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급 지방직 한국사] 12년 1회차
9급 지방직 한국사 기출문제

12년 1회차

총 20문항 · 객관식 · A4 약 1장

1 / 1
A4정답 포함
9급 지방직 한국사 기출문제모두CBT · moducbt.com

12년 1회차

총 20문항 · 객관식 · 정답·해설 포함
문제 1
고인돌을 많이 만들던 시대에 대한 설명으로 옳은 것은?
1추수용 도구로 반달 돌칼을 사용하였다.
2대표적인 토기는 빗살무늬 토기이다.
3대표적인 유적으로는 제천 창내 유적, 서울 암사동 유적 등이 있다.
4무리 가운데 경험이 많은 사람이 지도자가 되었으나 정치권력을 갖지는 못하였다.
정답 및 해설

고인돌을 많이 만들던 시기는 청동기 시대이며, 이 시기에는 추수용 도구로 반달 돌칼을 사용하였다.

고인돌은 청동기 시대 지배층의 무덤으로, 계급 사회와 정치권력의 등장을 보여 준다. 벼농사가 시작되면서 이삭을 따는 반달 돌칼이 널리 쓰였다.

  • 빗살무늬 토기 — 신석기 시대의 대표 토기이며, 청동기 시대에는 민무늬 토기가 대표적이다.
  • 제천 창내·서울 암사동 유적 — 창내는 구석기, 암사동은 신석기 유적으로 청동기 시대 유적이 아니다.
  • 경험 많은 자가 지도자가 되나 정치권력은 없음 — 평등 사회였던 구석기·신석기 시대의 모습이다.
문제 2
각 나라별 생활과 풍속에 대한 설명으로 옳지 않은 것은?
1고조선-남에게 상처를 입힌 자는 곡식으로 갚게 하였다.
2동예-다른 부족의 영역을 침범하면 노비와 소, 말로 변상하게 하였다.
3부여-길흉을 점치기 위해 소를 죽였고, 매년 10월에 제천행사를 열었다.
4고구려-신부 집 뒤에 집을 짓고 살다가 자식을 낳아 장성하면 아내를 데리고 신랑 집으로 돌아가는 제도가 있었다.
정답 및 해설

부여의 제천 행사는 10월이 아니라 12월의 영고이므로 부여에 대한 설명이 옳지 않다.

부여는 전쟁 때 소를 죽여 굽의 모양으로 길흉을 점쳤으나(우제점법), 제천 행사는 수렵 사회의 전통이 남은 12월에 열었다. 10월 제천은 고구려의 동맹, 동예의 무천이다.

  • 고조선 — 8조법에 남에게 상처를 입힌 자는 곡식으로 갚게 하였다.
  • 동예 — 다른 부족의 영역을 침범하면 노비·소·말로 변상하는 책화가 있었다.
  • 고구려 — 신부 집 뒤에 서옥을 짓고 살다 자식이 장성하면 신랑 집으로 돌아가는 서옥제가 있었다.
문제 3
시기 순으로 바르게 나열한 것은?
ㄱ. 고구려의 흥안령 일대 장악
ㄴ. 백제의 사비 천도
ㄷ. 신라의 마운령비 건립
ㄹ. 전기 가야 연맹의 약화
1ㄱ→ㄹ→ㄷ→ㄴ
2ㄱ→ㄹ→ㄴ→ㄷ
3ㄹ→ㄱ→ㄷ→ㄴ
4ㄹ→ㄱ→ㄴ→ㄷ
정답 및 해설

시기 순서는 ㄹ→ㄱ→ㄴ→ㄷ이다.

광개토대왕이 400년 신라를 구원하며 낙동강 하류까지 진출하자 금관가야 중심의 전기 가야 연맹이 약화되었다. 이후 장수왕이 유연과 함께 지두우를 분할(479)하여 흥안령 일대까지 세력을 넓혔다.

  • 백제 성왕은 538년 웅진에서 사비로 도읍을 옮겼다.
  • 신라 진흥왕은 함경도 지역까지 진출한 뒤 568년 마운령비를 세웠다.
문제 4
다음 그림에 대한 설명으로 옳지 않은 것은?
1사신도의 하나로, 북쪽 방위신이다.
2돌무지 덧널무덤의 벽면에 그려진 것이다.
3죽은 자의 사후세계를 지켜 주리라는 믿음을 표현하였다.
4고구려 시대의 고분에 그려졌는데 도교의 영향이 나타나 있다.
정답 및 해설

그림은 고구려 고분 벽화의 현무도로, 돌무지덧널무덤이 아니라 굴식 돌방무덤의 벽면에 그려진 것이다.

벽화는 널방이 있는 굴식 돌방무덤에서만 그릴 수 있으며, 돌무지덧널무덤은 신라의 무덤 양식으로 벽화가 없다.

  • 거북과 뱀이 얽힌 현무는 사신도 가운데 북쪽을 지키는 방위신이다.
  • 사신도는 죽은 자의 사후 세계를 수호해 주리라는 믿음을 담고 있다.
  • 강서대묘 등 고구려 후기 고분에 그려졌으며 도교의 영향을 보여 준다.
문제 5
밑줄 친 ㉠~㉣에 대한 설명으로 옳은 것은?
○ 문무왕 8년(668) 김유신에게 태대각간의 관등을 내리고 ㉠식읍 500호를 주었다.
○ 신문왕 7년(687) 문무 관리들에게 ㉡관료전을 차등 있게 주었다.
○ 신문왕 9년(689) 내외 관료의 ㉢녹읍을 혁파하고 매년 조(租)를 주었다.
○ 성덕왕 21년(722) 처음으로 백성에게 ㉣정전을 지급하였다.
1㉠-조세를 수취하고 노동력을 징발할 권리를 부여하였다.
2㉡-하급관료와 군인의 유가족에게 지급하였다.
3㉢-전쟁에서 큰 공을 세운 사람에게 공로의 대가로 지급하였다.
4㉣-왕권이 약화되는 배경이 되었다.
정답 및 해설

㉠ 식읍은 공신 등에게 지역의 조세를 거두고 노동력을 징발할 권리를 준 것이므로 옳은 설명이다.

신문왕은 관료전을 지급하고 녹읍을 폐지하여 귀족의 경제 기반을 약화시켰고, 성덕왕은 백성에게 정전을 지급하였다.

