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급 국가직 한국사] 05년 1회차
9급 국가직 한국사 기출문제

05년 1회차

총 20문항 · 객관식 · A4 약 1장

1 / 1
A4정답 포함
9급 국가직 한국사 기출문제모두CBT · moducbt.com

05년 1회차

총 20문항 · 객관식 · 정답·해설 포함
문제 1
식량채집 생활에서부터 시작된 인류역사는 식량을 생산하는 농경을 알게 되면서 크게 변화 하는데 이를 ‘신석기혁명’이라 한다. 이 시기와 가장 관련 깊은 사항은?
1청동기를 처음 사용하였다.
2계급이 형성되었다.
3문자를 사용하였다
4간석기와 토기를 처음 사용하였다
정답 및 해설

신석기 혁명 시기와 가장 관련 깊은 것은 간석기와 토기를 처음 사용하였다는 것이다.

신석기 시대에는 농경과 목축이 시작되었고, 돌을 갈아 만든 간석기와 곡식을 저장·조리하는 토기(빗살무늬 토기 등)를 사용하였다.

  • 청동기 사용: 청동기 시대의 특징이다.
  • 계급 형성: 잉여 생산물과 사유 재산이 늘어난 청동기 시대에 뚜렷해졌다.
  • 문자 사용: 신석기 시대의 특징이 아니다.
문제 2
다음 설명에 해당하는 세력이 집권하고 있을 때의 상황을 옳게 설명한 것은?

- 고려 후기의 집권세력으로서 고관 요직을 장악하고 거대한 농장을 소유하였다.
- 주로 음서에 힘입어 관인으로서의 신분을 세습시켜 나갔다.
- 주로 원의 세력을 배경으로 하여 등장한 경우가 많았다.
- 도평의사사를 독점하여 정권을 장악하였다.

1토지겸병이 성행하여 국가 재정과 민생에 끼치는 폐해가 심했다
2천민 계층의 신분방해운동이 광범위하게 전개되었다
3관료체제가 정비되어 모범적인 유교정치가 실시되었다
4북진 정책의 이념아래 이민족과의 투쟁을 통하여 영토를 크게 확장 시켰다.
정답 및 해설

제시된 세력은 권문세족이며, 이들이 집권할 때 토지 겸병이 성행하여 국가 재정과 민생에 끼치는 폐해가 심했다.

'원의 세력을 배경', '도평의사사를 독점', '거대한 농장'은 원 간섭기 권문세족의 특징이다. 이들의 농장 확대로 국가의 조세 수입이 줄고 많은 농민이 노비로 전락하였다.

  • 천민의 신분 해방 운동: 망이·망소이의 난, 만적의 난 등은 무신 집권기의 일이다.
  • 모범적인 유교 정치: 성종 때 관료 체제를 정비한 고려 전기의 모습이다.
  • 북진 정책과 영토 확장: 원 간섭기에는 오히려 영토 일부를 원에 빼앗겼다.
문제 3
조선 전기의 정책에 대한 설명으로 옳은 것은?
1행정의 편리를 위해 수령은 주로 자기 출신지에 임명되었다
2중앙군은 5위체제, 지방군은 진관체제로 정비되었다.
3유향소에 향리를 두어 수령을 보좌하도록 하였다.
4우수한 관리 양성을 위해 향교에는 양반자제만이 입학하게 되었다.
정답 및 해설

조선 전기 정책에 대한 옳은 설명은 중앙군은 5위, 지방군은 진관 체제로 정비되었다는 것이다.

조선 전기 중앙군은 5위로 편성되었고, 지방은 세조 때 각 도에 거진을 두고 주변 고을을 묶는 진관 체제로 방어하였다.

  • 수령의 출신지 임명: 상피제에 따라 수령은 자기 출신지에 임명되지 않았다.
  • 유향소의 향리: 유향소는 지방 양반(재지 사족)으로 구성되어 수령을 보좌하고 향리를 규찰하였다.
  • 향교의 양반 자제 한정: 향교에는 원칙적으로 양인 이상이면 입학할 수 있었다.
문제 4
가야 연맹에 대한 설명으로 옳지 않은 것은?
1철의 생산과 중계 무역으로 발전하였다.
25세기경 고구려, 신라의 압력으로 큰 타격을 입었다.
3처음에는 대가야, 후에는 금관가야가 맹주국이 되었다.
4중앙집권 국가로서의 정치적 발전을 이룩하지는 못하였다
정답 및 해설

가야 연맹에 대한 설명으로 옳지 않은 것은 처음에는 대가야, 후에는 금관가야가 맹주국이 되었다는 내용이다.

순서가 반대이다. 전기 가야 연맹은 김해의 금관가야가 주도하였고, 5세기 이후 후기 가야 연맹은 고령의 대가야가 주도하였다.

  • 철 생산과 중계 무역: 가야는 풍부한 철을 바탕으로 낙랑·왜를 잇는 중계 무역으로 발전하였다.
  • 5세기경의 타격: 광개토대왕의 고구려군이 신라를 도와 왜를 쫓으면서 금관가야 중심의 전기 가야 연맹이 큰 타격을 입었다.
  • 중앙집권 국가 미달성: 가야는 연맹 왕국 단계에서 신라에 병합되었다.
문제 5
일제하 민족문화의 수호를 위해서 활동한 단체가 아닌 것은?
1진단학회
2조선어학회
3조선어연구회
4조선사편수회
정답 및 해설

일제 강점기 민족 문화 수호 단체가 아닌 것은 조선사편수회이다.

조선사편수회는 조선 총독부가 설치한 기구로, 『조선사』를 편찬하며 식민 사관을 퍼뜨렸다.

  • 진단학회: 이병도·손진태 등이 실증 사학 연구를 위해 조직하였다.
  • 조선어연구회: 한글 연구와 보급을 위해 조직되어 가갸날을 제정하였다.
  • 조선어학회: 조선어연구회를 개편한 단체로 한글 맞춤법 통일안을 제정하였다.
문제 6
다음은 통일 신라의 민정문서에 대한 설명이다. 옳지 않은 것은?

서원경 부근의 4개 촌락의 남녀별, 연령별의 정확한 인구수와 노비의 수, 논과 밭의 면적, 소, 말, 뽕나무, 호두나무, 잣나무 등의 수를 3년마다 한 번씩 촌주가 통계를 낸 사실이 기록되어 있다.

1국가의 부역과 조세의 기준마련을 위해 중앙에서 촌주를 파견하였다.
2국가는 생산자원을 철저하게 편제하고 관리하였다.
3남녀별, 연령별 인구의 수를 기록한 것은 여성도 노동력 자원으로 파악한 것이다.
43년에 1번씩 촌주가 통계를 내었으나 수취(收取)는 매년 이루러 졌다.
정답 및 해설

민정문서 설명으로 옳지 않은 것은 중앙에서 촌주를 파견하였다는 내용이다.

'촌주'는 중앙에서 파견한 관리가 아니라 그 지역의 토착 유력자로, 몇 개 촌락을 관할하며 '3년마다' 호구·토지·가축 등의 변동을 조사하였다.

  • 생산 자원의 철저한 편제: 인구·토지·가축·나무 수까지 기록하여 국가가 자원을 관리하였다.
  • 남녀별·연령별 인구 기록: 여성도 노동력 자원으로 파악하였음을 보여 준다.
  • 3년 단위 통계와 매년 수취: 문서는 3년마다 작성하였으나 조세·공물·역은 해마다 거두었다.
문제 7
다음은 고려시대에 일어난 역사적 사건들을 시대순으로 나열한 것이다. (가) 시기에 발생한 역사적 사실로 옳은 것을 <보기>에서 모두 고르면?

