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유적은 경기도 연천군 한탄강 언저리에 넓게 위치하고 있다. 이곳에서 아슐리안 계통의 주먹도끼가 다량으로 출토되어 더욱 많은 관심이 집중되었다. 이곳에서 발견된 주먹도끼는 그 존재 유무로 유럽과 동아시아 문화가 나뉘어진다고 한 모비우스의 학설을 무너뜨리는 결정적 증거가 되었다.
연천 전곡리의 주먹도끼가 사용된 구석기 시대에는 사람들이 동굴이나 바위 그늘, 강가의 막집 등에서 살았다.
'연천군 한탄강', '아슐리안 계통의 주먹도끼', '모비우스의 학설'이 단서로, 전곡리 유적은 동아시아에도 아슐리안형 주먹도끼가 있음을 보여 준 구석기 유적이다. 구석기인은 이동 생활을 하며 임시 거처에 머물렀다.
- 내부에 화덕이 있는 움집이 일반적인 주거 형태가 된 것은 신석기 시대이다.
- 토기를 만들어 음식을 조리하고 식량을 저장한 것은 신석기 시대부터이다.
- 구릉에 마을을 이루고 도랑(환호)과 목책을 두른 것은 청동기 시대의 모습이다.
고려 정부는 몽골과 강화를 맺고 개경으로 환도하였다. 대몽 항전에 적극적이었던 (가) 은/는 개경 환도를 반대하고 반란을 일으켰다. 이어 진도로 근거지를 옮기면서 항쟁을 전개하였다.
(가)는 삼별초로, 도적을 잡기 위해 설치한 야별초에서 비롯되었다.
'개경 환도 반대', '진도로 근거지를 옮김'이 단서이다. 최씨 무신 정권 때 설치된 야별초가 좌·우별초로 나뉘고 신의군이 더해져 삼별초가 되었으며, 몽골과의 강화 후 진도·제주도로 옮겨 항쟁하였다.
- 포수·사수·살수의 삼수병으로 편제된 것은 조선 후기 훈련도감이다.
- 윤관의 건의로 편성된 기병 중심 부대는 고려의 별무반이다.
- 양계에서 국경 방어를 맡은 상비 전투부대는 고려 지방군인 주진군이다.
일단 강화를 맺고 나면 저 적들의 욕심은 물화를 교역하는 데 있습니다. …(중략)… 저들이 비록 왜인이라고 하나 실은 양적(洋賊)입니다. 강화의 일이 한번 이루어지면 사학(邪學)의 서적과 천주의 상(像)이 교역하는 가운데 섞여 들어갈 것입니다.
자료는 강화도 조약 체결에 반대한 최익현의 주장이다.
'저들이 비록 왜인이라고 하나 실은 양적(洋賊)'이라는 표현이 단서로, 일본과 서양을 같은 존재로 본 왜양일체론을 내세워 개항에 반대하는 상소를 올렸다.
- 박규수는 통상 개화론을 주장하며 개항을 지지한 인물이다.
- 김홍집은 『조선책략』을 들여오고 갑오개혁을 주도한 온건 개화파이다.
- 김윤식은 영선사로 청에 파견된 온건 개화파이다.
- 서재필이 정부 지원을 받아 창간하였다.
- 한글판을 발행하여 서양의 문물과 제도를 소개하였다.
- 영문판을 발행하여 국내 사정을 외국인에게도 전달하였다.
설명에 해당하는 신문은 독립신문이다.
'서재필이 정부 지원을 받아 창간', '한글판', '영문판'이 단서이다. 독립신문은 1896년 창간된 최초의 민간 신문으로 순한글판과 영문판을 함께 발행하였다.
- 제국신문은 순한글로 발행되어 서민층과 부녀자를 주된 독자로 삼았으나 영문판은 없었다.
- 한성순보는 박문국에서 발행한 관보 성격의 신문으로 순한문이었다.
- 황성신문은 국한문 혼용 신문으로 장지연의 「시일야방성대곡」을 실었다.
삼국의 역사서로는 고구려에 『유기』가 있었는데, 영양왕 때 이문진이 이를 간추려 『신집』 5권을 편찬하였다. 백제에서는 (가) 시기에 고흥이 『서기』를, 신라에서는 (나) 시기에 거칠부가 『국사』를 편찬하였다.
(가)는 백제 근초고왕, (나)는 신라 진흥왕이며, 진흥왕은 화랑도를 국가적 조직으로 개편하였다.
'고흥이 『서기』'를 편찬한 것은 근초고왕 때이고, '거칠부가 『국사』'를 편찬한 것은 진흥왕 때이다.
