옳지 않은 설명은 슴베찌르개를 구석기 전기 유물로 본 것이다.
주먹도끼는 전기 구석기의 대표 유물이지만, 슴베찌르개는 자루에 꽂아 쓰는 후기 구석기에 등장한 도구이다.
- 신석기 움집: 바닥이 원형이나 모서리가 둥근 사각형인 반지하 움집이 일반적이었다.
- 신석기 조개류: 조개더미(패총)가 남아 있고, 조개껍데기 가면·팔찌 같은 장식품도 출토되었다.
- 청동기 유물: 비파형동검·붉은간토기·반달돌칼·홈자귀가 전형적인 청동기 유물이다.
역사란 무엇이뇨. 인류 사회의 아와 비아의 투쟁이 시간부터 발전하며 공간부터 확대하는 심적 활동의 상태의 기록이니, 세계사라 하면 세계 인류의 그리되어 온 상태의 기록이며, 조선사라 하면 조선 민족의 그리되어 온 상태의 기록이니라.
자료를 쓴 역사가는 신채호이며, 그는 을지문덕·최영·이순신 등 애국명장의 전기를 지어 애국심을 고취하였다.
역사를 '아와 비아의 투쟁'의 기록으로 규정한 이 글은 신채호의 「조선상고사」 총론이다. 그는 「을지문덕전」, 「이순신전」 등 영웅 전기를 써서 민족의식을 일깨웠다.
- 「여유당전서」 간행과 실학자 재평가는 정인보·안재홍 등이 주도한 조선학 운동의 활동이다.
- 「조선사회경제사」로 세계사적 보편성 속에서 한국사를 해석한 사람은 사회경제사학자 백남운이다.
- 동아일보에 '5천 년간 조선의 얼'을 연재한 사람은 정인보이다.
| 중앙 | 지방 | |
|---|---|---|
| ㄱ | 9서당 | 10정 |
| ㄴ | 5위 | 진관체제 |
| ㄷ | 5군영 | 속오군 |
| ㄹ | 2군과 6위 | 주현군과 주진군 |
군사 제도는 통일 신라 → 고려 → 조선 전기 → 조선 후기 순서이므로 9서당·10정, 2군 6위·주현군·주진군, 5위·진관 체제, 5군영·속오군 순으로 나열된다.
각 제도의 시행 시기는 다음과 같다.
- 9서당·10정은 삼국 통일 이후 신라의 중앙군과 지방군이다.
- 2군 6위와 주현군·주진군은 고려의 중앙군과 지방군이다.
- 5위와 진관 체제는 조선 전기의 중앙군과 지방 방어 체제이다.
- 5군영과 속오군은 임진왜란 이후 정비된 조선 후기의 군사 제도이다.
- (가) 옷은 흰색을 숭상하며, 흰 베로 만든 큰 소매 달린 도포와 바지를 입고 가죽신을 신는다.
- (나) 부여의 별종(別種)이라 하는데, 말이나 풍속 따위는 부여와 많이 같지만 기질이나 옷차림이 다르다.
- 『삼국지』 위서 동이전 -
흰옷을 숭상한 (가)는 부여로, 남의 물건을 훔치면 12배로 배상하게 하는 1책 12법이 있었다.
(가)는 흰 베로 만든 큰 소매 도포를 입었다는 기록으로 부여임을 알 수 있고, (나)는 '부여의 별종'이라 하였으므로 고구려이다.
- 민며느리제는 옥저의 혼인 풍속이다.
- 제사장인 천군이 다스리는 소도는 삼한에 있었다.
- 단궁·과하마·반어피는 동예의 특산물이다.
- (가) 낭혜화상백월보광탑비문(朗慧和尙白月葆光塔碑文)
- (나) 대견훤기고려왕서(代甄萱寄高麗王書)
- (다) 낭원대사오진탑비명(朗圓大師悟眞塔碑銘)
세 글을 지은 사람은 신라 말 6두품 출신의 최치원·최승우·최언위로, 모두 당에 유학하여 빈공과에 급제하였다.
