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서는 백성들에게 금하는 법 8조가 있었다. 그것은 대개 사람을 죽인 자는 즉시 죽이고, 남에게 상처를 입히는 자는 곡식으로 갚는다. 도둑질을 한 자는 노비로 삼는다. 용서받고자 하는 자는 한 사람마다 50만 전을 내야 한다. 비록 용서를 받아 보통 백성이 되어도 사람들이 이를 부끄럽게 여겨 혼인을 하고자 해도 짝을 구할 수 없다.
㉠은 고조선이며, 고조선은 중국의 한과 대립할 정도로 성장하였다.
'백성들에게 금하는 법 8조', 사람을 죽인 자는 죽이고 상처를 입힌 자는 곡식으로 갚으며 도둑질한 자는 노비로 삼는다는 내용은 고조선의 8조법이다. 고조선은 위만 이후 세력을 키워 한과 대립하다가 한 무제의 침공으로 멸망하였다.
- 옥저와 동예를 정복한 나라는 고구려이다.
- 족외혼과 책화의 풍습은 동예의 특징이다.
- 마가·우가 등 가(加)들이 다스린 별도의 행정구역 사출도는 부여에 있었다.
ㄱ. 불교를 수용하고, 율령을 반포하였다.
ㄴ. 고국원왕이 평양성전투에서 전사하였다.
ㄷ. 을파소를 등용하여 진대법을 실시하였다.
ㄹ. 한성을 공격하여 함락시키고 개로왕을 죽였다.
시기 순서는 ㄷ→ㄴ→ㄱ→ㄹ이다.
을파소를 등용해 진대법을 실시한 것은 2세기 말 고국천왕 때이다. 고국원왕은 백제 근초고왕의 공격으로 371년 평양성에서 전사하였고, 그 뒤를 이은 소수림왕이 불교를 수용(372)하고 율령을 반포(373)하였다. 장수왕은 475년 한성을 함락하고 개로왕을 죽였다.
- ㄴ→ㄷ→ㄱ→ㄹ은 고국원왕의 전사(371)를 고국천왕의 진대법 실시(194)보다 앞에 두어 틀렸다.
- ㄴ→ㄷ→ㄹ→ㄱ은 ㄴ·ㄷ의 순서가 뒤바뀌었고, 장수왕의 한성 함락(475)을 소수림왕의 불교 수용·율령 반포보다 앞에 두어 틀렸다.
- ㄷ→ㄴ→ㄹ→ㄱ은 장수왕의 한성 함락을 소수림왕의 불교 수용·율령 반포보다 앞에 두어 틀렸다.
(가) 국호를 신라로 바꾸고, 왕의 칭호도 마립간에서 왕으로 고쳤다. 대외적으로는 우산국을 복속시켰다.
(나) 한강 유역을 빼앗고, 고령 지역의 대가야를 정복하였다. 북쪽으로는 함경도 지역까지 진출하였다.
(가)는 지증왕, (나)는 진흥왕이므로 그 사이인 법흥왕 때 병부를 설치하고 백관의 공복을 제정한 사실이 해당한다.
'국호를 신라로', '마립간에서 왕으로', '우산국 복속'은 지증왕의 업적이고, 한강 유역 확보와 '대가야 정복', 함경도 진출은 진흥왕의 업적이다. 법흥왕은 병부 설치, 율령 반포, 공복 제정, 불교 공인 등으로 체제를 정비하였다.
- 백제 동성왕과의 혼인 동맹은 지증왕 이전인 소지 마립간 때의 일이다.
- 김씨에 의한 왕위 계승권 확립은 내물 마립간 때의 일이다.
- 진골 귀족의 반발로 녹읍이 부활한 것은 통일 이후 경덕왕 때이다.
1970년대 정책이 아닌 것은 금융실명제의 실시이다.
금융실명제는 1993년 김영삼 정부가 대통령 긴급 재정 경제 명령으로 전격 시행한 정책이다. 나머지는 모두 박정희 정부의 1970년대 정책이다.