  • 관료전은 관리에게 직역의 대가로 조세만 거두게 한 토지로, 유가족 지급 토지가 아니다.
  • 녹읍은 관료에게 지급한 것으로, 전공에 대한 대가로 준 토지가 아니다.
  • 정전 지급은 국가의 농민 지배를 강화한 것으로 왕권 약화의 배경이 아니다.
문제 6
밑줄 친 ‘갈등’에 대한 설명으로 옳지 않은 것은?
이성계는 즉위 직후 명에 사신을 보내어 조선의 건국을 알리고, 자신의 즉위를 승인해줄 것과 국호의 제정을 명에 요청하였다. 명으로부터 승인을 받아 국내의 정치상황을 안정시키기 위함이었다. 그러나 이후 조선은 명과 외교적 갈등을 빚었다.
1조선으로 넘어온 여진인의 송환을 명이 요구함으로써 생긴 갈등
2조선이 명에 보낸 외교문서에 무례한 표현이 있다는 명의 주장에 따른 갈등
3이성계가 이인임의 아들이었다는 중국 측 기록을 둘러싼 갈등
4조선의 조공에 대해 명 황제가 내린 회사품의 양과 가치가 지나치게 적은 데 따른 갈등
정답 및 해설

조선 초 명과의 갈등에 회사품의 양과 가치가 적다는 문제는 포함되지 않는다.

건국 초 조선과 명은 여진 문제, 표전 문제, 종계변무 등으로 마찰을 빚었다.

  • 조선으로 넘어온 여진인의 송환을 명이 요구하면서 갈등이 생겼다.
  • 조선의 외교 문서(표전)에 무례한 표현이 있다며 명이 문제 삼은 표전 문제가 있었다.
  • 명의 기록에 이성계가 이인임의 아들로 잘못 적힌 것을 바로잡으려는 종계변무 문제가 있었다.
문제 7
고려시대에 대한 설명으로 옳지 않은 것은?
1지방의 모든 군현에 지방관이 파견되어 행정을 담당하였다.
2중앙군은 2군 6위, 지방군은 주현군ㆍ주진군으로 편성되었다.
3발해의 유민들을 받아들였으며, 발해 세자 대광현을 왕족으로 대우하였다.
4광종은 황제라 칭하였고, 개경을 황도(皇都)라 불렀으며, 독자적 연호를 사용하였다.
정답 및 해설

고려는 모든 군현에 지방관을 파견하지 못하였으므로, 모든 군현에 지방관이 파견되었다는 설명이 옳지 않다.

고려에는 지방관이 파견된 주현보다 파견되지 않은 속군·속현이 더 많았고, 속현은 주현을 통해 간접 통제되며 실제 행정은 향리가 맡았다.

  • 군사 제도 — 중앙군은 2군 6위, 지방군은 주현군·주진군으로 편성하였다.
  • 발해 유민 포용 — 태조는 발해 유민을 받아들이고 세자 대광현에게 왕씨 성을 내려 왕족으로 대우하였다.
  • 광종 — 황제를 칭하고 개경을 황도라 하였으며, 광덕·준풍 등 독자적 연호를 사용하였다.
문제 8
고려시대의 건축과 조형예술에 대한 설명으로 옳지 않은 것은?
1초기에는 광주 춘궁리 철불 같은 대형 철불이 많이 조성되었다.
2지역에 따라서 고대 삼국의 전통을 계승한 석탑이 조성되기도 하였다.
3팔각원당형의 승탑이 많이 만들어졌는데, 그 대표적인 예로 법천사 지광국사 현묘탑을 들 수 있다.
4후기에는 사리원의 성불사 응진전과 같은 다포식 건물이 출현하여 조선시대 건축에 큰 영향을 끼쳤다.
정답 및 해설

법천사 지광국사 현묘탑은 팔각원당형이 아닌 독특한 사각형 평면의 승탑이므로, 이를 팔각원당형의 대표 예로 든 설명이 옳지 않다.

팔각원당형은 신라 말 이래 승탑의 기본 양식이며, 고려에서는 이를 잇는 한편 지광국사 현묘탑처럼 특이한 형태의 승탑도 조성되었다.

  • 대형 철불 — 고려 초기에는 광주 춘궁리 철불처럼 대형 철불이 많이 만들어졌다.
  • 지역별 석탑 — 옛 삼국 지역에 따라 고구려·백제·신라 계통의 전통을 이은 석탑이 조성되었다.
  • 다포식 건물 — 고려 후기 성불사 응진전 같은 다포식 건물이 등장해 조선 건축에 영향을 주었다.
문제 9
민족적 자주 의식을 반영한 고려 후기의 역사서로 옳지 않은 것은?
1해동고승전
2제왕운기
3삼국유사
4해동역사
정답 및 해설

해동역사는 조선 후기 한치윤이 편찬한 역사서이므로 고려 후기의 역사서가 아니다.

무신 집권기와 원 간섭기를 거치며 고려 후기에는 민족적 자주 의식을 반영한 역사서가 편찬되었다. 해동역사는 조선 후기 실학의 영향 속에 중국·일본 자료를 폭넓게 인용해 쓴 기전체 사서이다.

  • 해동고승전 — 고려 고종 때 각훈이 우리나라 고승의 전기를 정리하였다.
  • 제왕운기 — 이승휴가 단군에서 시작하는 우리 역사를 중국사와 대등하게 서술하였다.
  • 삼국유사 — 일연이 단군 조선을 우리 역사의 시작으로 기록하였다.
문제 10
시기 순으로 바르게 나열한 것은?
ㄱ. 노리사치계는 일본에 불경과 불상을 전하였다.
ㄴ. 최승로는 시무 28조 개혁안을 올려 유교를 치국의 근본으로 삼을 것을 주장하였다.
ㄷ. 김부식은 기전체 역사서인 「삼국사기」를 편찬하였다.
ㄹ. 원효는 일심 사상을 바탕으로 다른 종파들과의 사상적 대립을 조화시키고자 노력하였다.
1ㄱ→ㄹ→ㄷ→ㄴ
2ㄱ→ㄹ→ㄴ→ㄷ
3ㄹ→ㄱ→ㄴ→ㄷ
4ㄹ→ㄱ→ㄷ→ㄴ
정답 및 해설

시기 순서는 ㄱ→ㄹ→ㄴ→ㄷ이다.

백제 성왕 때 노리사치계가 일본에 불경과 불상을 전하였고, 이어 7세기 신라의 원효가 일심 사상으로 종파 간 대립을 조화시키려 하였다.

  • 최승로의 시무 28조는 고려 성종 때 올린 것이다.
  • 김부식의 「삼국사기」는 고려 인종 때(1145) 편찬되었다.
문제 11
후삼국시대의 정치 상황에 대한 설명으로 옳지 않은 것은?
1견훤은 900년에 무진주에서 후백제를 건국하였다.
2궁예는 901년에 송악에서 후고구려를 건국하였다.
3궁예는 국호를 마진으로 바꾸고, 도읍을 철원으로 옮겼다.
4견훤은 후당(後唐), 오월(吳越)과도 통교하는 등 대중국 외교에 적극적이었다.
정답 및 해설

견훤은 무진주에서 세력을 일으킨 뒤 900년에 완산주(전주)에 도읍하여 후백제를 세웠으므로, 무진주에서 건국하였다는 설명이 옳지 않다.

견훤은 먼저 무진주(광주)를 점령해 기반을 마련하고, 이후 완산주로 옮겨 후백제를 칭하였다.