이자겸의 난 -> (가) -> 무신정변 -> 몽고침입 -> 위화도 회군

ㄱ. 노비안검법과 과거제도가 시행되었다.
ㄴ. 풍수지리설을 내세워 서경천도 운동이 일어났다.
ㄷ. 최고 집정부로 교정도감이 설치되었다.
ㄹ. 황제를 칭할 것과 금국정벌론이 제기되었다.
ㅁ. 고구려 계승 이념에 대한 이견과 갈등이 일어났다.

1ㄱ,ㄴ,ㄹ
2ㄴ,ㄹ,ㅁ
3ㄱ,ㄴ,ㅁ
4ㄴ,ㄷ,ㄹ
정답 및 해설

(가) 시기에 해당하는 것은 ㄴ, ㄹ, ㅁ으로, 모두 묘청의 서경 천도 운동(1135)과 관련된다.

'이자겸의 난'(1126) 뒤 묘청 등 서경파는 풍수지리설을 내세워 서경 천도, 칭제 건원, 금국 정벌을 주장하였다. 고구려 계승 의식을 강조한 서경파와 신라 계승 의식의 김부식 등 개경파가 대립하였다.

  • 노비안검법과 과거제: 고려 초 광종 때 시행되어 (가) 시기보다 앞선다.
  • 교정도감 설치: 최충헌이 설치한 것으로 무신정변 이후의 일이다.
문제 8
다음은 조선 시대 어떤 학파의 계보이다. 이 학파에 대한 설명으로 옳은 것은?
1지행합일의 실천성을 중시하는 사상체계를 추구하였다
218세기 정국을 주도하면서 주로 영남지방에 서원을 설립하였다
3절의를 중시하여 임진왜란 때에 정인홍, 곽재우 등의 의병장을 배출하였다.
4이황의 학통을 계승하여 노론과 이기론을 둘러싼 논쟁은 전개 하였다.
정답 및 해설

제시된 계보는 정제두에서 시작된 강화학파로, 이들은 지행합일의 실천성을 중시하는 양명학을 추구하였다.

정제두는 강화도에서 양명학을 연구하여 학파를 형성하였고, 그 학문은 이광사·이충익 등 가학을 통해 이어져 한말 이건창 등에까지 계승되었다.

  • 18세기 정국 주도와 영남 서원 설립: 양명학은 이단으로 배척되어 정국을 주도하지 못하였고, 영남 지방 서원은 주로 남인 계열과 관련된다.
  • 임진왜란 의병장 정인홍·곽재우 배출: 조식 문하의 남명학파에 대한 설명이다.
  • 이황 학통 계승과 이기론 논쟁: 이황의 학통은 영남학파(남인)로 이어졌다.
문제 9
다음 글은 동학 농민 운동의 핵심주동자에 대한 공초 내용을 발췌한 것이다. 밑줄친 곳에 들어갈 말로 가장 적절한 것은? (순서대로 ㉠, ㉡, ㉢)

문: 너의 성명은 무엇인가?
답:  ㉠ 이다.
문: 작년 3월  ㉡ 등지에서 백성들을 크게 모았다고 하니 무슨 사연으로 그러하였는가?
답:  ㉡  군수가 정액 외의 가렴(苛斂:가혹하게 징수함)이 수만 냥이므로 민심이 억울하고 원통하여 이 의거가 있었다.
문:  ㉡  에서 기포할 적에 동학이 많았느냐 원통한 사람이 많았느냐?
답:  ㉢ .
문: 다시 난을 일으킨 것은 무슨 이유인가?
답: 일본이 개화라 칭하고 처음부터 민간에게 일언반구의 말도 공포함이 없이 군대를 거느리고 밤중에 왕궁을 공격하여 임금을 놀라게 하였다. 그러므로 초야의 사민(士民)들이 충군 애국하는 마음으로 분개함을 이기지 못하여 의병을 규합하여 일본인과 접전하여 이 사실을 묻고자 함이다.

1김개남, 백산, 원통한 사람이 많았다
2김개남, 고부, 동학이 많았다
3전봉준, 고부, 원통한 사람이 많았다
4전봉준, 고부, 동학이 많았다
정답 및 해설

빈칸에는 차례로 전봉준, 고부, 원통한 사람이 많았다가 들어간다.

'군수가 정액 외의 가렴'이 수만 냥이라는 진술은 고부 군수 조병갑의 수탈에 맞서 일어난 고부 민란을 가리키며, 이를 이끈 인물은 전봉준이다. 전봉준은 공초에서 봉기한 이들이 동학교도보다 원통한 사람이 많았다고 진술하였다.

'다시 난을 일으킨' 이유로 든 일본군의 '왕궁을 공격'은 경복궁 점령을 가리키며, 이에 맞선 것이 동학 농민군의 2차 봉기이다.

문제 10
남북한 통일외교와 관련하여 옳은 것은?
1북한의 고려민주연방공화국 통일방안은 2국가 2체제를 목표로 하고 있다.
21972년 7. 4남북공동성명에서 남과 북은 자주적, 평화적, 민족대단결의 통일원칙에 합의 했다.
31997년 남과 북은 ‘남북사이의 화해와 불가침및 교류·협력에 관한 합의서’를 체결하였다.
42000년 6. 15 남북공동선언에서 남북은 유엔 감시하의 통일 방안에 합의 하였다
정답 및 해설

7·4 남북 공동 성명에서 자주·평화·민족 대단결의 통일 원칙에 합의하였다는 설명이 옳다.

1972년 7·4 남북 공동 성명은 분단 이후 처음으로 남북이 통일 원칙에 합의한 문서이다.

  • 고려 민주 연방 공화국 방안: 북한의 이 방안은 1민족 1국가 2제도 2정부의 연방제를 내세웠다.
  • 1997년 남북 기본 합의서: '남북 사이의 화해와 불가침 및 교류·협력에 관한 합의서'는 1991년 노태우 정부 때 채택되었다.
  • 6·15 남북 공동 선언의 유엔 감시 통일: 6·15 공동 선언은 통일 문제의 자주적 해결과 남측 연합제안·북측 낮은 단계 연방제안의 공통성을 인정한 것이다.
문제 11
6세기경 신라가 한강 하류지역을 확보함으로써 초래된 결과로 옳지 않은 것은?
1신라는 남양만 부근에 당항성을 쌓고 중국과 직접 교류할 수 있었다.
2신라는 황해를 통해 중국과 연결함으로써 외교적인 공세를 취할 수 있게 되었다.
3나. 제 동맹의 결렬되고, 백제가 고구려와 연합하여 신라에 압박을 가하기 시작했다.
4고구려는 북진해 오는 신라를 막기 위하여 남하 정책을 추진하였다.
정답 및 해설

신라의 한강 하류 확보 결과로 옳지 않은 것은 고구려가 북진해 오는 신라를 막기 위해 남하 정책을 추진하였다는 내용이다.

고구려의 남하 정책은 5세기 장수왕 때 본격화한 것으로, 신라의 한강 하류 확보(진흥왕, 6세기)보다 앞선다. 오히려 신라가 한강 유역을 차지하면서 고구려는 이 지역을 잃었다.

  • 당항성 축조: 신라는 남양만의 당항성을 통해 중국과 직접 교류하였다.
  • 외교적 공세: 황해를 통해 중국과 연결되어 삼국 경쟁에서 유리한 위치를 차지하였다.
문제 12
다음 자료에서 언급하는 조선 중기의 정치 세력에 대한 설명으로 옳은 것을 <보기>에서 모두 고르면?