- 새마을운동: 1970년에 제창되어 농촌 환경 개선과 소득 증대를 내세우며 전국적으로 추진되었다.
- 통일벼 보급: 1970년대에 다수확 품종인 통일벼가 전국에 보급되어 쌀 자급에 기여하였다.
- 수출 주도형 중화학 공업화: 1973년 중화학 공업화 선언 이후 철강·조선·석유화학 등을 집중 육성하였다.
향회라는 것이 한 마을 사민(士民)의 공론에 따른 것이 아니고, 수령의 손 아래 놀아나는 좌수·별감들이 통문을 돌려 불러 모은 것에 불과합니다. 그 향회에서는 관의 비용이 부족하다는 핑계로 제멋대로 돈을 거두고 법을 만드니, 일의 원통함이 이보다 심한 것이 없습니다.
자료는 조선 후기 향회가 수령의 통제 아래 들어간 모습으로, 이 시기에는 수령과 향리의 권한이 오히려 강화되었으므로 '영향력이 약해졌다'는 설명이 옳지 않다.
'수령의 손 아래 놀아나는 좌수·별감', 관의 비용을 핑계로 돈을 거두는 향회는 사족 중심의 자치 기구였던 향회가 수령의 부세 자문 기구로 바뀌었음을 보여 준다. 사족의 향촌 지배력이 약해지자 수령과 향리 중심의 관 주도 향촌 지배가 강화되었다.
- 사족의 향촌 지배력 약화는 이 현상의 배경으로 옳다.
- 향회가 수령의 부세 자문 기구로 전락한 것은 자료의 내용과 일치한다.
- 양반 사족과 부농층(신향)이 향촌의 주도권을 다툰 향전도 이 시기의 배경으로 옳다.
광복 직후의 사실은 모스크바 3상 회의에서 한반도 문제가 논의된 것이다.
1945년 12월 미·영·소 외상이 모스크바에 모여 한반도에 임시 민주 정부 수립, 미·소 공동 위원회 설치, 최대 5년간의 신탁 통치 등을 결정하였다.
- 조선건국동맹: 여운형이 광복 이전인 1944년에 비밀리에 조직하였고, 광복 직후에는 이를 바탕으로 조선 건국 준비 위원회를 결성하였다.
- 대한민국 건국강령: 대한민국임시정부가 1941년 충칭에서 조소앙의 삼균주의를 바탕으로 발표하였다.
- 우리말 큰사전 편찬: 일제강점기인 1920년대 말에 편찬 작업이 시작되었으나 조선어학회 사건(1942)으로 중단되었다.
심충겸이 장원 급제를 하자 전랑으로 천거하려고 하였다. 김효원이 “외척은 쓸 수 없다.” 하며 막으니, 심의겸이 “외척이 원흉의 문객보다는 낫지 않느냐.” 하였다. 이때 김효원 편을 드는 사람들은 “효원의 말은 공론에서 나온 것이다. 그런데 의겸이 사사로운 혐의로 좋은 선비를 배척하니 매우 옳지 못하다.” 하였다.
자료는 이조 전랑 자리를 둘러싼 심의겸과 김효원의 대립으로, 그 결과 사림이 동인과 서인으로 나뉘었다.
선조 때 '전랑' 천거를 두고 김효원을 지지한 신진 사림이 동인, 심의겸을 지지한 기성 사림이 서인이 되었다.
- 남인과 북인으로의 분화는 정여립 모반 사건과 정철의 건저의 문제 처리를 둘러싸고 동인이 나뉜 것이다.
- 노론과 소론으로의 분화는 숙종 때 경신환국 이후 남인 처벌 문제 등으로 서인이 나뉜 것이다.
- 서인과 남인 간의 예송논쟁은 현종 때 효종과 효종비의 상례 문제로 일어났다.