'낭혜화상백월보광탑비문'은 최치원, 견훤을 대신해 고려 왕에게 보낸 '대견훤기고려왕서'는 최승우, '낭원대사오진탑비명'은 최언위가 지었다.
- 세 사람이 함께 호족 억압을 주장했다는 공통점은 없으며, 최승우는 오히려 후백제의 견훤을 섬겼다.
- 세 사람이 공통으로 국내의 태학에서 공부했다는 사실은 없으며, 이들의 공통 이력은 당 유학이다.
- 고려에서 벼슬한 사람은 최언위이며, 최치원은 은거하였고 최승우는 후백제에 출사하였다.
이 엔닌은 대사의 어진 덕을 입었기에 삼가 우러러 뵙지 않을 수 없습니다. 저는 이미 뜻한 바를 이루기 위해 당나라에 머물러 왔습니다. 부족한 이 사람은 다행히도 대사께서 발원하신 적산원(赤山院)에 머물 수 있었던 것에 대해 감경(感慶)한 마음을 달리 비교해 말씀드리기가 어렵습니다.
- 『입당구법순례행기』 -
밑줄 친 대사는 장보고이며, 웅주를 근거지로 반란을 일으켜 장안을 세운 인물은 장보고가 아니라 김헌창이다.
엔닌의 「입당구법순례행기」에 나오는 '적산원'은 장보고가 산둥반도에 세운 법화원을 가리킨다. 김헌창은 아버지 김주원이 왕위에 오르지 못한 것에 반발하여 웅천주에서 난을 일으켰다.
- 장보고는 산둥반도 적산촌에 법화원을 세우고 지원하였다.
- 장보고는 당에 건너가 서주 무령군 소장이 되었다.
- 장보고는 회역사·견당매물사 등 교역 사절을 파견하여 일본·당과 교역하였다.
호암사에는 (가)(이)라는 바위가 있다. 나라에서 장차 재상을 뽑을 때에 후보 3, 4명의 이름을 써서 상자에 넣고 봉해 바위 위에 두었다가 얼마 후에 가지고 와서 열어 보고 그 이름 위에 도장이 찍혀 있는 사람을 재상으로 삼았다.
- 『삼국유사』 -
- ㄱ. 중앙정치는 대대로를 비롯하여 10여 등급의 관리들이 나누어 맡았다.
- ㄴ. 중앙관청을 22개로 확대하고 수도는 5부, 지방은 5방으로 정비하였다.
- ㄷ. 16품의 관등제를 시행하고, 품계에 따라 옷의 색을 구별하여 입도록 하였다.
- ㄹ. 지방 행정 조직을 9주 5소경 체제로 정비하였다.
- ㅁ. 중앙에 3성 6부를 두고, 정당성을 관장하는 대내상이 국정을 총괄하도록 하였다.
(가)는 정사암으로 백제의 재상 선출 방식이며, 백제의 통치 체제는 22부·5부 5방과 16관등제·복색 구분이다.
'호암사'의 바위에서 재상을 뽑은 정사암 회의는 백제의 귀족 합의 제도이다. 백제는 사비 천도 후 중앙 관청을 22부로 늘리고 수도 5부·지방 5방으로 정비하였으며, 16관등에 따라 자색·비색·청색 옷을 입게 하였다.
- 대대로를 비롯한 10여 등급의 관리 체제는 고구려의 제도이다.
- 9주 5소경 체제는 통일 신라의 지방 행정 조직이다.
- 3성 6부와 정당성의 대내상은 발해의 중앙 통치 체제이다.
오늘날 백성을 다스리는 자는 백성에게서 걷어들이는 데만 급급하고 백성을 부양하는 방법은 알지 못한다. …… '심서(心書)'라고 이름 붙인 까닭은 무엇인가? 백성을 다스릴 마음은 있지만 몸소 실행할 수 없기 때문에 그렇게 이름 붙인 것이다.
글을 쓴 사람은 「목민심서」를 지은 정약용이며, 그는 홍역 관련 의서를 종합한 「마과회통」을 저술하였다.
