로 관직에 나아갔으므로, 모든 관직 진출이 법적으로 막힌 것은 아니었다.
- 재산으로 취급되어 매매·상속·증여의 대상이 된 것은 노비이다.
- 풍헌은 향촌의 면·리에서 조세·공물 징수 등을 맡던 향임의 명칭으로, 서얼을 부르던 말이 아니다.
보통 백정이라고 불렸던 농민들은 조상 대대로 물려받은 토지를 경작하며 생계를 유지하였다.
사료는 고려 시대이며, 고려는 관리를 18등급으로 나누어 전지와 시지를 차등 지급하는 전시과를 운영하였다.
"백정"이라 불린 일반 농민이 조상 대대로 물려받은 민전을 경작하였다는 서술이 고려 사회의 단서이다. 고려에서 백정은 직역이 없는 일반 농민을 가리켰다.
- 수리시설 확충과 함께 논농사가 크게 발달한 것은 이앙법이 보급된 조선 후기의 모습이다.
- 상품화폐경제의 발달로 토지를 잃은 농민들이 농촌을 떠난 것은 조선 후기의 상황이다.
- 관리에게 녹읍을 지급하고 백성에게 정전을 지급한 것은 통일 신라의 토지 제도이다.
어사대, 중서문하성 낭사, 홍문관, 사헌부, 사간원
옳지 않은 서술은 홍문관·어사대·사간원을 삼사라 하였다는 것이다.
조선의 삼사는 홍문관·사헌부·사간원이다. 어사대는 고려의 감찰 기구로, 조선의 사헌부에 해당한다.
- 제시된 관서들은 모두 언론과 간쟁, 감찰을 맡은 기구였다.
- 고려에서는 중서문하성의 낭사와 어사대를 합쳐 성대 또는 대간이라 불렀다.
- 이들 기구는 왕과 고위 관료의 권력 행사를 견제하여 정치의 균형을 이루게 하였다.
19세기의 정치는 권력구조면에서 고위직만 정치적 기능을 발휘하여 그 아래의 관리들은 행정실무만 맡게 되었고, 비변사가 핵심적인 정치기구로 자리잡았다.
사료의 정치 상황은 세도 정치이며, 이 시기 남인·소론·지방 선비들이 권력에서 배제되어 사회 통합에 실패하였다.
"19세기", 고위직만 정치적 기능을 발휘하고 "비변사가 핵심적인 정치기구"가 되었다는 서술이 순조 이후 소수 외척 가문이 권력을 독점한 세도 정치를 가리킨다.
- 세도 정치기에는 권력이 왕이 아니라 외척 가문에 집중되어 왕권이 약화되었다.
- 공론이 중시되고 이조 전랑의 권한이 강화된 것은 사림이 정국을 주도한 붕당 정치 시기의 일이다.
- 예송 논쟁은 17세기 현종 때 서인과 남인 사이에서 일어났다.
당에서 유학하고 돌아온 6두품 지식인은 개혁을 추구했지만 그 자체가 호족의 출신 성분은 아니다.
6두품 지식인은 골품제의 한계 속에서 개혁안을 제시하다 좌절하자 호족과 연계하여 사상적 기반을 제공하였다. 호족은 몰락 귀족, 군진·해상 세력, 촌주 출신 등이 주를 이루었다.
- 중앙 권력 투쟁에서 밀려나 지방에 내려가 세력을 키운 귀족은 호족의 한 갈래이다.
- 장보고처럼 해상 활동으로 재력과 무력을 쌓은 군진 세력도 호족이 되었다.
- 지방의 토착 세력인 촌주가 성장하여 호족이 된 경우가 많았다.
영·정조 대에는 사족 중심의 향촌 지배가 공고해진 것이 아니라 오히려 약화되었다.
탕평 정치로 왕권이 강화되면서 수령과 향리의 권한이 커지고, 향촌에서는 사족의 지배력이 약해지며 향전이 벌어지는 등 변화가 나타났다.
- 붕당의 폐해를 없애기 위해 탕평책을 실시하였다.