영의정 이원익이 의논하기를, “각 고을에서 진상하는 공물이 각 사의 방납인들에 의해 중간에서 막혀 물건 하나의 가격이 몇 배 또는 몇십 배, 몇백 배가 되어 그 폐단이 이미 고질화 되었는데, 기전(畿甸)의 경우는 더욱 심합니다. 그러니 지금 마땅히 별도로 하나의 청(廳)을 설치하여 매년 봄·가을에 백성들에게서 쌀을 거두되, 1결당 매번 8말씩 거두어 본청(廳)에 보내면 본청에서는 당시의 물가를 보아 가격을 넉넉하게 헤아려 정해 거두어들인 쌀로 방납인에게 주어 필요한 때에 사들이도록 함으로써 간사한 꾀를 써 물가가 오르게 하는 길을 끊으셔야 합니다. …(후략)…”
밑줄 친 '청'은 대동법을 관장한 선혜청이다.
이원익의 건의로 광해군 때 '방납인'의 폐단이 심한 '기전(畿甸)', 곧 경기도부터 공물을 토지 결수에 따라 쌀로 거두는 대동법이 시행되었고, 이를 담당하기 위해 선혜청이 설치되었다.
- 어영청은 인조 때 설치되어 효종 때 북벌의 핵심 부대가 된 군영이다.
- 상평청은 물가 조절과 진휼을 맡은 관청이다.
- 균역청은 영조 때 균역법 시행에 따른 재정 보충을 위해 설치되었다.
삼국사에서 신라를 으뜸으로 한 것은 신라가 가장 먼저 건국했고, 뒤에 고구려와 백제를 통합하였으며, 또 고려는 신라를 계승하였으므로 편찬한 것이 모두 신라의 남은 문적(文籍)을 근거로 했기 때문이다. …(중략)… 고구려의 강대하고 현저함은 백제에 비할 바가 아니며, 신라가 차지한 땅은 남쪽의 일부에 불과할 뿐이다. 그러므로 김씨는 신라사에 쓰여진 고구려 땅을 근거로 했을 뿐이다.
자료는 안정복의 「동사강목」으로, 우리 역사의 독자적 정통론을 세워 체계화한 역사서이다.
'삼국사'가 신라를 으뜸으로 삼고 '김씨'(김부식)가 신라 측 기록에만 의존해 고구려 강역을 서술한 점을 비판하고 있다. 「동사강목」은 단군 조선-기자-마한-통일 신라-고려로 이어지는 정통론을 체계화한 강목체 통사이다.
- 단군-부여-고구려의 흐름을 중시하며 만주 수복을 희구한 사서는 이종휘의 「동사」 등이다.
- 중국 및 일본 자료를 망라한 기전체 사서는 한치윤의 「해동역사」이다.
- 여러 영역을 항목별로 나눈 백과사전적 서술은 이수광의 「지봉유설」, 이익의 「성호사설」 등의 특징이다.
무릇 나라의 독립은 오직 자강(自强)의 여하에 달려 있는 것이다. …(중략)… 그러나 자강의 방도를 강구하려 할 것 같으면 다른 곳에 있지 않고 교육을 진작하고 산업을 일으키는 데 있으니 무릇 교육이 일어나지 않으면 민지(民智)가 열리지 않고 산업이 일어나지 않으면 국부가 증가하지 못하는 것이다. 교육과 산업의 발달이 곧 자강의 방도임을 알 수 있는 것이다.
취지서를 발표한 단체는 대한자강회이며, 고종의 강제 퇴위 반대 운동을 전개하다가 일제에 의해 해산되었다.
'자강(自强)'을 내세우고 교육 진작과 산업 진흥을 자강의 방도로 제시한 것은 1906년 결성된 대한자강회의 취지서이다. 대한자강회는 1907년 고종 강제 퇴위 반대 운동을 주도하다가 보안법에 의해 해산되었다.
- 만민공동회를 열어 러시아의 침략 정책을 규탄한 단체는 독립협회이다.
