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급 지방직 한국사] 14년 2회차
9급 지방직 한국사 기출문제

14년 2회차

총 20문항 · 객관식 · A4 약 1장

1 / 1
A4정답 포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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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년 2회차

총 20문항 · 객관식 · 정답·해설 포함
문제 1
다음 유물이 만들어진 시대의 사회상으로 옳은 것은?
  • 충북 청주 산성동 출토 가락바퀴
  • 경남 통영 연대도 출토 치레걸이
  • 인천 옹진 소야도 출토 조개 껍데기 가면
  • 강원 양양 오산리 출토 사람 얼굴 조각상
1한자의 전래로 붓이 사용되었다.
2무덤은 일반적으로 고인돌이 사용되었다.
3조, 피 등을 재배하는 농경이 시작되었다.
4반량전, 오수전 등의 중국 화폐가 사용되었다.
정답 및 해설

제시된 유물은 신석기 시대의 것이므로, 조·피 등을 재배하는 농경이 시작되었다는 설명이 옳다.

실을 뽑는 '가락바퀴', 오산리 출토 사람 얼굴 조각상, 소야도 출토 조개껍데기 가면은 모두 신석기 시대의 대표 유물이며, 이 시기에 원시 농경이 시작되었다.

  • 한자 전래로 붓이 사용된 것은 철기 시대(창원 다호리 붓)의 일이다.
  • 고인돌이 일반적인 무덤으로 쓰인 것은 청동기 시대이다.
  • 반량전·오수전 등 중국 화폐가 사용된 것은 철기 시대이다.
문제 2
통일신라시대 민정문서(장적)에 대한 설명으로 옳지 않은 것은?
1인구, 가호, 노비 및 소와 말의 증감까지 매년 작성하였다.
2토지에는 연수유전답, 촌주위답, 내시령답이 포함되어 있다.
3사람은 남녀로 나누고, 연령을 기준으로 하여 6등급으로 구분하였다.
4호(戶)는 상상호(上上戶)에서 하하호(下下戶)까지 9등급으로 구분하였다.
정답 및 해설

민정문서는 3년마다 촌의 변동 사항을 조사해 작성한 문서이므로, 매년 작성하였다는 설명이 옳지 않다.

민정문서(신라 촌락 문서)는 서원경 부근 4개 촌락의 인구·가호·토지·가축·나무 수 등을 기록한 것으로, 국가가 조세와 노동력 징발의 근거로 삼았다.

  • 토지 항목에는 백성에게 지급된 연수유전답과 촌주위답, 내시령답, 관모전답, 마전 등이 기록되어 있다.
  • 사람은 남녀로 나눈 뒤 연령에 따라 정·조자·추자·소자·제공·노공의 6등급으로 구분하였다.
  • 호는 사람의 많고 적음(인정의 다과)을 기준으로 상상호부터 하하호까지 9등급으로 구분하였다.
문제 3
밑줄 친 ‘나’에 대한 설명으로 옳지 않은 것은?
나는 도(道)를 구하는 데 뜻을 두어 덕이 높은 스승을 두루 찾아다녔다. 그러다가 진수대법사 문하에서 교관(敎觀)을 대강 배웠다. 법사께서는 강의하다가 쉬는 시간에도 늘 “관(觀)도 배우지 않을 수 없고, 경(經)도 배우지 않을 수 없다.”라고 제자들에게 훈시하였다. 내가 교관에 마음을 다 쏟는 까닭은 이 말에 깊이 감복하였기 때문이다.
1해동 천태종을 창시하였다.
2이론과 실천의 양면을 강조하였다.
3교종의 입장에서 선종을 통합하였다.
4정혜쌍수로 대표되는 결사운동을 일으켰다.
정답 및 해설

밑줄 친 '나'는 대각국사 의천이므로, 정혜쌍수를 내세운 결사운동을 일으켰다는 설명이 옳지 않다.

'진수대법사' 문하에서 '교관'을 배웠다는 단서와 경과 관을 함께 닦아야 한다는 내용은 의천의 교관겸수를 가리킨다. 정혜쌍수와 수선사 결사는 지눌의 활동이다.

  • 의천은 국청사를 중심으로 해동 천태종을 창시하였다.
  • 의천은 교관겸수를 내세워 이론과 실천의 양면을 강조하였다.
  • 의천은 교종의 입장에서 선종을 통합하려 하였다.
문제 4
다음 활동을 전개한 단체로 옳은 것은?
평양 대성학교와 정주 오산학교를 설립하였고 민족 자본을 일으키기 위해 평양에 자기 회사를 세웠다. 또한 민중계몽을 위해 태극 서관을 운영하여 출판물을 간행하였다. 그리고 장기적인 독립운동의 기반을 마련하여 독립전쟁을 수행할 목적으로 국외에 독립운동 기지 건설을 추진하였다.
1보안회
2신민회
3대한 자강회
4대한 광복회
정답 및 해설

제시된 활동을 전개한 단체는 신민회이다.

'대성학교'·'오산학교' 설립, 평양 '자기 회사', '태극 서관' 운영은 신민회의 대표 활동이며, 신민회는 국외 독립운동 기지 건설(삼원보 등)도 추진하였다.

  • 보안회는 일본의 황무지 개간권 요구를 저지한 단체이다.
  • 대한 자강회는 교육·산업 진흥과 고종 강제 퇴위 반대 운동을 벌인 단체이다.
  • 대한 광복회는 1910년대 공화정체를 목표로 군자금 모집·친일파 처단을 벌인 비밀 단체이다.
문제 5
다음 글을 쓴 인물에 대한 설명으로 옳은 것은?
이른바 3대 문제는 무엇인가. 첫째는 유교계의 정신이 오로지 제왕측에 있고, 인민 사회에 보급할 정신이 부족함이오, 둘째는 여러 나라를 돌아다니면서 천하를 변혁하려 하는 정신을 강구하지 않고, 내가 동몽(童蒙)을 찾는 것이 아니라 동몽이 나를 찾는다는 생각을 간직함이오, 셋째는 우리 대한의 유가에서 쉽고 정확한 법문을 구하지 아니하고 질질 끌고 되어 가는 대로 내버려 두는 공부만을 숭상함이다.
1‘조선심’의 개념을 중시하고 한글을 그 결정체로 보았다.
2‘5천년간 조선의 얼’이라는 글을 써서 민족 정신을 고취하였다.
3실천적인 새로운 유교 정신을 강조하는 유교구신론을 주장하였다.
43ㆍ1운동 때 민족 대표 33인의 한 사람이며, 일제의 사찰령에 반대하였다.
정답 및 해설

제시된 글은 박은식의 「유교구신론」이므로, 실천적인 새 유교 정신을 강조하는 유교구신론을 주장하였다는 설명이 옳다.

유교계의 '3대 문제'로 제왕 중심성, 소극성, 번잡한 학풍을 지적한 것은 박은식이 유교 개혁을 주장하며 내세운 내용이다. 그는 양명학에 바탕한 실천적 유교를 강조하였다.