  • 후고구려 건국 — 궁예는 901년 송악에서 후고구려를 세웠다.
  • 국호·도읍 변경 — 궁예는 국호를 마진으로 바꾸고 도읍을 철원으로 옮겼다.
  • 대중국 외교 — 견훤은 후당·오월 등 중국 왕조와 통교하며 외교에 적극적이었다.
문제 12
다음 조선전기의 토지제도에 대한 설명으로 옳지 않은 것은?
(가) 지방 관청에서 그 해의 생산량을 조사하고 조(租)를 거두어 관리에게 나누어 주었다.
(나) 국가 재정과 관직에 진출한 신진 사대부의 경제적 기반을 확보하기 위해 만들었다.
(다) 과전의 세습 등으로 관료에게 지급할 토지가 부족해지자 현직 관리에게만 토지를 지급하였다.
1(가)가 실시되어 국가의 토지 지배권이 한층 강화되었다.
2(나)에서 사전은 처음에 경기지방에 한정하여 지급하였다.
3(다)가 폐지됨에 따라 지주전호제 관행이 줄어들었다.
4시기 순으로 (나), (다), (가)의 순서로 실시되었다.
정답 및 해설

(다) 직전법이 폐지되자 지주전호제는 줄어든 것이 아니라 오히려 확산되었다.

(가)는 성종 때의 관수관급제, (나)는 고려 말의 과전법, (다)는 세조 때의 직전법이다. 16세기 직전법이 폐지되면서 수조권 지급이 사라지고 토지 소유에 기반한 지주전호제가 일반화되었다.

  • 관수관급제는 관청이 조를 거두어 나누어 주게 하여 국가의 토지 지배권을 강화하였다.
  • 과전법에서 관리에게 주는 사전은 경기 지방에 한정하였다.
  • 실시 순서는 과전법, 직전법, 관수관급제 순이다.
문제 13
조선시대 시전에 대한 설명으로 옳은 것은?
1신해통공으로 육의전의 금난전권이 폐지되었다.
2경시서를 두어 시전과 지방의 장시를 통제하였다.
3시전은 보부상을 관장하여 독점판매의 혜택을 오래 누렸다.
4국역의 형태로 궁중과 관청에 필요한 물품을 조달할 의무가 있었다.
정답 및 해설

시전 상인은 특권을 받는 대신 국역으로 궁중과 관청에 필요한 물품을 조달할 의무를 졌다.

시전은 서울의 관허 상점으로, 왕실·관청에 물품을 공급하는 대가로 특정 상품의 독점 판매권과 금난전권을 얻었다.

  • 신해통공 — 육의전을 제외한 일반 시전의 금난전권을 폐지한 조치로, 육의전의 금난전권은 유지되었다.
  • 경시서 — 서울 시전의 불법 상행위와 도량형 등을 감독한 관청으로, 지방 장시를 통제하지는 않았다.
  • 보부상 — 장시를 돌아다닌 행상으로, 시전이 이들을 관장한 것이 아니다.
문제 14
다음은 조선시대에 편찬된 어떤 책의 서문이다. 이 책이 편찬된 국왕 때에 일어난 일이 아닌 것은?
전하께서는 … 신 서거정 등에게 명해 제가(諸家)의 작품을 뽑아 한 질을 만들게 하셨습니다. 저희들은 전하의 위촉을 받아 삼국시대로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사(辭), 부(賦), 시(詩), 문(文) 등 여러 문체를 수집하여 이 중 문장과 이치가 순정하여 교화에 도움이 되는 것을 취하고 분류하여 130권을 편찬해 올립니다.
1유향소를 다시 설치하고, 사창제를 폐지하였다.
2서울의 원각사 안에 대리석 10층탑을 건립하였다.
3재가녀 자손의 관리 등용을 제한하는 법을 공포하였다.
4정읍사, 처용가 등이 한글로 수록된 악학궤범이 편찬되었다.
정답 및 해설

서문은 성종 때 서거정 등이 편찬한 「동문선」의 것이며, 원각사 10층 석탑 건립은 성종이 아니라 세조 때의 일이다.

"서거정", 삼국시대 이래의 "사, 부, 시, 문"을 모은 "130권"이라는 단서로 「동문선」임을 알 수 있다.

  • 성종 때 유향소가 다시 설치되고 사창제가 폐지되었다.
  • 성종 때 「경국대전」이 완성·반포되며 재가녀 자손의 관직 진출이 제한되었다.
  • 성종 때 성현 등이 정읍사·처용가를 한글로 수록한 「악학궤범」을 편찬하였다.
문제 15
밑줄 친 ‘공(公)’이 속한 신분 계층에 대한 설명으로 옳은 것은?
공(公)은 열일곱에 사역원(司譯院) 한학과(漢學科)에 합격하여, 틈이 나면 성현(聖賢)의 책을 부지런히 연구하여 쉬는 날 없었다. 경전과 백가에 두루 통달하여 드디어 세상에 이름이 났다. … 공은 평생 고문(古文)을 좋아하였다.
- 완암집 -
1조선 초기-개시 무역에 종사하여 많은 부를 축적하였다.
2조선 중기-서원 건립을 주도하고 성현들의 제사를 받들었다.
3조선 후기-소청 운동을 통해 신분 상승 운동을 전개하였다.
4개항 전후-외세 침략에 맞서 위정 척사 운동을 주도하였다.
정답 및 해설

'공'은 역관으로 중인 계층이며, 중인은 조선 후기 소청 운동을 통해 신분 상승을 추구하였다.

"사역원 한학과"에 합격했다는 단서로 통역을 맡은 역관, 곧 기술직 중인임을 알 수 있다. 중인은 철종 때 대규모 소청 운동을 벌여 청요직 진출 허용을 요구하였다.

  • 개시 무역은 조선 후기에 활발해진 것이므로 조선 초기에 부를 쌓았다는 설명은 맞지 않다.
  • 서원 건립과 제사를 주도한 것은 사림 양반이다.
  • 위정척사 운동을 주도한 것은 보수적 유생층이다.
문제 16
조선시대 각 시기별 대외관계에 대한 설명으로 옳지 않은 것은?
115세기: 류큐에 불경이나 불종을 전해주어 그곳 불교문화 발전에 기여하였다.
216세기: 을묘왜변이 일어나자 비변사로 하여금 군사문제를 처리하도록 하였다.
317세기: 정묘호란과 병자호란의 패배로 인해 청에 대한 문화적 열등감이 팽배해졌다.
418세기: 청과 국경분쟁이 일어나 양국 대표가 백두산 일대를 답사하고 정계비를 세웠다.
정답 및 해설

호란 이후 조선에서는 청을 오랑캐로 여기는 북벌론과 소중화 의식이 확산되었으므로, 청에 대한 문화적 열등감이 팽배해졌다는 설명이 옳지 않다.

정묘·병자호란으로 군사적으로는 굴복하였으나, 사대부들은 명을 계승한 조선이 문화적으로 우월하다는 인식을 강화하였다. 청 문물을 배우자는 북학론은 18세기 후반에 대두하였다.