- 현량과를 실시하여 인물 중심으로 관리를 등용하였다.
- 불교나 도교와 관련된 종교 행사를 폐지하고 공납제도의 폐단을 시정하고자 하였다.
- 향약을 전국적으로 시행하고 소학 교육을 장려하여 향촌자치와 성리학적인 윤리를 강화하려 하였다.

ㄱ. 3사에서 언론과 문한(文翰)직을 담당하였다.
ㄴ. 도덕과 의리를 바탕으로 한 왕도정치를 추구하였다.
ㄷ. 조선 초기 문물제도의 정비에 기여하였다.
ㄹ. 관학파의 학풍을 계승하고 중앙집권체제를 강조하였다.

1ㄱ,ㄴ
2ㄴ,ㄷ
3ㄴ,ㄹ
4ㄷ,ㄹ
정답 및 해설

제시된 정치 세력은 사림(조광조 일파)이며, 옳은 설명은 ㄱ, ㄴ이다.

'현량과', '향약을 전국적으로 시행', '소학 교육' 장려는 중종 때 조광조의 개혁이다. 사림은 주로 3사의 언관직을 맡아 훈구 세력을 비판하였고, 도덕과 의리에 바탕을 둔 왕도 정치를 내세웠다.

  • 조선 초기 문물제도 정비: 훈구파(관학파)의 공로이다.
  • 관학파 학풍 계승과 중앙집권 강조: 훈구파의 성격이며, 사림은 향촌 자치를 중시하였다.
문제 13
다음 자료를 통해서 조선의 중앙 권력 구조를 바르게 추론한 것을 <보기>에서 모두 고르면?

6조는 각기 모든 직무를 먼저 의정부에 품의하고, 의정부는 가부를 헤아린 뒤에 왕에게 아뢰어 (왕의) 전지를 받아 6조에 내려 보내어 시행한다. 다만, 이조, 병조의 제수, 병조의 군사업무, 형조의 사형수를 제외한 판결 등은 종래와 같이 각조에서 직접 아뢰어 시행하고 곧바로 의정부에 보고한다. 만약 타당하지 않으면 의정부가 맡아 심의 논박하고 다시 아뢰어 시행토록 한다.
<세종실록>

ㄱ. 세종은 왕권을 강화하기 위해 6조 직계제를 부활하였다.
ㄴ. 인사와 군사에 관한 일을 왕이 직접 처리하고자 하였다.
ㄷ. 의정부에서 정책을 심의하는 의정부 서사제를 실시하였다.
ㄹ. 의정부 기능의 강화로 6조 중심의 행정 체제가 유명무실 해졌다.

1ㄱ,ㄴ
2ㄴ,ㄷ
3ㄴ,ㄹ
4ㄷ,ㄹ
정답 및 해설

자료는 세종 때의 의정부 서사제이며, 옳은 추론은 ㄴ, ㄷ이다.

6조의 일을 '먼저 의정부에 품의'하게 한 것은 의정부 서사제이다. 다만 '이조, 병조의 제수', '병조의 군사업무' 등은 각 조가 '직접 아뢰어 시행'하게 하여 인사·군사권은 왕이 직접 장악하였다.

  • 6조 직계제 부활: 자료는 의정부 서사제 실시를 보여 주며, 6조 직계제를 부활한 왕은 세조이다.
  • 6조 중심 행정 체제의 유명무실화: 6조는 여전히 행정을 집행하였고 일부 업무는 직접 왕에게 아뢰었다.
문제 14
1920년대에 대한 설명으로 가장 옳은 것은?
1이 시기에 일제의 근대교육은 한국 민중에게 보통교육과 고등교육을 강화하는데 역점을 두었다.
2일제는 헌병경찰제도를 실시하여 민족운동을 탄압하였다
3일제는 지방행정기관인 도. 부. 면에 협의회를 설치하여 친일세력을 포섭하였다.
4상해 홍구 공원에서 윤봉길의 의거가 있었다.
정답 및 해설

1920년대에 대한 옳은 설명은 도·부·면에 협의회를 설치하여 친일 세력을 포섭하였다는 것이다.

3·1 운동 이후 일제는 이른바 문화 통치로 전환하여 지방 행정 기관에 자문 기구인 협의회 등을 두고 친일 세력을 키웠다.

  • 보통 교육과 고등 교육 강화: 일제는 식민지 교육에서 초급 실업 교육 중심을 유지하고 고등 교육 기회를 제한하였다.
  • 헌병 경찰 제도: 1910년대 무단 통치의 특징이다.
  • 윤봉길 의거: 1932년의 일이다.
문제 15
1945년 광복이후 우리나라의 정치변화에 대한 설명으로 옳은 것은?
1이승만은 장기 집권을 위하여 대통령 간선제의 발췌 개헌안은 국회에서 강압적인 방법으로 통과 시켰다.
2이승만 정권이 붕괴된 후 수립된 과도정부하에서 헌법은 내각책임제와 양원제 국회의 권력구조로 개정되었다.
3유신체제의 성립으로 우리나라는 의회주의와 삼권분립을 존중하는 민주적 헌정체제를 구축하게 되었다.
410. 26 사태(1979) 직후 민주화를 요구하는 국민들의 요구로 대통령을 직접 선거로 선출하는 헌법이 마련되었다.
정답 및 해설

광복 이후 정치 변화에 대한 옳은 설명은 이승만 정권 붕괴 후 허정 과도 정부 아래에서 헌법이 내각 책임제와 양원제로 개정되었다는 것이다.

4·19 혁명(1960)으로 이승만 정권이 무너진 뒤 허정 과도 정부 시기에 내각 책임제·양원제 개헌이 이루어졌고, 이에 따라 장면 내각이 출범하였다.

  • 발췌 개헌: 1952년 발췌 개헌은 대통령 직선제 개헌이었다.
  • 유신 체제: 대통령에게 권력을 집중시켜 의회주의와 삼권 분립을 무력화하였다.
  • 10·26 사태 직후 직선제: 10·26 이후에도 간선제가 유지되었고, 직선제 개헌은 1987년 6월 민주 항쟁의 결과이다.
문제 16
삼국사기 와 삼국유사에 대한 설명으로 가장 옳은 것은?
<삼국사기><삼국유사>
①불교사상사 관계 자료는 물론 많은 민간전승과 신화, 설화 수집논찬을 따로 두어 주관적 서술을 제한, 구별하고 삼국을 '우리'로 서술하는 등의 객관적이고 합리적인 입장표명
②기전체로서 본기·열전·지·연표로써 다양한 역사 체험 포괄고승전 체제를 바탕으로 기이편을 앞부분에 넣고 효선편을 마지막에 붙여서 유사체로 편집
③중국 측 사료를 더 신뢰한 결과, 민족 시조를 제시했으면서도 체계화에 대한 노력 미흡고조선 등의 존재를 알면서도 이를 삭제하고 삼국시대만의 단대사 편찬
④기층민의 생활상에서 드러나는 반 귀족적 사회의식도 일정한 정도 반영부족 설화, 불교 설화같이 전통적 생활 체험이 담긴 기층 공동체의 체험을 유교적 사관에 맞게 고치거나 탈락시킴
1①
2②
3③
4④
정답 및 해설

옳은 짝은 『삼국사기』는 기전체로 본기·열전·지·연표를 갖추고, 『삼국유사』는 기이편·효선편 등을 둔 유사체라는 행이다.

김부식의 『삼국사기』는 현존 최고(最古)의 기전체 정사이고, 일연의 『삼국유사』는 고승전 체제를 바탕으로 불교사와 민간 설화를 수록하였다. 나머지 행은 두 책의 특징이 서로 뒤바뀌어 있다.