  • '조선심'을 중시하고 한글을 그 결정체로 본 것은 문일평이다.
  • '5천년간 조선의 얼'을 연재해 민족정신을 고취한 것은 정인보이다.
  • 3·1운동 민족 대표 33인으로 사찰령에 반대한 것은 한용운이다.
문제 6
(가)∼(다)는 고려시대 대외관계와 관련된 자료이다. 이를 시기순으로 바르게 나열한 것은?
(가) 윤관이 “신이 여진에게 패한 이유는 여진군은 기병인데 우리는 보병이라 대적할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라고 아뢰었다.
(나) 서희가 소손녕에게 “우리나라는 고구려의 옛 땅이오. 그러므로 국호를 고려라 하고 평양에 도읍하였으니, 만일 영토의 경계로 따진다면, 그대 나라의 동경이 모두 우리 경내에 있거늘 어찌 침식이라 하리요.”라고 주장하였다.
(다) 유승단이 “성곽을 버리며 종사를 버리고, 바다 가운데 있는 섬에 숨어 엎드려 구차히 세월을 보내면서, 변두리의 백성으로 하여금 장정은 칼날과 화살 끝에 다 없어지게 하고, 노약자들은 노예가 되게 함은 국가를 위한 좋은 계책이 아닙니다.”라고 반대하였다.
1(가)→(나)→(다)
2(나)→(가)→(다)
3(나)→(다)→(가)
4(다)→(나)→(가)
정답 및 해설

시기순으로 나열하면 (나)→(가)→(다)이다.

(나)는 거란 1차 침입 때 서희의 외교 담판(993), (가)는 숙종 때 여진에 패한 뒤 윤관이 별무반 창설을 건의한 일, (다)는 몽골 침입기 최우의 강화도 천도(1232)에 유승단이 반대한 일이다.

  • 거란과의 항쟁(10세기 말)이 여진 정벌 준비(12세기 초)보다 앞선다.
  • 몽골 침입에 따른 강화 천도 논의는 세 사건 중 가장 늦다.
문제 7
조선 후기 예송에 대한 설명으로 옳지 않은 것은?
1갑인예송에서 남인은 조대비가 9개월복의 상복을 입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2기해예송은 서인의 주장대로 조대비가 효종을 위해 1년복을 입는 것으로 결정되었다.
3기해예송은 효종이 사망하자 조대비가 상복을 3년복으로 입을 것인가, 1년복으로 입을 것인가를 둘러싸고 일어났다.
4갑인예송은 효종비가 사망하자 조대비가 상복을 1년복으로 입을 것인가, 9개월복으로 입을 것인가를 둘러싸고 일어났다.
정답 및 해설

갑인예송에서 남인은 1년복(기년복)을 주장하였으므로, 남인이 9개월복을 주장하였다는 설명이 옳지 않다.

예송은 현종 때 효종과 효종비의 상에 조대비(자의대비)가 입을 상복 기간을 두고 서인과 남인이 대립한 사건이다. 9개월복(대공복)은 갑인예송에서 서인이 주장한 것이며, 이때는 남인의 주장이 받아들여졌다.

  • 기해예송은 효종 사망 후 3년복과 1년복을 두고 일어났다는 설명은 옳다(남인 3년복, 서인 1년복).
  • 기해예송에서 서인의 주장대로 1년복으로 결정되었다는 설명은 옳다.
  • 갑인예송은 효종비 사망 후 1년복과 9개월복을 두고 일어났다는 설명은 옳다.
문제 8
(가) 시기에 볼 수 있는 장면으로 적절한 것은?
이인좌의 난(가)규장각 설치
1당백전으로 물건을 사는 농민
2금난전권 폐지를 반기는 상인
3전(錢)으로 결작을 납부하는 지주
4경기도에 대동법 실시를 명하는 국왕
정답 및 해설

(가) 시기에 볼 수 있는 장면은 전(錢)으로 결작을 납부하는 지주이다.

(가)는 영조 때의 '이인좌의 난'(1728)부터 정조 즉위년의 '규장각 설치'(1776)까지이다. 영조는 균역법(1750)을 시행하고 부족분을 토지 1결당 결작으로 거두게 하였다.

  • 당백전은 흥선 대원군이 경복궁 중건 때 발행하였으므로 (가) 이후이다.
  • 금난전권 폐지(신해통공)는 정조 때(1791)로 규장각 설치 이후이다.
  • 경기도 대동법 실시는 광해군 때(1608)로 (가) 이전이다.
문제 9
다음 글을 쓴 인물에 대한 설명으로 옳은 것은?
이제 이 도(圖)와 해설을 만들어 겨우 열 폭밖에 되지 않는 종이에 풀어 놓았습니다만, 이것을 생각하고 익혀서 평소에 조용히 혼자 계실 때에 공부하소서. 도(道)가 이룩되고 성인이 되는 요체와 근본을 바로잡아 나라를 다스리는 근원이 모두 여기에 갖추어져 있사오니, 오직 전하께서는 이에 유의하시어 여러 번 반복하여 공부하소서.
1일본의 성리학 발전에 크게 영향을 끼쳤다.
2방납의 폐단을 개선하기 위해 수미법을 주장하였다.
3노장 사상을 포용하고 학문의 실천성을 강조하였다.
4성리학을 중심에 두면서도 양명학의 심성론을 인정하였다.
정답 및 해설

제시된 글은 이황이 선조에게 올린 『성학십도』의 일부이므로, 일본 성리학 발전에 크게 영향을 끼쳤다는 설명이 옳다.

'열 폭'의 '도(圖)와 해설'로 성인이 되는 요체를 정리해 왕에게 바친 것은 『성학십도』이다. 이황의 학문은 임진왜란 이후 일본 성리학에 큰 영향을 주었다.

  • 방납 폐단을 고치기 위해 수미법을 주장한 것은 이이이다.
  • 노장 사상을 포용하고 학문의 실천성을 강조한 것은 조식이다.
  • 이황은 『전습록논변』으로 양명학을 비판하였으므로 양명학의 심성론을 인정했다는 설명은 맞지 않는다.
문제 10
다음은 일제 강점기 국외 독립운동에 관한 사실들이다. 이를 시기 순으로 바르게 나열한 것은?
ㄱ. 대한민국 임시 정부가 지청천을 총사령으로 하는 한국광복군을 창설하였다.
ㄴ.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이상설, 이동휘 등이 중심이 된 대한 광복군 정부가 수립되었다.
ㄷ. 홍범도가 이끄는 대한 독립군을 비롯한 연합 부대는 봉오동 전투에서 대승을 거두었다.
ㄹ. 양세봉이 이끄는 조선 혁명군은 중국 의용군과 연합하여 영릉가 전투에서 일본군을 무찔렀다.
1ㄱ→ㄹ→ㄴ→ㄷ
2ㄴ→ㄷ→ㄹ→ㄱ
3ㄷ→ㄴ→ㄹ→ㄱ
4ㄹ→ㄷ→ㄱ→ㄴ
정답 및 해설

시기순으로 나열하면 ㄴ→ㄷ→ㄹ→ㄱ이다.

대한 광복군 정부 수립(1914) → 봉오동 전투(1920) → 영릉가 전투(1932) → 한국광복군 창설(1940) 순이다.

  • 대한 광복군 정부는 1910년대 연해주에서 수립된 망명 정부로 가장 앞선다.
  • 봉오동 전투는 3·1운동 직후 만주 무장 투쟁의 성과이다.
  • 영릉가 전투는 만주사변 이후 한중 연합 작전의 성과이다.
  • 한국광복군은 충칭 임시 정부가 창설한 군대로 가장 늦다.
문제 11
삼국시대 금석문 자료에 대한 설명으로 옳지 않은 것은?
1호우총 출토 청동 호우의 존재를 통해 신라와 고구려 관계를 살펴볼 수 있다.
2사택지적비를 통해 당시 백제가 도가(道家)에 대한 이해를 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3울진 봉평리 신라비를 통해 신라가 동해안의 북쪽 방면으로 세력을 확장하였음을 알 수 있다.
4충주 고구려비(중원 고구려비)를 통해 신라가 고구려에게 자신을 ‘동이(東夷)’라고 낮추어 표현했음을 알 수 있다.
정답 및 해설

충주 고구려비에서 신라를 '동이(東夷)'라 낮추어 부른 쪽은 고구려이므로, 신라가 스스로를 동이라 표현했다는 설명이 옳지 않다.