- 국호를 남부여로 바꾼 것은 백제 성왕이다.
- 동진으로부터 불교를 받아들인 것은 백제 침류왕이다.
- 병부를 처음 설치하여 군권을 장악한 것은 신라 법흥왕이다.
사택지적비는 영산강 유역 진출과 관계가 없으므로 사택지적비-영산강 유역 확장의 연결이 옳지 않다.
사택지적비는 백제 의자왕 대 귀족 사택지적이 세월의 덧없음을 한탄하며 불당을 세운 내용을 담은 비석이다. 백제가 마한 세력을 복속해 영산강 유역까지 영역을 넓힌 것은 근초고왕 대의 일로 이 비석과 무관하다.
- 임신서기석-두 청년이 시경·상서·예기 등 유교 경전을 익히기로 맹세한 내용이 새겨져 있어 옳다.
- 충주 고구려비-장수왕 대 고구려가 남한강 유역까지 진출했음을 보여 주어 옳다.
- 호우명 그릇-경주 호우총에서 '국강상광개토지호태왕' 명문이 새겨진 그릇이 출토되어 5세기 초 고구려와 신라의 밀접한 관계를 보여 주므로 옳다.
여러 도에서 의병이 일어났다. …(중략)… 도내의 거족(巨族)으로 명망 있는 사람과 유생 등이 조정의 명을 받들어 의(義)를 부르짖고 일어나니 소문을 들은 자들은 격동하여 원근에서 이에 응모하였다. …(중략)… 호남의 고경명·김천일, 영남의 곽재우·정인홍, 호서의 조헌이 가장 먼저 일어났다.
-『선조수정실록』-
행주산성에서 일본군을 크게 무찌른 인물은 곽재우가 아니라 권율이다.
곽재우는 임진왜란 때 경상도 의령에서 가장 먼저 의병을 일으킨 인물로, 붉은 옷을 입고 싸워 홍의장군으로 불렸다.
- 스스로 홍의장군이라 칭하며 활약하였다.
- 의령을 거점으로 봉기하여 낙동강 일대에서 싸웠다.
- 익숙한 지리를 활용한 기습 작전으로 일본군에 타격을 주었다.
지금 우리들은 정신을 새로이 하고 충의를 떨칠 때이니, 국채 1,300만 원은 우리 대한 제국의 존망에 직결된 것입니다. 이것을 갚으면 나라가 보존되고 이것을 갚지 못하면 나라가 망할 것은 필연적인 사실이나, 지금 국고에서는 도저히 갚을 능력이 없으며, 만일 나라에서 갚지 못한다면 그때는 이미 삼천리 강토는 내 나라 내 민족의 소유가 못 될 것입니다.
-『대한매일신보』-
자료는 국채 보상 운동의 취지로, 이 운동은 1907년 대구에서 시작되어 전국으로 확산되었다.
'국채 1,300만 원'을 갚아 나라를 지키자는 내용이 단서이다. 서상돈 등이 대구에서 발의하였고 대한매일신보 등 언론의 후원을 받았으나 통감부의 탄압으로 좌절되었다.
- 조선 형평사는 백정에 대한 차별 철폐를 내건 형평 운동 단체이다.
- 조선 물산 장려회는 1920년대 물산 장려 운동을 이끈 단체이다.
- 신사 참배 거부 운동은 1930년대 이후 기독교계 등이 전개한 저항이다.
조선시대 과거 제도에는 문과·무과·잡과가 있었는데, 이 가운데 문과를 가장 중시하였다. 『경국대전』에 따르면 문과 시험 업무는 (가) 에서 주관하고, 정기 시험인 식년시는 (나) 마다 실시하는 것이 원칙이었다.
| (가) | (나) | |
|---|---|---|
| ① | 이조 | 2년 |
| ② | 이조 | 3년 |
| ③ | 예조 | 2년 |
| ④ | 예조 | 3년 |
(가)에는 예조, (나)에는 3년이 들어간다.
『경국대전』에 따르면 문과 시험은 교육·의례·외교를 맡은 예조가 주관하였고, 정기 시험인 식년시는 자(子)·묘(卯)·오(午)·유(酉)가 드는 해, 곧 3년마다 실시하였다.
- 이조는 문관의 인사를 맡은 관청으로 과거 시험을 주관하지 않았다.
- 식년시를 2년마다 실시하였다는 연결은 틀리다.