백성을 다스릴 마음은 있으나 실행할 수 없어 '심서'라 이름 붙였다는 서문은 유배 중 지방관의 도리를 정리한 「목민심서」의 내용이다.
- 우리나라에서 처음으로 지전설을 주장한 사람은 김석문이다.
- 「농가집성」을 펴내 이앙법 보급에 기여한 사람은 신속이다.
- 조선 시대 역사를 서술한 「열조통기」는 안정복이 편찬하였다.
- (가)는 “교(敎)를 배우는 이는 대개 안의 마음을 버리고 외면에서 구하고, 선(禪)을 익히는 이는 인연을 잊고 안의 마음을 밝히기를 좋아하니, 모두 한쪽에 치우친 것으로 두 극단에 모두 막힌 것이다.”라고 주장하였다.
- (나)는 “정(定)은 본체이고 혜(慧)는 작용이다. 작용은 본체를 바탕으로 존재하므로 혜가 정을 떠나지 않고, 본체가 작용을 가져오게 하므로 정은 혜를 떠나지 않는다.”라고 주장하였다.
- ㄱ. (가)와 (나)는 서로 다른 방법으로 교종과 선종의 통합을 시도하였다.
- ㄴ. (가)와 (나)는 지방 호족과 연합하여 신라 정부의 권위를 약화시켰다.
- ㄷ. (가)는 불교와 유교 모두 도를 추구한다는 점에서 같다는 유·불 일치설을 주장하였다.
- ㄹ. (나)는 수선사 결성을 제창하여 불교계의 개혁을 추진하였다.
(가)는 교관겸수를 내세운 의천, (나)는 정혜쌍수를 내세운 지눌이므로 교·선 통합 시도와 수선사 결성이 옳은 설명이다.
의천은 교종 중심으로 선종을 아우르려 천태종을 개창했고, 지눌은 선종 중심으로 교종을 포용하며 수선사 결사를 통해 불교계를 개혁하였다.
- 지방 호족과 연합하여 신라 정부의 권위를 약화시킨 것은 신라 말 선종 9산의 모습으로, 고려 승려인 두 사람과 관계가 없다.
- 유·불 일치설은 지눌의 제자 혜심이 주장하였다.
대외 무역이 발전하면서 예성강 어귀의 벽란도가 국제 무역항으로 번성했으며, 대식국(大食國)으로 불리던 아라비아 상인들도 들어와 수은·향료·산호 등을 팔았다.
자료는 고려의 모습이며, 고려에서는 해동통보와 은병 같은 화폐를 만들어 사용하였다.
예성강 어귀의 '벽란도'가 국제 무역항으로 번성하고 '대식국' 상인이 드나든 것은 고려의 대외 무역을 보여 준다. 숙종 때 주전도감을 두어 해동통보와 활구라 불린 은병을 발행하였다.
- 인구·토지 면적을 기록한 장적(민정 문서)은 통일 신라 때 작성되었다.
- 송상이 전국에 송방을 개설한 것은 조선 후기의 모습이다.
- 객주와 여각이 매매·숙박·창고·운송을 맡은 것도 조선 후기 상업의 모습이다.
옳지 않은 설명은 경복궁 동쪽에 사직, 서쪽에 종묘를 두었다는 것이다.
한양은 '좌묘우사' 원칙에 따라 궁궐 기준 동쪽(왼쪽)에 종묘, 서쪽(오른쪽)에 사직을 배치하였다.
- 근정전 명칭: 경복궁과 근정전 등 전각의 이름은 정도전이 지었다.
- 4대문 명칭: 흥인지문·돈의문·숭례문 등 도성 4대문의 이름에 인·의·예·지의 덕목을 담았다.
- 성저십리: 도성 밖 10리 안은 무덤을 쓰거나 나무를 베는 것을 금하여 관리하였다.