충주 고구려비에는 고구려가 신라왕을 '매금', 신라를 '동이'라 칭한 표현이 나타나, 고구려가 신라를 아래로 보는 관계였음을 보여 준다.

  • 경주 호우총에서 광개토 대왕을 기리는 명문이 새겨진 청동 호우가 출토되어 당시 신라와 고구려의 긴밀한 관계를 알 수 있다.
  • 사택지적비에는 세월의 덧없음을 한탄하는 내용이 담겨 있어 백제의 도가(노장) 사상 이해를 엿볼 수 있다.
  • 울진 봉평리 신라비는 법흥왕 때 세워진 비로, 신라가 동해안 북쪽 방면으로 세력을 넓혔음을 보여 준다.
문제 12
(가), (나)의 나라에 대한 설명으로 옳은 것만을 <보기>에서 모두 고르면?
(가) 살인자는 사형에 처하고 그 가족은 노비로 삼았다. 도둑질을 하면 12배로 변상케 했다. 남녀 간에 음란한 짓을 하거나 부인이 투기하면 모두 죽였다. 투기하는 것을 더욱 미워하여, 죽이고 나서 시체를 산 위에 버려서 썩게 했다. 친정에서 시체를 가져가려면 소와 말을 바쳐야 했다.
(나) 귀신을 믿기 때문에 국읍에 각각 한 사람씩 세워 천신에 대한 제사를 주관하게 했다. 이를 천군이라 했다. 여러 국(國)에는 각각 소도라고 하는 별읍이 있었다. 큰 나무를 세우고 방울과 북을 매달아 놓고 귀신을 섬겼다. 다른 지역에서 거기로 도망쳐 온 사람은 누구든 돌려 보내지 않았다.
- 삼국지 -

<보기>
ㄱ. (가) - 왕 아래에는 상가, 고추가 등의 대가가 있었다.
ㄴ. (가) - 농사가 흉년이 들면 국왕을 바꾸거나 죽이기도 하였다.
ㄷ. (나) - 제천 행사는 5월과 10월의 계절제로 구성되어 있었다.
ㄹ. (나) - 동이(東夷) 지역에서 가장 넓고 평탄한 곳이라 기록되어 있었다.
1ㄱ, ㄴ
2ㄱ, ㄹ
3ㄴ, ㄷ
4ㄷ, ㄹ
정답 및 해설

(가)는 부여, (나)는 삼한이며, 옳은 것은 ㄴ, ㄷ이다.

도둑질에 '12배' 변상(1책 12법)과 투기 처벌은 부여의 법속이고, '천군'과 '소도'는 삼한의 제정 분리를 보여 준다. 부여는 흉년이 들면 왕에게 책임을 물었고, 삼한은 5월 수릿날과 10월 계절제를 지냈다.

  • 상가·고추가 등의 대가는 고구려의 관직이므로 부여에 대한 설명이 아니다.
  • 동이 지역에서 가장 넓고 평탄하다고 기록된 것은 부여이므로 삼한에 대한 설명이 아니다.
문제 13
다음 중 해외로 유출된 우리 문화재는?
1신윤복의 미인도
2안견의 몽유도원도
3정선의 인왕제색도
4강희안의 고사관수도
정답 및 해설

안견의 몽유도원도는 일본 덴리대학 중앙도서관에 소장되어 있는 해외 유출 문화재이다.

몽유도원도는 안평 대군이 꿈에서 본 도원을 안견이 그린 조선 전기의 대표적 산수화로, 현재 일본에 있다.

  • 신윤복의 미인도는 조선 후기 풍속화가의 여인 그림으로, 국내(간송미술관)에 소장되어 있다.
  • 정선의 인왕제색도는 비 갠 뒤 인왕산을 그린 진경산수화로, 국내에 소장되어 있다.
  • 강희안의 고사관수도는 선비가 물을 바라보는 모습을 그린 조선 전기 그림으로, 국내에 소장되어 있다.
문제 14
조선시대 의궤에 대한 설명으로 옳지 않은 것은?
1왕실의 행사에 사용된 도구, 복식 등을 그림으로 남겨 놓았다.
2이두와 차자(借字) 및 우리의 고유한 한자어(漢字語) 연구에도 귀중한 자료이다.
3왕실 혼례와 장례, 궁중의 잔치, 국왕의 행차 등 국가의 중요한 행사를 기록하였다.
4프랑스 국립도서관에는 신미양요 때 프랑스군이 약탈해 간 어람용 의궤가 소장되어 있다.
정답 및 해설

프랑스군이 강화도 외규장각의 어람용 의궤를 약탈해 간 것은 병인양요 때이므로, 신미양요 때라는 설명이 옳지 않다.

병인양요는 병인박해를 구실로 프랑스가 강화도를 침략한 사건이고, 신미양요는 제너럴셔먼호 사건을 구실로 미국이 강화도를 침략한 사건이다. 약탈된 외규장각 의궤는 프랑스 국립도서관에 보관되다가 이후 국내로 돌아왔다.

  • 의궤는 행사에 쓰인 도구와 복식, 행렬 모습 등을 그림(도설·반차도)으로 남겨 놓았다.
  • 의궤에는 물품명 등을 이두와 차자로 적은 표기가 많아 우리 고유 한자어 연구에 귀중한 자료가 된다.
  • 의궤는 왕실 혼례·장례, 궁중 잔치, 국왕 행차 등 국가의 중요 행사를 기록한 책이다.
문제 15
밑줄 친 ‘나’에 대한 설명으로 옳은 것은?
우리가 기다리던 해방은 우리 국토를 양분하였으며, 앞으로는 그것을 영원히 양국의 영토로 만들 위험성을 내포하고 있다.……나는 통일된 조국을 건설하려다가 38도선을 베고 쓰러질지언정 일신의 구차한 안일을 취하여 단독정부를 세우는 데에는 협력하지 아니하겠다.
1통일 정부 수립을 위한 남북 협상을 추진하였다.
2한국 민주당을 결성하여 미군정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였다.
3미국에서 귀국한 후 독립 촉성 중앙 협의회를 구성하였다.
4조선 건국 준비 위원회를 조직하고 위원장으로 활동하였다.
정답 및 해설

밑줄 친 '나'는 김구이므로, 통일 정부 수립을 위한 남북 협상을 추진하였다는 설명이 옳다.

'38도선을 베고 쓰러질지언정' 단독정부 수립에 협력하지 않겠다는 내용은 김구의 「삼천만 동포에게 읍고함」(1948)이다. 김구는 김규식과 함께 평양에서 남북 협상을 추진하였다.

  • 한국 민주당을 결성해 미군정에 적극 참여한 것은 송진우·김성수 등이다.
  • 미국에서 귀국해 독립 촉성 중앙 협의회를 구성한 것은 이승만이다.
  • 조선 건국 준비 위원회를 조직하고 위원장을 맡은 것은 여운형이다.
문제 16
(가), (나) 국왕의 재위 시기에 있었던 사실로 옳은 것만을 <보기>에서 모두 고르면?
(가) 대조영의 뒤를 이어 즉위하였다. 영토 확장에 힘을 기울여 동북방의 여러 세력을 복속하고 북만주 일대를 장악하였다.
(나) 대부분의 말갈족을 복속시키고, 요동 지역으로 진출하였다. 이후 전성기를 맞은 발해를 중국에서는 해동성국(海東盛國)이라고 불렀다.