- 붕당의 근거지였던 서원을 정리하고, 이조 전랑의 후임자 추천권(자대권)과 삼사 관리 추천권(통청권)을 폐지하는 등 삼사 언론과 전랑의 권한이 약해졌다.
- 왕권이 강화되어 국왕이 정국 운영을 주도하였다.
5경·3사·제자백가에 능통한 정도로 인재를 나누어 등용한 것은 신라 원성왕의 독서삼품과로, 고려 중기 관학 진흥책이 아니다.
고려 중기에는 최충의 문헌공도 등 사학 12도가 융성하여 관학이 위축되자, 예종·인종 대에 관학을 되살리는 정책을 폈다.
- 예종은 장학 재단인 양현고를 두어 국학의 재정을 뒷받침하였다.
- 예종은 국학에 7재라는 전문 강좌를 설치하였다.
- 인종은 경사 6학을 정비하여 관학 교육 체제를 강화하였다.
‘왕즉불’ 사상을 받아들여 불교식 왕명을 사용한 나라는 고구려가 아니라 신라이다.
신라는 법흥왕부터 진덕여왕까지 불교식 왕명을 사용하여 왕이 곧 부처라는 관념으로 왕권을 신성화하였다.
- 신라는 삼국 가운데 불교를 가장 늦게 공인했으며, 이차돈의 순교에서 보듯 전통 신앙을 지닌 귀족과 마찰이 있었다.
- 삼국은 중앙 집권 체제를 확립하고 지방 세력을 통합하려던 시기에 왕실 주도로 불교를 수용하였다.
- 신라 불교는 왕실의 비호 아래 황룡사 9층 목탑 건립 등 호국 불교로 발전하였다.
「한국통사」는 간행 직후 중국·노령·미주의 한국인 동포들은 물론이고 국내에서도 비밀리에 대량 보급되어 민족적 자부심을 높여 주고 독립 투쟁정신을 크게 고취하였다.
일제는 이에 매우 당황하여 1916년 조선반도편찬위원회를 설치하고 「조선사(朝鮮史)」 37책을 편찬하였다.
옳지 않은 것은 「한국통사」의 저자가 「조선사연구초」를 집필했다는 서술이다.
「한국통사」의 저자는 박은식이고, 「조선사연구초」는 신채호의 저술이다.
- 일제의 「조선사」 편찬자들은 식민사관에 따라 한국사를 정체성·타율성으로 설명하려 하였다.
- 박은식은 민족정신을 ‘혼’으로 파악하고, 혼이 살아 있으면 나라를 되찾을 수 있다고 보았다.
- 일제가 「조선사」를 편찬한 목적은 식민 통치를 정당화하고 효율적으로 실시하려는 데 있었다.
대학교수단의 시국 선언은 4월 19일 시위를 촉발한 것이 아니라 4월 25일, 시위 이후에 발표되었다.
교수단 시위는 이승만 정부에 대한 퇴진 요구를 확산시켜 이승만 대통령의 하야를 앞당긴 계기가 되었다.
- 이승만 정부의 독재와 장기 집권이 혁명의 배경이 되었다.
- 3·15 부정 선거와 마산 시위에서 드러난 김주열 학생의 죽음이 도화선이 되었다.
- 학생이 앞장서고 시민이 합세한 민주 혁명이었다.
박지원의 「양반전」·「허생전」은 한글 소설이 아니라 한문 소설이다.
박지원은 한문 소설로 양반 사회의 위선과 무능을 풍자하였다. 한글 소설의 예로는 「홍길동전」·「춘향전」 등이 있다.
- 김정희가 추사체를 창안하여 서예의 새 경지를 열었다.
- 정선의 진경산수화, 김홍도·신윤복의 풍속화가 유행하였다.
- 강세황 등이 서양화의 원근법·명암법을 받아들여 사물을 실감 나게 표현하였다.
남측의 연합제 안과 북측의 연방제 안의 공통성을 인정한 것은 2000년 6·15 남북 공동 선언의 내용이다.