  • 15세기 류큐 — 조선은 류큐에 불경 등을 전해 그곳 불교문화 발전에 기여하였다.
  • 16세기 을묘왜변 — 을묘왜변을 계기로 비변사가 상설 기구가 되어 군사 문제를 처리하였다.
  • 18세기 정계비 — 숙종 때 청과 국경을 정하기 위해 백두산 일대를 답사하고 백두산정계비를 세웠다.
문제 17
밑줄 친 ‘상(上)’의 재위 시에 있었던 일로 옳은 것은?
이 책이 완성되었다. … 곤봉 등 6가지 기예는 척계광의 「기효신서」에 나왔는데 … 장헌세자가 정사를 대리하던 중 기묘년에 명하여 죽장창 등 12가지 기예를 더 넣어 도해(圖解)로 엮어 새로 신보를 만들었고, 상(上)이 즉위하자 명하여 기창 등 4가지 기예를 더 넣고 또 격구, 마상재를 덧붙여 모두 24가지 기예가 되었는데, 검서관 이덕무·박제가에게 명하여 … 주해를 붙이게 했다.
1민(民)의 상언과 격쟁의 기회를 늘려주었다.
2대전회통을 편찬하여 통치 체제를 재정리하였다.
3군역의 부담을 줄이기 위해 균역법을 시행하였다.
45군영 대신 무위영과 장어영 등 2영을 설치하였다.
정답 및 해설

밑줄 친 '상'은 정조로, 정조는 백성의 상언과 격쟁 기회를 늘려 민의를 직접 들었다.

"장헌세자" 이후 즉위한 왕, "24가지 기예", 검서관 "이덕무·박제가"라는 단서로 정조 때 편찬된 「무예도보통지」임을 알 수 있다.

  • 「대전회통」 편찬은 고종 즉위 초 흥선 대원군 집권기의 일이다.
  • 균역법은 영조 때 시행되었다.
  • 5군영을 무위영·장어영의 2영으로 개편한 것은 고종 때이다.
문제 18
(가), (나)를 주장한 인물에 대한 설명으로 옳은 것은?
(가) 내정 독립이나 참정권이나 자치를 운운하는 자 누구이냐? 너희들이 ‘동양 평화’, ‘한국 독립 보전’ 등을 담보한 맹약이 먹도 마르지 아니하여 삼천리강토를 집어 먹힌 역사를 잊었느냐? … 민중은 우리 혁명의 대본영이다. 폭력은 우리 혁명의 유일한 무기이다.
(나) 나라는 없어질 수 있으나 역사는 없어질 수 없으니 그것은 나라는 형체이고 역사는 정신이기 때문이다. … 정신이 보존되어 없어지지 않으면 형체는 부활할 때가 있을 것이다.
1(가)-대한민국 임시 정부에서 처음으로 대통령을 역임하였다.
2(가)-독사신론을 연재하여 민족주의 사학의 발판을 마련하였다.
3(나)-조선 불교 유신론을 통해 새로운 사회의 방향을 추구하였다.
4(나)-낭가 사상을 강조하여 민족독립의 정신적 기반을 만들려고 하였다.
정답 및 해설

(가)는 신채호의 조선 혁명 선언으로, 신채호는 「독사신론」을 연재하여 민족주의 사학의 토대를 마련하였다.

"민중은 우리 혁명의 대본영", "폭력은 우리 혁명의 유일한 무기"는 의열단 선언문인 조선 혁명 선언의 구절이다. (나)의 나라는 형체, 역사는 정신이라는 주장은 박은식의 「한국통사」 서문이다.

  • 대한민국 임시 정부의 첫 대통령은 이승만이며, 박은식은 그 뒤를 이은 대통령이다.
  • 「조선불교유신론」을 저술한 인물은 한용운이다.
  • 낭가 사상을 강조한 인물은 박은식이 아니라 신채호이다.
문제 19
밑줄 친 ‘그’가 일으킨 사건의 영향에 대한 설명으로 옳은 것은?
일제는 1월 28일 일본승려사건을 계기로 전쟁을 도발하였다. 일본은 이때 시라카와(白川) 대장을 사령관으로 삼아 중국과의 전쟁을 승리로 이끌었다. 그는 이해 봄 야채상으로 가장하여 일본군의 정보를 탐지한 뒤, 4월 29일 이른바 천장절 겸 전승축하기념식에 폭탄을 투척하기로 하였다. 식장에 참석하여 수류탄을 투척함으로써 파견군사령관 시라카와, 일본거류민단장 가와바다 등은 즉사하였다.
1이를 계기로 신간회가 결성되었다.
2한국 광복군 형성의 기초가 되었다.
3민족 유일당 운동의 계기가 되었다.
4미쓰야 협정이 체결되는 계기가 되었다.
정답 및 해설

'그'는 윤봉길로, 그의 의거는 중국 국민당 정부가 임시 정부를 지원하는 계기가 되어 한국광복군 형성의 기초가 되었다.

"4월 29일" "천장절 겸 전승축하기념식"에서 "시라카와"를 처단한 것은 1932년 상하이 훙커우 공원 의거이다. 이후 중국 군관 학교에 한인 특별반이 설치되는 등 무장 투쟁 역량이 길러졌다.

  • 신간회 결성(1927)은 의거 이전의 일이다.
  • 민족 유일당 운동은 1920년대 중후반에 전개되었다.
  • 미쓰야 협정(1925)은 만주 독립군 탄압을 위한 것으로 의거 이전에 체결되었다.
문제 20
(가), (나) 발표 시기의 사이에 있었던 사실로 옳지 않은 것은?
(가) 통일은 외세에 의존하거나 외세의 간섭을 받음이 없이 자주적으로 해결하여야 한다. 통일은 서로 상대방을 반대하는 무력행사에 의거하지 않고 평화적인 방법으로 실현하여야 한다. 사상과 이념, 제도의 차이를 초월하여 우선 하나의 민족으로서 민족적 대단결을 도모하여야 한다.
(나) 남과 북은 나라의 통일을 위한 남측의 연합 제안과 북측의 낮은 단계의 연방제 안이 서로 공통성이 있다고 인정하고, 앞으로 이 방향에서 통일을 지향시켜 나가기로 하였다.
1경의선 철도가 다시 연결되었다.
2북한에서 국가 주석제가 도입되었다.
3남북 이산가족이 서울과 평양을 처음 방문하였다.
4한반도 비핵화에 관한 공동 선언이 채택되었다.
정답 및 해설

(가) 7·4 남북 공동 성명(1972)과 (나) 6·15 남북 공동 선언(2000) 사이의 일이 아닌 것은 경의선 철도 재연결이다.

경의선 철도 복원은 6·15 남북 공동 선언 이후 추진되어 2000년대에 연결되었다.