<보기>
ㄱ. (가) - 수도를 중경에서 상경으로 옮겼다.
ㄴ. (가) - 장문휴가 수군을 이끌고 당(唐)의 산둥(山東)지방을 공격하였다.
ㄷ. (나) - ‘건흥’ 연호를 사용하고, 지방 행정 조직을 정비하였다.
ㄹ. (나) - 당시 국왕을 ‘대왕’이라 표현한 정혜공주의 묘비가 만들어졌다.
1ㄱ, ㄴ
2ㄱ, ㄹ
3ㄴ, ㄷ
4ㄷ, ㄹ
정답 및 해설

(가)는 무왕, (나)는 선왕이며, 옳은 것은 ㄴ, ㄷ이다.

'대조영의 뒤를 이어' 즉위한 왕은 무왕으로, 장문휴를 보내 당의 산둥 지방을 공격하였다. '해동성국'으로 불린 전성기의 왕은 선왕으로, '건흥' 연호를 쓰고 5경 15부 62주의 지방 제도를 정비하였다.

  • 중경에서 상경으로 천도한 것은 문왕 때이다.
  • 국왕을 '대왕'으로 표현한 정혜공주 묘비는 문왕의 딸 무덤에서 나온 것으로 선왕 때가 아니다.
문제 17
다음에서 서술하고 있는 인물에 대한 설명으로 옳은 것은?
이 인물을 중심으로 한 도적 무리는 조선 전기 도적 가운데 그 세력이 가장 컸으며, 명종 14년부터 명종 17년까지 주로 활동하였다. 이들이 거점으로 삼았던 지역은 백정들이 많이 사는 지역과 공물이 운송되며 사신들의 왕래가 빈번하여 농민들의 부담이 무거웠던 역촌(驛村) 지대 및 주변에 갈대밭이 많은 곳 등이었다. 이들은 이러한 곳을 거점으로 약탈·살인·방화를 서슴지 않았다.
1광대 출신으로 승려 세력과 함께 봉기하여 서울로 들어가려고 하였다.
2허균이 이 인물을 주인공으로 하여 정치의 부패상을 비판한 소설을 썼다.
3황해도를 중심으로 경기ㆍ강원ㆍ평안ㆍ함경도 주변 지역에서 활동하였다.
4대동계라는 비밀결사를 조직하여 새 왕조를 세우려는 역성 혁명을 꿈꾸었다.
정답 및 해설

제시된 인물은 임꺽정이므로, 황해도를 중심으로 경기·강원·평안·함경도 주변에서 활동하였다는 설명이 옳다.

'명종' 때 활동한 조선 전기 최대의 도적 무리라는 단서가 임꺽정을 가리킨다. 백정 출신인 임꺽정은 황해도 구월산 일대를 거점으로 활동하였다.

  • 광대 출신으로 승려 세력과 연결된 것은 숙종 때의 장길산이다.
  • 허균이 소설의 주인공으로 삼은 인물은 홍길동이다.
  • 대동계를 조직한 것은 선조 때의 정여립이다.
문제 18
(가), (나)는 조선이 외국과 맺은 조약이다. 이와 관련한 설명 중 옳은 것은?
(가) ○ 조선국은 자주국으로 일본국과 평등한 권리를 보유한다.
○ 경기, 충청, 전라, 경상, 함경 5도 연해 중에서 통상하기 편리한 항구 두 곳을 택하여 지정한다.
(나) 이 수륙 무역 장정은 중국이 속방(屬邦)을 우대하는 뜻에서 상정한 것이고, 각 대등 국가 간의 일체 동등한 혜택을 받는 예와는 다르다.
1(가)는 ‘운요호 사건’ 이후 체결된 것이다.
2(가)에는 일본 상인의 내지 통상권에 대한 허가가 규정되어 있다.
3(나)는 갑신정변 이후 체결된 것이다.
4(나)에는 천주교의 포교권 인정이 규정되어 있다.
정답 및 해설

(가)는 강화도 조약, (나)는 조청 상민 수륙 무역 장정이며, (가)가 운요호 사건 이후 체결되었다는 설명이 옳다.

'조선국은 자주국', '항구 두 곳' 개항은 1876년 운요호 사건을 계기로 맺은 강화도 조약의 내용이고, '속방'을 명시한 수륙 무역 장정은 1882년 임오군란 직후 체결되었다.

  • 강화도 조약에는 일본 상인의 내지 통상권이 규정되지 않았으며, 내지 통상은 조청 상민 수륙 무역 장정에서 처음 허용되었다.
  • 조청 상민 수륙 무역 장정은 갑신정변이 아니라 임오군란 이후 체결되었다.
  • 천주교 포교 허용과 관련된 것은 조프 수호 통상 조약(1886)이다.
문제 19
다음 선언을 지침으로 삼았던 애국 단체의 활동에 대한 설명으로 옳은 것은?
우리는 ‘외교’, ‘준비’ 등의 미련한 꿈을 버리고 민중 직접 혁명의 수단을 취함을 선언하노라. 조선 민족의 생존을 유지하자면 강도 일본을 내쫓을지며, 강도 일본을 내쫓을지면 오직 혁명으로써 할 뿐이니, 혁명이 아니고는 강도 일본을 내쫓을 방법이 없는 바이다.
1이재명이 이완용을 습격해 중상을 입혔다.
2나석주가 동양 척식 주식 회사에 폭탄을 투척하였다.
3장인환이 샌프란시스코에서 외교 고문 스티븐스를 사살하였다.
4안중근이 만주 하얼빈 역에서 초대 통감이었던 이토 히로부미를 사살하였다.
정답 및 해설

제시된 선언은 신채호의 조선 혁명 선언으로 의열단의 지침이므로, 나석주가 동양 척식 주식회사에 폭탄을 던진 활동이 옳다.

'외교'·'준비' 노선을 버리고 '민중 직접 혁명'을 선언한 이 글은 1923년 의열단의 행동 강령이 되었다. 의열단원 나석주는 1926년 식산은행과 동양 척식 주식회사에 폭탄을 던졌다.

  • 이재명의 이완용 습격은 1909년의 개인 의거로 의열단 결성 이전이다.
  • 장인환의 스티븐스 사살은 1908년 미국에서 일어난 의거로 의열단과 관련이 없다.
  • 안중근의 이토 히로부미 사살은 1909년의 의거로 의열단 결성 이전이다.
문제 20
다음은 근대 개혁 방안에 관한 자료이다. 이를 시기 순으로 바르게 나열한 것은?
ㄱ. 내시부를 없애고 그 가운데서 재능있는 자가 있으면 뽑아 쓴다.
ㄴ. 왕실 사무와 국정 사무를 모름지기 나누어 서로 뒤섞지 아니한다.
ㄷ. 대한국 대황제는 육해군을 통솔하고 편제를 정하며 계엄과 해엄을 명한다.
ㄹ. 재정은 모두 탁지부에서 전담하여 맡고, 예산과 결산은 인민에게 공포한다.
1ㄱ→ㄴ→ㄷ→ㄹ
2ㄱ→ㄴ→ㄹ→ㄷ
3ㄴ→ㄱ→ㄷ→ㄹ
4ㄴ→ㄱ→ㄹ→ㄷ
정답 및 해설

시기순으로 나열하면 ㄱ→ㄴ→ㄹ→ㄷ이다.

ㄱ은 갑신정변의 14개조 정강(1884), ㄴ은 홍범 14조(1895), ㄹ은 관민 공동회의 헌의 6조(1898), ㄷ은 대한국 국제(1899)이다.