- 방직·고무·메리야스 공장 육성을 통한 경제 자립 운동은 1920년대 물산 장려 운동의 흐름이다.
- 일본의 황무지 개간권 요구를 철회시킨 단체는 보안회이다.
성은 김씨이다. 29세에 황복사에서 머리를 깎고 승려가 되었다. 얼마 후 중국으로 가서 부처의 교화를 보고자 하여 원효(元曉)와 함께 구도의 길을 떠났다. …(중략)… 처음 양주에 머무를 때 주장(州將) 유지인이 초청하여 그를 관아에 머물게 하고 성대하게 대접하였다. 얼마 후 종남산 지상사에 가서 지엄(智儼)을 뵈었다.
- 「삼국유사」 -
자료의 인물은 의상으로, 「화엄일승법계도」를 저술하여 화엄 사상을 정리하였다.
'원효와 함께 구도의 길'을 떠났고, 당의 '종남산 지상사'에서 화엄종의 지엄에게 배운 인물은 의상이다. 귀국 후 부석사를 세우고 화엄 사상을 전파하였다.
- 중국에서 풍수지리설을 들여와 지세의 중요성을 일깨운 인물은 도선이다.
- 「십문화쟁론」을 지어 종파 간 대립을 해소하려 한 인물은 원효이다.
- 인도와 중앙아시아를 여행하고 「왕오천축국전」을 저술한 인물은 혜초이다.
원성왕 6년 3월 북국(北國)에 사신을 보내 빙문(聘問)하였다. …(중략)… 요동 땅에서 일어나 고구려의 북쪽 땅을 병합하고 신라와 서로 경계를 맞대었지만, 교빙한 일이 역사에 전하는 것이 없었다. 이때 와서 일길찬 백어(伯魚)를 보내 교빙하였다.
'북국'은 발해이며, 태학감은 신라의 교육 기관이므로 발해의 최고 교육 기관으로 태학감을 두었다는 설명이 옳지 않다.
발해의 최고 교육 기관은 주자감이다. 태학감은 신라 경덕왕 때 국학의 이름을 고친 것이다.
- 발해는 관리를 감찰하는 기관으로 중정대를 두었다.
- 발해는 당의 제도를 받아들여 중앙에 3성 6부를 두되 명칭과 운영은 독자적으로 하였다.
- 발해의 지방 행정 조직은 5경 15부 62주로 정비되었다.
왕은 중국에 36명의 승려를 파견하여 법안종을 배우도록 하였다. 또한 제관과 의통을 파견하여 천태학에 대한 관심을 보였다.
자료의 왕은 고려 광종이며, 광종은 승과 제도를 시행하였다.
승려들을 중국에 보내 '법안종'을 배우게 하고 '제관과 의통'을 파견하는 등 불교 정비에 힘쓴 왕은 광종이다. 광종은 과거제와 함께 승과를 실시하고 국사·왕사 제도를 두었다.
- 요세가 세운 백련사를 후원한 것은 무신 집권기의 일이다.
- 의천의 국청사 창건을 후원한 왕은 숙종이다.
- 거란의 침입을 물리치기 위해 초조대장경을 조성한 것은 현종 때이다.
그는 송악산 아래의 자하동에 학당을 마련하여 낙성(樂聖), 대중(大中), 성명(誠明), 경업(敬業), 조도(造道), 솔성(率性), 진덕(進德), 대화(大和), 대빙(待聘) 등의 9재(齋)로 나누고 각각 전문 강좌를 개설토록 하였다. 그리하여 당시 과거 보려는 자제들은 반드시 먼저 그의 학도로 입학하여 공부하는 것이 상례로 되었다.
밑줄 친 '그'는 최충이며, 9경과 3사를 중심으로 교육하였다.
'송악산 아래의 자하동'에 학당을 열고 '9재'로 나누어 가르친 사학은 최충의 문헌공도(9재 학당)로, 과거 응시자들이 몰려 사학 12도 중 가장 번성하였다.