  • 북한은 1972년 말 사회주의 헌법을 제정하여 국가 주석제를 도입하였다.
  • 남북 이산가족 고향 방문단의 서울·평양 첫 교환 방문은 1985년에 이루어졌다.
  • 한반도 비핵화 공동 선언은 1991년 말 채택되었다.
9급 지방직 한국사 기출문제모두CBT · moducbt.com
12년 1회차
총 20문항 · 객관식 · 정답·해설 포함
문제 1
고인돌을 많이 만들던 시대에 대한 설명으로 옳은 것은?
1추수용 도구로 반달 돌칼을 사용하였다.
2대표적인 토기는 빗살무늬 토기이다.
3대표적인 유적으로는 제천 창내 유적, 서울 암사동 유적 등이 있다.
4무리 가운데 경험이 많은 사람이 지도자가 되었으나 정치권력을 갖지는 못하였다.
정답 및 해설

고인돌을 많이 만들던 시기는 청동기 시대이며, 이 시기에는 추수용 도구로 반달 돌칼을 사용하였다.

고인돌은 청동기 시대 지배층의 무덤으로, 계급 사회와 정치권력의 등장을 보여 준다. 벼농사가 시작되면서 이삭을 따는 반달 돌칼이 널리 쓰였다.

  • 빗살무늬 토기 — 신석기 시대의 대표 토기이며, 청동기 시대에는 민무늬 토기가 대표적이다.
  • 제천 창내·서울 암사동 유적 — 창내는 구석기, 암사동은 신석기 유적으로 청동기 시대 유적이 아니다.
  • 경험 많은 자가 지도자가 되나 정치권력은 없음 — 평등 사회였던 구석기·신석기 시대의 모습이다.
문제 2
각 나라별 생활과 풍속에 대한 설명으로 옳지 않은 것은?
1고조선-남에게 상처를 입힌 자는 곡식으로 갚게 하였다.
2동예-다른 부족의 영역을 침범하면 노비와 소, 말로 변상하게 하였다.
3부여-길흉을 점치기 위해 소를 죽였고, 매년 10월에 제천행사를 열었다.
4고구려-신부 집 뒤에 집을 짓고 살다가 자식을 낳아 장성하면 아내를 데리고 신랑 집으로 돌아가는 제도가 있었다.
정답 및 해설

부여의 제천 행사는 10월이 아니라 12월의 영고이므로 부여에 대한 설명이 옳지 않다.

부여는 전쟁 때 소를 죽여 굽의 모양으로 길흉을 점쳤으나(우제점법), 제천 행사는 수렵 사회의 전통이 남은 12월에 열었다. 10월 제천은 고구려의 동맹, 동예의 무천이다.

  • 고조선 — 8조법에 남에게 상처를 입힌 자는 곡식으로 갚게 하였다.
  • 동예 — 다른 부족의 영역을 침범하면 노비·소·말로 변상하는 책화가 있었다.
  • 고구려 — 신부 집 뒤에 서옥을 짓고 살다 자식이 장성하면 신랑 집으로 돌아가는 서옥제가 있었다.
문제 3
시기 순으로 바르게 나열한 것은?
ㄱ. 고구려의 흥안령 일대 장악
ㄴ. 백제의 사비 천도
ㄷ. 신라의 마운령비 건립
ㄹ. 전기 가야 연맹의 약화
1ㄱ→ㄹ→ㄷ→ㄴ
2ㄱ→ㄹ→ㄴ→ㄷ
3ㄹ→ㄱ→ㄷ→ㄴ
4ㄹ→ㄱ→ㄴ→ㄷ
정답 및 해설

시기 순서는 ㄹ→ㄱ→ㄴ→ㄷ이다.

광개토대왕이 400년 신라를 구원하며 낙동강 하류까지 진출하자 금관가야 중심의 전기 가야 연맹이 약화되었다. 이후 장수왕이 유연과 함께 지두우를 분할(479)하여 흥안령 일대까지 세력을 넓혔다.

  • 백제 성왕은 538년 웅진에서 사비로 도읍을 옮겼다.
  • 신라 진흥왕은 함경도 지역까지 진출한 뒤 568년 마운령비를 세웠다.
문제 4
다음 그림에 대한 설명으로 옳지 않은 것은?
1사신도의 하나로, 북쪽 방위신이다.
2돌무지 덧널무덤의 벽면에 그려진 것이다.
3죽은 자의 사후세계를 지켜 주리라는 믿음을 표현하였다.
4고구려 시대의 고분에 그려졌는데 도교의 영향이 나타나 있다.
정답 및 해설

그림은 고구려 고분 벽화의 현무도로, 돌무지덧널무덤이 아니라 굴식 돌방무덤의 벽면에 그려진 것이다.

벽화는 널방이 있는 굴식 돌방무덤에서만 그릴 수 있으며, 돌무지덧널무덤은 신라의 무덤 양식으로 벽화가 없다.

  • 거북과 뱀이 얽힌 현무는 사신도 가운데 북쪽을 지키는 방위신이다.
  • 사신도는 죽은 자의 사후 세계를 수호해 주리라는 믿음을 담고 있다.
  • 강서대묘 등 고구려 후기 고분에 그려졌으며 도교의 영향을 보여 준다.
문제 5
밑줄 친 ㉠~㉣에 대한 설명으로 옳은 것은?
○ 문무왕 8년(668) 김유신에게 태대각간의 관등을 내리고 ㉠식읍 500호를 주었다.
○ 신문왕 7년(687) 문무 관리들에게 ㉡관료전을 차등 있게 주었다.
○ 신문왕 9년(689) 내외 관료의 ㉢녹읍을 혁파하고 매년 조(租)를 주었다.
○ 성덕왕 21년(722) 처음으로 백성에게 ㉣정전을 지급하였다.
1㉠-조세를 수취하고 노동력을 징발할 권리를 부여하였다.
2㉡-하급관료와 군인의 유가족에게 지급하였다.
3㉢-전쟁에서 큰 공을 세운 사람에게 공로의 대가로 지급하였다.
4㉣-왕권이 약화되는 배경이 되었다.
정답 및 해설

㉠ 식읍은 공신 등에게 지역의 조세를 거두고 노동력을 징발할 권리를 준 것이므로 옳은 설명이다.

신문왕은 관료전을 지급하고 녹읍을 폐지하여 귀족의 경제 기반을 약화시켰고, 성덕왕은 백성에게 정전을 지급하였다.

  • 관료전은 관리에게 직역의 대가로 조세만 거두게 한 토지로, 유가족 지급 토지가 아니다.
  • 녹읍은 관료에게 지급한 것으로, 전공에 대한 대가로 준 토지가 아니다.
  • 정전 지급은 국가의 농민 지배를 강화한 것으로 왕권 약화의 배경이 아니다.
문제 6
밑줄 친 ‘갈등’에 대한 설명으로 옳지 않은 것은?
이성계는 즉위 직후 명에 사신을 보내어 조선의 건국을 알리고, 자신의 즉위를 승인해줄 것과 국호의 제정을 명에 요청하였다. 명으로부터 승인을 받아 국내의 정치상황을 안정시키기 위함이었다. 그러나 이후 조선은 명과 외교적 갈등을 빚었다.
1조선으로 넘어온 여진인의 송환을 명이 요구함으로써 생긴 갈등
2조선이 명에 보낸 외교문서에 무례한 표현이 있다는 명의 주장에 따른 갈등
3이성계가 이인임의 아들이었다는 중국 측 기록을 둘러싼 갈등
4조선의 조공에 대해 명 황제가 내린 회사품의 양과 가치가 지나치게 적은 데 따른 갈등
정답 및 해설

조선 초 명과의 갈등에 회사품의 양과 가치가 적다는 문제는 포함되지 않는다.