  • 내시부 혁파는 급진 개화파의 갑신정변 정강으로 가장 앞선다.
  • 왕실 사무와 국정 사무의 분리는 2차 갑오개혁 때 반포된 홍범 14조의 내용이다.
  • 탁지부 재정 일원화와 예산·결산 공포는 독립 협회가 주도한 헌의 6조의 내용이다.
  • 황제의 군 통수권을 규정한 대한국 국제는 광무개혁기에 반포되어 가장 늦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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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년 2회차
총 20문항 · 객관식 · 정답·해설 포함
문제 1
다음 유물이 만들어진 시대의 사회상으로 옳은 것은?
  • 충북 청주 산성동 출토 가락바퀴
  • 경남 통영 연대도 출토 치레걸이
  • 인천 옹진 소야도 출토 조개 껍데기 가면
  • 강원 양양 오산리 출토 사람 얼굴 조각상
1한자의 전래로 붓이 사용되었다.
2무덤은 일반적으로 고인돌이 사용되었다.
3조, 피 등을 재배하는 농경이 시작되었다.
4반량전, 오수전 등의 중국 화폐가 사용되었다.
정답 및 해설

제시된 유물은 신석기 시대의 것이므로, 조·피 등을 재배하는 농경이 시작되었다는 설명이 옳다.

실을 뽑는 '가락바퀴', 오산리 출토 사람 얼굴 조각상, 소야도 출토 조개껍데기 가면은 모두 신석기 시대의 대표 유물이며, 이 시기에 원시 농경이 시작되었다.

  • 한자 전래로 붓이 사용된 것은 철기 시대(창원 다호리 붓)의 일이다.
  • 고인돌이 일반적인 무덤으로 쓰인 것은 청동기 시대이다.
  • 반량전·오수전 등 중국 화폐가 사용된 것은 철기 시대이다.
문제 2
통일신라시대 민정문서(장적)에 대한 설명으로 옳지 않은 것은?
1인구, 가호, 노비 및 소와 말의 증감까지 매년 작성하였다.
2토지에는 연수유전답, 촌주위답, 내시령답이 포함되어 있다.
3사람은 남녀로 나누고, 연령을 기준으로 하여 6등급으로 구분하였다.
4호(戶)는 상상호(上上戶)에서 하하호(下下戶)까지 9등급으로 구분하였다.
정답 및 해설

민정문서는 3년마다 촌의 변동 사항을 조사해 작성한 문서이므로, 매년 작성하였다는 설명이 옳지 않다.

민정문서(신라 촌락 문서)는 서원경 부근 4개 촌락의 인구·가호·토지·가축·나무 수 등을 기록한 것으로, 국가가 조세와 노동력 징발의 근거로 삼았다.

  • 토지 항목에는 백성에게 지급된 연수유전답과 촌주위답, 내시령답, 관모전답, 마전 등이 기록되어 있다.
  • 사람은 남녀로 나눈 뒤 연령에 따라 정·조자·추자·소자·제공·노공의 6등급으로 구분하였다.
  • 호는 사람의 많고 적음(인정의 다과)을 기준으로 상상호부터 하하호까지 9등급으로 구분하였다.
문제 3
밑줄 친 ‘나’에 대한 설명으로 옳지 않은 것은?
나는 도(道)를 구하는 데 뜻을 두어 덕이 높은 스승을 두루 찾아다녔다. 그러다가 진수대법사 문하에서 교관(敎觀)을 대강 배웠다. 법사께서는 강의하다가 쉬는 시간에도 늘 “관(觀)도 배우지 않을 수 없고, 경(經)도 배우지 않을 수 없다.”라고 제자들에게 훈시하였다. 내가 교관에 마음을 다 쏟는 까닭은 이 말에 깊이 감복하였기 때문이다.
1해동 천태종을 창시하였다.
2이론과 실천의 양면을 강조하였다.
3교종의 입장에서 선종을 통합하였다.
4정혜쌍수로 대표되는 결사운동을 일으켰다.
정답 및 해설

밑줄 친 '나'는 대각국사 의천이므로, 정혜쌍수를 내세운 결사운동을 일으켰다는 설명이 옳지 않다.

'진수대법사' 문하에서 '교관'을 배웠다는 단서와 경과 관을 함께 닦아야 한다는 내용은 의천의 교관겸수를 가리킨다. 정혜쌍수와 수선사 결사는 지눌의 활동이다.

  • 의천은 국청사를 중심으로 해동 천태종을 창시하였다.
  • 의천은 교관겸수를 내세워 이론과 실천의 양면을 강조하였다.
  • 의천은 교종의 입장에서 선종을 통합하려 하였다.
문제 4
다음 활동을 전개한 단체로 옳은 것은?
평양 대성학교와 정주 오산학교를 설립하였고 민족 자본을 일으키기 위해 평양에 자기 회사를 세웠다. 또한 민중계몽을 위해 태극 서관을 운영하여 출판물을 간행하였다. 그리고 장기적인 독립운동의 기반을 마련하여 독립전쟁을 수행할 목적으로 국외에 독립운동 기지 건설을 추진하였다.
1보안회
2신민회
3대한 자강회
4대한 광복회
정답 및 해설

제시된 활동을 전개한 단체는 신민회이다.

'대성학교'·'오산학교' 설립, 평양 '자기 회사', '태극 서관' 운영은 신민회의 대표 활동이며, 신민회는 국외 독립운동 기지 건설(삼원보 등)도 추진하였다.

  • 보안회는 일본의 황무지 개간권 요구를 저지한 단체이다.
  • 대한 자강회는 교육·산업 진흥과 고종 강제 퇴위 반대 운동을 벌인 단체이다.
  • 대한 광복회는 1910년대 공화정체를 목표로 군자금 모집·친일파 처단을 벌인 비밀 단체이다.
문제 5
다음 글을 쓴 인물에 대한 설명으로 옳은 것은?
이른바 3대 문제는 무엇인가. 첫째는 유교계의 정신이 오로지 제왕측에 있고, 인민 사회에 보급할 정신이 부족함이오, 둘째는 여러 나라를 돌아다니면서 천하를 변혁하려 하는 정신을 강구하지 않고, 내가 동몽(童蒙)을 찾는 것이 아니라 동몽이 나를 찾는다는 생각을 간직함이오, 셋째는 우리 대한의 유가에서 쉽고 정확한 법문을 구하지 아니하고 질질 끌고 되어 가는 대로 내버려 두는 공부만을 숭상함이다.
1‘조선심’의 개념을 중시하고 한글을 그 결정체로 보았다.
2‘5천년간 조선의 얼’이라는 글을 써서 민족 정신을 고취하였다.
3실천적인 새로운 유교 정신을 강조하는 유교구신론을 주장하였다.
43ㆍ1운동 때 민족 대표 33인의 한 사람이며, 일제의 사찰령에 반대하였다.
정답 및 해설

제시된 글은 박은식의 「유교구신론」이므로, 실천적인 새 유교 정신을 강조하는 유교구신론을 주장하였다는 설명이 옳다.

유교계의 '3대 문제'로 제왕 중심성, 소극성, 번잡한 학풍을 지적한 것은 박은식이 유교 개혁을 주장하며 내세운 내용이다. 그는 양명학에 바탕한 실천적 유교를 강조하였다.

  • '조선심'을 중시하고 한글을 그 결정체로 본 것은 문일평이다.
  • '5천년간 조선의 얼'을 연재해 민족정신을 고취한 것은 정인보이다.
  • 3·1운동 민족 대표 33인으로 사찰령에 반대한 것은 한용운이다.
문제 6
(가)∼(다)는 고려시대 대외관계와 관련된 자료이다. 이를 시기순으로 바르게 나열한 것은?
(가) 윤관이 “신이 여진에게 패한 이유는 여진군은 기병인데 우리는 보병이라 대적할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라고 아뢰었다.
(나) 서희가 소손녕에게 “우리나라는 고구려의 옛 땅이오. 그러므로 국호를 고려라 하고 평양에 도읍하였으니, 만일 영토의 경계로 따진다면, 그대 나라의 동경이 모두 우리 경내에 있거늘 어찌 침식이라 하리요.”라고 주장하였다.
(다) 유승단이 “성곽을 버리며 종사를 버리고, 바다 가운데 있는 섬에 숨어 엎드려 구차히 세월을 보내면서, 변두리의 백성으로 하여금 장정은 칼날과 화살 끝에 다 없어지게 하고, 노약자들은 노예가 되게 함은 국가를 위한 좋은 계책이 아닙니다.”라고 반대하였다.
1(가)→(나)→(다)
2(나)→(가)→(다)
3(나)→(다)→(가)
4(다)→(나)→(가)
정답 및 해설

시기순으로 나열하면 (나)→(가)→(다)이다.