- 유교적 합리주의 사관으로 「삼국사기」를 편찬한 인물은 김부식이다.
- 시무 28조를 올린 인물은 성종 때의 최승로이다.
- 「소학」과 「주자가례」를 중시하며 권문세족과 불교의 폐단을 비판한 것은 고려 말 신진 사대부이다.
1975년 서지학자 박병선 박사는 이곳 도서관에서 조선시대 도서가 보관되어 있음을 발견하고 목록을 정리하여 그 존재를 알렸다. 그 후 1990년대 초 한국 정부가 반환을 공식 요청 하기에 이르렀다. 그 결과 2011년에 ‘5년마다 갱신이 가능한 대여 방식’으로 반환되었다.
자료는 외규장각 의궤의 반환 과정으로, 관련 사건은 프랑스가 강화도 외규장각 도서를 약탈한 병인양요이다.
박병선 박사가 프랑스 국립도서관에서 발견하고 '5년마다 갱신이 가능한 대여 방식'으로 돌아온 도서는 1866년 병인양요 때 프랑스군이 강화도에서 약탈해 간 외규장각 의궤이다.
- 어재연이 광성보에서 결사 항전한 것은 신미양요이다.
- 제너럴 셔먼호 사건을 빌미로 일어난 것은 신미양요이다.
- 조선이 처음으로 서양 국가와 외교 관계를 맺은 것은 조미 수호 통상 조약이다.
동학농민운동에 관한 설명으로 옳지 않은 것은 삼정이정청 설치이다.
삼정이정청은 1862년 임술 농민 봉기(진주 농민 봉기)를 수습하기 위해 철종 때 설치된 임시 기구로, 1894년 동학농민운동과는 관계가 없다. 동학농민운동 당시 정부는 전주화약 이후 교정청을 설치해 개혁을 시도하였다.
- 청·일 군대 철수 요청: 전주화약을 맺은 뒤 조선 정부는 출병 명분이 사라졌다며 청·일 양국에 철병을 요구하였다.
- 집강소 운영: 전주화약 이후 전라도 각지에 설치된 집강소는 청·일 전쟁이 발발한 뒤에도 운영되었다.
- 농민군 연합: 일본군의 경복궁 점령 이후 농민군이 재봉기하였고, 전봉준의 남접과 손병희의 북접이 논산에서 연합해 북상하였다.
산미 증식 계획은 공업화로 인한 일본의 식량 부족 문제를 해결하려고 실시한 정책이다.
제1차 세계 대전 이후 일본은 공업화·도시화로 쌀 부족과 쌀값 폭등(쌀 소동)을 겪었고, 이를 한반도의 쌀 증산과 반출로 해결하고자 1920년부터 산미 증식 계획을 추진하였다.
- 춘궁 퇴치·자력갱생: 1930년대 초 조선 총독부가 추진한 농촌 진흥 운동의 구호이다.
- 쌀·잡곡 배급제와 공출제: 중일 전쟁 이후 전시 체제(1940년대)에서 실시된 식량 통제 정책이다.
- 소작조정령: 1930년대 초 농민 운동을 무마하기 위해 농촌 진흥 운동과 함께 발표된 법령이다.
제4조 정부는 전시에 국가 총동원 상 필요할 때에는 칙령이 정하는 바에 따라 제국 신민을 징용하여 총동원 업무에 종사하게 할 수 있다.
자료는 1938년 공포된 국가 총동원법으로, 토지 소유권 조사는 그 이전인 1910년대 토지 조사 사업이므로 옳지 않다.
'전시에 국가 총동원 상 필요할 때' 제국 신민을 '징용'할 수 있게 한 법은 중일 전쟁 이후의 국가 총동원법이다. 이후 일제는 민족 말살 정책과 인적·물적 수탈을 강화하였다.