- 조선의 민주 독립을 보장한 삼상 회의 결정에 의하여 남북을 통한 좌우 합작으로 민주주의 임시 정부를 수립할 것
- 토지 개혁에 있어서 몰수, 유조건 몰수, 체감매상 등으로 토지를 농민에게 무상으로 나누어 주며, …(중략)… 민주주의 건국 과업 완수에 매진할 것
- 입법 기구에 있어서는 일체 그 권능과 구성 방법 운영에 관한 대안을 본 합작 위원회에서 작성하여 적극적으로 실행을 기도할 것
제1차 미·소 공동 위원회는 1946년 3월에 열려 좌우 합작 7원칙(1946년 10월)보다 앞서므로 이후의 사실이 아니다.
'삼상 회의 결정', '좌우 합작', '본 합작 위원회'가 단서로, 제1차 미·소 공동 위원회가 결렬된 뒤 결성된 좌우 합작 위원회가 1946년 10월 7원칙을 발표하였다.
- 제헌 국회에서 대통령 이승만, 부통령 이시영을 선출한 것은 1948년 7월이다.
- 반민족 행위 처벌법은 1948년 9월에 공포되었다.
- 3·15 부정 선거에 맞선 4·19 혁명은 1960년에 일어났다.
그는 화엄종을 중심으로 교종을 통합하고 해동 천태종을 창시하여 선종까지 포섭하려 하였다. 그러나 그의 사후에 교단은 다시 분열되었고, 권력층과 밀착되어 타락하는 양상까지 나타났다.
밑줄 친 '그'는 의천으로, 이론적인 교리 공부와 실천적인 수행을 아우르는 교관겸수를 주장하였다.
'화엄종을 중심으로 교종을 통합', '해동 천태종을 창시'가 단서이다. 의천은 고려 문종의 아들로 교종 중심의 선종 통합을 시도하였다.
- 참선·독경과 노동을 강조하며 수선사 결사를 제창한 것은 지눌이다.
- 『해동고승전』을 편찬한 것은 각훈이다.
- 백련사를 결성하여 참회와 염불 수행을 강조한 것은 요세이다.
| 임진왜란 | (가) | 병자호란 |
청에 인질로 끌려갔던 봉림 대군의 귀국은 병자호란 이후의 일이므로 (가) 시기에 해당하지 않는다.
(가)는 임진왜란(1592)부터 병자호란(1636)까지이다. 봉림 대군은 병자호란 뒤 청에 볼모로 갔다가 1645년에 돌아와 효종으로 즉위하였다.
- 인조반정은 1623년에 일어났다.
- 영창 대군은 광해군 때인 1614년에 사망하였다.
- 강홍립은 광해군 때 사르후 전투(1619)에서 후금에 항복하였다.
| 유적(지) | 주제 | |
|---|---|---|
| ① | 외규장각 | 동학 농민 운동 |
| ② | 고려궁지 | 대몽 항쟁 |
| ③ | 고인돌 | 청동기 문화 |
| ④ | 광성보 | 신미양요 |
강화도 외규장각은 동학 농민 운동이 아니라 병인양요와 관련된 유적이다.
외규장각은 정조 때 강화도에 설치된 왕실 도서 보관소로, 1866년 병인양요 때 프랑스군이 의궤 등을 약탈해 갔다.
- 고려궁지는 몽골 침입 때 강화도로 천도하여 대몽 항쟁을 벌인 시기의 궁궐 터이다.
- 고인돌은 청동기 시대의 대표적인 무덤으로 강화 고인돌은 세계 유산이다.
- 광성보는 1871년 신미양요 때 어재연 부대가 미군과 싸운 곳이다.
인조 대에는 남인이 정권을 독점한 것이 아니라 서인이 집권하고 남인이 일부 참여했으므로 이 설명이 옳지 않다.
인조반정으로 북인이 몰락한 뒤 서인이 정국을 주도하면서 남인과 공존 관계를 유지하였다. 붕당 간 공존이 무너지고 한 붕당이 정권을 독점하는 일당 전제화는 숙종 대 환국 이후에 나타났다.
- 선조 대-이조 전랑 임명 문제를 둘러싸고 사림이 동인과 서인으로 분열하였다.
- 광해군 대-동인에서 갈라진 북인이 집권하였다.
- 숙종 대-경신환국 이후 남인 처벌 문제 등을 두고 서인이 노론과 소론으로 갈라졌다.
화통도감은 세종 대가 아니라 고려 우왕 대에 설치되었으므로 이 설명이 옳지 않다.
화통도감은 최무선의 건의로 설치되어 화약과 화포를 제조한 기구이며, 진포 싸움에서 왜구를 격퇴하는 데 활용되었다.
- 갑인자-세종 대에 주조된 금속 활자로 옳다.