(나)는 거란 1차 침입 때 서희의 외교 담판(993), (가)는 숙종 때 여진에 패한 뒤 윤관이 별무반 창설을 건의한 일, (다)는 몽골 침입기 최우의 강화도 천도(1232)에 유승단이 반대한 일이다.

  • 거란과의 항쟁(10세기 말)이 여진 정벌 준비(12세기 초)보다 앞선다.
  • 몽골 침입에 따른 강화 천도 논의는 세 사건 중 가장 늦다.
문제 7
조선 후기 예송에 대한 설명으로 옳지 않은 것은?
1갑인예송에서 남인은 조대비가 9개월복의 상복을 입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2기해예송은 서인의 주장대로 조대비가 효종을 위해 1년복을 입는 것으로 결정되었다.
3기해예송은 효종이 사망하자 조대비가 상복을 3년복으로 입을 것인가, 1년복으로 입을 것인가를 둘러싸고 일어났다.
4갑인예송은 효종비가 사망하자 조대비가 상복을 1년복으로 입을 것인가, 9개월복으로 입을 것인가를 둘러싸고 일어났다.
정답 및 해설

갑인예송에서 남인은 1년복(기년복)을 주장하였으므로, 남인이 9개월복을 주장하였다는 설명이 옳지 않다.

예송은 현종 때 효종과 효종비의 상에 조대비(자의대비)가 입을 상복 기간을 두고 서인과 남인이 대립한 사건이다. 9개월복(대공복)은 갑인예송에서 서인이 주장한 것이며, 이때는 남인의 주장이 받아들여졌다.

  • 기해예송은 효종 사망 후 3년복과 1년복을 두고 일어났다는 설명은 옳다(남인 3년복, 서인 1년복).
  • 기해예송에서 서인의 주장대로 1년복으로 결정되었다는 설명은 옳다.
  • 갑인예송은 효종비 사망 후 1년복과 9개월복을 두고 일어났다는 설명은 옳다.
문제 8
(가) 시기에 볼 수 있는 장면으로 적절한 것은?
이인좌의 난(가)규장각 설치
1당백전으로 물건을 사는 농민
2금난전권 폐지를 반기는 상인
3전(錢)으로 결작을 납부하는 지주
4경기도에 대동법 실시를 명하는 국왕
정답 및 해설

(가) 시기에 볼 수 있는 장면은 전(錢)으로 결작을 납부하는 지주이다.

(가)는 영조 때의 '이인좌의 난'(1728)부터 정조 즉위년의 '규장각 설치'(1776)까지이다. 영조는 균역법(1750)을 시행하고 부족분을 토지 1결당 결작으로 거두게 하였다.

  • 당백전은 흥선 대원군이 경복궁 중건 때 발행하였으므로 (가) 이후이다.
  • 금난전권 폐지(신해통공)는 정조 때(1791)로 규장각 설치 이후이다.
  • 경기도 대동법 실시는 광해군 때(1608)로 (가) 이전이다.
문제 9
다음 글을 쓴 인물에 대한 설명으로 옳은 것은?
이제 이 도(圖)와 해설을 만들어 겨우 열 폭밖에 되지 않는 종이에 풀어 놓았습니다만, 이것을 생각하고 익혀서 평소에 조용히 혼자 계실 때에 공부하소서. 도(道)가 이룩되고 성인이 되는 요체와 근본을 바로잡아 나라를 다스리는 근원이 모두 여기에 갖추어져 있사오니, 오직 전하께서는 이에 유의하시어 여러 번 반복하여 공부하소서.
1일본의 성리학 발전에 크게 영향을 끼쳤다.
2방납의 폐단을 개선하기 위해 수미법을 주장하였다.
3노장 사상을 포용하고 학문의 실천성을 강조하였다.
4성리학을 중심에 두면서도 양명학의 심성론을 인정하였다.
정답 및 해설

제시된 글은 이황이 선조에게 올린 『성학십도』의 일부이므로, 일본 성리학 발전에 크게 영향을 끼쳤다는 설명이 옳다.

'열 폭'의 '도(圖)와 해설'로 성인이 되는 요체를 정리해 왕에게 바친 것은 『성학십도』이다. 이황의 학문은 임진왜란 이후 일본 성리학에 큰 영향을 주었다.

  • 방납 폐단을 고치기 위해 수미법을 주장한 것은 이이이다.
  • 노장 사상을 포용하고 학문의 실천성을 강조한 것은 조식이다.
  • 이황은 『전습록논변』으로 양명학을 비판하였으므로 양명학의 심성론을 인정했다는 설명은 맞지 않는다.
문제 10
다음은 일제 강점기 국외 독립운동에 관한 사실들이다. 이를 시기 순으로 바르게 나열한 것은?
ㄱ. 대한민국 임시 정부가 지청천을 총사령으로 하는 한국광복군을 창설하였다.
ㄴ.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이상설, 이동휘 등이 중심이 된 대한 광복군 정부가 수립되었다.
ㄷ. 홍범도가 이끄는 대한 독립군을 비롯한 연합 부대는 봉오동 전투에서 대승을 거두었다.
ㄹ. 양세봉이 이끄는 조선 혁명군은 중국 의용군과 연합하여 영릉가 전투에서 일본군을 무찔렀다.
1ㄱ→ㄹ→ㄴ→ㄷ
2ㄴ→ㄷ→ㄹ→ㄱ
3ㄷ→ㄴ→ㄹ→ㄱ
4ㄹ→ㄷ→ㄱ→ㄴ
정답 및 해설

시기순으로 나열하면 ㄴ→ㄷ→ㄹ→ㄱ이다.

대한 광복군 정부 수립(1914) → 봉오동 전투(1920) → 영릉가 전투(1932) → 한국광복군 창설(1940) 순이다.

  • 대한 광복군 정부는 1910년대 연해주에서 수립된 망명 정부로 가장 앞선다.
  • 봉오동 전투는 3·1운동 직후 만주 무장 투쟁의 성과이다.
  • 영릉가 전투는 만주사변 이후 한중 연합 작전의 성과이다.
  • 한국광복군은 충칭 임시 정부가 창설한 군대로 가장 늦다.
문제 11
삼국시대 금석문 자료에 대한 설명으로 옳지 않은 것은?
1호우총 출토 청동 호우의 존재를 통해 신라와 고구려 관계를 살펴볼 수 있다.
2사택지적비를 통해 당시 백제가 도가(道家)에 대한 이해를 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3울진 봉평리 신라비를 통해 신라가 동해안의 북쪽 방면으로 세력을 확장하였음을 알 수 있다.
4충주 고구려비(중원 고구려비)를 통해 신라가 고구려에게 자신을 ‘동이(東夷)’라고 낮추어 표현했음을 알 수 있다.
정답 및 해설

충주 고구려비에서 신라를 '동이(東夷)'라 낮추어 부른 쪽은 고구려이므로, 신라가 스스로를 동이라 표현했다는 설명이 옳지 않다.