  • 민간전승·설화 수집 / 논찬을 둔 합리적 입장: 앞은 『삼국유사』, 뒤는 『삼국사기』의 특징이다.
  • 고조선을 삭제한 삼국시대 단대사: 『삼국사기』의 특징이며, 『삼국유사』는 고조선(단군)을 수록하였다.
  • 설화를 유교적 사관에 맞게 고치거나 탈락: 『삼국사기』의 특징이며, 기층민의 의식을 반영한 쪽은 『삼국유사』이다.
문제 17
조선후기의 붕당정치에 대한 설명으로 옳은 것은?
1예종대 예송논쟁은 동인과 서인의 정권다툼이었다.
2인조반정으로 인해 북인이 정권을 장악하였다.
3기사환국으로 인해 서인은 노론과 소론으로 분열되었다.
4장희빈의 소생을 세자로 책봉하는 과정에서 남인이 집권하였다.
정답 및 해설

조선 후기 붕당 정치에 대한 옳은 설명은 장희빈 소생을 세자로 책봉하는 과정에서 남인이 집권하였다는 것이다.

숙종 때 장희빈 소생(뒤의 경종)의 세자 책봉에 반대한 서인이 몰락하고 남인이 집권한 사건이 기사환국이다.

  • 예송 논쟁: 현종 때 서인과 남인 사이에 벌어졌다.
  • 인조반정: 서인이 광해군과 북인 정권을 몰아내고 집권하였다.
  • 노론·소론 분열: 경신환국 이후 남인 처벌 문제를 둘러싸고 서인이 노론과 소론으로 나뉘었다.
문제 18
다음은 개항 이후 일부 정치 세력이 주장한 내용의 일부이다. 이와 직접적인 관련이 있는 사건에 대한 설명으로 옳은 것은?

- 대원군을 가까운 시일 안으로 나라에 돌아오도록 할 것
- 각 도의 환상(還上) 제도를 영원히 없앨 것
- 재정은 모두 호조에 관할케 할 것

1이 사건의 주역들은 사회적으로 문벌을 폐지하고, 인민 평등권을 확립하고자 하였다.
2구식 군인들이 정부의 차별대우에 불만을 품고 개혁을 요구한 것이 발단이 되었다.
3서울 상인과 빈민들은 이 사건을 일으킨 정치세력에게 적극적인 지지를 보냈다
4이 사건 이후 일본의 강요로 조선과 청 사이에 텐진 조약이 맺어졌다.
정답 및 해설

제시된 주장은 갑신정변(1884) 때의 14개조 정강이며, 그 주역들은 문벌을 폐지하고 인민 평등권을 확립하고자 하였다.

'대원군을' 돌아오도록 할 것, '환상' 제도 폐지, '재정은 모두 호조에' 관할하게 할 것은 김옥균 등 급진 개화파가 발표한 정강의 내용이다.

  • 구식 군인의 차별 대우 불만: 1882년 임오군란의 발단이다.
  • 서울 상인과 빈민의 적극 지지: 갑신정변은 민중의 지지를 얻지 못한 것이 실패 원인의 하나였다.
  • 조선과 청의 톈진 조약: 갑신정변 뒤 톈진 조약은 청과 일본 사이에 맺어졌다.
문제 19
다음은 일제 시대 우리 민족의 역사를 재조명하려는 사학자들의 글이다. <보기>의 글과 사학자를 옳게 연결한 것은 고르면? (순서대로 ㄱ, ㄴ, ㄷ, ㄹ)

ㄱ. 대개 국교(國敎)· 국학 국어·국문·국사는 혼(魂)에 속하는 것이요, 전곡·군대·성지(城池) ·함선 · 기계 등은 백(魄)에 속하는 것이므로 혼의 됨됨은 백에 따라 죽고 사는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국교와 국사가 망하지 않으면 그 나라도 망하지 않는 것이다.
ㄴ. 누구나 어릿어릿하는 사람을 보면 '얼' 빠졌다고 하고, '멍'하니 앉은 사람을 보면 '얼'하나 없다고 한다. '얼'이란 이같이 쉬운 것이다. 그런데 '얼'하나의 있고 없음으로써 그 광대·웅맹함이 혹 저렇기도 하고 그 잔루(孱陋) 구차함이 이렇기도 하니, '얼'에 대하여 명찰통조(明察通眺)함은 실로 거론하기 어렵다 할 수도 있다.
ㄷ. 나는 신민족주의 입지에서 이 글을 썼다. 왕장 1인만이 국가의 주권은 전유하였던 귀족정치기에 있어서도 민족 사상이 없었던 것은 아니요, 자본주의 사회에서도 또한 민족주의란 것이 있다. 그러나 그러한 민족사상은 모두 진정한 의의의 민족주의는 아니었다.
ㄹ. 역사란 무엇인가. 인류사회의 아(我)와 비아(非我)의 투쟁이 시간부터 발전하며 공간부터 확대하는 정신적 활동 상태의 기록이니, 세계사라하면 세계 인류의 그리되어 온 상태의 기록이며, 조선역사라 하면 조선 민족이 그리되어 온 상태의 기록인 것이다.

1신채호, 정인보, 안재홍, 박은식
2신채호, 박은식, 문일평, 손진태
3박은식, 정인보, 손진태, 신채호
4박은식, 손진태, 백남운, 신채호
정답 및 해설

글과 사학자를 옳게 연결하면 박은식, 정인보, 손진태, 신채호 순이다.

'혼(魂)'과 '백(魄)'으로 국혼을 강조한 것은 박은식, '얼'을 강조한 것은 정인보이다. '신민족주의' 입지를 밝힌 것은 손진태, 역사를 '아(我)와 비아(非我)의 투쟁'으로 정의한 것은 신채호의 『조선상고사』이다.

  • 문일평: '조선심'을 강조한 민족주의 사학자이다.
  • 안재홍: 정인보와 함께 조선학 운동을 펼쳤으나 제시된 글의 단서와 맞지 않는다.
  • 백남운: 유물 사관에 입각한 사회 경제 사학자이다.
문제 20
다음에서 설명하는 내용과 가장 부합하는 역사책은?

단군, 기자, 삼한, 후조선(위만)을 본기로 하고 세가, 열전, 연표, 지를 두어 사대적 명분을 뒤집는 본격적인 기전체 형식을 취하였다. 그러나 체계적인 정리는 아니고 고조선사를 중심으로 삼국시대를 연결시키는 국사의 맥을 추적하는 입장의 서술이다. 고대사체계에는 정통론이 도입되어 있어서, 단군-기자-마한-고구려의 삼한정통론적 입장을 취했으면서도 단군-부여-고구려의 연결성도 존중하여서, 고구려는 단군의 혈통, 세력과 기자의 문화를 동시에 계승하였음을 주장하였다.

1이종휘 「동사」
2일연의 「삼국유사」
3이이의 「기자실기」
4유득공의 「발해고」
정답 및 해설

제시된 설명과 부합하는 역사책은 이종휘의 『동사』이다.

'단군, 기자, 삼한, 후조선'을 본기로 둔 기전체 서술과 고구려가 '단군의 혈통'과 '기자의 문화'를 함께 계승하였다는 주장은 『동사』의 특징이다. 이종휘는 고대사 인식의 폭을 만주까지 넓혔다.