- 마을마다 애국반을 편성해 일상생활을 통제한 것은 이 시기의 정책이다.
- 일본식 성과 이름으로 고치는 창씨개명도 이 시기에 시행되었다.
- 여성에게 '몸뻬' 착용을 강요한 것도 전시 동원 체제의 모습이다.
2000년 12월에 유네스코 세계 유산으로 지정된 경주 역사 유적 지구는 남산 지구, 월성 지구, 대릉원 지구, 황룡사 지구, 산성 지구로 세분된다. 이 중에 남산 지구에 해당하는 문화유산으로는 ( ) 등이 있다.
<보기>
ㄱ. 계림 ㄴ. 나정(蘿井) ㄷ. 포석정
ㄹ. 분황사 ㅁ. 첨성대 ㅂ. 배리 석불 입상
남산 지구에 해당하는 문화유산은 나정, 포석정, 배리 석불 입상이다.
경주 남산 지구에는 박혁거세 탄생 설화가 깃든 나정, 신라 왕실의 연회 장소였던 포석정, 배리 석불 입상 등 남산 일대의 유적이 포함된다.
- 계림은 월성 지구에 속한다.
- 첨성대도 월성 지구에 속한다.
- 분황사는 황룡사지와 함께 황룡사 지구에 속한다.
| 과 | 1 | 2 | 3 | 4 | 5 | 6 | 7 | 8 | 9 | 10 | 11 | 12 | 13 | 14 | 15 | 16 | 17 | 18 | ||
|---|---|---|---|---|---|---|---|---|---|---|---|---|---|---|---|---|---|---|---|---|
| (가) | 지급 액수(결) | 전지 | 110 | 105 | 100 | 95 | 90 | 85 | 80 | 75 | 70 | 65 | 60 | 55 | 50 | 45 | 42 | 39 | 36 | 32 |
| 시지 | 110 | 105 | 100 | 95 | 90 | 85 | 80 | 75 | 70 | 65 | 60 | 55 | 50 | 45 | 40 | 35 | 30 | 25 | ||
| (나) | 전지 | 100 | 95 | 90 | 85 | 80 | 75 | 70 | 65 | 60 | 55 | 50 | 45 | 40 | 35 | 30 | 27 | 23 | 20 | |
| 시지 | 70 | 65 | 60 | 55 | 50 | 45 | 40 | 35 | 33 | 30 | 25 | 22 | 20 | 15 | 10 | |||||
| (다) | 전지 | 100 | 90 | 85 | 80 | 75 | 70 | 65 | 60 | 55 | 50 | 45 | 40 | 35 | 30 | 25 | 22 | 20 | 17 | |
| 시지 | 50 | 45 | 40 | 35 | 30 | 27 | 24 | 21 | 18 | 15 | 12 | 10 | 8 | 5 | ||||||
<보기>
ㄱ. (가) - 관품과 함께 인품도 고려되었다.
ㄴ. (나) - 한외과가 소멸되었다.
ㄷ. (다) - 승인과 지리업에게 별사전이 지급되었다.
ㄹ. (가)~(다) - 경기 8현에 한하여 지급되었다.
옳은 것은 (가) 시정 전시과에서 인품도 고려된 점과 (다) 경정 전시과에서 승인·지리업에게 별사전이 지급된 점이다.
1과에 전지·시지를 모두 110결씩 준 (가)는 경종 때의 시정 전시과로 관품과 함께 인품을 반영하였다. 1과 전지 100결·시지 70결인 (나)는 목종 때의 개정 전시과, 1과 전지 100결·시지 50결로 시지가 크게 줄어든 (다)는 문종 때의 경정 전시과이다.
- (나) 개정 전시과에서는 18과에 들지 못한 한외과가 남아 있었고, 한외과가 소멸된 것은 (다) 경정 전시과 때이다.
- 전시과는 전국을 대상으로 지급되었으며, 경기 8현에 한하여 지급한 것은 고려 후기의 녹과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