국왕이 말했다. “나는 일찍부터 이 제도를 시행해 여러 해의 평균을 파악하고 답험(踏驗)의 폐단을 영원히 없애려고 해왔다. 신하들부터 백성까지 두루 물어보니 반대하는 사람은 적고 찬성하는 사람이 많았으므로 백성의 뜻도 알 수 있다.”
밑줄 친 제도는 세종의 공법으로, 토지의 비옥도에 따라 전분 6등법으로 조세를 차등 징수하였다.
'답험의 폐단'을 없애려 하고 신하부터 백성까지 찬반을 물었다는 내용은 세종이 여론 조사를 거쳐 공법을 시행한 사실과 맞는다. 공법은 비옥도에 따른 전분 6등법과 풍흉에 따른 연분 9등법으로 이루어졌다.
- 풍흉에 상관없이 1결당 4~6두를 걷은 것은 인조 때의 영정법이다.
- 토지 소유자에게 1결당 미곡 12두를 걷은 것은 공납을 개혁한 대동법이다.
- 수확량의 10분의 1을 걷은 것은 과전법 체제의 수조 방식이다.
왕이 양역을 절반으로 줄이라고 명령했다. “…… 호포(戶布)나 결포(結布) 모두 문제가 있다. 이제 1필을 줄이는 것으로 온전히 돌아갈 것이니 경들은 1필을 줄였을 때 생기는 세입 감소분을 보충할 방법을 강구하라.”
옳지 않은 설명은 신립이 상주에서 싸웠다는 것이다.
부산진에서 정발이 전사한 것은 맞지만, 상주에서 패한 장수는 순변사 이일이고 도순변사 신립은 충주 탄금대에서 배수진을 쳤다가 패하였다.
- 훈련도감: 휴전 협상 기간에 설치되어 포수·사수·살수의 삼수병 체제로 편제를 바꾸었다.
- 평양성 탈환: 조선군과 명 원군이 연합하여 평양성을 되찾았다.
- 전란 종결: 정유재란 중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죽자 일본군이 철수하며 전쟁이 끝났다.
옳지 않은 설명은 현존 최고(最古) 족보를 「문화류씨 가정보」로 본 것이다.
성종 7년에 간행된 현존 가장 오래된 족보는 「안동권씨 성화보」이며, 「문화류씨 가정보」는 그보다 뒤인 명종 때 간행되었다.
- 족보 매입·위조: 조선 후기 신분제가 동요하면서 부유한 농민이 족보를 사거나 위조해 신분 상승을 꾀하였다.
- 조선 초기 족보: 친손과 외손을 구별하지 않고 모두 수록하였고, 출생 순서대로 기재하였다.
- 족보의 활용: 혼인 상대를 고르거나 붕당을 구별하는 자료로 쓰였다.
- (가) 대통령의 임기는 7년이며 중임할 수 없다.
- (나) 대통령과 부통령은 국회에서 무기명 투표로 각각 선거한다.
- (다) 대통령과 부통령의 임기는 4년으로 하며, 1차 중임할 수 있다. 단, 이 헌법 공포 당시의 대통령에 대하여 중임 제한을 적용하지 아니한다.
- (라) 6년 임기의 대통령은 통일 주체 국민회의에서 선출된다.
(다)는 초대 대통령의 중임 제한을 없앤 사사오입 개헌(1954)이며, 이 헌법이 적용되던 1958년에 진보당의 정당 등록이 취소되었다.
(가)는 7년 단임의 8차 개헌(1980), (나)는 국회 간선의 제헌 헌법(1948), (라)는 통일 주체 국민회의 간선의 유신 헌법(1972)이다.
- 남북한 유엔 동시 가입(1991)은 직선제 9차 개헌(1987) 이후의 일로, 8차 개헌 시기가 아니다.
- 판문점 휴전 협정(1953)은 직선제로 바꾼 발췌 개헌(1952) 이후의 일이다.
- 7·4 남북 공동 성명(1972. 7.)은 유신 헌법 공포(1972. 12.) 이전에 발표되었다.
러시아를 막을 수 있는 조선의 책략은 무엇인가? 중국과 친하고(親中) 일본과 맺고(結日) 미국과 연합해(聯美) 자강을 도모하는 길 뿐이다.