  • 일연의 『삼국유사』: 불교사 중심의 유사체 역사서로 기전체가 아니다.
  • 이이의 『기자실기』: 기자를 중심으로 존화 의식을 드러낸 16세기 사림의 저술이다.
  • 유득공의 『발해고』: 발해를 우리 역사로 다루어 남북국 시대론을 제시한 책이다.
9급 국가직 한국사 기출문제모두CBT · moducbt.com
05년 1회차
총 20문항 · 객관식 · 정답·해설 포함
문제 1
식량채집 생활에서부터 시작된 인류역사는 식량을 생산하는 농경을 알게 되면서 크게 변화 하는데 이를 ‘신석기혁명’이라 한다. 이 시기와 가장 관련 깊은 사항은?
1청동기를 처음 사용하였다.
2계급이 형성되었다.
3문자를 사용하였다
4간석기와 토기를 처음 사용하였다
정답 및 해설

신석기 혁명 시기와 가장 관련 깊은 것은 간석기와 토기를 처음 사용하였다는 것이다.

신석기 시대에는 농경과 목축이 시작되었고, 돌을 갈아 만든 간석기와 곡식을 저장·조리하는 토기(빗살무늬 토기 등)를 사용하였다.

  • 청동기 사용: 청동기 시대의 특징이다.
  • 계급 형성: 잉여 생산물과 사유 재산이 늘어난 청동기 시대에 뚜렷해졌다.
  • 문자 사용: 신석기 시대의 특징이 아니다.
문제 2
다음 설명에 해당하는 세력이 집권하고 있을 때의 상황을 옳게 설명한 것은?

- 고려 후기의 집권세력으로서 고관 요직을 장악하고 거대한 농장을 소유하였다.
- 주로 음서에 힘입어 관인으로서의 신분을 세습시켜 나갔다.
- 주로 원의 세력을 배경으로 하여 등장한 경우가 많았다.
- 도평의사사를 독점하여 정권을 장악하였다.

1토지겸병이 성행하여 국가 재정과 민생에 끼치는 폐해가 심했다
2천민 계층의 신분방해운동이 광범위하게 전개되었다
3관료체제가 정비되어 모범적인 유교정치가 실시되었다
4북진 정책의 이념아래 이민족과의 투쟁을 통하여 영토를 크게 확장 시켰다.
정답 및 해설

제시된 세력은 권문세족이며, 이들이 집권할 때 토지 겸병이 성행하여 국가 재정과 민생에 끼치는 폐해가 심했다.

'원의 세력을 배경', '도평의사사를 독점', '거대한 농장'은 원 간섭기 권문세족의 특징이다. 이들의 농장 확대로 국가의 조세 수입이 줄고 많은 농민이 노비로 전락하였다.

  • 천민의 신분 해방 운동: 망이·망소이의 난, 만적의 난 등은 무신 집권기의 일이다.
  • 모범적인 유교 정치: 성종 때 관료 체제를 정비한 고려 전기의 모습이다.
  • 북진 정책과 영토 확장: 원 간섭기에는 오히려 영토 일부를 원에 빼앗겼다.
문제 3
조선 전기의 정책에 대한 설명으로 옳은 것은?
1행정의 편리를 위해 수령은 주로 자기 출신지에 임명되었다
2중앙군은 5위체제, 지방군은 진관체제로 정비되었다.
3유향소에 향리를 두어 수령을 보좌하도록 하였다.
4우수한 관리 양성을 위해 향교에는 양반자제만이 입학하게 되었다.
정답 및 해설

조선 전기 정책에 대한 옳은 설명은 중앙군은 5위, 지방군은 진관 체제로 정비되었다는 것이다.

조선 전기 중앙군은 5위로 편성되었고, 지방은 세조 때 각 도에 거진을 두고 주변 고을을 묶는 진관 체제로 방어하였다.

  • 수령의 출신지 임명: 상피제에 따라 수령은 자기 출신지에 임명되지 않았다.
  • 유향소의 향리: 유향소는 지방 양반(재지 사족)으로 구성되어 수령을 보좌하고 향리를 규찰하였다.
  • 향교의 양반 자제 한정: 향교에는 원칙적으로 양인 이상이면 입학할 수 있었다.
문제 4
가야 연맹에 대한 설명으로 옳지 않은 것은?
1철의 생산과 중계 무역으로 발전하였다.
25세기경 고구려, 신라의 압력으로 큰 타격을 입었다.
3처음에는 대가야, 후에는 금관가야가 맹주국이 되었다.
4중앙집권 국가로서의 정치적 발전을 이룩하지는 못하였다
정답 및 해설

가야 연맹에 대한 설명으로 옳지 않은 것은 처음에는 대가야, 후에는 금관가야가 맹주국이 되었다는 내용이다.

순서가 반대이다. 전기 가야 연맹은 김해의 금관가야가 주도하였고, 5세기 이후 후기 가야 연맹은 고령의 대가야가 주도하였다.

  • 철 생산과 중계 무역: 가야는 풍부한 철을 바탕으로 낙랑·왜를 잇는 중계 무역으로 발전하였다.
  • 5세기경의 타격: 광개토대왕의 고구려군이 신라를 도와 왜를 쫓으면서 금관가야 중심의 전기 가야 연맹이 큰 타격을 입었다.
  • 중앙집권 국가 미달성: 가야는 연맹 왕국 단계에서 신라에 병합되었다.
문제 5
일제하 민족문화의 수호를 위해서 활동한 단체가 아닌 것은?
1진단학회
2조선어학회
3조선어연구회
4조선사편수회
정답 및 해설

일제 강점기 민족 문화 수호 단체가 아닌 것은 조선사편수회이다.

조선사편수회는 조선 총독부가 설치한 기구로, 『조선사』를 편찬하며 식민 사관을 퍼뜨렸다.

  • 진단학회: 이병도·손진태 등이 실증 사학 연구를 위해 조직하였다.
  • 조선어연구회: 한글 연구와 보급을 위해 조직되어 가갸날을 제정하였다.
  • 조선어학회: 조선어연구회를 개편한 단체로 한글 맞춤법 통일안을 제정하였다.
문제 6
다음은 통일 신라의 민정문서에 대한 설명이다. 옳지 않은 것은?

서원경 부근의 4개 촌락의 남녀별, 연령별의 정확한 인구수와 노비의 수, 논과 밭의 면적, 소, 말, 뽕나무, 호두나무, 잣나무 등의 수를 3년마다 한 번씩 촌주가 통계를 낸 사실이 기록되어 있다.

1국가의 부역과 조세의 기준마련을 위해 중앙에서 촌주를 파견하였다.
2국가는 생산자원을 철저하게 편제하고 관리하였다.
3남녀별, 연령별 인구의 수를 기록한 것은 여성도 노동력 자원으로 파악한 것이다.
43년에 1번씩 촌주가 통계를 내었으나 수취(收取)는 매년 이루러 졌다.
정답 및 해설

민정문서 설명으로 옳지 않은 것은 중앙에서 촌주를 파견하였다는 내용이다.

'촌주'는 중앙에서 파견한 관리가 아니라 그 지역의 토착 유력자로, 몇 개 촌락을 관할하며 '3년마다' 호구·토지·가축 등의 변동을 조사하였다.

  • 생산 자원의 철저한 편제: 인구·토지·가축·나무 수까지 기록하여 국가가 자원을 관리하였다.
  • 남녀별·연령별 인구 기록: 여성도 노동력 자원으로 파악하였음을 보여 준다.
  • 3년 단위 통계와 매년 수취: 문서는 3년마다 작성하였으나 조세·공물·역은 해마다 거두었다.
문제 7
다음은 고려시대에 일어난 역사적 사건들을 시대순으로 나열한 것이다. (가) 시기에 발생한 역사적 사실로 옳은 것을 <보기>에서 모두 고르면?