1972년 7·4 남북 공동 성명은 자주·평화·민족적 대단결의 통일 3대 원칙을 제시하였다.
- 외세에 의존하거나 간섭받지 않고 자주적으로 통일한다는 것은 자주 원칙이다.
- 무력이 아닌 평화적 방법으로 통일을 실현한다는 것은 평화 원칙이다.
- 사상·이념·제도의 차이를 초월해 민족적 대단결을 도모한다는 것은 민족적 대단결 원칙이다.
조선 독립 동맹은 조선 의용군을 거느리고 중국 공산당군(팔로군)과 함께 항일전에 참가하였다.
김두봉 등 화북 지역의 사회주의 계열 인사들이 옌안을 근거지로 결성하였으며, 조선 의용대 일부가 화북으로 이동해 조선 의용군으로 개편되었다.
- 조국 광복회 결성과 보천보 전투는 만주의 동북 항일 연군 내 한인 세력의 활동이다.
- 중국 국민당군과 연계한 항일 투쟁은 김원봉의 조선 의용대나 한국 광복군의 활동이다.
- 소련 영내로 이동해 소련군과 활동한 것은 만주의 항일 유격대 일부의 행적이다.
삼국 간섭으로 대륙을 침략하려던 일본의 기세가 꺾이자, 조선 정부 안에서는 러시아의 힘을 빌려 일본의 간섭에서 벗어나려는 움직임이 일어났다.
사료의 결과가 아닌 것은 김홍집 내각의 홍범 14조 발표이다.
사료는 1895년 삼국 간섭 이후 조선 정부에 친러 세력이 대두한 상황이다. 홍범 14조는 제2차 갑오개혁 때인 1895년 초에 반포되어 삼국 간섭보다 앞선다.
- 친러 정책에 위기를 느낀 일본은 낭인과 군대를 동원해 명성황후를 시해하였다(을미사변).
- 을미사변 뒤 신변의 위협을 느낀 고종은 러시아 공사관으로 피신하였다(아관파천).
- 친일 세력 위축 속에 박영효는 반역 음모가 발각되어 다시 일본으로 망명하였다.
일제는 산미 증식 계획을 추진하며 지주제를 철폐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지주제를 강화하였다.
증산 비용(수리 조합비·비료 대금 등)이 농민에게 전가되면서 소작농이 증가하고 식민지 지주제가 확대되었다.
- 1930년대 이후 대륙 침략과 함께 조선을 병참 기지로 삼아 공업 구조를 군수 공업 중심으로 바꾸었다.
- 토지 조사 사업 과정에서 신고되지 않은 토지와 공공 토지가 대거 총독부 소유로 편입되었다.
- 1910년 회사령을 공포하여 회사 설립을 허가제로 하고 조선인의 회사 설립을 통제하였다.
음서로 권문세족이 된 것은 향리가 아니며, 향리는 주로 과거를 통해 중앙 관리로 진출하였다.
권문세족은 음서를 통해 지위를 세습한 가문이고, 과거로 진출한 향리 출신 관리들은 신진 사대부로 성장하였다.
- 무신 집권기에 만적의 난 등 노비의 신분 해방 운동이 일어났다.
- 원 간섭기에는 원과 연결된 환관 가운데 권세가가 나타났다.
- 대외 항쟁 과정에서 군공을 세운 일반 농민이 무반으로 출세하기도 하였다.
농민·노동 쟁의가 절정에 달한 것은 1920년대가 아니라 1930년대 초반이다.
1930년대에는 쟁의 건수가 크게 늘었고, 일제의 탄압 속에서 사회주의자들이 주도한 혁명적 농민·노동조합을 중심으로 비합법·정치적 투쟁으로 바뀌었다.
- 1920년대 소작 쟁의는 소작인 조합을 중심으로 소작료 인하 등 생존권 투쟁으로 전개되었다.
- 1929년 원산 총파업은 1920년대 노동 운동 가운데 가장 큰 규모의 투쟁이었다.
- 1923년 암태도 소작 쟁의는 1920년대 대표적인 농민 운동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