건국 초 조선과 명은 여진 문제, 표전 문제, 종계변무 등으로 마찰을 빚었다.

  • 조선으로 넘어온 여진인의 송환을 명이 요구하면서 갈등이 생겼다.
  • 조선의 외교 문서(표전)에 무례한 표현이 있다며 명이 문제 삼은 표전 문제가 있었다.
  • 명의 기록에 이성계가 이인임의 아들로 잘못 적힌 것을 바로잡으려는 종계변무 문제가 있었다.
문제 7
고려시대에 대한 설명으로 옳지 않은 것은?
1지방의 모든 군현에 지방관이 파견되어 행정을 담당하였다.
2중앙군은 2군 6위, 지방군은 주현군ㆍ주진군으로 편성되었다.
3발해의 유민들을 받아들였으며, 발해 세자 대광현을 왕족으로 대우하였다.
4광종은 황제라 칭하였고, 개경을 황도(皇都)라 불렀으며, 독자적 연호를 사용하였다.
정답 및 해설

고려는 모든 군현에 지방관을 파견하지 못하였으므로, 모든 군현에 지방관이 파견되었다는 설명이 옳지 않다.

고려에는 지방관이 파견된 주현보다 파견되지 않은 속군·속현이 더 많았고, 속현은 주현을 통해 간접 통제되며 실제 행정은 향리가 맡았다.

  • 군사 제도 — 중앙군은 2군 6위, 지방군은 주현군·주진군으로 편성하였다.
  • 발해 유민 포용 — 태조는 발해 유민을 받아들이고 세자 대광현에게 왕씨 성을 내려 왕족으로 대우하였다.
  • 광종 — 황제를 칭하고 개경을 황도라 하였으며, 광덕·준풍 등 독자적 연호를 사용하였다.
문제 8
고려시대의 건축과 조형예술에 대한 설명으로 옳지 않은 것은?
1초기에는 광주 춘궁리 철불 같은 대형 철불이 많이 조성되었다.
2지역에 따라서 고대 삼국의 전통을 계승한 석탑이 조성되기도 하였다.
3팔각원당형의 승탑이 많이 만들어졌는데, 그 대표적인 예로 법천사 지광국사 현묘탑을 들 수 있다.
4후기에는 사리원의 성불사 응진전과 같은 다포식 건물이 출현하여 조선시대 건축에 큰 영향을 끼쳤다.
정답 및 해설

법천사 지광국사 현묘탑은 팔각원당형이 아닌 독특한 사각형 평면의 승탑이므로, 이를 팔각원당형의 대표 예로 든 설명이 옳지 않다.

팔각원당형은 신라 말 이래 승탑의 기본 양식이며, 고려에서는 이를 잇는 한편 지광국사 현묘탑처럼 특이한 형태의 승탑도 조성되었다.

  • 대형 철불 — 고려 초기에는 광주 춘궁리 철불처럼 대형 철불이 많이 만들어졌다.
  • 지역별 석탑 — 옛 삼국 지역에 따라 고구려·백제·신라 계통의 전통을 이은 석탑이 조성되었다.
  • 다포식 건물 — 고려 후기 성불사 응진전 같은 다포식 건물이 등장해 조선 건축에 영향을 주었다.
문제 9
민족적 자주 의식을 반영한 고려 후기의 역사서로 옳지 않은 것은?
1해동고승전
2제왕운기
3삼국유사
4해동역사
정답 및 해설

해동역사는 조선 후기 한치윤이 편찬한 역사서이므로 고려 후기의 역사서가 아니다.

무신 집권기와 원 간섭기를 거치며 고려 후기에는 민족적 자주 의식을 반영한 역사서가 편찬되었다. 해동역사는 조선 후기 실학의 영향 속에 중국·일본 자료를 폭넓게 인용해 쓴 기전체 사서이다.

  • 해동고승전 — 고려 고종 때 각훈이 우리나라 고승의 전기를 정리하였다.
  • 제왕운기 — 이승휴가 단군에서 시작하는 우리 역사를 중국사와 대등하게 서술하였다.
  • 삼국유사 — 일연이 단군 조선을 우리 역사의 시작으로 기록하였다.
문제 10
시기 순으로 바르게 나열한 것은?
ㄱ. 노리사치계는 일본에 불경과 불상을 전하였다.
ㄴ. 최승로는 시무 28조 개혁안을 올려 유교를 치국의 근본으로 삼을 것을 주장하였다.
ㄷ. 김부식은 기전체 역사서인 「삼국사기」를 편찬하였다.
ㄹ. 원효는 일심 사상을 바탕으로 다른 종파들과의 사상적 대립을 조화시키고자 노력하였다.
1ㄱ→ㄹ→ㄷ→ㄴ
2ㄱ→ㄹ→ㄴ→ㄷ
3ㄹ→ㄱ→ㄴ→ㄷ
4ㄹ→ㄱ→ㄷ→ㄴ
정답 및 해설

시기 순서는 ㄱ→ㄹ→ㄴ→ㄷ이다.

백제 성왕 때 노리사치계가 일본에 불경과 불상을 전하였고, 이어 7세기 신라의 원효가 일심 사상으로 종파 간 대립을 조화시키려 하였다.

  • 최승로의 시무 28조는 고려 성종 때 올린 것이다.
  • 김부식의 「삼국사기」는 고려 인종 때(1145) 편찬되었다.
문제 11
후삼국시대의 정치 상황에 대한 설명으로 옳지 않은 것은?
1견훤은 900년에 무진주에서 후백제를 건국하였다.
2궁예는 901년에 송악에서 후고구려를 건국하였다.
3궁예는 국호를 마진으로 바꾸고, 도읍을 철원으로 옮겼다.
4견훤은 후당(後唐), 오월(吳越)과도 통교하는 등 대중국 외교에 적극적이었다.
정답 및 해설

견훤은 무진주에서 세력을 일으킨 뒤 900년에 완산주(전주)에 도읍하여 후백제를 세웠으므로, 무진주에서 건국하였다는 설명이 옳지 않다.

견훤은 먼저 무진주(광주)를 점령해 기반을 마련하고, 이후 완산주로 옮겨 후백제를 칭하였다.