- 「칠정산」-세종 대에 원의 수시력과 명의 대통력을 참고해 우리 실정에 맞게 편찬한 역법서로 옳다.
- 간의-세종 대에 제작된 천체 관측 기구로 옳다.
- 우리는 정치적, 경제적 각성을 촉진함
- 우리는 단결을 공고히 함
- 우리는 기회주의를 일체 부인함
강령을 발표한 단체는 신간회로, 광주 학생 항일 운동이 일어나자 진상 조사단을 파견하였다.
'정치적, 경제적 각성을 촉진', '기회주의를 일체 부인'은 1927년 민족주의 좌파와 사회주의 세력이 연합해 창립한 신간회의 강령이다.
- 조선 민립 대학 기성회는 이상재 등이 1923년에 조직하였다.
- 파리 강화 회의에 대표(김규식)를 파견한 것은 신한 청년당이다.
- 6·10 만세 운동은 신간회 창립 이전인 1926년에 사회주의계와 학생 등이 계획하였다.
세상에서 동명왕의 신이(神異)한 일을 많이 말한다. …(중략)… 지난 계축년 4월에 『구삼국사』를 얻어 「동명왕 본기」를 보니 그 신기한 사적이 세상에서 얘기하는 것보다 더하였다. 그러나 처음에는 믿지 못하고 귀신이나 환상이라고만 생각하였는데, 두세 번 반복하여 읽어서 점점 그 근원에 들어가니 환상이 아닌 성스러움이며, 귀신이 아닌 신성한 이야기였다.
글쓴이는 「동명왕편」을 지은 이규보로, 김부식의 『삼국사기』에 동명왕의 신이한 사적이 생략되었다고 평하였다.
'『구삼국사』를 얻어 「동명왕 본기」를 보니'가 단서이다. 이규보는 고구려 시조 동명왕의 업적을 서사시로 읊어 고구려 계승 의식을 드러냈다.
- 강목체 사서를 편찬하여 평가를 강조한 것은 『동국통감제강』, 『동사강목』 등 조선 후기 사서의 특징이다.
- 단군부터 충렬왕 때까지를 서사시로 기록한 것은 이승휴의 『제왕운기』이다.
- 단군신화와 민간 전승 자료를 폭넓게 수록한 것은 일연의 『삼국유사』이다.
1910년대의 사실은 임병찬이 주도한 독립 의군부의 항일 운동이다.
독립 의군부는 1912년 임병찬이 고종의 밀지를 받아 조직한 단체로, 국권 회복 후 군주제를 되살리려는 복벽주의를 내세웠다.
- 조선 독립 동맹-1940년대 초 중국 화북 지방에서 결성되었다.
- 참의부·정의부·신민부-1920년대 중반 만주에서 조직되었다.
- 영릉가 전투-1930년대 초 조선 혁명군이 양세봉의 지휘 아래 일본군을 격파하였다.
우리 조선의 역사적 발전의 전 과정은 가령 지리적 조건, 인종학적 골상, 문화 형태의 외형적 특징 등 다소의 차이는 인정되더라도, 다른 문화 민족의 역사적 발전 법칙과 구별되어야 하는 독자적인 것이 아니다. 세계사적인 일원론적 역사 법칙에 의해 다른 민족과 거의 같은 궤도로 발전 과정을 거쳐 왔다.
주장의 주인공은 백남운으로, 마르크스 유물 사관을 바탕으로 한국사를 연구하였다.
'세계사적인 일원론적 역사 법칙'에 따라 다른 민족과 같은 궤도로 발전했다는 주장은 식민 사학의 정체성론을 비판한 사회 경제 사학의 관점이다.
- 민족정신으로서 조선 국혼을 강조한 것은 박은식이다.
- 조선의 얼을 강조한 것은 정인보이다.
- 진단 학회를 조직해 실증주의 사학을 정립한 것은 이병도·손진태 등이다.
애치슨 선언은 6·25 전쟁 이전인 1950년 1월에 발표되었으므로 전쟁 중의 사실이 아니다.
미국 국무장관 애치슨이 한반도를 태평양 방위선에서 제외한다고 발표한 것은 전쟁 발발(1950년 6월) 전의 일로, 북한의 남침 판단에 영향을 주었다는 평가를 받는다.
- 인천 상륙 작전-1950년 9월 국군과 유엔군이 감행해 서울을 되찾는 계기가 되었다.
- 발췌 개헌-1952년 피란 수도 부산에서 대통령 직선제를 담은 개헌안이 통과되었다.
- 반공 포로 석방-1953년 6월 정전 협상 중 이승만 정부가 북한 송환을 거부하는 포로를 석방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