이자겸의 난 -> (가) -> 무신정변 -> 몽고침입 -> 위화도 회군

ㄱ. 노비안검법과 과거제도가 시행되었다.
ㄴ. 풍수지리설을 내세워 서경천도 운동이 일어났다.
ㄷ. 최고 집정부로 교정도감이 설치되었다.
ㄹ. 황제를 칭할 것과 금국정벌론이 제기되었다.
ㅁ. 고구려 계승 이념에 대한 이견과 갈등이 일어났다.

1ㄱ,ㄴ,ㄹ
2ㄴ,ㄹ,ㅁ
3ㄱ,ㄴ,ㅁ
4ㄴ,ㄷ,ㄹ
정답 및 해설

(가) 시기에 해당하는 것은 ㄴ, ㄹ, ㅁ으로, 모두 묘청의 서경 천도 운동(1135)과 관련된다.

'이자겸의 난'(1126) 뒤 묘청 등 서경파는 풍수지리설을 내세워 서경 천도, 칭제 건원, 금국 정벌을 주장하였다. 고구려 계승 의식을 강조한 서경파와 신라 계승 의식의 김부식 등 개경파가 대립하였다.

  • 노비안검법과 과거제: 고려 초 광종 때 시행되어 (가) 시기보다 앞선다.
  • 교정도감 설치: 최충헌이 설치한 것으로 무신정변 이후의 일이다.
문제 8
다음은 조선 시대 어떤 학파의 계보이다. 이 학파에 대한 설명으로 옳은 것은?
1지행합일의 실천성을 중시하는 사상체계를 추구하였다
218세기 정국을 주도하면서 주로 영남지방에 서원을 설립하였다
3절의를 중시하여 임진왜란 때에 정인홍, 곽재우 등의 의병장을 배출하였다.
4이황의 학통을 계승하여 노론과 이기론을 둘러싼 논쟁은 전개 하였다.
정답 및 해설

제시된 계보는 정제두에서 시작된 강화학파로, 이들은 지행합일의 실천성을 중시하는 양명학을 추구하였다.

정제두는 강화도에서 양명학을 연구하여 학파를 형성하였고, 그 학문은 이광사·이충익 등 가학을 통해 이어져 한말 이건창 등에까지 계승되었다.

  • 18세기 정국 주도와 영남 서원 설립: 양명학은 이단으로 배척되어 정국을 주도하지 못하였고, 영남 지방 서원은 주로 남인 계열과 관련된다.
  • 임진왜란 의병장 정인홍·곽재우 배출: 조식 문하의 남명학파에 대한 설명이다.
  • 이황 학통 계승과 이기론 논쟁: 이황의 학통은 영남학파(남인)로 이어졌다.
문제 9
다음 글은 동학 농민 운동의 핵심주동자에 대한 공초 내용을 발췌한 것이다. 밑줄친 곳에 들어갈 말로 가장 적절한 것은? (순서대로 ㉠, ㉡, ㉢)

문: 너의 성명은 무엇인가?
답:  ㉠ 이다.
문: 작년 3월  ㉡ 등지에서 백성들을 크게 모았다고 하니 무슨 사연으로 그러하였는가?
답:  ㉡  군수가 정액 외의 가렴(苛斂:가혹하게 징수함)이 수만 냥이므로 민심이 억울하고 원통하여 이 의거가 있었다.
문:  ㉡  에서 기포할 적에 동학이 많았느냐 원통한 사람이 많았느냐?
답:  ㉢ .
문: 다시 난을 일으킨 것은 무슨 이유인가?
답: 일본이 개화라 칭하고 처음부터 민간에게 일언반구의 말도 공포함이 없이 군대를 거느리고 밤중에 왕궁을 공격하여 임금을 놀라게 하였다. 그러므로 초야의 사민(士民)들이 충군 애국하는 마음으로 분개함을 이기지 못하여 의병을 규합하여 일본인과 접전하여 이 사실을 묻고자 함이다.

1김개남, 백산, 원통한 사람이 많았다
2김개남, 고부, 동학이 많았다
3전봉준, 고부, 원통한 사람이 많았다
4전봉준, 고부, 동학이 많았다
정답 및 해설

빈칸에는 차례로 전봉준, 고부, 원통한 사람이 많았다가 들어간다.

'군수가 정액 외의 가렴'이 수만 냥이라는 진술은 고부 군수 조병갑의 수탈에 맞서 일어난 고부 민란을 가리키며, 이를 이끈 인물은 전봉준이다. 전봉준은 공초에서 봉기한 이들이 동학교도보다 원통한 사람이 많았다고 진술하였다.

'다시 난을 일으킨' 이유로 든 일본군의 '왕궁을 공격'은 경복궁 점령을 가리키며, 이에 맞선 것이 동학 농민군의 2차 봉기이다.

문제 10
남북한 통일외교와 관련하여 옳은 것은?
1북한의 고려민주연방공화국 통일방안은 2국가 2체제를 목표로 하고 있다.
21972년 7. 4남북공동성명에서 남과 북은 자주적, 평화적, 민족대단결의 통일원칙에 합의 했다.
31997년 남과 북은 ‘남북사이의 화해와 불가침및 교류·협력에 관한 합의서’를 체결하였다.
42000년 6. 15 남북공동선언에서 남북은 유엔 감시하의 통일 방안에 합의 하였다
정답 및 해설

7·4 남북 공동 성명에서 자주·평화·민족 대단결의 통일 원칙에 합의하였다는 설명이 옳다.

1972년 7·4 남북 공동 성명은 분단 이후 처음으로 남북이 통일 원칙에 합의한 문서이다.

  • 고려 민주 연방 공화국 방안: 북한의 이 방안은 1민족 1국가 2제도 2정부의 연방제를 내세웠다.
  • 1997년 남북 기본 합의서: '남북 사이의 화해와 불가침 및 교류·협력에 관한 합의서'는 1991년 노태우 정부 때 채택되었다.
  • 6·15 남북 공동 선언의 유엔 감시 통일: 6·15 공동 선언은 통일 문제의 자주적 해결과 남측 연합제안·북측 낮은 단계 연방제안의 공통성을 인정한 것이다.
문제 11
6세기경 신라가 한강 하류지역을 확보함으로써 초래된 결과로 옳지 않은 것은?
1신라는 남양만 부근에 당항성을 쌓고 중국과 직접 교류할 수 있었다.
2신라는 황해를 통해 중국과 연결함으로써 외교적인 공세를 취할 수 있게 되었다.
3나. 제 동맹의 결렬되고, 백제가 고구려와 연합하여 신라에 압박을 가하기 시작했다.
4고구려는 북진해 오는 신라를 막기 위하여 남하 정책을 추진하였다.
정답 및 해설

신라의 한강 하류 확보 결과로 옳지 않은 것은 고구려가 북진해 오는 신라를 막기 위해 남하 정책을 추진하였다는 내용이다.

고구려의 남하 정책은 5세기 장수왕 때 본격화한 것으로, 신라의 한강 하류 확보(진흥왕, 6세기)보다 앞선다. 오히려 신라가 한강 유역을 차지하면서 고구려는 이 지역을 잃었다.

  • 당항성 축조: 신라는 남양만의 당항성을 통해 중국과 직접 교류하였다.
  • 외교적 공세: 황해를 통해 중국과 연결되어 삼국 경쟁에서 유리한 위치를 차지하였다.
문제 12
다음 자료에서 언급하는 조선 중기의 정치 세력에 대한 설명으로 옳은 것을 <보기>에서 모두 고르면?