자료는 1880년 김홍집이 들여온 「조선책략」이며, 최익현의 오불가소는 그보다 앞선 1876년 강화도 조약 체결 때 올린 상소이다.
'친중·결일·연미'로 러시아를 막자는 내용은 황준헌의 「조선책략」으로, 제2차 수신사 김홍집이 1880년에 가져왔다.
- 육영공원은 1886년에 설립되었다.
- 임오군란과 제물포 조약은 1882년의 일이다.
- 우정총국 개국 축하연을 이용한 갑신정변은 1884년에 일어났다.
우리나라의 건국정신은 삼균제도(三均制度)의 역사적 근거를 두었으니 선조들이 분명히 명한 바 「수미균평위(首尾均平位)하야 흥방보태평(興邦保泰平)하리라」 하였다. 이는 사회 각층 각급의 지력과 권력과 부력의 향유를 균평하게 하야 국가를 진흥하며 태평을 보유(保維)하려 함이니 홍익인간(弘益人間)과 이화세계(理化世界)하자는 우리 민족의 지킬 바 최고 공리(公理)임
자료의 삼균주의를 정립한 인물은 조소앙이며, 그는 5·10 총선거에 참여하지 않았으므로 제헌 국회의원이 아니었다.
'삼균제도'와 '지력·권력·부력의 균평'은 대한민국 임시 정부 건국 강령의 기초가 된 조소앙의 삼균주의를 보여 준다. 조소앙은 남북 협상에 참여하고 단독 선거에 불참했다가 이후 제2대 국회의원 선거에 당선되었다.
- 조소앙은 1930년 상하이에서 한국독립당 창당에 참여하였다.
- 조소앙은 대한민국 임시 정부의 국무위원(외무부장)으로 활동하였다.
- 삼균주의는 정치·경제·교육의 균등을 핵심 내용으로 한다.
옳지 않은 설명은 국민교육헌장을 1970년대에 제정되었다고 한 것이다.
국민교육헌장은 박정희 정부 시기인 1968년에 제정·선포되었으므로 1960년대의 일이다.
- 미군정기: 미국식 민주주의 교육 이념과 6-3-3-4 학제가 도입되었다.
- 1950년대: 전후 어려움 속에서도 초등학교 의무교육이 시행되었다.
- 1960년대: 입시 과열을 막기 위해 1969년부터 중학교 무시험 추첨제가 도입되었다.
- 제1조 일본 정부와 통모하여 한·일 합병에 적극 협력한 자, 한국의 주권을 침해하는 조약 또는 문서에 조인한 자와 모의한 자는 사형 또는 무기 징역에 처하고, 그 재산과 유산의 전부 혹은 2분의 1 이상을 몰수한다.
- 제2조 일본 정부로부터 작위를 받은 자 또는 일본 제국 의회의 의원이 되었던 자는 무기 또는 5년 이상의 징역에 처하고 그 재산과 유산의 전부 혹은 2분의 1 이상을 몰수한다.
- 제3조 일본 치하 독립운동자나 그 가족을 악의로 살상박해한 자 또는 이를 지휘한 자는 사형, 무기 또는 5년 이상의 징역에 처하고 그 재산의 전부 혹은 일부를 몰수한다.
자료는 반민족 행위 처벌법이며, 이 법은 1948년 9월에 국회를 통과하여 여수·순천 10·19 사건보다 앞선다.
일제에 협력한 자와 작위를 받은 자, 독립운동가를 박해한 자를 처벌하는 조항으로 보아 제헌 국회가 제정한 반민족 행위 처벌법이다. 여수·순천 10·19 사건은 같은 해 10월에 일어났다.
- 이 법에 따라 반민특위와 함께 특별 재판부가 설치되었다.
- 제헌 헌법 부칙에 반민족 행위자를 처벌하는 특별법을 제정할 수 있다고 명시되어 있었다.
- 반민특위 활동으로 일부 반민족 행위자가 실형을 선고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