충주 고구려비에는 고구려가 신라왕을 '매금', 신라를 '동이'라 칭한 표현이 나타나, 고구려가 신라를 아래로 보는 관계였음을 보여 준다.

  • 경주 호우총에서 광개토 대왕을 기리는 명문이 새겨진 청동 호우가 출토되어 당시 신라와 고구려의 긴밀한 관계를 알 수 있다.
  • 사택지적비에는 세월의 덧없음을 한탄하는 내용이 담겨 있어 백제의 도가(노장) 사상 이해를 엿볼 수 있다.
  • 울진 봉평리 신라비는 법흥왕 때 세워진 비로, 신라가 동해안 북쪽 방면으로 세력을 넓혔음을 보여 준다.
문제 12
(가), (나)의 나라에 대한 설명으로 옳은 것만을 <보기>에서 모두 고르면?
(가) 살인자는 사형에 처하고 그 가족은 노비로 삼았다. 도둑질을 하면 12배로 변상케 했다. 남녀 간에 음란한 짓을 하거나 부인이 투기하면 모두 죽였다. 투기하는 것을 더욱 미워하여, 죽이고 나서 시체를 산 위에 버려서 썩게 했다. 친정에서 시체를 가져가려면 소와 말을 바쳐야 했다.
(나) 귀신을 믿기 때문에 국읍에 각각 한 사람씩 세워 천신에 대한 제사를 주관하게 했다. 이를 천군이라 했다. 여러 국(國)에는 각각 소도라고 하는 별읍이 있었다. 큰 나무를 세우고 방울과 북을 매달아 놓고 귀신을 섬겼다. 다른 지역에서 거기로 도망쳐 온 사람은 누구든 돌려 보내지 않았다.
- 삼국지 -

<보기>
ㄱ. (가) - 왕 아래에는 상가, 고추가 등의 대가가 있었다.
ㄴ. (가) - 농사가 흉년이 들면 국왕을 바꾸거나 죽이기도 하였다.
ㄷ. (나) - 제천 행사는 5월과 10월의 계절제로 구성되어 있었다.
ㄹ. (나) - 동이(東夷) 지역에서 가장 넓고 평탄한 곳이라 기록되어 있었다.
1ㄱ, ㄴ
2ㄱ, ㄹ
3ㄴ, ㄷ
4ㄷ, ㄹ
정답 및 해설

(가)는 부여, (나)는 삼한이며, 옳은 것은 ㄴ, ㄷ이다.

도둑질에 '12배' 변상(1책 12법)과 투기 처벌은 부여의 법속이고, '천군'과 '소도'는 삼한의 제정 분리를 보여 준다. 부여는 흉년이 들면 왕에게 책임을 물었고, 삼한은 5월 수릿날과 10월 계절제를 지냈다.

  • 상가·고추가 등의 대가는 고구려의 관직이므로 부여에 대한 설명이 아니다.
  • 동이 지역에서 가장 넓고 평탄하다고 기록된 것은 부여이므로 삼한에 대한 설명이 아니다.
문제 13
다음 중 해외로 유출된 우리 문화재는?
1신윤복의 미인도
2안견의 몽유도원도
3정선의 인왕제색도
4강희안의 고사관수도
정답 및 해설

안견의 몽유도원도는 일본 덴리대학 중앙도서관에 소장되어 있는 해외 유출 문화재이다.

몽유도원도는 안평 대군이 꿈에서 본 도원을 안견이 그린 조선 전기의 대표적 산수화로, 현재 일본에 있다.

  • 신윤복의 미인도는 조선 후기 풍속화가의 여인 그림으로, 국내(간송미술관)에 소장되어 있다.
  • 정선의 인왕제색도는 비 갠 뒤 인왕산을 그린 진경산수화로, 국내에 소장되어 있다.
  • 강희안의 고사관수도는 선비가 물을 바라보는 모습을 그린 조선 전기 그림으로, 국내에 소장되어 있다.
문제 14
조선시대 의궤에 대한 설명으로 옳지 않은 것은?
1왕실의 행사에 사용된 도구, 복식 등을 그림으로 남겨 놓았다.
2이두와 차자(借字) 및 우리의 고유한 한자어(漢字語) 연구에도 귀중한 자료이다.
3왕실 혼례와 장례, 궁중의 잔치, 국왕의 행차 등 국가의 중요한 행사를 기록하였다.
4프랑스 국립도서관에는 신미양요 때 프랑스군이 약탈해 간 어람용 의궤가 소장되어 있다.
정답 및 해설

프랑스군이 강화도 외규장각의 어람용 의궤를 약탈해 간 것은 병인양요 때이므로, 신미양요 때라는 설명이 옳지 않다.

병인양요는 병인박해를 구실로 프랑스가 강화도를 침략한 사건이고, 신미양요는 제너럴셔먼호 사건을 구실로 미국이 강화도를 침략한 사건이다. 약탈된 외규장각 의궤는 프랑스 국립도서관에 보관되다가 이후 국내로 돌아왔다.

  • 의궤는 행사에 쓰인 도구와 복식, 행렬 모습 등을 그림(도설·반차도)으로 남겨 놓았다.
  • 의궤에는 물품명 등을 이두와 차자로 적은 표기가 많아 우리 고유 한자어 연구에 귀중한 자료가 된다.
  • 의궤는 왕실 혼례·장례, 궁중 잔치, 국왕 행차 등 국가의 중요 행사를 기록한 책이다.
문제 15
밑줄 친 ‘나’에 대한 설명으로 옳은 것은?
우리가 기다리던 해방은 우리 국토를 양분하였으며, 앞으로는 그것을 영원히 양국의 영토로 만들 위험성을 내포하고 있다.……나는 통일된 조국을 건설하려다가 38도선을 베고 쓰러질지언정 일신의 구차한 안일을 취하여 단독정부를 세우는 데에는 협력하지 아니하겠다.
1통일 정부 수립을 위한 남북 협상을 추진하였다.
2한국 민주당을 결성하여 미군정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였다.
3미국에서 귀국한 후 독립 촉성 중앙 협의회를 구성하였다.
4조선 건국 준비 위원회를 조직하고 위원장으로 활동하였다.
정답 및 해설

밑줄 친 '나'는 김구이므로, 통일 정부 수립을 위한 남북 협상을 추진하였다는 설명이 옳다.

'38도선을 베고 쓰러질지언정' 단독정부 수립에 협력하지 않겠다는 내용은 김구의 「삼천만 동포에게 읍고함」(1948)이다. 김구는 김규식과 함께 평양에서 남북 협상을 추진하였다.

  • 한국 민주당을 결성해 미군정에 적극 참여한 것은 송진우·김성수 등이다.
  • 미국에서 귀국해 독립 촉성 중앙 협의회를 구성한 것은 이승만이다.
  • 조선 건국 준비 위원회를 조직하고 위원장을 맡은 것은 여운형이다.
문제 16
(가), (나) 국왕의 재위 시기에 있었던 사실로 옳은 것만을 <보기>에서 모두 고르면?
(가) 대조영의 뒤를 이어 즉위하였다. 영토 확장에 힘을 기울여 동북방의 여러 세력을 복속하고 북만주 일대를 장악하였다.
(나) 대부분의 말갈족을 복속시키고, 요동 지역으로 진출하였다. 이후 전성기를 맞은 발해를 중국에서는 해동성국(海東盛國)이라고 불렀다.