- 현량과를 실시하여 인물 중심으로 관리를 등용하였다.
- 불교나 도교와 관련된 종교 행사를 폐지하고 공납제도의 폐단을 시정하고자 하였다.
- 향약을 전국적으로 시행하고 소학 교육을 장려하여 향촌자치와 성리학적인 윤리를 강화하려 하였다.

ㄱ. 3사에서 언론과 문한(文翰)직을 담당하였다.
ㄴ. 도덕과 의리를 바탕으로 한 왕도정치를 추구하였다.
ㄷ. 조선 초기 문물제도의 정비에 기여하였다.
ㄹ. 관학파의 학풍을 계승하고 중앙집권체제를 강조하였다.

1ㄱ,ㄴ
2ㄴ,ㄷ
3ㄴ,ㄹ
4ㄷ,ㄹ
정답 및 해설

제시된 정치 세력은 사림(조광조 일파)이며, 옳은 설명은 ㄱ, ㄴ이다.

'현량과', '향약을 전국적으로 시행', '소학 교육' 장려는 중종 때 조광조의 개혁이다. 사림은 주로 3사의 언관직을 맡아 훈구 세력을 비판하였고, 도덕과 의리에 바탕을 둔 왕도 정치를 내세웠다.

  • 조선 초기 문물제도 정비: 훈구파(관학파)의 공로이다.
  • 관학파 학풍 계승과 중앙집권 강조: 훈구파의 성격이며, 사림은 향촌 자치를 중시하였다.
문제 13
다음 자료를 통해서 조선의 중앙 권력 구조를 바르게 추론한 것을 <보기>에서 모두 고르면?

6조는 각기 모든 직무를 먼저 의정부에 품의하고, 의정부는 가부를 헤아린 뒤에 왕에게 아뢰어 (왕의) 전지를 받아 6조에 내려 보내어 시행한다. 다만, 이조, 병조의 제수, 병조의 군사업무, 형조의 사형수를 제외한 판결 등은 종래와 같이 각조에서 직접 아뢰어 시행하고 곧바로 의정부에 보고한다. 만약 타당하지 않으면 의정부가 맡아 심의 논박하고 다시 아뢰어 시행토록 한다.
<세종실록>

ㄱ. 세종은 왕권을 강화하기 위해 6조 직계제를 부활하였다.
ㄴ. 인사와 군사에 관한 일을 왕이 직접 처리하고자 하였다.
ㄷ. 의정부에서 정책을 심의하는 의정부 서사제를 실시하였다.
ㄹ. 의정부 기능의 강화로 6조 중심의 행정 체제가 유명무실 해졌다.

1ㄱ,ㄴ
2ㄴ,ㄷ
3ㄴ,ㄹ
4ㄷ,ㄹ
정답 및 해설

자료는 세종 때의 의정부 서사제이며, 옳은 추론은 ㄴ, ㄷ이다.

6조의 일을 '먼저 의정부에 품의'하게 한 것은 의정부 서사제이다. 다만 '이조, 병조의 제수', '병조의 군사업무' 등은 각 조가 '직접 아뢰어 시행'하게 하여 인사·군사권은 왕이 직접 장악하였다.

  • 6조 직계제 부활: 자료는 의정부 서사제 실시를 보여 주며, 6조 직계제를 부활한 왕은 세조이다.
  • 6조 중심 행정 체제의 유명무실화: 6조는 여전히 행정을 집행하였고 일부 업무는 직접 왕에게 아뢰었다.
문제 14
1920년대에 대한 설명으로 가장 옳은 것은?
1이 시기에 일제의 근대교육은 한국 민중에게 보통교육과 고등교육을 강화하는데 역점을 두었다.
2일제는 헌병경찰제도를 실시하여 민족운동을 탄압하였다
3일제는 지방행정기관인 도. 부. 면에 협의회를 설치하여 친일세력을 포섭하였다.
4상해 홍구 공원에서 윤봉길의 의거가 있었다.
정답 및 해설

1920년대에 대한 옳은 설명은 도·부·면에 협의회를 설치하여 친일 세력을 포섭하였다는 것이다.

3·1 운동 이후 일제는 이른바 문화 통치로 전환하여 지방 행정 기관에 자문 기구인 협의회 등을 두고 친일 세력을 키웠다.

  • 보통 교육과 고등 교육 강화: 일제는 식민지 교육에서 초급 실업 교육 중심을 유지하고 고등 교육 기회를 제한하였다.
  • 헌병 경찰 제도: 1910년대 무단 통치의 특징이다.
  • 윤봉길 의거: 1932년의 일이다.
문제 15
1945년 광복이후 우리나라의 정치변화에 대한 설명으로 옳은 것은?
1이승만은 장기 집권을 위하여 대통령 간선제의 발췌 개헌안은 국회에서 강압적인 방법으로 통과 시켰다.
2이승만 정권이 붕괴된 후 수립된 과도정부하에서 헌법은 내각책임제와 양원제 국회의 권력구조로 개정되었다.
3유신체제의 성립으로 우리나라는 의회주의와 삼권분립을 존중하는 민주적 헌정체제를 구축하게 되었다.
410. 26 사태(1979) 직후 민주화를 요구하는 국민들의 요구로 대통령을 직접 선거로 선출하는 헌법이 마련되었다.
정답 및 해설

광복 이후 정치 변화에 대한 옳은 설명은 이승만 정권 붕괴 후 허정 과도 정부 아래에서 헌법이 내각 책임제와 양원제로 개정되었다는 것이다.

4·19 혁명(1960)으로 이승만 정권이 무너진 뒤 허정 과도 정부 시기에 내각 책임제·양원제 개헌이 이루어졌고, 이에 따라 장면 내각이 출범하였다.

  • 발췌 개헌: 1952년 발췌 개헌은 대통령 직선제 개헌이었다.
  • 유신 체제: 대통령에게 권력을 집중시켜 의회주의와 삼권 분립을 무력화하였다.
  • 10·26 사태 직후 직선제: 10·26 이후에도 간선제가 유지되었고, 직선제 개헌은 1987년 6월 민주 항쟁의 결과이다.
문제 16
삼국사기 와 삼국유사에 대한 설명으로 가장 옳은 것은?
<삼국사기><삼국유사>
①불교사상사 관계 자료는 물론 많은 민간전승과 신화, 설화 수집논찬을 따로 두어 주관적 서술을 제한, 구별하고 삼국을 '우리'로 서술하는 등의 객관적이고 합리적인 입장표명
②기전체로서 본기·열전·지·연표로써 다양한 역사 체험 포괄고승전 체제를 바탕으로 기이편을 앞부분에 넣고 효선편을 마지막에 붙여서 유사체로 편집
③중국 측 사료를 더 신뢰한 결과, 민족 시조를 제시했으면서도 체계화에 대한 노력 미흡고조선 등의 존재를 알면서도 이를 삭제하고 삼국시대만의 단대사 편찬
④기층민의 생활상에서 드러나는 반 귀족적 사회의식도 일정한 정도 반영부족 설화, 불교 설화같이 전통적 생활 체험이 담긴 기층 공동체의 체험을 유교적 사관에 맞게 고치거나 탈락시킴
1①
2②
3③
4④
정답 및 해설

옳은 짝은 『삼국사기』는 기전체로 본기·열전·지·연표를 갖추고, 『삼국유사』는 기이편·효선편 등을 둔 유사체라는 행이다.

김부식의 『삼국사기』는 현존 최고(最古)의 기전체 정사이고, 일연의 『삼국유사』는 고승전 체제를 바탕으로 불교사와 민간 설화를 수록하였다. 나머지 행은 두 책의 특징이 서로 뒤바뀌어 있다.