  • 후고구려 건국 — 궁예는 901년 송악에서 후고구려를 세웠다.
  • 국호·도읍 변경 — 궁예는 국호를 마진으로 바꾸고 도읍을 철원으로 옮겼다.
  • 대중국 외교 — 견훤은 후당·오월 등 중국 왕조와 통교하며 외교에 적극적이었다.
문제 12
다음 조선전기의 토지제도에 대한 설명으로 옳지 않은 것은?
(가) 지방 관청에서 그 해의 생산량을 조사하고 조(租)를 거두어 관리에게 나누어 주었다.
(나) 국가 재정과 관직에 진출한 신진 사대부의 경제적 기반을 확보하기 위해 만들었다.
(다) 과전의 세습 등으로 관료에게 지급할 토지가 부족해지자 현직 관리에게만 토지를 지급하였다.
1(가)가 실시되어 국가의 토지 지배권이 한층 강화되었다.
2(나)에서 사전은 처음에 경기지방에 한정하여 지급하였다.
3(다)가 폐지됨에 따라 지주전호제 관행이 줄어들었다.
4시기 순으로 (나), (다), (가)의 순서로 실시되었다.
정답 및 해설

(다) 직전법이 폐지되자 지주전호제는 줄어든 것이 아니라 오히려 확산되었다.

(가)는 성종 때의 관수관급제, (나)는 고려 말의 과전법, (다)는 세조 때의 직전법이다. 16세기 직전법이 폐지되면서 수조권 지급이 사라지고 토지 소유에 기반한 지주전호제가 일반화되었다.

  • 관수관급제는 관청이 조를 거두어 나누어 주게 하여 국가의 토지 지배권을 강화하였다.
  • 과전법에서 관리에게 주는 사전은 경기 지방에 한정하였다.
  • 실시 순서는 과전법, 직전법, 관수관급제 순이다.
문제 13
조선시대 시전에 대한 설명으로 옳은 것은?
1신해통공으로 육의전의 금난전권이 폐지되었다.
2경시서를 두어 시전과 지방의 장시를 통제하였다.
3시전은 보부상을 관장하여 독점판매의 혜택을 오래 누렸다.
4국역의 형태로 궁중과 관청에 필요한 물품을 조달할 의무가 있었다.
정답 및 해설

시전 상인은 특권을 받는 대신 국역으로 궁중과 관청에 필요한 물품을 조달할 의무를 졌다.

시전은 서울의 관허 상점으로, 왕실·관청에 물품을 공급하는 대가로 특정 상품의 독점 판매권과 금난전권을 얻었다.

  • 신해통공 — 육의전을 제외한 일반 시전의 금난전권을 폐지한 조치로, 육의전의 금난전권은 유지되었다.
  • 경시서 — 서울 시전의 불법 상행위와 도량형 등을 감독한 관청으로, 지방 장시를 통제하지는 않았다.
  • 보부상 — 장시를 돌아다닌 행상으로, 시전이 이들을 관장한 것이 아니다.
문제 14
다음은 조선시대에 편찬된 어떤 책의 서문이다. 이 책이 편찬된 국왕 때에 일어난 일이 아닌 것은?
전하께서는 … 신 서거정 등에게 명해 제가(諸家)의 작품을 뽑아 한 질을 만들게 하셨습니다. 저희들은 전하의 위촉을 받아 삼국시대로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사(辭), 부(賦), 시(詩), 문(文) 등 여러 문체를 수집하여 이 중 문장과 이치가 순정하여 교화에 도움이 되는 것을 취하고 분류하여 130권을 편찬해 올립니다.
1유향소를 다시 설치하고, 사창제를 폐지하였다.
2서울의 원각사 안에 대리석 10층탑을 건립하였다.
3재가녀 자손의 관리 등용을 제한하는 법을 공포하였다.
4정읍사, 처용가 등이 한글로 수록된 악학궤범이 편찬되었다.
정답 및 해설

서문은 성종 때 서거정 등이 편찬한 「동문선」의 것이며, 원각사 10층 석탑 건립은 성종이 아니라 세조 때의 일이다.

"서거정", 삼국시대 이래의 "사, 부, 시, 문"을 모은 "130권"이라는 단서로 「동문선」임을 알 수 있다.

  • 성종 때 유향소가 다시 설치되고 사창제가 폐지되었다.
  • 성종 때 「경국대전」이 완성·반포되며 재가녀 자손의 관직 진출이 제한되었다.
  • 성종 때 성현 등이 정읍사·처용가를 한글로 수록한 「악학궤범」을 편찬하였다.
문제 15
밑줄 친 ‘공(公)’이 속한 신분 계층에 대한 설명으로 옳은 것은?
공(公)은 열일곱에 사역원(司譯院) 한학과(漢學科)에 합격하여, 틈이 나면 성현(聖賢)의 책을 부지런히 연구하여 쉬는 날 없었다. 경전과 백가에 두루 통달하여 드디어 세상에 이름이 났다. … 공은 평생 고문(古文)을 좋아하였다.
- 완암집 -
1조선 초기-개시 무역에 종사하여 많은 부를 축적하였다.
2조선 중기-서원 건립을 주도하고 성현들의 제사를 받들었다.
3조선 후기-소청 운동을 통해 신분 상승 운동을 전개하였다.
4개항 전후-외세 침략에 맞서 위정 척사 운동을 주도하였다.
정답 및 해설

'공'은 역관으로 중인 계층이며, 중인은 조선 후기 소청 운동을 통해 신분 상승을 추구하였다.

"사역원 한학과"에 합격했다는 단서로 통역을 맡은 역관, 곧 기술직 중인임을 알 수 있다. 중인은 철종 때 대규모 소청 운동을 벌여 청요직 진출 허용을 요구하였다.

  • 개시 무역은 조선 후기에 활발해진 것이므로 조선 초기에 부를 쌓았다는 설명은 맞지 않다.
  • 서원 건립과 제사를 주도한 것은 사림 양반이다.
  • 위정척사 운동을 주도한 것은 보수적 유생층이다.
문제 16
조선시대 각 시기별 대외관계에 대한 설명으로 옳지 않은 것은?
115세기: 류큐에 불경이나 불종을 전해주어 그곳 불교문화 발전에 기여하였다.
216세기: 을묘왜변이 일어나자 비변사로 하여금 군사문제를 처리하도록 하였다.
317세기: 정묘호란과 병자호란의 패배로 인해 청에 대한 문화적 열등감이 팽배해졌다.
418세기: 청과 국경분쟁이 일어나 양국 대표가 백두산 일대를 답사하고 정계비를 세웠다.
정답 및 해설

호란 이후 조선에서는 청을 오랑캐로 여기는 북벌론과 소중화 의식이 확산되었으므로, 청에 대한 문화적 열등감이 팽배해졌다는 설명이 옳지 않다.

정묘·병자호란으로 군사적으로는 굴복하였으나, 사대부들은 명을 계승한 조선이 문화적으로 우월하다는 인식을 강화하였다. 청 문물을 배우자는 북학론은 18세기 후반에 대두하였다.