<보기>
ㄱ. (가) - 수도를 중경에서 상경으로 옮겼다.
ㄴ. (가) - 장문휴가 수군을 이끌고 당(唐)의 산둥(山東)지방을 공격하였다.
ㄷ. (나) - ‘건흥’ 연호를 사용하고, 지방 행정 조직을 정비하였다.
ㄹ. (나) - 당시 국왕을 ‘대왕’이라 표현한 정혜공주의 묘비가 만들어졌다.
1ㄱ, ㄴ
2ㄱ, ㄹ
3ㄴ, ㄷ
4ㄷ, ㄹ
정답 및 해설

(가)는 무왕, (나)는 선왕이며, 옳은 것은 ㄴ, ㄷ이다.

'대조영의 뒤를 이어' 즉위한 왕은 무왕으로, 장문휴를 보내 당의 산둥 지방을 공격하였다. '해동성국'으로 불린 전성기의 왕은 선왕으로, '건흥' 연호를 쓰고 5경 15부 62주의 지방 제도를 정비하였다.

  • 중경에서 상경으로 천도한 것은 문왕 때이다.
  • 국왕을 '대왕'으로 표현한 정혜공주 묘비는 문왕의 딸 무덤에서 나온 것으로 선왕 때가 아니다.
문제 17
다음에서 서술하고 있는 인물에 대한 설명으로 옳은 것은?
이 인물을 중심으로 한 도적 무리는 조선 전기 도적 가운데 그 세력이 가장 컸으며, 명종 14년부터 명종 17년까지 주로 활동하였다. 이들이 거점으로 삼았던 지역은 백정들이 많이 사는 지역과 공물이 운송되며 사신들의 왕래가 빈번하여 농민들의 부담이 무거웠던 역촌(驛村) 지대 및 주변에 갈대밭이 많은 곳 등이었다. 이들은 이러한 곳을 거점으로 약탈·살인·방화를 서슴지 않았다.
1광대 출신으로 승려 세력과 함께 봉기하여 서울로 들어가려고 하였다.
2허균이 이 인물을 주인공으로 하여 정치의 부패상을 비판한 소설을 썼다.
3황해도를 중심으로 경기ㆍ강원ㆍ평안ㆍ함경도 주변 지역에서 활동하였다.
4대동계라는 비밀결사를 조직하여 새 왕조를 세우려는 역성 혁명을 꿈꾸었다.
정답 및 해설

제시된 인물은 임꺽정이므로, 황해도를 중심으로 경기·강원·평안·함경도 주변에서 활동하였다는 설명이 옳다.

'명종' 때 활동한 조선 전기 최대의 도적 무리라는 단서가 임꺽정을 가리킨다. 백정 출신인 임꺽정은 황해도 구월산 일대를 거점으로 활동하였다.

  • 광대 출신으로 승려 세력과 연결된 것은 숙종 때의 장길산이다.
  • 허균이 소설의 주인공으로 삼은 인물은 홍길동이다.
  • 대동계를 조직한 것은 선조 때의 정여립이다.
문제 18
(가), (나)는 조선이 외국과 맺은 조약이다. 이와 관련한 설명 중 옳은 것은?
(가) ○ 조선국은 자주국으로 일본국과 평등한 권리를 보유한다.
○ 경기, 충청, 전라, 경상, 함경 5도 연해 중에서 통상하기 편리한 항구 두 곳을 택하여 지정한다.
(나) 이 수륙 무역 장정은 중국이 속방(屬邦)을 우대하는 뜻에서 상정한 것이고, 각 대등 국가 간의 일체 동등한 혜택을 받는 예와는 다르다.
1(가)는 ‘운요호 사건’ 이후 체결된 것이다.
2(가)에는 일본 상인의 내지 통상권에 대한 허가가 규정되어 있다.
3(나)는 갑신정변 이후 체결된 것이다.
4(나)에는 천주교의 포교권 인정이 규정되어 있다.
정답 및 해설

(가)는 강화도 조약, (나)는 조청 상민 수륙 무역 장정이며, (가)가 운요호 사건 이후 체결되었다는 설명이 옳다.

'조선국은 자주국', '항구 두 곳' 개항은 1876년 운요호 사건을 계기로 맺은 강화도 조약의 내용이고, '속방'을 명시한 수륙 무역 장정은 1882년 임오군란 직후 체결되었다.

  • 강화도 조약에는 일본 상인의 내지 통상권이 규정되지 않았으며, 내지 통상은 조청 상민 수륙 무역 장정에서 처음 허용되었다.
  • 조청 상민 수륙 무역 장정은 갑신정변이 아니라 임오군란 이후 체결되었다.
  • 천주교 포교 허용과 관련된 것은 조프 수호 통상 조약(1886)이다.
문제 19
다음 선언을 지침으로 삼았던 애국 단체의 활동에 대한 설명으로 옳은 것은?
우리는 ‘외교’, ‘준비’ 등의 미련한 꿈을 버리고 민중 직접 혁명의 수단을 취함을 선언하노라. 조선 민족의 생존을 유지하자면 강도 일본을 내쫓을지며, 강도 일본을 내쫓을지면 오직 혁명으로써 할 뿐이니, 혁명이 아니고는 강도 일본을 내쫓을 방법이 없는 바이다.
1이재명이 이완용을 습격해 중상을 입혔다.
2나석주가 동양 척식 주식 회사에 폭탄을 투척하였다.
3장인환이 샌프란시스코에서 외교 고문 스티븐스를 사살하였다.
4안중근이 만주 하얼빈 역에서 초대 통감이었던 이토 히로부미를 사살하였다.
정답 및 해설

제시된 선언은 신채호의 조선 혁명 선언으로 의열단의 지침이므로, 나석주가 동양 척식 주식회사에 폭탄을 던진 활동이 옳다.

'외교'·'준비' 노선을 버리고 '민중 직접 혁명'을 선언한 이 글은 1923년 의열단의 행동 강령이 되었다. 의열단원 나석주는 1926년 식산은행과 동양 척식 주식회사에 폭탄을 던졌다.

  • 이재명의 이완용 습격은 1909년의 개인 의거로 의열단 결성 이전이다.
  • 장인환의 스티븐스 사살은 1908년 미국에서 일어난 의거로 의열단과 관련이 없다.
  • 안중근의 이토 히로부미 사살은 1909년의 의거로 의열단 결성 이전이다.
문제 20
다음은 근대 개혁 방안에 관한 자료이다. 이를 시기 순으로 바르게 나열한 것은?
ㄱ. 내시부를 없애고 그 가운데서 재능있는 자가 있으면 뽑아 쓴다.
ㄴ. 왕실 사무와 국정 사무를 모름지기 나누어 서로 뒤섞지 아니한다.
ㄷ. 대한국 대황제는 육해군을 통솔하고 편제를 정하며 계엄과 해엄을 명한다.
ㄹ. 재정은 모두 탁지부에서 전담하여 맡고, 예산과 결산은 인민에게 공포한다.
1ㄱ→ㄴ→ㄷ→ㄹ
2ㄱ→ㄴ→ㄹ→ㄷ
3ㄴ→ㄱ→ㄷ→ㄹ
4ㄴ→ㄱ→ㄹ→ㄷ
정답 및 해설

시기순으로 나열하면 ㄱ→ㄴ→ㄹ→ㄷ이다.

ㄱ은 갑신정변의 14개조 정강(1884), ㄴ은 홍범 14조(1895), ㄹ은 관민 공동회의 헌의 6조(1898), ㄷ은 대한국 국제(1899)이다.

  • 내시부 혁파는 급진 개화파의 갑신정변 정강으로 가장 앞선다.
  • 왕실 사무와 국정 사무의 분리는 2차 갑오개혁 때 반포된 홍범 14조의 내용이다.
  • 탁지부 재정 일원화와 예산·결산 공포는 독립 협회가 주도한 헌의 6조의 내용이다.
  • 황제의 군 통수권을 규정한 대한국 국제는 광무개혁기에 반포되어 가장 늦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