  • 민간전승·설화 수집 / 논찬을 둔 합리적 입장: 앞은 『삼국유사』, 뒤는 『삼국사기』의 특징이다.
  • 고조선을 삭제한 삼국시대 단대사: 『삼국사기』의 특징이며, 『삼국유사』는 고조선(단군)을 수록하였다.
  • 설화를 유교적 사관에 맞게 고치거나 탈락: 『삼국사기』의 특징이며, 기층민의 의식을 반영한 쪽은 『삼국유사』이다.
문제 17
조선후기의 붕당정치에 대한 설명으로 옳은 것은?
1예종대 예송논쟁은 동인과 서인의 정권다툼이었다.
2인조반정으로 인해 북인이 정권을 장악하였다.
3기사환국으로 인해 서인은 노론과 소론으로 분열되었다.
4장희빈의 소생을 세자로 책봉하는 과정에서 남인이 집권하였다.
정답 및 해설

조선 후기 붕당 정치에 대한 옳은 설명은 장희빈 소생을 세자로 책봉하는 과정에서 남인이 집권하였다는 것이다.

숙종 때 장희빈 소생(뒤의 경종)의 세자 책봉에 반대한 서인이 몰락하고 남인이 집권한 사건이 기사환국이다.

  • 예송 논쟁: 현종 때 서인과 남인 사이에 벌어졌다.
  • 인조반정: 서인이 광해군과 북인 정권을 몰아내고 집권하였다.
  • 노론·소론 분열: 경신환국 이후 남인 처벌 문제를 둘러싸고 서인이 노론과 소론으로 나뉘었다.
문제 18
다음은 개항 이후 일부 정치 세력이 주장한 내용의 일부이다. 이와 직접적인 관련이 있는 사건에 대한 설명으로 옳은 것은?

- 대원군을 가까운 시일 안으로 나라에 돌아오도록 할 것
- 각 도의 환상(還上) 제도를 영원히 없앨 것
- 재정은 모두 호조에 관할케 할 것

1이 사건의 주역들은 사회적으로 문벌을 폐지하고, 인민 평등권을 확립하고자 하였다.
2구식 군인들이 정부의 차별대우에 불만을 품고 개혁을 요구한 것이 발단이 되었다.
3서울 상인과 빈민들은 이 사건을 일으킨 정치세력에게 적극적인 지지를 보냈다
4이 사건 이후 일본의 강요로 조선과 청 사이에 텐진 조약이 맺어졌다.
정답 및 해설

제시된 주장은 갑신정변(1884) 때의 14개조 정강이며, 그 주역들은 문벌을 폐지하고 인민 평등권을 확립하고자 하였다.

'대원군을' 돌아오도록 할 것, '환상' 제도 폐지, '재정은 모두 호조에' 관할하게 할 것은 김옥균 등 급진 개화파가 발표한 정강의 내용이다.

  • 구식 군인의 차별 대우 불만: 1882년 임오군란의 발단이다.
  • 서울 상인과 빈민의 적극 지지: 갑신정변은 민중의 지지를 얻지 못한 것이 실패 원인의 하나였다.
  • 조선과 청의 톈진 조약: 갑신정변 뒤 톈진 조약은 청과 일본 사이에 맺어졌다.
문제 19
다음은 일제 시대 우리 민족의 역사를 재조명하려는 사학자들의 글이다. <보기>의 글과 사학자를 옳게 연결한 것은 고르면? (순서대로 ㄱ, ㄴ, ㄷ, ㄹ)

ㄱ. 대개 국교(國敎)· 국학 국어·국문·국사는 혼(魂)에 속하는 것이요, 전곡·군대·성지(城池) ·함선 · 기계 등은 백(魄)에 속하는 것이므로 혼의 됨됨은 백에 따라 죽고 사는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국교와 국사가 망하지 않으면 그 나라도 망하지 않는 것이다.
ㄴ. 누구나 어릿어릿하는 사람을 보면 '얼' 빠졌다고 하고, '멍'하니 앉은 사람을 보면 '얼'하나 없다고 한다. '얼'이란 이같이 쉬운 것이다. 그런데 '얼'하나의 있고 없음으로써 그 광대·웅맹함이 혹 저렇기도 하고 그 잔루(孱陋) 구차함이 이렇기도 하니, '얼'에 대하여 명찰통조(明察通眺)함은 실로 거론하기 어렵다 할 수도 있다.
ㄷ. 나는 신민족주의 입지에서 이 글을 썼다. 왕장 1인만이 국가의 주권은 전유하였던 귀족정치기에 있어서도 민족 사상이 없었던 것은 아니요, 자본주의 사회에서도 또한 민족주의란 것이 있다. 그러나 그러한 민족사상은 모두 진정한 의의의 민족주의는 아니었다.
ㄹ. 역사란 무엇인가. 인류사회의 아(我)와 비아(非我)의 투쟁이 시간부터 발전하며 공간부터 확대하는 정신적 활동 상태의 기록이니, 세계사라하면 세계 인류의 그리되어 온 상태의 기록이며, 조선역사라 하면 조선 민족이 그리되어 온 상태의 기록인 것이다.

1신채호, 정인보, 안재홍, 박은식
2신채호, 박은식, 문일평, 손진태
3박은식, 정인보, 손진태, 신채호
4박은식, 손진태, 백남운, 신채호
정답 및 해설

글과 사학자를 옳게 연결하면 박은식, 정인보, 손진태, 신채호 순이다.

'혼(魂)'과 '백(魄)'으로 국혼을 강조한 것은 박은식, '얼'을 강조한 것은 정인보이다. '신민족주의' 입지를 밝힌 것은 손진태, 역사를 '아(我)와 비아(非我)의 투쟁'으로 정의한 것은 신채호의 『조선상고사』이다.

  • 문일평: '조선심'을 강조한 민족주의 사학자이다.
  • 안재홍: 정인보와 함께 조선학 운동을 펼쳤으나 제시된 글의 단서와 맞지 않는다.
  • 백남운: 유물 사관에 입각한 사회 경제 사학자이다.
문제 20
다음에서 설명하는 내용과 가장 부합하는 역사책은?

단군, 기자, 삼한, 후조선(위만)을 본기로 하고 세가, 열전, 연표, 지를 두어 사대적 명분을 뒤집는 본격적인 기전체 형식을 취하였다. 그러나 체계적인 정리는 아니고 고조선사를 중심으로 삼국시대를 연결시키는 국사의 맥을 추적하는 입장의 서술이다. 고대사체계에는 정통론이 도입되어 있어서, 단군-기자-마한-고구려의 삼한정통론적 입장을 취했으면서도 단군-부여-고구려의 연결성도 존중하여서, 고구려는 단군의 혈통, 세력과 기자의 문화를 동시에 계승하였음을 주장하였다.

1이종휘 「동사」
2일연의 「삼국유사」
3이이의 「기자실기」
4유득공의 「발해고」
정답 및 해설

제시된 설명과 부합하는 역사책은 이종휘의 『동사』이다.

'단군, 기자, 삼한, 후조선'을 본기로 둔 기전체 서술과 고구려가 '단군의 혈통'과 '기자의 문화'를 함께 계승하였다는 주장은 『동사』의 특징이다. 이종휘는 고대사 인식의 폭을 만주까지 넓혔다.

  • 일연의 『삼국유사』: 불교사 중심의 유사체 역사서로 기전체가 아니다.
  • 이이의 『기자실기』: 기자를 중심으로 존화 의식을 드러낸 16세기 사림의 저술이다.
  • 유득공의 『발해고』: 발해를 우리 역사로 다루어 남북국 시대론을 제시한 책이다.