  • 15세기 류큐 — 조선은 류큐에 불경 등을 전해 그곳 불교문화 발전에 기여하였다.
  • 16세기 을묘왜변 — 을묘왜변을 계기로 비변사가 상설 기구가 되어 군사 문제를 처리하였다.
  • 18세기 정계비 — 숙종 때 청과 국경을 정하기 위해 백두산 일대를 답사하고 백두산정계비를 세웠다.
문제 17
밑줄 친 ‘상(上)’의 재위 시에 있었던 일로 옳은 것은?
이 책이 완성되었다. … 곤봉 등 6가지 기예는 척계광의 「기효신서」에 나왔는데 … 장헌세자가 정사를 대리하던 중 기묘년에 명하여 죽장창 등 12가지 기예를 더 넣어 도해(圖解)로 엮어 새로 신보를 만들었고, 상(上)이 즉위하자 명하여 기창 등 4가지 기예를 더 넣고 또 격구, 마상재를 덧붙여 모두 24가지 기예가 되었는데, 검서관 이덕무·박제가에게 명하여 … 주해를 붙이게 했다.
1민(民)의 상언과 격쟁의 기회를 늘려주었다.
2대전회통을 편찬하여 통치 체제를 재정리하였다.
3군역의 부담을 줄이기 위해 균역법을 시행하였다.
45군영 대신 무위영과 장어영 등 2영을 설치하였다.
정답 및 해설

밑줄 친 '상'은 정조로, 정조는 백성의 상언과 격쟁 기회를 늘려 민의를 직접 들었다.

"장헌세자" 이후 즉위한 왕, "24가지 기예", 검서관 "이덕무·박제가"라는 단서로 정조 때 편찬된 「무예도보통지」임을 알 수 있다.

  • 「대전회통」 편찬은 고종 즉위 초 흥선 대원군 집권기의 일이다.
  • 균역법은 영조 때 시행되었다.
  • 5군영을 무위영·장어영의 2영으로 개편한 것은 고종 때이다.
문제 18
(가), (나)를 주장한 인물에 대한 설명으로 옳은 것은?
(가) 내정 독립이나 참정권이나 자치를 운운하는 자 누구이냐? 너희들이 ‘동양 평화’, ‘한국 독립 보전’ 등을 담보한 맹약이 먹도 마르지 아니하여 삼천리강토를 집어 먹힌 역사를 잊었느냐? … 민중은 우리 혁명의 대본영이다. 폭력은 우리 혁명의 유일한 무기이다.
(나) 나라는 없어질 수 있으나 역사는 없어질 수 없으니 그것은 나라는 형체이고 역사는 정신이기 때문이다. … 정신이 보존되어 없어지지 않으면 형체는 부활할 때가 있을 것이다.
1(가)-대한민국 임시 정부에서 처음으로 대통령을 역임하였다.
2(가)-독사신론을 연재하여 민족주의 사학의 발판을 마련하였다.
3(나)-조선 불교 유신론을 통해 새로운 사회의 방향을 추구하였다.
4(나)-낭가 사상을 강조하여 민족독립의 정신적 기반을 만들려고 하였다.
정답 및 해설

(가)는 신채호의 조선 혁명 선언으로, 신채호는 「독사신론」을 연재하여 민족주의 사학의 토대를 마련하였다.

"민중은 우리 혁명의 대본영", "폭력은 우리 혁명의 유일한 무기"는 의열단 선언문인 조선 혁명 선언의 구절이다. (나)의 나라는 형체, 역사는 정신이라는 주장은 박은식의 「한국통사」 서문이다.

  • 대한민국 임시 정부의 첫 대통령은 이승만이며, 박은식은 그 뒤를 이은 대통령이다.
  • 「조선불교유신론」을 저술한 인물은 한용운이다.
  • 낭가 사상을 강조한 인물은 박은식이 아니라 신채호이다.
문제 19
밑줄 친 ‘그’가 일으킨 사건의 영향에 대한 설명으로 옳은 것은?
일제는 1월 28일 일본승려사건을 계기로 전쟁을 도발하였다. 일본은 이때 시라카와(白川) 대장을 사령관으로 삼아 중국과의 전쟁을 승리로 이끌었다. 그는 이해 봄 야채상으로 가장하여 일본군의 정보를 탐지한 뒤, 4월 29일 이른바 천장절 겸 전승축하기념식에 폭탄을 투척하기로 하였다. 식장에 참석하여 수류탄을 투척함으로써 파견군사령관 시라카와, 일본거류민단장 가와바다 등은 즉사하였다.
1이를 계기로 신간회가 결성되었다.
2한국 광복군 형성의 기초가 되었다.
3민족 유일당 운동의 계기가 되었다.
4미쓰야 협정이 체결되는 계기가 되었다.
정답 및 해설

'그'는 윤봉길로, 그의 의거는 중국 국민당 정부가 임시 정부를 지원하는 계기가 되어 한국광복군 형성의 기초가 되었다.

"4월 29일" "천장절 겸 전승축하기념식"에서 "시라카와"를 처단한 것은 1932년 상하이 훙커우 공원 의거이다. 이후 중국 군관 학교에 한인 특별반이 설치되는 등 무장 투쟁 역량이 길러졌다.

  • 신간회 결성(1927)은 의거 이전의 일이다.
  • 민족 유일당 운동은 1920년대 중후반에 전개되었다.
  • 미쓰야 협정(1925)은 만주 독립군 탄압을 위한 것으로 의거 이전에 체결되었다.
문제 20
(가), (나) 발표 시기의 사이에 있었던 사실로 옳지 않은 것은?
(가) 통일은 외세에 의존하거나 외세의 간섭을 받음이 없이 자주적으로 해결하여야 한다. 통일은 서로 상대방을 반대하는 무력행사에 의거하지 않고 평화적인 방법으로 실현하여야 한다. 사상과 이념, 제도의 차이를 초월하여 우선 하나의 민족으로서 민족적 대단결을 도모하여야 한다.
(나) 남과 북은 나라의 통일을 위한 남측의 연합 제안과 북측의 낮은 단계의 연방제 안이 서로 공통성이 있다고 인정하고, 앞으로 이 방향에서 통일을 지향시켜 나가기로 하였다.
1경의선 철도가 다시 연결되었다.
2북한에서 국가 주석제가 도입되었다.
3남북 이산가족이 서울과 평양을 처음 방문하였다.
4한반도 비핵화에 관한 공동 선언이 채택되었다.
정답 및 해설

(가) 7·4 남북 공동 성명(1972)과 (나) 6·15 남북 공동 선언(2000) 사이의 일이 아닌 것은 경의선 철도 재연결이다.

경의선 철도 복원은 6·15 남북 공동 선언 이후 추진되어 2000년대에 연결되었다.

  • 북한은 1972년 말 사회주의 헌법을 제정하여 국가 주석제를 도입하였다.
  • 남북 이산가족 고향 방문단의 서울·평양 첫 교환 방문은 1985년에 이루어졌다.
  • 한반도 비핵화 공동 선언은 1991년 말 채택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